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게이트는 공간과 공간을 잇는 통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인의 차원과 우리 세계를 연결하는 문인 거죠.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서로 맞부딪치며 차원과 차원이 맞붙는 것을 형상화했다.
“통로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체체는 차원을 가로막는 ‘벽’이 약해지는 시기에 여행자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실은 그 차원 사이에 통로가 존재한다니. 그건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지가 궁금했다.
“저희 쪽에서 게이트 발생이 탐지되어 에스퍼가 투입되었습니다. 그가 안에 쓰러져 있던 당신을 데리고 나온 겁니다.”
“…….”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있었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눈을 떴을 때 각혈하던 사람이 하나 실려 가던 게 이제야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이상하게 그 남자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얼굴 인식도 잘 안 되는 데다 처음 보는 사람이 분명한데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꿈이 아니었나…?”
나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무 현실감이 없고 기억도 드문드문해, 내내 긴 꿈을 꿨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남자가 ‘통로’에서 자신을 구해 준 거라면 납득이 갔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병동에 입원 중입니다만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아직도요?”
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하루가 다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니, 감사함과 미안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나인은 조만간 사람들에게 물어 그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여기선 이런 일이 흔한가요?”
공간미아라고 불리는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닌 게 나인에게는 좀 특이하게 느껴졌다. 체체의 말에 따르면 그녀와 같은 초월자조차 차원을 함부로 넘나들 수 없다고 했다. 용께서도 천 년을 살며 딱 한 명을 봤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서는 공간미아가 이렇게나 많이 발견된 것일까?
체체의 말에 따르면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여행자’는 세 가지 부류에 한정되었다. 정령과 새, 그리고 일부 인간.
용의 입장에서 인간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초월자가 할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그래서 체체는 인류를 가리키며 가능성이 무한한 종족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늘 다른 용들에게서 전해 들은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고 그 덕에 나인도 원치 않게 역대 여행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외우다시피 해 버렸다.
체체가 자신이 차원을 이동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무척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천 년이 더 지나도록 자신이 차원 이동자와 친구를 먹은 적이 있다며 떵떵대겠지.
‘그건… 좀 꼴 보기 싫을지도.’
후일 그녀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은 사양이었다. 나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간혹 있는 일입니다. 일 년에 한두 명꼴로 나타나죠.”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군요.”
묘한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살면서 용을 제외한 누군가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일들이 여기서는 일 년 단위로 일어나고 있다. 차원 이동자라니….
“지금은 저 이외에 다른 여행… 아니, 공간미아는 없는 건가요?”
“예. 가장 최근은 아마 작년 가을 때쯤이었던가요? 그때는 태평양 지부에서 발견했는데….”
생각 없이 말을 이어 가던 중 누군가 헛기침을 하자 남자는 말을 끊었다. 나인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눈을 깜빡였다. 왜인지 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한 눈치였다.
“…아무튼 지금 남아 있는 공간미아는 없습니다. 다 돌아가고 당신뿐이에요.”
남자는 다른 주제를 꺼내며 이만 말을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나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작년은 뭔데요?” 하고 되묻자 하는 수 없이 뒷말을 아주 작게 이었다.
“그는 저희 지부로 옮겨지고 일주일 만에 자살했습니다.”
“…….”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현재 남은 공간미아가 자신뿐이라니. 나인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남자는 그의 눈치를 보다 중얼거렸다.
“그분은 발견 당시부터 좀 정신이 불안정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게이트에 휘말리셨던 분이었죠. 당신에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앞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할 겁니다. 그러니 나인 씨도 불편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나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저 말을 전부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낯선 사람들을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들이 제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고 해를 가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인은 현재 가진 게 거의 없고 혼자서는 이런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때문에 당분간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도 좋을 것 같았다.
“당신들은 왜 저를 돕는 거죠?”
나인이 물었다. 그는 내내 궁금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모여 있었다. 여긴 어디일까. 이들의 목적이 뭐지? 나를 도움으로써 이들이 얻는 이익은?
나인의 말에 남자가 안경을 검지로 치켜 올리며 말했다.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나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인명을 구조하는 일이 의무라니…. 그건 무척 거창하게 들렸다.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이라도 된다는 건가.
의아해하는 나인을 위해 사람들은 말 대신 자료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빠르다고 판단했다. 빔 프로젝터에서 빛이 쏘아져 흰 벽에 자료 화면을 띄웠다.
‘마법…….’
나인은 잠시 멈칫했다.
이 세계에도 마법은 있는 것 같았다. 벽에서 빛이 나고 생전 처음 보는 마도구들도 많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눈을 떴던 곳도 신기한 것들투성이였지. 물 온도를 조절하는 게 엉망이던 것만 빼면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어제도 손대는 것만으로 조명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 신기해 벽에 달린 스위치를 백 번 정도는 딸깍거렸던 것 같다.
새하얀 벽에 빛을 쏘는 것만으로 필요한 정보를 보여 주는 것에 넋이 나가 나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벽에 인쇄된 것처럼 반듯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간미아 대책 프로그램]
그렇게 쓰인 글자 아래에는 그보다 좀 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각성자 관리 센터]
그들은 나인을 위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어제는 1월의 첫째 날이자 나인이 게이트에서 떨어진 날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새해의 첫날을 각성자의 날이라고 부른다. 백여 년 전의 1월 1일, 아시아 대륙의 한 반도 국가에서 초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인류 최초의 각성자는 공기를 움직여 바람을 다루는 자였다.
“바람이요? 그게 정말 인간이 확실한가요? 초월자라거나, 아니면 정령사라거나….”
나인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믿기 어려웠다. 그는 세계 최초 각성자의 능력을 듣고 크게 놀랐다.
바람의 원소는 오로지 자연의 것이었다. 차라리 물체를 움직임으로써 바람을 일으킨다고 했다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 오로지 본인의 능력만으로 커다란 회오리바람까지 일으켰다는 기록까지 나와 있었다.
“정령사가 뭔진 모르겠지만…… 최초의 각성자가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말도 안 돼요.”
나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자연 원소는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나 까다로운 종류인데…. 정령사도 아니라면 정체를 숨긴 초월자가 아닐까?
나인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곳에도 용이나 용에 상응하는 존재가 있을지 모른다고. 초월자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집에 돌아갈 방법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이런 거 본 적 없어?”
그때였다.
나인의 맞은편에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여자가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나인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
나인이 숨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여자가 낄낄 웃으며 다시 앉으라고 손짓했다. 여자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던 화염은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보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나인뿐으로, 그를 제외한 모든 이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순간 귓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혼자만 흥분한 게 쑥스러웠던 나인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고 마구 쿵쿵거렸다.
그녀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그녀를 나지막하게 꾸짖었다.
“에스퍼님, 지금 장난칠 상황 아닙니다. 공간미아 좀 놀라게 하지 마세요.”
“왜? 웃기잖아요.”
여자가 입을 가리지도 않고 깔깔 웃었다. 나인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심호흡했다.
괜찮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져서 약간 놀란 것뿐이고. 그, 그럴 수도 있지……. 사람 몸에 불 좀 붙은 게 뭐가 대수… 긴 한데. 아무튼 저 사람이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쿵쿵대던 심장 소리도 시간이 지나니 어느덧 잦아들었다. 나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하며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여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