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나인, 아직 게이트를 본 적은 없죠?”
“사진으로만 봤어요.”
“방금 전 본 것과 유사해 보이지 않았나요?”
그런가? 사진 속에 나온 게이트는 그나마도 화질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냥 까만 동그라미로 보였을 뿐이다.
“다른 공간이 갑자기 코앞으로 옮겨 오는 것처럼 보였죠?”
나인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마치 이 방 안에, 복도 공간이 그대로 옮겨 온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게이트와 유사해 보이지 않냐는 그의 말도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게이트는 공간 전이와는 달라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없고 뜬금없이 동떨어져 있죠. 사막 위에 고래가 있는 것처럼요.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어요.”
애쉬는 나인의 어깨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 후는 평범해요. 특별 훈련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비슷해도 원하던 게 아니란 걸 그들도 깨달은 거겠죠. 이후 나도 다른 에스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들을 배웠어요. 가끔 글을 배우고, 전투 훈련도 하고. 개인 이능 훈련은…… 날 누가 가르치겠어요? 공간 다루는 이능은 내가 유일한데.”
그렇게 살았어요, 나는. 나름 평범하죠? 애쉬가 안면에 진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혹시 평범이 뭔지 모르나?’
나인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인생사를 들으며 조금 벙쪘다.
하기야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지고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기준이 조금 다르려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물건이 제게는 보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 또한 나인의 사고 회로와는 많이 달랐다. 센터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낯선 일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애쉬는 어려서부터 각성자 센터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는 ‘게이트’에도 밥 먹듯이 드나들며 나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나인의 비일상이 남자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역으로, 제게는 당연하고 특별할 것 없으며 지루하기까지 한 하루가 애쉬가 듣기에 신기하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전투 훈련 같은 것도 하는구나.”
“그럼요.”
“……근데 대체 뭘 배워요? 검술?”
생각해 보니 여기선 검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인이 있던 곳에서는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내려올 때 스스로 몸을 지키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마법 스크롤도 없잖아요.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거예요?”
“검… 은 안쓰지만 그 대신에 총이 있죠. 사격술을 배워요. 근접 격투술은 필수고.”
“아, 사격이요?”
그렇구나, 총이 있었지.
“저도 배운 적 있어요.”
나인이 괜히 아는 척을 하자 애쉬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인이 그런 걸 뭐하러요?” 하고 물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무슨 온실 속 화초처럼만 자란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별걸 다 할 줄 아네요. 나인, 그거 말고는요?”
“……음, 말을 탈 줄 알아요.”
나인은 애쉬가 바라는 ‘재미있는 얘기’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인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흥미롭게 들어 주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가 낯설고 신기했다. 제 일상이 애쉬의 입장에서는 비일상처럼 들리는 것이다.
하도 말을 많이 해 목이 다 아플 지경이 되어서야 나인은 한참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쉬와의 대화가 즐거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인이 손 아래 쥐이는 소매를 꿈지럭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이제 씻으러 가고 싶은데요….”
“아, 그래요? 슬슬 일어날까요?”
그 말에 나인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려났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니 허리가 조금 뻐근한 것 같았다. 기뻐했던 것도 잠시, 느긋하게 나인을 따라 일어난 애쉬가 허리를 숙여 나인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는 나인이 꺼내 두었던 옷가지를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갑자기 왜 제 물건을 애쉬가 정리해 주는 건지 의아해하던 순간이었다. 시야가 사진 넘기듯 단번에 뒤집혔다.
“……!”
귓가에 삐 하는 이명이 들리자 나인은 반사적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오늘만 몇 번째야…. 이번에는 쏟아 낼 것처럼 울렁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역감 대신에 욕이 튀어나왔다.
“윽!”
퍽! 나인은 애쉬의 배를 팔꿈치로 힘껏 치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애쉬가 헉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프다고 투덜대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하긴 한 모양이었다.
‘여긴 뭐야?’
깔끔하게 정리된 채 두 사람을 기다리던 센터 레지던스와 다르게 이 공간은 무척 너저분했다. 마치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도 살고 있던 것처럼 생활감이 넘친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인은 우드 톤으로 통일된 고풍스러운 가구들 사이에 상당히 낯익은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그간 애쉬가 제게서 갈취해 갔던 것들이었다. 노란 스마일이 각인된 머그 컵 안에는 차 티백이 말라비틀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나인의 담요는 침대 위에 너저분하게 널브러져 있다. 센터 로고가 박혀 있는 냅킨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는데 그 난장판을 구성하는 물건들이 모두 나인의 것이었다. 물건을 하나하나 확인할 때마다 저것들을 빼앗기던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다.
‘아니, 딱히 소중히 여기지도 않을 거면서 정말 왜 가져간 거지……? 무슨 용도야?’
나인은 혼란에 빠져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여긴 어디죠?”
“내 집이에요. 여기서 차 타고 30분만 가면 센터.”
“……?”
“바깥이라고요.”
기숙사가 아니라 집이라고? 심지어 센터 밖?
“그럼 기숙사는요?”
“거긴 시끄러워서 못 자요.”
“……?”
“밤만 되면 신음 소리에… 뭐, 낮에도 다르지 않죠. 거긴 동물원이 따로 없어요. 사람이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요.”
아, 그 소리…. 솔직히 나인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였다. 나인은 각성자 숙소도 아닌 일반 직원들이 쓰는 기숙사에 잠깐 머물렀는데, 그 건물에서조차 밤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해괴한 신음 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던 것이다.
각성자 숙소는 그보다 더하겠지. 생각만 해도 민망해지는 일이다.
“앞으로는 나인도 나랑 같이 여기서 지내요.”
“……그래도 됩니까?”
“원랜 안 돼요.”
그는 표정에 미동조차 없이 당당하게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말했다. 말투가 너무 뻔뻔해서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뻔했다.
무심코 고개를 든 나인의 시야에 창밖 풍경이 들어왔다. 넓은 정원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하얗고 고요한 풍경이다. 비록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데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저 넓다는 것 하나만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주변이 굉장히 조용하다. 근처에서 사람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이점이었다.
“방 좀 치우죠.”
하지만 나인은 도저히 이런 너저분한 데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방치해 뒀다가는 벌레까지 꼬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인은 옆방을 써요.”
“방을 따로 쓰나요?”
“…….”
애쉬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인은 그제야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쉬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왜요. 막상 다른 방 쓴다니까 서운하기는 한가 봐요?”
“그게 아니라….”
“같이 잘까요? 나인만 좋다면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싫은데요. 싫어요.”
당황한 나인이 고개를 붕붕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그때였다. 금방이라도 그를 놀리려 들 것 같았던 애쉬의 시선이 그를 비껴 나가 뒤쪽을 향했다.
“왔네….”
“……?”
“나가면 안내해 줄 거예요.”
무형의 힘이 나인을 떠밀어 문 바로 앞까지 내쫓았다.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을 땐 언제고 뜬금없는 축객령이었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사람이라니까. 나인은 얼떨결에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못마땅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
아직 사람이 다 나가지도 않았는데 애쉬가 상의를 뒤집어 벗으며 탈의부터 하고 있었다. 나인은 기겁했다. 널찍한 등판이 드러난 것을 보고 있으니 남자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어?’
순간 나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남자의 등에 긴 흉터 자국이 나 있어 시선을 잡아끌었다. 허리에서부터 날개 뼈까지, 등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흉터는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진 상태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최근에 생긴 것보다는 아주 옛날에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위치가 같아.’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절묘했다. 나인의 등 뒤에도 같은 위치에 비슷한 흉터가 있었다. 어렸을 때 무화과나무 근처에서 뛰놀다 철조망에 긁힌 걸 모르고 지나쳐서 남은 흔적이라고 했다.
비록 자신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같은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흉터가 남아 있는 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저 남자도 실수로 긁힌 상처를 방치해서 흉터가 남은걸까? 나인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넋을 놓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