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난 이미 내 이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다룰 줄도 아니까 의무 훈련 대상이 아닐 뿐이에요.”
“…….”
“놀러 와서 그런 걱정 해서 뭐 해요.”
제 입으로 놀고 있단 소리까지 지껄이는 남자는 정말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인은 애쉬의 성격이 좀 부러웠다. 나쁘게 말하면 대책 없고 좋게 본다면 여유로운 성격이었다.
나인이 보기에 애쉬는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기반에 깔려 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은 아마 실력에서 나오는 것일 테지.
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성격은 되지 못한다. 가질 수 없는 성격이라 부러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 *
[세계 각성자 채널 페이지][공포] 이거 누구?
(pic.jpg)
[댓글]
-? 애쉬잖아 ㅂㅅ
⤷걔 말고 걔 뒤에 있는 사람말이야 버러지새끼야ㅋㅋ
⤷⤷왜 욕하고 지랄임 신고함
⤷⤷니가 먼저 했잖아
-우연히 같이 찍힌 행인 아님?
⤷다른 사람 얼굴은 가려ㅠㅠ... 또 신고당하면 골치아픔. 안 그래도 외부에선 각성자페이지 이미지 안좋은데...
⤷(pic.jpg)ㄴㄴ 한 장 아님. 더있어ㅋㅋ 일행은 맞아ㅇㅇ
⤷⤷손잡은거임?
-저거 언제야
⤷오늘
⤷몰래찍었냐?
⤷⤷공인인데 뭐.. 나 말고도 다 찍던데..?
⤷헐 나도 오늘 아는 동생 본다고 러스티 스퀘어 잠깐 갔다가 찍힌 사진에 애쉬같은사람 있음
⤷⤷인증 없으면 뭐다?ㅋㅋ
⤷⤷(pic.jpg) 이런걸로 주작을 왜함?
-(pic.jpg) 맞네ㅋㅋㅋ 검색해보니까 트위터에도 올라옴. 애쉬 페어 가이드 생겼다며. 그거 아님?
⤷그래서 저거 옆엔 누군지 아시는분
⤷⤷모르겟는데ㄷㄷ
⤷⤷야 나 진심 언론에 공개된 각성자 이름이랑 얼굴 줄줄 외울수 있는데 쟨 처음 봄.
-이 정도면 일반인이야
-왜 아무도모르냐? 니들 아는척하는거 ㅈㄴ 좋아하잖아 검색이든 뭐든 해서 알아오셈
⤷다 모르는 거 보니까 신입 가이드인가봄ㅋㅋㅋ
⤷⤷미쳤냐 신입을 애쉬한테 붙임?
⤷⤷신고식 제대로 하네
⤷⤷퇴사가 멀지않았다..
-애쉬랑 투샷인데 별로 안 꿇리는 놈 오랜만에 보네 각도빨인가
⤷근데 여자들 저런 얼굴 안좋아한다
⤷⤷ㄹㅇㅋㅋ
⤷⤷엥 나 여자 아니었네
-저정도면 잘생긴 거 아닌가여 (본인 게이아님ㅇㅇ)
⤷게이새끼
⤷십대 여자애들이나 저런 거 좋아하지 스무살 넘어가면 안찾음. 남자는 몸이다 몸. 나 어릴때부터 소꿉친구 여자애(옆집인데 에블린 소세초닮았고 하이스쿨에서도 인기ㅈㄴ많앗음ㅋ 공부도 잘해서 아이비리그갔고 가슴 H컵에 키도 크고 프롬퀸 출신임) 오랜만에 집 왔길래 샤워 한김에 은근슬쩍 수건 걷고 운동한 몸 보여주니까 놀라서 소리지르던데ㅋㅋ 내가 옷입으면 좀 말라보이는 스타일이거든ㅋ 반가워서 살짝 선것도잇고ㅋㅋ 남자로보이려면 니들도 운동해라 그냥 운동 말고 쇠질이 직빵이다
⤷⤷씨발 이새낀 뭐래..
⤷⤷이 개찐따새끼 왜 갑자기 신낫는지 가르쳐주실분
⤷⤷성희롱 아님?
⤷⤷죽어주라
-(pic.jpg)다른 커뮤니티 반응 다 잘생겼다는데 니들은 뭔데 평가질
⤷어린애들 많은 여초 커뮤니티는 그렇게 생각할수도ㅋㅋ
⤷취향차이지
-근데 찍힌 사진들 보면 애쉬 죄다 처웃고 있는데?
⤷합성임
⤷⤷겠냐
⤷저 새끼 비웃는 웃음 아닌거 처음 보는듯
⤷기사 사진들은 곧 뒤질 것 같았는데 오늘 사진 보면 멀쩡한데? 언론플레이 아니냐ㅋㅋ
⤷가이드 기피증있다며
⤷손도 안 닿았는데 지랄하던 짤 좀 가져올사람
⤷⤷(pic.gif) 여기
⤷⤷다시 봐도 명작이네
⤷⤷이거뭐냐?
⤷⤷뭐임 존나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
-흠 위에 짤 보면 저 금발남도 가이드는 아닌듯
⤷그럼 뭐임 친구?
⤷⤷친구ㄷㄷ
⤷⤷그게 더 공포임
-누가 인성갑 4대 천왕들 친구생기면 전쟁식량 구비하라던데 오늘 마트가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가취가욥
-말머리 공포로 바꿔
⤷개웃기네 진짜 바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니들 왜 다 여기 모여있음? 내 글에도 댓글 좀 달아봐 쌍놈들아 형 심심하다고
⤷니가 노잼글만 썼나보지
-왜 말도 없이 불판 파서 달리고 있냐고ㅠ 각페 정전인 이유가 있었네
-여기 뭐야? 게이 새끼들 데이트 하는 사진인데 댓글 왜이리 많냐?
⤷ㄹㅇ
* * *
나인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냐고 불안해하자 애쉬는 가장 가까운 시일 내로 예정된 합동 훈련 스케줄을 하나 잡았다.
어느 날 갑자기 가이드가 되어 나타난 나인을 모든 사람들이 반겨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상당할 정도의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동시에 이유 모를 적의를 보이는 사람도 당연히 존재했다.
“F등급이라면서? 솔직히 급이 안 되지 않나.”
“얼마 전까지 민간인이던 F등급을 개인 훈련 생략하고 바로 실전에 투입시켜도 되는 거야?”
“쟤 가이딩 조절할 줄은 안대?”
“설마. 울면서 관둔다고 떼쓰지만 않아도 다행이지.”
몇몇 이들이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나인의 처지를 비꼬았다. 일부러 다 들으라는 듯 작지 않은 목소리는 나인에게도 들렸다. 약자라고 생각했던 공간미아 주제에 하루아침에 A등급 에스퍼의 페어 가이드 자리를 꿰찬 게 고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가이드의 눈치를 보는 몇몇 에스퍼들도 더 이상 나인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고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눈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그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동정하는 사람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나인을 곱지 않게 보았다. 뒤숭숭한 분위기에 나인도 어느 정도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간 호의에 절여져 잊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나인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대부분이 동정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을. 동정하던 대상이 하루아침에 자신들과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오니 아니꼽게 보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나인, 뭘 저런 말을 자꾸 듣고 있어요.”
“들리는데 어떡하라고요.”
“내가 가서 아가리 다물라고 할까요.”
애쉬가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인은 이번만큼은 그런 그를 말리지 않고 한술 더 떴다.
“내버려 둬요. 질투하는 거 보니까 내 자리가 탐나나 보죠. 당신을 좋아하나 봐요.”
“나를요?”
본인이 듣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애쉬는 참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뺏기면 안 돼요, 나인. 최선을 다해 지켜 줘요. 난 이제 당신 거니까.”
그가 확인을 구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금방이라도 그들 쪽으로 다가가 입을 찢어 놓을 것 같던 날 선 눈빛은 금세 웃음기로 잠식되어 가라앉았다.
‘……우리가 누굴 좋아한다고?’
뒷말을 하던 사람들이 황당한 얼굴로 경악했다. 두 사람이 제법 큰 소리로 대화를 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뒷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처음부터 가이딩엔 관심도 없었고 저들 말이 아예 다 틀린 것만은 아니니까.
‘근데 내가 막상 제대로 배우면 잘할 수도 있는데 벌써부터 못 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건 무슨 태도야?’
나인은 그들이 영 못마땅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땅을 신발 앞코로 퍽퍽 차다 자신이 그들을 지나치게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제부터 신경 안 쓴다, 진짜.’
저 사람들이 내 등급 낮아서 무시한다는 것쯤은 진짜 정말로 하나도 신경 안 쓰인다고.
‘……신경 쓰여!’
나인은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을 도무지 혼자 몰아낼 수가 없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타고난 성격이었다. 그는 타인의 작은 말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비생산적이란 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건 알고 있다. 속이 좀 쓰리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저런 말에 일일이 슬퍼하며 잠겨 있으면 정말 저들 바람대로 뒤처질 뿐이다.
그는 더 이상 동정으로 호의를 사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만큼 자신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인은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야, 오랜만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인!”
뒤이어 나인에게 알은척을 해 온 것은 체드와 리온 남매였다. 두 사람은 야외 훈련장에서 나인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호들갑을 떨며 그를 반겼다. 꼰대 깡패 체드와 다람쥐처럼 아담하고 귀여운 인상의 리온. 나인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딴판이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말투나 자잘한 습관 따위가 닮아 있었다.
“훈련복 잘 어울려요, 나인.”
“…….”
리온의 칭찬에 나인은 순간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칭찬에 앞서 이 옷을 입은 과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 마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제, 제발, 혼자 입을 수 있다니까!’
‘이대로라면 한 시간이 지나도 안 나올 것 같길래요.’
‘나갈 거예요!’
‘가만히 좀 있어요. 이러다 긁히면 아프잖아요. 아무것도 안 한다니까요? 나 못 믿어요?’
‘나가!’
사실 나인은 이런 일체형 훈련복이 처음이라 어떻게 입는 건지 잘 몰라 한참을 헤맸다. 그러자 애쉬는 탈의실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와 능숙한 손길로 시중을 들며 입혀 주다시피 했다. 생각한 것만큼 몸을 더듬는다거나 하지도 않고 웬만한 시종들의 손길보다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