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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왔구나. 역시 엔돌핀은 성실하네.”
준비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온 덕분에 선배님과 스태프로부터 칭찬 받았다. 오늘은 한새도 새벽같이 일어났다. ‘깁미아이돌’은 시청률 평일 1위인 아이돌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대기실로 들어가 대본을 훑었다. 앨범 소개, 첫 번째 라이브, 개인기, 게임. 두 번째 라이브, 먹방, 게임, 게임, 게임..
“뭐야, 게임이 왜 이렇게 많아. 형, 이거 2회 해요?”
“아, 응. 우리는 특별히 2회 분량이래.”
“와.. 엔돌핀 많이 컸네. 흐흐흐.”
한새가 보기 흉하게 웃었다. 근데 나도 덩달아 보기 흉한 웃음이 나왔다. 엔돌핀 많이 컸구만.
대본을 읽는 중에 폰이 울렸다. 끊임없이 반짝반짝하는 단톡방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냈다.
권수한 [오늘은 시간 되나?]
[ㄴㄴ내일돼요]
답장을 보내고 잠시 머뭇거렸다. 카시트는 어떻게 잘 처리했는지 모르겠다. 나도 꽤 돈을 벌고 있으니 내가 한 짓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차를 좋아하는 문이 형한테 물어봤다.
“형, 00 브랜드 일렉틴시리즈 카시트는 얼마나 할까?”
“글쎄, 천만 원은 할 걸. 왜?”
“..아니, 그냥.”
모른 척 해야겠다..
답장이 오지 않아서 화면을 껐다. 마침 매니저 형들이 양 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자, 오매불문에서 준 도시락이다. 먹고 힘내서 녹화해라.”
오늘 녹화에도 엔돌핀의 팬들이 도시락을 보내줬다. 정확히 문이 형의 팬페이지다. 메뉴가 멤버별로 다 달랐는데, 나는 갈비찜에 후식은 사과 샐러드였다. 어떻게든 먹게 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팬분들 세심하네. 각자 취향대로, 몸에 좋은 종류로 도시락을 싸주셨어.”
“그러게. 형 팬들 짱이다. 우리 인증샷 찍자!”
한새가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도시락을 들고 방실방실 웃었다. 찰칵. 사진 찍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라, 또 어디 가. 넌 식사 때만 되면 가만히 있질 않냐.”
“난 이따 먹음. 촬영 앞두고는 안 먹히더라.”
제새끼는 요전부터 계속 나만 보고 있나..
“억지로라도 먹어. 곧 쓰러질 것처럼 비리비리 해가지고.”
“시비 거냐, 새끼야. 밥이나 처먹어.”
“그래, 제이야, 그만해. 억지로 먹으면 오히려 속 안 좋아. 이라야, 네 도시락은 내가 따로 챙겨놓을게.”
“..네, 용준이 형.”
제이는 혀를 찼지만 따라 나오진 않았다. 난 문에 기대 한숨을 한번 쉬고는 1층 편의점으로 향했다.
김밥과 컵라면을 골라 먹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권수한 [밥은 먹었고?]
권수한은 아침부터 내 하루 세끼 감시 중이다. 난 먹고 있는 거 그대로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다.
권수한 [다섯 번째 되어서야 겨우 보내는 게 컵라면 사진인가. 건강 망치려고 작정했나보지?]
[님 제 헬스트레이너세요?ㄷㄷ]
권수한 [콕꼭 씹어 먹어라. 스무 번씩.]
라면을 어떻게 스무 번씩 씹니.. 대신 권수한의 톡을 읽씹 하기로 했다.
폰은 잡은 김에 인터넷에 들어갔다. 즐겨찾기 제일 마지막에 추가한 페이지가 나를 반겨주었다.
<나 솔직히 이라 마음에 안 들어(심각)
왜 병아리가 아닌거야??????ㅇ.ㅇ.ㅇㅇ.ㅇㅇ.ㅇ
주머니에 넣어서 갖고다니고 싶은데 왜 병아리 아니야 ㅇ.
후후.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충만한 기분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화면을 캡처해서 앨범에 저장도 했다. 나와 병아리를 합성한 사진도 다 저장해 놨다. 금세 코끝이 찡한 게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나를 갖고 다니고 싶다는 귀여운 글을 화면에 띄워놓고 반찬 삼아 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은 자주 먹어서 물릴 만도 한데 계속 맛있다. 하긴 세상에 맛없는 건 없지만은.
후루룩 면발을 삼킬 때 MC 선배님이랑 마주쳤다. 매니저 분이랑 오신 것 같았다.
“이라야, 혼자 뭐해? 밥 먹어?”
“아.. 넹. 선배님은요?”
“담배 한 갑 사러 왔지. 너네 오늘 팬들이 도시락 주지 않았어? 우리는 그 도시락 먹었는데?”
“아, 다 먹고 배고파서 또 먹게요. 선배님은 맛있게 드셨어요?”
“하하, 덕분에 잘 먹었어. 키 크겠네. 이라.”
선배님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이따 보자며 나갔다.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다른 변명을 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을 안 먹은 걸 들키진 않을까 걱정이다.
“.......”
아직 반이나 남은 컵라면과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처럼 보였다. 잔뜩 헐은 입 안도 아프고, 입맛도 뚝 떨어져 남은 건 다 버렸다.
첫 번째 타이틀곡을 마치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시간을 보니 벌써 녹화한 지 1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숙소 정수기물을 받아온 텀블러를 대기실에 놓고 온 걸 이제야 알았다. 작가님이 생수를 챙겨주긴 했는데..
“야, 제이. 네 거 마셔도 되냐? 새 거 뜯기 아까워서.”
“...그래, 마셔.”
왠지 찝찝해서 제이 걸 마셨다. 제이는 물끄러미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홱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문이 형이랑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게 굳었다. 문 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녹화가 다시 시작됐다. 온갖 성대모사를 방출해야 하는 개인기 타임인데 사실 엔돌핀 급 정도 되면 막 치열하게 안 해도 된다. 예능 담당인 한새가 몇몇 연예인 따라 해주기만 하면..
“다른 멤버들은 뭐 없어? 맨날 한새만 하고~~”
가끔 더 시킬 때는 문이 형이 트럼펫 소리를 내기만 하면..
“에이, 그것도 다른 데서 한 거잖아. 새로운 거 해줘요. 제이랑 야단이랑 이라도 뭣 좀 해봐~~”
정말 간혹 이렇게 집요할 때가 있다. 그럼 항상 제이와 야단이의 이미지 보호를 위해 내가 나선다.
“제가 모창 좀 하는데.”
“맨날 하던 피아디 씨랑 강김 씨 말고 뭐 있어요?”
“엑, 두 분 말고요? 후후. 마침 하나 더 개발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 앨범 준비하면서 열심히 연습하고 멤버들한테도 인정받은 모창이다.
“이수미 선배님 날 그리워해 한 소절만 해볼게요.”
“오, 남자가 여자 목소리를? 신선한데? 해봐요, 얼른.”
난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 노래했다. 애상적이고 아련한 가사를 수없이 연습한 목소리로 부르자 스태프들까지 과장되게 감탄어린 탄성을 내주셔서 무척 민망했다.
“세상에~ 이라는 노래 너무 잘한다. 똑같은 것도 똑같은 건데 노래를 그냥 너무 잘해버리네. 나 울뻔 했잖아.”
“그쵸. 저희도 처음 들었을 때 눈물 찔끔 했어요.”
“진짜 똑같지 않아요? 이거 원키로 부른 거예요.”
“응, 똑같아. 근데 원곡보다 더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이라는 노래를 참 슬프게 부르네.”
“이라가 부르면 뭐든 슬퍼지잖아요. 크크.”
뭔가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하게 말이 이어졌다. 난 그냥 개인기 성공해서 좋다며 웃었다.
“저기, 야단이는 뭐 없니? 형들이 이렇게 열심인데, 막내가.”
이 선배님 오늘 뽕을 뽑으려고 작정했나보다..
야단이는 덤블링, 백덤블링, 복근 공개를 순차적으로 전부 하고 마지막으로는 물구나무 선 채 팔굽혀 펴기까지 선보였다. 그래도 땀방울 하나 안 났다. 모셔너는 진짜 대단하다.
선배님은 제이도 뭔가 시켜보려고 했지만 제이는 철벽이었다.
“D 방송사에서 연기 했던 거 한번만 보여주면 안 돼요?”
“다시보기로 보세요.”
“야단이처럼 복근 공개!”
“1집 뮤비 보세요.”
“검무 한번만 보여줘랑~~”
“이번 앨범 무대 보시죠.”
그냥 철벽도 아니고 엄청난 철벽이다. 선배님은 포기한 것 같았다.
“제이, 애교 한번만.”
제이한테 애교를 부탁하다니..
“우리 팀 애교 담당은 한새입니다.”
제이가 빠르게 토스했다. 아마 선배님은 제이가 토스한 멤버의 애교나 보자 싶었을 것이다.
“아니죠, 이라죠. 애교=이라거든요. 이라 별명이 이교거든요.”
한새 시발새끼가?
“애교하면 뭐니 뭐니 해도 막내죠. 막내야, 애교 큐!”
찡긋하자 야단이가 진중하게 말했다.
“저희 맏형이 사실 애교 장인입니다.”
그렇게 문이 형이 모두를 위한 희생을 하게 되었다.. 로 끝나면 좋으련만! 선배님의 엄청난 집착 때문에 결국 제이를 제외한 전원이 애교를 선보여야 했다. 나도 미친 토끼 흉내를 내며 볼을 부풀리고 뿌잉뿌잉 했다. 엔돌핀 팬들 티비 보다가 토하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안 그래도 많은 안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시발, 이거 본방 모니터링 안 해야지..
그 후로 촬영이 이어져 반나절 정도 지났을 때 드디어 마지막 게임이었다. 다섯 명이서 특정 사진 속 단체 포즈를 취해야하는데 3분 만에 성공했다. 너무 쉽게 해내니 선배님도 감탄했다. 상품은 국산 소고기였다. 숙소에서 구워 먹어야징.
“모셔너가 두 분 있으시다지만 너무 쉽게 해냈네요. 내가 봤을 땐 이거 다 이라 때문이야.”
“네? 저요??”
“네가 너무 가벼우니까 아래 애들이 흔들리지도 않지. 이거 사실 되게 어려운 포즈인데 맨 윗사람이 이라인 건 반칙이나 마찬가지에요~~”
“하하.. 그래도 상품은 저희 거예요!”
“이라를 위에 올린 건 다 전략이라구요. 후훗.”
“이라 몸무게 몇이니? 50은 넘어?”
갑자기 훅 아픈 델 찌르네. 깜짝 놀랐다.
“에이, 당연히 50은 넘죠~~~ 키가 있는데”
“너 키 작잖아.”
제이 시발새끼.
“와, 너보다는 작은 거지 그렇게 작진 않거든?”
“너 172잖아.”
“그게 뭐!! 안 작거든???”
“나도 뭐.. 네가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하긴 해.”
뭐라는 거야? 이 제새끼가..
“자자, 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몸무게 몇이냐구요. 너무 마른 것 같은데.”
“이라 흠.. 데뷔 초에는 58인가? 57 아니면 58이었을 거예요.”
문이 형은 멤버들 프로필을 다 알고 있나. 딱 맞춰서 놀랐다.
“지금은 절대 50 안 넘어 보여. 맞지?”
“50이에요, 50.”
사실 안 넘는다. 구라 깠는데 아무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선배님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50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랐어. 40대 같은데. 너무 말라서 건강에 안 좋아 보여요.”
“다이어트를 좀 했어요. 데뷔 때 통통했어가지고.”
“다이어트 너무 혹독하게 하는 거 아니니? 그러다가 형 나이쯤 되면 고생해. 골다공증이라고 알아요?”
“형, 더 말해주세요. 이라 저거 다이어트 좀 멈춰야 돼요.”
“아주 혼내주시죠.”
한새랑 제이가 같은 멤버 편을 들진 못할망정 선배님을 부채질 했다. 선배님은 푸흐흐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도시락도 먹고, 김밥에 컵라면도 먹었잖아. 다이어트라고 하기엔 많이 먹는데?”
“아,”
“그냥 살이 안 찌는 체질이니?”
아. 난 나도 모르게 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제이는 방금 전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문 형은 고개를 갸웃했고, 야단이는 눈을 깜빡 깜빡 했다. 한새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컵라면이요? 이라가 컵라면이랑 김밥을 먹었다고요? 아까?”
“어.. 너네 왜 이렇게 놀라? 아까 편의점에서 이라랑 마주쳤는데 혼자 먹고 있던데. 도시락도 이미 다 먹고 배고파서 먹는다고..”
“.......”
선배님은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느낀 건지 입을 다물었다.
와.. 지금이 촬영 끝인사만 앞두고 있어서 다행이지 중간이었으면 촬영 중단됐겠다.
겨우 겨우 촬영을 마치고 대기실에 오자마자 잔뜩 혼났다. 용준이 형이야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데, 형들 누나들 멤버들 안 가리고 다 나를 혼냈다. 특히 문 형이 눈에 불을 켜고 캐물었다.
왜 도시락은 안 먹고 편의점에 간 것이며, 도시락 먹었다고 거짓말한 이유는 무엇이냐.
내 대답은, “가끔 컵라면이랑 김밥이 땡길 때가 있는데 그게 오늘이었고, 팬들이 준 도시락 안 먹고 다른 거 먹으면 오해하실까봐 거짓말했다.”였다.
단순한 한새는 그런 거였냐~~ 했는데 다른 멤버들은 전혀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제이는 진짜 무서웠다. 안광이 번뜩이는데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았다.
“너, 그딴 좆같은 변명으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똑똑히 이유 말해. 내가 모르는 게 뭔지 다 털어놔.”
“제이야, 그만 해라. 일단 지금은 스케줄 가야 하니까.. 그리고 라면이 먹고 싶었을 수도 있지..”
문 형도 사실 내 변명에 전혀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는데 제이가 너무 화를 내다보니까 오히려 내 편을 들어주었다. 제이는 그런 문 형이 답답한지 눈썹을 까딱했다.
“그래서 뭐, 넘어 가자고? 형은 저번에 내 말 귓등으로 쳐들었어?”
히익. 제이가 문 형한테 대거리를 해서 한새도 나도 야단이도 다 놀랐다. 솔직히 도시락 안 먹고 편의점 간 게 이렇게까지 화 낼 일인가 싶다. 문 형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제이야..”
“야, 일단 스케줄 가자. 이따가 숙소에서 다시 얘기해.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씨발..”
보다 못한 내가 제이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내 손길이 닿으니 차마 휘두르지도 못하고 다른 쪽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이 섹시해 보이니 나도 참 중증이다. 제이는 일단 밤에 보자고, 무시무시하게 무서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고는 대기실을 쿵쿵 빠져나갔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데.. 이걸 핑계로 그냥.. 다 불어버릴까? 다 털어놓으면 안 될까? 그래도 용준이 형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제이가 저렇게 무서운데.
제이는 어제 녹화에서 뭔진 모르지만 사고를 쳐서 오늘 사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멤버들이랑 다 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훔쳐들었는데 제느님은 오히려 그 정도 발언이 허용 안 된다면 이 회사는 가치가 없다고 윽박질렀고, 사장님은 깨갱하고 전화를 끊었다. 회사 갑님도 못 이긴 제느님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길까.
그냥 나는 노력했지만 제이의 집요함을 이길 수 없었어요, 하고 사후 핑계를 대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잠시 그런 희망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