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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에는 내가 엔돌핀의 팬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돌아 쓰레기통에 빵봉지를 버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한새가 옆에서 “검색어에도 올랐어.” 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휘청거렸다. 단단한 손이 허리를 잡아주고 천천히 소파에 앉혔다. 제이는 내게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물 한잔 줄까?”
“응..”
물어본 건 제이인데 야단이가 가지러 갔다. 제이랑 한새가 양옆에 앉았다. 문이 형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무척 화가 나 보였다. 차가운 물을 들이키자 속이 좀 가라앉았다. 문 형은 내게서 빈 컵을 가져가고 바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 영상 진짜 맞아?”
“어, 맞아. 내가 버렸어.”
“..너 지금 그렇게 뻔뻔하게,”
“형.”
제이가 문 형을 나직하게 불렀다. 멤버들은 침착했다. 말 많은 한새도 눈동자를 굴리며 드물게도 분위기에 맞추고 있었다.
‘이유가 있겠지.’
멤버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팬을 너무 사랑하는 문이 형만은 화가 나서 숨을 거칠게 내쉬며 씩씩 거렸다.
나는 언제나 궁금하다. 팬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건 어떤 걸까? 내가 병아리글을 썼던 팬을 좋아했던 것과 비슷할까? 어떻게 팬을 저렇게 아낄 수 있을까? 그 두렵고 무서운 존재를.
“이유가 있었어.”
“그래.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유가 있겠지. 말해봐. 과연 납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 형은 몹시 화를 냈지만, 내가 진실을 밝힌다면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멤버들한테만은 밝히고 싶었다. 처음에는 사장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멤버들에게 밝히지 않아야 한다고, 제이한테만은 절대로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털어놓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이해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참고 있어서 일까. 기회가 왔음에도 입을 열기 무섭다. 이 사실을 밝히는 건 나만의 권리가 아닌 것 같다. 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먼저, 사장님이랑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아.”
“그게 왜 상의가 필요한 일인지 1도 모르겠는데?
“이게 좀 조심스러운 문제라서 그래.”
“혹시 사장님이 사생이라고 험하게 대하라고 했어?”
문 형이 인상을 썼다. 문 형은 숙소 건물까지 찾아오는 팬들을 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거 아니고.. 아무튼 사장님이랑 한번 얘기해보고 말해줄게.”
“네 말은 사장님은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거냐.”
제이도 드디어 화가 나는 건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 사장님이랑 용준이 형은 알아.”
“...하.”
제이는 어이없다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저 분노를 이해하기에 나는 눈을 내리 깔았다.
멤버들은 연이어 여러가지 물어봤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휴, 진짜 혼자 생각만 많은 소울러 새끼.”
한새가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였다. 내가 아마 한새의 이백만 배 쯤은 답답할 것이다.
“뭔가 SNS에 해명이라도 빨리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사람들이 더 루머 부풀리기 전에 빨리 무슨 글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은데요. 입장 정리 중이라는 글이라도.”
“야단이 말이 맞아. 그래도 마침 우리가 돈가스 사진을 올린 날 터져서 다행이지. 돈가스라도 안 올렸으면 걷잡을 수 없었겠어.”
그 말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돈가스 사진이 왜?”
“아.”
“돈가스가 왜..?”
문 형이 화낼 땐 언제고 이제는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멤버들이 모두 그랬다. 난처해하는 얼굴들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휴대폰을 켰다. 다들 한숨을 쉬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HANSAE_ENDORPHIN
[팬여러분>0 오늘도 도시락 감사합니다!!! 돈가스 냠냠 방울토마토도 냠냠!! 멤버들 다같이 맛있게 잘 먹었어요>ㅇ<♡♡♡♡
(사진)]
믿을 수가 없었다. 손에서 힘이 빠져 휴대폰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리는 눈으로 제이를 바라봤다. 제이는 신중하고, 침착하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어떻게..”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나를 속이고 이런 걸 먹여?”
“야, 네가 팬이 준 건 안 먹는다는 얘기가 나와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이 덕분에 논란도 그나마 쉴드 가능한 거야.”
“그래, 너도 맛있게 먹었잖아. 잘 먹어놓고 왜 그래.”
한새랑 문이 형의 목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잘 먹어놓고 왜 그러냐고? 나는 죽을 수도 있었어. 나는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단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어떻게.
“진정해, 이라야. 너 왜 그래?”
“만약, 내가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뭐?”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얼마나 그동안.. 어떻게.. 어떻게 날 속이고 그런 걸 먹일 수 있어?”
난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일어났다. 제이가 바로 내 손을 잡고 턱을 돌려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팬.. 너희 팬이 준 걸..”
눈앞이 흐려졌다. 난 제이를 밀치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멤버들을 믿었다. 네가 우리 팀이라서 좋다는 한새의 그 말을 믿었다. 가끔씩 귀찮을 정도로 나를 챙겨주는 착한 문이 형과 말 수 적어도 늘 침착하고 차분한 야단이를 믿었다. 내가 진심으로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제이를 믿었다. 내내 품고 있었던 희망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기대하고 실망해서 눈물을 흘리는 일도 이제는 지친다. 어떻게 나한테 팬이 준 걸, 그렇게 속여서까지 먹일 수가 있어?
내가 죽었으면 어쩌려고?
죽었으면.
“‘너희’ 팬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라, 진정하고 제대로 얘기해.”
제이는 단호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 목소리가 들리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성적으로 사장님을 기다리자고 생각할 때가 바로 잠시 전이었는데.
“사실 나는... 나는, 작년에,”
입을 열려는 그때 현관 키패드가 순식간에 눌리고 삐리릭, 문이 열렸다. 급하게 들어온 사람은 용준이 형과 사장님이었다.
용준이 형과 사장님은 멤버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자, 잠깐. 너희들 뭐하는 거냐. 이라 때문에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우선 오늘 녹화 하고 나서 얘기하자. 이제 활동 끝났으니까, 시간도 많고, 어?”
“싫어. 지금 얘기해, 이라. 알아듣게 설명해.”
“사장님도 계신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이라도 사장님과 먼저 얘기해야 하지 않겠니? 어?”
“그래, 나랑 먼저 얘기할 테니까. 문아, 뭐하니. 애들 안 돌려보내고.”
사장님이 문 형에게 말하자 문 형은 화를 가라앉히고 멤버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다만 제이는 납득하지 않아서 사장님이 직접 쩔쩔 매며, 자기가 먼저 말해보겠다고 설득했다. 사장님은 머리가 희끗하고 나와 체구가 비슷한 분이라 제이 같은 커다란 놈이 그 앞에서 사납게 노려보자 무척 못 되어보였다.
그 사이 용준이 형은 내 손목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제이와 야단이 같은 모셔너는 목소리를 작게 하고 대화해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난 어깨를 들썩였다.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는 내내 계속 붙잡힌 손목도 너무 아팠다.
용준이 형은 주차장의 회사 차 안에 날 구겨 넣었다.
“너 진짜 미쳤어? 어? 어떻게 거기서 바로 쓰레기통에 버릴 생각을 해!? 제정신이야, 지금?”
형은 내 가슴을 밀쳤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용준이 형이 내게 화를 내고 있다.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미치겠다. 너 때문에 지금 얼마나 곤란한지 알아?”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걸 가지고 있을 수는, 알잖아요. 독이 들어있는데,”
“독이 들었다고? 네 피해망상에 어울려주는 것도 지겹다. 그래, 무섭겠지. 청산가리가 들어있던 선물 때문에 네 개가 죽어서 슬픈 것도 알겠어. 하지만 이젠 극복할 때쯤 되지 않았냐? 네가 어린애야?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딱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언제까지 붙잡혀서 살 건데?!”
형이 소리쳤다. 난 시트를 꽉 붙잡았다.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날 이해해주지 않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형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어깨를 아프도록 잡고 있는 손도 밀어냈다. 눈물이 흐르자 형은 놀란 것처럼 보였다.
“너...”
어제도 울다 지쳐 잠들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을 텐데. 눈물은 내가 어찌할 틈 없이 흘러내렸다. 눈이 따끔거렸다.
“왜, 왜 울고 그러냐..”
“형, 나는 죽을 뻔 했는데.. 그때 나 죽을 뻔 했는데.”
형이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려고 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랑이는 위가 녹아서 죽었고 나또한 그렇게 될 뻔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차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방해했다. 사장님이었다. 제이를 어떤 말로 설득했는지 혼자였다. 용준이 형이 문을 열어줬다. 사장님은 울고 있는 나를 보고서는 용준이 형을 밀어내며, 왜 울리냐고 혀를 찼다.
사장님은 옆에 와 앉았다.
“이라야. 이 상황에서 네가 울면 안 되지. 화 못 내게 선수 치는 거니?”
“.......”
“그걸 바로 버리면 어떡하니? 숙소에다 버리든 했어야지. 난 네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경솔할 줄은 몰랐네. 많이 실망했다.”
나는 엔돌핀의 팬의 준 걸 손에 들고 있는 게 너무 무서웠고 끔찍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들고 있기 싫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 자체로도 숨도 못 쉴 만큼 두려웠다. 그래도 계속 가지고 있었어야 했던 걸까? 내가 경솔했던 걸까? 진짜 어른들은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고맙다고 말하고, 품에 넣고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너 팬들이 준 건 아예 먹지 않고 버리는 거 말이다. 그거 정신병이야. 아무리 소울러라고 해도 지나쳐.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들 중 너처럼 독극물 음식을 받은 사람이 없는 줄 아니? 다들 잘 극복하고 살고 있는데 너는 지금 그까짓 한번으로 대체 얼마나 얽매어 있는 거야? 아주 복에 겨워서. 어떤 무명 신인은 안티라도 있기를 바라더라.”
“.......”
“그만 울렴.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너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구나.”
난 이 순간 사장님이 너무 미웠고, 당황스러웠다. 히끅, 가슴 속에서부터 터지려는 울음소리를 간신히 막고 정신없이 눈물을 닦았다.
“저, 한번, 아니에요.”
주머니를 더듬자 휴대폰이 만져졌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다행히 가지고 왔다.
“이것 보세요. 얼마 전에 팬사인회에서 받은 편지에요. 여기 면도날도 있었어요. 계속 절 죽이려고 한단 말이에요.”
떨리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보여줬다. 사장님은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이런 편지를 받아, 이라야. 인터넷 댓글만 봐도 염산을 붓겠다느니 화형식을 하겠다느니 너네 애들 모두가 악플을 받는데 왜 너 혼자 혼자 예민하게 구니?”
사장님은 일부러 강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염산과 화형식이라는 단어를 듣자 눈이 뜨거운 것과 반대로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차가워졌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멎은 듯했다.
“그냥 다 밝히면 되잖아요. 저 독약 넣은 음식물을 선물 받은 적 있다고. 그 후로 팬이 준 건 먹지 못한다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밝히면 되잖아요.”
“그리고 피해망상증도 생겼다고?”
“.......”
“정신병 생겼다고 사방에 알리자는 말이니? 그까짓 인기 연예인은 누구나 겪는 일 때문에.”
내가 원했던 건 그런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되는대로 말했다.
“네, 알려요. 다 알려버려요. 더 이상은 내가 힘들어서 안 되겠으니까, 내가 병신이 됐든 뭐든 다 알려요.”
“..이라야.”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지 사장님이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차분하게 날 부르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오러를 풀었다.
사장님은 어댑터다.
“상처받을 부모님을 생각해봐. 우리 아들이 반년 넘게 그런 고통을 겪어왔던 사실이 밝혀지면 마음이 어떠시겠니?
사장님의 오러가 넘실넘실 내 안으로 들어왔다.
“멤버들도 말이야. 네가 독 음식을 받고 피해의식이 생긴 것처럼 멤버들도 팬들을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는 거고, 괜히 네 말 때문에 팬덤에 분열 생기면 어쩔 거니? 속상해 하고 마음 아파할 팬들은? 나는 애초에 그 일이 이렇게 커진 것부터가 이해 안 되지만, 그래. 네 나이가 어리고 소울러이니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말이다. 네가 그 일로 이런 지경에 빠졌다면 오히려 멤버들한테는 숨겨야 하지 않겠니? 네 친구들도 같은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싶어?”
난 사장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 동의하지 않는데.. 일정 부분은 맞는 것 같다. 내가 너무 경솔했고, 나만 당하는 일도 아닌데 혼자 이 세상의 비극은 다 내게 온 마냥 굴었다. 별 거 아닌 일인데..
멤버들에게 밝히려던 타이밍에 두 사람이 들어와서 털어놓지 못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멤버들도 두 사람처럼, 그때 한번 때문에 트라우마까지 생길 일이냐고, 그런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직접 멤버들로부터, 제이에게서 예민하다는 말을 들었다면 난 너무 상처 받아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제이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풍경은 수도 없이 상상해왔지만, 그 풍경 속에 날 향한 싸늘한 시선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정말이지 이런 경우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진실을 안다면 날 이해해주리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피해망상증을 앓게 된 걸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 왜 그랬지, 내가? 어떻게 이런 착각을 할 수 있지..? 사장님의 말이 맞다. 이제는 극복해야 할 때인데, 엉망진창으로 굴러 떨어진 채 나아질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 멤버들한테 짐을 떠안길 생각만 하고. 한심하다. 바보 같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침착해져갔다. 억울함도 점점 사라진다. 이젠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라야!”
차체가 쿵, 하고 흔들렸다. 사장님도 용준이 형도 놀라서 창밖을 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서 이 타이밍에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권수한..?”
사장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