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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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가리 범인이 잡히고, 전속계약 해지 건도 속도가 붙었다. 여론과 유진이 형 덕분이었다. 나를 방치한 회사는 대중에게 있어서 악덕 기업이었고, 그 악덕 기업이 ‘불쌍한 이라’와 엔돌핀을 놓아주고 있지 않으니 유진이 형은 이 부분을 해결해줘서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어쨌든 나에게는 이득이었다.

 -아마 엔돌핀이라는 이름은 못 쓰게 될 거야. 식시티가 저작권 등록을 다 해놔서.. 되찾아오는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2, 3년은 걸린다더라.

 -신동우 씨발새끼, 여론이 이 지경인데도 존나 더럽게 굴어.

 화면 속 문이 형은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옆에 전 사장님께 욕을 서슴지 않는 한새는 오히려 살이 오른 모습이었다.

 “응, 안 그래도 아빠가 말해줬어. 야단이도 알아? 제이도?”

 -둘 다 알아. 근데 뭐 둘 다 쿨하게 받아들이더라.

 -그 새끼들은 모셔너라서 감성이 메말랐어. 아무렇지도 않아 해. 존나 정 없는 새끼들.

 -사실 나도 엔돌핀으로 활동했던 1년 5개월 생각하면 눈물도 났는데, 걔네 반응 보니까 운 내가 뭐지 싶더라고.

 문이 형이 하하, 웃었다.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후련해보였다. 어쩌면 내 심정이 후련함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 지도 모른다. 엔돌핀으로서의 11개월은 영원히 잊지 못할 테고 분명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너무 힘든 일이 많았기에..

 “솔직히 나도 엔돌핀 말고 다른 이름으로 컴백하고 싶었어. 그럼 진짜 시작이라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이해해, 이라야. 우리 같이 좋은 이름 찾아보자. 한새 이 녀석은 ‘돌핀’ 이런 거 말하더라.

 -괜찮지? 뭔가 자유와 귀여움의 상징으로.

 -나는 ‘러브 앤 피스’나 ‘프리덤’ 이런 게 좋은데. 의미가 있잖아.

 일단 문이 형한테는 이름 짓기는 절대로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겠다.

 -참, 우리 계약 해지일이 19일이라서, 그 날 이후로는 엔돌핀이 아니거든. 그래서 그 전에 팬분들한테 이벤트를 해줄까 하는데 어때?

 “어떤 이벤트?”

 -게릴라 미니콘서트.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슬퍼하고 그리워해주실 분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인 거지.

 -진짜 팬바보다운 생각 아니냐? 이 형은 나중에 결혼도 못할 거다.

 미니콘서트.

 가슴이 뛰었다. 엔돌핀으로서 서는 마지막 무대. 짧지 않은 시간 팬이 되어준 분들께 드리는 선물.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동안, 엔돌핀의 이라를 좋아해주신 분들을 위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읽지도 않는 편지를 계속 써주신 분들을 위해서, 내가 자세히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려버린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을 위해서.

 청산가리 범인이 잡히고 나서 나보다 더 분노하고, 심란해 했을 분들이다.

 정작 나는 다른 문제 때문에 새삼 상처받는다거나 다시 그날을 떠올리며 힘들어하지도 않았는데, 내 SNS 계정으로 ‘사랑해 이라야’라는 메시지를 얼마나 받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권수한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말이 없자 어떻게 해석한 건지 문이 형은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부담 갖지 말라는 말에 나는 울컥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외치듯이 답했다.

 “좋아, 형. 팬분들을 위해서 한 번 더 무대를 하고 싶어. 나도 선물을 드리고 싶어!”

 우리와 계약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기획사의 도움으로 장소 섭외와 인력 구인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게릴라를 예정했지만 기사가 나버리는 바람에 그냥 마지막 콘서트로 변경했다. 공지 뜨고 이틀 만에 티켓팅을 했는데 5초 만에 전석 매진되고 취소표 한 장도 풀리지 않아서 울고 있는 팬 분들이 많았다.

 구상을 마치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을 때는 열흘도 남지 않았기에 쉬지 않고 연습해야 했다.

 연습 첫날, 제이와 나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둘째 날에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게 됐고, 셋째 날에는 밥도 같이 먹었다.

 “야, 사진 좀 찍어도 되냐?”

 “뭔 사진.”

 “니네 화해해갖고 같이 탕수육 먹는 모습 보니까 감동이라서 팬들한테 제이라 떡밥 좀 던져주려고 한다.”

 한새는 우리가 어색했던 이유를 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걸 수도 있고. 나는 거부하려고 했는데 제이가 갑자기 자리를 옮겨 내 옆으로 왔다.

 “어, 찍어. 여전히 사이좋다고 찍어서 올려.”

 그러고서는 내게 탕수육 하나를 포크로 찍어 주며, 어깨동무까지 했다.

 “야, 팔 무거워. 안 내려놔?”

 “이거나 먹어.”

 “무ㄱ어아오.”

 제이는 내 입에 탕수육을 쏙 넣었다. 찹쌀탕수육 쫄깃하고 맛있다.

 “찍는다. 카메라 봐. 하나 둘 !”

 나는 볼 터지게 입에 음식을 넣은 채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한새는 사진을 나한테 보여주지도 않고 바로 SNS에 올렸다. 핸드폰을 빼앗아서 확인하니 시크한 흑표범 옆의 내 얼굴은 무너진 찐빵 같았는데,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기에 만족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또 끝없는 연습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내가 멤버들 중 가장 체력이 딸려서 단체 안무를 따라가지 못했는데, 누구도 나를 재촉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난 땀으로 범벅이 되고 눈앞이 하얘지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몸은 더욱 더디게 움직였다.

 “나 독무 연습할 테니까 자리 좀 만들어줘. 조금만 쉬고 있어.”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건지 제이는 검무 연습을 핑계로 내게 아예 쉴 시간까지 강제로 제공했다.

 제이의 독무는 무대 전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충분한 공간을 필요로 했다. 강제로 쉬게 된 멤버들은 벽에 붙어 앉거나 드러누웠다. 나도 타월로 땀을 닦으며 누웠는데, 가방 안에서 핸드폰 불빛이 깜박이는 게 보였다.

 부재중 32통 [권수한]

 뭔 전화를 이렇게 많이.. 식겁해서 얼른 폰을 가지고 연습실을 나갔다.

 권수한은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전화 받았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왜 전화를,”

 -아무 일도 없어.

 ...?

 목소리가 싸늘한 게 완전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오늘 연습 언제 끝나.

 “똑같이요.. 한 12시 쯤?”

 -밥도 잘 안 먹는 애가 12시까지 며칠씩이나 연습하면 당일에 몸이 버틸 것 같아? 정도껏 해야지. 지금 연습실 앞이니까 일찍 끝내고 나와.

 “네에??? 아니, 지금 제가 제일 못 따라가는데 제가 어떻게 가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만큼 어색한 게 풀리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연습하면서 땀 흘리면 밥 잘 들어가요. 오늘도 세 끼 다 먹었는데.”

 -그래, 탕수육 먹었더군. 권제이랑 아주 찰싹 달라붙어서.

 얼음이 쩍쩍 갈라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랑은 뭐 먹지도 않더니 그 모셔너와는 아주 먹을 게 잘도 넘어가나 보지?

 “...연습하다 보면 배고프니까..”

 -오늘은 나랑 저녁 먹어.

 이 사람 진짜 나랑 뭐하자는 거야?

 그렇게 어른스럽고 차분한 인간이 제이만 견제해대고 유치한 짓거리를 하는데 나보고 어떻게 착각하지 말라는 건지 묻고 싶다.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지금은 진짜 안돼요. 10시쯤에 갈 테니까 그때 다시 데리러 와주든가.”

 -10시? 왜, 이따 저녁도 권제이랑 같이 먹으려고?

 “..9시, 아니, 8시에 갈게요. 그 전은 진짜 안 돼요.”

 -그래. 너 올 때까지 난 굶을 테니까 알아서 연락해.

 그때서야 권수한의 목소리가 조금 풀렸지만 내용은 여전히 유치하다. 이렇게 행동에 일관성이 없어서 내가 그런 착각을 안 하게 생겼냐고. 불퉁한 마음이 든다.

 “형, 나 먹고 싶은 거 생겼어요.”

 -뭔데.

 “구절판이랑 고추잡채랑 팔보채 먹고 싶어요.”

 -알았어. 준비해둘게.

 골려주려고 한 말인데 생각보다 빠른 대답에 내가 더 놀랐다.

 전화를 끊고 머리가 아파서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동정이란 말이야? 너무 명백한 질투인데 대체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거야. 권수한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다. 차라리 확인하고 나면 두통이 좀 가실 것 같다.

 권수한이 날 혼란스럽게 만들어도 일단 지금은 연습에 집중하자. 팬분들에게 선물을 드려야 해.

 나는 스스로 다잡은 후 연습실로 돌아갔다.

 연습실 안쪽은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 위였다. 모션 오러는 소울 오러와는 달리 ‘움직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문을 열자마자 거친 바람이 날 덮쳐왔다. 제이는 항상 독무 연습할 때도 본무대처럼 완벽한 환상을 만든다.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 위에서 고독하게 검무를 추는 제이는 너무나 멋있고 근사했다.

 제이의 독무 연습 시간, 다들 쉬러 갈 때 나 혼자 연습실에 남아 검무를 구경하고는 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멋지고 근사한 몸짓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제와 그때를 회상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 나는 내 가방 옆으로 가서 다른 멤버들처럼 눈을 감고 누웠다.

 내가 일찍 가겠다고 하자 멤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오늘 연습 끝이다!!’했다. 누군가 일찍 끝내주기를 바랐다며 오히려 고맙다는 반응이었다. 진짜로 야단이는 고맙다는 인사까지 예의바르게 해왔다.

 그저께랑 어제보다 일찍 끝났는데 어째 몸은 더 고단하다. 나오면서 휘청거리는 몸을 단단한 손이 부축해왔다.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어, 땡큐. 잠깐 어지러워서.”

 “며칠째 너무 무리했어. 들어가서 푹 쉬어.”

 “너도.”

 제이는 들어가서 푹 쉬라는 말과는 달리 내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었다. 떼놓을 생각으로 제이의 손등에 내 손을 살짝 얹을 때였다.

 빠앙-!!

 크랙션 소리가 날카롭게 울러 퍼졌다. 깜짝 놀라서 도리어 제이 품에 안기고 말았다.

 연습실 앞 도로변에 익숙한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는데,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

 냉담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키 큰 남자는 권수한이었다.

 “언제까지 안고 있을 셈이지? 사진이라도 찍히고 싶나?”

 “...이라가 비틀거려서 부축했을 뿐입니다. 건강을 잘 챙기고는 있는지 염려되는군요.”

 “내가 알아서 잘 챙겨줄 테니까 이제 놔.”

 권수한은 놓으라면서 그 시간을 못 참고 제이의 팔목을 잡았다. 두 남자끼리 시선이 맞부딪쳤다. 파지직 전기가 튈 것 같고.. 힘겨루기라도 하고 있는지 둘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난 슬그머니 제이의 품을 빠져나와 권수한의 옷깃을 쥐었다.

 “집에 가요. 피곤해 죽겠어요. 배도 고프고.”

 “...차로 가 있어.”

 “같이 가요.”

 내가 차분히 다시 말하자 권수한은 깊은 숨을 한번 내쉰 후에 제이의 팔을 놓아주었다. 제이와 권수한의 시선이 다시 맞부딪쳤다. 한 명은 차가운 심해 같은 눈으로, 한 명은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눈으로. 체격은 제이가 더 크지만 키는 권수한이 더 커서 제이가 조금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로변이라 언제 사람이 지나갈지도 모르는데 너무 살벌한 분위기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시 한 번 재촉하려는 찰나 권수한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잡고 있는 옷깃을 한번 보고 그 다음 날 바라봤다. 검은 심해는 날 비출 때면 조금은 온기를 머금는다..

 “들어가요, 형. 저 배고파요.”

 그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이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차로 향했다. 권수한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제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시선을 둘 수는 없었다.

 아파트로 오는 길은 생각보단 살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오간 것도 아니지만. 난 ‘질투했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봐 계속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현관을 열자마자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이미 요리를 해두었나 보다. 오늘은 나한테 거들라고 안할 모양인지 10분 정도 기다리라고 했다.

 식탁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요리를 마무리하는 권수한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음식들을 만들지. 신기하다.

 -지이이잉.

 식탁 위에 올려진 권수한의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

 “권수한 씨, 동생 분한테 전화 왔는데요.”

 “받아 봐.”

 난 냉큼 전화를 받았다.

 -어, 형. 형이 말했던 거..

 “형, 저에요. 이라. 수한이 형이 지금 바빠서.”

 타당탕. 가스레인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권수한이 갑자기 국자를 떨어뜨렸다. 국자가 데굴데굴 식탁까지 굴러왔다. 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이 미끄러졌군. 하던 전화 계속 해.”

 왜인지 귀가 좀 붉어진 것 같은데 불 앞이라서 그런 거겠지?

 난 국자를 주워 식탁에 올려놨다.

 “수한이 형이 지금 바빠서 제가 전화 받았어요. 뭐라고 전달해줄까요?”

 -으응, 수하니 형이 바쁘구나. 이제 밥 먹으려구?

 “네, 형은 밥 먹었어요?”

 -먹었지이. 늦게 먹네, 이라. 오늘도 연습 열심히 했니?

 “네..”

 이 형은 나 대할 때 말투 묘하게 어려지는 거 나는 눈치 못 챈 줄 아는 것 같다.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통화 중 화면이 사라지자 바로 인터넷 창이 떴다. 열심히 넷서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검색어가 [팔보채 레시피]다.

 웹페이지 서너 개가 보라색 글씨로 변해 있었다.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권수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프로 연예인의 표정 관리를 했다.

 난 침착하게 검색창을 터치해 이력을 확인했다.

 [엔돌핀 이라]

 [구절판 파는 곳]

 [엔돌핀 이라]

 [고추잡채]

 [이라]

 [팔보채]

 [펄보ㅊㅐ ]

 푸흡... 최대한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난 핸드폰을 부여잡고 식탁을 내려치며 푸하하 웃었다. 눈물도 찔끔 맺혔다. 애가 미쳤나 라는 얼굴로 다가온 권수한은 내 손에 쥔 핸드폰을 발견하고 급히 빼앗아갔다. 그 모습도 너무 웃겨서 먹으면서도 웃었고, 씻으면서도 웃었고, 잠들기 직전까지도 웃다보니 나중에는 배까지 땡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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