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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5)화 (5/63)

#5

물론 나인은 믿지 않았다. 지금은 몰라도 좀 더 어렸을 적의 나인은 말수도 적고 사회성도 없었다.

듣기론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발작을 하다 쓰러지고 잠도 혼자서는 못 자는 성가신 꼬맹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비가 내려도 대충 맞으며 앉아 있다 감기에 걸려 앓아누울 정도로 멍하고 무신경하기까지 했다.

물론 어렸을 때의 이야기라 기억도 안 날 만큼 너무 오래전이다. 지금의 그는 맹한 꼬마가 아니라 한 사람 몫을 해내는 똑 부러지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과거 얘기도 주변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뿐, 정확한 기억까지는 나지 않았다.

‘뭐, 그땐 어렸으니까.’

아무튼 진정한 이유는 오로지 체체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급히 통역 에스퍼를 데리고 왔을 때 나인은 이미 그들의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된 후였다.

“…뭡니까? 그새 말을 배운 건 아닐 테고.”

“말이라고 해 봐야 인사뿐이었잖아요? 들은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거 아닌가?”

“아닐걸. 방금 내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고대로 알아먹고 말해 주더라니까.”

“진짜예요. 분명 아까 전까지는 공간미아랑 말이 안 통했거든요?”

사람들은 갑자기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나인을 의아하게 보았다. 나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다물고 멀어지려는 정신을 다잡는 데 집중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말이 통하면 좋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기묘하다는 듯 힐긋대며 입맛만 다셨다. 그들은 여자 한 명만 남겨 두고 모두 방을 빠져나갔다.

“참 침착하시네요.”

여자가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겉으로라도 그래 보인다면야 다행이었다.

나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성격이었다. 실제로 느끼는 게 어떠하든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무결하게 보이고자 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으며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꾸며 낸 모습을 진짜 모습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나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어 둔다면 흠 잡힐 일이 현저히 적어진다.

나인은 낯선 사람에게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첫인상은 무척 중요하다.

심호흡까지 하며 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가 느끼는 위기감은 어마어마했다.

무려 차원 단위의 조난이라니.

“보통 공간미아들은 이런 일이 닥치면 상황 설명할 새도 없이 최소 사흘은 울거나 소리치기만 하시거든요. 진정시키는 데만 며칠이 걸렸죠.”

“…….”

나인은 눈앞에 놓인 차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식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다. 진정 효과가 있다며 내온 만큼 일부러 손도 대지 않았다. 괜한 허세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찻잔을 쥐었다가는 떨리는 손을 들키게 될 게 뻔했고 차는 반도 마시지 못하고 죄다 쏟게 될지도 모른다.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처음이 아닌 거구나.’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나인은 이 차원에 일흔일곱 번째로 떨어진 여행자였다. 체체에게 수도 없이 들어 다른 차원에 대한 개념을 얼추 알고 있는 자신마저도 당황스러운데 자신 이전에 있었다던 여행자들은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다행히 나인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떨어진 게 그가 처음이 아니었던 덕에 에스퍼들이 출동해 나인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체계가 존재했다. 덕분에 나인은 험한 일도 당하지 않고 잃어버린 물건도 없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

눈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든 나인은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소리를 못 들었다.

“피곤하시죠?”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를 시킨 것 같네요. 나머지는 내일 마저 할까요?”

여자는 작성 중이던 서류를 보란 듯이 덮었다. 그녀는 나인에 대해 측은함과 호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공간미아 처지가 다 그렇긴 하지만 나인은 그들 중에서도 특히 어린 편이었으니까.

그것도 이렇게 예쁘장한 미남이 게이트에서 나온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차분하고 나긋한 말투의 남자는 무려 본인을 일국의 황자로 소개했다. 현시대에 다소 생소한 단어에 놀란 것도 잠시였으나 그녀는 금세 납득했다. 남자의 이미지와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파도의 포말과 같이 흰색에 더 가까운 백금발과 바다처럼 푸른 벽안. 해사하고 맑은 분위기의 공간미아는 입고 있는 옷도 꼭 연극배우들이 입는 옷 같아 시대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의 모습이 그대로 튀어나온 듯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흐트러진 차림새로도 그는 충분히 우아하게 보였다.

그녀는 나인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충분한 휴식이란 것을 직감했다. 평온을 가장하고 있지만 지금 보니 그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나 싶었다.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공간미아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일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녀는 이후의 절차는 내일로 미뤄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그녀는 무해하게 웃으며 나인을 안심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괜찮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일단 오늘은 쉬시고 내일 다시 이야기할까요?”

“그냥 지금 얘기해도….”

“방이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따라오시죠.”

여자가 말을 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황족의 말을 끊는 자가 존재하다니 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성에서 산 기간보다 아카데미에서 지낸 기간이 훨씬 길었던 나인은 별생각 없었다. 그런 말을 할 정신도 없었고. 나인은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 곧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한참을 걸어야 했다. 다른 건물로 옮겨 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나인을 스쳐 가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나인은 그들을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주변 정보를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꼿꼿한 자세로 걷는 데 그저 열중한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들어가서 푹 쉬시고 내일 아침에 뵐게요.”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다 도착했다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여자는 방에 나인을 밀어 넣고는 책자와 함께 작은 알사탕을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피곤해….’

나인은 그제야 자신이 그새 많이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로가 삽시간에 몰려와 어깨가 묵직해진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낯선 세상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떨어진 기분이 묘했다.

‘잠깐….’

나인은 뒤늦게 위화감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고개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방이 너무 작았다. 창가에 작은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벽에 붙은 침대 옆으로는 통행만이 가능할 정도로 무척 좁은 공간만이 있었다. 침대가 아니라면 앉아 있을 수조차 없는 방이었다.

말도 안 된다. 이게 정말 손님방이 확실한가? 오면서 본 바로는 부리는 사람의 수도 그렇고 영지의 크기도 작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손님 대접이 영 부실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다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은 나인이 여태 손에 들려 있던 책으로 주의를 돌렸다.

<공간미아 대책 매뉴얼>

나인은 책을 펼쳐 내용을 훑어보았다. 상세한 삽화와 간단명료한 글로 구성된 책이었다. 나인은 글을 천천히 읽어 내리다 자신과 같이 차원 단위로 길을 잃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공간미아.

“체체는 여행자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공간미아라고 하는구나….”

아까 몇 번 들은 말이기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글을 읽어 보니 좀 더 다가오는 게 있었다.

“여행자와 미아.”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다르다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좀 더 생각해 보니 나인은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단어는 후자가 맞다 생각했다. 비자발적으로 이런 상황에 처한 제게 여행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아가 어울리지.

“없네.”

책을 훌훌 넘겨보던 나인은 실망스러운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책에는 어디에도 집에 돌아가는 법 따위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 책은 돌아갈 방법을 서술하기보다는 이곳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 매뉴얼인 모양이었다.

여기 떨어지는 사람이 모두 나인처럼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고려했는지 삽화가 글의 양보다 훨씬 더 많고 상세했다.

[밖에서 길을 잃었을 때에는 헤매지 말고 택시(노란색이며 꼭대기에는 캡이 달린 차량)를 찾으세요. 자택 주소를 몰라도 괜찮습니다. 공간미아 신분증 뒷면을 보여 주세요. 택시는 금전적 대가를 받고 당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운송수단입니다.]

그리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이해할 정도로 간단명료한 그림이 여러 장 그려져 있었다.

이건 처음 듣는 단어다. 이 희한하게 생긴 마차의 이름이 택시인가? 여기까지 올 때에도 비슷한 것에 탔었다. 마차보다 훨씬 덜컹거림이 덜한데도 어째서인지 내릴 때쯤에는 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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