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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고 있는 제이를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권수한이 아주 냉정하게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지.” 했다. 날 끌어안고 있던 제이는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놀랐다. 아마 권수한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신발도 좀 벗고.”
그제야 나도 제이가 신발을 벗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제이의 귓불이 확 빨개졌다.
“신발 주고 가서 세수 좀 하고 와. 욕실 저기 있어.”
난 제이한테 소곤거렸다. 너무 친절한 내용이었는데 제이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신발 줘.”
“....씨..”
제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신발을 벗었다. 난 그걸 받아들려고 했는데 그 전에 권수한이 낚아채서 현관에 내팽개쳤다. 제이는 굉장히 쪽팔려하면서 운 흔적이 역력한 얼굴을 어정쩡하게 가린 채 욕실로 향했다.
“죄송해요. 신발 안 벗은 줄 몰랐어요.”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자리에나 앉아.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네.”
권수한과 나는 나란히 카펫 위에 앉았다. 나는 TV를 껐다가 너무 적막함이 흘러서 다시 켰다.
제이는 아까의 나처럼 앞머리까지 젖은 채 욕실을 나왔다. 나란히 앉은 우리를 보고 볼을 씰룩이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물 세 컵과 과자가 올라와 있는데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
제이가 불만이 서린 눈길로 권수한을 노려봤다. 이 자리에 꼭 있어야 겠냐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아마 제이는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을 것이다. 나도 그 필요성은 느끼지만 여긴 권수한의 집이고, 권수한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하는 건 좀 건방진 것 같다. 왠지 불편해진 마음에 앉은 자세를 바꾸자 제이가 날 쳐다봤다.
“..그동안 몰라서 미안해.”
“.......”
“나만은 네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은, 네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걸 모르고 널 몰아세우기만 하고.. 한심하게.”
제이가 자책하려 하길래 난 급히 입을 열었다.
“야,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모르지. 자책하지마.”
“아니, 넌 충분히 신호를 줬어. 내가 병신같이 눈치 채지 못했고.”
그 말에 심장이 지끈, 했다.
“너는 그동안 몇 번이나 내게 기회를 줬는데 내가 그걸 잡지 못했어. 네가 오러를 펼쳐 나를 보호했을 때도, 도시락 대신 컵라면을 먹고 왔을 때도, 팬사인회에서 받은 음식들을 공유하지 않았을 때도. 내가 관심을 기울였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는데. 나는 바보처럼 흘려듣기만 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심장이 몹시 지끈거렸다. 다시 울음이 나올 것 같다. 존나 울보가 됐다. 난 제이의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을 참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며 노력했다.
“미안, 이라. 미안해. 네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걸로 그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그런 두려움 속에 혼자 내던져놔서 미안하다. 널 몰아붙이기만 하고..”
“아니야, 괜찮아. 나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힘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선택이었고, 다 각오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경솔하게 쓰레기 버리는 바람에 논란이 커져서 너랑 멤버들한테 미안한데.”
“그렇게 말 하지마. 다들 너한테 미안하다고 그랬어. 얼마 전에 협박 편지도 받았다면서. 팬들 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일 없는 줄 알았어. 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저런 말은 왜 하는 걸까? 다 알았잖아. 너네 팬들이 나 싫어하는 거 다 알고 있었잖아. 당연한 거니까 너네도 방치했잖아. 다 알려진 마당에 왜? 내가 새삼 상처받을까봐?
제이에게 이죽거리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제이는 잘못이 없는데.
그때 내 뒷머리를 간지럽히는 손길이 있었다. 권수한은 자기 손이 뭘 어쩌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장이 안정되어갔다. 반면 제이의 눈빛은 불같이 타올랐다.
“오러 증폭이 아니라 오러 치유였던 거지? 둘이서 그동안 만나왔던 건.”
“제이라고 했나. 팬들이 다 이라를 좋아한다는 건 무슨 소리지? 내가 이라한테서 들은 거랑 좀 다르군. 이라는 엔돌핀의 팬들이 다 자신을 싫어한다던데.”
제이는 자신의 질문과는 다른 소리를 하는 권수한에게 발끈했다가 곧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권수한에게 뿔이 나서 머리를 흔들어 손을 뿌리쳤다.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요.”
“무슨 소리야. 팬들이 이라를 얼마나..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됐어. 다 아니까 애써 숨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랑 멤버들도 다 알았잖아. 나 미움 받는 거.”
“네 합류 초기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이제는 다 너 좋아하잖아. 네 목소리 하나에 몸짓 하나에 다들 환호하고 더 사랑 못해서 안달인데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거짓말 안 해도 돼. 미니 팬미팅할 때마다 나 좋다는 팬이 없어서 진행이 늦어졌잖아. 선물 박스도 맨날 내가 제일 적었고. 저번에는 단체 서포트 도시락 주면서 나한테만 편지 없었던 적도 있었지. 단체 선물 들어올 때도 나만 없고. 너도 알다시피.. 왜 숨기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네.”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는데, 제이의 눈빛에는 점점 절망이 어렸다. 권수한은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서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제이는 참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번 앨범 개인 커버로 5종 나간 거 알지?”
“어?”
“네가 제일 많이 팔렸어.”
난 제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회사로 보내오는 팬레터, 네가 제일 많아. 개인 팬카페 회원수, 네가 두 번째로 많고. 개인 티저 영상 조회수도 네가 두 번째고. 당장 공식 팬사이트에서 받는 편지글 개수만 세어 봐도 알잖아!”
제이가 소리쳤다. 난 깜짝 놀랐다가 권수한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온 덕분에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라는 몰랐던 것 같군.”
“왜.. 왜 몰라? 왜..”
“인터넷을 안 하면 조회수든 편지글이든 얼마나 받는지 모를 수 있지. 실제로 인기를 체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받지 않는다든가, 선물 박스가 적다든가 하는 불운이 계속 된다면, 들어가지 않는 인터넷에서 인기가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아니면 혹시 누가 애기를 해준 적이 있나?”
“.......”
“누가 이라한테, 합류 초기와는 달리 팬들은 이제 모두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나?”
“그런 건.. 당연히 알 거라고,”
“당연히 모르겠지. 얘길 들은 적이 없다면.”
제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 얼굴도 아마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셋이서 짠 듯이 말이 없었다. 나는 머릿속이 무척 복잡했다. 혼란스러웠다. 제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마치.. 내게 팬이 있었다는 소리 같아서.
말이 안 되잖아.
미니 팬미팅에서 맨날 나만 선택 당하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 선물 박스 수가 제일 적은 것도 사실이고, 서포트 도시락이 들어올 때 내 편지만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제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가슴 부근에 손을 올리자 둘이서 동시에 반응했다.
“왜 어디 아파?”
“왜 그러지?”
“...머리가 아파요.”
가슴을 잡고서 머리가 아프다는 나를 보고 권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권수한은 내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군.”
난 권수한에게 몸을 기댔다. 제이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정말 간신히,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꼿꼿이 세웠다. 권수한이 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고,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감싼 채 속삭이듯이 물었다.
“좀 쉬는 게 낫겠는데. 나머지 얘기는 나중에 하지?”
“아니요. 괜찮아요.”
난 권수한의 손을 잡고 내 이마에서 뗐다. 권수한은 무척 할 말 많은 얼굴로 날 보았다. 권수한의 큰 손이 내 이마를 어루만진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난 그것으로 두통과 혼란스러움이 좀 가라앉았다.
제이는 입을 꾹 다문 채 뜨거운 눈길로 권수한과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제이를 보며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내가 사장님한테 부탁한 건, 대중에게 알리자는 게 아니라 그냥 멤버들한테만 알리겠다는 거였어. 앞으로는 내가 너희 팬들이 주는 도시락을 먹지 않아도, 내 앞으로 오는 음식을 공유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수 있게.”
“‘너희’ 팬이라고 하지마. 다들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팬사이트는.. 들어가 볼게. 팬카페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팬카페에는 팬들이 엔돌핀 멤버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게시판이 있는데, 아직 ‘to 고유진’ 카테고리가 있으며, 나는 일부러 내게 상처가 될 글을 찾아 읽는 타입은 아니기에 들어가지 않은지 한참 지났다. 예전에 팬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로 병아리 팬처럼 그만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번에도 들어가서 그런 글들만 읽게 될까봐 무섭다.
“...지금 이런 말 하면 이라 네가 더 머리 아플 수도 있겠지만.”
제이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화를 삭이려는 것이다.
“멤버들 다 사장한테 화가 났어. 함구해야 할 걸 함구해야지 누구보다 가까운 우리한테 숨기도록 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도 않고 오히려 너를 탓하는 행태에 질려서, 지금 우리끼리 계약 해지 하자는 말도 나왔어.”
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계약 기간은 남아 있지만, 아티스트의 건강이 위험해질 정도로 방조한 건 충분히 해지 사유가 될 수 있으니까. 여론도 우리 쪽이고, ..너.. 괜찮아?”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 두통약 숙소에 있는데 어떡하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대답을 못하고 있자 권수한이 오러를 흘러 넣어줬다. 내 오러와 그의 오러가 부드럽게 합쳐져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와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오러 치유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제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계약 해지하면.. 엔돌핀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건데 다들 괜찮대? 너네 팬들은?”
“다 각오했고, ‘우리’ 팬들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너 왜, 그런 반응이야.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좋아할 줄 알았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제이는 어딜 가든 인기 많을 것이다. 계약하자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곳이 수두룩하겠지. 문 형도, 야단이도, 한새도 모두 식시티를 나가서도 부르는 곳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민 욕받이로 불릴 정도로, 죽이려고 시도할 정도로 안티가 많은 나는? 날 데려가려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내겐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다. 나는...
“너 혹시 이 회사 나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냐 지금?”
제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아니야. 나가고 싶지. 나가면 좋겠지.”
하지만 내겐 다른 기회가 없단 말이야. 여길 나가면 나는..
“대체 뭐야. 그럼 왜 그러는데?”
“.......”
“씨.. 넌, 제발 말을 좀 해.”
얼마나 답답할 지 이해한다. 하지만 마음에 있는 답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척 어렵다.
청산가리 일을 밝히고 나니까 새로이 문제되는 게 많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밝힌 걸 후회하지는 않을 만큼만 고민들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계약 관련해서는,”
권수한이 입을 열었다. 너무 적절한 순간에 끼어들어줘서 고마웠다. 오러로 내 감정을 읽은 걸까 싶을 정도로.
“내일 이라 부모님이 오시면 다시 이야기하지. 너희도 어른과 함께 상의해야 하는 부분이고.”
“..그쪽이 끼어들 일 아닙니다만.”
“너야말로 무턱대고 대답을 강요할 때가 아닐 텐데.”
날카로운 말을 권수한은 무심하게 받아쳤다. 제이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반면 권수한은 냉정하고 차분했다.
난 더 머리가 아파졌다..
저녁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제이의 핸드폰도 녀석을 찾는 전화들로 계속 울리는 상황이라서 일단 얘기를 끝내기로 했다.
내가 현관에 서서 제이를 배웅하자 제이는 내 뒤에 선 권수한을 흘깃 보고 내게 물었다.
“숙소에는 언제 돌아올 생각이냐. 계약 관련해서도 우리끼리 대화를 해봐야지.”
“어.. 글쎄.”
“숙소에 가면 이라를 치료해줄 어댑터는 있고?”
권수한이 제이의 정곡을 찔렀는데 사실 내 정곡도 같이 찔렸다. 힘든 일밖에 떠올릴 수 없는 숙소보다는, 좋은 기억만 있고 날 치유해 줄 사람이 있는 이 집이 훨씬 좋다.
내가 머뭇거리자 제이는 기분이 상한 듯 했다.
“네가 숙소가 싫다면 따로 집을 구할게. 이쪽 부근으로.”
“네 기분과 어댑터의 치유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는 게 좋겠군.”
“..나는 이라한테 물어봤습니다. 왜 자꾸 그쪽이 끼어듭니까?”
“미안하게 됐군. 하던 얘기 계속 해.”
권수한을 노려보는 제이의 눈길에서 파지직 불길이 튀었다. 제이가 이렇게 유치한 녀석이었나? 권수한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하면서도 무심하게 서 있었다. 제이는 그 모습에 더 열 받아 하는 것 같은데, 아마 권수한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면서 이러는 거다, 분명.
난 이쯤해서 제이를 얼른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내일 오신다고 해서 아직 잘 모르겠어. 내일 연락할게. 조심히 들어가.”
말하면서 열 살 차이 애한테 시비 거는 권수한을 팔꿈치로 밀었다. 권수한은 '내가 뭐'라는 시치미 뚝 뗀 표정이었다. 세상 냉정 침착한 얼굴을 하고서 어쩌면 견제는 이 형이 더 하는 것 같다. 진짜 유치하게..
“.......”
제이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너무 조용하니까 의아함에 앞을 봤다.
제이는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꾹 닫은 입매와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상처받았음이 느껴졌다.
왜..
라는 의문이 생기자마자 이유를 알았다. 나는 방금 너무 무심했다. 제이가 원하는 내용의 대답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작별 인사를 해버렸다. 제이는 자신을 밀어낸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
심장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난 끝까지 정정해주지 않은 채 제이를 보냈다.
권수한과 부딪칠 때도 격렬하게 쏘아보던 녀석은 내 한 번의 외면으로.. 확 타오르던 불길에 물을 끼얹어 숨이 죽어버린 모닥불처럼, 처량하게 떠났다.
난 지끈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권수한은 내가 진정될 때까지 뒤에서 기다려주었다.
얼마 전의 물음이 떠올랐다.
「아주.. 돌이킬 수 없게 된 건 아니지?」
그 물음이 지금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나는 왜 제이를 위로하지 않고 보낸 걸까.
어째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