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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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먼저 제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미안하다고만 반복하다가, 지금 어댑터 아파트에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날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제새끼가 보고 싶어서 저녁에 잠깐 얼굴을 보기로 했다.

 거실로 나가자 권진호와 함께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권수한이 내 시선을 눈치 채고서 잠시 통화를 멈추고 입 모양으로 ‘왜’ 했다.

 “이따 제이 잠깐 만나려고요. 어제 너무 급하게 헤어졌고, 이 해명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도 많을 거고..”

 권수한은 잠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밖에서 만나면 시선이 쏟아질 거다. 아예 집으로 오라고 해.”

 “그래도 돼요?”

 “제발 그래줘.”

 하하.. 나는 웃으며 권수한이 불러주는 집 주소를 제이에게 보내줬다.

 전화가 쏟아졌는데 다 받지는 못하고, 멤버들 전화만 우선 받았다. 멤버들도 제이와 반응이 비슷했다. 날 만나고 싶어 했는데 위치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아마 제이도 멤버들을 데리고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새는 전화를 끊자마자 SNS를 통해 회사와 일부 안티들을 향해 무섭게 화를 내는 글을 올렸다. 문 형과 야단이도 마찬가지였다.

 사장님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내가 받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

 [너 뭐하는 짓이니 진짜 해보자는거야]

 [이렇게우리를 모독하니?]

 [너로 인해 피해받을 회사직원들,멤버들,팬들은 생각도안해?]

 난 연달아 쏟아지는 문자를 보고 있다가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는 어느새 전화를 마쳤는지 차가운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 표정을 풀려고 노력하면서

“왜?” 했다.

 난 조르르 달려가서 문자를 보여줬다.

 권수한은 화면을 캡처하고 자기한테 전송한 후 내게 돌려줬다.

 “이런 쓰레기들 문자에 신경 쓰지 마. 다 해결할 테니까. 가족한테는 말했어?”

 “아직요.”

 “얼른 전화 드리고 와.”

 “넴.”

 전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고 전화가 끊긴 뒤에 난 잠깐 눈만 깜박거리면서 서 있었다. 권수한이 방으로 들어오다가 날 보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난 이 황망한 사실을 그에게 알려줬다.

 “지금 비행기표 끊으셨대요.”

 “들어오신대?”

 “네..”

 “언제 도착해? 부모님이랑, 동생도?”

 “내일요.. 동생도요.”

 “주소 알려드려. 아니, 입국 시간 알려 달라 해. 마중 나갈 테니까.”

 “네..”

 권수한은 부모님과 민이의 입국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얘기했다. 이게 당연한... 일인가? 입국하실 정도로 큰 일은 아니지 않나.. 부모님을 걱정 끼쳐 드려 너무 죄송한데 기분은 좋아졌다.

 대충 통화를 끝내고 나니 권수한이 밥 먹겠느냐고 물었다. 난 아까 먹은 죽이 너무 빨리 소화돼서 배가 고팠던 참이었다.

 권수한은 내 손목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짧게 오러 치유를 해줬는데 불안했던 마음이 없어지고 편안해졌다. 한 5분 정도로 짧게 해주고서 권진호한테 음식 재료를 사오라고 심부름 시켰다. 간장 양념 소불고기와 파프리카 잡채가 주메뉴였다. 내가 고기를 먹어도 되는 건강 상태라고 판단했나 보다.

 권진호가 양손 가득 재료를 사오고 둘이 주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내가 소파에서 발을 꼼지락 거리고 있자 권수한이 이쪽을 보면서

 “빨리 안 와?”

 했다. 권진호가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혀, 형. 무슨, 진짜 피도 눈물도 없어? 이라 군, 앉아 있어요. 쉬고 있어. 우리가 할게.”

 권진호는 경악하다시피 했고 나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 너무 힘들고 피곤해여.. 머리도 아프구..”

 “권진호, 너는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고. 이라, 얼른 와서 파프리카 썰어. 이만한 크기로.”

 권수한이 기다랗게 자른 파프리카를 손에 들고 보여줬다.

 쳇, 난 부모님이 입국하실 정도로 큰일을 당한 사람인데, 어? 꼭 이렇게 심부름을 시켜야 돼? 구시렁대며 일어났다.

 권진호가 내게 부들부들 떨면서 식칼을 건네줬다. 이런 걸 시켜서 너무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칼, 쓸 수 있어요? 자를 수 있어?”

 “네, 칼질 해봤어요.”

 “조심해요. 다치면 안 돼. 형은 이런 걸 시키고 그럴까. 못돼먹어 가지고.”

 이 둘은 친형제가 맞다. 친형제가 아니라면 저렇게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한 체격 좋은 남자를 감히 못돼먹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파프리카를 썬 다음에는 버섯이랑 어묵을 썰어야 했다. 당근도 두 개나 있길래 도마 위에 하나를 올려뒀는데 권수한이 쏙 가져갔다.

 “당근은 썰지 마요? 잡채 당근 없으면 맛없는데.”

 “내가 썰 테니까 너는,”

 권수한이 주방을 둘러봤다. 솔직히 시킬 게 없는 것 같다.

 “가서 TV 보고 있어.”

 “네에.”

 난 칼을 조심히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 사실 마른 행주가 있었는데 괜히 권수한이 걸친 앞치마에다가 탁탁 닦았다. 그 모습에 권진호가 2차 경악을 했지만, 권수한은 슬쩍 미소 지으며 장난치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할 뿐이었다.

 TV를 켜니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홈쇼핑 방송에서 멈췄다. 보험을 들면 믹서기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믹서기 안에서 즙이 되는 야채들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저 채소들이 나인 것 같았다.

 아마 권수한이 없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 권수한이 없었다면, 사장님이 하자는 대로.. 사장님은 과연 뭐라고 논란을 해명했을까? 아이돌이 팬이 준 쓰레기를 버린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해명할 생각이었을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일지도 궁금하다. 인터넷에 들어가 볼까. 분명 기사가 많이 떴을 테니 한번 읽어봐야겠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니 가장 첫 화면에 ‘엔돌핀 이라 독살 시도 고백’이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순간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으려고 했지만 곧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게 떠올랐다. 욕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게워냈다.

 욱... 우욱

 안 그래도 목구멍이 쓰라렸는데 토하고 나니 속도 메스껍고 머리도 아프고 엉망진창이었다. 눈 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물을 내리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있자 발소리가 들렸다. 침착하고 차분한 발소리.

 “이라야.”

 난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세수하면서 입 안을 헹궜다. 권수한은 내게 수건을 건네줬다. 방금 세탁한 것처럼 좋은 냄새가 나는 포실포실한 수건이었다. 내가 얼굴을 부비고 있자 권수한이 가져가서 물에 젖은 앞머리랑 귀까지 꼼꼼하게 닦아줬다.

 그 와중에 또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앞이 흐릿해졌다.

 “아씨..”

 짜증이 나서 욕하자 내 머리랑 어깨랑 손이랑 하여튼 온기가 필요한 곳은 다 안아주던 권수한이 작게 웃었다.

 “왜 욕해.”

 “아, 몰라요. 요즘 낄끼빠빠 안 가리고 계속 눈물이 나잖아요.”

 “울고 싶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울어야지.”

 “..낄끼빠빠 알아요?”

 “그 정도는 알아.”

 권수한은 내 앞머리를 아주 조심히 들어 올리고 포실포실한 수건으로 눈가를 아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나는 권수한에게 기대다시피 하고 욕실을 나오다가 주방 쪽에서 훌쩍 거리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권진호가 쭈그려 앉아 앞치마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흑.. 히끅.. 히끅.”

 설마 나 때문에 우는 건 아니겠지? 나는 얼떨떨하게 권수한을 올려다봤다. 권수한은 한심하단 얼굴로 보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날 바라봤다.

 “놔 둬. 저런 약한 녀석.”

 “저도 울었는데요?”

 “넌 다르지. 넌 괜찮아.”

 권수한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목소리가 들리자 권진호는 벌떡 일어났다.

 “이라 군, 괜찮아요?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해서...흐흡, 큽. 아, 앉아서 쉬어요. 응? 얼른요. 크흡.”

 권진호는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안경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형 쪽은 너무 냉랭하고 동생은 너무 물렁하고, 둘이 합쳤다가 떼어 놔야 할 것 같다.

 권수한은 나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준비할 테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권수한과 권진호는 다시 식사 준비를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서 두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기웃거렸다. 권진호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 피해줬다. 권수한은 얇게 썬 당근을 볶고 있었다.

 “저 하나만 먹어도 돼요?”

 “.......”

 권수한이 말없이 한 젓가락 들어서 입에 넣어줬다. 난 권수한이 다른 재료들도 볶는 걸 다 구경했다.

 넓은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TV를 보는 것보다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권수한의 동선을 방해하는 게 훨씬 기분이 좋았다. 권수한은 내가 자꾸 방해하고 기웃 거려도 한 마디 지적하지 않고, 재료들을 하나씩 넣을 때마다 내 입에도 한 젓가락씩 넣어줬다.

 권진호가 가기 싫다고 찡찡 거리다가 쫓겨나고 얼마 안 돼서 제이가 단지 입구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왔다. 권수한이 정문을 열어줬다. 제새끼가 이제 곧 현관을 열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니 초조함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과 용준이 형처럼 이깟 일로 트라우마가 생기냐는, 그런 반응이지는 않겠지? 나는 제이를 믿는다. 믿기 때문에 더 두렵다.

 불안함과 초조함에 거실을 왔다갔다 하며 서성였다. 권수한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한 마디 던졌다.

 “앉아서 기다려. 정신 사납다.”

 “몰라요. 저 물 좀 마실게요.”

 “떠줄 테니까 앉아 있어.”

 제이가 권수한의 집에 온 다니.. 뭔가.. 너무 이상한 기분이었다. 뒤늦게야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 천천히 마셔라.”

 권수한은 미지근한 물을 떠다 줬다. 난 정말 천천히 마시기 위해 노력했는데,

 딩동.

 “켁, 콜록콜록.”

 벨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거하게 사레가 들러버렸다.

 “쯧..”

 “빨, 리 콜록, 가서 열어줘요.”

 “진정해.”

 권수한은 내 등을 천천히 두들겨줬다. 세상 느긋이 아니었다. 반면 집 밖의 사람은 세상 다급함이 느껴지는 속도로 딩동, 다시 벨을 누르고, 딩동, 또 눌렀다.

 “빨리 열어줘요!”

 “그래, 알았다.”

 내가 거실 한복판에서 초조함에 어쩔 줄을 모르자 권수한이 저벅저벅 걸어가 몹시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문을 열어줬다. 벌컥, 문이 열리자마자 제이가 날 발견하고 눈을 부릅뜨고서 달려왔다.

 “이라, 너! 너, 눈이 왜 이렇게 빨개. 울었냐? 울었어?”

 “아니, 방금 사레 들러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제이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제이의 두 눈은 잔뜩 충혈 되어 있었고, 입술도 오늘 물 한 방울 안 닿은 것처럼 메마른 게 보였다. 시니컬했던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에 모든 감정이 드러났다. 숨길 여유가 없는 것이다.

 걱정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어제의 나는 제이의 불안할 마음은 배려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에 모른 척 해버리고 말았다. 무척 미안했다.

 “신동수 그 새끼랑 이용준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고, 넌 전화도 안 받고, 네가 계속 연락 없으면 무작정 어댑터 아파트에 찾아오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기사가 뜨더니.. 저 어댑터가 그런 글을 올리고.”

 제이의 목소리에는 사무치는 괴로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불같이 타오르는 눈에도, 내 어깨를 붙잡은 손등의 힘줄에도, 짓이겨져 있는 메마른 입술에도.

 “내가, 얼마나. 얼마나.”

 “.......”

 나는 손을 들어 제이의 구겨진 미간을 폈다. 제이는 할 말을 참는 녀석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풀리는 성격이었고, 이렇게 말을 더듬으면서 좀처럼 잇지 못하는 모습은 제이를 안 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너, 그런,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언젠가부터 먹을 걸 나누지 않았던 것도, 우리가 네 것에 손대려고 하면 화부터 냈던 것도, 팬이 준 서포트 도시락을 먹지 않은 것도 전부 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 맞아.”

 늘 얘기하고 싶었다. 나보다 한참 더 큰 제이를 올려다보면서, 한때 심장을 쥐고 흔들었던 잘생긴 얼굴과 올곧은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팬이 준 쿠키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어. 말랑이가 그걸 먹고 죽었고, 범인은 붙잡지 못했어. 그래서 난 그 후로 팬이 준 건 먹지 않아.”

 아. 이렇게 쉬운데..

 내 8개월은 이렇게.. 30초도 안 되는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는 게..

 뭔가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말 못해서 미안해.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지? 사장놈이 밝히지 말라고 해서.”

 “...씨발... 네가 미안하다고 하지 마.”

 제이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제이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안쓰러워서 등을 토닥이며 달래줬다. 그러다 제이의 뒤쪽에 서 있던 권수한을 발견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냉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잔뜩 구겨진 미간에서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음이 느껴졌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꿈틀 거리며 얼른 표정 관리를 하길래 왠지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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