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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28)화 (28/63)

#28

제 앞에선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더니, 왜 뒤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퍼뜨리고 다니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설마 이쪽 일 해 보기로 한 거야?”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설마요. 가이드는 무슨.”

“그럴 줄 알았어.”

에스퍼는 왜인지 기뻐 보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배려심이 깊다니…. 나인은 제 걱정을 해 주는 에스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인류애가 샘솟았다.

“그럼 둘이 정말 무슨 사이야? 요새 애쉬가 매일같이 여기로 출근한단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진짜야?”

나인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정말 그와 자신은 무슨 사이일까.

‘은인?’

일단 이건 맞는 것 같다. 제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다. 하지만 애쉬는 자신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게 거의 확실했다.

‘나인, 나 이것 좀 빌려 갈게요.’

‘왜요?’

‘고마워요.’

‘……저기요, 에스퍼님. 전 준다고 한 적 없는데요?’

‘잠깐 빌리는 거예요.’

‘애쉬. ……잠깐만요. 사라지지 마요. 왜 일어나요? 얘기 마저 하고 가라고요.’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자기가 듣기에 곤란한 얘기를 하는 것 같으면 애쉬는 이능을 사용해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막무가내가 따로 없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열 받네. 맡겨 뒀어?’

애쉬는 첫인상과 달리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이 조금 강해졌다. ‘특이한 성격’ 이라는 말이 덧붙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애쉬가 빌려 간 물건들은 여태 단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다. 대부분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이라 돌려 달란 말을 안 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나인은 한참 고민한 끝에 용기 내어 말했다.

“저 괴롭힘당하는 것 같아요.”

“역시 그거지!”

“…….”

에스퍼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기뻐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나인은 생각했다.

그건가. 공감 능력이 없는 걸 보아 혹시 사이코패스인가?

“고마워, 나인.”

“…….”

이 자식은 사회에서 격리해야 하는 놈이 확실했다. 용기내어 괴롭힘을 당한다 고백한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는 미친놈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저런 것도 노력한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건가?

하지만 그가 왜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병동 출입문에 옹기종기 붙어 있던 에스퍼 몇몇에게 돌아가자 그들이 똥 씹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의 손에 내던지듯 넘겨주던 것이다.

“나인, 고마워!”

부자가 된 남자가 뒤로 돌아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흔들며 한턱내겠다고 소리쳤다. 나인은 그제야 저놈들이 자신을 가지고 내기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남자에게 마주 웃어 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러다 넘어져라.’

남자는 정말 몇 발 못 가서 앞을 보지 않고 걸은 죄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늘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나인은 제 소소한 소원을 들어준 하늘에게 오랜만에 감사 기도를 올렸다.

* * *

애쉬는 정말 나인을 하루 종일 귀찮게 굴며 친구 타령을 했다. 알겠다고, 친구 해 주겠으니 제발 꺼져 달라고 부탁을 해도 그는 뻔뻔하게 곁에 눌러앉아 있었다. 사람을 사귀는 게 서툴러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찜찜하고 걸리는 게 조금 있기도 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인의 물건과 그가 가져온 간식을 물물 교환 하는 행위까지 일삼았다. 소위 말하는 삥 뜯기였다. 나인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제 물건들을 빼앗긴 이후로 방에서 나올 때 개인 소지품을 가져오는 것을 최소화했다.

“저기요.”

“이름으로 불러 줄래요?”

“애쉬.”

그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훈련 일정 같은 거 없어요?”

꺼지세요. 나인은 그 말을 좋은 말로 포장해 살짝 돌려 말했다.

병동은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는 오는 곳이다. 그런데 부러진 팔 말고는 죄다 멀쩡한 그가 여길 대체 왜 오는지 이해가 안 갔다. 최소한 들어온 환자 내쫓는 짓이라도 하질 말든가!

오로지 애쉬만 유독 뻔질나게 여길 드나들었다. 명색이 에스퍼라는 사람이 훈련을 간다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애쉬는 그 말에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더니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환자인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좀 어지러웠어요. 내가 원래 좀 병약한 체질이거든요.”

“…….”

“안 믿는 눈치네요. 정말인데.”

‘믿겠냐, 너라면.’

병약해?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안 웃을 소리였다. 처음 그 모습이라면 몰라도 요즘의 애쉬는 잘 먹고, 잘 자고, 빈둥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애쉬의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도 거의 다 사라졌고 피부도 유독 반짝거린다. 이대로 화보를 찍어도 될 낯짝이다. 이게 어딜 봐서 아프다는 사람의 얼굴인가? 그는 이미 얼굴로 컨디션 최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팔로 무슨 훈련이에요. 난 환자라서 다 나을 때까지 쉬어야 해요.”

“…다 나으면 훈련 가시는 거예요?”

그렇군. 팔이 문제란 말이지…. 얼른 낫게 해 줘야 저 남자도 바빠지고 나도 덜 귀찮아지겠어. 나인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그 옆에서 애쉬가 서운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왜 자꾸 내쫓으려고만 해요? 좀 예뻐해 줘요. 어떻게 하면 친해질까 싶어서 안달을 내는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나인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나인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마법 약을 떠올렸다. 때마침 그는 지난 학기에 과제로 제출한 <부러진 뼈를 한 번에 아물게 하는 마법 약>의 여분을 몇 병 가지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오늘 저녁에 방에 돌아가면 마법 약을 챙겨 뒀다 내일 애쉬에게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언제 친구 시켜 줄 거예요?”

애쉬가 투덜거렸다.

“저희 이미 친구 맞는데요.”

“농담 말아요. 이런 게 뭐가 친구냐고요. 내 얼굴 보이면 제일 먼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부터 짓잖아요, 나인.”

그가 투덜거렸다.

‘아. 그래도 알긴 아는구나.’

남자에게 눈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이런 비생산적인 농담을 왜 합니까?”

나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애쉬가 왜 자신과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더 의아했다. 이름 알고 이렇게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라면 뭐라는 말인가. 나인이 생각하는 친구의 범주는 아주 넓어, 서로 이름을 알고 인사를 주고받으면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애쉬는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가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덧붙여 물었다.

“친구 다음도 있어요?”

“절교겠죠.”

“…….”

이번에는 약간 못마땅한 눈빛이 돌아왔다. 이게 이기고 지는 싸움도 아닌데 나인은 괜한 승리감이 들었다. 남자에게 한 방 먹인 듯한 기분이 들어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애꿎은 사람한테 ‘내 가이드’라는 말은 왜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게 나인의 귀에까지 들어가요?”

우와…, 소문 빠르네. 그는 헛소문을 내고 다닌다는 것을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고 느긋했다. 나인의 울화통이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나인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가이드 아니라고요. 헛소문 퍼뜨리지 마세요, 제발. 그것 때문에 어제도 한 시간이나 시달렸단 말이에요….”

자신을 가지고 내기를 한 에스퍼 무리가 돌아가자마자 인사 팀 직원이 쪼르르 달려와 배턴 터치를 했다. 애쉬가 있을 때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주제에 그가 자리를 뜨기만 하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금방 교대해 나인을 귀찮게 굴었다.

그녀는 ‘내 가이드’라는 말에서 ‘내’라는 글자를 빼고 나인이 가이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이드 등록 절차를 밟는 걸 도와주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나인으로서는 아주 혈압이 올라 목 뒤편을 잡을 만큼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힘들어요?”

“힘들기보다는 좀 귀찮죠.”

“어떡하지? 내가 못 괴롭히게 잘 말해 볼까요?”

“…….”

나인은 순간 싸한 기분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애쉬는 제 앞에서만큼은 상식적인 선을 지켰지만, 만약 소문 속의 그 얘기가 진짜라면…….

“누군데요?”

“괜찮습니다.”

나인은 딱 잘라 말했다. 애쉬가 제 일에 깊게 개입하는 게 꺼려졌다. 그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누가 귀찮게 굴면 언제든 말해요. 안 보이게 치워 줄 테니까.”

애쉬가 산뜻하게 웃으며 농담을 했다. 자신을 가장 귀찮게 굴고 있는 건 본인이란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러는지도 모른다. 나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쉬, 제발 당신도 일 좀 해요.”

“알아서 할게요.”

“퍽이나….”

“이상하다. 아무도 나한테 일정 가지고 참견 안 하는데…. 센터에서도 안 하는 소리를 왜 나인이 나서서 해요?”

그는 본인 일에 참견하지 말란 소리를 돌려서 했다. 하지만 이제 애쉬의 이런 말에 주눅들 나인이 아니었다. 나인은 그를 슬쩍 흘겨보며 대답했다.

“저는 열심히 일하는 거 안 보이세요?”

“일하고 있는 거였어요?”

“방해하지 말고 그쪽도 그쪽 일 하러 가 보세요.”

“잔소리….”

그만 뭐라 해요. 애쉬는 불평조로 투덜거렸다. 나인의 말을 들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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