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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부른 배를 쓰는 동안 직원이 빈 그릇을 치우며 권수한에게 물었다.
“후식 드릴까요?”
“이라, 뭐가 먹고 싶지?”
권수한이 후식 메뉴는 지정 안 해놨나 보다. 후식이 뭐있는지 물으니 수정과와 식혜를 얘기하길래 권수한은 수정과를 나는 식혜를 부탁했다. 직원은 바로 후식을 가져왔다. 예쁜 꽃모양 약과도 있었다.
“약과는 서비스에요.”
“와, 감사합니당.”
직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갔다.
식혜를 호로록 마셨다. 달짝지근하고 시원했다.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군.”
“네, 편식 안 해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이렇게 잘 먹는데 음식을 걸러내야 하니 고생이겠어.”
갑자기 식혜 맛이 씁쓸해졌다. 권수한은 처음부터 이 얘기가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름 배려한다고 밥은 다 먹이고 말하는 거겠지.
“별로요. 익숙해져서.”
“멤버들은 알고 있나?”
“..몰라요.”
“가족들은?”
난 고개를 저었다.
“미치겠군.”
권수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차갑고 냉정하기만 한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왜 비밀로 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범인을 잡지 않나.”
“저 이 말 하려고 왔는데요. 혹시 원하는 게 있어요? 비밀로 지켜주는 대신 받고 싶은 거나.”
“..하.”
“저한테 받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면 저희 회사 사장님이랑 말해보세요. 나한테 이런 얘기 백날 해봤자 소용없다구요.”
입술을 삐죽하자 권수한은 답답한 듯 보였다.
“너는 치료가 필요해.”
“그 청산가리 쿠키는 전 입도 안 대서 하나도 안 아파요.”
“그 치료가 아니다.”
“그럼 뭐요?”
“..트라우마가 안 생길 수가 없지.”
“아, 저 정신병 생겼을까 봐요?”
“.......”
정신병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일까. 권수한의 매서운 눈빛이 더 냉랭해졌다.
“괜찮아요. 아이돌로 데뷔할 때부터 미움 받는 거야 각오했고, 음식은 제가 좀 더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 일이 또 있었던 것도 아니구요. 원래 좀 무던한 성격이라.”
손가락이 떨려서 테이블 밑으로 감췄다. 차가운 시선이 나를 낱낱이 훑었다.
“의사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군. 소울 오러 유저에 무던한 성격은 없어.”
“...전 그런대요.”
“소울러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감정에 크게 휩쓸리지. A, S급 정도 되면 대체로 자존감이 높거나, 낮거나 둘 중 하나로 극단적으로 나뉘어. 내가 보기에 넌 후자 같군.”
“저 완전 저 사랑하는데요? 얼굴도 귀엽고 노래도 잘 부르고. 권수한 씨는 그리고 정신과 의사가 아니잖아요. 전문의 아닌 사람이 진단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물론 다른 의사를 소개해주겠다.”
“싫어요! 이 이상 비밀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권수한은 예상한 듯이 다음 말을 했다.
“정신과 상담이 싫다면, 내가 너의 오러를 치료해줄 수 있어.”
“오러를.. 치료한다고요?”
“그래. 난 어댑터니까.”
소울 오러는 정신과 이어져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저렇게 차가운 사람이 치유는 무슨. 오히려 내 맘을 더 삭막하게 만들 것 같은데.
“이거 협박이죠. 치료 안 받으면 비밀 누설할 거예요?”
“나는 의사다. 너 같은 어린애가 눈앞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말라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나 방금 밥 두 공기 싹싹 비운 거 못 봤어요?”
“네가 치료 받지 않겠다면 기자에게 연락하겠다.”
“.......”
역시 협박이네.
생각해보면 비밀을 아는 사람들 중에 내게 치료가 필요하다 말한 사람은 권수한 뿐이다. 오늘 두 번째로 보는 인간이 그나마 날 제일 걱정해주고 있다.
어차피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협박이지만 오러 치유는, 좀, 내 감정을 저 인간한테 그대로 내보여야 한다는 점이 찝찝하다.
내가 고민하자 권수한이 한 마디 더 던졌다.
“난 네 소울 오러의 폭을 늘려줄 수도 있지.”
헐.
“좋아요. 할게요. 콜.”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와씨, 개이득. 어댑터의 오러 증폭은 돈 많은 사람들이 몇 천을 들여서 계약 맺고는 한다. 등급이 올라갈 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러가 늘어나면 엔돌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부터요? 오늘부터요?”
“다음부터, 좀 더 편한 자리에서 하지.”
아싸. 기분이 좋아져서 헤벌쭉 웃었다. 권수한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권수한 씨는 되게 차갑게 생겼는데 은근 따뜻하시네요. 친하지도 않은 아이돌 건강도 챙겨주고.”
“..의사니까.”
권수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날 뭔가 정도로 신기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웃을 줄도 아는군.’ 딱 이런 표정이라 웃겼다.
권수한도 나도 내일 아침부터 바빠서 그만 일어났다. 점퍼를 입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아, 가십니까?”
“네, 맛있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직원 두 명이 있었는데, 남직원이 여직원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저기,”
말없이 서빙해주던 직원이 수줍어하며 내게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엔돌핀 이라 군 맞죠? 저 엔돌핀 진짜 팬이에요. 여기 사인 좀..”
“아.. 네.”
정신이 받아들이기 전에 자동적으로 손이 펜과 종이를 받아들었다. 옆에서 남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얘가 엔돌핀 진짜 좋아합니다. 데뷔 때부터 팬이었어요.”
“아, 아, 그렇군요. 감사하네요. 이름이 어떻게..?”
직원이 불러주는 이름을 쓰고, 내 사인을 하고, 악수도 했다. 직원들은 또 오시라며 웃는 낯으로 배웅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깥에 나와서 권수한의 전지진동차를 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으니 숙소가 어디냐 묻길래 주소를 불러줬다.
「얘가 엔돌핀 진짜 좋아합니다. 데뷔 때부터 팬이었어요.」
하아.
「데뷔 때부터 팬이었어요.」
..흐으.. 차 안의 공기가 희박해지는 느낌이다.
“이라.”
눈 앞이 아득해진다.
“이봐. 이라.”
숨 쉬기가 어려워..
“정신 차려.”
헉.
갑자기 숨이 트였다. 난 눈을 깜박였다. 권수한이 그의 오러로 나를 진정시켜줬음을 알았다.
“아, 죄송, 죄송해요. 멀미를.”
“갑자기 왜 그러지?”
“아... 멀미를.”
「약과는 서비스에요.」
“......우욱.”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일었다. 입을 막고 헛구역질 하자 권수한이 혀를 찼다.
“괜찮아. 토해 내.”
권수한은 그의 비싼 차의 카시트에 먹은 걸 게워내는 나를 인내심 있게 달래줬고, 등도 살살 두들겨줬다.
무섭다. 그 약과는, 어쩌면 식혜일지도 몰라. 아니면 추가한 공깃밥일지도. 엔돌핀의 팬은 어디에나 있는데. 오늘도 두 번이나 당할 뻔 하고서 또 방심했어.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이라.”
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권수한이 물티슈를 줘서 입을 닦았다.
“감..사해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새 차는 갓길에 세운 상태였고, 창문도 열려 있었다.
“폐를 끼쳤네요. 시트.. 시트 물어드릴게요.”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군.”
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차가운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한심함이나 그럴 줄 알았다는 비소가 아니라 걱정이었다.
“전 괜찮아요.”
“나가자. 택시를 부르지.”
권수한이 다가왔다. 방금 전 토한 사람한테 스스럼없었다. 그는 내 안전벨트를 푸르고 내 쪽 차문을 열었다.
바깥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몰랐는데 이비틱 강을 지나는 다리 위였다. 내 키보다 높은 투명한 난간에 기대 강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강물은 슬프게 반짝였다.
찬바람을 쐬며 보고 있으니 정신이 들었다. 내가 방금 무슨 행태를 보였는지 자각하게 됐다. 권수한이 내 옆에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나와는 반대쪽 하늘을 바라봤다.
“이런 일이 많은가.”
“무슨 일이요.”
“잘 먹어놓고, 팬이 줬다고 하니까 게워내는 일.”
“..보통은 아예 먹질 않죠.”
나는 혹시나 해서 덧붙였다.
“진짜로 독 안 넣었을 거라는 건 알아요. 토 해놓고 이런 말 해봤진 안 믿기겠지만, 그 약과를 그쪽도 먹을 가능성이 있는데 독을 넣진 못하죠.”
“알면서 왜.”
“모르겠어요. 그냥 팬이 줬다고 하면 속이 역해져서.”
권수한이 차분히 심호흡 했다.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눈치가 있어서 분노의 대상이 내가 아닌 건 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권수한에 대한 인상이 바뀐다.
“넌 팬을 무서워하는군.”
“당연하죠. 그들은 나를 싫어하니까. 오늘 일만 해도,”
말하려다가 이 인간 앞에서 굳이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멈췄다. 하지만 권수한은 내가 하려던 얘기를 눈치 챘다.
“오늘 일이라면 윈디슈즈 말인가?”
“..네. 내 생각엔 엔돌핀 팬이 고장 낸 건 같아요. 무대 뒤쪽에 팬이 왔었거든요.”
난 스태프와 여학생 얘기를 해줬다. 사과주스부터 윈디슈즈까지.
말하면서 권수한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냉정하면서도 신중히 듣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사실 이거 오늘 그쪽한테 부탁하려 했어요. 그쪽 동생 분한테요.”
난 점퍼 주머니에서 사과주스를 꺼냈다. 스태프의 여동생이 꼭 이라 오빠가 먹어야 한다고 줬던 사과주스였다.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요.”
“...그래. 며칠 걸릴 거다.”
“네, 고마워요.”
내가 이걸 국과원에 맡기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독이 들어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굳이 제이가 아닌 ‘이라’가 먹어야 하는, 나는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고 사실 독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고 확인 받고 싶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는, 차라리 독이 들어있음을 확인 받고 싶기도 하다. 내 일상을 조여 오는 불확실성에 신물이 난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게 혼란스럽고 무섭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무거워져야 하는데.
권수한은 그 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이비틱강 물결만 바라봤다. 조금 후에 권수한이 불렀다는 택시가 도착했는데 리무진 택시였다. 권수한은 나만 태웠다.
“다음엔 언제 시간 되지?”
“컴백 2주 차라 바빠요. 그쪽도 바쁘지 않아요?”
“네게 맞출 수 있어.”
“매니저 형한테 물어보고 연락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권수한이 문을 닫아줬다. 차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저거 수습 어떻게 하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