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죽는 줄 알았네.”
애쉬는 여태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총알은 나인의 손에서 발사될 때에만 요상한 방향으로 휘어지고는 했다.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일이었다. 사격 선생님은 혀를 차며 “어쩌면 황자님은 마법에 재능이 있으실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총알이 뒤로 날아가는지.” 하는 말을 남긴 뒤 그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인에게 호신용 하급 정령이 붙은 것은 체체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한참을 낄낄거린 뒤였다. 당시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쯧. 혀를 찬 애쉬가 나인을 향해 질린 듯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건 놓고 가요.”
넵. 나인은 얌전히 총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손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기대와는 다르게 훈련장 자체는 크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평범한 한겨울의 숲이다. 축축하고 스산한 분위기에 침엽수들과 황갈색 숲 이끼가 우거져 있고, 오솔길은 굽이져 있었다. 자동차로 달려 이십 분 거리. 다른 팀과의 거리가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웨에엥-!
오두막에 달린 스피커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훈련 시작을 알리는 음이었다. 나인은 이제부터 어쩔 거냐는 시선으로 애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나인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또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올라올래요?”
목소리는 위쪽에서 들려왔다. 언제 또 저기까지 올라갔는지, 건물 5층 높이의 나무 위쪽에서 애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나인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고개를 한참 꺾어야 보이는 높이였다. 게다가 칙칙한 색의 훈련복 덕분에 아주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사람이 저 위에 올라가 있다는 것은 예상도 못 할 것 같았다.
“계속 거기 있으면 금방 잡힐 텐데.”
빙글거리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치사하게! 갈 거면 처음부터 같이 가든가. 나인은 맨손으로 바위도 부수는 에스퍼들을 일대일로 마주쳐 무사할 자신이 없었다.
“저도 올려 줘요.”
그가 불퉁한 얼굴로 대답하자 현기증을 동반한 이명과 함께 시야의 위치가 바뀌었다.
“조심해야죠.”
애쉬는 비틀거리는 나인을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 덕에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나인이 본능적으로 애쉬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나인.”
“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죠?”
뜬금없지만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 얼굴을 뚫어져라 봤더니 애쉬의 시선이 슬그머니 내려가 아래쪽에 닿았다.
“…….”
그의 시선을 따라간 나인은 애쉬의 훈련복 한쪽 주머니에 뭔가 들어 있는 것처럼 불거져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자리를 고쳐 앉으며 시선을 홱 피했다. 상대는 남자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에게 욕정하기도 하는데…. 씨발.
순간 몰려오는 부담감에 나인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모르는 체를 하자 애쉬가 실실 웃으며 나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등 뒤의 체온이 쏟아져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나인은 눈을 꾹 감았다 뜨기만 했다.
아찔한 높이였다. 평소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떨어지면 바로 목이 꺾여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서 올려다볼 때에도 까마득해 보였는데, 위에서는 조금만 시선을 아래로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여긴 왜?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려고? 아니, 그렇다기에는 높이가 과하게 높다.
경치가 좋으니 구경하라고? …그럴 리가 없지.
나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쉬가 말했다.
“이럴 땐 고지를 선점하는 게 좋아요.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기 좋을 테니까.”
“계속 여기 있는 거예요?”
“굳이 힘 뺄 필요 있어요? 두 팀이 싸우다 한쪽이 나가떨어지면 그때 빨리 훈련을 끝내면 돼요.”
“그래도 됩니까?”
“항상 이랬는데요, 뭐. 곳곳에 카메라가 있어서 다 보고 있을 텐데 안 되면 하지 말라고 하겠죠.”
잠시 생각하던 나인은 그러려니 했다. 처음인 자신보다야 애쉬가 더 잘 알겠거니 싶어서. 애초부터 아무 무기도 챙기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하기야 깊게 생각해 보면 체술에 특화된 강화계 에스퍼들을 애쉬가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쪽은 다섯이고 애쉬는 하나인데. 그나마 숨는 데 특화된 이능이라도 가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으으.
나뭇잎이 서로 마찰되며 나는 소리가 세차게 부는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나무 위는 아래쪽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소리마저도 살벌하게 느껴졌다.
“나인.”
흠칫.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인의 몸이 잠시 굳었다.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본 애쉬가 키득대며 웃었다. 숨결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참, 방은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빨리도 물어본다 싶었다. 물론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침 일찍 애쉬의 상태를 떠올려 보면 납득이 안 갈 일도 아니다.
매일 오전 비슷한 시간에 병동에서 일하던 자신을 찾아오던 것 때문에 그가 아침에 약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의외로 애쉬는 일어난 순간부터 한 시간 정도는 넋을 반쯤 빼놓고 선 채 조는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제대로 못 잤어요. 머리 아파요….’
나인의 인사에 그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중얼거렸다. 그에 대해 물어보니 꿈 때문에 잠을 못 잤단다.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꿈은 아닌 듯싶어 내용을 묻지는 않았다.
나인이 머물게 된 방은 이상할 정도로 다른 방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불을 끄고 누우면 방 천장에 붙은 여러 가지 크기의 야광 별 스티커가 보였다. 창문에는 바람이 불면 딸랑거리는 유리 풍경이 걸려 있었으며 먼지가 앉은 목각 말들은 색이 좀 바랜 채로 선반 위에 쭉 늘어서 있었다.
“……솔직히 좀 어린애 방 같던데요.”
“그래요?”
“직접 꾸미신 방이라던데.”
“맞아요. 내가 하나하나 손보지 않은 데가 없죠.”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왜 그 방만 그래요?”
“…….”
“어렸을 때 자기 방 못 가져서 한이라도 맺혔던 거예요?”
나인의 말에 애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는데 유감이네요.”
“아뇨, 그래도 좋아요. 분위기가 아늑해서.”
널찍한 공간인데도 아기자기하게 배치된 가구들 덕에 공간은 아지트처럼 아늑한 느낌을 주었고 창문을 열면 탁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좋았다. 아침 일찍 커튼을 열면 막 떠오르는 해가 방 안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나인은 아침에 미지근한 햇살을 받으며 한 십 분은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어거스트가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고요?”
“집사님은 제게 굉장히 잘해 주세요.”
“노인네가 좀 꼬장꼬장하지 않던가요?”
“좋은 분이세요.”
애쉬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둘이 잘 통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할 말이 많았어요? 첫날은 그렇다 쳐도, 이틀 동안 밤늦은 시간까지 남 얘기를 어찌나 그렇게 길게 하던지.”
“네?”
나인은 잠시 눈만 깜빡이다 고개를 들어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들으셨어요?”
“들으라는 거 아니었어요?”
애쉬는 부러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음부터는 나 몰래 비밀 얘기 할 거면 다른 건물로 옮겨 가서 해요. 거기까지는 못 들으니까.”
“차, 참고할게요.”
나인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없는지 잠시 생각했다. 다행히 대화 상대가 나이가 지긋한 노집사인지라 특별히 애쉬의 험담을 한 기억은 없던 것 같다.
‘그나저나 그게 들렸다고?’
애쉬의 침실은 2층에 있었고 주방은 그와는 정반대인 1층 끝에 위치해 있었다. 어거스트와 대화하는 내내 나인은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애쉬는 본인의 방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조금 소름이 돋았다.
“무슨 생각 했어요?”
“생각이라뇨?”
“당신 그저께 울었잖아요. 얘기 들으면서.”
“……아.”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나인은 잠시 숙연해졌다. 보통 사람의 인생 이야기도 아니고 무려 공간미아였던 시절이 있었던 이의 말이었다. 나인은 한 시간을 꼬박 넘어가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잠시도 집중력이 흐려진 때가 없었다.
“솔직히 남 일같이 들리지만은 않더라고요.”
나인은 얼버무리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거스트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본인의 어렸을 적의 기억부터 시작해 인생에 있어 중대했던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했다. 유려한 말솜씨 덕에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이 눈앞에 그의 인생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는 올해로 예순 살 생일을 맞았으며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의 이 도시였다.
시기상 맞지 않았다. 태어난 연도로부터 계산하면 서른이어야 할 사람이 예순 살의 중년이 되어 있다니? 나인이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하자 어거스트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불행이자 전환점이었던 사건을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