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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11)화 (11/63)

#11

그런데 나인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흥분해 대단하다 칭찬해 주니 플로라는 정말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개 마도구 하나도 없이 맨손으로 불을 다루는 건 마법사들조차 못 할… 앗 뜨거!”

“아니, 만지지 말라니까? 당신 바보야? 불을 만지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진짜 제가 아는 불인지 궁금해서….”

“참 나, 손 좀 줘봐요.”

플로라는 늘 상비하고 다니는 화상 연고를 꺼내어 살짝 데인 상처 위를 덕지덕지 문댔다.

“부주의하기는. 갖고 다니면서 바르든가요.”

그녀가 투덜거리면서 건넨 연고를 받아든 나인이 “상냥하시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서는 어떠한 사심도, 비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냥하다고?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살란 소리만 자주 들었지, 상냥하단 말을 들어본 게 몇 년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더 웃긴 건, 그 소리를 들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당황해 공간미아의 눈을 피했다는 것이다. 진심어린 한마디는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쑥스럽게 느껴졌다. 한 시간도 안 되어 플로라는 나인이 공간미아치고는 꽤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각.

통역 에스퍼 케드릭은 처음 보는 광경에 낯을 가리고 있었다.

‘……얘들 왜 이래?’

이번 공간미아가 좀 특이한 놈이라는 것은 대충 느끼고 있었다. 그를 회의장까지 안내해 데리고 온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나인은 에스퍼를 꺼리기는커녕 신기해한다. 초면인 에스퍼의 팔을 조물거리고 쉴 새 없이 그들의 이능에 대해 물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 최소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이 실재하는 곳에서 왔다니 에스퍼를 꺼리지 않고 친한 척을 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문제는 그가 아닌 다른 데 있었다.

저 샊… 아니, 저놈들.

일반적으로 에스퍼들은 무척 예민한 자들이었다. C등급 통역 에스퍼인 케드릭은 이능 각성이 늦은 데다 등급도 낮아 좀 덜했지만, 나인의 곁에서 제 이능을 뽐내지 못해 안달인 놈들 가운데는 A등급 에스퍼도 존재했다.

특히나 이곳 11지부는 유독 사회성 없고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아 폐쇄 병동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그런 에스퍼들이 나인의 앞에선 왜인지 평범한 민간인처럼 굴고 있었다.

신체 강화형 에스퍼인 체드가 주먹을 내리쳐 테이블을 산산조각내고, 화염 에스퍼 플로라가 부서진 테이블 조각에 불을 붙여 실내에서 캠프파이어를 즐기기 시작했다. 미친놈들……. 말려 봐야 들을 놈들이 아니니 케드릭 역시 애초부터 나설 생각도 안 했다.

플로라가 웃으며 불길을 키우니 체드가 환기를 하겠답시고 창문틀을 통째로 뜯어냈다. 미친 자들의 광란 어린 파티였다. 공간미아는 에스퍼들의 재주에 입을 틀어막고 말도 못 내뱉을 정도로 신기해한다.

‘좀 말리라고.’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정상이라고는 케드릭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얼마 안 지나 요란한 화재경보기 소리와 함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팍 터져 나오자 에스퍼들이 나인의 등을 떠밀며 엉망이 된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플로라는 불과 같은 성질을 가진 여자였다. 쉽게 흥분하고 다혈질적이다. 그녀는 수십 건의 방화 미수범이자 온갖 사고를 몰고 다니는 에스퍼였고 체드도 그에 뒤지지 않는 사고뭉치였다. 그 뒤의 에스퍼들은 사고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이런 현장에 함께 있다 종종 걸리는 놈들이었다.

‘어쩌다 이런 놈들만 오늘 스케줄이 비었던 걸까. 없는 것만 못한 놈들을 대체 왜 데리고 왔지?’

죄 없는 자신만 또 사건 진술서를 쓰러 불려 가겠구나 생각하며 케드릭은 그 뒤를 어슬렁어슬렁 쫓아갔다.

대단해, 대단해. 나인은 내내 마술 쇼라도 보는 양 물개 박수를 쳤으며 그가 아는 마법사들과 비교해서 정말 대단하다고 말 한마디 해 주는 게 다였다. 고작 그거에 에스퍼들이 코를 쓱쓱 문지른다.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성격이었다. 이름 대신 ‘황자님’이라 부르며 대놓고 비꼬던 체드에게도 나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은근슬쩍 말을 놓기도 하고, 팔을 만져도 되겠느냐며 이능에 대해 칭찬해 주니 체드도 전의를 잃고 나름 온순해졌다. 두 사람은 어느새 친구가 된 듯했다.

왜 다들 저 어린애한테 물렁하게 구는 거지? 단순히 생긴 게 좀 반반하다는 이유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케드릭은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혹시 귀 뚫으셨어요?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도 안 하시네요?”

“그건 왜?”

“금속은 열전도율이 높잖아요. 불을 다루시는데 그런 장신구를 하면 뜨겁지 않을까 해서….”

“그런가. 그런 이유는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 안 해요.”

에스퍼들은 플로라의 말에 공감했다. 아무래도 센터에서 이능 훈련을 받는 에스퍼들은 전투계 능력을 가진 쪽이 월등히 많았고, 그런 자들에게 장신구는 할수록 거슬리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통역 에스퍼인 케드릭은 물론 별개였다. 현장직과 사무직의 차이가 이런 소소한 것에서부터 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케드릭은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만지작대며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떨떠름하게 그 꼴을 관찰했다.

왜 저 재수 없는 에스퍼 놈들이 나인에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을 내는 걸까. 왜 저런 시답잖은 말에도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는 거지?

‘가이드라면 몰라도.’

케드릭은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가이드일 리가.’

쟨 공간미아잖아. 그리고 나인과 손이 살짝 스쳤을 때조차 가이딩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나인이 가이드였다면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모두가 눈치를 챘겠지. 여기 등급 높은 에스퍼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더더욱 현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케드릭은 낄낄대며 친근한 척 구는 놈들의 원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재수 없는 놈들이다.

특히 체드. 저 강화계 에스퍼 놈은 예민한 기질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냥 존나 싸가지가 없는 새끼였다. 센터 입사와 동시에 훈련실 하나를 다 날려 먹은 놈….

놈은 꼬맹이 시절부터 성격이 아주 글러 먹었다. 지금은 좀 통제가 되는 편이었지만 전에는 더했다. 그와 남매 사이이자 몇 년 늦게 센터에 입사한 가이드인 리온이 있어 그나마 통제가 되는 게 지금 상황이었다.

“나인, 몇 살이에요?”

“스무 살이요.”

나인의 대답에 케드릭을 비롯한 에스퍼들이 눈썹을 치켜들며 그를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수많은 시선들이 동시에 쏟아지자 놀란 나인이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며 긴장했다.

“왜, 왜요?”

“스무 살?”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났어요. 아직 졸업 전이긴 한데 스무 살 맞아요.”

문제 있나요? 나인이 뺨을 긁적이며 눈치를 봤다. 순간 고요해진 분위기를 어색해하는 듯했다.

“와. 이거 완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었네.”

라고 마찬가지로 대가리가 말랑말랑할 스물두 살 체드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본인 입으로 자신이 반 오십이라고 하고 다니는 플로라도 그에 동의하듯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케드릭은 심드렁하게 눈을 끔뻑였다. 제법 귀엽게들 논다. 센터 밖이라면 몰라도 스무 살은 이곳에서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11지부에는 이른 나이에 이능 발현을 마쳐 아예 이곳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에스퍼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했으니 말이다.

누가 보면 저들이 공간미아와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줄 알 것이다. 내일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케드릭은 어린놈들이 나이 타령하는 게 정말 고까웠다. 센터 내에는 나인보다 어린 각성자들이 수두룩했지만 에스퍼들은 그들과 나인을 결코 동일 선상에 놓지 않을 것이다.

[각성자는 시민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통 십 대 중반에 이능을 개화시키는 각성자들은 위와 같은 교육을 수도 없이 받으며 자랐다. 특별한 이능이 있는 만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수년 동안 그런 소리를 들으며 생각이 굳어지게 된 에스퍼들은 비각성자를 어려워하며 제법 감싸고 도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인은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공간미아다. 측은함 점수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 자식이 어디 신입 주제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봐.”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체드였다. 그는 착 가라앉아 낮은 톤의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인이 어리둥절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놈의 입가가 꿈틀거리는 걸 보니 놀리려는 게 뻔한데 그걸 단번에 눈치채지 못한 공간미아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내내 멍하던 나인의 얼굴에 다른 감정이 덧입혀지는 게 꽤 유쾌하게 느껴졌다. 케드릭도 그만 참지 못하고 다른 에스퍼들처럼 피식 웃었다.

공간미아는 의외로 붙임성도 있고 말도 밉지 않게 한다. 그에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한 명도 아니고 여러 에스퍼가 동시에 저렇게 말려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 부탁드립니다.”

케드릭은 제 부서로 돌아가며 검사실에 전화를 걸어 공간미아 나인 엘로윈의 형질 검사를 건의했다.

“별 건 아니고 지금껏 공간미아 상대로 형질 검사를 한 적은 없잖습니까. 혹시나 싶어서요. 앞으로 센터 내에서 지낼 거라던데 이런 거라도 공평해야죠.”

다음 날 저녁, 놀랍게도 나인은 각성자로서의 자질을 가진 것으로 판명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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