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14)화 (14/63)

#14

“너 오늘도 매칭 검사 거부했다며? 참 겁도 없다.”

아, 뭔 상관…. 어쩌라고…….

나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애써 참았다.

듣기론 체드는 센터 기물 파손이 특기에 훈련 교관에게 대들기가 취미라는데 그런 그가 제게 불성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체드는 스물두 살로 나인과 나이 차도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 그러는 주제에 어른인 척은 혼자 다 했다.

개꼰대….

나인은 입에 든 것을 꼭꼭 씹어 넘기고는 조용히 말했다.

“거부가 아니라 나는 검사할 의무가 없다니깐.”

“하긴 넌 무려 황자씩이기까지 하니까. 겁나는 게 없을 만도 하다!”

체드가 그를 놀리며 낄낄 웃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공간미아 신분이라서….’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말을 해도 알아들을 지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 남자가 과연 의무와 권리라는 단어의 뜻을 알까. 풀어 말해 주기도 귀찮다.

“이 새끼 그러고 보니 왜 또 나한테 반말이냐?”

“뭔 소리야? 나 외국인. 그런 거 잘 몰라.”

“지랄 마. 어차피 너 자동 번역기 같은 거 쓴다며?”

“…….”

움찔. 찔린 나인이 괜히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서 외국인인 척한다고 속겠냐. 이 새낀 가끔 보면 지 불리할 때만 이러더라.”

체드가 갑자기 나인의 뺨을 덥석 꼬집어 흔들었다. 그는 나인을 한참 어린 동생처럼 취급했다. 형님들이 제게 하는 행동과 별다르지 않았던 것 때문에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좀 더 직설적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이 만만해 보인다는 것이다. 뺨이 많이 아프지만 제가 참는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 인내하는 법이니까. 나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정신 연령으로 치면 저보다 훨씬 아래일 체드에게 예의 차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아득한 윗사람이 아닌 이상 반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반말로 상대하는 게 편했다.

“자꾸 이러면 사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거야.”

“해 봐, 한번.”

체드는 나인의 소심한 반항에도 쫄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해 보라는 듯 낄낄 웃을 뿐이었다.

나인은 체드가 웃을 때 가끔 살이 떨렸다. 입가에 남은 흉터 때문인가, 짧게 깎은 머리카락 때문인가. 사람을 얼굴로 차별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체드는 얼굴만 보면 마치 뒷골목 불량배 두목 같았다.

나인은 종종 양아치 수집가라는 별명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체드의 얼굴은 관심 밖이다. 그는 날티 난다기보다는 정말 말 그대로 깡패 두목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제 취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인.”

“……왜.”

“너 각성자 등록할 생각은 전혀 없어?”

“없어….”

“잘 생각해 봐.”

“생각했어….”

“등록만 하면 시민권도 나오고 네 마음대로 도서관도 드나들 수 있어.”

“알아….”

“그리고 이런 것도 나오거든.”

체드가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를 꺼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사진을 찍은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지금 얼굴보다 훨씬 더 앳되어 보이는 초상과 함께 소속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A등급 에스퍼, 체드 우.’

가이드 등록증의 경우는 에스퍼 대신에 가이드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만 달랐다. 나인이 등록증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체드가 “어때, 멋지지. 갖고 싶냐? 갖고 싶지?” 하며 깐족거렸다.

멀찍이에서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아닌 척하며 나인과 체드를 힐긋대고 있었다. 인사 팀 직원 몇 명과 검사실 사람 한 명이었다. 굳이 자세히 묻지 않아도 뻔했다.

‘이놈더러 부추기라고 시켰군.’

왜 하고 많은 에스퍼들 가운데 하필이면 멍청한 체드를 골랐을까, 하고 나인은 생각했다.

고른 인간이 틀려먹었다. 좀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왔다면 망설여 보기라도 했겠지만, 자신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고작 가이드 등록증 하나를 가지고 싶다고 귀찮음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도서관 못 쓰는 건 좀 아쉽지만 그거야 아무나 붙잡고 부탁하면 빌려다 주니까 괜찮아.’

에스퍼들과의 매칭 검사에서 그들과의 매칭률은 죄다 0%를 기록했다. 에스퍼들은 나인과 손바닥을 접촉했을 때조차 느껴지지 않는 가이딩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 가이드가 맞긴 맞아요?” 하고 물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인은 “저도 몰라요.” 하고 대답했다.

결국 잠재 능력이 풍부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터는 나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에스퍼의 수보다 가이드 인구의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는 일부러 형질 검사를 하지 않고 숨기면 죽을 때까지 본인의 잠재 능력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 데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에스퍼를 온순하게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센터에서는 나인이 F등급으로 나올지언정 일단 한번 써먹어 보고 싶어 했다. 그를 속이려고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제가 알아봤는데 공간미아는 각성자로 등록할 의무가 없다고 하던데요.’

‘……예?’

‘난 공간미아라 시민권이 없잖아요. ‘각성자’로서의 의무를 지는 대상에 분명 공간미아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제게는 원래 이곳 사람들이 마땅히 누리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요.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요?’

나인의 말에 상대방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말을 얼버무리며 갑자기 어딘가로 바삐 연락을 돌렸다.

나인은 그들의 마음대로 쉽게 속아 주지 않았다. 가이드가 맞냐고 의심하는 에스퍼들의 말만 듣지 않았어도 이들에게 홀라당 속아 넘어갔을지도 몰랐지만, 이들이 제게 뭔가 사기를 치려고 한다는 의심을 품은 뒤로부터 나인은 절대 호락호락하게 속아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인은 첫날 받은 책자는 물론이고, 형질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난 뒤 일부러 공간미아의 처분에 대한 도서까지 구해서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공간미아에게는 제약이 정말 많았다. 그들은 법적으로 약자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센터에 의해 보호받기는 하되 독자적으로 행할 수 있는 권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이 보호 시설을 한 번 통해야만 가능했다. 허가 없이 타지로 이동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슈퍼마켓’이라고 온갖 물건을 파는 식료품점에서조차 구매할 수 없는 품목이 있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자면 시민권이 없기 때문에 이곳 사람이라면 마땅히 다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것은 공간미아 지원금이었지만, 이것조차 나인에게 적용하기는 좀 애매했다. 나인은 무상으로 지원금을 받는 게 아니라 벌써부터 일자리를 구해 노동을 함으로써 그로 인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지자면 급료였다.

각성자 관리법이 적용되는 대상에 공간미아가 포함된다는 얘기는 정말 어디에도 없었다. 나인은 그 부분을 지적했고 덕분에 얼렁뚱땅 등록 절차를 거쳐 검사 의무를 짊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윗사람들은 뭔 스무 살짜리 애가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냐며 혀를 찼다.

“황자님, 손 좀 줘 봐.”

“뭐 하려고….”

나인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반항할 용기는 없어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체드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고 가만히 집중했다. 그러나 그 역시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놓아주었다.

“야, 너 가이드 맞냐?”

“시간 낭비라니까. 진짜, 사람 말을 콧구멍으로 듣나.”

“……진짜 뒤질래?”

갑자기 발끈한 체드가 나인의 코를 손가락으로 집어 좌우로 흔들며 시비를 걸었다. 나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코가 막혀서 숨을 입으로 쉬어야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반항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참는다, 진짜. 나인은 그렇게라도 생각하며 자기 위로를 했다.

“병동 일은 좀 할 만하냐?”

“응. 다들 잘해 주셔서.”

나인이 코맹맹이 소리로 웅얼대자 체드는 그를 가리켜 바보 같다며 낄낄거렸다. 붙잡은 코는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아프다고 중얼거리며 괜히 불쌍한 척을 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나인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제 형님들도 자신이 어렸을 때는 좀 귀찮게 굴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못살게 괴롭힌 적은 없었다. 나인이 조금만 우는소리를 해도 금세 장난을 거두고 그를 꼭 안아 주고는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개꼰대 깡패 자식….’

말이 안 통해. 나인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괜히 어설프게 반항했다가는 지난번처럼 저 우락부락한 팔로 머리통을 쥐어 짜일 것이다. 저 자식은 온몸이 돌처럼 단단했다. 신체 강화형 에스퍼의 장난은 전혀 장난 같지가 않았다. 폭력 앞에 장사 없었다.

공간미아 적응 프로그램에는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센터에 남게 된 공간미아는 처음이라 그런지 나인에게 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센터에서는 하찮은 일자리에 나인을 끼워 넣기로 마음먹었다.

나인은 병동 1층 로비에서 접수 일을 하는 직원을 보조하는 직원을 또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말단 중의 말단이자 잡일꾼이라는 소리였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나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았고, 기껏해야 병동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말동무를 해 주거나 화분에 물을 주거나 서류 탑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 정도가 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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