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7 (완결) =========================
(연참입니다)
포털사이트 연예 기사부터 봤다. 오러 볼 리그의 승부조작 소식이나 전 아이돌 출신 나이트의 뉴스나 하여튼 오늘도 다사다난한 와중에 우리 얘기도 한 구석 차지하고 있다.
“전속계약 뉴스가 오늘 떴더군. 봤어?”
“응, 봤어요. 전 엔돌핀 멤버들 전원 새 소속사로 둥지 튼다고.”
“그룹 이름은 언제 정할 거야?”
“모르겠어요. 문이 형이 자꾸 러브 앤 피스 같은 거나 주장하고 있어서 큰일이에요. 믿었던 야단이도 흑혈단이니 흑염룡이니 하고 있고.”
보통 큰일이 아닌데 권수한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다음으로 팬사이트에 들어갔다. 팬카페의 편지글도 꼼꼼하게 하나 하나 읽었고, 라더기네 홈에 올라온 글도 정독했다.
라더기네 홈은 며칠 전에 개편하더니 회원제가 되었고 등업제도 생겼다. 아무나 글 남길 수 있는 2등급, 비밀글을 쓰고 열람할 수 있는 1등급 두 가지다. 근데 이 1등급 등업 조건이 회원가입 후 3개월이 지나야하고 글은 100개, 댓글은 300개를 써야한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이다. 나는 포기했지만 권수한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권수한 아이디로 비밀글 다 읽어줄 테다.
[이라는 지금 뭐할까?]
난 눈에 띄는 새 글에 들어갔다.
지금 점심 먹고,, 꾸벅꾸벅 졸면서 일햐는 즁
우리 이라 사진 보면서 잠깨고이따ㅋㅋ
애기는 지금 뭐할까? 애기도 밥 먹었겠지?(만약 점심 안 먹었으면.. 권수한쌤 우리 애기 밥먹이고 라덕질해요!!)
오늘 전속계약 기사도 떴으니까 컴백 회의 중이려나??
얼른 보고싶다 우리 이라
누나 열시미 돈벌테니까 컴백길만 걸어~~~~
요즘 팬들 올리는 글은 하나같이 기승전컴백이다. 진짜 귀여워.
아, 하지만 난 팬들의 실체를 안다. 나 정신 잃었던 시간에 올라온 글들 정주행하면서 다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얼마나 살 떨리게 욕을 하던지, 심지어는 킬러 고용하자는 글도 있었다. 신동우는 무기징역이라서 다행이지 나왔으면 우리 팬들이 고용한 킬러한테 죽었을 것이다.
우리 팬들이 고생이 참 많았다. 이제는 내 팬들 꽃길만 걷게 해줘야지. 마음 아파하지 않고 웃음과 즐거움으로만 가득하게.
“흠, 사과도 못 먹을 만큼 배부르게 먹였는데.”
권수한은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우리 팬들이 내가 형한테 의지하는 거 알아서 자기들도 형한테 의지하네요. 귀엽져.”
“뭐, 제법 이라해.”
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했다가 장난기어린 눈가를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는 수하니형도 참 저 같고 그러네요.”
후후. 권수한 이럴 때마다 진짜 귀여워.
“형, 같이 찍어요. SNS에 올릴래.”
“그래.”
권수한은 내가 투샷 찍자 할 때 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는 권수한의 품 안에 쏙 들어갔고 권수한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고, 한쪽 팔은 멀찍이 뻗어 셀카를 찰칵 찍었다. 그리고 찰칵. 또 찰칵. 찰칵.
권수한은 변함이 없지만 난 막 표정이랑 자세 요리저리 바꾸면서 찍었다. 4장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 필터를 먹이고 SNS에 첨부했다.
@LEERA_ENDORPHIN
[안뇽? 전 밥 든든히 먹고 수한쌤이랑 같이 팬페이지 염탐 중. 선물 투샷이에요><
(사진)]
바로 반응이 올라왔다.
┗꺅
┗이라다
┗애기!
┗수한이라!!
반응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몇 개 보다 포기했다. 왠지 나 혼자 찍을 때보다 권수한이랑 같이 찍을 때 반응이 더 뜨거운 것 같은데 착각일까?
라더기네 홈에도 내 SNS 업뎃 소식이 올라왔다.
이라 SNS 올라왔오!!!!!!
(사진)
또 수한쌤이랑 셀카야ㅋㅋ
둘이 진짜 무슨 사이지?
┗우엥 우리 이라 연애하니ㅠㅠ?
┗권수한 리얼 성덕ㅋㅋ큐ㅠㅜ
┗이라 왠지 밑에 라더기 글 보고 올린 것 같지 않아? 지금 뭐하고 있을까 이거
┗┗에이 설마 ㅋㅋㅋㅋ
┗솔직히 말해 수한쌤이랑 무슨 사이야!?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애인 생기면 우리 팬들 울 텐데..
┗수한이라...♡
┗수한이라존좋ㅠㅠㅠㅠㅠㅠㅠㅠ
┗언제 공표하나요^0^???
반응 보면 오히려 풍악을 울릴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12시간씩 자고 일어나면 권수한이 해주는 밥을 먹고, 권수한 품에 안겨 인터넷이나 하면서 딩가딩가 시간을 보내는 와중 컴백 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혔다.
팀명과 팬덤명(우리 팬들한테도 이름이 생긴다!)은 공개모집하기로 하고 우선은 컴백 날짜부터 잡아버렸다. 멤버들도, 팬들도, 나도 너무 너무 앨범을 내고 싶어서였다.
새 회사에서 내준 숙소는 저번 숙소 아파트 옆동이었다. 권수한은 오러 치유를 근거로 숙소 생활을 반대했지만, 내가 이번 컴백을 재데뷔 수준으로 생각하는 걸 알고서 결국 허락해줬다.
본격적으로 합숙하기 전 권수한과의 마지막 밤, 앨범 컨셉 회의를 마치고 집에 가자 권수한이 와인에 치즈카나페를 준비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어보였다. 나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은은한 조명 밑에서 촉촉해진 눈으로 그윽하게 시선을 맞추는 것까지는 좋았다. 내가 피곤했던 건지 술이 약해진 건지 권수한이 와인을 너무 강한 걸 가져왔던 건지..
헤롱헤롱해진 건 기억나는데 눈을 뜨니까 다음날이었다.
“.......”
입가의 침을 슥 닦으며 눈을 깜박이다가 스치는 어제의 기억에 베개를 팡팡 내리쳤다. 억울해!
벌컥.
5초도 안 돼서 권수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빛이 무시무시한데.. 눈 밑이 퀭한 것 같기도 하고.. 손에는 꿀물로 추정되는 액체가 들려있다.
“아주 빨리도 일어났군.”
“...꾸우우울..”
목이 말라서 그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얼른 꿀물 줘여.
“먼저 물마시고, 그 다음 꿀물 마셔.”
물은 늘 있는 그 자리, 협탁 위에 있었다. 찬물을 들이키자 정신이 좀 들었다.
모처럼 분위기 잡아놨더니 쿨쿨 쳐자는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날 압박하던 권수한은 내가 꿀물을 비우자마자 입을 열었다.
“1시에 들어가기로 한 녀석에 1시에 일어나고 아주 잘하는 짓이군. 너 숙소 내일 들어가.”
“깨우지 그랬어요...”
“어떻게 깨워. 잘 자고 있는 애를.”
“......”
권수한의 눈빛이 잠깐 씁쓸해졌다.
내가 잠이 많아진 건 정신 조작의 후유증 때문이다. 권수한의 품 안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나면 푸근한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는 한다. 그러면 지그시 나를 지켜보고 있던 권수한이 “잘 잤어?” 다정하게 인사하며 물 컵을 건넨다. 요즘 나의 아침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권수한은 안쓰러워하는 것 같지만 나는 지난날의 불면증을 보상받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합숙하고 연습 시작하고 나면 어떻게 버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의사쌤 말로는 컴백 전에는 많이 나아진다니까 뭐. 손상된 정신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치유될 거라고 들었다. 그래서 큰 걱정은 않는데, 그건 내 얘기고 권수한 입장에서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걱정이 되나 보다.
아점을 먹고 멤버들 단톡에 [오늘 못 갈 것 같아ㅠㅠ]라고 보냈다. 다들 괜찮으니까 내일 와도 된다고 말해줬다. 짐 정리 같이 해야 하는데..
권수한이 잠깐 환자와 만나러 간 사이(30분이면 온다고 했다) 냉장고에서 닥치는 대로 식재료를 꺼냈다. 어제 카나페 같은 안주를 만들어야겠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링크를 타고 들어가다가 30분 만에 만드는 노오븐 베이킹 게시물을 발견했다.
박력분? 이게 뭐야. 대충 밀가루면 되겠지? 초콜릿하고.. 계란 2개 밖에 없는데, 그냥 2개만 넣자. 치즈도 처음 보는 종류가 적혀있었지만 같은 치즈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노란색 사각 치즈를 넣었다. 사과랑 딸기 같은 과일들도 열심히 손질했다.
뭔가 잘 되어가는 것 같았는데 불붙인 프라이팬에 호일을 깔고 반죽을 올린 지 얼마 안 돼서 갑자기 화르륵 타올랐다.
깜짝 놀라서 얼른 싱크대에서 물을 받아 뿌렸지만 죽기는커녕 더 커지는 것이다. 이러다 화재경보기가 울리게 생겼다.
어쩔 줄 모르는 내 귀로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삐리릭, 탁.
문이 열리고 권수한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황망한 표정을 짓던 권수한은 급히 다가와서 내 팔을 붙잡고 침실 쪽 욕실에 넣었다. 주방에서 뭔가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난 놀라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느끼며 살며시 나갔다.
권수한은 테이블 위 밀가루 가루와 까맣게 탄 프라이팬, 싱크대에 꽉 찬 과일껍질을 번갈아 보다가 내 인기척을 듣고는 돌아보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너무 놀랐어요..”
나는 권수한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뻗었다. 권수한은 내 어깨를 감싸고 등을 토닥이며 거실로 데려갔다.
“왜 물을 부었는데 더 불이 세져요? 제가 불낸 줄 알았어요.”
“..식용유 부었어?.. 호일 위에.”
“네, 본래 구울 때는 식용유 두르잖아요.”
“...어디 다치진 않았고?”
“몰라요. 너무 놀랐단 말이에요.”
“괜찮아. 이제 다 껐으니까.”
난 칭얼대면서 그에게 안겼다. 권수한은 내 가슴에 손을 얹어서 진짜로 펄떡펄떡 뛰는 심장 진동을 느끼고서 혀를 찼다. 날 안은 채로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권수한은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한쪽 손으로 내 코를 살짝 쳤다.
“왜 갑자기 주방에 갔어. 뭐 먹고 싶었어?”
“맛있는 거 만들어주려고 했죠.. 어제 당신처럼 분위기 잡고 있으려고 했는데. 10분만 늦게 오지.”
“글쎄, 10분 가지고는..”
권수한은 복잡한 한숨을 내뱉고는 나를 더욱 끌어안았다. 가슴이 서로 맞붙었다.
왠지 권수한의 심장도 쿵쿵쿵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너 숙소 가서 절대로 요리하지 마.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안 해요. 숙소에서는 거의 안 먹고 먹어도 시켜먹으니까.”
“식당 음식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다. 내가 반찬이랑 다 줄 테니까 그거 먹어.”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요.”
“미안하면 살 찌워서 와.”
살은 안 그래도 열심히 찌울 생각이다. 가족들도 팬들도 멤버들도 친구들도 권수한도 다 살 찌라는 소리를 달고 살아서 내가 살찌면 세계평화라도 올 것 같다.
아까의 실패작을 뒤로 하고 권수한과 함께 다시 만들었다. 이번엔 오븐도 사용했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쿠키 위에 사과를 올리니 와인과도 어울렸다.
어젯밤처럼 은은한 조명 아래 마주 앉았는데 탄 내 때문에 어제의 분위기가 안 나서 그냥 불을 켜고 우걱우걱 먹었다.
권수한은 날 옆에 두고 노트북으로 뭔가를 열심히 작성했다. 읽으려고 했지만 외국어 너무 많고.. 난 팔뚝에 기대서 눈을 깜박이며 구경했다.
평화롭다.
멤버들은 짐 정리하고 있을 텐데.. 아, 몰라. 그동안 내 설움을 몰라준 것에 대한 작은 복수다.
내가 심심해하는 것 같았는지 권수한이 쓰던 창을 끄고 팬사이트에 들어갔다.
어제 투샷에 대한 반응으로 아직도 뜨거웠다.
┗권수한 선생님의 크고 남자다운 손이 이라 허리를 감싸고 배에 올라와 있는데요..
라는 댓글을 보고 사진을 보니 정말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힐끔 올려다보니 권수한은 그런 팬들의 반응을 흐뭇하게 웃으며 보고 있다.
저 사람은 우리 사이가, 지금 우리 자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사귀지도 않는데 품에 끌어안고 허리를 쓰다듬고..
설마 이 인간 스킨십에 헤픈 인간인가 하는 의심이 든 나는 재빨리 그의 옆에서 벗어났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를 노려보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했다.
“뭐 하는 짓이야. 빨리 이리 와.”
“형, 우리 관계를 정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봐 봐요. 사귀지도 않는데 막 배 만지고 이러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어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러자 그는 잠깐 한대 얻어맞은 얼굴을 하더니 노트북을 탁 덮었다. 그리고 굉장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안겨서 자고, 허벅지를 비볐다는 말이군.”
“..넹?”
“도덕성을 아주 씹어 먹었어.”
권수한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아니, 날카롭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내가 댕강 썰릴 것 같다.
“그렇게 스킨십에 후한 성격인 줄 몰랐네. 아주 호텔방을 잡아도 좋다 하겠군.”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뭐야 우리가 연애라도 해..?
응..?
“너 다른 사람이랑은 신체 접촉 꿈도 꾸지 마. 네 스킨십 개념을 아주 뜯어 고쳐줄 테니까.”
그런 말은 듣기는 했었다.. 어른들은 오늘부터 1일, 하고 딱 정해서 사귀진 않는다고..
“생각할수록 기가 차군. 허벅지에 엉덩이를 비벼대는 걸 기껏 참아줬는데 뭐? 사귀지도 않아? 그걸 말이라고 지금,”
“형.”
나직하게 부르자 권수한이 싸늘히 노려봤다. 나는 살랑살랑 그에게 다가갔다.
“내 말은 공개연애가 아니니까 사진 찍을 때는 자제하자는 거죠. 팬들은 우리가 사귀는 줄 모르잖아요.”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권수한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껴안았다. 여전히 미간에 굳게 주름 져 있었다.
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핀 상태였다.
“그런데요. 우리 언제가 1일이에요? 형이 나 좋아한지는 조금 오래된 거 아는데.”
내가 살살 달래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꾸욱꾸욱 누르자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저번에 막 내 고백 듣고 착각이라고 해서 놀랐잖아요. 왜 튕기고 그랬어요? 그때도 나한테 빠졌으면서.”
말해놓고도 너무 오만한가 싶었지만 권수한은 마음에 들었는지 낮게 웃었다.
“그래, 맞아. 그때부터 인정할걸 그랬지.”
그는 내 볼을 쓰다듬었다.
“이미 사랑에 빠진 후에 부인해봤자 소용없는 일을..”
깊고 어두운 심해 같은 눈에 전과는 달리 한 줄기 빛이 비치고 있었다.
봄볕에 녹은 얼음 밑에서 새순이 돋아나듯이 그의 차갑고 냉정한 얼굴에도 따스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의 귀에 들리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는 아직도 그의 미간에 올려놓은 내 손가락을 붙잡았다. 내 것보다 단단하고 두꺼운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를 하나하나 얽혀왔다. 나는 그의 시선에 붙잡혀 있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감했다.
지금 그와 나의 오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있으므로 더 이상 어떤 질문이나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
권수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잡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눈을 감으며 잠깐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했지만 곧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권수한의 입술은 무척 따뜻했고, 입맞춤은 길게 지속되었다. 마침내 얼굴이 달아올라 부끄러워진 내가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하려고 하자 이 욕심 많은 인간은 도리어 내 뒤통수로 손을 옮겨 이동하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입술을 툭툭 건드리며 침범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어이가 없어서 살며시 실눈을 뜨자 너무나 진지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두 눈을 감은 채 키스를 갈구하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열기를 숨기지 않은.. 마치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나와 입 맞추는 일 외에는 없는 것처럼.
권수한의 사랑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오러가 연결되어 있지 않는데도, 능력을 사용하는 게 아닌데도 그의 마음이 흘러넘쳐 내게로 전달됐다. 사랑스럽다고, 너무 사랑스럽다고.. 계속해서.
이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지금 이 세상 속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과거의 미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 세상이 불운을 주면 불운한 대로, 오해를 주면 오해한 대로 살아가던 나는 이제 없다. 우주 속에 영원히 버려진 듯한 고독함 따위도 이제는 끝이 났다.
이 순간 나는 나의 꿈을 온전히 완성했다.
권수한으로 인해서.
권수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낌으로 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