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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야!! 괜찮아? 안 다쳤어??”
“씨ㅂ.. 괜찮냐? 깜짝 놀랐네. 기절할 뻔했어.”
“형, 일단 무대 뒤로 들어가요.”
다른 멤버들도 모두 따라 내려왔다. 무대 뒤로 가자 매니저 형들, 스타일리스트 형누나들, 스태프들이 모두 달려와서 괜찮냐고 걱정했다. 장내에서는 돌발 사고로 인해 잠시 무대를 중지한다는 방송이 울러 퍼졌다.
난,
“안 다쳤으니까 걱정 마세요. 하하.. 저 때문에 소란 일으켜서 죄송해요.”
아이돌의 웃음을 지어보이며 사람들 사이의 치솟은 긴장을 풀어봐. 제이가 날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슈즈 벗어봐.”
제이는 벗어보라고 말하면서 이미 벗기고 있었다. 엔지니어가 바로 건네받았다.
“뭐가 문제입니까?”
“아.. 오러 게이지가 비었.. 이거 게이지 충전이 안 되어 있어요.”
“방전된 슈즈를 줬다고요..?”
“왜 이게 들어갔지.. 죄송합니다. 아나, 미치겠네.. 이라 씨, 미안해요. 착오가 있었나 봐요.”
그래, 알 것 같다. 엔지니어 모르게 아까의 팬이 들어와 스토리지를 바꿨다. 내 발사이즈는 독특하니 찾기 쉬웠겠지. 어둠 속에 숨어 숨죽여 하나를 바꾸고 나머지를 교체하기 전 식은땀을 훔치는 사이 사람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하나로 만족하자며 아쉬움 속에서 몰래 도망친 것이다.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슈즈 점검 한두 번 해요?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챙기는 사람이 엔지니어입니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제정신입니까??”
제이는 무섭게 화를 냈다. 일개아이돌이 아니라 국가 재산인 S급 모셔너였다. 국보의 분노는 무서운 것이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화낼 일은 아니었다. 무대 중 오러가 방전되어 떨어지는 일은 간혹 있었고, 나는 그나마도 한쪽만 출력이 안 되어 느리게 기우뚱했을 뿐이며, 어디 하나 다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휴, 다행이다. 진짜 놀라서 씨발, 아까 조금 욕해버렸네.”
“난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하다. 진짜 큰 사고 날 뻔했어.”
“이라 형, 괜찮아요? 진정했어요?”
“응, 나보다는 너네랑 형이 진정해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사내자식이 이런 걸로 놀라고 그래. 나도 오러 유저라 떨어져도 안 다쳤어.”
“이라 시발새끼가, 넌 시벌 간덩이가 부어서 떨어져도 퉁퉁 튀겠다. 시발놈아.”
한새가 거칠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웃음이 터졌다. 스태프들도 겨우 웃었다. 분위기가 풀어졌는데 다만 제이는 혼자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문 형이 내게 눈짓했다. 제이 좀 어떻게 해보라는 뜻이었다.
“제이, 너도 좀 진정해라. 내가 무슨 애기도 아니고. 너보다 생일도 빨라. 형님이거든? 짜식아.”
“.......”
“이럴 때만 과묵한 척은 혼자 다 해.”
“...내 앞에서 괜찮은 척 하지마. 진짜 열 받으니까.”
제이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난감했다. 결코 이렇게 화 낼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레 문 형과 용준이 형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그들 역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멤버들과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살피고 싶었으나 제이는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자 더 강렬하게 노려봐서 난 녀석의 눈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는 고마웠어. 난 진짜 괜찮아. 다친 데도 없고, 3S 무대 하다 보면 이런 일도 한번쯤 겪는 거지. 이제 무대 하러 가자. 다들 기다리잖아.”
내가 거듭거듭 달랜 후에야 제이의 분노와 걱정이 가라앉았다. 30분 후에야 엔돌핀의 무대를 재개할 수 있었다. 나는 튼튼한, 제대로 점검한 윈디슈즈를 신고 다시 날아올랐다.
무대를 마친 후에는 여느 때보다 커다란 환호가 있었다. 이건 그냥 해프닝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마 멤버들에게도.
하지만 제이에게는 해프닝이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장님에게 다이렉트로 전화해 전용 슈즈를 사자고 한 걸 보면. 어쩌면 녀석에겐 합당하고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너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저녁 스케줄까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권수한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디 식당에서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한번쯤 얘기는 나눠야 하기에 수락했다. 그에게 부탁할 것도 있고.
“어디 가?”
“잠깐 친구 보러.”
“친구 누구?”
“고급 동창.”
캡모자를 눌러 쓰고, 봄점퍼를 걸치고 방에서 나오자 거실에서 용준이 형을 기다리고 있던 제이가 물었다. 난 아주 자연스럽게 운동화를 신었다.
“동창 누구.”
“알아서 뭐하게. 야, 오늘 녹화 잘해라? 야밤에 한다고 졸지 말고.”
“그냥 쉬지. 아까 많이 놀랐을 텐데.”
운동화 끈을 묶다가 멈칫했다. 난 제이를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야, 사내자식이 그딴 걸로 아직까지 놀라있음 되겠냐. 형은 가니까 숙소 잘 지키고 있어.”
“일찍 와라. 내일도 아침부터 스케줄 있어.”
“알써. 녹화 잘해~ 빠이.”
제이는 현관까지 따라와서 잔소리했다. 더 잔소리 듣기 전에 얼른 나왔다.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아까 못한 검색을 마저 해봤다.
권수한. 서른둘이고 S급의 어댑터, 오러 의사.
해외 방송에도 나갔었구나. 우리나라 교양이나 시사 프로그램에는 나온 적 있는데 예능은 엔돌핀이 처음이었나 보다. 외모가 쿨하고 잘생겨서 그런지 팬들도 많은 것 같았다.
모처럼 웹에 들어간 김에 '이라 병아리'도 검색해봤다. 바로 이미지가 떠서 놀랐다. 저번 잡지 촬영 때 사진이었다.
노랑 후드티를 입고 숲 속 커다란 나무 발치에 앉아있는 사진 옆에다가 병아리 하나가 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사진을 붙여 놨다. 청량한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컨셉 사진에도 빨빨빨 돌아다니는 병아리 사진이 붙어 있고, 햇살 아래에서 낮잠 자는 컨셉으로 찍은 사진 옆에도 뽀송뽀송 잠들어 있는 병아리 사진이 붙어 있다.
와, 시발.. 나를 병아리랑 비교하는 거야? 아무리 어려 보여도 그렇지 20대 남자 가지고 이런 심각한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사진 밑에는 ‘이라는 병아리해 귀여웡♡’이라는 사족이 달려 있었다. 순간 눈앞이 뿌예지면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 팬이 있긴 하구나. 누군가 내가 진짜 귀여워서 이렇게 시간을 들여서 사진도 합성하고 글을 올린 거야.
눈을 깜박하자 대번에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모자 챙 아래로 숨죽여 닦았다. 오늘 나는 두 번 죽을 뻔했으니 이 정도 눈물은 어쩔 수 없지.. 나라도 나를 위로해줘야 한다.
글쓴이 이름을 눌러서 이 팬이 쓴 글만 보았다. 다섯 개 정도가 올라와 있었는데 그 중 한 제목이 심장을 쿵 떨어뜨렸다.
<나 솔직히 이라 마음에 안 들어(심각)>
한숨을 쉬며 화면을 껐다. 감동이 1분을 안 간다. 그럼 그렇지. 내 인생이 이렇지 뭐..
멍하니 스쳐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화면을 켰다. 평소라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왠지 내용을 읽고 싶다.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왜 병아리가 아닌거야??????ㅇ.ㅇ.ㅇㅇ.ㅇㅇ.ㅇ
주머니에 넣어서 갖고다니고 싶은데 왜 병아리 아니야 ㅇ.
아....
하하... 내 오해였구나.
이런 경우도 있구나. 다행인 한편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글을 클릭 안 했으면 평생 오해할 뻔했다. 평생 날 싫어하게 됐구나, 라고 말이다. 오늘 아주 울다가 웃다가 뭔 날인가 보다.
권수한은 내가 폰을 보며 실실 웃고 있을 때 나타났다.
“뭐 웃긴 거라도 있나?”
“아, 씨, 깜짝이야. 왜 이렇게 늦어요?”
“미안하군. 들어가지.”
말끔한 정장 차림에 머리카락 한올 빼놓지 않고 올린 권수한은 미안함이라는 뜻을 모르는 얼굴로 한 마디 하고는 들어갔다.
제잔딘 왕국 공식 식당은 처음 와본다. 두리번거리며 따라가자 제잔딘 고유 복장을 한 직원들이 룸 입구로 안내했다. 스무 명은 앉을 수 있는 넓은 좌식 테이블이었다. 권수한은 익숙하게 직원에게 코트를 건네고 앉았다. 다른 직원도 내 점퍼를 받으려는 듯 손을 내밀길래 사양했다.
“오늘 사고가 있었더군. 윈디슈즈가 방전 됐다고. 다친 덴 없나?”
“그게 뭐라고 기사가 떴지?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오늘은 한 끼라도 먹었고?”
“아녀. 많이 얻어 먹으려구 굶었는데요.”
나는 메뉴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접시를 나르는 직원들을 보았다. 직원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갈비찜과 잡채 같은 음식들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직원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권수한에게 물었다.
“왜 주문도 안 했는데 날라요? 갈비찜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나 오는 거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저 사람들.”
“.......”
권수한은 말없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난 움찔하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권수한은 내 몫의 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안심하지. 여긴 공식식당이고, 메뉴는 미리 주문해 놨다. 직원들이 네가 오는 걸 알고 있지도 않았어.”
“.......”
“내가 반찬을 한 입씩 다 먹어봐야 만족하겠나? 기미상궁이라도 된 것 같군.”
“됐어요. 그냥 먹을게요.”
뭐랄까..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이니까 말이 통해서 편하구나.
젓가락을 들었다.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많았다. 잡곡밥, 갈비찜, 소불고기당면볶음, 낙지볶음, 쌈채소, 잡채, 조기구이, 파전, 간장게장, 양념게장, 쪽파무침, 시금치, 콩나물을 비롯한 여러 나물 무침, 우렁된장찌개..
“이건 뭐에요?”
“성게 젓갈.”
처음 보는 거당. 나도 모르게 젓가락이 향했다. 젓갈이라니까 짤 것 같아서 조금만 찍어먹어 봤다.
“쯥픕쯥!”
겁나 짜서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아나.. 앞을 보니 권수한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크크큭 웃고 있었다.
난 다른 애들도 맛보았다. 대체로 자극적이지도 않고 맛있었다. 특히 갈비찜은 진짜 맛있어서 손으로 들고 쯉쯉 먹었다.
“천천히 먹지. 누가 안 쫓아온다.”
갈비 진짜 부드럽고 입에서 사르르 녹네.
“너무 빨리 먹지 마라.”
된장찌개는 우렁 넣은 게 짱인 것 같다.
“이라.”
권수한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난 밥그릇의 밥풀을 싹 긁어먹었다.
“이미 다 먹었는데요.”
“10분도 안 돼서..”
10분이라니. 입 안이 헐어서 잘 못 먹은 탓에 너무 오래 걸렸다.
권수한은 한숨을 쉬고 직원을 호출했다. 직원이 밥 한 그릇과 리필 반찬을 주고 갔다.
“한번 씹을 때 스무 번 이상 씹어.”
“혹시 동생 있어요?”
“알면서 왜 묻지?”
“국과원분 말구요. 나이 차 많은 동생.”
“없다. 좀 천천히 먹어라.”
막냇동생 혼내는 말투길래 물어보니까 없단다. 어느 정도 배가 찬 나는 스무 번까지는 아니라도 아까보다는 천천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