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쉽게 말하자면 그냥 마법이라는 뜻이에요.”
“대, 대단하시네요.”
케드릭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훗. 그 거짓 맞장구에 나인이 피식 웃었다. 제 칭찬은 아니었지만 친구 비슷한 사이의 초월자가 대단하단 말을 듣는 것은 나인에게도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곳에도 용이 있나요?”
나인의 물음에 케드릭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예? 뭐요?”
“용 말이에요. 초월자.”
“……?”
용… 전설 속 동물 그거?
케드릭은 눈을 굴려 나인의 눈치를 보았다. 나인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웃음기 없이 그저 말간 눈으로 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기분이 묘했다.
날 한심한 듯 바라보고 있는 건 착각이겠지…. 케드릭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꼭 멍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처음 보는 어린애에게서 자신을 빡대가리 취급하던 사촌 형의 환상이 겹쳐 보였다.
‘에이. 농담이겠지….’
용이 실존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이 남자가 동화 속에서 튀어나왔다면 몰라도…. 케드릭은 물리적으로 그것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물속도 아닌데 그런 육중한 덩치로 어떻게…. 차라리 이 남자가 망상병을 가지고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용은…… 실존하지 않지만 그게 뭔지는 압니다.”
케드릭은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가볍게 말을 받아치기로 마음먹었다. 경험상 이런 대화는 진지하게 받아치면 분위기만 더 이상해진다.
“게임이나 만화에 나오거든요.”
“……?”
“용에 의해 성에 납치 감금된 공주를 구하는 용사의 모험 이야기라든가.”
그 순간, 잠자코 말을 듣던 나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용이 나오는 작품의 제목을 줄줄이 읊는 케드릭의 말을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오해예요…. 용이 뭐 하러 인간을 납치하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 일은 서 대륙의 푸른 용이 공주의 부탁을 들어준 일이었어요.”
“…….”
‘그 일’이 뭔데? 당황한 케드릭이 하던 말을 멈추고 나인을 바라보았다. 나인은 침착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요상한 소리를 조곤조곤 쏟아 내기 시작했다.
“물론 모르면 그럴 수 있죠. 다들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 그 공주와 서 대륙의 용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어요. 혼기가 차자 벌 떼처럼 날아드는 구혼장 때문에 공주는 꽤 골머리를 앓았죠. 그녀는 타고난 학자 체질이었고 연애나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어?
“초상화 속의 반반한 남자들의 생김새는 별로 그녀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수준 떨어지고 머리는 텅 빈 남자들과 혼인해 인생을 허비할 바에야 아무도 없는 데서 연구나 하다 죽겠다고 용에게 부탁한 겁니다.”
어어?
케드릭은 동화의 뒷사정을 알게 된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크게 당황했다. 내내 무심한 말투를 고수하던 나인은 갑자기 푸른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케드릭을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마나 함축식을 개발해 냈어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네?”
“현존하는 모든 마법 수식은 모두 그분이 개발한 함축식에 의해 간략화됐어요. 현재 보편화된 마법진에도 그 함축식이 녹아들어 있다니까요. 아마 공주가 그때 남들 손에 떠밀려 원치 않던 결혼을 했었더라면 그녀의 대업적은 좀 더 늦춰졌을 거라고요.”
“…그, 그렇군요.”
나인이 눈을 반짝였다.
“모든 대륙에는 대현자 헬리스타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요. 뒷사정까지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분은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이거든요. 백 리겔짜리 화폐에도 초상이 새겨져 있죠.”
…도통 무슨 소리인지, 원. 케드릭은 그냥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뒤에서 나인이 구시렁거리는 소리는 그냥 흘려들었다.
그러니까 용이 악의가 있어 공주를 납치한 게 아니라고, 대다수의 용은 먼저 나서서 인간을 해치는 일이 드물다고. 용이 평면적인 악당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는 대부분 허구의 것이니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뭐래. 정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건가.’
케드릭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길이나 안내했다. 저 남자는 본인이 용도 아니면서 왜 만화 속 용의 입장을 대변하려 안간힘을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침착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심 분야 얘기가 나오니 봇물 터지듯 줄줄 얘기를 쏟아 내는 모습은 조금 놀라웠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어제 당신이 게이트에서 떨어졌잖아요. 공간미아 대책 회의가 열렸으니 거기로 안내 중입니다.”
“아, 그랬죠.”
생각이 없는 건지 태평한 건지 나인은 공간미아치고는 상당히 침착해 보였다. 아니, 좀 무던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납득이 빠르다 해야 하나…. 위기감이 전혀 안 느껴지는지 뭘 해도 그러려니 하는 태도가 신선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해 다행이었다. 지난번의 공간미아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흉기를 겨누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였다. 헛소리는 좀 잦아도 얌전한 공간미아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훨씬 나았으니까.
케드릭은 느릿느릿 뒤를 따라오는 남자를 돌아보며 그를 회의가 열리는 동으로 안내했다.
나인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일일이 놀라워했다. 사람을 감지한 센서 등이 알아서 번쩍 켜지자 위를 올려다보며 흠칫 튀어 올랐고, 8층의 회의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을 때에는 엔진 소리에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얼어붙었다.
공간미아들이 으레 겪는 문화 차이였다. 무척 놀랐으면서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하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에 긴장해 숨까지 참는 꼴까지 보였다.
‘많이 봐 줘야 이십 대 초중반쯤 되려나.’
다른 에스퍼들에 비해 각성이 무척 늦은 편이었던 케드릭은 스무 살 때의 본인을 떠올렸다. 무려 십 년도 넘었지만 기억은 어제의 것처럼 생생하다.
당시의 케드릭은 아직 에스퍼로 각성하기 전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나 타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당시에는 자신이 다 큰 성인 같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참 미숙하고 어렸구나 싶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나인의 위로 겹쳐 보며 쓸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됐네.’
이제 막 세상을 즐기기 시작할 젊은 시기에 낯선 곳에 떨어져 고생이 많겠구나 싶었다.
* * *
회의실에는 이미 공간미아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센터장, 위기 감지 대책 팀, 그리고 혹여나 하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사실은 그냥 한가했던― 에스퍼들까지. 급하게 열린 대책 회의임에도 나름 구색은 갖췄다.
나인은 그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전혀 주눅 들지도 않고 그를 위해 비워진 자리에 척척 걸어가 앉았다.
어제의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한 건지, 사람들은 통역 에스퍼의 존재를 필요 없게 하는 나인의 자연스러운 언어 구사에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나인은 오면서 케드릭에게 했던 말처럼 초월자의 권능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농담인 줄 알고 무시당했다. 그 탓인지 그는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나인 엘로윈이라고 합니다.”
그는 낭랑한 목소리로 누구도 시키지 않은 제 소개를 시작했다.
“여기서는 내가 있던 곳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동 대륙의 블란체 제국 출신으로 엘로윈 황가의 3황자입니다.”
나인은 부러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는 첫인상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만해 보이지는 않되 최대한 격식을 차린 것처럼 들리도록 말했다.
“…황자?”
누군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인이 신분을 밝히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이들을 보고 나인은 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편히 대해 주세요. 여기가 내 세계와 다른 차원이란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나인은 동맹국도 아닌 곳에서 황족 대접을 받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 덕인지 경직되어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인의 입꼬리가 뿌듯하게 올라갔지만 이들의 표정이 풀린 이유는 나인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뭐야. 멀쩡하잖아?’
그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공간미아가 어제 발견되었던 것치고는 정신 상태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고, 일부가 그러했듯 난동을 피울 기세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남자는 상황 판단이 무척 빨랐다. 낙천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나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나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원래 같았으면 이름이 아니라 황자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을 테지만 앞서 말했듯 나인은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방인 처지에 낯선 곳에 떨어져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냥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더 잦았던 터라 익숙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나인 씨. 이해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게이트 사고에 휘말리셨습니다.”
게이트 감지 팀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현 상황을 정의했다.
“게이트라고요?”
생소한 단어에 나인이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어제 책에서 본 단어기는 한데 그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