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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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에 나오니 회사 직원 한 분이 마이크를 채워주신다. 그 모습을 둘째 매니저 형이 캠을 들고 촬영했다. 내가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까지 하고 나온 이유이다. 오늘부터 비하인드 캠이 따라다닌다. 스케줄 중간 중간 엔돌핀의 모습을 촬영하는 건데 인터넷에 올라오는 뿐만이 아니라 방송까지 된다고 하니 부담스럽다. 원래 오늘은 스케줄 없이 휴일이라 하루 종일 거실에서 딩가딩가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카메라가 있으니 스케줄 있는 기분이다.

 “..일어났냐?”

 “...어.”

 제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내가 나오니까 일어났다. 제이는 어제 피플제이 방송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안 했다.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주제를 삼가는데 오히려 문이 형이 얘기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어제 숙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겨준 건 문이 형이었다.

 「이라야. 너 방송 봤지?」

 「응, 봤는데 걱정하지 마. 팀에 폐 끼치지 않도록 잘 수습할게.」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왜? 걱정하지 말래도」

 「그게 아니라, 우리 이제 자리도 잡았고.. 이제는 그냥...」

 형은 잠깐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쉬었다. 문이 형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

 「후, 미안해. 정리가 안 되네. 나중에.. 활동 끝나면 다시 얘기하자.」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거였는지는 못 들었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문이 형은 예전에도 지금도 팀을 걱정하는 것이다. 형의 엔돌핀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니까.

 “앉아 있어. 아침밥 먹어야지.”

 “뭐냐. 네가 해주게?”

 “그래.”

 “이열, 제느의 아침밥이라니. 멤버들 깨워야겠네.”

 “지들이 알아서 일어나겠지. 넌 그냥 앉아있어.”

 제이는 내 팔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히고 쿠션까지 안겼다. 소파에서 주방이 보이는 지라 듬직한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카메라를 의식했다.

 왜 제이 안 따라가지?

 “형, 제이 요리하는 거 찍어야죠.”

 “아니, 너 찍으려고.”

 “팬들은 제이 요리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할텐데.. 저 말 없이 TV만 볼 건디요.”

 “글쎄다. 내 보기엔 팬들은 네가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서서 찍기 귀찮은가 보다. 둘째 매니저 형은 제이의 뒷모습만 찍고 다시 내게 렌즈를 돌렸다. 난 렌즈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여러분 제이 저거 카메라 있다고 연기하는 거예요. 속지 마세요. 아, 어차피 무뚝뚝한 거 소문났으니 안 속으시겠죠? 후후.”

 실없이 웃다가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는 중에 한새, 야단, 문이 형의 순으로 멤버들이 일어났다. 다들 카메라에 인사 한 마디씩 한 후 야단이는 식사 차리는 걸 도와주려고 갔고, 한새랑 문 형은 양옆에 앉았다.

 “야, 이라. 너 몇 시에 들어왔냐? 니 온 줄도 몰랐네.”

 “1시쯤 왔을 걸?”

 “그럼 방송 봤냐? 제새.. 제이 일 낸 거.”

 “어.. 봤지.”

 나랑 문이 형의 시선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어쩌면 야단이도 제이와 나 사이를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새 이 자식은 하늘도 포기한 눈새다.

 한새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 다 들리게 속삭였다.

 “커밍아웃에다가 아직도 짝사랑내 폴폴 풍기고. 저 자식은 아이돌의 기본자세가 안 되어있어. 이때싶 상처받은 팬들을 다 끌어들일 테다. 크흐흐.”

 “야, 제이 팬들이 제이 싫어졌다고 널 좋아하게 되진 않을 듯. 이미지 너무 다른 거 아니냐.”

 “뭐 내 이미지가 뭐!”

 “이라 말이 맞아. 그리고 팬분들은 분명 제이를 응원해주실 거야. 놓쳤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랑을 이루기를 바라고 계실 거야.”

 문 형은 진짜 팬 빠돌이다.. 그 말은 진심이겠지만 속으로는 조금 웃겼다. 정작 본인은 응원 안 하면서.

 한새가 카메라에 대고 자기는 원래 흑표범이니 뭐니 개소리 하는 걸 재밌게 구경하는 와중에 야단이가 식사 다 됐다며 불렀다.

 으..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니까 머리가 핑 돌았다.

 “와씨, 깜짝이야. 너 괜찮냐?”

 “이라야. 왜 그래?”

 그냥 머리만 핑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비틀거린 모양이다. 한새가 내 어깨를, 문이 형이 허리를 붙잡고 놀란 눈을 했다.

 “땡큐. 잠이 덜 깼엉. 어제 넘 늦게 들어와서.”

 “그러게 넌 불면증인 애가 무슨 이렇게 스케줄 빡센 와중에 불금을 보내겠다고, 어휴. 아침 먹고 기운 차려라.”

 “지가 차린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여러분, 한새가 이런 성격입니다. 절대 흑표범 아니구요~~”

 “와, 도와줬더니!”

 투닥거리며 식탁으로 향했다. 문이 형이 안 오길래 뒤를 돌아보니 내 허리를 붙잡아줬던 손을 보면서 얼어붙어 있었다. 야단이가 다시 한 번 부른 후에야 얼음, 땡! 한 것처럼 깨어나서 왔다.

 미역국에 갖가지 나물 반찬과 계란말이, 오이고추랑 두부부침, 간장게장, 동그랑땡. 나물 반찬은 한새 어머니께서 해주셨고, 간장게장은 문이 형 어머니, 동그랑땡은 야단이네서 주셨다. 미역국이랑 두부부침은 제이가 직접 만들었다는 뜻이라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제이야,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고 각자 젓가락을 들었다. 카메라는 먹는 모습을 다 찍을 생각인지 꺼지지 않았다.

 입 안이 헐어 먹기도 힘들고, 속이 쓰려서 넘어가지도 않아 의도치 않게 숟가락질이 느려졌다.

 “이라, 너 밥 좀 잘 퍼먹어. 방금 전 또 넘어질 뻔 했나본데 다 밥을 안 먹으니까 그래.”

 “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넘어질 뻔 하는 줄 알겠다.”

 “맨날이지, 그럼. 오늘도 다섯 번은 더 휘청거릴 거면서.”

 제이가 내 밥그릇 위에 동그랑땡을 올려주며 비아냥거렸다.

 “그래요, 형은 좀 많이 먹을 필요가 있어요.”

 “많이 먹고 살 쪄라, 이라야.”

 “야, 좀 팍팍 좀 먹어. 숟가락질 느려 터졌네.”

 멤버들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둘째 매니저 형이랑 직원분은 쿠쿡 웃었지만 난 부끄러웠다.

 “반찬들은 직접 만들었어?”

 둘째 매니저 형이 물었다. 다 알면서. 문이 형이 카메라를 보면서 이건 누구 어머니가 줬고, 이건 누구 어머니가 줬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난 벌떡 일어났다.

 “이라?”

 “뭐야, 왜?”

 대답 없이 성큼성큼 냉장고에 가서 소불고기를 꺼냈다.

 “우리 엄마도 이거 만들어서 보내줬는데. 외국에서 막 비싸게 돈 들여서. 해외배송이 진짜 비싸거든요.”

 “푸하하하. 맞아, 이라네 어머니도 주셨지.”

 “권제이, 왜 안 꺼냈냐. 이라 어머니 서운해하시겠네. 크크.”

 “아침이니까. 점심에는 구워 먹자.”

 난 소불고기를 실컷 어필한 후 다시 집어넣었다. 헤헤, 뿌듯해.

 “아, 참고로 제이네 아버지께서도 굴비랑 랍스터 보내주셨어요. 어제 다 먹어서 없는데.”

 “제이네도 챙기냐, 하하.”

 “그럼, 그럼. 방송 보고 계시죠, 우리 멤버들 부모님들? 늘 감사합니당!”

 내가 먼저 고개를 꾸벅하자 멤버들도 따라서 인사했다. 문이 형은 자리로 돌아온 내게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던 제이의 표정이 그 순간 굳어진 건 나만 눈치 챈 것이기를 바란다.

 그냥 평상시대로 있으라고 했지만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니까 뭐라도 해야 될 것 같다. 결국 보드게임이나 하기로 하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문이 형이랑 야단이가 사러 갔다.

 “아, 카메라 없으니까 살 것 같다. 시발, 휴일이 휴일이 아니여.”

 한 대 뿐인 카메라를 따라 둘째 매니저 형이랑 직원분이 나가자마자 한새놈은 쭈욱 기지개를 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좆같은 기획은 누가 한 거래?”

 “팬바보형이 했겠지. 이라가 좆같다고 했다고 일러야지~~”

 “아, 쫌.”

 “아까의 복수다, 새끼야. 크크.”

 눈새자식. 나 지금 문 형이랑 어색하단 말이야.

 한새를 흘겨보는데 옆에 두 번째로 어색한 멤버 제이가 털썩 앉았다.

 “너 어제 권수한이랑 마트 갔다며.”

 “..어떻게 알았냐?”

 “목격담 떴어. 미역이랑 참깨랑 소고기 샀다던데. 뽈뽈거리면서 잘 돌아다녔다고. 졸귀씹귀하면서 울더라.”

 “뭔.. 뽈뽈은 무슨..”

 “저번에도 둘이 같이 식당 갔다며. 나한텐 동창이랑 논다고 하고. 왜 거짓말 했냐?”

 난 당황해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한새가 아무리 눈새라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데..

 당황하는 내게 제이가 손을 뻗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 눈앞에서 흔들었다.

 “다른 남자 집에 가서 손가락이나 다쳐오고.”

 밴드 뗐고 흉도 희미한데 어떻게 알았지? 역시 모셔너.. 아니, 이게 아니라 이 새끼 커밍아웃 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변명해봐. 왜 거짓말했어?”

 “야, 내가 뭐 거짓말을 하든 말든..”

 “권제이, 왜 이러냐. 닭살 돋게. 어제 커밍아웃 해놓고 이라한테 이러면 오해한다, 인마.”

 한새가 제이가 잡은 손을 손날로 장난치듯 갈랐다. 제이의 째려보는 시선에 곧 끼깅하며 손을 거두었지만. 난 제이를 안다. 저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을 알고 있다. 제이는 어떻게든 거짓말한 이유를 들으려는 거다.

 순간적으로 좋은 변명이 생각났다. 난 제이의 손에 잡힌 손목을 구부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오러 증폭을 도와준댔어. 그 사람 동생이 내 친구잖아. 특별히 동생 친구니까 해준대.”

 제이는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 가늘게 떴다. 사실을 섞은 거짓말이라서 속아 넘길 자신은 있었다. 실제로 한새는 속았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와락 달려들었다.

 “헐, 진짜? 계탔네. 야, 야단이도 어떻게 좀 부탁해봐라.”

 “어, 나 좀 받고나서 효과 있으면 부탁해보려고.”

 “오러 증폭 되게 비싼데 역시 인맥이 짱이구만. 짜식, 그런 인맥이 있으면 형한테 말을 했어야지.”

 “누가 형이야? 무겁거든? 얼른 비켜라?”

 “키로 보나 모로 보나 내가 형이지, 야. 근데 너.. 되게 말랐다. 목뼈가 손에 잡히는데..”

 “아, 마른 거 알았으면 치우라고요. 나 짓눌려죽..”

 “비키라잖아.”

 제이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말하고는 한새의 뒷덜미를 잡았다. 한새는 악 소리를 내며 소파로 내뒹굴어졌다. 곧 뒷목을 잡고 왜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지랄거렸지만 제이는 나만을 보고 있었다.

 “오러 증폭을 위해 만난다고.”

 “..어.”

 “나는 네가.”

 “.......”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 어제 말했듯이..”

 “야!!!!!”

 소리를 꽥 질렀다. 제이의 뒤쪽으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한새가 보인다. ‘너네 지금 뭐하냐? 드라마 찍냐?’ 딱 이런 눈빛이었다. 남은 멤버가 한새 뿐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난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한다 하고 제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쾅. 방문을 소리 내서 닫았다.

 “너 시발새끼야 미쳤냐? 커밍아웃 하더니 맛이 갔어? 한새 앞에서 뭐하는 건데?”

 “이제 이유도 알지 못하고 당하는 건 사절이야. 네가 멀어진 이유도, 지금 숨기고 있는 비밀도 다 말해.”

 “..그 좆같은 이유 진짜 몰라서 물어?”

 네가 동의했잖아. 네가 먼저 동의했잖아!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곧 파스스 식었다. 제이의 얼굴이 너무 서글퍼보였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보자 화가 가라앉고 그 자리에 찌릿한 아픔이 생겨났다. 난 지끈지끈한 이마를 짚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이는 날 바라보며 묵직하게 서 있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다. 대체 그 좆같은 이유가 뭔지 설명 좀 해봐.”

 “.......”

 “권수한은 왜 만나는 건데.”

 “..권수한은 진짜로 오러 증폭 때문에 만나는 게 맞아.”

 “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뭔지 말해.”

 없어. ..라고 해도 안 믿겠지.

 난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여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저번처럼 다이어트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말해. 네가 이렇게 마른.. 이유. 네가 이렇게 살이 빠지고, 잠을 못 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 못하는 이유. 숨길 생각하지마. 나한테는 숨기지 마.”

 ...알고 싶어?

 내가.

 밥도 잘 못 먹고, 먹으면 토하고, 내 살을 그렇게 빠지게 하고, 내 잠을 앗아간 그 이유. 근본적인 원인.

 어떤 팬이 준 쿠키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어. 그 범인은 못 잡았고, 안 잡을 거래.

 아.. 말하고 싶다. 제이라면 분명 날 도와줄 텐데. 해결해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제이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제이가 발끈하려는 것 같길래 팔을 잡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이번 활동 끝나면 얘기할게.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번 활동만 끝나면 다 얘기해주겠다고.”

 “...전부 다?”

 “어, 전부 다. 나도 다 털어놓고 싶으니까.”

 내 말에서 진심을 느낀 건지 형형했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제이는 연거푸 뜨거운 한숨을 내쉬다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아주.. 돌이킬 수 없게 된 건 아니지?”

 제이의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우리의 관계를 묻는 건지, 지금의 내 상태를 묻는 건지. 뭐가 됐든 내 대답은 하나였다. 난 제이의 어깨에 얼굴을 포갰다.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그것은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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