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27)화 (27/63)

#27

“네가 보기엔 어때?”

한 에스퍼가 나인을 향해 물었다. 당사자인 나인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뭐……, 듣던 것보다는 상식적인 분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요.”

“쟤 정신 나갔냐?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지.”

“물론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지금은? 에스퍼들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인을 바라보았다. 나인은 신중하게 머릿속에서 좋은 말을 고르고 또 골라 입 밖으로 꺼냈다.

“성격이 조금…… 특이하신 것 같긴 해요.”

“야. 그건 특이한 게 아니라!”

“그만해.”

애쉬는 특이한 성격이란 말을 갖다 댈 게 아니라 그냥 인성이 터진 거라고 다그치려던 에스퍼는, 옆에 있던 이에게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핀잔을 들으며 발언권을 박탈당했다.

“특이하단 정도로 그칠 수 있어 다행이네요. 애쉬가 센터 토박이라 그래요.”

“토박이요?”

“이 지역 지부들에는 어려서부터 각성자 센터에서 쭉 자란 애들이 특히 많아요. 전부 다는 아니고, 걔들 중 일부가 좀…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에이, 그건 솔직히 토박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윽!”

“넌 좀 닥쳐. 나 얘기하고 있잖아.”

말을 하던 여자가 불쑥 끼어든 에스퍼의 안면에 주먹을 메다꽂았다. 뻑. 깔끔한 타격음과 함께 남자 에스퍼가 두 손으로 얻어맞은 안면을 감싸 쥐었다.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나인이 힉 하고 숨을 집어삼켰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손을 허공에 탁 털어 버리고는 마저 말을 이어갔다.

“각성자 교육 프로그램 초기 과정을 보면 인적성을 길러 주는 과목이 거의 전무해요. 대부분이 이능 훈련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뭐, 이미 진로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하는 거겠죠? 이 지역이 전 세계를 통틀어 게이트 최다 발생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거두는 에스퍼들이 대부분 게이트 투입에 최적화된 이능을 가지고 있어요. 사회성 기를 시간에 게이트에서 쓸 만한 에스퍼를 만드는 게 목적인 거죠. 그래서 저도 센터 토박이들의 처참한 인성이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것은 아니에요.”

여자의 주먹에 얻어맞은 에스퍼가 불만 하나 내뱉지 못하고, 휴지를 뭉쳐 주섬주섬 콧구멍에 쑤셔 넣고 있었다. 보아하니 한두 번 이런 게 아닌 것 같았다. 얼굴 표정 하나도 변하지 않고 저 남자의 코피를 터뜨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인은 일단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반박을 했다간 저 주먹이 제 얼굴을 향해 날아올지도 몰랐다.

“제가 그 자식을 감싸는 건 절대 아니고요. 웬만하면 토박이들과 얽힐 일은 안 만드는 게 편할 거예요.”

“……근데 전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

나인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 말대로 나인은 애쉬를 피해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미 얽혀 있었으니까. 11지부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정도로 애쉬는 나인의 일터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미 일이 벌어진 상황에서는 조심할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된 원인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 봐도 원인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각성자들 가운데, 한 남자가 애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남자는 공공 지원 2팀 소속의 가이드였다. 시선이 그 가이드에게로 쏠리자 그는 제 의견을 뒷받침할 근거를 덧붙였다.

“그 자식이 원래 가이딩 받는 거 끔찍이 싫어하잖아요. 전에도 이그노어 에스퍼까지 동원해서 가이딩실에 억지로 잡아 두니까 이그노어는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가이드들은 죄다 나무에다 매달아 버리고. 건물도 벽이고 천장이고 다 털어 버린 거 기억 안 나요?”

“아, 그때….”

센터에서 오래 일했던 각성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멍해졌다. 그때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진 것이었다.

11지부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건이다. 건물 8층 높이의 커다란 나무 위에 주렁주렁 열린 가이드들을 내리기 위해 사다리차를 불러야 했고 그들에게 고소 공포증이라는 트라우마를 심어 주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건물의 배관이나 전선도 다 터지고 가구나 집기는 당연히 다 부서졌다. 기둥이나 슬래브, 코어 등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아주 구조적인 기반만 제외하고 통째로 털린 것이다. 당장 건물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두고 정작 본인은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타국의 휴양지로 튀어, 복구 에스퍼들을 동원해 건물을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데에만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나인…. 당신, 멀티랬죠? ……혹시 몰라요, 당신 가이딩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을지도.”

그 말에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그건 진짜 아니다.”

“쟨 무늬만 가이드지 그냥 민간인이야. 피부 접촉했을 때도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F급보다 더 하위인 등급이 있는 거 아닌가 싶어. 사실 등급도 측정이 안 되는데 형질만 가이드인 거 아니냐고.”

“폐급?”

“그런 거지.”

그들은 아무튼 간에 나인이 가이드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낄낄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가이드들은 폐급이라는 소리를 들은 나인이 불쾌해하지 않을까 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나인은 익숙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흘려들었다.

그때,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은 에스퍼가 입을 열어 파문을 일으킬 말을 던졌다.

“첫눈에 반한 거 아냐?”

“…….”

농담이었지만 누구도 웃지 않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인은 어리둥절했다.

“씨발 놈아, 말조심해. 말이 씨가 된다는데.”

“막말에도 정도가 있지.”

말 꺼낸 놈은 뒤통수를 퍽, 퍽 두어 대 얻어맞고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나인이 중얼거렸다. 걸리는 게 아예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올 때마다 제 물건을 몇 개씩 훔쳐 가세요.”

아니, 사실 훔쳐 간다기보다는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쪽이 더 옳았다. 그는 나인의 물건을 탐낼 때마다 빌린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잠시 빌릴게요, 하고. 그건 남의 물건을 무단 갈취하는 양아치들이 으레 하는 대사였다.

“뭐?”

웅성이던 목소리가 일제히 멎으며 나인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그 얘기를 좀 더 해 보라는 에스퍼들의 말에 따라 나인은 그가 가져간 물건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만년필로 시작해 여분의 명찰, 손수건, 머그 컵, 무릎 담요, 심지어는 쓰지도 않은 휴지 조각까지….

“진짠가…. 휴지까지 가져간 건 선 넘었는데.”

“……그것 봐, 썅!”

억울하게 머리만 두 대 맞은 에스퍼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피 묻은 휴지 뭉치가 콧구멍에서 뽁 빠져나와 바닥에 뒹굴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애쉬는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옆에 앉아 동전 모양 초콜릿을 수북하게 쌓아 놓고 하나씩 까먹다 돌아가기도 했고, 병동에 찾아온 꾀병쟁이 에스퍼를 눈빛 컷으로 돌려보내고, 자기 심심하다고 나인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볼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나인이 “이것도 대가인가요?” 하고 물으면 언짢은 얼굴로 “그런 거 하나하나 다 따지면서 계산적으로 살면 친구 안 생겨요.” 하고 조언까지 해 주었다. 나인은 그런 그의 얼굴 앞에 거울을 들이댈 뻔했다. 정작 친구 없는 건 본인이면서.

나인을 향한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애쉬는 폭력적이기보다는 나인의 앞에서만큼은 친절하고 상식적으로 굴었다. 그리고 나인과 친해지는 것에 묘하게 집착했다.

애쉬가 찾아오면 누구도 나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은 죄책감에 나인은 괴로워했지만 병동 직원들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나인에게는 조금 고마워하기도 했다. 상종도 하기 싫은 애쉬를 전담 마크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오직 나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혼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포기해. 넌 인생 망했다, 이제.”

그 얘기를 모두 들은 에스퍼가 나인의 처지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답도 없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젓는다.

“친구 사귀는 게 서툴러서 그러시는 거 아닐까요?”

나인은 친구 없는 사람이 친구 한번 사귀어 보겠다고 낑낑 안간힘을 쓰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뭔… 말이 되냐?”

사람들은 그 말을 비웃었다.

“그 새끼가 뭔 친구를 사귄다고.”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모두 그딴 건 아니라며 단언했다. 질색하는 표정들이 압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남잔데 첫눈에 반한다니….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나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의 겉모습이 취향인 자신마저도 애쉬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단언하지는 않았다. 그의 외모를 보고 관심이 간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와 좋은 친구가 되고 말고는 이후 행보에 달린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각성자라 그런지, 직업 특성상 동성 간의 신체 접촉이나 감정 교류에도 큰 부담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남자끼리 첫눈에 반해. 나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신세계처럼 느껴지는 점이었다.

* * *

다음 날이었다.

“나인,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뭔데요?”

“애쉬가… 널 자기 가이드라고 하고 다녀….”

“……?”

이 소식을 전해 준 이의 말에 따르면 애쉬는 공간미아와 무슨 사이냐는 질문에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춰 ‘비밀을 나눈 사이’라거나 ‘내 가이드’라는 대답을 번갈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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