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공간미아
사람에게는 육감이라는 게 있다고들 한다. 그것은 때로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고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기도 한다. 혹자는 이를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자님, 지금 출발하십니까?”
“응.”
“……그렇게 입고요?”
“왜? 별로야?”
나인은 고개를 숙여 제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별로 이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나인의 중얼거림에 그레이스는 그를 빤히 보다가 옷장을 열어 외투 한 벌을 꺼냈다.
“이 날씨에 이렇게만 입고 나가시면 얼어 죽습니다.”
“아….”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날이 덜 풀려서 여전히 추워요.”
그렇게 말하며 그레이스가 나인의 어깨에 흰 외투를 걸쳐 주었다. 나인이 그녀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고마워, 유모.”
“그리고 이렇게 급하게 출발하실 필요 없습니다.”
“음…… 너무 급한가?”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적어도 하루는 푹 쉬다 내일 출발하시지 그러십니까. 어차피 급한 일도 아니신데요.”
그런가. 나인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빨리 가 봐야지. 체체 때문에 다들 얼굴이 너무 상했던걸.”
“…….”
그레이스는 나인이 외투에 주섬주섬 팔을 꿰어 입는 것을 지켜보다 한숨을 내쉬며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카데미에서 이제 막 돌아온 나인을 이렇게 금방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올해로 갓 스무 살이 된 나인은 바람직하게 쑥쑥 자라 이제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외형을 갖췄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여전히 뺨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녀의 아기 황자님일 뿐이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매일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삐약거리기 바빴던 울보 꼬맹이의 성장은 유독 애틋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여전히 나인을 보면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묘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차비는 챙기셨습니까?”
“응.”
“짐은요.”
“밖에 있어. 아직 짐 안 풀어서 그대로 들고 가면 돼.”
“……여태 짐도 안 푸셨다고요?”
그럼 처음부터 떠날 생각이셨던 거잖아요. 그레이스가 서운해하는 어조로 투덜거렸다. 나인은 그녀에게 민망한 듯 웃어 보이며 “미안해.” 하고 대답했다.
제 아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애틋한 마음이 들어도 되는 걸까. 그래, 언제까지나 나인을 어린아이 취급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나인을 배웅했다.
“가시는 길에 마차 조심하세요.”
“응.”
“한눈팔다 넘어지지 마시고 발 앞에 뭐가 있는지 똑바로 보고 걸으시고요. 길에서 신기한 재료 판다고 구경하다가 괜히 딴 데로 새지 마세요. 길에서 파는 건 어차피 약재상에 다 있는 겁니다. 나중에 봐도 늦지 않아요.”
“응….”
“기차가 연착되면 그냥 기다리시고요. 또 지난번처럼 마차 타고 간다고 서두르시다가 다리 부러진 채로 돌아오지 마시고 제발 무탈하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제발요.”
“…….”
“금방 다녀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아, 알았다고….”
수도 없는 염려의 말에 나인은 민망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그럼에도 얼굴에서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아직까지 걱정을 듣는 게 민망할 정도로 나인은 이제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낼 정도로 똑 부러진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아카데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우등생으로 평가받는데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은 나인을 덜 자란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일이 잦았다.
그의 유모인 그레이스도 그런 주변인들 중 하나였다. 그녀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인을 과하게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인은 본인의 관심 분야가 나오면 무엇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것에만 몰두해 주변 상황을 전혀 살피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사고에 휘말려 다치거나 다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 보는 눈은 또 어떻고? 나인의 주변에는 유독 이상한 놈들이 꼬이는 일이 잦았다. 뒷골목 불량배처럼 건들거리는 차림새의 친구들을 잔뜩 사귀어 놓고 그 괴수 같은 것들 사이에서 혼자 맹하게 웃고 있던 나인을 생각하니 그레이스는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재들에게는 2% 부족한 면이 있다는데 그레이스는 신께서 나인에게 공부 머리와 집중력을 준 대신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존 본능을 죄다 빼앗아 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그런 덜떨어진 놈들만 족족 골라 사교 활동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호위라도 하나 데리고 가시면 안 되나요?”
아무래도 혼자 보내는 건 불안하다. 그레이스의 제안에 나인은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저었다.
“안 돼. 용께서 싫어하셔.”
“하아…. 도대체 용이 뭐라고.”
“그런 말 다른 데서 하면 큰일 나. 체체가 들으면 화낸다?”
“예, 예. 그러시겠죠.”
그레이스는 나인의 말을 흘려들었다. 어차피 그 용은 관심을 둔 인간들이 아니라면 제 욕을 하든 찬양을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것보다 유모, 어깨 덧나기 전에 얼른 치료부터 받아 봐.”
“예?”
“또 삐끗했지? 무거운 거라도 들었어?”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레이스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요 며칠 사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인은 그저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혹시나 해서. 유모는 몸이 아파도 덧나기 전까지 참으니까. 그러다 금방 나을 걸 한 달씩 끌고 가는 게 취미잖아?”
“신기할 정도로 황자님은 매번 그걸 귀신같이 알아차리시고요.”
“됐어. 아픈 거 참지 말고 오늘 꼭 진찰받아. 알겠지? 다녀와서 물어볼 거야.”
“내가 점쟁이를 키웠지, 점쟁이를….”
그레이스는 매번 귀신같이 제 상태를 알아차리는 나인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나인에게도 나름의 비밀은 있었다. 어려서부터 사람의 몸이 온전한 상태에서 벗어나면 그 부위에 까만 점이나 안개 같은 게 덧씌워진 듯 보이는 것이다.
이것 탓에 나인은 한때 자신도 마법사인 줄 알았지만 마법사들이 이야기하기를 세상에 그런 마법은 아직 없단다. 그들은 나인의 말을 어린아이의 상상력 정도로 생각하며 웃고는 했다.
그래서 나인은 그냥 본인만의 재능이자 잔재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능력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실제로 병원에 의료 실습을 나갔을 때에도 많이 도움이 되기도 했고….
“황자님, 정말 몸조심하셔야 해요.”
“아, 알았다니까. 몇 번을 얘기해?”
“그만큼 매번 다쳐 오시잖습니까.”
“이젠 아니야. 내가 어린애야?”
나인이 투덜거렸다. 애죠, 그럼…. 그레이스가 입 안으로만 하고 싶던 말을 중얼댔다.
“나 다녀올게!”
나인은 황성을 등진 채 혼자서 길을 나섰다. 씩씩한 발걸음은 조금 들떠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를 배웅하던 그레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목소리를 낮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제 꿈자리가 이상했단 말입니다….”
그녀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오늘따라 정말 이유 없이 기분이 찜찜했다. 이런 날에는 꼭 무슨 사건이 터지고는 한다. 차라리 나인이 애라면 강제로 붙들어 두고 나가지 못하게라도 하지, 지금의 나인은 그레이스가 억지로 막을 수조차 없는 나이다.
그런 그레이스의 걱정이 무색하게, 우습게도 나인은 불길한 예감은커녕 그날따라 유독 날씨가 좋아 기분이 무척 들떴다. 기분 좋은 바람이 따스한 햇살을 실어 와 뺨을 간질였다. 하늘은 푸르렀고 정원에 만개한 꽃나무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완연한 봄이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나인이 용을 보러 가기로 정한 날이었다.
용의 진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 대륙의 수호룡은 인간들이 부를 이름을 ‘체체’라고 스스로 정했다. 각 대륙을 수호하는 용들은 대부분 전쟁의 시대에 잠들어 현 시대에 깨어 있는 유일한 용은 그녀뿐이었다.
살아온 세월이 세월인 만큼 대륙의 용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했다. 그들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도 했으며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숨 쉬기도 했다. 때로는 악역, 때로는 선역. 용들은 인간들이 정한 기준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시는 거야.’
나인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적한 거리를 거닐었다. 용은 마법의 근원이자 살아 있는 역사라고도 불리는 생물이지만 그렇게 위대한 존재치고는 너무 귀찮고 성가신 게 사실이었으니까.
동 대륙의 수호자는 가끔, 아니 종종 인간들의 머릿속에 전음을 보내어 그들이 놀라는 것을 즐기는 별종이었다.
―초월자를 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권태라고 하지. 나는 동 대륙의 수호룡이자 세계의 초월자로서 진실되게 이르노니 너희 용살 가문 엘로윈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
구구절절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심심해 죽겠단 소리였다.
체체는 나인의 기억이 시작되던 때부터 예언 놀이에 미쳐 있었다. 그녀는 전음을 사용해 황실 사람들에게 멋대로 예언 같은 말을 전했다. 불시에 커다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면 놀라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황제는 식사 도중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포도주를 코로 뿜었고 황태자인 첫째 형님은 정무를 보는 도중 크게 놀라 욕까지 내뱉었다고 한다. 밤낮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탓에 다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