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 *
코끝에 싸한 냄새가 스쳤다.
삑, 삑, 삑.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음과 새하얀 천장.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반쯤 남은 수액과 애쉬가 있던 공간을 다른 공간과 분리하고 있는 간이 커튼이었다.
“…….”
애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몸에 붙어 있는 선들을 성가신 듯 떼어 내고 커튼을 한 번에 촤악 걷어 냈다.
근처에 있다가 애쉬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의료진이 화들짝 놀라며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출을 받은 애쉬의 담당의, 다니엘이 설렁설렁 걸어와 알은체를 했다.
“잘 잤냐? 빨리도 일어난다.”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어지럼증을 억누른 애쉬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지났어.”
“일주일 정도?”
그 말에 애쉬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몸에 힘이 없더라.”
“걱정 마, 근육은 좀 빠졌어도 재활할 정도는 아니니까.”
“근손실….”
“제정신 아닌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진짜 괜찮은가 보네. 이 정도로 그치는 걸 다행인 줄 알아.”
의시가 픽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일주일이나 깨어나지 않고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것치고 애쉬는 지금 머릿속이 무척 맑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깨어나서도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을 텐데 말이다.
“…….”
애쉬의 시선이 비스듬히 올라가 수액 쪽에 닿자, 다니엘이 급하게 말했다.
“그냥 포도당이야!”
“지레 찔려서는.”
“네 평소 행실을 생각해라.”
다니엘이 질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딸깍 소리를 내어 볼펜 촉을 꺼낸 뒤 체크 리스트를 보며 애쉬에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이름.”
“애쉬 블랭크.”
“지금 몇 살이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짜는?”
“스물넷. 날짜는…… 몰라. 들어갔을 때가 연말이었으니 나올 무렵은 아마 1월 초였을 텐데.”
“넘어가고, 마지막 임무는?”
“통로형 게이트 인명 구조.”
“멀쩡하네. 안 섞였구나.”
마지막 질문까지 ‘문제 없음’에 체크한 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의 시선은 다니엘 옆쪽에 있는 협탁으로 옮겨 갔다. 화병 하나가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꽂혀 있는 하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다. 왜 저런 게 제 병실에 놓여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애쉬는 잠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거 뭐야?”
제정신으로 그에게 꽃을 보낼만한 사람은 적어도 이 센터 내에는 없었다. 애쉬의 물음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다니엘이 작은 탄성과 함께 꽃에 대해 설명했다.
“그거 공간미아가 보냈어.”
꽃을? 애쉬의 의아하다는 표정에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좀 과하긴 하지. 그 옆에 카드도 있으니까 읽어 봐.”
애쉬는 말 대신 바로 손을 뻗어 분홍색 카드를 집어 들었다.
[하루 빨리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기대와 달리 별 내용은 없었다. 카드 뒷면에는 ‘러스티 플라워 샵’이란 글자와 함께 꽃집의 SNS 아이디만 새겨져있었다. 그것 외에 이름이라든가 하는 다른 정보는 없었다. 둥근 필체로 쓰인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던 애쉬가 고개를 들었다.
“걔가 나를 어떻게 알고 이런 걸 보내?”
“응?”
“기억한대?”
애쉬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눈빛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다니엘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야. 애초에 게이트 나올 때 공간미아는 처음부터 기절해 있었다던데? 애초에 통로형 게이트 안에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했잖아.”
“…….”
“그 공간미아가 널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게이트에서 자기를 구해 줬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너를 생명의 은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나 보더라고. 그래서 고맙다더라.”
“아.”
그래서…. 애쉬는 작게 중얼거리며 짧은 한숨을 탁 내쉬었다. 다니엘은 생소한 애쉬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딱히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대신에 들고 있던 차트를 뒤적이며 말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이번 게이트는 좀 덜 빡셌나 보더라?”
애쉬는 미동조차 없는 얼굴로 평연하게 대답했다.
“난 익숙해서 잘 모르겠는데. 다음에는 같이 들어가 보든가.”
“…….”
“왜. 내가 데려가 줘?”
“……아. 놀래라! 농담, 농담이구나? 하하!”
“의사 하나 있으면 좋지. 나와서 이렇게 쓰러질 일도 드물 거고 여차하면 미끼로 던지고 튀면 그만이니까….”
“미, 미끼?”
“지원해 보든가. 승인이 날지는 모르지만 난다면 내가 데리고 들어가 줄 테니까.”
“…….”
다니엘은 당황해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저건 농담이 아니었다. 백 퍼센트 진심인 얼굴이다. 게다가 애초에 애쉬가 투입될 만한 게이트는 보통 위험한 게이트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나 같은 민간인이 게이트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그는 애쉬의 섬뜩한 제안을 애써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 그냥 결과가 좋아서 한 말이었어…… 하하.”
다니엘은 괜히 소리를 내어 과장되게 웃었다. 그는 곧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리고자, 차트에 출력된 결과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정상, 정상, 정상, 보통, 정상….
“체내 가이딩 수치는 17퍼센트…. 이건 수치가 좀 낮긴 한데 평소랑 비슷하니까 넘어가자. 내가 말하는 건 이 부분.”
다니엘은 애쉬의 눈앞에 차트를 들이대 보여 주었다. 흰 종이 위에 그래프가 출력되어 있었다. 그래프 하단에 ‘이능 파장’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원래는 들쑥날쑥 난리도 아니었잖아. 기억해?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프가 이렇게 안정적인 모양으로 나온 거야.”
그는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며 과하게 들뜬 모습을 보였다.
“이거 봐. 모양도 규칙적이고 폭도 너무 크지 않아. 난 처음에 결과지가 다른 에스퍼 거랑 바뀐 줄 알았다니까? 애쉬. 설마 너 누구 하나 붙잡고 가이딩 받은 건…….”
들뜬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던 다니엘은, 그를 올려다보는 애쉬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에 입술이 굳었다.
“역시 아니지? 나도 아닌 거 안다. 하, 하하하….”
하여간 농담을 받을 줄 모르는 놈이라니까. 괜히 민망해진 다니엘이 안경을 달그락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누가 뭐라든 다니엘은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늘 골골대는 게 디폴트인 그의 환자가 또 피를 토하고 실려 온 것치고는 상상 이상으로 컨디션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했는지 팔 한쪽은 부러진 상태였지만 깔끔하게 부러져 처치도 쉬웠다. 이건 한 달만 지나도 금방 붙을 것이다. 그 기간 안에 저놈이 몸을 함부로 쓰지만 않는다면….
아무튼 가이딩 수치가 낮은 건 물론이고 이능 파장까지 들쑥날쑥해 잠재적 폭탄 취급을 받던 애쉬가 게이트에서 갓 나온 직후인데도 쌩쌩하다. 드물다 못해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내내 앉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애쉬의 눈에 갑작스레 안광이 돌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주워 온 애 어디 있어?”
“공간미아는 왜?”
“얼굴 좀 보게.”
“직접 가 본다고? 네가 웬일이야?”
다니엘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걔가 갑자기 손을 잡던데,”
“그게 뭐.”
“그게 기분이 조금….”
“조금?”
“……묘해서.”
“……?”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제 손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 애쉬에, 다니엘은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였다.
기분이 묘하기는 무슨, 그냥 누가 자기 손을 잡으니 기분이 더러웠던 거겠지. 그때 상황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안 봐도 뻔했다. 애쉬는 공간미아의 손이 제 살갗에 닿기도 전에 손을 잡아 뺐을 것이다.
‘그런데 쟤가 갑자기 왜 안 하던 소리를 하고 그러지…. 게이트 영향인가?’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반대편 팔뚝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아, 씨…! 눈물이 찔끔 새어나올 정도로 아픈 걸 보니 환각이나 꿈 따위는 아니었다.
“확인해 보고 싶어.”
애쉬의 중얼거림에 다니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뭘 확인한다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애쉬를 보내면 안 될 것 같다고나 할까.
“공간미아도 네 걱정 많이 하기는 하더라.”
“…….”
“야, 일어나지 말고 앉아있어. ……어차피 너 깼다는 거 알면 그쪽에서 어련히 먼저 찾아올 텐데 뭐 하러 네가 내려가냐? 체력 빼지 말고 좀 더 쉬면서 연락 올 걸 기다려.”
그 말에 애쉬의 눈썹이 위로 까딱 움직였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향해 물었다.
“무슨 소리야? 여길 어떻게 찾아와?”
“아, 맞다. 넌 모르겠구나…. 이번 공간미아가 여기 1층 접수처에서 일하거든.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내선 번호로 연락이 와.”
“……매일? 무슨 말 하는데?”
“그냥 너 언제 깨어나냐는 얘기?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매일 아침 꾸준히 전화해서 네 안부를 묻더라. 그렇게 신경이 쓰이나 봐. 요새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른….”
다니엘은 말을 하던 도중 애쉬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애쉬는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덮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몰래 하품이라도 하려고 저러나 싶었겠지만 놈의 귓등이 붉어진 꼴을 확인한 순간, 다니엘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