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나라의 가이드 (4)화 (4/63)

#4

* * *

다행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현실이었다. 머릿속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자 눈앞이 선명했다. 나인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저건 뭐야. 시체?’

온몸이 새까만 안개로 뒤덮인 듯한 남자 한 명이 피 칠갑을 한 채로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미처 제대로 올려 두지 못하고 들것 아래로 축 늘어진 손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남자가 희미하게 잔기침을 할 때마다 허공에 피가 튀었다. 안개 농도를 보니 그는 조만간 죽을 사람이었다.

‘근데 저 사람, 어디서 봤던가?’

얼핏 본 남자의 인상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닌가….’

아직까지 머릿속이 온통 몽롱했다.

<이봐, 사람이 깨어났다! 빨리 담요 하나 더 가지고 와!>

<정신이 좀 드십니까?>

사람들은 뒤늦게 나인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인은 얼떨떨하게 입술만 달싹였다. 생전 처음 듣는 언어였다. 그는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 여럿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을 멍하니 흘려들으며 눈을 굴렸다.

‘여긴….’

도대체 여긴 어디지? 이곳은 그가 정신을 잃었던 골목길이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장소다. 낯선 언어, 처음 보는 복식의 옷을 걸친 사람들, 그리고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은….

‘……눈인가?’

나인은 손 아래서 뽀득거리는 눈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온몸이 시렸다. 찬 바닥에 놓인 손끝은 발갛게 부르터 감각이 무뎠다.

나인이 살던 동 대륙의 블란체 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였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만 해도 그리 춥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예년보다 봄이 일찍 찾아왔다. 꽃나무에는 파릇파릇한 새싹과 향기로운 꽃이 만개했고 날이 풀리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외투도 얇아졌다.

그런데 이 정도로 눈이 쌓여 있다니…. 적어도 하루 꼬박 눈이 내렸어야 가능할 일이다. 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설마 여기 북 대륙인가?’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인 북 대륙은 어딜 가도 설원이었다. 하지만 나인은 사람들의 얼굴을 힐긋거리다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북 대륙의 어느 왕국에서도 저런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주변에 즐비한 마도구들이었다. 처음 보는 것들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에 이상한 물건을 들고 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고, 빛도 난다.

건물의 외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현수막은 쉴 새 없이 화려하게 깜빡이며 내용을 바꿨다. 휘황찬란한 거리에 나인은 눈앞이 핑글 도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정령도 없어. 돌아간 건가?’

어디에서도 정령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체가 붙여 준 호신용 하급 정령은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었다. 정령은 나인이 잠을 잘 때조차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정령은 죽지 않는 존재지만 감당 불가능한 힘을 마주하면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나인이 정령사가 아닌 이상 다시 불러낼 수도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 꿈을 꾸나….’

나인은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처음 보는 마차에 밀어 넣을 때까지도 현실감이 없어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체체가 종종 이야기하곤 했던 일이 제게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나인, 여행자들은 다른 인간들과 영혼의 색이 다른 거 알고 있니?’

‘여행자가 뭔데요?’

‘여행자는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란다. 정령이나 새, 그리고 드물게는 인간도 있어. 나인, 난 그들을 여행자라고 부른단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사람이 차원을 넘는다니? 애초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웃기시네! 또 개뻥치시는 거죠.’

‘이런, 또 시작이군. 요 되바라진 꼬맹이 말버릇을 또 어떻게 고쳐 줘야 할까…. 나인, 너는 초월자를 존경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동 대륙의 위대한 용이 거짓말을 할 것 같니?’

‘하잖아요. 하잖아요!’

체체는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지만 나잇값을 못 하는 용이라 농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인은 체체에게 속아 무려 열두 살 때까지 이빨 요정이 실존하는 줄 알았다. 아기는 무화과나무에서 태어나는 줄로만 알고 열매가 영글 시기가 되면 하염없이 과수원의 나무 아래 누워 동생이 태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던 때도 있었다.

천 년 묵은 용은 열 살배기 꼬마가 그녀의 말에 홀랑 넘어가 속을 때마다 그걸 속냐며 배를 잡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심지어 다른 차원 이야기는 체체의 말 가운데서도 가장 현실성이 없었다. 그래서 또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이미 공간을 지배하고 있잖아요? 마력은 어디에나 퍼져 있고 인간은 마력을 다룸으로써 공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어요. 만일 체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교수님들이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안 해 주셨을 리가 없어요.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그런 건 못 하거든요.’

‘인간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그것들이 네게 그렇게 가르치던?’

‘왜요? 아니에요?’

체체는 “하!” 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전혀 아니란다. 세상 거만한 것들 같으니. 그건 내가 근 백 년 동안 들은 얘기 중에 제일 말도 안 되는 소리구나.’

체체는 좀 더 목소리를 낮추어 진지하게 속삭였다.

‘나인, 여행자는 실존해. 나는 실제로 여행자를 내 두 눈으로 본 적도 있단다.’

‘…….’

진짠가? 아니면 또 놀리는 건데 내가 눈치를 못 채는 거야?

용의 장난에 속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나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마법의 근원에 가까운 존재는 나인에게 종종 거짓말을 하지만 이번은 진짜일지도 몰랐다. 나인은 체체의 말에 또다시 귀가 팔랑거리고 말았다.

‘……정말이에요? 그 사람 진짜 대마법사예요?’

‘아니. 마법이라곤 쓸 줄도 모르던 평범한 인간이야. 본인은 제게 일어났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기억을 못 해요? 왜요?’

‘글쎄다. 좋지 않은 기억이라 스스로 기억에서 지웠을지도 모르고 그냥 이유 없이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겠구나. 그건 사고였으니까.’

‘사고라고요?’

‘그래, 사고.’

예고 없이 닥친 일이 사고가 아니라면 뭐겠니?

어린 시절의 대화 속, 웃음기 섞인 체체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다.

* * *

‘체체는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나인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럴 리 없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용께서는 늘 가볍게 사는 듯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면 모든 행동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놀리려고 드는 장난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캐물어 볼걸.

‘나는 설마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줄은 몰랐지!’

당연하지만 낯선 도시의 낯선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언어 체계 자체가 다른 듯했다. 사람들은 나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언어에 다소 곤란해했지만, 정작 말이 통하지 않는 장본인인 나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아 둔 공간 확장 주머니 속에서 용에게 직접 선물받은 반지를 찾아 남들 몰래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광물을 깎아 만든 장신구에 용의 마법을 불어 넣은 까만 반지는 그것의 가치와는 다르게 상당히 투박한 모양이었다. 표면을 장식하는 보석 하나 없이 밋밋했지만 손가락과 직접 맞닿는 안쪽 면에 상형 문자 같은 고대어가 각인되어 있었다.

용의 힘을 근원으로 한 마법이 순식간에 그를 생전 처음 접한 언어에 능통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지고 있었다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오래전에 받았던 거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 체체에게 받았다던 이 반지는 용언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차원적인 마법이 중첩으로 걸려 있는 보물이었다.

무려 용언이 불어 넣어진 마도구. 타 대륙의 언어부터 고대어까지 읽지 못하는 글이 하나도 없었다.

그 덕분에 도서관에서 고서를 빌려 볼 때 이 아티팩트가 톡톡히 도움이 되어 주고는 했다. 교수님들은 나인이 제출한 과제물을 보고 다른 학생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주제 선정과 방대한 자료 조사의 흔적에 감탄했다.

교수들조차 나인이 고대어를 읽을 줄 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도서관에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일반적으로는 존재 자체도 알려지지 않은 어마어마한 가치의 아티팩트라는 소리였다.

나인은 체체가 왜 제게만 수호 정령을 붙여 주고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주는 건지 평생을 궁금해했다.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어서?’

자의식 과잉 환자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동 대륙뿐만 아니라 황실의 수호룡이라고도 불리는 체체는 인간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나인을 특히나 더 아꼈다. 가지고 노는 맛이 난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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