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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이용한 내시경 검사는 환자가 아프지도 않고, 정확도가 높아서 굉장히 비싼데, 오늘 내가 받은 검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다 권수한이 돈 내줘서 하는 거지 내가 내는 거였음 절대 안 했다.
“심각해 보이네. 오러 유저가 아니었으면 이미 엉망진창이었겠는 걸. 일단 정확한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와. 너한테 바로 보내줄게.”
“좀 더 빨리, 3일 내로 가능한가?”
“뭐.. 네 부탁이라면 그래야지. 메일 주소 안 바뀌었지?”
“그래. 그럼 부탁한다.”
놀랍게도 내 검진 결과를 가지고 본인은 쏙 빼고 의사와 권수한 지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였다.
“저기요. 저한테 먼저 줘야죠. 아니, 저한테만 알려줘야죠. 내 검사 결과인데, 개인정보 같은 거 침해에요.”
“나는 보호자잖아.”
“참 나. 내 보호자는 우리 엄마랑 아빠거든요?”
“네 부모님께 이 일을 알릴 마음이 있나?”
“.......”
“결과 나오면 그날 만나도록 하지.”
권수한은 내가 입고 있는 가운을 벗기고, 벗어놓은 재킷을 걸쳐줬다. 잠깐 꿀 먹은 벙어리가 됐지만 재킷을 입으면서 계속 구시렁댔다.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의사에게 인사하고 아예 날 데리고 나왔다. 의사가 “이라 군, 잘 가요. 밥 잘 먹고요.”하고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권수한은 자연스레 날 조수석에 태웠다.
“어디 가요?”
“집.”
“권수한 씨네 집?”
“그래. 찜닭 먹을 거다.”
역시 뭘 먹이려 한다. 제이랑 저녁 먹을 때 조금밖에 못 먹으면 어떡하지 걱정은 됐지만 찜닭은 먹어야 하므로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다.
이번엔 전처럼 칼질을 시키지는 않았다. 대신에 밥을 안치라고 했다. 난 이번 한 끼만 먹을 건데 왜 밥을 지어야 하지.. 닭 먹느라 많이 먹지도 못할 테고.. 권수한이 먹을 밥을 왜 내가.. 손님이 밥을.. 어이없어 하면서 쌀을 씻고, 밥솥 취사버튼을 눌렀다.
“밥은 할 줄 아는군.”
“그럼요.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글쎄, 16세부터 자취한 것 치고는 당근도 못 썰던데.”
“모양은 상관없거든요. 들어가면 다 똑같아지는데. 그쪽은 언제부터 혼자 살았는데요?”
“10년 넘었지. 우리는 성인이 되면 타운에 집 한 채를 할당받으니까.”
어댑터는 정부로부터 공짜 집을 1인당 하나씩 받는다. 뭐 어댑터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는데 권수한이 당면 봉지를 쪼물딱거리는 게 보였다. 왜 안 뜯지? 물어보려는 찰나 질문이 돌아왔다.
“당면, 괜찮나?”
“헐~~~ 넣어야죠. 안 넣으려고 했어요?”
난 세상 놀란 표정으로 오버했다. 권수한은 머쓱하게 “호불호가 갈린다더군.”하며 봉지를 뜯었다.
기타 반찬들을 차리고, 젓가락을 손에 쥐고 찜닭을 기다렸다. 찜닭찜닭. 어제랑 그제 합쳐서 빵 한 개 먹은 게 끝이라 너무 배고팠다. 사실 다른 것도 먹었는데 다 토해버렸고.. 그래도 제이가 준 단팥빵은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 제이가 차려준 아침이 요근래 유일한 진짜 식사다. 토하지도 않고 잘 먹었다. 새삼 자각하니 더 배가 고파왔다.
“형, 빨리 밥 주세여. 배고파요.”
찰캉. 말을 끝내기도 전에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숟가락을 떨어뜨린 권수한의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형?”
“뭐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줘요?”
“.......”
“권수한 씨?”
“.......”
“배고프다...”
“..조용히 있어. 금방 되니까.”
배를 쓸며 배고프다는 한 마디가 권수한의 얼음 상태를 깼다. 처음 봤을 때 나를 싫어한다고 확신했던 냉미남 의사는, 배고프고 마르고 작고, 청산가리가 들은 쿠키를 선물 받은 후 음식 트라우마가 생긴 불쌍한 아이돌을 밥 먹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 의사는 참 책임감 있는 진정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나본 어른 중에 가장, 내가 철없는 스물두 살이어도 되는.. 진짜 어른.
찜닭은 살코기가 부드럽고 양념이 너무 짜지도 않아서 맛있었다. 처음엔 젓가락으로 불편하게 먹다가 권수한이 편하게 좀 먹으라고 해서 손에 들고 뜯어 먹었다. 밥도 한 숟갈씩, 당면도 후루룩 빨아들이며 허겁지겁 먹다보면 중간 중간 참나물 무침이나 볶음 김치 같은 반찬이 숟가락 위에 올라왔다. 내가 애냐는 표정으로 권수한을 바라보면 그 냉혈한 같은 얼굴로 시치미 뚝 떼고 찜닭을 뒤적거리는 것이다. 네 숟가락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듯.
깔끔하게 다 먹고 싶었지만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했다. 배가 완전 빵빵하게 불러서 나중에는 꾸역꾸역 먹었는데, 내가 배가 불렀다는 걸 눈치 챈 권수한이 그만 먹으라고 찜닭을 빼앗아갔다. 매번 주던 후식도 안 줬는데 진짜 배불러서 아쉽지는 않았다.
“손.”
“....네.”
소파 아래 바닥에 담요를 깔고 앉아 권수한과 손을 맞잡았다. 서서히 포근하고 따스한 오러가 몸 안으로 들어와 내 차가운 핏줄을 데워주었다.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막노동으로 지친 몸을 뜨거운 온천에 누이는 것과 비슷한 평온함.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고, 따뜻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기도 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 아늑한 별장에서 벽난로의 불을 쬐며 한가로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노곤노곤해...
고개가 꺾어졌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제 어깨에 앉혔다. 폭신폭신한 이불도 안겨줬다. 난 보드라운 이불을 손으로 끌어안고 어깨에 볼을 비볐다.
“...이라.”
어깨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름을 불렀다.
“..왜요...”
“고양이한테 캣닢을 주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왜 자꾸 고양이.. 난 강아지가 더 좋거든여.. 장모치와와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요..”
“...알지.”
말랑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양이한테 캣닙이라면 말랑이에게는 장난감이다. 꼬리를 흔들며 인형을 가지고 놀던 모습, 장난감을 참 많이 사줬는데 장난감 중에서 내 손가락을 제일 많이 좋아했다. 나는 졸려 죽겠는데 자꾸 내 손가락을 물고 빨아서 자다 깨서 놀아준 적도 있다. 인형을 물어다가 내 손 옆에 두고서 저 혼자 손가락이랑 인형이랑 번갈아 핥은 적도 있다. 나름 인형놀이라도 했던 걸까. 고작 작년의 일이다. 작년 이맘때 이 시간에도 나는 말랑이를 껴안고 잠들었고 일어나보면 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다. 그 때의 사진들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 동영상도 있는데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다. 이젠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아무리 바라고 염원해도 영원히.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속에 피어올랐다.
“울지 마라, 이라.”
“안 우는데.. 내 생각 읽고 있어요?...”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감정이 전해져 와.”
내 감정은 울고 있다는 말일까. 물론 울고 싶지만, 지금 너무 울고 싶지만 난 눈물 흘릴 자격이 없다. 그건 나 자신을 동정하는 짓인데, 난 동정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물고 볼을 씰룩이는 나를 권수한이 토닥였다. 천천히 등을 어루만지며 자리에 눕혔다.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권수한은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아주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오늘 스케줄은 오전 씨 싱잉 스테이지, 오후 팬사인회, 오후 엔돌핀 비하인드 촬영으로 꽉 차있다. 이제 다음 주면 활동이 끝나서 앞으로 일주일은 휴일 없이 바짝 땡긴다고 했다.
권수한 [잠 잘 시간은 주는 건가.]
[이동할 때 짬짬이 쪽잠자요ㅜ]
권수한 [식사는?]
[편의점도시락..]
권수한 [ㅡㅡ밥도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하고 잠도 못자게 하고 아주 악덕기업이 할짓은 다하는군.]
[졸리고 배고파요ㅜㅜㅜ]
권수한 [지금이라도 조금 자둬. 내 메시지 무시해도 되니까.]
[햄버거먹고싶당.. ]
권수한 [나중에 만나면 배터질 때까지 먹게 해주지.]
[기대할게요ㅋㅋ 이제 공연장 도착해써요]
권수한에게 투정투정하다보니 공연장에 도착했다. 해변에 있는지라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탁 트인 수평선과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에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허벅지까지 오는 워터슈즈를 신고, 이번에는 당당하게 스토리지를 확인했다. 가득 차 있다.
“이라, 네 슈즈 확인했어?”
“응, 정상이야. 너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봐.”
제이가 묻길래 활짝 웃으며 답했다. 대기실을 거닐며 목을 푸는데 야단이가 다가왔다.
“형, 워터슈즈 스토리지 차 있어요?”
“응~ 확인했어. 너도 해봐.”
착한 우리 야단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귀가 붉어졌다. 마이크를 차고 있는데 이번엔 한새가 물었다.
“야, 너 슈즈 줘봐. 또 안 열어봤지?”
“형님이 벌써 다 봤다~~ 걱정 노노하고 너도 열어봐봐.”
짜식. 손을 흔들어주고 마이크 차라고 보냈다. 문이 형은 내가 권수한이랑 톡을 하고 있을 때 왔다.
“너 슈즈 좀 보자. 가만히 있어봐.”
“형, 다 확인했어. 정상이얌. 형도 한번 봐봐”
문이 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갔다. 난 권수한에게서 온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권수한 [공연 잘해. 워터슈즈 스토리지 확인하고.]
내가 어련히 할까.. 다들 웃기는 사람들이야.
수면 위를 걸어 다니고 높은 파도 위에서 미끄러지고,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햇빛이 반짝이는 파란 바다를 누볐다. 발 아래에 바다가 부딪치는 느낌은 언제나 새롭다. 씨 싱잉 때는 방수되는 복장인데, 바닷가라 기온 자체가 낮은 탓에 무대를 마치고 나면 굉장히 춥다. 하지만 넓고 푸른 해수면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광활한 바다 위에 모래 사막과 선인장 같은 환상을 만들고 있노라면 추위 따위는 상관없어진다. 백번은 더 추울 수 있다.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아씨, 추워!!”
추워서 욕이 나온다. 팬사인회도 씨 싱잉 공연장 내부에서 진행되는 지라 바닷가를 벗어나지 못해서 더 춥다. 오들오들 떨며 제이가 준 간이 난로에 찰싹 달라붙으니 한새가 혀를 찼다.
“뭐가 춥다그러냐. 체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어.”
“넌 안 춥냐??”
“어, 전혀. 넌 무슨 어린애냐?”
“어우씨..”
“이라 손목 봐봐. 이렇게 말랐는데 안 추운 게 이상하지.”
문이 형이 담요를 덮어줬다. 난 난로를 안고 담요 속에 파고들었다.
“.......”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가 담요를 빼앗아가더니 자기 품에서 벌렸다. 그리고는 얼른 품에 파고들라는 듯이 날 보는데.. 미친 거 아닌가?
얼마 전에 저녁 식사는 제이와 함께 하기로 해놓고서 권수한 네서 자다가 아침에 들어가 버렸다. 그때 제이가 엄청 삐쳐가지고 고분고분하게 제이 말은 다 들어주고 있는데,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
“팬서비스야. 팬들이 보고 있잖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이유를 댄다. 진짜로 팬들이 지켜보고 있기는 한데 이게 왜 서비스인지는 1도 모르겠다. 어쨌든 춥기도 하고, 제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으므로 품에 안겼다.
“꺄아아아.”
환호가 터져 나온다. 대체 이게 왜 환호거리일까.. 팬들은 제이가 뭘 하든 다 멋있어 보이나보다. 내 눈에도 그렇지만..
한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야, 좀.. 위험하지 않냐? 제이 너 커밍아웃했는데 이라 안고 있으면, 막 스캔들 나면..”
“괜찮을 거야. 얘넨 원래 이런 스킨쉽은 해왔으니까.”
나는 문이 형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속으로는 우리가 얼른 떨어지길 바라겠지만 팬들이 좋아한다면 상관없다는 마인드는 진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팬들이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좋았지, 참...
난 제이의 품 안에 얼굴 부비며 눈을 감았다. 제이가 내 어깨를 담요로 감싸줬다. 왜인지 환호성이 더 커진 기분이다.
나도 나를 병아리 같다 해준 팬이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유일한 팬이 환호성을 질러준다면, 뭐든.
팬사인회 준비가 끝났다고 매니저 형들이 불렀다. 용준이 형이 사장님한테 불러갔기 때문에 두 명으로 우리를 케어 하느라 바쁜 형들이었다. 무대로 나가기 전 누나한테 걸려서 앞머리를 점검 당했다. 아까 제이 품 안을 너무 베개처럼 사용하는 바람에..
급히 머리칼을 매만지고 다시 가는데 통로에서 비하인드 캠이 한새를 찍고 있는 게 보였다. 난 캠을 들고 있는 둘째 매니저 형 뒤쪽으로 빙 돌아갔다.
“아이고, 이라야.. 카메라를 피하면 어떡하니.”
“아, 한새 찍고 있길래요.”
“그럼 자연스럽게 옆에 와서 끼어들어야지.”
굳이 왜 그래야 하나.. 일단은 넹, 하고 한새 옆에 끼어들었다.
한새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 팬미팅을 앞둔 소감 따위를 물었다. 당연히 무섭고 겁나지. 늘 그렇듯. 엔돌핀의 팬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이 시간은 늘 설레는 것 같네요. 떨리고. 한새, 너는 어때?”
“나도 떨려. 덜덜덜, 심장 겁나 뛴다.”
“얼른 가자. 문이 형 뿔나기 전에. 여러분, 지금 바로 만나러 갑니다~~!”
캠에 손인사를 하고 무대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엔돌핀입니다!!”
구십도 각도로 인사하자 환호가 쏟아졌다.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