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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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샌드 싱잉이 잡혀 있어 새벽부터 일어났다. 어제 팬사인회에서 받은 음식물들을 배낭 안에 쑤셔 담고, 대기실에 도착해 멤버들이 메이크업을 받는 사이 용준이 형에게 처리를 부탁했다. 용준이 형이 눈살을 찌푸려서 깜짝 놀랐다. 앞으로는 웬만하면 내가 해야 하나..

 위가 쓰리고 머리도 아프고 컨디션이 엉망이다. 이럴 때는 병아리 팬의 글을 봐줘야 한다. 폰 화면을 켜니 메시지창이 반짝였다.

 권수한 [내일 오후 2시로 잡아놨다. 자정이 넘으면 아무것도 먹지마.]

 [ㅇㅇㅋ ㄴㅇㅂㅇ]

 대기실 오기 전에 이런 대화를 나눴는데 그 뒤로 하나가 더 와있었다.

 권수한 [ㅇㅂㅇ../]

 ?? 무슨 뜻이지?

 [먼소리에요?]

 권수한 [너는 무슨 뜻인데]

 [내일봐요]

 칼답하는 인간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난 궁금증을 못 이기고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컬러링이 이번 타이틀곡이었다. 두 소절이 지나고 잔뜩 마뜩찮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왜.

 “뭐라고 보낸 건데요? 무슨 뜻인 줄 알았는데?”

 -...표정인 줄..

 표.. 미친.. 푸후훕.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푸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아니,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나이가 그렇게 아저씨도 아니면서..

 -그만 웃지?

 “크푸흐흐. 아, 미쳐. 그럼 손 흔드는 표정 보낸 거예요, 나한테?”

 -...바빠서 이만 끊지.

 “크하하하. 존나 웃겨, 진짜.”

 -끊는다.

 “네 크크크픕흐흐.”

 달칵. 끊는 소리가 나고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냉혈한 같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ㅇㅂㅇ/ 를 꾹꾹 터치하는 상상을 하니 무대 할 때도 웃을까봐 걱정될 정도였다.

 “뭐 재밌는 게 있다고 그렇게 웃냐?”

 헉. 깜짝이야.

 중앙 거울 앞에서 헤어 하던 제이가 어느새 앞에 와 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까 다들 날 보고 있었다. 처음 웃음을 터뜨린 갓난아기를 보는 듯한 흐뭇한 얼굴이다. 심지어는 둘째 매니저 형이 캠코더로 찍고 있기까지 했다.

 앞머리를 까고 눈썹이 없는 상태의 한새놈이 쟤 저렇게 웃는 거 간만이라며 껄껄댔다. 난 매니저 형의 캠을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빼앗았다. 한새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가는 날 보면서 겁이 질렸다. 그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팬여러분, 보세요. 한새는 눈썹이 없습니다! 평소엔 내린 머리라 몰랐겠지만 보세요! 일주일전에 지가 지 눈썹을 밀어버린 처참한 아이돌의 모습을 보세요!”

 “야. 너, 이 씨..!!”

 “여러분이 보아왔던 눈썹은 한새의 진짜 눈썹이 아니었습니다..!! 한새 오빠 이마는 민둥산이에요!!”

 “야. 고만해라. 내가 잘못했다. 아놔..”

 “이라야, 한새 그만 놀려. 사람 약점 가지고..”

 “형이 더 나빠!!”

 한새의 항복을 받아내고 쿡쿡 웃으며 캠을 돌려줬다. 문이 형도 야단이도 매니저들과 스태프들도 다들 웃고 있었다.

 소파로 돌아가자 제이만 심각하게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내 폰이었다.

 “야, 그거 내 핸드폰이잖아.”

 “어.”

 “..되게 당당하다?”

 “권수한이랑 카톡도 하냐.”

 “아, 내놔라 좀.”

 “내 것도 봐.”

 제이가 자기 폰을 건네줬다. 잠깐 혹했으나 혹시 대화 중에 그 사건과 관련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넘어가지 않았다.

 “빨랑 줘라? 카톡 시찰 금지요!”

 “진짜로?”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

 제이는 내가 진심으로 거부하는 걸 알고 돌려줬다. 표정은 열 받아 하는 것 같은데 차마 나한테 화는 못 내고, 카메라가 돌아가니 욕도 못하고. 답답해하는 그 얼굴이 왠지 귀여웠다.

 모래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샌드 공연장은 스카이 공연장 면적의 3배로 굉장히 광활하다. 전광판이 사방에 있으며, 관객들은 망원경을 준비해 온다.

 랜드 슈즈의 끈을 묶는데, 문득 이 슈즈의 스토리지를 점검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저번에 한번 해프닝이 있었다고 해서 다른 슈즈도 점검하는 건 예민한 피해망상으로 취급당할까봐 섣불리 열지 못했다.

 “야, 이라. 너 슈즈 봐봐.”

 그때 제이가 큰 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이번엔 잘 충전됐는지 봐야지.”

 “어? 괜찮겠지 뭐.”

 “그러다 큰 사고 나는 거다.”

 “그래 그래, 잘 봐봐.”

 “저 새ㄲ.. 저 자식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미리 점검 안 하고. 나라면 허가 안 떨어져도 그냥 전용 슈즈를 사왔을듯.”

 “이라 형은 가끔씩 이상한 데서 대담해지네요.”

 멤버들이 한 마디씩 하고 나자 내 고민이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해망상에 대한 피해망상이 생겼나..

 가만히 있는 내가 답답한지 제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발을 소듕하게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진짜 소듕하게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간지러운 조심스러움이었다.

 “이쪽은 멀쩡하네. 왼쪽은?”

 “.......”

 “이쪽도 괜찮네.”

 제이는 신중하게 스토리지를 점검하고 소듕하게 발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손을 내밀길래 얼결에 붙잡자 일으켜 세워줬다. 제이는 그 손을 놓지 않고 무대 뒤까지 향했다. 마지막 스탠바이 1분 전에야 놔줬는데,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어서 제이의 온기가 옮겨진 따뜻한 손바닥을 매만지다가 문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문이 형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였는데 그 멋쩍은 웃음이 꼭 내 웃음처럼 보였다.

 이번 타이틀곡 <푸른 계절>은 사막 배경의 노래라 샌드 싱잉 스테이지에 더욱 신경을 썼다. 랜드 슈즈를 신고 사막 위를 얼음 위를 거니는듯 미끄러졌다가, 늪을 밟은듯 움푹 들어갔다가 나오는 안무는 힘들긴 했지만 하고나면 쾌감이 느껴졌다. 이번 야단이의 퍼포먼스는 모션 오러를 두르고 모래 속에 잠겼다 깨어나는 퍼포였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래에 파묻혔다가 파헤치며 일어나는 퍼포는 큰 환호를 받았다. 제이는 늘 그렇듯 검무였다. 발을 힘차게 박찰 때마다 모래가 사방에 튀었다. 그 강렬한 모습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보았다.

 나는 도마뱀과 선인장의 환영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노래하다가 곡후반부에 높은 파도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공연장의 객석 3층까지 닿을만한 높은 파도, 쏴아아 압도적인 파도 소리, 태양이 내리쬐는 모래 사막과 부딪혀 하얗게 조각나는 물결들. 그리고 청량한 고음의 노래.

 환호가 공연장을 가득메웠다.

 무대가 끝난 뒤엔 멤버들은 숙소로 돌아갔지만 나는 다른 팀 메인보컬들과 콜라보가 예정되어 있어서 짧게 연습 시간을 가졌다. 나이도 연차도 내가 제일 막내지만 몇번 사적인 자리에서도 만난 적 있는 형들이라서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스키보드의 요젠 형은 농담까지 건넸다.

 “너무 열심히 연습하지 말고 적당히 해~ 너 노래 너무 잘한단 말이야.”

 진짜 재밌는 형이다. 모래를 너무 먹어서 목이 까끌한 상태였는데..

 스케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니 멤버들이 거실에 모여서 노트북 두 대로 온라인 전투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용준이 형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알만 했다. 문이 형이랑 제이가 피의 결투를 진행 중이었다. 난 가방을 내려놓으며 한새 옆에 앉았다.

 “이라, 왔냐? 연습 잘했어?”

 “수고하셨어요. 형들이 잘해주세요?”

 “어, 잘해주지. 뭐하냐? 게임?”

 “응, 근데 제이를 이길 수가 없다. 이 자식은 무슨 프로게이머야?”

 “쟤는 예전부터 신컨이라서. 나도 한번도 못 이겼어.”

 “너야 이라니까 뭐..”

 “내가 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데!!”

 사람이 일하고 들어오니까 놀리기만 하는 한새 자식한테 와락 대들며 태클을 걸자 문이 형이 어? 하는 소리를 냈다. 화면을 보니 제이가 순간적인 실수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신들린 손놀림으로 수습했다. 오오, 감탄이 찍고 있는 둘째 매니저 형한테서도 터져 나왔다.

 결국 그 판은 제이가 이기고, 나랑 문이 형의 대결이 이어졌다. 처참하게 패배당했다. 다음으로 야단이랑 붙었는데 3분 만에 졌다.

 “야, 게임 왜 하냐? 진짜 재미없지 않냐?”

 “지가 지니까 노잼이래. 하하.”

 “기다려봐. 씻고 나와서 개운한 정신으로 다 이겨줄 테니까.”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래.. 내가 멤버들이라도 안 무섭다. 게임 싫엉..

 방에 들어와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엄마한테서 전화가 와있길래 걸어봤다.

 -이라야.

 “응, 엄마. 왜?”

 엄마는 근심이 있는 목소리여서 걱정스러웠다

  -글쎄, 민이가 사춘기가 왔나봐..

 “민이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겠지. 무슨 일 있었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침대에 앉았다. 그 사이 제이가 노크도 안 하고 문을 열었다. 통화 중인 나를 보고서 문을 닫고 나가는 게 아니라 문을 닫고 들어와 팔짱을 끼고 기대는 것이다. 기가 차서 진짜.

 -얘가 학교 성적도 안 좋고 그래서 아빠랑 고민했거든. 근데 어젯밤에 글쎄 오러 볼 리그(*오러를 이용한 구기 스포츠 대회)에 나가겠다고 선언을 하지 뭐니?

 “..오러 볼이라니.. 내가 모르는 사이 등급 올랐어?”

 -올랐으면 전화를 했겠니. 그대로야. 근데도 역사가 없었던 것도 아니라면서 자긴 죽어도 나가겠다더라. 우리 모르게 학교에서 동아리도 들었고, 참가 신청까지 했어.

 “보호자 사인이 필요할 텐데?”

 -위조 했더라구. 기가 차서 진짜.

 헐..

 -우리 말은 들을 것 같지 않아. 형을 잘 따랐으니까 네가 좀 타일러줄래?

 “웅, 내가 잘 말해볼게. 걱정하지마.”

 -바쁠 텐데 미안. 너무 살 빠졌던데 제발 잘 좀 먹고. 엄마 걱정돼서 죽겠어.

 “응. 잘 먹을게. 그리고 엄마가 보내준 거 애들이 다 맛있다 했어. 고마워.”

 -고맙기는. 이번에 곰국 얼린 거 내일모레 쯤 도착할 거야.

 “또?? 어유, 쉬지 좀.”

 -너 먹고 살찌라고 보내는 거야. 제발 많이 좀 먹어.

 “알았엉. 엄마랑 아빠도 잘 챙겨먹고 있지?”

 -걱정할 사람을 걱정하렴. 네 아빠 뱃살을 어떻게 처리할지.

 몇 마디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제이가 입을 열었다.

 “이민이가 오러 스포츠 한대?”

 “어. 미치겠다. 왜 이런대냐.”

 “힘들 텐데.. 걔 등급이 뭐랬지?”

 “F야. F 모셔너.”

 제이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나도 이해한다. 오러 볼 리그 참가 선수들의 평균 등급은 A 등급이다. 난 폰에 민이 번호를 띄워놓고 물었다.

 “내 방엔 왜 들어왔는데?”

 “씻으러 간 애가 소식이 없어서.”

 “소식 알았으면 나가주시죠.”

 “너 동생이랑 통화할 때 얼마나 재밌는데 이 재밌는 일을 앞두고 내가 왜 나가냐.”

 제이 씨발놈...

 후우. 심호흡을 하고, 제이를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 울린 끝에 여보세요,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에 변성기가 왔나 보다.

 “민아, 오랜만이야.”

 -......

 “형이야. 이라 형.”

 -...알아.

 난 엄마한테 얘기 들었다고 짧게 설명했다.

 제이가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인다. 어쩔 수 없다. 나랑 7살 차이 나는 동생을 대할 때는 조심스러워지고, 목소리에 가식과 넘쳐흐르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나 설득하라고 시켰구나.

 “응? 아니, 딱히 그렇다기 보단 나도 걱정되고,”

 -웬일로 전화를 다 하나 했더니.

 민이는 씨발, 하고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난 침대와 엉덩이 사이가 30cm는 뜰 정도로 크게 놀랐다. 민이가 욕을.. 민이가 욕을..!!

 -왜? F 주제 오러 볼 리그 나간다니까 비웃겨? 하긴 형은 A급이니까 비웃을 만 하지. A급 소울러니까.

 민이야. 지금 S급 모셔너가 옆에 있단다.. 스피커폰은 아니지만 아마 제이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소울러는 S여도 오러 볼 리그 같은 데는 못 나가는데 얘가 이걸 말이라고.

 “나는 그게 아니라 워낙 위험한 스포츠잖아.. 여러모로 걱정도 되고.. 조금 더 공부를 해보고 많은 경험을 쌓은 다음에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것도 많은 경험 중 하나야. 그리고 나 지금 바빠.

 “아.. 그럼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언제쯤 시간 돼?”

 -하지마. 난 오러 볼 리그 무조건 나갈 거니까.

 “..민이야, 부모님을 생각해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응?”

 -맨날 엄빠 얘기 시끄럽고 형은 밥이나 잘 처먹어.

 툭. 전화가 끊겼다. 차마 다시 걸 용기가 나지 않아서 화면을 껐다. 엄마랑 아빠는 나한테 기대를 걸었을 텐데 어떡하지?

 의기소침해 있자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제이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희한하게 친동생을 어려워하더라. 나이 차이 많이 나면 보통 형이 군기 꽉 잡는데.”

 “어렵게 다뤄야지 그럼, 얘 중급 2학년이란 말이야. 네 동생은 몇 살이었지? 여자애라서 군기 같은 건 안 잡겠네?”

 “세 살 차이인데, 뭐.. 그냥 내 앞에선 조용해지더군.”

 제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이 새끼는 가만히 있어도 상대가 군기 잡아지는(?) 새끼였지.

 “도움이 안 되네, 짜식. 나가자.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이상하게 생각하라고 해.”

 제이는 내 팔을 잡고 침대에 앉혔다.

 “내일 저녁은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너 요새 왜 이렇게 나 먹이려고 해. 살찌워서 어쩌려구.”

 “어쩌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어쩌지 않을 거니까 먹고 싶은 거 얘기나 해.”

 “넌 뭐가 먹고 싶은데?”

 “네가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떡만둣국.”

 그냥 생각 없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먹고 싶었나 보다.

 “해 둘 테니까 밖에서 밥 먹지 말고 집에서 먹어.”

 “..응, 땡큐.”

 제새끼, 아까 메시지를 보고 내일 권수한이랑 약속 있는 걸 안 거다. 견제라도 하려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가 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견제할 이유가 뭐야. 두 인간 다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검진 후에 권수한도 날 뭐 먹이려고 할 터라 걱정이다. 음.. 그냥 두 번 다 맛있게 먹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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