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어거스트는 고아였다. 열여섯 살의 소년이 나이가 차서 고아원을 나서던 날, 어거스트는 나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연히 공간의 균열을 마주했다. 다만 그는 나인처럼 바로 다른 차원에 떨어진 게 아니라 게이트 속에서 한 달여를 헤매다 겨우 통로의 끝을 찾아 다른 차원에 도달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간미아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곳이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낯선 도시에서 스스로 적응해야 했다.
무일푼으로 길거리를 전전하던 어거스트는 결국 뒷골목에서 소매치기 짓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갔다. 구역이 겹치는 건달들에게 자릿세를 내라며 뭇매를 맞는 날도 있었지만 연고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소년의 인생에 있어 가장 거대했던 불행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고는 불행이 아니라 기회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어느 날 어거스트는 골목길에서 길을 잃은 소녀를 만나 길 안내를 해 주었다. 배꽃같이 환한 낯의 소녀는 단정한 옷차림에서부터 짐작했지만 굉장히 귀한 집의 아가씨였다. 어거스트는 우연한 기회로 그 집의 하인이 되어 얹혀살며 심부름을 하게 되었고, 종내에는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월계수 나무 아래서 입을 맞추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달이 구름에 가려져 사방이 어둠에 잠식되던 날,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손을 꼭 마주 잡고 집에서 도망쳤다.
비록 넘어야 했던 역경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아내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노라고, 어거스트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부부는 슬하에 자녀 하나 두지 않고 서로만을 아껴 주며 스무 해를 함께했으나 마을에 전염병이 유행하며 아내가 갑작스레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손써 볼 틈조차 없었다. 아내의 시신은 그녀의 가문에서 거두어 갔다. 어거스트는 그녀의 장례식에조차 초대받지 못했다.
그는 십 년 가까이 아내와 함께했던 추억이 가득한 집만을 지키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그를 이 세계로 인도했던 균열을 만나고 스스로 그 균열에 뛰어들었다.
어거스트가 애쉬를 처음 만난 것은 그 게이트 속에서였다.
“나인이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해 봤어요?”
“…….”
애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나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생각은 수도 없이 해 봤다. 그의 이야기가 마치 제 이야기처럼 들렸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거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나인은 밤새 뒤척이며 생각에 잠겼다.
노집사는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는 게이트를 사십여 년 만에 겨우 마주했다. 차원 간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같지 않았기에 열여섯의 소년이 예순에 가까운 노인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나인은 이야기의 실체를 눈치챈 후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차원 간의 시간 차….
“…….”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요?”
애쉬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한 나인의 목덜미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돌아갈 때쯤 나인이 알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예 모르는 세상이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단순히 가족이 다시 보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라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아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는 애쉬의 말은 냉정하게까지 들렸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을 수도 있죠.”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죠.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절망만 더 커져요.”
그가 감정 없이 건조하게 말했다. 애쉬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말을 듣기 무섭게 정신이 번쩍 들었을 정도였다.
“……난 집에 가고 싶어요.”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을 수도 있는데도?”
“…….”
“미안하지만 정말 그럴 확률이 더 커요. 어거스트를 봤으면 알잖아요?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냥 여기 적응하는 공간미아들도 더러 있었죠.”
그리고 나인, 그건 포기가 아니라 어찌 보면 지혜로운 거예요. 애쉬는 사뭇 달콤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연달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말이 막연한 위로보다는 훨씬 낫게 들린다면 이상할까? 나인은 어쩌면 미래의 자신이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그가 경고해 주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요.”
“그래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곳이라도 좋아요.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
애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그는 더는 나인을 몰아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물론 나중에 말 바꿔도 상관없으니 얼마든지 변덕스럽게 굴어도 좋아요.”
“제가 말을 왜 바꿔요?”
사람 떠보는 것도 아니고. 나인은 입을 쭉 내민 채 괜히 투덜댔다. 시선을 돌려 애쉬를 힐긋 보려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애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까지 본 나인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항상 고개를 돌려 남자를 돌아볼 때마다 눈이 마주친다. 애쉬는 대부분 나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은, 그는 자신이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제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건데….
‘왜 쳐다보는 거야.’
이런 식으로 시선을 체감할 때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나인은 고개를 숙였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번에는 먼 풍경을 바라봤다. 쏴아아. 바람이 불자 휘날리는 앞머리가 이마를 간질였다. 나인은 눈이 간지러워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나인은 많이 변했네요. 이럴 때 보면.”
“네?”
“단단해졌어요.”
단단? 나인은 저도 모르게 애쉬의 허벅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다행히 애쉬는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봤으면 또 기를 쓰고 놀려 댔을 테니까.
“머리로는 이해가 돼요. 되면서도….”
“…….”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뭔 소리를 하는지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그냥 걱정해 준 건가?’
애쉬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무시무시한 소문과 달리 의외로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더없이 솔직했고, 가끔은 얄밉지만 대체로 다정하며, 나인에게 무척 쉬운 사람처럼 굴었다. 나인은 애쉬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 가지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본질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거스트도 처음부터 애쉬에게 충성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게이트에서 만난 애쉬와 성격 면에서 많이 부딪혔다.
‘제가 게이트 속에서 그분께 많이 귀찮게 굴었을 겁니다. 부끄럽지만 한참 어린 애송이가 건방지게 굴길래 화풀이를 하고 싶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와, 건방졌다고요? 싸가지가….’
‘저희는 나이 생각 않고 게이트 속에서 참 많이 싸웠습니다. 어쩜 이런 늙은이에게 그렇게 예의 없게 굴 수 있었는지….’
어거스트가 혀를 찼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질린다는 듯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저는 저를 숨기지 않고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었습니다. 확 죽어 버릴 거란 말도 서슴없이 했고 실제로도 그러고 싶었죠. 두면 곧 죽을 성가신 늙은이쯤이야 그냥 홧김에 버리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분은 끝까지 저를 책임지셨습니다. 애쉬 님은 아니라고 하실 테지만 이 저택도 어쩌면 저 때문에 사들이신 건지도 모릅니다.’
어거스트는 센터의 적응 프로그램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이방인의 향이 짙었다. 애초부터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였던 그는 이 차원에 애정이 전혀 없었고, 삶에 지쳐 더는 살아가고자 하는 열정도 없었다.
‘집사님 때문에요?’
‘……익숙한 일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세상 밖에 나가는 게 싫다면 처박힐 장소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당시의 애쉬는 센터 부지 근처의 고저택을 통째로 사들여 무일푼인 어거스트에게 가장 익숙한 일을 맡겼다. 심지어 센터에서 애쉬가 밖으로 나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돈의 출처를 깨끗하게 세탁했고 명의는 어거스트 쪽으로 되어 있었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아내를 보낸 이후로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부끄럽게도 할 줄 아는 일이 많이 없어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이 무섭지 않아요. 그가 주름진 눈가를 접어 웃었다.
초면인 노인에게 저택 부지 하나를 통째로 안겨 줄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인은 제 입장에서 생각해 봤지만 솔직히 말해 자신 없었다.
아마 그때도 애쉬는 어거스트에게 지나치게 현실적인 말들을 쏟아부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어거스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몰라도, 나인은 그에게 조금 고마웠다.
“……!”
그때 멀리서 무언가 터지는 듯 요란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나인의 고개가 자연스레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갔다. 심드렁한 반응의 애쉬와 달리, 나인의 고개가 쭉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에스퍼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이 야외 훈련의 의의는 아마 애쉬가 아닌 다른 두 팀에게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꼼지락대지 말고 가만히 기대어 있어요. 잘못하면 떨어지니까.”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나인은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켰다. 너무 높다. 떨어지면….
“떨어져도 주워 줄게요.”
“떨어지면 죽을 겁니다. 죽고 나서 주우면 무슨 소용이에요?”
“몇 번이고 살려 줄 테니까 걱정 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