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인은 오랜만에 아카데미에서 돌아와 모두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조금 당황했다. 피부는 온통 푸석하고 잠이 부족해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그들은 피곤한 얼굴로 나인에게 ‘네게는 목소리 안 들렸니?’ 하고 물었고 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그나마 학생이라고 좀 봐준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만 아카데미에 있어서 깜빡했거나. ……아무튼 체체는 자비로운 용이었다.
‘제가 다녀올까요?’
‘……그래 주겠니?’
말리는 이가 그 누구도 없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다들 눈 밑이 퀭했다.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오랜만에 황성에 돌아온 나인은 그렇게 해서 쉴 새도 없이 체체를 달래러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귀찮은 것과는 별개로 체체를 찾아가는 게 그저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는 길이 조금 험난할 뿐 막상 체체를 마주하면 즐겁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체체의 레어에는 유서 깊은 보물은 물론이고 웬만한 마법사는 구경도 할 수 없을 순수하고 강력한 마석 또한 존재했다. 보물 창고도 황실의 것 못지않게 거대하고 화려하다. 그녀는 용들이 으레 그러하듯 온갖 보물과 장신구를 긁어모으는 습성이 있었다. 반짝이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오늘은 뭘 주시려나….’
자신을 애완 인간 정도로 생각하는지 체체는 나인만 보면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음식을 먹였다. 그뿐만 아니라 귀하디귀한 아티팩트까지 흔한 장난감인 양 휙 던져 주고는 했다. 어렸을 적의 나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옛 고성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아티팩트들로 구슬치기를 했다면 말은 다 한 것이었다.
‘그렇게 심심해 죽겠다면 그냥 마을로 내려와서 사시지.’
그렇다면 더 자주 찾아뵐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체체는 위대한 초월자가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섞여 사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질색했다. 자고로 용은 높고 험난한 데 살아야 모양새가 난다고. 허세 빼면 시체인 용다웠다.
체체의 레어까지는 근처 지방에 도착한 후에도 반나절을 꼬박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가는 길도 험했고 이동 마법은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 감히 그녀의 영역 내를 좌표로 설정해 마법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이 대륙 안에는 없었으니까.
먼 과거의 인간들은 용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때는 전쟁이 만연하던 시기였다. 험난한 바위산이나 해저에 사는 데다 강력한 마법까지 사용하는 생물은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존재였다. 왕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용의 레어에 군사를 보내고 초월자인 그들을 살해하려는 무용한 시도를 반복했다. 체체가 검 든 놈들이라면 질색을 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 탓에 호위 기사 하나 달고 나오지 않은 게 나인이 그날 저지른 실수 중 하나였다.
홀로 인적 드문 골목을 지나던 길이었다. 까만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기어와 나인의 발치에 닿았다.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눈치챌 겨를도 없이 발목이 그림자에 의해 붙잡혔다.
“……?”
그는 깜짝 놀라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랗게 뚫린 새까만 구멍은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나인의 팔이 허공을 크게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몸이 기울어졌다.
‘아.’
나인은 황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몸이었다. 다른 황족들과는 다르게 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마나를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렇기에 이런 일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나인을 황가의 돌연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순식간에 발밑이 꺼졌다. 참담하게도 나인은 추락하면서도 이 구멍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하필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길이라 그가 사라지는 광경은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다.
어둠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나인은 정신을 놓았다.
* * *
몇 번이고 의식이 돌아왔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뜰 때마다 풍경이 뒤바뀐 듯한 착각이 든다. 칠흑처럼 새까만 공간처럼 보일 때도 있었고 저 멀리서 희미한 빛무리가 보이는 듯하다 까무룩 잠에 들기도 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듯이 온종일 멍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모든 공기가 자신을 꽉 짓누르는 듯했다. 사물 분간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로 나인은 제 몸이, 그리고 이 장소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일났네.’
안간힘을 써 봐도 움직여지지 않는 상태에, 나인은 이 상황을 혼자 파헤쳐 나가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기감의 끝에는 허탈함만 있었다.
‘이러다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자꾸만 둔감해지는 감각만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나인은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몽혼약이라도 들이마신 사람처럼 자꾸만 멍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자신을 툭 건드리는 느낌과 함께 나인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본 세상은 흐린 날 고인 비 웅덩이에 비친 풍경처럼 온통 뿌옇다. 그리고 그 풍경 한가운데, 회색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그것은 최초의 소음이었다.
‘누구지?’
나인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림자. 안개. 그런 단어들에 비유할 만큼 흐릿한 실루엣으로 나타난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무채색투성이다.
나인은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다시피 해 다급하게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겨우 손끝을 움찔댄 게 전부였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곁에 앉았다. 거친 촉감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뺨을 스쳤다. 간지러운 감촉에 나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턱선을 훑고 내려온 손가락이 마침내 목덜미에 닿았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인의 목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 순간, 나인은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다시피 해 다급하게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남자의 소매를 덥석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는 겨우 그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소매를 세게 잡아당긴다거나 무언가를 손짓으로 표현하기엔 힘이 없었다.
“…….”
살려 주세요. 나인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목덜미에 머무르던 남자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을 감싸던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피부에 엉겨 붙던 체온이 사라지고 그 자리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나인은 남자가 이대로 떠나려는 건가 싶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은 이미 버석하게 말라 소리를 내뱉을 수 없는 상태였다.
다행히 남자는 나인을 버리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쓰러져 있던 나인의 몸통 아래로 제 손을 밀어 넣고는 나인을 단번에 일으켜 앉혔다. 겨우 쥐어짜 냈던 힘이 풀려 그의 소매를 움켜쥐었던 손도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남자는 나인의 목뒤를 받쳐 안았다. 그리고 온기는 무방비한 입술 사이를 단숨에 파고들었다. 미지근한 물이 흘러들어 와 말라붙은 목을 축였다. 나인은 정신없이 조금씩 흘러들어 오는 물을 받아 마셨다. 조금이나마 살 것 같았다. 온기는 몇 번이고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맞붙기를 반복했다.
입가에, 뺨에, 그리고 다시 입술에. 새가 쪼는 것같이 무척 가벼운 버드 키스였다. 나인의 눈가에 고인 눈물마저도 남자는 사막의 물처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핥아 먹었다. 당연하다는 듯 망설임 없는 행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안도감. 살았다는 생각에 온 정신이 팔린 나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조차 그때는 들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온기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나인은 뒤늦게 안개 속에 감춰져 있던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
검은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눈은 아름다웠다. 깊이감 있는 은빛 홍채는 묘하게 일렁거려 눈동자 속에 은하수를 심어 놓은 것 같았다.
긴 속눈썹과 그 아래 감춰진 은안, 사납고 날카로운 눈매, 짙은 눈썹…. 따로 떼 놓고 보면 분명히 보이는데, 시선을 옮길 때마다 묘하게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전체적인 얼굴의 형상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이거 혹시 꿈인가?
나인의 생각이 맞는다는 듯 풍경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다. 흐린 풍경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세계가 꿈틀댄다. 지면과 하늘이 소용돌이치듯 뒤섞인다. 그 짧은 사이 나인은 또 한 번 절망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가는 길이 멀어. 좀 자둬.>
뭐라는 거야?
그림자를 닮은 남자의 손바닥이 나인의 눈 위를 뒤덮었다. 시야가 가려지기 무섭게 정신이 몽롱하다. 꼭… 마법 같았다.
나인의 눈꺼풀은 몇 번 끔뻑이다 이내 완전히 내려앉았다. 가느다란 숨이 빠져나가며 그의 고개가 푹 꺾였다. 축 늘어진 몸이 들어 올려져 어딘가에 걸쳐지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인은 눈을 감았다.
또다시 의식의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