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짐 많냐고요.”
“……그건 왜요?”
“이따가 방 옮겨야 하잖아요. 짐 많으면 내가 가서 좀 도와줄까 해서.”
“오지 마세요. 짐 많이 없어요.”
센터 기숙사에 기거하는 각성자들이 페어 계약을 맺게 되면 생활 범위를 합쳐야 했다. 쉽게 말해 동거 생활이었다. 코딱지만 한 지금의 방보다는 그나마 업그레이드된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간 말은 안 했지만 나인은 감옥처럼 비좁은 방에 들어가기가 싫어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바깥에서 떠돌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괜히 이유도 없이 발발거리며 센터를 싸돌아다닌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팔걸이에 있던 애쉬의 손이 스멀스멀 가까이 기어 오고 있었다. 아니, 뭐 하세요…. 나인이 말 대신에 시선으로 핀잔을 주자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손잡아도 되나요?”
“아뇨.”
망설임 없는 거절에 애쉬가 미간을 구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 바라는 대로 미리 물어봤잖아요.”
“그래서 대답하잖아요? 싫다고요.”
“한 마디도 안 지네……. 왜 이러는데요. 또 뭐…, 바라는 게 더 있어요? 아니면 나한테 화났나?”
“그런 게 아니라…. 제발 때와 장소를 좀 가리세요.”
“이거 계약 위반이에요.”
“계약서에 이런 위반사항 없었는데요? 그리고 어차피 그쪽은 읽어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다 아는 내용이니까 안 읽어 봤죠.”
그 때, 재생되던 영상이 멈췄다. 나인이 고개를 들자 가장 앞에 앉아 있던 교육 담당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뒤에 두 분, 안 듣더라도 제발 조용히 좀 해 주세요….”
“…….”
나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애쉬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살다 살다 제 키의 절반도 안 되는 꼬맹이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 줄이야. 애쉬는 같이 혼난 주제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옆에서 툭툭거리며 나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가 어떻게 굴든 당신이 안 넘어오면 되는 거잖아요.”
“말 걸지 마요.”
“설마 자신 없어요?”
“아, 말 걸지 말라고요.”
아까보다 목소리를 더욱 낮췄지만 한 번 더 주의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나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손잡게 해 주면 말 안 걸게요.”
“…….”
“손.”
그는 맡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하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이건 백퍼센트 사심 채우기다. 잘은 몰라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게, 애쉬는 정말 교육이 끝나기 전까지 귀찮게 말을 걸어댈 사람이다. 나인은 자포자기해서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얹어놓았다.
약속은 지켜졌다. 말을 걸지 않는 대신 한 시간 내내 손을 주물럭거리며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그는 나인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어떤 글자를 써넣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인은 손바닥에 쓰는 글자로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보나마나 실없는 소리겠거니 싶어 무시했다.
벌써부터 앞날이 답도 없이 캄캄하게 느껴져 나인은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 * *
각성자들이 주로 훈련을 받는 구역은 건물의 배치가 복잡하고 구역 자체의 크기도 무척 컸다. 따라서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며 애쉬는 나인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이능을 사용했다.
그 덕에 걸어서 30분 거리를 1초 만에 이동하게 되었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은 여전했다. 울렁거림이 공간 이동 스크롤을 썼을 때보다 배는 더 심했다.
오전에는 먹은 것이라도 없었지, 지금은 하필 점심 식사가 다 소화되기도 전이었다. 결국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먹은 걸 다 토해 냈다. 나인이 이렇게 된 원인인 애쉬는 그의 뒤에서 등을 툭툭 쳐 주며 그가 게워 내는 것을 도왔다. 나인은 한결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괜찮아요?”
“안, 안 괜찮아요. 토할 것 같아.”
“아직도요?”
“……아, 잠깐만 말 걸지 말아봐요.”
여전히 어지러웠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두 명, 세 명으로 갈라져 보이기도 했다. 나인이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에서 속을 진정시키는 동안 애쉬는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멀미가 왜 이렇게 심하지?”
얼굴에 핏기가 어느정도 돌아온 뒤, 나인은 애쉬의 부축을 받고 가이딩실에 도착했다. 문을 연 순간 그 공간 안에 있던 가이드들이 시선을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
그런데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실외보다 더 냉랭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만 느낀 것은 아닌지 애쉬도 나긋한 어조로 흥얼거리듯 말했다.
“분위기 한번 더럽게 살벌한데.”
“…….”
나인은 마치 애쉬와 일행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에게서 한 발짝 멀리 떨어졌다. 가이드들이 원수라도 진 것처럼 애쉬를 힘껏 노려보는 게 나인에게도 느껴졌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애쉬는 실내를 빙 둘러보더니 용케 감쪽같이 고쳤다고 중얼거렸다. 본인 입으로 말하는 걸 보니 몇 년 전에 그가 여길 다 부숴 놨다는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피할만 하네….’
가이드들의 기피대상 1호다웠다. 나인은 어떻게 이런 놈을 불쌍하다고 생각했는지 며칠 전까지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나인,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머리 위로 손을 붕붕 흔들며 나인을 반기는 것은 센터의 공공 가이드 2팀 소속이자 체드의 누나인 리온이었다. 체드가 직접 소개시켜 준 그녀는 오늘로 나인과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하는 거 아닌가?’
좋기야 한데 지난번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의 리온은 무척 차분한 여자였다. 다혈질적이고 활발한 동생 체드와 달리 조심스럽고 정중하던 리온이, 왜인지 오늘은 십년지기 친구처럼 친밀하게 굴고 있었다.
리온은 나인의 앞으로 총총 달려와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마음고생 많았죠?”
“네?”
“아는 변호사님 소개해 줄 테니 페어 계약 무효화 소송부터 준비해요.”
“아. 이미 한 분 명함 받았어요.”
그런데 명함이 어디 갔지? 손을 넣어 제 주머니를 뒤적이는 나인을 올려다보며 리온이 배시시 웃었다.
“잘됐네요. 저도 도울게요!”
“당사자 앞에서 선 넘네.”
애쉬가 웃으며 말했다. 별 같잖은 걸 다 본다는 듯한 표정이다. 애쉬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아 지켜보는 사람들이 괜히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안해했다.
하지만 리온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애쉬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픽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아… 어디서 개가 짖나?”
그녀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는 시늉을 했다. 센터에서 몇 년을 굴러먹으며 별의별 괴팍한 에스퍼들에게 적응한 그녀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센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기가 셌다.
두 사람을 데리고 개별 가이딩실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리온은 애쉬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끝까지 투명 인간처럼 대했다. 졸지에 기 싸움을 시작한 두 사람의 사이에 낀 나인만 가시방석이었다.
“가이딩은 처음이랬죠?”
리온이 물었다. 나인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인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그래서 제가 있는 거니까. 파장을 느끼시는 데에 제가 그나마 도움이 될 거예요.”
리온은 나인의 옆에 앉아 그의 손에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꼈다. 리온이 말도 없이 손을 잡았는데도 나인이 거리낌 없이 가만히 있자 애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손가락만 스쳐도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애쉬와 달리, 그녀와의 접촉에서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편안했다. 나인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가이딩을 목적으로 하는 신체접촉과 사심이 들어간 스킨십 간의 차이를 말이다.
“침착하게 하죠. 조급하게 굴면 될 것도 안 돼요. 가이드를 일종의 정신계 이능력자라고 생각해 봐요. 나인, 최대한 집중하며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노력해 보세요.”
이제 눈 감아 봐요. 리온이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녀의 지시대로 나인이 눈을 살며시 감자 리온이 반대편 손을 올려 애쉬에게 중지를 치켜들었다. 애쉬는 뜬금없이 시비를 거는 그녀를 한심한 것 보듯 바라봤고, 리온은 치켜세운 중지를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부터 제가 가이딩 파장을 잡아 끌어낼 거예요. 눈을 감은 채로 편안하게 호흡하세요.”
리온은 본인의 현재 행동과 달리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드라고 해서 처음부터 자유자재로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 첫 시작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가이드의 이능 개화를 돕기 위해 다른 가이드가 파장을 잡아 억지로 끌어내는 방식은 종종 사용하는 것이었다.
‘식은 죽 먹기라고.’
경험이 충분한 가이드인 제게 신입 가이드의 파장을 끌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리온은 집중을 하며 나인의 파장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뭔가 이상했다. 당황한 그녀가 실눈을 떠 측정기 모니터를 살펴봐도 가이딩의 세기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뭔가 잘 안 되나 본데 할 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말끝을 잡아 늘이면서 이죽대는 애쉬의 말투에 리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좀 닥치지. 집중을 하게 내버려 둬도 모자랄 판국에 도발하는 말이라니. 저 개새끼 좀 어디로 치워 버릴 수는 없는 건가?
“아. 도와준다는 사람 능력이 형편없어서 그런가?”
애쉬는 무려 A등급 가이드를 면전에 두고 마음껏 비웃고 있었다.
‘저게 진짜.’
리온이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능력 있는 가이드였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 하는데 아무리 집중해 봐도 희미한 기운조차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