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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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애쉬와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매일같이 나인을 찾아와 며칠 남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는 돌아갔다.
‘사흘 남았어요.’
‘이틀이에요. 혹시 잊어버린 거 아니죠?’
‘드디어 내일이네요, 나인. 기대되는데요.’
매일같이 찾아와 저러는데 잊어버릴래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결국 나인은 그의 소원대로 끊임없이 애쉬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어젯밤은 생각이 많아져 뒤척이다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고민하는 의미가 있는 건가?’
어차피 집에 돌아가려면 그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겉보기에는 선택권이 있는 것 같지만 대안을 찾지 않는 이상 어차피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왜지?’
분명 애쉬도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게 있으니 이러한 제안을 했을 텐데 도대체 자신이 가이드가 되는 것이 그에게 무슨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일주일 동안 나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끙끙 고민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체드에게 가이드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인사 채용 팀에서 하는 입에 발린 소리와 실제 가이드들과 부딪히며 현장에서 일하는 에스퍼들의 이야기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인의 판단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급료의 차이, 생활의 윤택함, 센터의 각종 복지 혜택 등을 주로 이야기하며 꼬드기려던 인사 팀과는 달리 에스퍼들은 실제로 가이드가 하는 일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이드는 에스퍼가 이능을 사용하는 것을 보조하는 역할이다. 여기서 가장 궁금했던 게 있었다. 가이딩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가이딩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비접촉 상태로 진행하는 방사 가이딩과 피부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방식의 접촉 가이딩이었다.
방사 가이딩은 다수의 에스퍼를 한꺼번에 가이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접촉 가이딩은 한 명을 집중적으로 맡기 때문에 보다 빠르게 폭주를 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효율이 더 좋은 건 후자의 쪽이었다.
그리고 나인은 접촉 가이딩이 그저 손을 맞잡고 있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스퍼 놈들이 그 얘기를 할 때 손으로 성행위를 묘사하다 낄낄대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고, 사이가 좋은 각성자들은 공공장소에서도 누가 보고 있든 말든 입술을 맞부딪친 채로 쪽쪽댔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수치심이라는 게 없는 걸까? 시선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다면 저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인은 그들을 보며 세상이 말세라고 생각했다.
‘에휴. 출근이나 해야지.’
나인은 끝나지 않는 고민을 잠깐 넣어 두기로 했다. 늘 방을 나서는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문을 열고 나선 그는 익숙한 얼굴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좋은 아침.”
“……애쉬?”
그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웬일로 일반 직원들의 기숙사 동까지 찾아온 남자가 나인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나인은 그의 존재보다도 그가 등지고 있는 배경에 놀라 기겁했다.
애쉬가 걸어오고 있던 방향의 문들이 대부분 열려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는 것은 처음 봤다. 아침부터 곱지 않은 시선들이 애쉬의 뒤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방에서 머리 거품도 다 씻어 내지 못한 남자가 문을 열며 “누구야! 벨 누르고 튄 놈!” 하고 소리쳤다. 애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나긋하게 웃었다.
“대답 들으러 왔어요.”
“…….”
“그런데 방이 너무 많은데 당신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서….”
그가 소리 없이 간지럽게 웃었다. 마, 말투 왜 저래? 누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애쉬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웃는 꼴을 목격한 이들은 일제히 못 볼 광경을 본 것처럼 똥 씹은 표정을 해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
그래서 오는 길에 있는 벨들을 다 눌러 봤다는 소리였다. 나인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런 짓을 하고도 죄책감 하나 없이 남의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는 철면피가 여러 의미로 참 대단하다 여겨지기는 했다.
“결정은 내렸나요?”
애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
“나인, 아직 잠이 덜 깼나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듯 싱글벙글 웃는 낯이 얄미웠다.
“……해야죠.”
나인은 체념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할게요.’가 아닌 ‘해야죠.’였다. 달리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 남자가 바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진 몰라도 지금은 휘둘려 주는 수밖에. 지체 없는 나인의 답변에 애쉬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잘 생각했어요.”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한 그는 나인의 어깨에 손을 덥석 얹었다.
“……!”
그 순간 나인은 유체 이탈을 경험했다.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공간 자체가 일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한순간에 바뀐 것이다.
기숙사 복도에 서 있던 나인은 순식간에 그가 일하는 병동 앞에 서 있게 되었다. 꿈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들이나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이건 애쉬의 이능이 틀림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치워 버리는 것이나 본인이 그 능력을 써서 사라지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나인이 직접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욱, 멀미 나.’
나인은 비틀거리며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속이 뒤집혔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마차에서 한 시간을 시달린 것처럼 구역질을 동반한 울렁거림이 올라왔다. 먹은 게 없어 나오는 건 맑은 침밖에 없었다.
애쉬는 비틀대는 나인의 손목을 쥐고 병동 건물로 들어가더니 나인이 일하는 자리를 지나쳐 그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둘은 엘리베이터 대신에 계단을 올랐다. 정신이 들고 보니 지난번에도 와 봤던 장소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매칭 검사실이었다.
“여긴 왜….”
불길함을 느낀 나인이 질문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애쉬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부터 열고 들어갔다.
“……!”
카운터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입가를 무의식적으로 슥 닦고 난 뒤에야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
“…….”
그녀는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멍한 얼굴로 나인과 애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말투로 물었다.
“여,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잠이 덜 깼나. 애쉬가 여길 왜 제 발로. 그녀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여자의 물음에 대답하지도 않고 멋대로 밀고 들어온 애쉬는 나인을 팔걸이 취급하며 어깨 위에 팔을 걸쳐 놓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여자는 제 발로 검사실로 기어들어 가는 애쉬를 보고 제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파…….”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울상을 하며 두 사람을 따라 검사실로 뛰어 들어갔다.
“안 돼요!”
저 개 같은 에스퍼가 또 건물을 부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전 수리와 리모델링을 갓 마친 이곳은 파괴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었다.
‘추운 건 싫은데.’
흐어어엉. 그녀는 속으로 우는소리를 했다. 고장 난 난방 장치가 다시 고쳐져서 정말 행복했는데 또 추운 데서 덜덜 떨며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에스퍼님!”
그녀는 일주일 치 용기를 다 쥐어짜 내 애쉬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팔까지 넓게 벌린 채 겁을 잔뜩 집어먹은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애쉬가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왜요?”
“여긴 안 돼요…. 다른 데가 부술 거 더 많아요.”
여자는 이미 지난 몇 주간 난방 장치의 소중함을 절실히 알게 된 상태였기 때문에, 추위에 떨며 일하는 것보다는 악명 높은 에스퍼를 저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부순다고요? 뭘요?”
나인이 애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애쉬는 그를 한 번 흘깃 보고,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애쉬는 나인의 시선을 의식해 유감이라는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없는 말 지어내지 말아요.”
“네? 하지만 전에도 에스퍼님께서.”
“내가 언제 뭘 했다고 그래요, 응? 그리고 당신 나 알아요? 난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
갑,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야. 왜 처웃으시지? 처음 듣는 상냥한 목소리에 어쩐지 소름이 돋은 여자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애쉬는 순간적으로 나인의 귓가를 다른 공간과 차단시킴으로써 공간을 분리했다. 애쉬는 그제야 평소의 그처럼 서늘한 어조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기회 줄 때 잡아.”
그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조곤조곤하게 경고했다. 나인을 상대할 때와는 목소리의 온도 차가 확연히 달랐다.
“…기회?”
무슨 기회를 잡으라고….
“……!”
여자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다 그녀가 일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려 냈다.
‘매칭 검사실!’
그녀는 그제야 이 둘이 여기에 찾아온 진짜 목적을 눈치채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칭 검사 받으시게요?!”
맙소사. 이건 세상이 멸망할 징조였다!
그녀가 입을 틀어막고 크게 놀라자 애쉬도 그에 덩달아 흠칫하며 “아, 깜짝아.” 하고 불쾌감을 표했다.
물론 놀란 건 놀란 거고 일은 별개였다. 여자는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기고 허둥거렸다.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해야 했다. 저 변덕스러운 남자가 말을 바꾸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