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33)화 (33/63)

#33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갑자기가 아니에요. 그동안 저도 당신이 자꾸 일자리로 찾아오는 거 불편하다고 자주 표현했던 것 같은데요.”

“거래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당신도 원하는 게 있으면 확실하게 말을 해야죠.”

웃음기 하나 없이 무표정한 얼굴은 어쩐지 조금 낯설었다.

“나인의 해결책은 나예요. 그리고 회피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을 거고요. 나는 대화할 마음이 충분히 있어요. 잘 조율해서 서로 맞춰 나가면 되는 일이잖아요. 난 나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합의점은 분명히 있을 거예요.”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러한 제 행동은 그에게 회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해서라도 애쉬를 돌려보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나인. 세 번째 조건 기억해요? 도망치지 않기로 했잖아요.”

“……다 엎어진 마당에 세 번째 조건은 무슨. 그냥 모든 걸 처음부터 없던 셈 치자는 소리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건 좀 비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도망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책임감 없고 평소의 자신답지 못한 행동이다.

문제를 똑바로 직면하는 건 항상 어려웠다. 하지만 나인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는 이러한 태도도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도 죄다 자기 합리화일지 모르지만….

“가이딩이 불편하면 하지 않아도 돼요.”

애쉬가 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 말은 나인에게 더더욱 확신을 가져다줬다.

거짓말. 전담 가이드를 구하는 거면서 가이딩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나중에 그가 말을 바꾸면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뿐일 것이다. 나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가이드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애쉬는 축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인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나인 말고 다른 가이드는 없어요.”

“생길 겁니다.”

슬슬 자리를 피해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았다. 같은 말이 자꾸만 반복된다. 이러다가 말려들게 될까 봐 조금은 불안했다.

나인은 슬며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나인은 애처로운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심부름 다녀올게요.”

“같이 가요. 얘기 좀 더 해요.”

그가 나인을 따라 일어서려는 시늉을 했다. 이랬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 나인은 애쉬의 어깨를 밀어 그를 다시 앉혔다. 애쉬가 의자에 앉은 채 나인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난 지금 더없이 이성적인데요?”

“저는 이제 할 얘기 끝났습니다. 상식적인 분이시니 제 말 알아들으셨을 거라 생각할게요. 그러니까 갔다 왔을 땐, 정말로….”

“…….”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그 말과 함께 나인은 시선을 피했다. 애쉬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나인은 그를 애써 무시했다. 서류 한 뭉치를 안아 들고 그것을 전달하러 가는 나인의 뒤통수에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인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더 빠르게 재촉했다.

그가 돌아선 순간부터 애쉬의 표정에서는 물기가 싹 가셨다. 그는 눈을 깜빡여 나인이 빠르게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 도망치는 건가? 그 사실을 알아채기 무섭게 애쉬는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기는 소리가 나는 것을 자각했다. 그의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보지.”

하여간 귀는 가벼워서, 또 어디서 어떤 소리를 주워듣고 와서 저러는 건지…. 애쉬의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나인이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탈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간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다 짜증이 났다.

애쉬를 둘러싼 공기는 이후 내내 서늘하기만 했다. 로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간은 이상할 정도로 웅성거리는 소리 없이 고요했다.

그들은 애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정확하게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나인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애쉬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의 웃지 않는 얼굴은 나인 외의 타인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최근의 애쉬가 평소의 그답게 구는 일은 아주 드물었기에 몇 없던 사람들조차 애쉬를 낯선 시선으로 힐긋거렸다.

축 가라앉은 은빛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남자의 인내심은 이미 동난 지 오래였다.

도망치게 둘 거였으면 가만히 안 뒀지. 절대 안 놔줘. 내가 어떻게 찾은 건데? 애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금 온화한 껍데기를 뒤집어썼다. 순식간에 상냥해지는 표정에 그 꼴을 흘깃대던 이들이 눈을 피하며 미친놈이라도 봤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록 연극 따위는 체질이 아니었지만 나인만 좋게 봐준다면 이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들어온 것을 다시는 잃을 생각이 없었다. 곁에 두기로 결심한 한, 그가 좋아하는 모습만을 보여 주고, 그렇지 않은 모습은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이번만큼은 나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도망을 치려고 한다면 끈질기게 따라붙어 퇴로를 막을 수밖에. 아주 오래전부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애쉬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 * *

그날 이후. 나인은 며칠 내내 애쉬를 보지 못했다. 매일 출근과 동시에 달려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던 모습도 이제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제게서 얻어 갈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갑자기 발걸음이 뚝 끊겨 얼굴조차 비치지 않을 정도로 돌변한 태도가 후련하기는커녕 조금 허전했다.

‘너무 매정하게 굴었나.’

바라던 상황이기는 한데 단번에 상황이 바뀌니 어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애쉬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나인의 머릿속에서 애쉬가 골방에 혼자 틀어박혀 우울해하는 모습이 자꾸만 그려졌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내심 신경이 쓰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는 날에는 직원들이 몰려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애쉬는 더 이상 안 오는 거냐고.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확신 없는 대답에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유를 물었다. 혹시 싸웠느냐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나인은 저도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을 돌려보낸 뒤 나인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상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난 지금 애쉬가 찾아오지 않아 서운한 건가?’

나인은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남자를 거절한 것은 자신이었다. 따라서 제게는 서운해할 자격이 없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잘라 버려서 화가 났나?’

평소에는 제법 뻔뻔하게 굴더라니 이렇게 단번에 말을 알아듣고 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 당시에는 돌아갔더라도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타날 거란 이유 모를 확신이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건 오만이었다.

“…….”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애쉬가 화를 내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늘 실실 웃거나 장난만 쳐 댔으니 말이다. 차라리 슬퍼한다면 모를까.

내내 같은 고민만 반복하던 나인은 이런 생각이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공간미아인 나인의 신세와는 달리 애쉬는 어디에서든 입지가 견고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나인이 ‘그’ 애쉬와 얽히게 되었는가 싶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상대가 애쉬가 아닌 다른 이였더라면 돌아오지 않았을 관심이었다.

이 관계는 한쪽이 놓으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자세히 생각하려 해 봐야 머리만 아프다.

‘잊어버리자.’

나인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더 충실하고자 했다. 남자를 보지 못한 지 딱 일주일째가 되던 날, 일부러 떠올리지 않는 한 생각나지는 않을 정도로 그와 멀어질 수 있었다.

나인은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여유를 느꼈다. 일상의 눈요깃거리는 사라졌지만 허전하던 자리는 다른 일로 금세 메꿔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단 말은 사실이었다.

* * *

“나인, 그… 불끈, 아니… 마법 약 말이에요.”

“어제 사 가셨잖아요. 벌써 더 필요하신 거예요?”

“아니, 아니요. 죄송하지만….”

남자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것처럼 입가를 움찔거리다 눈을 질끈 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아는 친구가 눈치를 채서…. 걔가 자기도 발… 아니, 마법 약을 좀 사고 싶다고 나인에게 좀 물어봐 달라고 하는데요.”

“아…… 그래요?”

“정말 소문 퍼뜨릴 녀석은 아니거든요. 어떻게 안 될까요?”

남자는 간절하게 두 손까지 모아 부탁했다. 타인이 눈치를 챌 정도로 효과가 좋기는 했을 것이다. 다만 눈앞의 남자에게는 그럴듯하게 둘러댈 말솜씨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인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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