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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회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멤버들 부모님과 이미 연락하고 계셨던 부모님은 뭐 그런 새삼스러운 소릴 하느냐고 하셨다. 일사천리로 해지 건이 진행되었는데 이런 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우리는 부르지 않았다.
부모님과 민이는 호텔의 장기투숙객이 되었다. 민이는 투덜거리면서도 나와 퍼즐 조각을 맞추거나 게임을 하면서 같이 있어줬다. 권수한이 무척 바빴기 때문에 민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넓은 집에 혼자 있어야 했을 것이다.
멤버들과는 간간히 통화를 하며 상황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내가 미안할 정도로 내게 미안해했지만, 나는 내게 미안해야 할 사람들을 확실하게 구분 짓고 싶어서 더 이상 사과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내 뜻을 이해해주는 건지 한새와 야단이는 평소 때처럼 돌아갔는데, 문 형은 여전히 내게 죄인처럼 굴어서 좀 마음이 불편했다.
신동우랑 이용준한테서도 계속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우리도 가만 있지 않겠다]며 협박하더니 나중에는 [일단얼굴보자 응? 만나서얘기하자 그래도 우리그동안쌓인 정이라는게 잇잔니] 라는 애절한 문자를 보냈다. 근데 그 문자가 하필이면 권수한이랑 식사 중에 와서, 권수한은 내 핸드폰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말없이 가져가더니 차단해버렸다.
“저 이 사람들 안 만나도 돼요? 어차피 해지하려면 본인이 가서 뭔가 서명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넌 신경 쓸 일 없어.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지금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내일 먹고 싶은 메뉴를 나한테 말해주는 일 뿐이야.”
그래서 난 차단 상태로 두기로 했다. 어른을 상대하는 것은 어른에게 맡길 것이다.
하여튼 요즘 나는 몸상태도, 정신상태도 요 근래 가장 개운하고 맑았다. 특히 팬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하루가 순삭이었다.
오늘도 이제 내 것 같은 권수한의 침대 위를 구르면서 작년 11월경의 팬카페 편지글을 읽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자 똑같은 번호로 문자가 왔다.
[이라, 오늘 3시 희완전으로 오도록 해. -고유진]
난 벌떡 일어났다. 고유진? 유진이 형? 희완전은 숙소 근처에 있는 제잔딘 고급 궁정 식당이다. 설마 제잔딘에 들어온 건가?
심장이 쿵쿵거렸다.
전화를 거는데,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이라야.
단정하면서 서늘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형,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제잔딘이야? 학교는?”
-일주일 전부터 의사(義士: 난민을 돕는 등 공익에 이로운 일을 하는 오러 유저, 정치계 입문 단계)가 됐고, 제잔딘에는 방금 들어왔어.
8개월 만에 4년제 학교를 졸업하다니.. 역시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소식 들었어. 청산가리가 들어간 쿠키를 받았다면서.
..아.
-네 애완견, 말랑이였나? 진심으로 명복을 빌어.
심장이 찌릿했다. 난 가슴을 부여잡았다.
“응, 고마워.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숙소에도 데리고 들어갈 정도로 아꼈는데 상심이 컸겠구나.
지끈거리는 심장 박동을 무시하기 위해 애썼다. 부모님도 민이도 멤버들도 말랑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나도 면역이 없었다.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팬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내 불찰이야. 좀 더 깨끗하게 정리하고 갔어야 했는데. 너는 착하고 성실하니까 금방 팬들의 사랑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유진이 형의 순수한 말에 상처받는 내 자신이 꼴볼견이었다. 진정하자.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권수한의 집,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그의 침실.
그리고 나는 팬들의 사랑을 확인했다.
며칠 전이면 몰라도 이제는 안다.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과자를 선물 받고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싫어한다고 여겼던 그때에도, 내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편지를 보내왔음을.
“아니야.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형도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사과할 일이 아닌데 사과 받으면 오히려 상처야.”
-.......
“어? 뭐라고?”
형이 조그만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렸는데 들리지 않았다. 다시 묻자 형은 하하, 낮게 웃었다.
-네 말이 맞다고. 그나저나 너랑 애들 보려고 일부러 들어왔어. 늦지 않게 와야 해.
“응, 알았어. 이따 봐.”
슬슬 숙소 짐정리도 해야 하고 멤버들도 만나봐야 할 시기이긴 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다가 전화라는 걸 깨닫고 알겠다고 답했다.
유진이 형은 그럼 이따 보자. 하고 끊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난 인터넷에 고유진을 검색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입국 기사가 도배되고 있었다. 아무거나 기사 하나를 터치했는데, 댓글에 내 얘기가 있었다.
┗이라 때문에 들어온듯
┗온 김에 엔돌핀 재합류ㄱㄱㄱㄱ
┗식시티 나오고 여섯 명으로 새 그룹 하면 안 되나? 이라 고유진 둘다 못 잃어..ㅠㅠㅠ
┗고유진 그립다 이런 아이돌 전무후무 할 거야
맞는 말이다. S급 소울오러유저 아이돌은 유진이 형이 최초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만인에게 공평하며, 정의롭고 자애로운 동시에 날카롭고 서늘한 면을 지녀서 특이하고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기가 많았다. 형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리더십과 카리스마. 제이가 위압감을 주는 카리스마라면, 유진이 형은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카리스마였다. 나도 형을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고유진이 돌아왔으니, 이제 엔돌핀의 팬들은..
머리가 아프다. 두통약을 입에 털어 넣고, 나가기 위해 외출복을 입고 있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제이였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제이.”
-이라, 들었어? 유진 형 왔다고 방금 전화 받았는데.
“응, 지금 나가려고.”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는군.
제이는 허탈한 듯 말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통화는 자주 했지만..
-희완전으로 어떻게 올 거야? 대중교통은 위험해. 사람들이 너 보고 가만 안 둘 거다.
“택시 부르지, 뭐.”
-지금 어댑터 아파트 단지 앞이니까 준비되면 나와.
“어? 야, 제이!”
제이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차 끌고 나온 건가. 하지만 이상했다. 유진이 형은 만나자는 연락을 이제 막 돌리고 있는데, 제이는 벌써 이 근처라니.
혹시 제이는 만날 약속도 없이, 그냥 와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제도, 그저께도...
제이와는 할 얘기가 많다. 끝마쳐야할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녀석도 알 것이다. 저번에 느꼈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얼굴을 마주할 때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래서 만남을 피해왔지만, 제이는 이제 기다려줄 인내심이 동났나 보다.
옷을 마저 입고 폰을 들었다. 권수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깨끗이 잘 먹었네. 맛은 있었나?]
점심 먹고 나서 보낸 빈 그릇 사진에 대한 답장이었다.
[맛있었어요 형 오늘도 늦어요?/]
권수한 [9시쯤 들어갈 거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배불러서 생각나는거 없는데]
권수한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바로 말해줘]
[넹 >ㅇ<]
9시면 배고파지려나. 안 배고파도 많이 사오라고 해서 이 사람이나 먹어야겠다. 권수한은 지금은 뭐하고 있냐고 물었는데, 난 웃고 있는 토끼 얼굴 이모티콘 하나만 보내며 대화를 끊었다. 유진이 형이랑 만나기로 했다는 얘기는 굳이 안 써도 되겠지.
문을 도어락에 열쇠까지 잠그며 항상 이 시간 쯤 와서 나랑 시간을 보내주는 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민아. 나 지금..”
-형, 전화하려고 했는데. 나 지금 아파트 입구. 현관 열어줘.
“벌써 왔어? 지금 나갈 거라서 전화했는데.”
-나갈 거라고? 씨, 진즉 말하지.
“미안..”
-어디 가는데? 누구 만나? 어디서? 멀어? 늦게 와?
민이는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물었다.
-혹시 고유진 만나? 입국 기사 떴던데.
“...어, 멤버들 만나기로 했어.”
-...제느.. 권제이도?
민이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확하고 기분이 업된 게 전해져 왔다. 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응, 만나는데.”
-..나.. 나도 데려가!
민이가 허겁지겁 말했다.
-그 어댑터가 나한테 형이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엄마아빠도 형 혼자 두지 말라고 했으니까 형 옆에 있어야 돼. 나도 갈래! 제, 제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겁나 귀찮지만 부탁받은 거 때문에 가는 거야!
다급한 말투에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묻어나왔다. 제느님 만나고 싶어 얼굴 보고 싶어 대화하고 싶어!! 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주 귀여웠다. S급 모션 오러 유저 제이는 모셔너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존재인 걸 안다. 나도 마음 같아선 민이를 데려가 소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무거운 얘기가 오갈 텐데 15살 밖에 안 된 어린애를 데려가 앉혀놓기도 뭐하다. 엄밀히 말하면 외부인 이기도 하고.
-형, A4 용지 같은 거 있어? 아니, 앨범이나 뭐 그런 것 좀 갖고 나와라. 사인펜도!
“...알았어. 지금 내려갈게, 앞에서 기다려.”
그렇지만 역시 잔뜩 들뜬 민이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다시 집에 들어갔다. 권수한 집 서재에 있는 앨범들 중 하나랑 매직을 챙겨서 백팩에 넣고, 엔돌핀 단톡방에 들어갔다.
[내 동생도 데려가도 돼?]
문형 [동생? 이민이? 제잔딘 왔어?]
문형 [ㅇㅇ 데려와]
야단이 [네 형 데려오세요]
한새 [ㅋㅋㅋㅋ너 동생 앞에서 쭈구리되는 거 좀 보겠넼ㅋㅋㅋ]
다들 흔쾌히 받아줘서 다행이다. 유진이 형한테도 따로 메시지했다. 형은 [^^ 응. 데리고 와]라고 답장했다.
현관에서 만난 민이는 양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 데려갔으면 정말 실망했을 것 같다.
“어떡하지? 나 안 이상해? 옷 대충 입었는데. 아씨, 운동화 새로 산 거 집에 있는데 가지고 올걸.”
“안 이상하고 귀여.. 멋있어. 기다려 봐. 제이한테 전화할게.”
“제이한테 왜 전화해???”
“제이 차 타고 가기로 했거든.”
민이가 입을 쩍 벌렸다. 눈도 입도 동그래지더니 끄아아 제자리에서 오두방정을 떨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 조금 놀란 상태다. 민이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내겐 보여주지 않는 원래 성격인가 보다. 자꾸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오랜만에 만난 제이는 요전보다도 더 핼쑥해져 있었다. 턱선이 날카롭게 빠진 게 하루 세 끼는 먹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제새끼 왜 얼굴이 반쪽이 됐지. 마음이 아프다.
“제이 형 되게 늠름하시다...”
민이가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지만 내 눈엔 지쳐있는 청년만 보일 뿐이었다. 제이는 나를 보고서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너 잘 챙겨 먹고 있는 거냐? 얼굴이 반쪽이 됐어. 그 어댑터가 잘 안 챙겨줘?”
“요즘 하루 다섯 끼 먹고 있는데.”
“뭘 먹길래 찌라는 살은 안 찌고..”
제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난 일주일 사이에 무려 5kg이나 쪘다. 권수한은 집에 오면 날 체중계 위에 올려놓는 일부터 한다. 얼마 전에 인터넷 하다가 한 끼 굶은 적이 있는데, 그걸 알고 무섭게 화를 냈다. 큰소리 친 건 아니지만 그 고요하고 매서운 눈빛이 무서웠다. 그 후로는 먹고 나서 인증샷도 꼬박꼬박 보내야 한다. 날 살 찌워서 잡아먹으려는 속셈인 것 같다.
제이랑 민이에게 서로 소개해주고 차에 올라탔다. 민이는 의외로 제이 앞에선 수줍음만 많아져서 ‘사인해주세요’의 ‘ㅅ’도 꺼내지 못했다.
오랜만에 타는 제이 차는 변한 게 없었다. 나란히 진열된 조그만 동물 인형 다섯 마리는 우리가 인형 뽑기로 뽑은 것이다. 저거 뽑느라고 8만원은 썼던 기억이 난다. 나랑 같이 가서 맞췄던 군번줄도 룸미러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다. 선바이저 거울에는 아직도 스티커가 붙여져 있을까? 글러브 박스에는 내 전용 이불이었던 다갈색 담요가 곱게 개어져 있을까. 제이 몰래 콘솔 박스에 넣어뒀던 사탕은...
조금 기분이 가라앉아서 조수석에 앉는데, 앉자마자 제이가 상체를 들이밀었다.
“..안전벨트 매주려고.”
“...어, 감사.”
나도 맬 수 있는데 항상 이 녀석이 매어주고는 했지. 난 ‘내가 맬 거야’라는 말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앞머리에 제이의 단단한 턱이 스쳤다. 숨결이 닿을 것 같아서 숨도 쉬지 않고 내 허벅지만 내려다보았다. 제이는 아주 느긋하고 천천히 안전벨트를 둘러 주었고, 마지막에 내 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왜?”
“얼어 있지 마. 한때 네 차처럼 자주 탔었잖아.”
“.......”
“다 잊지는.. 않았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제이는 씁쓸하게 웃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녀석 답지 않게 힘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런 제이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쓸쓸해 할 거면 왜 그런 선택을 했어? 이렇게 미련 있는 것처럼 굴 거면 왜 그랬어?
네가 선택했잖아. 네가 선택한 결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