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15)화 (15/63)

#15

나인은 그의 일자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일도 어렵지 않은데다 신기한 기계들도 많이 볼 수 있었고 그가 좋아하는 장소인 회전문과도 가까웠다. 또한 각성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니만큼 그들과의 접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데에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좋다.

제 실험체… 아니아니 연구 표본이 될지도 모를 에스퍼들과 친목을 다지는 것은 기쁜 일이다.

자주 다쳐 오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마주치는 에스퍼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체드였다. 강화형 이능을 가졌다고 몸을 아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다 보니 센터에서 가장 친해진 에스퍼가 체드라 그는 나인에게 가이드인 본인의 누나까지 소개시켜 줬다. 나인은 체드의 누나인 리온을 통해 가이드 몇 명과도 안면을 텄다.

나인은 사람들에게 살갑게 굴려고 무척 노력했다. 적응 속도가 상당한 나인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그러나 실은 나인은 적응이 빠른 게 아니라 새로운 자극에 더 이상 크게 놀라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있었다. 항상 좋게 말해 돌려보내니 다음 날 또다시 쪼르르 달려와 가이드 등록을 하자고 졸라 대는 인사 팀 사람들은 정말 귀찮기 그지없었다.

아.

나인은 생각을 하다 말고 체드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이런 부탁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뭔데?”

“우리 친하지, 그치?”

그 말에 순간 불길함을 느낀 체드가 경계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용건부터 말해.”

“실례가 안 된다면 돈 좀 빌려주세요.”

“아, 꺼져.”

체드가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친구 사이에 돈거래는 절대 안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바람직한 사고방식은 필히 칭찬해 줄 만했지만 나인은 정말 진심으로 돈이 궁했다. 그는 평생 이렇게 쪼들려 본 적이 없었다. 식비에, 생필품만 조금 사도 빈털터리가 되어 버리는 탓이었다.

“내가 원래 진짜 남한테 돈 빌리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데 진짜 배도 고프고…. 가진 건 없고. 당장 내일 식권 살 돈도….”

나인이 최선을 다해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체드는 답도 없단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혀를 찼다.

“거지새끼.”

“……그게 다야?”

“식권 열 장 사 줄게.”

“음료수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참나, 그러든가….”

그는 어이없어하며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나인에게로 대충 던졌다. 나인은 단번에 그 카드를 받아들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음료 두 잔 마셔도 돼? 쿠폰에 도장 두 개 받으면 열 개 다 채워져서….”

“…….”

“비싼 거 안 먹을게.”

대놓고 뜯어먹겠다는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왜인지 호구 잡힌 기분이었다. 체드는 헤죽 웃는 나인을 한 대 때릴까 싶은 얼굴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카드는 내일 줘.”

“응.”

뜯어먹히는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얄밉지가 않았다. 아, 맞다. 나인이 건네받은 카드를 소중히 주머니에 넣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 사람은 깨어났어?”

“누구?”

“나 구해 줬던 사람. 이름이 애쉬라고 했던가?”

나인이 듣기로 그때 그 남자는 여전히 의식 불명인 상태라고 했다. 그때는 나인도 정신이 너무 없었기에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허공에 피가 튀던 장면만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

체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골치 아프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경 꺼. 어차피 네가 고마워하든 코앞에서 넙죽 절을 하든 그 새낀 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거니까.”

“왜?”

“걘 원래 그래. 웬만해선 가까이하지도 말고.”

“왜?”

“내 말 들어서 나쁠 것 없어, 새끼야.”

“그니까 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

체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나인을 바라보며 충고했다.

“가까이하지 말라면 그냥 말 좀 들어, 씨발. 또 왜라고 하면 죽인다.”

그제야 나인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딱히 저딴 말에 쫀 것은 아니고 체드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는 것을 보고,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참은 것이다. 겁먹은 꼴 좀 보라며 체드가 낄낄거렸다.

“그건 이제 됐고 너 센터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 좀 그만해. 소풍 왔냐? 센터에 관광객 하나 생겼다고 소문 쫙 났더라. 진짜 네 이름 모르는 놈이 거의 없다고.”

“뭐?”

그렇게 싸돌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냥 자신은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건물을 구경하고 회전문 안을 산책하고 일이 끝난 뒤에 친해진 에스퍼들 뒤를 따라다닌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장본인도 며칠 전 나인에게 센터 내 역사관을 견학시켜 준 적이 있으면서! 졸지에 눈치 없이 돌아다니는 놈이 된 나인은 억울했다.

“그래도 가지 말라는 곳은 안 들어갔어.”

“어제 누가 옆 건물 로비 불 끄고 쪼르르 토꼈다던데. 그거 너 맞지?”

“…….”

그건 너무 당황해서. 버튼 하나 누른 것뿐인데 사방이 새까매지길래 수습할 방법이 없어서 그만….

나인은 아무 변명 못 하고 잘못한 강아지처럼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그냥 여기서만 놀면 상관없는데 훈련동 쪽은 위험하니까 진짜 얼씬도 하지 마. 거긴 너 같은 민간인이 드나드는 곳 아니야. 병동에서도 위험해 보이는 에스퍼 근처엔 가지도 말고.”

“어차피 그런 사람은 여기서 볼 일 없어. 응급실로 가니까….”

“그래, 그래. 괜히 애먼 데 찌르고 다니다 큰코다치지 말고 얌전히 굴란 소리야. 나처럼 선량한 사람이랑만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아.”

“와, 양심. 선량이 뭔지 모르나.”

나인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린 말은 너무 작아 다행히 체드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애쉬 그 씹새한테서도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잘해.”

왜 씹새라고 하는거지?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벌림과 동시에 무언가로 틀어 막혔다. 체드가 나인의 입에 멋대로 제 몫의 빵을 반으로 쪼개 욱여넣은 것이었다.

“처먹어. 식권은 열 개만 사라. 더 사면 죽는다.”

카드는 내일 줘. 체드가 말했다. 강제로 입막음을 당한 나인이 한동안 우물거리며 빵을 다 삼키고 나니 체드는 도망치듯 자리를 비운 뒤였다.

‘왜 저래.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체드마저 저렇게 말을 얼버무릴 줄은 몰랐다. 제 목숨의 은인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 반응이 다 이렇다. 나인은 이유가 궁금했다.

‘애쉬요?! 걔가 왜요?’

‘나인은 몰라도 돼요. 진심으로, 진짜 그냥 모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요.’

‘혹시나 해서 경고하는데 혹여나 마주치더라도 그 자식 얼굴에 속으면 안 돼요. 하, 저도 그 끝내주는 얼굴에 백 번 하고도 마흔 번까지는 속아 줄 수 있었죠…….’

‘그 약쟁이 얘긴 왜?’

‘으악! 내 귀! 부정 탈라!’

그 사람을 지칭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다 이런 식이었다.

‘사람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나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 남자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만….

“…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은 나인의 은인이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 * *

그날 저녁, 나인은 센터의 허락을 받고 한가한 에스퍼 두 명과 함께 외출했다. 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사 주었다. 공짜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음악가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나인은 낯설고 휘황찬란한 바깥 풍경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다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을 뻔하기도 했고 제 이름이 미아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진귀한 경험도 해 보았다. 그를 데리고 나온 에스퍼들은 나인을 겨우 찾고는 그새 십 년은 늙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다 깜빡할 뻔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마침 꽃집이 눈에 띈 덕에 나인은 외출의 원래 목표를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꽃집에 들어간 나인은 첫 주급의 절반을 탈탈 털어 예쁜 꽃다발을 샀다. 얼굴까지 가려질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어 받는 나인을 보고 에스퍼들이 미쳤느냐며 기겁을 했다.

“프러포즈라도 할 작정이에요? 너무 과하잖아!”

“왜요? 제 마음의 크기인데요?”

“이 자식 돈도 없으면서! 야, 너 가난하대서 밥도 우리가 사 줬잖아!”

“나인, 돈 얼마 남았어요. 다 내놔 봐요.”

“예? 방금 다 썼는데요?”

“뭐?”

그들은 꽃다발 가격을 듣고 십 년을 더 늙어, 도합 이십 년 늙은 얼굴로 목 뒤편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당장 밥도 굶고 다니는 주제에 금전 감각이 없느냐며 잔소리를 늘어놨지만 나인은 당장 내일부터 며칠을 굶더라도 상관없었다.

감사의 표현은 아무리 크게 해도 과하지 않다. 무려 생명의 은인이다. 원래 같았더라면 은인을 황성에 초대라도 해 극진하게 대접해야 함이 마땅했다.

고작 꽃 몇 송이 정도에 과하다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없다고 생각한 나인은 에스퍼들의 호들갑에도 그저 태연했다.

“손님, 카드에는 뭐라고 적을까요?”

꽃집 주인은 당장 환불하라고 떠들어 대는 에스퍼들을 무시하고 돈줄인 나인에게만 친절하게 물었다.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머릿속에 떠도는 구구절절한 말은 묻어 두기로 했다. 카드는 되도록 간략하게, 감사 인사는 직접 전하는 게 좋다.

“빨리 나으라는 말만 써 주세요.”

“감사합니다, 손님.”

당장 환불하랬지! 에스퍼들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나인은 꽃집 주인에게 대신 써 달라고 부탁한 카드까지 잘 끼워 넣고 남자가 있을 병실에 그의 전 재산을 털어 산 꽃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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