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어이, 대마법사. 면회다.”
“…….”
아, 나 대마법사 아니라고…. 나인은 비꼬는 소리를 하는 경찰에게 함부로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하고 억울함에 뺨만 씰룩거렸다.
오랜만에 나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유치장 안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를 보고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흙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번들거리는 검은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정한 발소리는 나인의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늘 편한 사복이나 훈련복만 대충 걸치고 다니던 평소 모습과 달리, 오늘의 남자는 제법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남자가 셔츠 단추를 제대로 잠그고 있는 옷차림을 처음 봐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몰랐고.
그 와중에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회색 셔츠의 단추는 위에서부터 두어 개가 풀려 있었다. 속살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걸 보니 안에 뭘 받쳐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이 날씨에 셔츠 한 장뿐이라니, 춥지도 않나.’
별생각 없이 멍하게 남자를 훑어보는 나인에, 남자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그와 눈을 맞췄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눈을 접으며 상냥하게 웃는다.
“오랜만이네요.”
“아, 넵….”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태연하게 안부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런 장소에서 남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인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나인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인….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사람들한테 불법 최음제를 팔면 어떡해요.”
“……?”
최음제라니? 불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양심적인 포션 메이커 나인은 억울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그냥 기력 회복제…!”
예고 없이 불쑥 다가온 손이 나인의 턱을 슥 들어 올렸다. 남자의 손아귀 안의 뺨이 눌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나인이 숨을 집어삼켰다. 마음 놓고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다른 기력이 회복이 된다니까요? 당신이 말한 것과는 효과가 영 딴판이라고요….”
“서, 설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 발생 시에는 100% 환불해 드려요. 전 양심적인 가격에 당일 만든 약만 판다고요. 제가 알려 드린 방법대로만 복용하면 성별 나이 관계없이 결전의 그날, 24시간 내내 최상의 컨디션으로 집중력과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
나인이 열심히 말하던 도중,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픽 웃었다. ……설마 비웃은 건가? 당황해서 횡설수설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어놓던 나인은 말을 멈추고 눈을 끔뻑였다.
남자의 손가락이 나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당신, 지금 되게 인터넷으로 약 파는 사기꾼같이 말하고 있는 거 알아요?”
“…….”
지금 날 보고 사기꾼이라고 한 거야?
그제야 나인은 남자가 딱히 용건도 없으면서 경찰서까지 납신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런 꼴이 된 자신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나인의 표정이 굳었다.
“남들이 나인이 만든 약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기력 회복제요.”
“‘불끈강장제’라고 불러요.”
“누가 그럽니까? 난 그딴 이름 붙인 적 없거든요!”
나인이 발끈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경찰들이 그만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곳곳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나인의 귓등이 붉게 달아올랐다. 경찰들은 남자의 편에 서서 나인을 마음껏 놀려 댔다.
“대체 뭘 어떻게 자–알 만들었길래 다들 불끈불끈하고 이 난리랍니까?”
“마법이란다~.”
“위대한 대마법사 되신답니다.”
그들은 나인이 진지한 얼굴로 했던 말을 인용해가며 그를 농락했다. 꾹 다물린 나인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들 신나있는 와중에 무척 심각한 얼굴로 유치장 안에서 철창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나인뿐이었다.
“나인.”
남자는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가장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얼핏 보면 나인을 걱정해 주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욕구 불만이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요.”
“…….”
“내가 이 한 몸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줬을지도 모르는데요….”
남자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농담을 하며 금방이라도 셔츠 단추를 다 끄를 것처럼 쇄골 아래로 손을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경찰관들이 낄낄 웃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서 내에 웃음꽃이 폈다. 이들의 모욕을 참다못한 나인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나인은 당당했다. 맹세컨대, 그는 마약이니 최음제니 하는 불법 약물을 만든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끌려온 것도 어이없는데….
“나인.”
“아시잖아요, 저는 진짜…!”
“그래서 그새 갈아탈 사람은 찾았나요?”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역시나 그에게는 용건이 달리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나인의 눈동자에, 남자가 목을 울려 작게 웃었다.
“없었죠?”
“…….”
“내가 그랬잖아요…. 당신에겐 지금 나밖에 없다고.”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소곤거렸다.
“지금도 봐요, 나인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은 나뿐이잖아요?”
“…….”
“도와줄까요?”
달콤한 목소리가 나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나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힐끔대는 시선 탓에 얼굴이 따갑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남자는 상당한 유명인이었다. 이름만 대면 ‘아, 그… 그 에스퍼?’ 하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지도 있는 에스퍼가 극진히 챙기고 대우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 덕인지 죄목만 들어서는 무척 심각할 사안인데도 경찰들은 나인을 그렇게 유해한 범죄자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도시락과 새 옷가지, 난로에 침구 세트까지 들고 서를 바삐 드나드는 남자를 보고 “얼씨구, 호텔이 따로 없군. 휴가 왔구만.”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사실 나인도 그가 왜 제게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제게 원하는 게 분명히 있었다. 그건 자신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성스레 굴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나인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인은 남자와 그다지 깊게 얽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의 생각은 나인과는 정확히 정반대인 것 같았지만….
“듣던 것만큼 무시무시한 에스퍼는 아니었구만.”
중년의 경찰관은 애쉬가 나간 문을 힐긋대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런 사람까지 극진히 챙기다니.”
“그러니까요. 다시 봤다니까요.”
마법 운운하며 결백을 주장하던 나인을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던 경찰들은, 그가 애쉬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으며 애쉬가 잘 부탁한다며 아쉬운 소리까지 할 정도로 나인을 챙기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나인에게 매우 친절해졌다. 물론 마법이니 뭐니 하는 말을 정신나간 소리 취급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법사 씨, 공간미아였구만?”
게다가 그들은 이 일에 얽힌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나인이 ‘공간미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부터 태도가 한결 바뀌어 더욱 흥미로워했다.
공간미아.
다른 말로는 차원 이동자.
“그런데 당신, 벌금 낼 돈은 있습니까?”
“…….”
누군가의 물음에 나인은 괜히 서러워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꾹 다문 입술을 움찔거리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젓자 경찰들이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애쉬한테 내 달라고 하쇼. 둘이 친한 것 같던데.”
“그래, 그러면 되겠네!”
“아까 보니까 마법사 씨가 부탁하면 기꺼이 내 줄 것 같더구만.”
“도와달라고 해요. 그거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나 어렵나?”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멋대로 쑥덕거렸다. 나인은 그 말에도 아무 말 못 하고 눈살만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그의 복잡한 마음을 알 리 없었던 경찰들은 남자의 재정 상태에 대한 말을 떠들어 대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남자를 아주 좋게 본 것 같았다. 외모 칭찬에, 능력 찬양에, 공간미아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그의 감춰진 인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아주 별의별 개 잡소리까지 다 나오는 와중 나인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탄식하며 꽉 쥔 주먹으로 허벅지 위를 쿡쿡 내리찍었다.
‘나더러 지금 아쉬운 소리를 하라고?’
나인은 심각한 얼굴로 벽에 고개를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줄까요?’ 하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나인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남자의 목소리를 잊어보려고 노력했다. 나인이 도와달라는 한마디만 한다면 그 남자는 나서서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남자는 나인에게 늘 이상하리만치 상냥했고 나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게 상냥한 것과 이번 일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인에게는 심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와 달라 할 수가 없다고!’
당연하잖아.
지금 날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한 것이 그 남자일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