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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한은 그 뒤로 날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냉한 표정으로 오러 치유만 해줬다. 내 복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어떤 생각이었을까. 가끔씩 어댑터의 기분이 궁금할 때가 있다.
오러 치유를 받으면 나른해지는지라 잠시 잠들었다가 익숙한 알람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손을 더듬자 누가 휴대폰을 쥐어졌다. 물론 그 누군가는 권수한이었다.
“저 얼마나 잤어요?”
왼손으로는 눈을 비비고 오른손으로는 알람을 껐다. 권수한이 내 왼손을 잡아 내렸다.
“눈 비비지 마. 안 좋은 습관이다.”
“얼마나 잤지..”
“1시간쯤 잤어.”
오러 치유에 중독된 사람들도 많다는데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유를 알 것 같다. 사과주스 때문에 한껏 예민했던 기분이 누그러졌고, 이런저런 걱정들도 사라졌다. 특히 권수한에 대한 경계심은 걍 없어졌다. 내일 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생기겠지만.. 영원히 이 평화에서 헤어나가고 싶지 않다.
난 권수한이 덮어 놓은 듯한 푹신한 이불 안에서 거실바닥을 뒹굴었다.
“아, 숙소 가기 귀찮다.”
“내일 스케줄 없는 걸로 아는데 여기서 자고 가라.”
“스케줄 없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물었다. 권수한은 입을 다물었다. 팬사이트라도 가입했나.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리모컨을 들었다.
무심코 손가락을 봤는데 밴드가 새로 붙어져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갈았나 보다. 겉보기엔 세상만사 무관심한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데 은근히 다정한 면이 있다.
“저 TV 하나만 보고 가도 돼요?”
“..그걸 보려고 알람을 맞춘 거군.”
“넴..”
“그렇게 해. 이왕이면 자고 가고.”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니 마침 제이가 등장해 인사하고 있었다. 권수한이 바닥은 딱딱하다며 내가 들어있는 이불을 소파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이불에 감싸인 나를 번쩍 들어 옮긴 것이다.
“너무 가볍군. 몸무게 몇이야.”
“으.. 몸무게 얘기 그만해요. 머리 아파.. 여기 앉아요. 같이 TV나 봐요.”
난 옆을 탁탁 쳤다. 권수한이 옆에 앉았다. 슬쩍 보니 진짜 진지하게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심각하게 말이다.
「제이 씨의 연애사도 궁금해요. 이상형은 이성 취향인지, 동성 취향인지요??」
「글쎄요. 첫사랑은 동성이었습니다.」
「아, 그.. 여쭤놓고 놀라서 죄송합니다만, 세상에.. 이렇게 폭탄발언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저희 프로로서는 감사하긴 하지만. 저기, 매니저분이 파랗게 질렸는데요.」
「괜찮습니다. 동성애가 죄도 아니고.」
「그.. 그분은 제이 씨의 사랑을 받아서 좋으셨겠어요.」
「그때는 사랑인 줄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사랑이었어요. 너무 늦게 깨달았죠.」
제이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분명 상대방도 제게 감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제 감정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멀어져 버렸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헤어질 때 버스정류장에서 막차시간까지 두 시간 동안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아무 약속 없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 하루를 함께 한다던가.. 음식점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부터 시켰고, 친구들과의 모임보다 우리의 만남을 우선시했죠. 그런데 어느 샌가부터 가끔씩 마주치던 시선이나 손길이 없어져 있더군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이런, 안타깝네요. 무슨 이유였을까요?」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항상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 마음이 변했는지, 왜 그렇게 갑자기 멀어져버렸는지.」
「아.. 제이 씨의 진심이 묻어나와 마음이 절절해지네요. 혹시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분이신가요?」
「그것까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분명 이걸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같이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제이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제 손을 놓아버린 건지. 왜 우리가 이렇게 멀어져버린 건지. 대체 왜..」
정신 차려보니 방송은 끝나 있었다. 권수한은 내게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양하고 택시를 잡았다. 혼자 돌아가고 싶었지만 권수한은 날 뒷좌석에 밀어 넣고 안전벨트까지 채워준 후 옆에 앉았다. 이럴 거면 권수한의 차를 타는 게 나았겠다.
“이봐.. 괜찮나?”
가는 길에 내가 너무 넋이 빠져 있으니 권수한은 몇 번씩이나 거듭해서 괜찮냐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앞 공원에 내렸다. 권수한이 자기도 내리려고 하길래 사양했다.
“들어가요. 늦었는데.”
“..너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
“네, 금방 있다 갈 거예요.”
걱정 말라는 의미로 웃어보였다. 권수한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했는지 돌아가 주었다.
난 공원을 서성거리기만 하고 숙소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까부터 오는 전화를 무시하니 메시지가 왔다.
[너 방송 봤어?]
[할 말 있으니까 전화 받아. 전화 받고 얘기하자.]
[이라야, 전화 받아.]
발신자는.. 문이 형이다.
순간 안에서부터 뭔가 올라왔다. 급히 공원 화장실을 찾았다. 늦은 시간이라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노란 조명 아래 변기를 붙잡고 안의 것들을 게워냈다. 권수한과 함께 먹었던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역한 냄새가 올라오니 더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위액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다 쏟아내고 나자 현기증이 일었다. 이마를 짚고 현기증을 가라앉힌 후 세면대에서 입을 헹궜다.
“하아....”
차가운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제이가 나름 숨기기 위해 버스정류장이니 뭐니 우리 사이에는 없었던 단어를 가져다 쓴 것 같지만, 문 형이라면 누구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제이와 나는 그런 관계였다.. 우리는 둘만 붙어 있을 때가 많았고, 문 형이나 한새가 자기도 좀 끼워주라고 불평하고는 했지만 제이도 나도 약속이나 한 듯이 다른 사람은 부르지 않았다. 굳이 다른 사람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회사에 들어와 제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이성 같은 걸 잃어버린 상태였다. 사실 아주 오래 전도 아니다. 연습생 때부터, 제이가 엔돌핀으로 데뷔하고, 내 합류도 결정되고, 바쁘게 활동할 때도 우리는 틈만 나면 얼굴을 마주하고 시간을 보냈다.
제이가 답답한 듯이 중얼거리는 “언젠가부터”의 ‘언젠가’는 제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특별한 사이였고, 그것을 염려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내 합류 이후 쏟아지는 비난을 보면서, 자기 일보다 더 화를 내는 제이를 보면서, 나 또한 더 이상 친구라고만 하기에는 애매한 이 관계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 제이는 나 같은 게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 나 같은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람보다는 더 좋은.. 여자를.
방송에서 MC 분도 당황하셨듯이, 동성애라는 게 절대 환영받는 부분은 아니다. 요즘은 많이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커밍아웃한 아이돌은 아직 두어 명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상형을 물어볼 때 이성인지 동성인지 먼저 물어보게끔 되어있지만, 정작 동성애자임을 밝히면 당황하고는 한다. 게다가 우리는 같은 그룹이고 같은 숙소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마 오늘 방송 이후로 끊임없이 그런 질문을 받을 것이다. 「제이 씨는 동성애자이신데, 동성 멤버들이랑 같이 사는 거 어떻게 괜찮으세요?」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대국민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사람이란 것. 나를 죽이려는 시도가 끊임없을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있는데, 그런 나와 감정적 교류가 있는 걸 알면 제이에게까지도 돌아설 수도 있다. 나는 그게 무서웠고.. 엔돌핀이란 그룹이 나 때문에 몇 번이나 논란에 오르게 할 수도 없었다. 나 같은 것 때문에..
결론은 나는 제이의 그런 마음을 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고, 제이는 더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고 근심 없는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제 손을 놓아버린 건지. 왜 우리가 이렇게 멀어져버린 건지. 대체 왜..」
그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런 구구절절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잖아. 제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투로 갑작스럽다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내가 갑자기 거리를 벌리니 당황스러웠다고?
거짓말.
「..어디 갔다 와?」
「어? 문이 형.」
「제이랑 놀다오니?」
난 그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라야, 아직은 여러 가지로 이른 것 같다. 우리 이제 막 데뷔했고, 유진이 탈퇴로 구설수도 많았는데. 팀 내 동성연애라니.」
「..형, 우리는 그냥..」
「내가 아역배우였던 거 알지?」
「...응.」
「늘 스타가 되고 싶었고, 연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엔돌핀이라는 팀에 인생을 걸었어. 드디어 데뷔했는데, 데뷔하자마자 유진이가 탈퇴하고.. 논란도 다툼도 이젠 지쳤다. 이제는 좀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나도 알아. 폐 끼치지 않게 할게. 비밀로..」
「제이도 동의했어.」
제이는 갑작스러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친구 관계로만 지내겠다고, 동의했어. 그러니까 너도 제이의 선택을 존중해. 너희 미래를 위해서도 이게 나아.」
..본인이. 이 관계를 선택한 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