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16)화 (16/63)

#16

3. 에스퍼 애쉬

각성자 관리 센터의 병동은 시간대와 관계없이 거의 매시간이 분주했다. 훈련 타임마다 다쳐서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달랐으니까. 정말 다쳐서 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대로 꾀병을 부리는 에스퍼도 있었다.

“아, 진짜 머리 아프다니까! 대가리 터질 것 같은데 왜 진료도 못 보게 하는 거야아악!”

“지금 다들 바쁜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두통약은 처방해 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두통약으로 해결 안 된다고. 난 지금 입원해야 해. 난 당신 말고 들어가서 의사를 봐야겠다니까! 확 여기서 폭주해 버린다. 아, 확 해 버린다?”

“에스퍼님 가이딩 수치는 정상이세요. 기록 보니 그저께 가이딩 받으셨다고 나오는데요.”

나인의 지적에 에스퍼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바꿨다.

“생각해 보니 가이딩 문제가 아니라…… 열도 나는 것 같다고. 가, 감기야. 존나 독한 감기.”

“열도 없으세요. 정상 체온보다 2도나 낮으신 걸로 나오는데요.”

“……의사! 의사 나오라고 해애애액! 나 장기 터진 것 같아!”

“화장실은 뒤쪽에 있으세요.”

“씨발, 장기를 싸라고?”

다른 에스퍼가 아픈 시늉을 했다면 속았을지도 몰랐지만 저 에스퍼는 늘 거짓 증상을 호소하며 꾀병을 부리는 사람이라 병동에서는 이미 진상이라고 소문났다.

이런 진상이 접수처로 가기 전에 치워 버리는 것도 나인의 일 중 하나였다. 나인은 쾌변하라고 중얼거리며 진상 에스퍼를 화장실로 떠밀고는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어딜 봐도 건강한데….’

혹시 몰라 샅샅이 훑었지만 그는 외상도 내상도 없었다. 건강하다 못해 너무 튼튼하다.

에스퍼는 결국 화를 내며 돌아갔다. 대처가 좀 과했나 싶어 슬쩍 눈치를 보니 잘하고 있다는 듯 다른 직원이 엄지를 척 치켜세워 준다.

‘잘하고 있구나!’

나인은 화색이 되어 금세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배정된 곳은 병동 1층의 접수처. 이 일자리는 나인에게 아주 적격이었다. 나인은 병동을 찾는 사람에게 다가가 증상을 묻기도 전에 모든 병명을 알고 있었다.

두통. 발목 염좌. 소화 불량. 만성적인 비염….

그리고 응급실을 가야 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해 보이면 나인의 선에서 미리 안내를 해 큰일로 번지는 것을 막아 줄 수도 있었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런 거라도 열심히 해야지.’

오전 내내 병동 출입구 자리에서 어슬렁거리며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올바른 접수처로 가는 일을 도왔다.

나인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실제로도 효과가 있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진상을 부리는 놈도 없고 업무가 수월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며 접수처 직원들이 즐겁게 재잘거렸다.

* * *

나인이 은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름과 성별, 그리고 그에 대한 센터 사람들의 신랄한 평가 정도였다.

“관둬요. 그래봐야 그 자식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꽃다발 처박을 놈이라니까요.”

나인이 은인의 병실에 전 재산의 절반을 쏟아 주문한 커다란 꽃다발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진지하게 경고했다. 나인은 물었다.

“그럼 꽃 말고는 뭘 좋아하실까요?”

사람들은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것도요.”

“뭐든 버릴걸요?”

나인은 그들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꽃에 대한 개인의 호불호는 존재할지언정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소박한 선물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지 말라니 굳이 뭔가를 더 보내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 식사 후 회전문 산책까지 마치고 돌아온 나인은 전원이 들어온 검색용 컴퓨터 앞에 앉았다.

비록 이곳에 마법이 보급화되지는 않았으나 다른 쪽으로는 상당히 발전되어 있다. 눈앞의 이 기계가 그렇다. 기계와 통신망만 있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통신망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인의 나라에도 원격 통신을 위한 신기루 거울이 존재했으나 웬만한 귀족들조차 구하기 힘들 정도로 값나가는 마도구라 쓰는 사람은 겨우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개인 통신 도구를 가지고 있고, 또 동시다발적으로 통신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보의 양과 질, 그리고 그것이 전해지는 속도 면에서 모두 뛰어났다.

‘이런 점은 대단해.’

나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일 제국에서도 이처럼 원격 소통이 가능한 마도구가 보편화된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돌아가면 체체에게 말해 주려고 배울 점을 상세히 메모도 해 뒀다. 다만 컴퓨터는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빠르게 피로해진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인, 뭐 하세요? 좀 도와줄까요?”

어느새 양치를 마치고 돌아온 보조 직원이 보조의 보조인 나인을 보고 말을 걸었다. 그래도 잡일로는 본인이 나름 선배라고 나인을 도와주고 우쭐해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던 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은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러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데 소극적이지 않았다.

용언 반지 덕택에 이미 쓰인 글까지는 어떻게 읽겠는데, 음운 단위로 분리된 글자는 인간의 뜻이 담긴 게 아니라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도 단어 조합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업무 시간에 딴짓을 하는 것은 잘못된 짓이지만 지금은 업무 시간도 아니니 상관없을 듯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암암리에 다 딴짓을 했다.

보조 직원이 가까이 붙어 앉아 마우스를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쇼핑 사이트에 들어가려는 것을 저지한 나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요? 또 마술용품 구경하려는 거 아니었어요?”

“마술 아니고 마법이에요.”

컴퓨터의 쓰임새를 알게 된 후로 내내 ‘마법’이란 단어를 검색해 진지한 얼굴로 쓸데없는 사이트들만 들여다보는 나인을 위해 직원은 미리 경고해 주었다.

“죄송하지만 나인…. 이 세상에 마법 같은 건 없어요.”

“있는데….”

“없어요.”

“있는데….”

“없다니까요. 사람 몸을 자르는 마술은 사실 한 명이 아니라 사람 두 명이 미리 쪼개진 상자 안에 구겨져 들어가 있는 거고요, 카드 마술은 정말 복제되는 게 아니고 트릭이 존재하는 손재간이에요.”

“…….”

“마법이라고 아무리 검색하셔 봤자 다 그런 사기꾼들만 나올 텐데 이제 그만 꿈 깨시죠?”

순식간에 흥미로운 마술 트릭을 스포일러당한 나인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평정심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원래 목적을 잊지 않고 똑바로 전했다.

“그거 말고요. 오늘은 애쉬라고 검색해 줘요.”

나인의 말에 상대방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쉬… 라고요?”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마디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당신도 직접 보는 편이 낫겠죠….”

그는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애쉬의 이름 철자를 검색창에 넣고 엔터 키를 눌렀다. 몇 초간 흰 화면이 천천히 로딩되더니 곧 연관 글과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빽빽한 사진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컴퓨터 속에 들어갈 듯 상체를 가까이 기울여 앉는 나인을 보고 보조 직원은 답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저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저런다. 본인이 저놈 껍질에 속은 줄도 모르고. 그는 본인의 머그 컵을 들고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나인은 뒤늦게 허리를 당겨 제대로 앉으며 첫 페이지의 사진 하나를 클릭했다. 그러자 다른 창이 새로 하나 뜨며 컴퓨터 화면 하나를 남자의 사진이 꽉 채우다시피 했다. 한참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던 나인은 가까스로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

묘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게이트 요원 전용 특수복을 입은 남자가 반쯤 풀린 눈으로 이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 속 인물이지만 어쩐지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움찔하게 된다. 이 사진이 유독 그렇게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쭉 찢어진 눈매의 밑이 거뭇하고 낯빛도 퍽 창백하다.

나인이 마우스를 꼭 잡고 스크롤바를 잡아 내리자 사진 아래 작은 글자가 붙어 있었다.

[사진_도심 게이트에서 나오는 애쉬]

남자는 잿빛 도시를 표류하는 방랑자였다. 온통 삭막한 빌딩 숲과 부서진 도로 파편 한가운데서 홀로 비스듬히 서 있는 그는 유독 눈에 띄어 돌무더기 사이에서 우연히 피어난 들꽃 같았다.

뒤늦게 확인한 기사의 제목은 사진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다.

[스크랩][기사] 에스퍼 애쉬, 또다시 불성실 논란 불거져

(사진)

[사진_도심 게이트에서 나오는 애쉬]

각성자 관리 센터 제11 지부 소속의 에스퍼 애쉬가 또 한 번 매칭 검사 일정에 참여하지 않아 불성실 논란이 불거졌다.

지난 8일. 모 익명 커뮤니티에 각성자 관리 센터 소속의 직원이 ‘또 매칭검사 불참한 그 에스퍼’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작성자는 본인이 검사실 소속임을 밝히며 에스퍼의 매칭 검사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매칭 검사 기간’은 페어 계약을 맺지 않은 모든 각성자들이 참여해 검사를 하도록 정해 둔 기간이다. 매칭률이 높게 나온 에스퍼와 가이드는 상호 간의 합의 후 페어 계약을 맺게 된다.

한편 애쉬는 적도 근처의 한 휴양지에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에서 여행을 하던 관광객에 의해 그의 목격담과 사진이 올라왔는데 시기가 센터의 매칭 검사 기간과 일치한다.

지금껏 그가 휴양지에서 포착된 시기는 모두 매칭 검사 기간 중이었으며 내부 직원의 말에 따르면 애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매칭 검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네티즌들은 이는 에스퍼로서 일종의 직무 유기에 해당된다는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각성자 관리 협회 측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해당 에스퍼의 행동이 상습적이니만큼 내부적으로 엄격한 절차를 밟겠다고 해명했다.

기사 출처 - BBN(누르면 링크로 감)

[댓글]

-엄격한 절차 이지랄ㅋㅋ 어차피 한다고 입만 털어놓고 암것도 못할거면서

⤷맞음ㅋㅋ 쟤네 예전에 비슷한 일 있었을 때도 같은 말 함. 그때랑 달라진 거 1도 없음.

-저번에도 내부에서 말로는 엄격한 징계한다고 했었음. 근데 센터가 막상 한 거 여권압수였다며^^

⤷네네... 마자요ㅠ 근데 몰래 여권 재발급 받아서 그 다음 주에 또 외국으로 토꼈대요ㅠ 애쉬가요ㅠ

⤷⤷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 개어이없네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또 맛집 찾아다녔냐? 리스트 공유좀

⤷⤷이 정도면 직업 에스퍼가 아니고 관광객인듯

-애쉬가 또...

-인생꿀빠내,, 씨이발 나도 에스퍼나 할걸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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