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인은 깜짝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마법 스크롤을 쓴 것도 아닌데 사람이 연기처럼 갑자기 증발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긴장된 얼굴로 이쪽을 힐긋대던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깜짝 놀랐네.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아마도 이게 그 남자의 이능인 듯싶었다.
“부럽다. 이동 스크롤 비싼데….”
나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어수선한 책상을 정리하며 바라본 탁상시계가 현재 시각을 알려 주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 잘 자라는 인사말을 듣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 * *
‘자주 볼 거라던 말이….’
내일 바로 찾아오겠다던 말이었나? 나인은 어제에 비해 한결 나아진 얼굴로 나타난 애쉬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에스퍼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
그 남자는 하품을 삼키며 대충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어제의 그 자리에 다시 앉아서 그대로 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에 뺨이 뚫릴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혹시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참다 못한 나인의 물음에 그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없는데….”
“…….”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왜 쳐다보는거야?
할 말도 없다면서 애쉬는 무척 관찰적인 시선으로 나인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말이다. 이따금씩 나인의 물건을 가져와 손으로 만지작대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누가 좀…….’
나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애초에 애쉬가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부터 직원들의 머리 위에 스트레스나 두통을 의미하는 상태가 보였다. 존재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두통이 되는 남자는 여러 의미로 참 대단했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도 곤경에 처한 나인을 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애쉬를 둘러싼 소문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은 자신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제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그럴 낌새조차 풍기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애쉬는 그를 둘러싼 소문을 떠올리기만 해도 미안해질 정도로, 알고 보면 꽤나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미지근한 호감과는 별개로, 나인은 딱히 애쉬와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이정도 거리감이 딱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에게 따돌림당하는 애쉬가 조금 불쌍하기는 했다. 얼마나 친구가 없으면 어제 처음 본 자신을 찾아와 여기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겠느냐고….
“나인. 어디서 왔어요?”
애쉬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나라 이름이요?” 하고.
“네, 그것도 포함해서. 이것저것…….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 다 얘기해 줄래요?”
나인은 입을 열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뭔가 요구하는 게 너무 자세하지 않나?’
그는 분명 제게 은인이 맞기는 한데……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나인은 일단 한번 남자를 경계해 보았다.
“그건 왜요?”
“궁금해서요.”
그러면 안 돼요? 애쉬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안 될 거야 없지만…. 나인은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곱씹었다.
‘나인, 명심해. 초면에 너한테 이유 없이 친절하게 굴며 웃어 주는 놈들은 둘 중 하나야. 사기꾼이거나 변태거나.’
그는 늘 주변인들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자신은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남들보다 배는 조심해야 한다고…. 더군다나 눈앞의 남자는 쓸데없이 잘생기기까지 했다. 나인은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다.
그럴 일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지명을 말하는 순간 나라 전체에 불벼락이 쏟아지고 역병이 창궐하며 수천 년을 이룩해 온 대륙의 역사가 한순간 멸망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인.”
한 손으로 살짝 턱을 괸 남자가 상체를 기울이며 손짓했다.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에 나인도 얼떨결에 몸을 기울였다. 애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에서 멈춘 입술이 벌어지고 은근한 목소리가 나인의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혹시 나에 대해 무슨 소문 들은 거 있어요?”
“……!”
나인은 숨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네. 아뇨?”
생각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나인은 말을 내뱉은 순간 정신이 확 돌아와 말을 바꿨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애쉬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던 것이다. 눈치로 보니 이미 들킨 듯했다.
“이놈의 인기.”
그가 어깨까지 떨며 킬킬 웃었다. 본인 소문이 긍정적인 내용일 리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인은 한시름 놓았다.
“나인. 당신 설마, 그 소문을 다 믿는 건 아니죠?”
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입꼬리가 씩 올라가며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접힌 눈꼬리는 여우처럼 치켜 올라간다. 남자의 웃는 얼굴은 나인의 정신을 순간적으로 나가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인은 뒤늦게 정신이 들어 멍하니 벌렸던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다 믿지는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닌데요?”
나인의 변명에 애쉬가 우스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도 아니면서 순진해서 그걸 다 믿고 다니네.”
어린애 취급에 이골이 난 나인은 정색을 하며 그 말을 부정했다.
“다는 안 믿었어요.”
“그럼요?”
“조금만 믿었습니다.”
나인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살짝 벌리며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애쉬가 입가를 꿈틀거리다 나인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그래요. 조금만 믿었군요.”
“…….”
웃음을 참던 남자는 결국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다. 자신을 놀리려는 낌새를 나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나인.”
애쉬가 턱을 괸 채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대로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자 눈 밑에 입체적인 그림자가 생겼다.
“당신이 보기엔 내가 어떤 사람 같은데요?”
어떤 사람이냐고? 잠자코 생각하던 나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암만 생각해 봐도 이것 외에 해 줄 말이 딱히 없었다. 자신은 눈앞의 남자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공공연한 소문만으로 판단하기에 애쉬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못돼 처먹기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정도로 그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나인의 말에 애쉬는 기분나빠하거나 민망해하는 대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잘 아는 사이가 되면 되겠네요.”
“제가 그쪽이랑요?”
생각 없이 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애쉬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펴졌다. 그는 바로 서운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그쪽이라니. 이제 와서 선 긋기예요? 커다란 꽃다발까지 갖다 바치면서 내가 깨어나기만 기다릴 땐 언제고 하루 사이에 그쪽이 돼 버렸네….”
그가 느릿하게 말을 뱉으며 입맛을 다셨다. 대놓고 ‘나 서운하다’고 어필하는 태도에 나인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저, 에스퍼님….”
“혹시 내 이름 까먹었어요?”
어려운 이름도 아닌데 그새 잊었을 리가. 하지만 아직 이름을 선뜻 부르기에는 그와 저 사이의 친밀함이 부족하지 않나….
“나한테 이렇게 선 그으면 당신, 나중에 후회할 텐데….”
“후회요?”
“아무도 얘기 안 해 줬어요? 너무들 하네…. 그건 당신도 꼭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무슨 얘기요?”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직 못 들었군요.”
무슨 이야기길래 내가 모르는 이야기라고 단언하는 거지? 나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잠깐만요.”
머릿속을 샅샅이 뒤지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도 정말 감이 안 잡혔다. 나인은 애쉬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뭐라도 생각나는 게 있나요?”
“…….”
나인은 고개를 들어 애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그간 들은 애쉬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악랄한 소문뿐, 좋은 이야기라곤 하나도 없다.
나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 친구들은 당신이랑 상종도 하지 말라던데요….”
“누가 그래요?”
“…….”
나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자질 같았기 때문이다. 애쉬도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은지 두 번은 묻지 않았다. 잘은 몰라도 사람들 사이의 오해의 골이 깊은 모양이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뭔데요?”
“그동안 게이트에서 떨어진 공간미아들 말이에요.”
애쉬가 꺼낸 말의 서두는 나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공간미아? 그 말에 나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이자, 애쉬는 의미심장하게 말의 톤을 낮추어 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