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가이딩이 싫다는 거예요? 몸이 아픈가요?”
“가이딩 문제가 아니라….”
나인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이젠 내가 싫어요?”
애쉬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깜빡였다. 표정 없는 얼굴인데 눈동자만 촉촉했다. 순간 그 모습이 애처롭게 보인 나인은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말을 좀 순화해 꺼냈다.
“……지금은 좀 밉긴 한데, 그런 이유는 아니고요.”
진심이었다. 나인은 애쉬가 이딴 식으로 자신을 끌고 온 데 엄청나게 큰 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
애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말했잖아요. 전 어차피 가이딩이니 뭐니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별 느낌도 안 들어서 상관없긴 한데요. 그보다 그냥 신체 접촉 자체가 별로 안 내킵니다. 몸 파는 것 같다고요.”
애쉬가 놀란 눈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합의하에 계약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몸 파는 거예요?”
“에스퍼님은 이게 정말 합의라고 생각하세요?”
“아니긴 해요.”
애쉬가 피식 웃었다. 그걸 알면서 이런 말을…. 헛웃음이 절로 났다. 이왕 시작한 거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나인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머릿속에 든 생각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왜 하필 접니까?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해 나중에 처리하기 편한 상대라서요? 힘도 없고, 편을 들어 줄 사람도 없고, 돌아서면 남이 되고, 가이드 같지도 않은 가이드니까? 갖고 놀기 만만해서요?”
애쉬는 나인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손가락을 세워 책상 위를 간헐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신중히 말을 고르는 듯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만만하다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당신은 내가 만만한가요?”
“…….”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조금, 아니, 조금보다는 조금 더 많이 만만하다. 나인은 예의상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 입만 다물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어려운데요.”
“……제가요?”
의외였다. 이게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맞나?
“그래요.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는걸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래요. 미움받기 싫어서 몇 번이나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고 난 뒤에야 입 밖으로 꺼낸다니까요.”
맙소사, 저게 나름 말을 고른 거였다니. 그럼 평소에는 얼마나 말을 생각없이 하고 다닌다는 걸까? 저 말의 사실 여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나인에게는 그저 변명처럼 들렸다.
“…예. 일단 그건 그렇다 쳐요. 그래도 전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에스퍼님.”
“애쉬라니까요.”
“그래요, 애쉬, 다른 사람들은 당신과 달리 절 가이드 취급도 안 합니다. 폐급이라고 하는데요?”
애쉬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경쟁자가 없어 다행이에요.”
경쟁자 같은 소리 하네. 나인의 눈이 세모꼴로 떠졌다.
“지금 제 욕하시는 거죠?”
“설마요…. 나인을 독점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뜻이었어요.”
나인은 입을 다물고 애쉬를 쳐다보았다. 그는 쌀쌀맞은 제 시선과 다르게 웃는 낯을 고수하며 자신을 마주봤다. 나인이 그를 노려보든, 언짢아하든 애쉬는 늘 저런 눈으로 나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에서도 온도가 느껴진다면 그의 것은 늘 온화하고 따뜻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가이딩 싫어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싫어했어요.”
그가 나긋하게 단언했다. 과거형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가이딩을 싫어하는데, 제게서 바라는 것은 가이딩이라니?
“그런데 지금은 별로 안 싫네요.”
애쉬는 나인의 손을 은근하게 끌어 붙잡았다. 이대로 멍청하게 앉아 있기만 하다간 저도 모르는 사이 말려들 것 같아 나인이 눈에 힘을 주고 손을 확 빼냈다.
“대답부터요.”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요. 왜 나만 추궁하는 거예요. 그러는 주제에 당신 듣기 싫은 말 나오면 쏙 발 빼 버리고.”
하여간 제멋대로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삐딱한 자세로 앉았다. 웃음기가 가라앉은 낯이 새벽처럼 고요했다.
“내가 왜 이러느냐고 물었죠?”
“…….”
“왜 이러는 것 같아요?”
원하던 대답 대신에 애쉬는 나인에게로 그 질문을 받아쳤다. 그가 제게 이러는 이유……. 나인은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그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던 말을 툭 내뱉고 말았다.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당연히 관심 있죠.”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
“……절 좋아하시냐고요.”
마지막 말을 내뱉고 난 뒤 나인은 곧바로 후회했다. 만약 오해였다면 자신만 조금 창피하고 말겠지만, 맞다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그와 제 사이의 무언가가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아.”
혼잣말에 가까운 탄성. 멍하니 있다 두어 번 깜빡여지는 눈꺼풀. 짧은 침묵에 나인은 숨을 죽이고 애쉬에게서 돌아올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런가 봐요.”
“……예?”
“그랬네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나 본데요.”
애쉬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는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갖고 싶었나봐요. 계속 곁에 두고 싶고, 생기다 만 것들이랑 얘기하는 게 보이면 짜증나고.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너무 달라서 난 내가 왜 이러는 건가 싶었어요.”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큰일났다. 괜히 물어봤어. 본인이 자기 감정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나인은 위기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이제 어쩌지?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애쉬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나인은 현실도피를 하기 시작했다. 그, 그래, 좋아한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을 담을 수 있다. 단순 사물에 느끼는 호감이나 친구 간 우정도 좋아한다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지 않던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 방금 고백한 거예요.”
“…….”
이런 씨발. 나인은 자기 합리화와 현실 도피에 실패했다.
“농담도 아니고 친구로서의 좋아한다는 말도 아니에요. 다르다고요.”
발그레한 생기가 남자의 뺨을 스쳐갔다. 애써 부정하던 것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나인의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나인과 반대로 애쉬는 들뜬 모습을 감추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 죄송한데 친구 없으시잖아요. 친구로서 좋아하는 게 아닌건지는 어떻게 알아요?”
“…….”
“그냥 궁금해서요.”
애쉬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작게 중얼거렸다.
“나 차인 거죠.”
“아마 그런 것 같은데요.”
“차여본 것도 처음이에요.”
그는 전혀 상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모습에 그를 찬 나인이 다 머쓱할 지경이었다.
“……그, 언제부터요?”
“당신 덕에 이제 막 깨달아서 나도 좀 헷갈리는데, 지금은 산통 깨지 말고 안 궁금해 하면 안돼요? 나도 여운 좀 즐기고 싶어서.”
“궁금해요.”
“알아서 뭐하려고요. 그게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하죠! 계기는 도대체 뭡니까?”
나인이 사정 봐주지 않고 질문을 차곡차곡 쌓자, 기분이 좋아 보이던 애쉬도 점점 눈을 가늘게 뜨며 싫은 내색을 비추었다.
“싫어요. 말 안 할래요.”
“…….”
“어차피 내 말을 듣는다고 나인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을 거잖아요.”
그가 고개를 홱 돌리며 입을 닫았다. 물론 그 말대로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납, 납득이 가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
“달라질걸요? 그럴듯하면…….”
“정말이죠.”
“네….”
나인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애쉬는 처음부터 제게 조금 이상하게 굴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사람들의 가설이 맞는다면, 그 시점이 게이트 안에서인가 아니면 애쉬가 다시 눈을 뜨고 병동 접수처에서 마주친 순간인가.
나인은 게이트 안에서의 일은 정신을 잃고 있어서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기절해 있던 그를 애쉬가 데리고 밖으로 나와 준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뿐이었다.
그 이후는 기억하는 대로다. 애쉬는 일주일간 쓰러져 눈도 뜨지 못했으며 나인과의 접점은 전혀 없었다. 깨어난 직후 역시 이렇다 할 만한 계기가 없다. 그는 처음부터 나인에게 다정하게 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제게 이유 없이 집착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계기….”
곰곰이 생각하던 애쉬는 말꼬리를 잡아 늘이더니 지그시 나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나도 정말 모르겠어요.”
“……?”
“그냥 계속, 계속 당신 생각을 했어요. 꿈에도 나올 정도로 지독하게.”
웃음기가 가시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회색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나인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잊을 수가 없었어요. 평생을 나인, 당신만 기다리면서 살아온 것 같다면 믿겠어요? 가끔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 때면 당신이 보고 싶고, 미우면서도 막상 다시 보니 전혀 밉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순간 남자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나인은 뒤로 주춤 물러나고 싶었다.
뭐야,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