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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 긴 복도를 걸어서 문 앞에 도착하니 이미 멤버들과 유진이 형은 한창 얘기 중이었다.
다들 날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어우, 이라 새끼 얼굴 보기 존나 어렵네. 살도 좀 찌고 좋아 보인다?”
“이라 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야, 너.. 후.. 너 진짜 내가.. 후.. 내가 진짜 할 말이 많은데..”
한새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고, 야단이는 옷소매를 잡았고, 문이 형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난 그 가운데에서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셋 다 나랑 눈 한 번 더 마주치려고 성화였다. 제이는 이 와중에도 내 머리에 얹힌 한새의 손을 떼어내고 있었다.
“이라야.”
유진이 형은 TV에서 가끔 보아 온 모습 그대로였다. 정의롭고 유능하며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고 의사. 전보다 눈빛이 조금 서늘해진 것 같지만 나를 보며 접어오는 눈매는 예전과 같았다.
형은 내게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내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정말 살이 많이 빠졌구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난 요새 오히려 찐 편이지. 형이야말로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난 철저한 계획 하에 일부러 살 뺐지. ..뒤엔 동생?”
“어. 민아, 인사해.”
“아, 안녕하세요!”
귀엽게도 민이는 음이탈을 내버렸다. 살면서 동생의 이런 생생한 모습을 보는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난 푸훗 웃음 지었다. 뭐랄까 민이 때문에 유진이 형에 대한 감정도 잊혀지는 것 같다.
사실 유진이 형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다시 얼굴을 보면 형은 죄가 없는 걸 알아도 악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민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렇지 않다.
내 감정에 유진이 형을 향한 미움이나 어두움이 없는 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난 민이를 멤버들에게 소개시키면서도 실없이 웃었는데, 그런 날 보고 유진이 형은 몹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제잔딘 정식 요리가 줄지어 나왔지만 나는 배가 불러서 먹지 않았다. 대신 성장기인 민이가 내 몫까지 열심히 먹었다.
아마 아빠처럼 키가 크겠지? 커 갈수록 아빠를 닮아가고 있는 민이다.
계약 해지에 관련된 얘기는 유진이 형이 제일 먼저 꺼냈다.
“식시티 나가면 어디와 계약할지 생각해놨어?”
“그건 나중 일이야. 일단 지금 식시티에서 우리를 놔주지 않으려고 해서 어머니 말로는 소송 얘기까지 나왔다더라고.”
“소송해. 이라를 그 정도까지 방치했으니 법도 너네 편을 들어주겠지. 팬이라는 사람한테서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음식을 받고, 그걸 먹고 애완견이 죽고. 여기까진 회사로서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후 대처가 엉망이었어. 누구도 손들어 주지 않을 거야.”
물 마시려고 물 컵을 들었던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으나 티 나게 움찔해버리고 말았다. 말랑이 얘기 꺼내기 전에 나 지금 말랑이 언급할 거라고 예고해줬으면 좋겠다. 말랑이는 너무나 괴로워하면서 죽었다.
그 광경이 다시 떠올라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시 한 번 이라, 너에게 미안하게 됐어. 내가 깨끗하게 수습했어야 했는데, 다들 금방 널 좋아하게 될 줄 알았지.”
구토감이 일었다. 하지만 참을 수 있다.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형, 나한테 사과하지 말랬잖아. 문이 형도, 너네들도. 괜히 미안해하지 마. 너네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니까.”
“야, 솔직히.. 너는 말 이렇게 해도 우린 너한테 사과 안 하면 죄책감 든단 말이야.”
한새가 우물쭈물 말했다.
“그때 너 오해하고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씨.. 이건 사과해도 되지? 내 잘못 맞으니까.”
“나도.. 너 몰아세워서 미안하다. 형이랍시고 의지가 되기는커녕.. 너한테 힘든 일만 더 얹어버리고.”
다들 나한테 사과하고 싶어 했다. 하하.. 속의 역함이 조금 가시고 웃음이 나왔다.
내 이상한 심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분명 멤버들의 사과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과 받고나니 얹혀있는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사과받기 전에는 쌓여있는 줄도 몰랐던 응어리였다.
“알았어. 그럼.. 오늘로 미안하단 말 그만하는 거야.”
“존나.. 새끼, 엄숙한 척 오지네. 옷 훔쳐 입고도 미안하다 안 해버릴라.”
“야, 그건 경우가 다르지. 장난하냐.”
“씨벌탱. 몰라. 네가 사과 오늘로 끝이랬어. 네 옷이랑 모자랑 다 훔쳐 입을 거야.”
“씨발놈이. 입기만 해봐. 네 옷 찢어놓는다.”
“사이즈도 안 맞으면서. 하하. 이라 옷 터지겠다.”
유진이 형이 크게 웃었다. 문이 형도 크크 웃었고, 야단이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엔돌핀 데뷔가 결정되기 전, 다른 연습생들도 많았지만 딱 이 여섯 명이서 친하게 지냈다. 중심에 유진이 형이 있었고, 항상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가끔 팩트 폭력으로 우리를 웃겨주고는 했다. 투닥거리면서 싸우는 건 나와 한새의 몫이었다. 문이 형이 우리에게 의젓한 야단이 좀 닮으라면서 잔소리하면 야단이는 괜히 우리 사이에 껴서 싸움을 말렸다.
그리고 제이는.. 항상 내 편을 들어줬고. 진짜 별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면서 내 편을 들어줬던 것 같다.
“이라 옷 입을 생각하지마라. 내가 입을 거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잠깐 제이가 내 옷 입은 모습을 생각해봤는데 내 옷이 너무 불쌍했다.
“아, 제새끼 농담 겁나 싱겁네. 그런데 너, 못 본 옷이다? 네가 옷을 다 살 줄도 아냐?”
“어, 진호 형이 사줬어.”
“진호 형?”
“권수한 동생인데 국과원 직원분이야. 가끔 집에 놀러오는데 엔돌핀 팬 같아.”
“.......”
제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아는 형이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캐물었을 것이다.
“맞아. 이라, 권수한 어댑터 집에서 지내고 있다면서. 예전에 그 사람 한 번 마주쳤을 때 좀 냉정하고 차갑다고 생각했거든. 지내기는 괜찮아?”
“형도 본 적 있구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완전 잘해줘. 요즘에 그 사람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핸드폰으로 팬사이트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야.”
“침대..?”
제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모른 척 시선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어쩐지 살이 올랐다 했더니 진짜 편하게 지내고 있었어. 이 형님은 마음이 놓인다.”
“형, SNS에도 글 올렸던데 재시작 하는 거예요?”
“천천히 시작하려고. 그동안 팬 분들한테 드리지 못했던 거 마음껏 드려야지.”
“좋은 생각이에요. 팬 분들도 좋아하실 거예요. 저도 좋고요.”
야단이는 내가 SNS를 시작한다는 말이 음원 순위 1위 했다고 들린 것처럼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건너편까지 팔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챙그랑.
가까이서 들린 파열음에 깜짝 놀라며 봤다. 혼자 과일 디저트를 먹고 있던 민이가 포크를 떨어뜨리고선 나와 야단이를 번갈아 보았다.
“왜 그래? 이라 동생, 과일 껍질이라도 씹혔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것 같지가 않았다. 열심히 집어먹던 녀석이 갑자기 입이 댓발 나와서는 포크를 집어 들고 과일을 헤집었다.
“민아, 다 헤집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먹을 수가.”
“하하, 그냥 둬. 이민이는 어린 나이인데도 키도 크고 멋있구나. 우리 세계에 또 훌륭한 모셔너가 등장하겠는 걸.”
유진이 형이 민이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왜인지 몰라도 삐진 것 같았던 민이는 유진이 형의 칭찬에 대번에 얼굴이 환해졌다. 하긴 감정이 급변할 때이다, 10대 중반은. 나 또한 그랬으니까 잘 안다.
그 후로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유진이 형이 지금도 팬카페에 들어가서 편지를 다 읽고 있다고 말해서 조금 놀랐다. 정치계로 넘어가면서 아이돌 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끊겠다고 했었는데, 역시 팬 분들의 응원은 끊기가 힘들었나 보다.
민이도 유진이 형 덕분에 낯가림을 털어내고 금방 재잘재잘 말이 많아졌다. 오러 볼 리그에 나갈 거라고 하자 유진이 형은 너라면 잘해낼 거라고 달콤한 말을 건넸다.
제이는 침대 이후로 말이 없어졌다.. 난 괜히 제이의 눈치를 자꾸 살폈다. 그런데 나 말고도 제이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또 있었다. 문이 형이었다.
“이라야, 우리 다 숙소에서 짐정리 마쳤거든. 네 짐도 박스에 담아서 갖고 오긴 했는데, 혹시 못 챙긴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가봐.”
“아, 저 박스들이 내 거였어? 고마워. 안 그래도 백팩 세 개나 가지고 왔어.”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서 정리하는 거 어때? 혼자 들기 무거우니까 제이가 도와주면 좋겠네.”
“어, 그래. 갔다가 다시 와라. 여기서 2차, 3차까지 다 하자.”
문이 형은 제이의 눈치를 보다 못해 아예 나랑 제이 둘만 내보내려고 했다.
우리 둘 다 미련 흘리는 것처럼 보이니까 확실하게 매듭지으라는 걸까.
나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이미 차 키를 꺼내고 있었다..
“민아, 일어나자. 호텔로 데려다줄게.”
민이를 혼자 둘 수는 없어서 불렀다. 유진이 형이 전해주는 오러 볼 선수들의 일화에 푹 빠져 있던 민이는 아쉬워하며 일어났다. 끝까지 애들한테 사인해달라는 말을 못하길래 내가 제이를 툭 치며 사인도 하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라고 했다.
찰칵.
다 같이 단체 사진을 찍고, 앨범에 한 명 한 명 사인했다. 유진이 형까지 다섯 명이었다. 나는 형이니까, 내 사인은 청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유진이 형이 사인해주는 것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난 가슴이 찌릿해서, 정말 욕심 많은 성격이구나 살짝 반성했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안 닮았구나.”
나랑 민이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보고 유진이 형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우리는 둘 다 움찔 놀랐다.
“어, 진짜 안 닮았어. 나 처음에 보고 완전 놀랐잖아. 동생은 모셔너고 이라는 소울러라서 그런가?”
“민아, 형 조그맣다고 무시하지 말고 잘해줘야 한다. 친동생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형 드물어.”
“..아, 네..”
유진이 형은 웃으면서 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이의 얼굴이 티 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얼른 민이의 손을 잡고 끌었다.
“걱정하지 마. 얼마나 의젓한데. 엔돌핀 동생들 중 민이가 제일 착할 걸?”
“헐, 이라가 광역 어그로를 끄네. 동생 있는 형들이랑 제이는 얼른 이라를 매우 치셈!”
“아니.. 내 동생은 이라 동생이랑은 다르게 진짜 안 착해서. 한새, 너 줄 테니까 제발 가져가.”
“아니.. 형 동생은 나도 좀..”
문이 형과 한새가 주고받는 대화에 멤버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애써 웃음 지었는데,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제이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세차게.
그리고 유진이 형은 웃음을 머금고 민이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백팩을 챙기고 나갈 때까지도 형의 시선은 민이에게 못 박혀 있었다. S급의 소울 오러 유저는 직감력이 뛰어나다던데, 민이와 내게서 뭔가를 느낀 걸까.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모른 체 하며 밖으로 나섰다.
민이를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숙소로 이동했다. 나는 운전하는 제이 옆에서 핸드폰을 했다. 요즘 완전 중독돼서 팬카페에서 헤어나가질 못하고 있다. 제이는 내가 팬카페에 들어간다는 걸 알고 기분 좋은 듯 웃었다.
“편지글 밀린 거 다 보려면 한참 걸릴 거다. 눈 안 나빠지게 조심해.”
“응. 야, 근데 이해 안 되는 거 있어. 내가 귀여운데 왜 아파트를 뿌시는 걸까?”
“원래 귀엽고 예쁜 거 보면 벽도 뿌수고 아파트도 뿌수고 하는 거야. 나도 너 때문에 지구 몇 번 부쉈어.”
“.......”
참나 저런 흑표범 같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나는 민망해져서 핸드폰에만 집중했다. 이날 예능에 나왔는지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오빠 예능감도 왤케 좋아요???’ 하는 편지들이 많았다. 움짤도 많이 올라왔다. 아, 입으로 종이 옮기는 게임 했을 때구나. 새록새록 생각난다.
-지잉.
핸드폰이 진동하면서 화면이 바뀌었다. 발신자는 권수한이었다.
난 힐끔 제이를 보았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제이를 위해서 이 전화는 받으면 안 될 것 같다. 일단 끊고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통화거절을 누르고 [저지금통화ㄴㄴ]라고 쓰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또 끊자 바로 다시 전화를 해왔다. 이쯤 되니.. 걱정된다. 왜 세 번이나 걸지? 무슨 일 있나?
“왜 안 받아.”
제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누구길래 안 받지? 그 어댑터인가.”
“...응.”
귀신같은 놈.
“전화 받아.”
받아도 되는 건가. 난 제이의 표정을 다시 확인했다. 목소리와는 달리 눈빛은 이글이글하고 핸들을 잡은 손등엔 핏줄이 돋아 있다. 그치만 난 전화를 받고 싶어서 받아도 된다는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입 부분을 가리고 통화를 터치했다.
“왜요. 나 지금 바쁜데 무슨 일 있어요?”
-.......
“권수한 씨?”
권수한은 말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하느라 바빠서 전화를 두 번이나 끊어.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니, 그냥.. 밖에 나왔는데.”
-밖, 어디.
“숙소에 짐 챙기러 가고 있어요.”
-혼자? 뭐 타고?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제이랑 같이 차타고 가고 있다고, 이 말이 왜 힘든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친구 차 타고요. 형은 뭐해요? 밥은 먹었어요? 앞으로 형도 밥그릇 사진 보내기로 해요.”
-..숙소에서 가져올 짐이 많나?
“아뇨. 백팩 3개 정도?”
-도우러 가지.
“네? 일 바쁘지 않아요?”
-지금 다 끝났어.
-아직 안 끝났어요, 선생님!
-어디를 가신다는 거예요!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권수한을 말리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었다.
“아직 안 끝난 거 아니에요?”
-끝났..
-안 끝났어요, 이라 군! 안 끝났으니까 말려줘.. 흡.
투닥투다닥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말소리가 끊겼다. 난 내 이름이 들려서 벙 쪄 있었다. 되게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 괜히 내가 땡땡이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맘이 불편하다.
난 입을 가리고 창가 쪽에 붙어서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권수한 씨, 일 다 하고 오세요. 올 시간에 거실에 앉아서 예쁘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
“진짜로 형 숙소 도착할 시간쯤엔 끝나고 나갈 걸요? 와봤자 헛수고에요.”
-..그래, 알았어. 일마치고 갈 테니까 전화는 한 번에 받아주면 좋겠군.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이동할 때마다 연락 주고. 일정 바뀌면 꼭 말하고.
나 몇 살이지? 열한 살이었나?
“사람이 왤케 걱정이 많아요. 알아서 잘 할게요.”
난 키득키득 웃으며 답했다. 권수한을 달래가며 전화를 끊은 뒤에도 웃음기가 남았다.
이런 사람도 일하기 싫어하는 건 똑같구나.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궁금하다. 대충 심리 관찰 같은 일일 것 같은데 오면 물어봐야겠다.
“...즐거워 보이네. 너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이야.”
제이가 쓸쓸하게 속삭여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제이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이쪽에는 시선을 안 두려는 듯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짐 정리를 마친 후 텅 비어버린 숙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9개월..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참 다사다난했다.
힘들었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음원이 1위를 했을 때라든지 분명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청산가리 이후로 나는 숙소에 오는 것도 두려웠다. 범인이 내 방 옷장에서 날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무서웠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자꾸 죽어있는 말랑이의 모습이 보여서 괴로웠다.
이제는 안녕.
난 눈을 한번 감았다 뜸으로써 이별을 고했다.
“이라야.”
제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나를 불렀다.
그래, 이제 너와도...
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