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각인에 대해 알고 있어?”
“각인?”
그게 뭐더라.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아 다니엘은 눈을 굴리며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각인. 각인…. 가물가물하지만 입 안에서 몇 번 그 말을 중얼거려 보니 생각이 났다.
[특정 가이드에게 각인을 한 에스퍼는 그 가이드의 가이딩 외에는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다니엘은 그가 학부생이던 시절 전공 서적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파트를 떠올리고 본인의 기억력이 아직 건재하단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각인은 학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소재였다.
‘심리적인 문제다.’
‘아니다, 에스퍼라는 인종의 특성이다.’
‘그것도 아니다, 실제론 존재하지도 않는 특이 현상일 뿐이다.’
연구에 진척이 보일 정도로 표본의 양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전공의 시험에도 나오지 않고 서적 초반부에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특이 케이스를 ‘각인’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고 넘겨 버린 것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각인 사례들은 모두 몇 년 이상 페어 관계를 유지해 오다 자연스럽게 각인이 된 각성자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각인은 심리적인 문제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건 갑자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다니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네가 누군가에게 각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
애매하게 말하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애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몸이 아프니 정신도 덩달아 건강하지 못했고 늘 예민했다. 그런 애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을 줄이야.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애쉬.”
“알아.”
“각인이란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도 아직 미지수고.”
“그것도 알고 있어.”
“…….”
다니엘은 애쉬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너는 어렸잖아.”
지금은 몰라도 그때의 애쉬는 정말 어렸다.
“각인할 만한 사람도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고. 학회에서도 함부로 결론 내리지 못한 건데 그게 네 사례일 리는 만무하잖냐.”
실제로 다니엘이 애쉬를 처음 만났을 때, 애쉬는 뺨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꼬맹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타인의 가이딩을 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체였고…. 그는 나인 이전의 모든 가이드들에게 한결같은 거부 반응을 보였다.
매칭률 8%에 불과하지만 나인이 애쉬와 유일하게 유의미한 매칭률을 보인 최초의 가이드였다.
“아무리 그래도 8%는 조금…. 제대로 써먹을 수나 있겠어?”
“나 걔 좋아해.”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쓸데없는 정보가 튀어나왔다. 다니엘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들었다.
“나인이 알려 줬어.”
“뭐라고?”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 난 처음부터 걔가 내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사랑이었다고. 바로 옆에 있는데도 가지고 싶고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하던 것도 사랑 맞잖아.”
“…….”
“왜.”
애쉬가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아닐걸? 아닐걸?’ 하고 반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니엘은 다른 사안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공간미아도 네가 좋대?”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랑 타령을 하겠는가. 나인의 반응이 상식선에서는 옳은 것이다.
그런데…… 저를 좋아한다는 놈과 페어 계약은 왜 해 줬지? 그는 애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너 설마 협박… 뭐 이런 거 한 건.”
“상관없잖아.”
“…….”
했구나. 그럼 그렇지.
“너 그거 범죄야.”
“왜 범죄야? 내가 사람을 죽였어, 아니면 멀쩡한 사람 다리를 부러뜨리기를 했어? 계약서에 서명한 건 나인 본인이야. 난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아주 사소한 조언을 좀 해 준 것뿐이고.”
“……그러면 합의가 아니잖아. 적어도 시간을 좀 두고 지켜보면서 공간미아도 너에게 호감이 생기면 꼬드겨 보든가 했어야지.”
“나인이 날 좋아하고 말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
“솔직히 몸만 옆에 있어도 돼.”
물론 나인의 마음까지 자신을 향한다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제 발로 자신을 떠나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딱히 상관은 없다고, 애쉬는 즐거운 듯 중얼거렸다. 다니엘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인이 가이드라서 다행이지.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잖아.”
말을 듣고 보니 나인은 가이드가 아니었더라도 지금 신세를 못 면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애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인을 가지려고 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아냐, 이거….”
불쌍한 공간미아. 괜한 놈에게 걸려 안온한 일상을 잃은 것이다.
“…….”
제삼자 입장에서는 그렇게만 느껴지겠지만 다니엘은 사실 애쉬가 좀 안타깝기도 했다. 그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으면 이렇게 빙글 돌아 버렸을까. 처음부터 이런 미친놈은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정에 치우쳐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린 건 잘못된 일이다. F등급 가이드를 도대체 어떤 에스퍼가 채 간다고 이렇게 급하게…. 이건 아니지. 적어도 시간을 좀 갖는 게 좋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실소했다.
등급 차이가 너무 났다. A등급 에스퍼를 F등급 가이드 한 명이 다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매칭률이 8%라니.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독이 될 뿐이었다.
애쉬가 가이딩 필을 내놓으라고 달려들 만도 했다. 아, 물론 이런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혀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애쉬, 너 설마…… 그 공간미아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거야?”
다니엘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버리지 못했다. 애쉬는 늘 공간미아들에 대한 일이라면 굳이 제가 그럴 필요 없는데도 발 벗고 나섰다. 정의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통로형 게이트가 열리면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금세 알아차리고 달려가 그 안으로 뛰어들었고, 위험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 냈다. 그는 지나치게 필사적이었다. 꼭 통로형 게이트 속에서 무언가 찾아야 할 게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느 날 어떤 기자가 물었다. 에스퍼님께서는 왜 불필요하게 나서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느냐고. 애쉬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 알 것 없다고 툭 말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기자는 그 한마디에 온갖 의미를 부여해 통로형 게이트의 구출 요원인 애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정의의 사도’로 묘사한 글을 써낸 적이 있었다.
그 기자가 쓴 기사는 우연하게 아주 많은 관심을 받았다. 통로형 게이트의 특성과, 그곳에 드나드는 유일한 에스퍼 애쉬. 당시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애쉬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었지만 하필 다음 날 놈이 또 여권을 들고 휴양지로 토끼는 바람에 여론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나인은 전의 그 공간미아들과는 좀 달랐다. 그는 무려 애쉬가 처음으로 고른 가이드였다. 애쉬가 공간미아에게 보이던 집착을 생각해 보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인이 그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 들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걸로 장난 안 쳐. 집에 보내 줄 거야.”
“……그럼 너는 괜찮겠어?”
조금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다니엘은 공간미아보다는 나인을 돌려보낸 뒤의 애쉬가 더 걱정될 뿐이었다.
“그렇게 좋아서 죽고 못 살겠으면 안 돌려보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다니엘이 확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애쉬는 그런 다니엘의 말을 비웃었다.
“그랬다가는 나인에게 평생 미움받을걸.”
“그래도 상관없다며?”
“미움받기는 싫어.”
“안 들키면 되지.”
“끝까지 속일 수 있을 만큼 나인이 멍청하지는 않아. 그리고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한다니. 그렇게 된다면 공간미아가 애쉬의 첫사랑이 되는건가? 애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다니엘은 웃음이 터져나올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나인은 가이드라는 가이드는 다 기피하던 애쉬가 무려 스스로 선택한 그의 첫 가이드였다. F등급이라 가이딩의 강도는 현저히 낮을지 몰라도 조금이나마 맞는 부분이 있다고 하니 좀 안심이었다.
얼핏 보면 내일이 없는 듯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쉬는 꽤나 계산적이고 영리하다. 센터 내의 그 어떤 에스퍼보다도 본인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고 무엇보다 자기 주제를 파악할 줄 아는 놈이었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었다. 약은 처방할 수 없어.
다니엘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칙상 짝 있는 에스퍼한테는 가이딩 필 처방을 못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다니엘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지막이 본론을 덧붙였다.
“하지만 약재 창고에 있는 물품을 도난당하는 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는 거잖아?”
“……”
금세 말을 알아들은 애쉬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는 다니엘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작당을 모의하는 악당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