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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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에서 내리자마자 크게 숨부터 들이켰다. 청량한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니 좀 살 것 같다. 내리는 게 3초라도 늦었으면 토네이도 한탕 할뻔 했다. 토를 흩뿌리는 아이돌로 사진 돌아다녔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길막하지 말고 비켜.”

 “아, 씨. 말로 해, 새끼야.”

 숨 좀 돌리고 있는데 제이 놈이 발로 내 엉덩이를 밀었다. 생각 같아선 바퀴차에 평생을 가두고 싶지만 다른 멤버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켜섰다. 눈을 치켜뜨고 야려보는데 뒤이어 나온 한새가 미안하다고 애교부리냐는 개소리를 했다. 확 진짜로 개가 되어줄까 하다가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관뒀다.

 “이라, 멀미 했어? 나 멀미약 있는데 말하지.”

 “아니, 멀미 안 하는데 걍 바퀴차가 오랜만이라.”

 “돌아갈 때도 이 차니까 그때는 멀미약 꼭 먹어.”

 “멀미 안 한다니까.”

 문 형이 친절하게 짜먹는 멀미약을 줬다.

 빈 속에 먹어도 되나? 뭐 안 먹는 것보단 낫겠지. 항상 민폐 끼치는 날 챙겨주는 문 형은 천사가 분명하다.

 전지진동차를 놔두고 불편하게 오일차를 타고 온 이곳은 마한빈야 서쪽 지방 와튼 스튜디오, 우리는 3집 타이틀곡 뮤비 촬영을 위해서 여기 왔다.

 메이크업을 간단히 수정하는 동안 매니저 형이 들어왔다.

 “개인컷부터 찍고 단체 안무 들어갈 거야. 문, 제이, 한새, 이라, 야단 순서로 가자.”

 “아, 왜요. 내가 먼저 할래.”

 “한새, 넌 NG 많이 낼 거잖아. 뒤쪽에서 해야지. 마지막 안 시키는 걸 감사히 여겨.”

 “헐, 저 NG 안 내고 한 큐에 끝낼 거거든요? 내가 앞에 할래. 기다리기 힘들단 말이야.”

 “그냥 저 놈 마지막 시켜. 야단이는 무슨 죄야.”

 “아, 왜! 싫어, 내가 먼저 할래. 마지막은 절대 싫어!!”

 “그럼 네 번째 하든가.”

 “네 번째도 싫어. 실수 안 하고 빨리 찍을 수도 있잖아. 오늘 컨디션도 좋단 말야. 앞에 할래~~!!”

 제이가 끼어드니 한새는 떼쟁이 아이가 되어서 바닥을 구를듯 했다. 사실 한새가 워낙 NG가 많아서 다들 한새 뒤 촬영은 원하지 않는다. 저 착한 문이 형도 가만히 있으니 뭐..

 매니저 용준이 형은 난감한 표정으로 한새를 달랬다. 문 형도 난감해했다. 한새와 제이는 틈만 나면 다투는데 대부분 제이가 이긴다. 이번에도 제이가 이기겠지?

 “야, 이라. 넌 어떻게 생각해?”

 “어?”

 한새가 날 끌어들였다. 이 기싸움에서 질 걸 예상한 것이다.

 “너도 내가 마지막에 했음 좋겠냐?”

 응.

 이라고 차마 말은 못하고 그냥 에휴, 한숨을 쉬었다.

 “야, 됐어. 이 형님이 마지막 해준다. 으이구.”

 “오, 진짜?”

 “빨리 끝내라. 엔간하면?”

 “알았어. 크크. 땡큐.”

 한새가 한차례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저게 형 대우는 못할망정..

 야려봤지만 눈길을 느끼지 못하고 혼자 룰루랄라 한다. 매니저 형은 고맙다고 눈을 찡긋하고 돌아갔다. 역겨움에 방금 전 선행을 후회하는데 문 형이 걱정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너 괜찮겠어? 멀미도 했잖아.”

 “아, 멀미 아니고 그냥 오일차가 싫은 거라니까.”

 “얼굴이 창백한데..”

 “저 녀석이 언제 안 창백한 적 있었나.”

 문 형의 걱정 어린 말에 제이가 찬물을 끼얹었다. 제이는 아니꼽다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서늘한 눈빛 할 때면 팬들이 흑표범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간다.

 “이라야. 몸 안 좋으면 언제든 말해. 넌 너무 말을 안 해서..”

 “오키염. 얼른 메컵 수정이나 받아. 형이 첫 번째잖아.”

 문 형이 시원찮은 얼굴로 한새 옆에 앉았다. 한새는 그새 기분 좋아져서 메이크업 누나한테 섀도우 해달라, 눈꼬리 빼달라 지랄을 떨고 있었다.

 이제 소파에 앉아 폰게임을 시작하려는데 옆에 야단이가 얌전히 와서 앉았다.

 “형.. 제가 마지막 할게요. 형 피곤하잖아요.”

 참 말 없는 녀석인데 가끔씩 입 열 때마다 항상 기특한 말만 한다.

 야단이의 머리칼을 쓰윽쓰윽 쓸어줬다.

 “너도 피곤하잖아. 저번에도 막내라고 제일 늦게 했고. 괜찮으니까 쉬고 있어.”

 “......네.”

 야단이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끄덕였다. 귀여운 놈. 씨익 웃고는 진짜로 폰게임을 하려는데 이번엔 왼쪽 소파가 가라앉았다. 제이 놈이 그 커다란 몸으로 불쌍한 소파를 짓누르고 있었다.

 “너 한새 너무 오냐오냐 하지 마라. 버릇 나빠져.”

 “야, 저 새낀 이미 끝났어. 이미 나빠졌으니 그냥 우리가 맞춰줘야지.”

 한새는 외동아들이라 집에서 너무 사랑만 받으며 컸다. 어쩌겠는가. 성격이 이제와 변할 수도 없을 거고.

 “차에서 한숨도 못 잤지. 기다리는 동안 잠이나 좀 자.”

 “게임 좀 하다가.”

 “그냥 좀 쳐 자.”

 제이새끼가 내 폰을 가져갔다. 빼앗으려고 시도해봤는데 그 큰 체구와 긴 팔을 이용해 날 조롱하기만 했다. 나중에는 제새끼의 가슴팍에 코까지 박았다.

 와씨, 열 받아서 씩씩거리자 대기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막내 매니저형랑 코디 누나랑.. 한새랑 문 형까지 웃고 있다. 쪽팔리게 다 봤나 보다.

 “시발, 알았어. 잠이나 잘 테니까 자고 일어나면 내 폰 제자리에 딱 돌려놔라.”

 “눈이나 감아.”

 “알았다고!!”

 난 팔짱을 끼며 보란 듯이 눈을 꽉 감았다.

 제새끼는 아직 모른다. 나는 사람 많은 데서는 잘 수 없다는 걸.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무방비하게 잠드는 바보 같은 짓거리는 안 한다. 그랬다가 뭔짓을 당하려고?

 그래서 지금 무척 피곤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그냥 눈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자는 척 하는 동안 내 앞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양옆에 움직임이 안 느껴진 걸 보면 야단이 아니면 제새끼인데..

 확 눈 떠버릴까 하다가 상대의 민망함을 생각해서 참아줬다. 후 내 인내심은 세상인내심이 아니야..

 마지막 개인컷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시간은 밤 11시, 문 형이랑 한새는 꿀잠을 잤는지 탱탱 부은 눈으로 날 맞이해줬다. 제이랑 야단이는 모셔너 아니랄까봐 지친 기색 1도 없이 내 촬영까지 다 지켜봤는데 말이다.

 아그그...

 소파에 앉는데 앓는 소리 참느라 힘들었다.

 제이랑 야단은 걍 가뿐해 보인다. 모션오러유저들은 진짜 튼튼하다. 나도 모션 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예전엔 이 정도로 체력 딸리진 않았는데..

 매니저 형이 기다려보라며 나가더니 곧 다른 누나, 형들이랑 같이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들을 가지고 왔다. 저게 뭔지 알 것 같아서 뒷목이 서늘해졌다.

 “오늘 도파민에서 서포트 들어온 거야. 도시락에 이름 써있으니까 헷갈리지 말고, 여분 많으니까 부족하면 말해.”

 “우와앗, 도시락이다! 배고팠는데 딱이네.”

 “맞아, 도파민에서 우리 서포트한다고 기부금 공지 올린 거 봤었어. 늘 고마운 사람들이야.”

 문 형은 인증샷을 제안했다. 각자 자기 스티커가 붙어진 도시락을 들고 소파에 주르륵 앉았다. 제이와 한새라는 거인 사이에 낑긴 나는 간신히 미소를 만들었다.

 찰칵.

 사진을 찍자마자 멤버들은 도시락 열기에 바빴다.

 “손편지도 있어. 대박. 『비글 한새 오빠. 늘 에너지 있고 밝은 오빠가 좋아요. 앞으로도 나잇값 못하게 비글거려주세요』..? 뭐야, 이거? 칭찬이야?”

 한새는 다른 멤버한텐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다며 여기저기 기웃기웃했다.

 『든든한 맏형 문이 오빠. 언제나 다정한 멜로 눈빛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요. 애인 만들면 쥬겨버릴 거야..』

 『침착한 막내 야단아. 입에 거미줄 칠까 걱정될 정도로 말 없는 우리 야단이. 목소리 좀 들려줘.』

 『흑표범 제이 님. 부디 이 도시락이 제이 님의 입맛에 맞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멋있는 검무 부탁드립니다.』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제이 손편지는 겁나 정중해서 너무 웃겼다. 팬들한테 제이의 존재란 뭘까?

 “이라 건?”

 “그러게. 이라 네 거 어디 숨겼어. 같이 좀 보자.”

 “야, 다 공유했잖아. 뭘 숨기냐? 얼렁 내놔 봐.”

 문 형이랑 한새는 내가 편지를 숨긴 줄 알지만 사실이 아니다. 난 애초에 편지 같은 거 못 받았다. 내가 뻘쭘하게 있자 문 형이 어리둥절한 듯 묻는다.

 “너.. 설마 편지 없었어?”

 “..어, 못 봤는데.”

 “왜 없지..? 다 받았는데.”

 나도 좀 놀라긴 했다.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는 편지는 줬었는데.

 “깜빡했나보지. 냅 둬.”

 “희한하네. 거기 회장 되게 꼼꼼한 성격이던데. 어디 떨어지진 않았나 찾아봐.”

 문 형의 말에 용준이 형이랑 코디 누나들까지 다 도시락을 뒤져가며 찾았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한새는 능글맞게 웃으며 너 오늘 일진 안 좋겠다고 놀려댔다. 제이도 혀를 찼다. 문 형은 열심히 쓴 편지를 잃어버린 팬들을 불쌍해했다. 나는 내가 불쌍하다. 나라도 날 불쌍해해야지 어쩌겠어.

 “아, 됐어. 얼른 밥이나 먹어들.”

 다들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내 스티커가 붙어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돈사태김치찜이랑 갈비탕이 메인이구나. 반찬은 어묵볶음이랑 파전이랑 많기도 많다. 각종 제철과일들도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난 팬이 준 건 먹지 않는다.

 뚜껑을 닫자 대번에 대기실이 조용해지면서 시선이 쏟아졌다. 살그머니 닫았는데 다들 나 먹는지 안 먹는지 보고 있었나 보다.

 “이라야.”

 “야, 너 또 안 먹냐? 좀 먹어라, 좀.”

 “멀미해서 속 안 좋아. 나중에 먹을래.”

 “멀미 안 한달 때는 언제고. 나중에 어지럽다고 촬영 지연 시킬 거 아니면 얼른 먹어.”

 제이가 까칠하게 정곡을 찔렀다. 너무 맞는 말이지만 난 보란 듯이 도시락을 백팩 안에 집어넣었다.

 “이따 먹을 거야. 지금 먹으면 속만 버릴 듯.”

 “따뜻할 때 쳐먹어, 병신아. 넌 맨날 이러더라? 팬들 생각해서 좀 먹어라.”

 “다른 때는 잘 먹으면서 꼭 촬영만 오면 안 먹어.”

 “촬영날은 긴장해서 그렇고 식으면 전자레인지 데우면 되지, 뭘. 나 화장실 갔다 온다. 맛있게 먹어라.”

 “이라야!”

 문 형이 불렀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멤버들은 먹지 않는 나를 걱정하지만, 내가 왜 안 먹는지 알고 있는 매니저 형은 그저 안쓰럽게 보기만 했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꼬르륵 배가 울었다. 문틈으로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김치찜 나 짱 좋아하는데. 되게 탐스럽고 맛있어 보였지. 방송에서도 몇 번 말했더니 종종 조공으로 김치찜이 온다. 다 미끼다. 나 먹으라는 미끼. 미안하지만 나는 절대 속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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