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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돌핀 아냐?”
“엔돌핀 이라 같은데..”
“옆에는 권수한 이잖아. 어댑터..”
마트에는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꽤 많았다. 모자도 안 쓴 상태라서 시선이 몰렸는데, 다들 수군거리기만 할 뿐 말 거는 사람도 없었고, 사진 찍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난 자꾸만 권수한 뒤에 숨었는데, 권수한은 당근을 카트에 던져 넣으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이 근처에 어댑터 전용 타운이 있어서 유명인이 많이 방문하다보니 봐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룰이 하나 생겼지. 지금 우릴 보고 수군거리는 저 사람들 중에도 어댑터와 오러 유저가 있다. 더 유명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아하.. 넹.”
뭔지 안다. 엔돌핀 숙소 근처에도 이런 마트가 하나 있다. 워낙 주위에 오러 유저를 보유한 아이돌 그룹이 많이 살다보니 그 마트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이돌을 봐도 그러려니 한다.
권수한은 야채 코너에서 피망이나 양파 따위를 척척 담았다. 그리고 나한테 여기서 기다릴 테니 미역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미역.......”
사 본 적 없는데...
차마 그 말은 못하고 야채 코너 쪽으로 갔는데 당연히 미역은 없었다. 뭔가 야채 쪽에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미역은 야채가 아니었다.. 그래서 생선 파는 데로 갔는데 거기도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직원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뭐 찾으세요, 이라 군?”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러서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
“미역 찾는데여..”
“미역은 이쪽에 있는데.”
직원이 포장되어 있는 미역을 찾아줬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 굉장히 다르게 생겼다.
“감사합니다.”
“으응, 쇼핑 잘해요.”
아주머니는 친근하게 손을 흔들고 떠나셨다. 난 미역을 들고 권수한이 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권수한이 내가 들고 온 미역을 쓱 훑을 때는 왠지 심장이 쫄렸다. 다행히 잘 산 건 지 카트로 집어넣어졌다.
“들깨랑 전복 사와라.”
“.......”
또다시 심부름을 시켰다. 심지어 하나가 더 늘어났다. 카트를 끌고 코너를 도는 권수한의 뒷모습이 이보다 더 싸가지 없어 보이기는 힘들 것이다.
전복은 쉽게 찾았는데, 들깨가 문제였다. 들깨.. 들깨를 어디서 사지? 들깨는 들깨인데..
“뭐 찾아요? 도와줄까요?”
발길을 못 찾고 서성거리자 커플로 보이는 두 명이 다가왔다.
“네.. 들깨여..”
“들깨여..? 어떡해...”
한 분이 어우어우 하면서 막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른 분도 왜인지 푸흐큽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입술을 깨물더니 엄청나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안내해줬다.
“감사합니다..”
“네에. 조심해서 잘 가요.”
마트 안이 뭐가 위험하다고 조심하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운 커플이었다.
권수한은 전복과 들깨를 신중히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카트에 넣었다. 휴. 속으로 안도했다.
“소고기 사와. 저기 가서.”
“아씨, 왜 다 시켜요.”
“미역국에 넣을 거라고 하고 가서 사와라. 얼른.”
존나 지는 발이 없나.. 신경질 나서 정육점에 향했는데 도착하니 쭈구리가 됐다. 아저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봤다.
“엔돌핀 이라 군 맞죠? 뭐 무슨 고기 드릴까?”
“미역국 먹을 건데요.. 소고기 사오라던뎅..”
“아, 그래. 얼마나?”
“두 명이서 먹을 거예요.”
“응응, 두 명이요오. 조금만 기다려요오.”
왜 이렇게 말꼬리를 늘어뜨리시지? 나를 알아봤으니 혹시 질 안 좋은 고기를 줄까봐 눈에 불을 켜고 고기 자르는 모습을 봤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나 말고도 먹는 사람이 있으니 완성된 요리라면 모를까 재료에 장난치진 못할 것이다.
난 소고기를 가지고 권수한한테 달려갔다.
“자, 이제 그만 시켜요!”
“..제대로 사왔군. 수고했다.”
씩씩거리는 날 보고는 입가에 미소가 아른거린다. 그 모습에 더 부아가 치밀었다. 권수한은 그 다음에는 따로 심부름 시키지는 않고 같이 사러 다녔다. 과자랑 빵 같은 것도 막 쳐 담았다. 진짜 부자가 맞나 보다.
권수한의 집은 어댑터 전용 아파트였다. 어댑터 전용은 처음 와보는데 한 층에 집이 하나씩 있는 난 본 적 없는 고급 아파트였다. 거실 바닥에 대리석이 깔려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린, 진짜 드라마에서나 봤던 재벌 집이었다. 다만 넓은 거실에는 소파와 TV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깔끔해도 너무 깔끔했다. 그나마 주방은 조금 살림살이가 있는 편이었다. 식탁 위에는 신문이 다섯 종류나 접혀 있었고 다 다른 언어였다. 주방에도 TV가 있어서, 이 인간이 TV는 자주 보는구나 싶었다.
“일단 손, 발 깨끗이 씻고 나와.”
“진짜 저도 만들어요?”
“그래.”
“저 너무 배고프고 힘도 없는뎅..”
“어디서 애교야. 가서 빨리 씻고 나와.”
매몰찬 인간 같으니. 투덜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말이 욕실이지 무슨 목욕탕이었다.
손 씻고 나오니 당근과 칼을 주면서 자르라고 시켰다. 난 권수한이 잘라놓은 모양을 잘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당근이 딱딱하고 두꺼워서 쉽지 않았다. 겨우 겨우 잘라놓으니 이번에는 대파를 줬다. 대파는 생각보다 자르기 쉬웠다. 그렇게 몇 가지 재료들을 손질하는데 막바지에 방심해서 내 손가락까지 같이 손질해버리고 말았다. 엄지가 조금 베여서 피가 흘러나왔다. 티슈를 쓱 뽑아 닦고서 마지막까지 손질했다.
“자요. 다했어요.”
“그럼 이제 전복을.. 손까지 잘랐나.”
“네, 이제 전 쉬어야 할 것 같아욤..”
“쯧.”
권수한은 혀를 차더니 손을 씻고 어디론가 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연고와 밴드가 들려 있었다. 권수한은 말없이 내 손가락을 씻기고 약을 발라주고 밴드도 붙여줬다.
“자, 그럼 다음은 파프리카 손질을 할 거다.”
“저기요. 나 손 벴는데요? 손 벴거든요?”
“괜찮아. 그 정도는 베고 그러는 거지. 5분이면 피 멎고 며칠 후면 흔적도 없어진다.”
다친 건 나인데 지가 괜찮댄다. 황당..
테이블 셋팅까지 마치니 권수한이 갈비찜부터 중앙에 놓았다. 잡곡밥에 전복미역국, 그리고 갖가지 반찬들이 올라왔다. 윤기가 반지르르 도는 요리들을 보고 있자니 배가 고파왔다. 권수한은 마지막으로 물을 꺼내놓고, 이제 먹자 했다.
갈비찜이란 게 막 오랫동안 양념에 재워놓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건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 양념이 고기에 다 베서 되게 맛있었다. 미역국도 국물이 깊은 맛이 났다.
내가 막 수치스럽게 심부름도 하고 피까지 흘려가면서 만든 음식들이니 밥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먹어버릴 테다.
“천천히 먹어라. 아무도 안 빼앗아 간다.”
“대게 마싯네요.”
“제발 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네, 아빵.”
권수한이 무표정으로 애걸하길래 속도를 줄였다. 아니, 사실은 입 안이 엉망으로 헐어서 후루룩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입맛에 맞고 어떻게든 많이 먹어버리겠다는 생각에 두 공기를 비웠다.
권수한은 배불러서 트림을 참는 내게 뭔갈 내밀었다. 난 진짜 그런 걸 줄 줄 몰라서 깜짝 놀랐다.
“식사를 마쳤으면 치워야지.”
“..저 손가락 다쳤는데..”
“그래서 이거 주잖아.”
진짜 냉혈한이다. 애처롭게 올려다봤지만 차가운 이 인간은 결국 나한테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웠다. 난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큽..”
“왜 웃어요?”
“고양이한테 신발을 신기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뭐 그냥 걷겠죠.”
“꼭 검색해봐라. 네가 지금 그 모습이야.”
우씨.. 날카롭게 째려보고 설거지통 앞에 섰다. 아니, 그냥 식당에 갔으면 좀 좋아? 뭐 하러 마트에서 쇼핑하고, 직접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인간이 그냥 식당에나 데려가지.. 투덜거리며 수세미를 박박 문질렀다. 세제 거품이 설거지통을 빠져나올 때까지 문지르니까 결국엔 권수한이 네가 애냐고 한 소리 하고서는 자기가 마무리 했다.
후식은 아까 마트에서 산 빵들이랑 차였다. 표면에 연유가 묻은 빵은 부드럽고 달달해서 입에서 녹았지만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왜 안 먹지?”
포크를 놓자 권수한이 물었다.
“배불러서요.”
“한창 때 남자애가 이 정도도 못 먹나. 하도 안 먹으니 위가 줄었군.”
“저 아까 밥 많이 먹는 거 못 봤어요?”
“하루에 한 끼 먹고, 그나마도 게워낼 때가 많지?”
그야 뭐.. 고개를 끄덕이자 권수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인간 앞에서는 토 한 것도 안 숨겨도 돼서 편하다. 유일하게 그 비밀에 대해서 투정부릴 수 있는 어른이 생긴 것 같다.
“아마 위벽이나 식도도 많이 상해있겠지. 병원에서 정식으로 진찰을 받아야 한다. 그쪽 회사에서는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도 안 해주나?”
“그런 거 안 해주던데.”
“다음에 만날 때는 건강 검진을 해야겠군. 물론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네에.”
비밀을 아는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투정부릴 수 있고.. 유일하게 나만을 걱정해준다. 뭔가 닭살이 돋을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기분은 좋지만 오늘은 이런 얘기나 하려고 만난 게 아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제 말해주세요. 사과주스.”
“..그 말 하기 전에 일단 인터넷을 켜 봐.”
“왜요.”
“잔말 말고 인터넷창 열어서 사과 씨앗 검색해 봐라.”
아우 씨.. 구시렁거리며 인터넷을 켜자 첫 화면에 나랑 병아리 합성 사진이 떠 있었다. 난 언제 구시렁거렸냐는 듯 헤벌쭉 웃었다.
“권수한 씨, 이거 볼래요?”
난 권수한에게 자랑스럽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떤 팬 분이 합성해서 올려줬어요.”
“.......”
“귀엽져.”
얼른 권수한이 긍정해주기를 바랐는데 권수한은 참나.. 하는 표정이었다.
“스스로 귀여워할 줄 아는 기특한 성격이 있는 줄은 몰랐군.”
“네? 아니, 저 말구요. 설마 저 말 했겠어요? 토 나오게. 이 글 쓴 팬이 귀엽잖아요. 이렇게 병아리 사진 막 찾아서 합성해서 올리다니.. 이 글도 보세요. 막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고 싶대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이모티콘도 막 넘 귀엽구... 걍 말을 넘 귀엽게 하는 것 같아요.”
“.......”
권수한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군.”
“그쵸, 그쵸? 후후.”
내 팬이 귀엽다고 칭찬 받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런 차가운 인간의 입에서 나온 칭찬이라 더욱.
안티가 천만대군인 나라도 이렇게 글 올려주는 팬도 있다구요. 싱글벙글 웃으며 잔뜩 들떠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뭘 검색하라고요? 사과 씨앗?”
“...그래.”
검색창에 사과 씨앗을 치자마자 뜨는 연관검색어를 보고 잔뜩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권수한은 내 표정을 보고 변명하듯이 말했다.
“사과 씨에는 원래 소량의 독 성분이 있어.”
“..괜찮아요. 예상했으니까. 어느 정도의 독이었어요? 죽이려는 거였어요? 아니면 배탈?”
“동생 말로는 구토와 어지럼증을 유발한다더군.”
“죽이려는 건 아니었네요.”
쓰게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은 죽이려고 한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난 그 때 스카이싱잉 무대를 앞두고 있었으니까. 건물 5층 위의 상공에서 어지럼증을 느끼고, 더군다나 윈디슈즈까지 고장 난다면 사고 위험성이 충분하다.
“끝까지 들어. 의도한 게 아니었을 거다. 기사를 읽어봐라. 가장 최근에 뜬 것.”
권수한의 말에 뉴스 탭에 들어가니 굵은 글씨의 기사가 하나 있었다.
어떤 브랜드의 사과 음료 제품에 사과 씨의 독성이 일정량 이상 검출되어 전량 회수 결정했다는 기사였다. 다행히 시중에 풀린 지 두어 시간 만에 회수해서 큰 사고는 없었다고.
“모르고 산 걸 거야.”
“이 기사를 보고 샀군요.”
동시에 말했다. 같은 일에 대한 권수한과 나의 반응이 정반대라서 웃겼다. 차라리 늘 그랬던 것처럼 알아보지 않고 버리면 나았을까. 그랬으면 이런 실망감은 들지 않았겠지.
병아리 합성 사진을 올린 팬의 글을 보고 깨달았다. 내 오해가 더러 있을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진실을 알아보고자 했다.
사과주스를 맡기면서 기대는 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독성 물질이 들어있든 아니든 그냥 좀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만 것 같다..
“절대로 의도는 없었을 거다. 타이밍이 안 좋았던 모양이야. 팬의 의도와는 달리.”
“글쎄요.”
난 쓰게 웃으며 화면을 껐다. 몰랐으면 더 좋았을 걸. 아니, 알아서 다행이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