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전 괜찮은데요. 당신 눈 예뻐요.”
애쉬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뜨더니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솔직히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네요.”
“그러시겠죠….”
“그런데요, 나인.”
“예?”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작업 거는 투의 말을 종종 하나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나인은 순간 멈칫했다.
“……저 작업 건 거 아닌데요?”
“그렇게 들리기도 한다는 소리예요.”
“…….”
나인은 자신이 지껄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되뇌어 보니 그렇게 들릴 만도 한 것 같다. 그도 남자고 자신도 남자인 상황만 아니라면 말이다.
애쉬가 종이에서 만년필을 떼어 내자, 각인된 마법이 작동해 애쉬의 필체를 따라서 같은 글자를 빠르게 반복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마법 같아요.”
그야 진짜 마법이니까…. 자동 수기 만년필에는 말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나인은 말을 아꼈다. 알려 줘 봐야 이 사람이 제대로 알아들을 리도 없었고, 어차피 잘 활용하는 기능도 아니었다. 말을 더듬는 것이나 실수로 한 말까지도 죄다 기록해 버리는 탓에 일을 두 배나 하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요즘 이런 마도구는 번거로워 잘 안 쓴다. 나인은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애쉬는 여러 가지 단어들을 생각나는 대로 써 보다가 나인이 쓴 그의 이름을 어설프게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써넣은 나인의 이름은 획이 틀려 ‘냐잉 옐료윈’처럼 보였다. 나인은 그가 틀렸다는 것을 따로 지적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애쉬가 물었다.
“이거 끝부분에 특이한 게 들어 있네요. 작은 돌멩이 같은 거…. 이게 동력원인가 본데요.”
그 말에 나인은 정신이 확 들었다.
“……그걸 어떻게.”
“그냥 보면 알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눈으로 유심히 보고 만지작댄 정도로 애쉬는 마도구의 작동 원리를 단번에 간파해 냈다. 마법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펜들과 별다를 바가 없는데 말이다.
나인은 잠시 놀란 채 굳어 있다가 그럴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애초에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재능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자신만 보더라도 그렇다. 사람들은 나인이 그들을 잠깐 보는 것만으로 당장 치료해야 할 부위를 아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애쉬의 경우도 이런 게 아닐까.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 구조를 알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건 인공 마석… 아, 그러니까 마법을 새긴 보석이에요. 세공 마법사들의 작품이죠.”
“세금 마법사?”
“세공이요….”
“마법사도 종류가 나눠져 있어요?”
애쉬가 생각 없이 한 말에 나인은 급발진하듯 고개를 치켜들며 열변을 토했다.
“다른 직업도 그 안에서 전문 분야가 나뉘는데 마법사라고 나뉘지 않을 리는 없잖아요?”
“아, 네…. 미안해요….”
나인의 급발진에 놀란 애쉬는 얼떨결에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나인은 그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 주기로 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세공같이 섬세한 작업까지는 어렵습니다. 세공 마법사들의 작업은 마법보다는 예술적인 영역에 가깝거든요.”
“공예가라는 거죠?”
“공예가도 맞지만 마법사도 맞아요. 마력을 다룰 줄 아는 보석 세공사들이 세공 마법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뿐이니까요.”
“음….”
“세공사 중에서도 극히 일부인 데다 장인들이 제자를 여럿 두는 편도 아니라서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보석에 마법 수식을 새기는 작업 특성상 보석을 구하기 쉬운 지역에 예술촌을 형성해서 모여 살고 있고요.”
“아하….”
“참고로 저도 아카데미 재학 중에 견학 삼아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는데요, 마침 수습 세공사들이 교육받고 있던 시기라서 볼 것도 많았어요. 이 만년필도 거기서 산 기념품이죠.”
“……글쿤.”
“보석은 마력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기만 하면 돼요.”
“단단….”
“마력을 새긴 보석은 그때부터 새겨진 마법과 관련된 성질을 띠는데 그걸 인공 마석이라고 불러요. 고위급 마법은 여기 들어가는 보석 정도로는 못 버티고요. 자동 수기 만년필에 들어가는 마법은 비교적 짧은 수식으로 구성돼서 보통 수습 세공사들이… 아.”
“…….”
말하다 보니 열중해서 그런지 나인은 정말 사소하고 쓸데없는 말들까지 꺼내고 말았다. 듣는 사람이 지루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뒤늦게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을 눈치챈 나인이 입을 다물자, 애쉬가 하품을 삼키며 한마디를 건넸다.
“충분히 흥미로웠어요.”
“…….”
“뻥이에요. 잘 뻔?”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나인도 하하 따라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마법이 뭔지도 모르고 흥미도 없는 사람들을 상종하다 보면 정말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입이 썼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애쉬가 물었다. 그가 무슨 맥락에서 또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난자 입장에서는 이미 대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이었다. 나인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애쉬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그럼 나한테 잘 보여야겠네요.”
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또 왜? 물론 타인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 약점이라도 잡으려는 듯한 남자의 말과 저 오묘한 표정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왜요?”
“당신을 집에 보내 줄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요.”
얼핏 들으면 협박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었다. 나인은 그 말의 신빙성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그간 통로형 게이트에서 길을 잃지 않고 살아 나온 에스퍼는 나뿐이에요.”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거기서 나인을 주워 온 것도 나였잖아요. 그 게이트에는 나 혼자 들어갔어요.”
“…….”
“못 믿겠으면 당신의 그 쓸모없는 에스퍼 친구들에게 물어보든가 해요.”
그런데 웬만하면 당신 인생에 하등 도움도 안 될 인간들이랑은 절교하는 게 좋아요. 이런 것도 말해 주지 않는 것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뭐 할래요?
애쉬가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충고했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셔 있었다.
나인은 뒷말은 대충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애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집에 돌아갈 방법.
달칵. 나인의 첫 번째 목표에 불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센터 간부들보다는 그나마 이런 말이 더 가치 있기는 했다. 적어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감이라도 잡히니까.
다른 에스퍼들조차 함부로 말하기 곤란해하던 일을 애쉬는 아주 쉬운 문제라는 양 이야기하고 있었다. 집요하면서도 관찰적인 눈은 묘하게 다정하기도 했다. 그는 시선만으로 나인의 속을 다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런데 저한테 이런 말은 왜 해 주세요?”
“나인을 도와주려고요.”
“……그냥 도와주시는 거예요? 아무 대가 없이?”
애쉬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니죠. 내가 길잡이를 해 줄 수는 있지만 그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해요.”
나인은 수긍했다. 받는 게 있으면 당연히 대가도 있어야 하는 법. 세상에 공짜는 없었…….
“세 개 정도?”
“세 개나요?”
아무리 그래도 세 개씩이나 대가를 요구할 줄이야. 놀란 나인이 숨을 집어삼키자 애쉬가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일단 첫째로, 통로형 게이트는 언제 나타나고 언제 소멸할지 몰라요…. 그러니 일단 게이트가 생성되면 그곳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게 중요하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앉아 있는 의자째로 나인의 등 뒤로 이동해 그의 목 뒤를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어? 나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애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이동해 자리에 앉았다.
“…….”
“…….”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사탕 세 개가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나인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웜홀이라고 알아요?”
“몰라요.”
그 말에 애쉬는 공중에 띄웠던 사탕을 떨어뜨려 다시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실은 나도 잘은 몰라요. 남들이 그거랑 대충 비슷하다고는 하는데 설명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내 이능은 공간 전이예요. 일직선으로 된 시작점과 도착점이 있다면 그 두 지점이 서로 겹쳐지도록 공간을 왜곡시키는 거죠.”
마냥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대충 공간을 이동하는 이능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했다. 나인은 고급 이동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사용해 보기도 했다.
물론 애쉬가 말하는 이능과 마법 스크롤의 원리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스크롤은 공간을 왜곡시킨다기보다 공기 중의 마력을 타고 좌표가 각인된 장소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마나가 희박한 장소거나 그 흐름이 끊기는 곳을 지나는 길이라면 사용 자체가 안 된다. 시간도 짧게는 일 분, 거리에 따라 십여 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