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7 (완결) =========================
7
(연참입니다)
나는 문득 정신이 들었고, 이곳이 꿈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캄캄한 우주 같은 이곳에서 나는 두려움과 마주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아이돌일까 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표현으로는 다시 고독해질까 하는 것이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알게 된 팬들이 등을 돌렸을까봐. 내 노래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어딜 가든 범죄자로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야 할까봐. 그래서 다시 이 세상에서 먼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을까봐.
눈을 뜨면 날 욕하는 이들만 가득하고.. 내게 실망해 등을 돌린 사람들과.. 신동우를 잡기 위해 부른 경찰이 비웃음을 걸고 내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다.
계속 그런 광경만이 떠올랐고 이 상상은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끝이 났다.
권수한, 당신은 어떤 반응일까.
그를 떠올리자 마치 방 불을 켠 것처럼 내 어두운 꿈속에도 햇빛이 들었다.
그 사람만은 날 외면하지 않을 지도 몰라.
그런 믿음이 있었다. 이유를 대라면 그 사람 탓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렇게 믿게끔 행동한 탓이다.
나는 선택을 미루고 꿈속을 유영했다. 두려움과 믿음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때 어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 이라야.
그건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한 목소리였다.
-눈을 떠 줘, 제발. 돌아와. 이곳으로. 내게 돌아와. 이대로 널 보낼 수는 없어. 제발 눈을 뜨고 돌아와 줘, 이라야.
그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눈을 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봐줘야 할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는 냉정하게만 보였던 권수한이 이렇게 절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 저 사람이 날 믿어준다면, 날 외면하지 않아준다면.. 그에게 돌아가고 싶다.
-글쎄, 과연 그럴까?
권수한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를 때 나는 또하나의 목소리와 마주했다.
-어떻게 세상으로 돌아갈 염치없는 생각을 할 수 있니?
그 목소리는 무척 차갑고, 잔인하다.
-넌 나와 같은 범죄자야. 그 사람도 네게 실망해서 돌아섰을 거란다. 헛된 희망은 꿈도 꾸지 말고 이 세계 속에서나 살아가렴. 눈을 뜰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야.
떠올랐던 마음이 침잠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그 목소리가 사장님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정신을 교란시키려는 발악인 것도 알았다. 다 알면서도 내 꿈속은 다시 어두워졌다.
두렵다. 헛된 희망일까봐. 눈을 뜨고 나면 내게는 아무것도 없을까봐.
차라리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영원히 나가지 않는 게 모두를 위한 방법이 아닐까.
나는 몸을 웅크렸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내가 가질 수 있는 평화는 이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내 마음은 끝없이 가라앉았다. 내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내고 있던 노래를 놓아주자.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반짝 반짝 빛나던 멤버들도, 내게는 과분한 사랑을 주던 우리 가족도.. 그리고.
-이라야.
그만해요. 내 이름을 그만 불러요.
-돌아와, 제발.
권수한의 목소리는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을 놓아줘야 하는데,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도저히.. 저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제발 눈을 떠 줘..
편히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 두려운 상황에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저 절실한 목소리를 듣고 그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깨달았다.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어 있던 정신이 깨어난 것도 저 사람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것을. 저 사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깨웠기 때문임을.
-돌아와, 이라야. 나에게 돌아와.
더 이상 망설임은 필요하지 않다.
웅크렸던 몸을 폈다. 날 옭아매고 있던 그림자들은 너무나 쉽게 떨쳐졌다.
-미련한 선택이야. 괜히 눈을 떴다가 실망하지 말고 이 평화로운 세계에 있으렴.
신동우의 목소리가 내게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나는 그 유혹을 들으며 오히려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향해 외쳤다.
내 평화 따위는 개나 주라지. 나는 권수한을 봐야겠어.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저 사람을 달래줘야겠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흐릿한 시야를 깜박 깜박 하고나니 무척 놀란 얼굴의 권수한이 보였다.
말끔한 냉미남은 어디 가고 면도 안 한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이라야.”
말똥말똥 보고 있자 떨리는 목소리가 날 불렀다. 잔뜩 갈라지고 쉬어서는 덜덜 떨고 있었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도 갈라지고 쉬어서 듣기 좋지 않았다. 성대가 내 보물인데.. 크흠, 목을 가다듬고 다시 권수한을 보았는데, 나는 그때의 그의 표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마치 네 삶은 끝났다는 소리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권수한 씨? 왜 그래요?”
놀라서 지친 것도 모르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음만큼 놀란 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너..”
“권수한 씨?”
권수한은 나를 보고 충혈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물었다.
“네 마지막 기억과 지금 상황을 말해봐.”
“신동우에게 정신 조작을 당해서 기절했어요. 아마 여기는 병원인가보죠?”
즉답하자 그는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눈 한번 깜박하기도 전에 성큼 다가왔다.
“이라.”
그는 와락 껴안고서 마치 내 체향이라도 만끽하는 것처럼 몇 번이나 숨을 들이쉬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안겼지만 답답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품 안은 뜨거웠고, 나는 그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어설프게 권수한의 커다란 등을 쓰다듬어주자 포옹은 더욱 거세졌다. 내 갈비뼈가 부러지기 전에는 놔줘서 다행이었다.
부모님과 민이 또한 권수한과 거의 다르지 않는 초췌한 몰골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엄청... 정말 엄청나게 혼났다
살면서 그렇게 혼난 건 처음이었다.
요 근래 나 때문에 출입국을 반복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자 더 혼내셨다.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니 얼마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셨을까. 나는 왠지 열불을 토하시는 그분들이 더욱 애틋하고, 옆에서 끄덕 끄덕 하며 추임새를 넣는 민이도 귀여워서 배시시 웃어버렸는데, 부모님은 내 웃음을 보고는 어이가 없으셨는지 의사까지 불러 재진찰을 시켰다.
멤버들은 처음 병실에 들어올 때는 조심스러워 했지만 곧 멤버들 다워졌다. 한새는 바나나를 가지고 와서 자기가 먹었고, 문이 형은 줄곧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야단이는 과묵하게 앉아 있다가 내가 몸을 움직일라치면 얼른 부축해줬다.
제이는 평소와 같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피폐해진 걸 빼면, 그러니까.. 평범한 친구처럼. 왜 걱정시키냐는 시비도 이젠 아프지 말라는 인사도 평범하게 이뤄졌다.
물론 나는 그 모습이 제이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임을 알았다.
진호 형의 경우에는 울면서 들어와 울기만 해서 권수한이 내쫓으려고 하니까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정신을 차리고 이튿날 능력 오남용 본부 요원들이 찾아왔다.
팔짱을 낀 채 서늘하게 노려보는 권수한 때문인지 굉장히 위축된 자세로 언제부터 정신 조종을 당했는지, 몇 차례였는지, 어떤 식이었는지 물었다.
나는 성실히 대답했다.
그들은 나가면서, 신동우는 아마 무기징역을 받을 거라고 귀띔해줬다. 현행범으로 잡히고도 경찰이 보는 앞에서 능력을 사용한 점에 대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예상보다 강한 형벌이었다.
깨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난 쌩쌩해졌다. 휠체어도 안 타고 걸어 다니고 복도도 뛰다가 주의 받았다.
그러나 난 더 아픈 척 했어야 했다.
내가 쌩쌩해지니 이제는 권수한이 날 봐주지 않았다.
권수한은 내가 저녁을 먹고 소화시키기까지 참고 인내했다가 다 소화된 후 TV를 켜려 하자 돌변했다.
리모컨을 빼앗아 전원을 끄고 날 싸늘히 노려보며 맞은편에 앉았다.
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분노로 차가워진 시선을 보내는 권수한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쭈구리가 되어 있는 내게 권수한은 말투에 얼음을 실어서 보냈다.
“감히 혼자서 어댑터의 집에 쳐들어 가?”
“...준비 다 해놨다구요. 근처 구조센터 위치랑 도착할 시간까지 파악해서..”
“경찰이 도착하기 전 네 정신을 파괴했으면 어쩔 뻔 했어?”
“그 정도는.. 조금 방어막 남겨놨고..”
“하, 방어막 남긴 녀석이 일주일이나 지나서 깨어나고 아주 잘도 방어했군.”
“.......”
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너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어.”
권수한은 여러 감정들을 꾹 억누르고 있었다.
“깨어나더라도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었어. 백지 상태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일어날 수도 있었어. 너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없어질 수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각오한 일이었다.
“너 혼자만..”
권수한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혼자만 각오하면 끝인가? 남겨진 사람들은? 네 부모님은? 동생은? 멤버들은?”
“.......”
“...나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나 아프게 흘러나왔다. 무섭도록 차가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는 떠올리지 않았어?”
“아니에요. 떠올렸어요.”
나는 다급히 말했다.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있었어요. 정신붕괴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동안 치유도 많이 받았고 건강해졌잖아요, 저.”
“어댑터를 두려워하라고 그토록 얘기했잖아. F 어댑터라도 널 정신 붕괴 시키는 데에 10분도 안 걸려!”
“당신이 떠올랐어요. 마지막 순간에.”
“.......”
권수한은 거친 숨을 내뿜었다. 그의 눈은 젖어 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를 내려왔다.
권수한의 핏대가 돋은 팔뚝에 내 손을 얹었다.
“당신이 떠올라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내 머릿속에서 계속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권수한의 꽁꽁 묶인 팔짱을 풀었다. 스르르 힘없이 풀려났다. 권수한은 내가 앉을 수 있게 꼬았던 다리도 풀었다.
“칭찬해주세요. 화내지 말구요. 돌아왔잖아요.”
나는 안아달라는 듯 양팔을 내밀었다. 권수한은 복잡한 눈으로 날 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아 끌어당겼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그는 나를 껴안은 채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다시는 느끼게 하지 마. 그때는 네가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없을 거야. 제어력을 상실한 어댑터로서 제거됐겠지.”
“무서운 소리 하지 마요.”
“진심이야. 협박으로 들어도 좋으니까 다시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협박이라기보다는 제발 들어달라는 기도로 들렸다. 나는 그의 커다란 몸에 양팔을 둘러 안았다.
“그럴게요. 다시는 위험한 일 안 하고 당신 옆에 있을게요.”
“.......”
“걱정시켜서 미안했어요..”
권수한은 한참을 날 놔주지 않았고, 나는 따뜻한 온기 속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오러 유저와 어댑터 관련 범죄에 대한 재판은 최대 3주 이내로 신속히 이뤄진다. 신동우 또한 그러했다.
어댑터의 재판은 노유저들로만 구성되기 때문에 나는 병실 침대에서 권수한의 품에 안겨서 노트북을 통해 원격 연결로 참석했다.
머리가 희끗한 신동우는 무척 왜소한 체구의 노인처럼 보였다.
신동우가 카메라를 노려볼 때면, 그가 날 보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움찔 놀랐는데 그때마다 권수한이 나를 꼬옥 힘주어 끌어안았다.
신동우는 정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탕 탕 탕. 선고가 끝나자마자 노트북을 덮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짐이 사라졌다.
“나 잘래요.”
“ 벌써?”
“몰라요. 왠지 엄청 졸려.”
“..그래. 졸리면 자야지.”
권수한이 일어나려는 걸 붙잡았다.
“..?”
나는 권수한의 허벅지에 앉은 채 몸을 꾸물 꾸물 움직여 돌아누웠다. 내가 가장 편한 자세는 권수한과 마주보고 껴안은 자세였다.
“음...”
권수한은 뭔가 곤란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가 내가 ‘뭐 불만있냐 내가 이 자세가 편하다는데’라는 눈으로 당당히 쏘아보자 얌전히 팔을 뻗어 등을 둘러 안았다.
난 다시는 신동우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 내가 마음이 변해 면회 간다고 해도, 소울 유저인 내게 해 끼치지 못하게 약물에 절여진 그 자를 만나겠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너만 그냥 지나가면 모두가 편해져.」
「어차피 이제와 찾을 방법도 없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만약 사장님이 청산가리로 충격 받은 내게 다른 말을 건넸다면...
의미 없는 상상을 해본 나는 곧 모든 걸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권수한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파고들었다. 권수한은 너무 단단하게 굳어서 숨은 쉬고 있는지 염려스러웠지만 난 돌침대려니 하고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배 아래쪽이 자꾸 결리는 느낌이 났지만 나름 편안한 침대였다.
퇴원 날 부모님과 민이가 집에 돌아갔고, 나도 집에 돌아갔다. 권수한은 다시 출근을 시작했지만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기퇴근만 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다 같이 먹으니 권수한이 일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시설 짱짱인 어댑터 아파트에서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고, 간단한 운동을 하면서, 주변 상가 사람들과도 안면을 텄다. 다들 나보고 굳세고 씩씩하다며 칭찬해줬는데 뭔가 되게 어린애 대하는 느낌이었다.
여론의 반응은 내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아무도 과거의 잘못을 탓하지 않았다. 내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돼서, 제이랑 유진이 형이 여론조작이라도 했나 의심했는데 권수한은 그런 날 보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널 욕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더군. 볼래?”
아니, 악플을 보라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내게 권수한은 핸드폰으로 내가 녹음한 신동우의 협박 음성이 담긴 기사의 베플을 보여주었다.
┗ㅡㅇㅡ저게 말이야 방구야 저딴 것도 협박이라고.. 저딴 협박에 넘어가는 이라는 또 뭐야ㅡㅡ 쟤는 다섯 살짜리 애가 지한테 실수해도 안 용서해줄 건가벼
뭐랄까 날 탓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싸주는 것 같기도 하는 이상한 글이었다.
아무튼 그 후로 나는 혼자 있을 때 아파트 사람들(대부분 어댑터와 그 가족들)과 마주쳐도 밝게 인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혼자 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백수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권수한이 제대로 일하는지 의심스럽다.
오늘도 권수한은 9시에 나가서 11시에 돌아왔다. 상담을 하루에 1명만 받나?
음식 재료를 바리바리 양손 가득 사와서 점심은 뭘 먹겠냐고 묻길래 계란간장볶음밥이라고 대답했다. 권수한은 제 손에 들린 꽃게와 낙지를 잠시 보다가 냉장고에 넣고 계란을 꺼냈다.
권수한이 밥을 볶는 동안 나는 테이블을 닦고 숟가락이랑 물을 세팅했다. 다 먹고 나서는 배가 너무 불러서 사과 한 조각도 안 넘어갔다. 권수한은 사과를 먹지 못하는 날 보고 속상해했다. 얼굴에 티는 안 났지만 그냥 느껴졌다.
우리는 욕실에서 함께 양치질 했다. 서로 쓰는 치약이 달라서 치약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다. 욕실에는 내 물건이 권수한 물건보다 많다. 드레스룸에도 내 옷이 절반 이상이다. 창고로 쓰고 있던 방도 비우기로 했다. 우리 팬들이 준 선물을 넣어야 하니까. 내 계획이 아니라 권수한의 계획이다. 곧 컴백하면 숙소에 들어갈 텐데 그 전에 내 흔적을 잔뜩 놔둘 속셈인 거다.
난 양치 후에 재빨리 소파의 로얄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권수한은 물컵과 약통을 들고 다가왔다.
“약 까먹지 마라.”
“이따 저녁에 먹으면 안 돼요?”
“자기 전에는 따로 있잖아.”
“힝.. 알약이 너무 크단 말이에여. 제 목구멍은 조그만데..”
칭얼거리자 권수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가책을 느끼는 듯한 애매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를 크다고 하면 곤란한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곧 알약을 반 뚝 잘라주었다.
나는 어제 정식으로 병원에 가서 심리 상담 받았고 오늘부터 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권수한은 다른 어댑터 의사가 나를 상담하도록 했다. 자신은 사심이 섞여 있으니 객관적인 진료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상담 시간엔 내 요청으로 권수한과 함께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의사 선생님과 인사하고 내 소개를 할 때, “저는 이라이고 스물두 살이며 아이돌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울컥 울 뻔했지만 그 뒤로는 씩씩하게 상담을 마쳤다. 선생님은 아주 씩씩했다고 칭찬해주셨고 권수한도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오러 치유는 권수한이 계속 하기로 했다. 받던 오러를 계속 받는 게 좋다고 선생님도 말씀하셨고, 권수한도 이 부분은 독점하기를 원했다.
권수한이 쪼개준 알약을 다 삼키고 나자 바로 달달한 초콜릿을 내밀었다. 가루약도 아니고 방금 양치도 했는데 날 몇 살로 생각하는 건지... 그래도 정성을 봐서 먹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