#59
내내 타오르는 불만 들여다보던 애쉬가 고개를 들었다. 나인은 텐트 입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나중에 졸리면 교대하게 좀 깨워줘요.”
통보를 마친 머리가 쏙 들어가더니 텐트 입구가 닫힌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던 나인은 머리를 대기 무섭게 금세 잠이 들었다.
“…….”
불에 장작을 하나 더 넣고 나뭇가지로 뒤적이던 애쉬는, 텐트 안쪽에서 희미하게 쌕쌕 들려오는 숨소리에 피식 웃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더니 역시 지치긴 한 모양이다. 애쉬는 무릎에 턱을 괸 채로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새벽의 숲공기는 습하고 차가웠으며 밤새 우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음산하게 흘러들어 왔다. 장작 타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생각에 잠기기 딱 좋은 시간이다. 애쉬는 몇 시간 전의 대화를 회상했다.
‘돌아갈 때쯤 나인이 알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예 모르는 세상이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단순히 가족이 다시 보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라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아요.’
솔직히 말해, 애쉬는 그 때 일부러 그를 자극할만한 말을 꺼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을 수도 있는데도?’
‘…….’
‘미안하지만 정말 그럴 확률이 더 커요.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냥 여기 적응하는 공간미아들도 더러 있었죠.’
보통 공간미아들은 차원 간 시간의 흐름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정신이 무너져 내리거나 절망한다.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단순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익숙한 인간들의 품이라는 소리였다.
‘그래도요.’
하지만 나인은 현실을 파악했는데도 여전히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곳이라도 좋아요.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도대체 뭐가 나인을 그 세계에 잡아 둔 걸까. 그를 자극해 혼란스럽게 만들면 생각을 바꾸어 먹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나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소중한 것을 그곳에 두고 왔거나, 나인을 이곳에 붙잡아 둘 만큼 매력적인 요소가 지금은 딱히 없는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절망하게 만들어서라도 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 미움받는 것은 싫었다. 이게 무슨 이중적인 감정일까.
나인의 발목을 억지로 묶어 두는 것이 함께 있는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이 그를 따라나서면, 모든 것을 버리는 대신에 나인만큼은 가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문제가 하나 더 생긴다. 그 세계에는 나인을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 아주 많다. 사람도, 학문도, 그리고 세계 그 자체도…. 나인의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그곳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애쉬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들이 널린 그 세상에서 과연 나인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신경 써 줄까? 그에게는 일순위가 되는 것들이 따로 있어, 저만 처참하게 버려져 말라 죽어 가는 것은 아닐까. 그걸 과연 진정으로 소유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인가.
언젠가 누군가 그랬다. 쓸데없는 집착이라고. 제발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 현실을 좀 살라고. 어느 순간부터는 애쉬도 자신이 뭘 하고 있나 싶어 허무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관둘 수는 없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고 관두기에도 너무 멀리 왔다. 그저 습관처럼 끊임없이 찾아 헤맬 뿐이었다.
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애쉬는 오랜 허무감의 근원을 깨달았다. 고작 한 명의 가이드가 텅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고 그의 세계를 다채롭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때와는 뭔가 다르다. 달라졌다. 변화의 이유를 찾던 제게 나인이 알려 줬다.
이건 사랑이라고!
그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조금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다는 충동이,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 맞추고 싶던 것도, 헐렁한 상의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싶다는 생각도. 생전 한 번 느껴 본 적 없는 욕구가 제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가 죽고 그 자리에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사람도 변한다. 그런데 나인에게서 자신이 모르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애쉬는 이유도 모르고 불안해졌다. 그를 바라보는 제 시선부터가 이전과 극명하게 달라졌음에도, 나인만큼은 이전 모습 그대로 있어 주길 바랐던 걸까.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이대로 평생 단둘이 있을 수 있다면 무엇에게도 나인을 빼앗기지 않을 텐데.
애쉬는 나인의 향기가 남은 손수건에 뺨을 대며 눈을 감았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멀리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비명 소리에 나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그는 애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텐트 문부터 잽싸게 열어보았지만 애쉬는 그곳에 없었다.
“……?”
뒤늦게 고개만 돌려 제 옆자리를 내려다보니, 애쉬는 침낭도 펴지 않고 배낭만 베고 누운 채였다.
‘졸리면 날 깨우라니까. 왜 들어와서 자고 있는 거야?’
땅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뭐 하나 덮은 것도, 밑에 깐 것도 없다. 이럴거면 침낭은 뭐하러 챙겨왔는지…. 입이 돌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때 다시, 어디선가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주의 깊게 들어봐도 동물 소리는 아니었다. 우는 소리에 희미하게나마 웅성거리는 다른 사람 목소리들도 섞여 들렸다. 어디서 무슨 일이 난 게 틀림없다.
“애쉬, 일어나 봐요.”
나인은 애쉬를 흔들어 깨웠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애쉬가 졸음기 섞인 목소리로 “왜요.” 하고 묻는다.
“이상한 소리 안 들렸어요?”
“들려요.”
“가봐야하는 거 아니에요?”
“……별일 아닐 텐데 그냥 무시해요….”
애쉬는 잠기운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나인은 이미 잠이 다 깨버렸다. 이대로는 신경이 쓰여서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만약 저 소리가 구조 신호라면. 위험에 처한 사람의 목소리라면 어떻게 하지?
“애쉬…….”
나인이 보채듯 그를 부르자, 애쉬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 잠깐 주변만 보고 오면 안 돼요?”
그럼에도 여전히 감은 눈만은 뜨지 않고 있던 그가 그 말에는 두 눈을 번쩍 뜨며 나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절대 안 돼요. 밤이라 멋대로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
확실히 사방이 캄캄하다. 휴대폰도 두고 왔고, 시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아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도 없었다. 24시간 모니터링 중일 본부석에서는 어떠한 방송도 하지 않았다.
“어두워서라면….”
주위를 밝히면 된다는 거잖아. 간단하게 해결책을 떠올린 나인이 주머니에서 마도구를 꺼내어 작동시켰다. 갑자기 눈을 공격하는 환한 빛에 애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났어요?”
나인의 손에 빛을 내는 구체가 생겨나 있었다. 텐트 안을 온통 환하게 밝히는 광량에 애쉬가 드물게 당황했다.
“무서워서 혼자 못 가겠어요.”
“…….”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
“…….”
못마땅한 얼굴로 나인을 바라보던 애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커다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나인의 손에서 빛 구체를 빼앗아 들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이건 뭐죠?”
“정령석이에요.”
정령석은 정령사가 제작하는 아티펙트의 종류인데, 이 경우에는 빛 스펠이 걸려 있었다.
“작동 원리를 모르겠는데… 이것도 마법인가요?”
“네.”
“그런데 나인, 당신…… 가지고 온 거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
잠시 망설이던 나인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공간확장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그가 그 안에 손을 넣었다 빼자, 홀쭉하던 주머니에 들어 있을 수 없던 부피의 쿠션이 하나 끌려 나왔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애쉬에게 나인은 “제 베개예요.”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꽤나 편하네요. 그 마법이란 거. 원하는 건 다 넣었다 뺄 수 있는 건가요?”
공간 확장 주머니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속에 넣어 둔 도구를 떠올리며 손을 넣으면 보관된 물건이 그대로 빠져나온다. 마법사들이 흔히 말하는 ‘아공간’을 구현한 마도구. 각종 분야에서 무척 유용했기에 아직도 수요가 공급을 못 따라갈 정도로 인기가 많다.
“빨리 가요, 애쉬.”
나인은 미적거리는 애쉬를 직접 일으켰다.
“하아, 오랜만에 잠 좀 제대로 자나 싶었는데….”
애쉬가 묘하게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을 깨운 장본인인 나인은 못 들은 척 그 말을 무시했다.
어두운 숲속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무에 부딪혀 마구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왼쪽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가도 소리의 방향이 자꾸 들쑥날쑥하게 변화했다.
산길은 밤이 되면 배는 험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령석이 길을 밝히고 있음에도 나인은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고, 그럴 때마다 애쉬를 붙잡아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절벽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둔덕 모서리에 다다랐다.
“……헉.”
나인은 숨을 집어삼켰다.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떨어졌을 것이다.
비명 소리가 아까 전보다 선명해졌다. 이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좀 돌아서 가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는 게 좋겠죠?”
비록 길은 모르지만 대충 옆으로 돌아서 내려가다보면 길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애쉬의 생각은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