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4. 폐급 가이드
기껏 아침에 먹은 것들이 다 얹히기 직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접수처를 찾아온 애쉬가 이젠 아예 카운터 안쪽까지 들어와 눌러앉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야 눈요깃거리가 제 발로 걸어와 주는 게 나름 반가웠지만, 이제는 용건도 없으면서 왜 매일같이 찾아와 여기서 버티고 앉아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쉬 때문에 나인은 혼자만의 여유 시간을 보낼 틈이 없었다. 그는 나인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과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인지 나인은 남자가 슬슬 더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고마웠던 마음까지 죄다 증발해 버릴 기세였다.
“히익!”
병동으로 들어서는 환자들이 남자를 본 뒤 소스라치게 놀라며 갑자기 도망쳤다. 치료조차 받지 않고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오늘만 벌써 다섯 손가락을 넘어갔다.
‘…뛰면 안 되는데….’
저러면 금방 나을 것도 일주일을 간다고요……. 나인은 그들이 당장 앉아 치료받아야 할 상태임을 알면서도 그들을 쫓아 달려 나가지 못했다. 이유야 뻔했다.
“나인, 어디 가려고요?”
“…….”
조금만 자세를 고쳐 앉아도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것처럼 굴며 말을 걸어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애쉬는 과할 만큼 나인을 졸졸 따라다녔다. 꼭 갓 알에서 깨어난 아기 새가 할 만한 행동이다. 고마움을 느껴야 할 건 나인이었는데 왜 본인이….
나인은 그가 자신을 구한 게 아니라 자신이 그를 구조했나 싶어 좀 어이가 없었다.
오늘도,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쯤이었다. 애쉬는 난데없이 병동에 등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그는 카운터에 깁스를 한 팔을 기댄 채, 자리에 앉아 분주하게 자리 정리를 하던 나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좋은 아침.”
“……!”
또 왔네? 나인은 무척 놀라 하마터면 애쉬의 얼굴에 물을 뿜을 뻔했다. 사레가 들려 고개를 숙이고 쿨럭거리는 나인을 보고 애쉬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또, 또 오셨어요? 아침부터 어디 다치셨나봐요?”
“음……. 팔?”
그가 게이트 안에서 부러졌던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고정된 상태의 팔에서는 안개가 불어나거나 꿈틀거리는 현상이 관찰되지 않았다. 그건 곧 다친 부위가 아주 순조롭게 낫고 있다는 뜻이었고, 또 치료받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애쉬는 또 나인의 옆에 눌러앉았다. 사람들은 이제 애쉬와 함께 나인의 시선도 피했다. 반강제적으로 또다시 둘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 것이다.
“…….”
“…….”
어색하다. 불편함을 참다못한 나인은 고개를 들어 애쉬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찾아오세요?”
그는 용기를 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한테 볼일도 없으시잖아요….”
“…….”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애쉬는 고개를 들어 나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불편한 제 마음도 모르는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묘하게 웃었다.
“관심 받고 싶어서요.”
“…….”
그건 확실히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다. 애쉬를 쳐다보는 시선들은 나인에게도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다. 그게 목적이라면 이미 그는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나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곳도 많은데 왜 굳이 여기서요? 차라리 아예 사람 많은 데로 가셔도 되잖아요.”
“글쎄요. 나인이 여기에만 처박혀 있으니까?”
“…….”
그 말은 정말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그가 관심받고 싶어 하는 대상이 오로지 나인이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럴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나인,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묻죠. 그러는 당신은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애쉬가 턱 끝으로 나인을 살짝 가리키며 되물었다. 질문이 질문으로 되돌아올 줄 몰랐던 나인은 조금 당황해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치, 친구가 없어서요?”
“친구?”
애쉬는 대놓고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맞네, 나 친구 없어요.”
하지만 제 면전에 대고 친구 없냐는 말을 한 사람은 나인이 처음이라고 그가 킬킬 웃었다. 나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명쾌하게 그렇다 대답하니 사과를 할 수도, 웃을 수도, 그리고 농담이라고 하기에도 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나는 친구도 없고 관종이라 그렇다 쳐도… 나인.”
“네?”
순간 애쉬의 눈가에 장난기가 깃들었다.
“당신은 왜 자꾸 쳐다봐요?”
“제가요?”
“아까부터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잖아요. 몇 번인지도 세놨는데 그것까지 이야기해야 인정할래요?”
“…….”
“관심 받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한테 그렇게 뜨겁고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요? 당신 옆이 제일 재밌는데.”
나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티 나지 않게 훔쳐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제 시선을 눈치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 멍청한 얼굴로 굳어 버린 나인을 보고 남자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짙어졌다.
“어차피 일 안 할 거면 그냥 훔쳐보지 말고 대놓고 봐도 돼요.”
“…….”
“보라니까요. 당신 내 얼굴 좋아하잖아요.”
뭐라고? 순간 움찔했던 나인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여부를 떠나 말이 너무 뻔뻔하게 들렸다.
“아닌데요. 저 일할 건데요.”
“일해요, 난 안 말렸어요.”
“이제 조용히 좀 해 주실래요. 시끄럽습니다.”
사실 그동안 애쉬는 조용히 책만 읽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먼저 말을 건 것도 자신이었지만 나인은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이곳은 나인의 일터였고 멋대로 눌러앉은 건 자신이 아니라 이 남자였으니까.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애초에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쳐다보는 거지, 자기 얼굴을 좋아한다고? 내가 왜?’
나인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일부러 애쉬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놓고 꺼지라고 눈치를 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애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나인보다 더 높은 직급의 사람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런데 자신이 뭐라고 애쉬를 강제로 내쫓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인은 그냥 자신이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거머리처럼 옆에 달라붙어 이것저것 만지며 놀던 애쉬는 몇 시간이 지나자 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러 간다며 떠났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는데 말이다.
* * *
그렇게 같은 일이 며칠째 반복되었다.
애쉬의 눈을 피해 한데 모인 각성자들은 나인의 처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주었다.
“살아 있었네. 옷에 가려서 안 보이는 데 맞은 거 아니지?”
“안 맞았어요.”
“협박당해?”
“안 당해요.”
“돈 받고 입막음당한 거 아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나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드러내자 에스퍼들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생긴 남자가 전혀 인기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의 성격이 엉망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나인이 속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각성자들은 나인이 아직도 애쉬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비통해했다.
“다 큰 어른들이 나이 처먹고 왜 이런 걸로 유치하게 다투고 그래요? 사람 하나 따돌리지 말고 친하게 좀 지내요.”
“…….”
“이러니까 계속 나만 찾아오죠.”
나인은 애쉬가 얼마나 심심하면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찾아오겠느냐며 에스퍼들을 꾸짖었다. 하지만 나인이 뭔가 착각하는 게 있었다. 그들이 애쉬를 따돌리는 게 아니라 애쉬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에스퍼들은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가슴을 쥐어뜯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네가 걔 실체를 몰라서 그래. 정말로!”
이 자리에 모인 에스퍼들은 죄다 한 번씩은 애쉬와 부딪힌 전적이 있었다. 사실 먼저 시비를 건 쪽도 그들이기는 했다.
애쉬는 동물이나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평하게 복수를 되돌려 주는 타입이었다. 그들이 약자여서가 아니었다. 악의가 없는 존재라서 그렇다.
애쉬는 강한 자에게도 강하고 약한 자에게도 강하게 나가는 인간 망종이었다. 제게 악의를 보인 사람이라면 당한 것보다 더한 복수를 행했다. 지나가던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던 놈의 발목을 깨끗하게 부러뜨린 뒤 높은 곳에 방치시켜 하루종일 내려오지 못하게 한다든가, 애쉬의 물건을 훔쳐 곤란하게 하려던 놈의 소지품 캐비닛을 통째로 폭파시킨다든가. 그에 의해 머리통이 깨져 병원 신세를 진 놈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그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아는 애쉬와 현재의 애쉬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쉬는 철저히 본인의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놈이었다.
그런 그가 매일같이 나인을 찾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앞에서 초콜릿이나 야금야금 까먹다 일어난다는 건, 그들 기준에서 애쉬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이들은, 생전 처음 들어 본 애쉬의 상냥한 말투에 팔을 벅벅 긁으며 자신이 못 볼 것을 봤다고 한탄하고는 했다.
“나인이 마음에 들었나?”
“그러게.”
“…왜지?”
그건 관심받는 장본인인 나인도 알 수 없었다.
그간 나인이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물어보니 ‘통로형 게이트에 들어가는 에스퍼가 그뿐’이라는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결국 그날 애쉬가 한 말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의 제안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가이드가 된다고 해서 그 남자에게 뭔가 이득이 될 만한 게 있던가?’
나인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