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온실낙원 4권-4. Round 0 (2) (8/8)

온실낙원 4권

4. Round 0 (2)

사흘 만에 지하로 내려온 성재현은 방문을 열었다. 일부러 에어컨도 꺼둔 방 안은 끈적하고 습한 열대 우림 같았다. 공기 청정기를 틀자 놀랐는지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성재현은 일부러 슬리퍼를 끌며 바닥에 웅크린 몸 앞에 다가갔다. 죽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몸 위에 발끝을 대고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힘없이 떨렸다.

성재현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등을 살살 토닥였다.

“이제 내 얼굴 볼 마음이 들어요?”

“우으, 응.”

그 말에 강진하가 몸을 앞뒤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자루 때문에 기우뚱거리는 모습이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손목을 어찌나 비벼댔는지 살갗이 터져있었다. 약을 좀 발라주는 게 좋으려나.

“땀을 너무 흘렸네. 우선 좀 씻는 게 좋겠어요. 그런 다음 여기다 약 바르고.”

“으, 으으.”

“욕조에 물 좀 받고 올게요.”

나가려던 성재현의 슬리퍼에 강진하가 달라붙듯이 몸을 비볐다. 마치 고양이가 몸을 비비는 듯한 몸짓에 성재현은 그를 달래듯이 손목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졌다. 진작 이렇게만 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살랑거리는 태도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만약 저 입에서 한 번이라도 또 나가겠다느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는 아예 이를 뽑아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얼마나 측은한가. 우므러진 입으로는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니 성재현은 애써 그를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침실과 이어지는 통로 가운데에 욕실이 있었다. 성재현은 일부러 CD 플레이어를 작동했다. 짜 맞춘 것처럼 음악이 흘러나왔다. 라크리모사. 음울한 장송곡에 맞춰 그는 세례를 준비하는 예배자처럼 물을 틀었다. 입욕제가 마침 다 떨어졌다. 여름이라서 목욕보다는 샤워를 많이 하다 보니 미리 챙기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차분히 방을 나섰다. 습관처럼 문을 걸어 잠그려던 성재현은 일부러 문을 살짝 열어뒀다.

설마 그사이에 나가려고 할까. 저렇게 손발이 묶여있는데? 단념했겠지. 그러고도 남은 시간이 아닌가.

“이 층 좀 다녀올게요. 이 트랙이 끝나기 전에는 올 거예요.”

대답은 딱히 돌아오지 않았다. 성재현은 슬리퍼 신은 발을 일부러 크게 끌며 2층으로 올라갔다. 입욕제를 챙기고도 그는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창밖을 잠시 바라봤다. 내일까지 비가 내린다고 했다. 잔디는 이미 빗물에 푹 젖어 정원은 늪지대 같았다.

비가 그치면 어디 별장에라도 데려다줄까. 집에 너무 오래 가둬두긴 했다. 의사도 스트레스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이 집보다 넓은 곳에서 바람을 쐬게 해주면 괜찮아지겠지. 모처럼 애지중지한 것이 볼썽사납게 시드는 모습은 성재현도 보고 싶지 않았다.

2층에서 나온 그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다봤다. 어둑어둑한 지하에서 인영이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성재현은 그렇게 웃어넘길 수 없었다. 상냥함으로 무장한 얼굴은 차갑고 싸늘한 두려움만이 비쳤다.

강진하가 도망치는 중이었다.

또 자신만 두고 여길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성재현은 비참함을 느꼈다. 도망치는 건 그저 붙잡아두면 된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고작 기어올라 도망치는 걸 놓칠 정도로 아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치욕스러운 거절이라도 당한 듯했다. 거절? 무슨 거절을 당한 건가. 그에게 내가 부탁을 했던가. 원한다고 했던가.

전율하듯 몸이 떨렸다. 심장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성재현은 주저 없이 그를 발로 걷어찼다. 얼굴에 씌운 천을 벗겨내자 땀으로 벌게진 얼굴이 드러났다. 겁먹은 눈동자를 마주한 성재현이 말했다.

여기서 뭐 해요?

화, 화장실에….

화장실?

조롱하듯 되묻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요! 그냥 답답해서, 더워서.

더워서 산책가고 싶었구나.

그러자 다시 입술이 닫혔다. 겁을 먹고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 거짓말. 천연덕스럽게 웃던 얼굴에 서서히 음울이 드리웠다. 성재현은 그를 산산이 짓이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도망가려 했잖아. 도망가려고 했으면서, 그런 말로 속이려고 하면 통할 거 같아?

이를 악문 강진하가 소리쳤다.

“넌 내가 지겹지도 않아? 질릴 만큼 섹스하고, 갖고 놀았으면 됐잖아. 이제 제발 좀… 버려.”

버리라니. 누구 마음대로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질린 적 없다. 질린다고 해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그런데 왜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자신과 있기 싫은 건가. 그 정도로?

바르작거리는 몸을 훑었다. 그의 가느다란 발목이 보였다.

다리를 못 쓰게 하면 도망칠 생각을 안 하려나.

발목을 부러트리면 어디든 못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지할 곳이라곤 오로지 자신밖에 남지 않는다. 온전히 제게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성재현은 삽을 들었다.

전부 다 망가트릴 생각은 없다. 그저 조금만, 저항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

“한동안 산책은 못 나가겠네.”

콱. 내리찍은 삽이 아슬아슬하게 발목을 스쳤다. 겁에 질린 강진하가 바들바들 떨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성재현이 삽날로 강하게 뒤꿈치를 그었다.

“으, 으윽!”

찡, 머릿골까지 울리는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찢긴 살갗에서 피가 질질 흘러내렸다.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던 강진하가 눈을 뒤집고 경련했다. 성재현은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다리에 난 상처를 발로 강하게 짓이겼다.

“아악!”

뚝, 파열음이 들렸다. 슬리퍼가 피에 젖었다.

삽을 내던진 성재현이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았다. 고통에 잠식된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명한 고통, 그리고 증오. 동시에 절망, 혹은 애원.

아, 예뻐라.

성재현은 그제야 웃었다. 두려움이 가신 얼굴엔 천진한 미소가 가득했다. 흐느낌에 아래가 섬뜩하게 지끈거렸다. 피가 흐르는 저 몸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싶어졌다. 짐승처럼 달려들고 싶었다.

강진하를 안아 든 그는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귀중한 모종을 제자리에 심듯 조심스러운 손길은 모순적이었다. 달랑거리는 발을 수건으로 감싸자 강진하는 힘없이 성재현의 어깨에 매달렸다. 팔을 움켜쥔 손가락이 살을 찢을 것처럼 강하게 힘을 줬다. 금세 성재현의 팔뚝에 피멍이 맺혔다. 그럼에도 성재현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울지 마.”

“흐읍, 흑.”

“이 정도는 금방 괜찮아져요.”

그저 울고 있는 눈 아래에 입 맞췄다. 도리질 치는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눈물을 핥았다.

황홀한 키스였다.

**

열 살, 겨울. 도련님이 감기에 걸렸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쏟아진 정원은 잿빛이었다. 현관 앞에 세운 눈사람이 무너졌다. 바퀴 자국이 선명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멋지게 달았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팔락거리고 있었다.

뒷문으로 안을 흘끔 살피자 어른들이 속닥거리고 있었다. 여태 아팠던 적이 손에 꼽던 그의 병환에 그들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꽉 짠 물수건과 빈 그릇을 들고 돌아온 외할머니가 당황스러운 듯 친손주를 붙들었다.

‘진하야 여긴 또 왜 왔어? 엄마가 또 가서 사장님 얼굴 좀 보고 오랬어?’

‘아니요. 안 그랬어요.’

‘이 기지배가. 말을 안 듣지, 말을!’

외할머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강진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머니는 술병이 나서 밤새 토하다 겨우 잠이 들었다. 아버지가 하던 대로 전자레인지로 죽을 데우고, 이불까지 손수 덮어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강진하가 바깥에 나갔는지, 뭘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오늘 삼성동에 온 건 순전히 강진하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도련님은 매주 한 번씩 이곳에 오라고 권했다. 저번 주말에는 내내 아파서 가지 못했으니 오늘만큼은 얼굴을 비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와보니 방문이 썩 편안해 보이진 않았다. 양말 신은 발끝을 꿈지럭거리던 강진하가 고개를 들었다.

‘할무니, 도련님 많이 아프대요?’

‘의사가 왔다 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학교도 이틀째 못 가셨거든. 사모님한텐 연락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다음에 뵈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할머니는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매주 한 번은 오라고 했는데.’

‘왔다가 갔다고 해둘게. 그럼 도련님도 이해하실 거야.’

무릎을 굽힌 외할머니가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썹을 구긴 강진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책가방을 꼭 쥐고 힘없이 돌아서던 강진하를 막아서듯 나타난 건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도련님이 들어오셔도 된답니다.’

‘정 비서.’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부른 외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애 얼마 전에 감기 크게 앓았어. 그러다 도련님한테 옮기면 어쩌려고. 사모님 귀찮은 일 싫어하시는 거 알잖아. 으응?’

‘차라리 감기로 아프면 둘러댈 말이라도 생기잖습니까. 열네 살이 수면 부족으로 쓰러졌단 소리보단 낫잖아요.’

‘그래서 사장님한테도 말 안 했잖아. 괜히 또 도련님한테 뭐라고 하시는 건 아닐까 봐.’

두 어른은 심각한 목소리로 옥신각신했다. 강진하는 그들 가운데에서 멍하니 대화를 듣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사모님은 도련님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대부분 시간을 제주도 별장이나 동해안 요트 클럽에서 보낸다며 식모 아주머니들이 숙덕거리곤 했다. 지 새끼 아니라고 야박한 거지. 사장님 탓도 되죠. 아무리 죽은 전처 자식이래도 너무 정이 없다니까. 쉬쉬, 다들 너무 목소리가 크다. 이러다 다 쫓겨나요. 우리 아들 곧 수능 결과 나온단 말이에요. 등록금 안 준다고 하면 나 진짜 큰일이야. 수군수군.

정 비서가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계단 아래로 눈짓했다.

‘도련님이 기다리세요.’

강진하는 카펫이 깔린 계단을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다. 당시엔 삼성동에 오더라도 한 번도 지하는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성재현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2층 방 대신 지하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단지 ‘왜 지하로 방을 옮겼을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만 있었을 뿐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짙고 어둡고 습했다. 고작 열네 단으로 이뤄진 계단이 왜 그리도 길게만 느껴졌던가. 볕도 잘 들지 않는 지하는 어두컴컴해서 심해 같았다.

그의 방은 어둠 끝에 있었다. 문을 열자 도련님은 침대에 외로이 누워있었다. 장식품에 둘러싸인 풍경은 인형의 집 같았다. 가습기가 푸스스 한숨을 내쉬었다. 강진하는 책가방을 내려두고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도련님, 저, 진하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얼굴이 종잇장 같았다. 아프다더니 진짜였구나. 막상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실례를 한 건 아닌지. 그치만 들어와도 된다고 했는데. 눈을 가늘게 뜬 성재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머뭇거리던 강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아프세요?’

‘…응. 조금.’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베개에 등을 기댔다. 그제야 강진하는 그의 얼굴을 완전히 볼 수 있었다. 볼거리를 앓는 것처럼 뺨이 붉었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잠옷은 며칠째 벗지 않았는지 구깃구깃했다. 그 완벽하던 도련님에게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다.

‘모처럼 놀러 왔는데 이런 꼴이라서 미안.’

한껏 무안한 미소를 지은 성재현이 말했다. 강진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왔으니까 간식 갖다 달라고 할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롤케이크? 주스? 프랑스에서 마카롱도 사 왔어.’

‘저 안 먹어도 돼요. 도련님 괜찮은지 보려고 한 거예요.’

‘다른 건 필요 없어? 텔레비전 가져오라고 할까? 책은 여기 말고 옆방에 많아.’

‘괜찮은데.’

‘얼굴만 보고… 가려고?’

성재현이 주눅 든 목소리로 되물었다. 마치 강진하가 가지 않았으면, 하고 애걸하는 것처럼 들렸다. 성재현은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외로워 보였다. 전구가 다 꺼지고 장식마저 빼앗긴 전나무 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도련님 열 많이 나요?’

‘손대봐.’

가까이 다가간 강진하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감기에 걸린 사람치고는 미지근했다. 열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강진하는 어머니에게 해준 것처럼 뺨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예의 없는 행동임에도 성재현은 거부하지 않았다. 나른하게 눈감은 얼굴이 병든 고양이 같았다.

‘밖에, 추웠지?’

‘아니요. 오늘은 따뜻한데… 눈사람도 다 녹았어요.’

‘눈사람? 아, 그거.’

‘보셨어요?’

‘응. 잘 만들었더라.’

그가 봤다는 말에 강진하는 쑥스러워 머리를 긁적거렸다. 성재현은 미술에 재능있다던 말도 들을 정도였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도련님 눈에 뭉뚝한 눈사람 두 개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았다면 다행이었으리라.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더라. 왜 둘이야?’

‘혼자면 외롭잖아요.’

그래서 두 개예요. 고개를 숙인 강진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성재현이 싱긋 웃었다.

‘맞아. 혼자면 외롭지.’

몸을 가까이 당긴 그가 눈을 감았다. 갈라진 목소리가 뒷말을 이었다.

‘진하야.’

‘응.’

‘나도 혼자면 외로워.’

손을 꽉 움켜쥔 그가 어리광 부리듯이 말했다. 가지 말고 나랑 있자. 왠지 우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힘껏 붙잡은 손이 아픈데도 강진하는 차마 손을 빼지 못했다.

아프면 다 아기가 되는 법이야. 외할머니가 흐느껴 우는 어머니를 보며 종종 하던 말이었다. 그럼 지금 도련님도 아파서 아기가 되고 싶은 걸까. 그래서 4살이나 어린 자신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걸까.

‘아무 데도 안 갈게요. 저 어차피 오늘은 갈 데도 없는걸요.’

‘그래?’

‘그러니까 저 지겹다구 쫓아내면 안 돼요.’

강진하는 손등을 맞잡고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그제야 안심하듯 그가 빙그레 웃었다.

**

진통제를 몇 차례 맞은 몸은 마치 플라스틱이 된 것처럼 어색했다.

강진하는 멍하니 발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봤다. 살짝 까딱거리기만 했는데도 소름 끼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씨발” 하고 욕을 대신 내뱉었다. 붕대를 감기 전 발은 더 끔찍했다. 휠 수 없는 방향으로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게 제 발 같지 않았다. 부서진 장난감 다리를 보는 줄로만 알았다.

개새끼, 개새끼.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을까.

발을 부러트리던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아프다며 우는 제 몸을 끌어안고 그는 웃었다. 거룩한 의식을 거행한 것처럼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 놓인 목발을 노려보던 강진하는 목발을 내던졌다. 요란스러운 소음을 내며 목발이 바닥을 굴렀다. 강진하는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만 걸어도 전신에 땀이 배어 나왔다.

끼익, 방문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열렸다. 강진하는 몇 시간 전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성재현은 강진하의 눈앞에서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에 자물쇠가 납작하게 으스러졌다. 이제 언제든 나가서 산책할 수 있겠네요. 망가진 자물쇠가 꼭 자신을 보는 듯해 강진하는 구역질을 견디지 못했다. 차라리 저열한 조롱을 듣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장식장에 놓인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4시간. 그다음엔 당연하게도 성재현이 이곳으로 돌아올 터였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걸 거듭 확인한 성재현은 강진하에게 주말에 함께 별장으로 가자고 말했다. 당분간 요양도 할 겸 푹 쉬게 해주겠다는 ‘관대한 제안’이었다. 그러겠다고 동의한 적도 없지만, 언제는 그가 제 의견을 들어줬던가. 그랬다면 진즉 이런 꼴도 되지 않았을 터였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난간을 부둥켜안고 힘없이 계단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몸에 손이 닿는 순간 강진하는 감전된 것처럼 파드득 떨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얼굴은 뺨을 맞은 사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니콜이 당황한 듯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강진하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머뭇거리던 니콜이 조심스레 강진하를 온몸으로 부축했다. 한 뼘은 족히 작은 몸에 기대려니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윽, 하아….”

계단을 오르는 내내 강진하는 몇 번이고 휘청거렸다. 딱 죽지 않을 만큼 아팠다. 죽으면 더는 아프지 않을 만큼 아프기도 했다. 너무 힘을 줬더니 이젠 반대쪽 발목까지 시큰거리며 아팠다. 무릎과 어깨는 움직일 때마다 연골이 닳은 것처럼 우득거렸고 하도 깨문 아랫입술은 껍질이 벗겨져 따끔거렸다.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이런 꼴로 별장에 가봤자 편해질 수나 있을까. 어쩌면 망가졌다고 여기고 영영 돌아보지 않을지도 모르지. 약혼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꼴로 버려지면 나는 정말로….

순간 기도에 뭔가 걸린 것처럼 목 안이 답답했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원하는 대로 지하 위로 올라왔고, 원한다면 바깥에도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처지만 실감이 났다.

소파에 힘겹게 걸터앉은 그는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제 얼굴을 봤다. 부스스하게 자라난 머리, 창백하게 질리고 해쓱해진 얼굴. 너무 추했다. 추하고 역겨운 나머지 강진하는 창문을 깨트리고 싶었다.

현관에서 벨 소리가 났다. 머지않아 주차장 쪽에 검은 승용차가 보였다. 벌써 성재현이 돌아온 걸까. 그러나 현관으로 들어온 건 정영호 혼자였다.

“오랜만입니다. 강진하 씨.”

현관을 들어선 정영호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무심한 눈길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태연했다. 그래, 알고 있었겠지. 강진하는 속으로 코웃음을 삼켰다. 그러니 이런 해괴한 일에도 궁금증 하나 품지도 않는 것이다.

무례한 태도에도 정영호는 쓴웃음조차 짓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반응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했다. 뭔가 가지러 왔는지 그는 위층에 잠깐 들렀다가 금세 응접실로 내려왔다. 돌아오는 기척에 벌떡 일어나는 강진하를 바라본 정영호가 눈살을 약하게 찌푸렸다.

“지금은 걷지 않는 게 나중에 장애도….”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진하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발목이 아픈데도 그는 멀쩡한 사람처럼 걸으려고 부단히 힘을 줬다.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건 제 몸이니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강진하는 멀쩡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멀쩡하다. 걸을 수 있다. 아무렇지 않다. 고집스러운 저항심이었다.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정영호를 따라나섰다. 기어코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정영호는 굳이 강진하를 만류하지 않았다. 저러다 제 고집에 지치리라고 여기는 듯 태평했다.

맨발에 붕대만 감은 게 전부인 강진하의 걸음은 누가 봐도 위태로웠다. 스프링클러에 흠뻑 젖은 잔디에 쓸린 발끝이 푸릇푸릇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강진하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바삐 옮겼다. 입속에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후텁지근한 더위에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차 앞에 멈춰 서자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온몸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자갈에 부딪힌 발이 얼얼했다.

강진하를 앞에 두고 정영호는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올라타기 전에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전무님 오늘 늦으실 겁니다. 여의도 회관에서 내년 대기업 정책으로 회동이 있는데 대외적으로라도 얼굴은 비쳐야 하는 모임이라… 그래 봤자 한두 시간 정도 들렀다가 바로 오실 겁니다.”

요컨대 10시 전에는 올 테니 미리 알고 대비하라는 신호였다. 시큰둥한 얼굴을 쳐다본 정영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었다. 풀썩,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뒷좌석을 돌아본 정영호는 강진하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빨리 차… 움직여요.”

손에 든 건 다름 아닌 정원용 가위였다.

조경 업체에서 두고 간 가위는 두껍고 날카로웠다. 가위를 한 손으로 움켜쥔 강진하가 겨눈 곳은 정영호가 아니라 제 목이었다. 시동으로 덜덜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침묵이 팽팽하게 서로 맞섰다. 한쪽은 목을 겨눈 채로, 다른 한쪽은 운전대를 붙든 채로.

달아날 계획을 세운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충동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 앞이었다. 조경용 가위를 집어 들고 차에 탔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빨리요!”

찢어지는 듯한 재촉에 정영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아무렇지 않게 안전벨트를 맸다. 세단은 미끄러지듯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비탈길을 내려가는 내내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 능숙하게 들어선 차는 직진했다. 내비게이션에서 이탈 신호와 함께 새로운 경로 탐색을 알렸다. 선릉 세한전자 본사, 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강진하는 혀를 씹을 뻔했다. 이대로 선릉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러려고 이런 쇼를 벌인 게 아니었다.

부르르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영호가 받기 전에 강진하가 먼저 핸드폰을 앞 좌석에서 낚아챘다. 수신인이 누군지 보지도 않고 그대로 끊어버린 그는 전원을 완전히 꺼버렸다. 달달 떨리는 턱에 힘을 꽉 준 강진하가 윽박질렀다.

“선릉 말고… 최대한 멀리. 중구 쪽으로 가요. 빨리!”

악다구니를 쓰느라 목이 갈라졌다. 날에 살짝 긁힌 목에서 실낱같은 피가 흘러내렸다. 정영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는 해괴한 협박이란 건 강진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힐끔 백미러를 쳐다본 정영호는 순순히 차선을 돌렸다. 가는 내내 마치 묵상이라도 하는 양 그는 묵묵했다.

창밖은 간판과 자동차 불, 신호등으로 색색이 어지러웠다. 강진하는 바깥 풍경과 돌부처 같은 남자의 등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초조해서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정말 서초동으로 가는 게 맞는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서울 중구는 강진하가 예전에 살던 동네였다. 10년 전에 살았던 그의 집은 이미 허물고 재단 같은 게 들어섰다고 했다. 불쑥 떠오른 곳이 거기뿐이었다.

문득 지하철역이 보였다. 강진하는 발작하듯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차 세워요!”

세단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강진하가 그대로 차 문을 강제로 열려 했다. 아슬아슬한 시도에 정영호가 갓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문을 활짝 연 강진하가 기침하듯 숨을 내쉬었다. 심호흡을 여러 차례 한 그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저 내리는 대로 유턴하지 말고 바로 직진하세요. 최소 오백 미터는 주행하고 나서… 핸드폰 켜시고요.”

차에서 내린 강진하는 품에 안고 있던 가위를 뒷좌석에 던지듯이 내려뒀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불쑥 올라왔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저 사람도 공조자에 불과하잖아. 방관했잖아.

정영호가 탄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는 듯이 단정히 서 있는 모습에 강진하는 뒷걸음질을 쳤다. 사정거리를 넘어선 몸은 어느새 뒤도 안 보고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왔지만 혹시 모르니 더 멀리 가야 했다. 반대편 출구로 나온 그는 표지판이 보이는 길만 계속 따라갔다. 찌는 듯한 더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버스 정류장을 네 개 정도 지나치자 탈진한 것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기적거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이어폰을 벗더니 그대로 자리를 피했다. 여자만이 아니었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강진하를 이상하다는 듯 힐끔거리고 있었다.

버스가 멈추고 지나갈 때마다 버스 문에 제 모습이 비쳤다. 품도 안 맞는 커다란 남색 파자마, 신발도 없이 몇 킬로미터를 걸었더니 잿빛으로 해진 붕대에 칭칭 감긴 맨발. 그사이에 발가락은 언제 베였는지 엄지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목에는 가위에 긁혀 흐른 핏자국, 팔다리에 점박이처럼 수두룩한 멍. 가히 볼만한 꼴이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거겠지. 평상시 강진하라도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터였다. 움직일라치면 경찰서에 신고도 했으리라.

차에서 급히 타느라 아무것도 갖고 오지 못했다. 어차피 벌인 일이라면 정영호한테 현금이라도 뜯어냈어야 했다. 강진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갑은커녕 주민등록증 한 장 없는 빈털터리였다. 가진 거라곤 멀쩡한지도 구분이 안 가는 몸이 전부였다. 은행에 가서 당장 통장 잔금을 꺼낼 수도 없었다. 좀 더 현명하게 판단해야 했다. 얼마나 등신, 천치, 머저리였으면 무턱대고 도망갈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버스가 몇십 대는 지나갔다. 그사이에 여름 저녁도 어슴푸레하게 어두워졌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정류장에는 취객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바로 옆 포차도 슬슬 운영을 시작하려는지 고추장과 멸치가 부르르 끓는 냄새가 풍겼다.

그 순간 놀랍게도 배가 요동쳤다. 여태 느끼지 못했던 허기였다. 군침을 꿀꺽 삼킨 강진하는 주춤거리며 포차를 멍하니 쳐다봤다. 포차 주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강진하를 지그시 쳐다봤다. 떡볶이, 튀김, 순대. 더부룩할 정도로 짙은 음식 냄새가 유혹하는 듯했다.

결국 강진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계속 있다간 배고픔에 눈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근린공원 입구였다. 공원 안에는 밤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말고는 한적했다. 쉬지 않고 걸은 탓에 두 발이 불에 덴 듯 뜨겁고 쓰라렸다. 강진하는 정강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힘주고 걸은 탓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오른쪽 발목은 퉁퉁 붓고 복숭아뼈부터 종아리까지 쥐가 난 듯 찌릿찌릿했다.

빌어먹을 망할 발목. 차라리 깔끔하게 부러졌다면 좋았을 텐데. 인대 파열이란 이유로 석고붕대 대신 반깁스만 했다. 여름이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지금의 강진하로선 나쁜 판단이었다. 눈앞에 있다면 돌팔이라고 욕하고 싶을 정도였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온몸에 아로새겨지는 듯했다. 아픔을 억누르려 강진하는 소리 내서 구시렁거렸다. 대부분 욕이었다. 씨발, 씨발, 빌어먹을, 개 같은, 망할 놈의.

성재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뇌리에 온통 성재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러는 것조차 치가 떨렸다. 모멸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람을 지리멸렬하게 만들어도 유분수가 있었다. 그래놓곤 성재현은 웃었다. 아픔에 비명 지르는 자신을 눕혀놓곤 온몸에 키스를 했다.

생각해보면 성재현은 키스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섹스는 했어도 그런 순진한 입맞춤은 드물었다. 순진하단 표현이 참 이상하지만, 그 순간 입맞춤하는 얼굴은 우습게도 순진한 아이 같았다. 내 거라고 강조라도 하듯 어른 앞에서 마구 키스하는 듯한 몸짓, 눈짓, 손짓.

다른 걸 생각하려 해도 도돌이표처럼 성재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증오할 것도 성재현, 화가 나는 것도 성재현, 당장 이 궁핍한 상황을 해결할 길도 성재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 입맞춤에 저주라도 걸린 모양이다.

해가 완전히 졌다. 막차마저 지나친 지하철역은 통로로 쓰는 출구를 빼면 전부 셔터를 내린 뒤였다. 강진하는 그나마 밝은 대로변 상점 앞에 우두커니 쪼그려 앉아있었다. 노래방에서 소리가 웅웅 울린다. 술에 너끈히 취한 사람들이 지하에서 올라와 제 갈 길 가기 바빴다. 택시, 콜택시. 대리운전. 차가 그렇게 수두룩하게 지나갔는데도 주변에는 그 익숙한 승용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벗어났는데, 벗어나도 벗어난 기분이 아니었다.

버려진 것만 같았다.

검은 세단이 근처에 우뚝 멈출 때마다 강진하는 멍청하게 차 번호를 살폈다. 번호가 아는 숫자일까 두려워하면서도 머릿속에 남은 숫자를 대조했다. 주인이 내다 버린 유기견처럼 자꾸 도로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이 너무 멍청하고 비정상 같았다. 삼성동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평생 살아가라고 한다면 차라리 목매달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다. 너무 서러워서 강진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사람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고도 미안하지도 않단 말인가. 서럽다고 느끼는 것조차 너무 억울했다. 찾아가서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구질구질한 기분을 느끼는 것조차 그 미친 새끼 때문이었다. 개 같은, 미친 성재현이 강진하를 망쳐놨다.

그런데 왜 성재현이 찾으러 왔으면 좋겠다는, 기가 막힌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지.

찾으러 올 거라면 진즉 찾아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럴 재력이 있고 그럴 인력이 있고 그럴 여유가 있는 놈이었다. 심지어 미아 방지 추적 칩도 팔뚝에 심어놓지 않았던가.

찾으러 오지 않을지도 몰라. 제 발로 도망갔으니까 내친김에 버린 셈 치겠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잖아. 아무렇지 않게 소모하다 버리면 그만이다. 성재현한테 자신은 그 이상도 되지 못할 터였다.

약혼한다고 했다.

자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했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던 얼굴이었다.

뺨을 손등으로 비빈 강진하는 눈을 감았다. 여름인데도 사무치게 추웠다.

**

되는 일이 없었다.

체크카드라도 재발급하고자 주민등록증을 신청하려 했다. 신청서까지 다 쓰고 나니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로 사진, 두 번째는 재발급 비용이었다. 당황한 강진하는 급기야 동사무소 직원에게 매달리듯이 빌었다. 지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 이전 주민등록증으로 발급은 안 되는지, 청구비용을 나중에 드리면 안 되는지. 물어보는 것마다 직원은 곤란한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행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말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단돈 5천 원이 없어서 신분증 하나 만들지 못했다. 주민센터를 털레털레 나오던 강진하는 전신 거울 앞에서 멀거니 자신을 쳐다봤다.

쪽잠을 자며 바깥을 떠돈 지 고작 닷새였다. 의류 수거함에 내다 버린 신발을 신은 게 그나마 나은 일이었다. 진통제와 소염제를 먹지 않아 발목은 이제 아픈 감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상태였다. 화장실에서 씻느라 대강 마른 머리는 부스스했고 얼굴은 하얗다 못해 유령처럼 창백했다. 주민등록증이 있더라도 쫓겨났을 듯한 행색이었다.

며칠간의 노숙 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지하철역에서 웅크리고 자다가 순찰을 돌던 순경에게 걸리는 바람에 그대로 쫓겨났다.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가 아파트 주민 신고로 도망쳐 나왔다.

죄다 남의 공간이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살아있는 유령이 된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공중전화 부스가 보일 때마다 강진하는 무턱대고 콜렉트 콜을 걸었다. 기억하는 전화번호는 거기서 거기였다. 처음에는 큰외삼촌에게 걸었다. 받지 않았다. 유료 수신 전화라서 받지 않는 건지 두 번째는 아예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큰외숙모에게 걸었다. 그녀 역시 받지 않았다. 한창 보이스 피싱 사기로 떠들썩한 무렵이니 낯선 번호에 민감한 반응인 것도 이해가 갔다.

남은 번호는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알고 싶어서 아는 번호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뇌에 절인 것처럼 밴 숫자였다.

성재현 전화번호.

삼성동 전화번호.

차마 그 전화만큼은 죽어도 걸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에게 전화를 건다면 손가락을 부러트려야 할 터였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테니까.

닷새가 지났지만 성재현은 찾아오지 않았다. 간간이 보이는 표지판으로 봐선 그래 봤자 서초구였다. 여전히 그의 영역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찾아내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거리였다.

오래 걷는 게 힘들었다. 강진하는 얼마 안 가 편의점 의자에 고양이처럼 웅크려 앉았다.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니 땀이 질질 흘렀다. 차라리 공원에 갈 걸 그랬다. 수돗가에 앉아있으면 탈수는 면할 텐데. 오피스텔과 모텔 사이에 있는 편의점이라 그런지 담배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아이스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씨발, 별 이런 걸로 바람을 다 맞추고.” 욕을 씹어 내뱉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강진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눈 한 번 잘못 마주쳤다가 취객한테 된통 얻어맞을 뻔한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너 몇 살?”

눈을 슬쩍 피하려는데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강진하는 마른 입술만 손가락으로 긁었다. 아예 의자를 당겨 앉은 남자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몇 살이냐니까.”

“스… 스물, 여….”

입을 연 강진하는 제가 말을 더듬는다는 걸 깨달았다. 말을 더듬는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 했다. 언제부터 그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방금 동사무소 직원한테도 그랬을까. 아니면 정영호한테 말할 때도? 성재현한테도 이런 식으로 말을 더듬었을까. 이상하게 들렸다. 머리가 나쁘고 둔해 보이는 어투였다.

“뭐야, 생각보다는 많네? 어려 보여서 학생인가 했더니.”

그는 입맛을 다시며 커피를 쪽 빨아들였다. 목이 말랐다.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커피를 흔들어 보였다. “줄까?”라는 말에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강진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손목을 잡았다.

“왜, 마시던 건 싫어? 새거 사줄까?”

“아, 아뇨, 돼, 됐어요.”

“말 더듬는 게 귀엽네. 좀 씻겨놓고 벗기면 볼만하겠다.”

팔목을 휘감은 손이 구렁이처럼 몸을 기어올랐다. 남자가 눈으로 말했다. 너 얼마야, 비싸게 굴지 마, 커피 한 잔 먹여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앞이 컴컴해졌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를 밀쳐내고 절뚝거리며 뛰었다. 하마터면 골목을 들어오던 차와 부딪칠 뻔한 몸이 골프공처럼 데굴데굴 굴렀다. 남자가 강진하를 붙들어 잡았다.

“뭘 도망치고 그래? 내가 뭘 했다고, 엉?”

“커피 돼, 됐다고 말했, 잖아요.”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비, 비싸게, 군 적 없어요.”

“여기 이 시간에 오피촌 어슬렁거리는 애들이면 뻔하지. 김 실장한테 일러바쳐 줄까? 너 뺀지 먹고 튀는 거 잡았다고?”

기가 막혔다. 남자는 지금 자신을 보도방 같은 성매매 출신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부스스 늘어지고, 옷도 잠옷이니 어디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악력이 너무 세서 그대로 질질 끌려갈 판이었다. 강진하는 넝쿨처럼 붙들어 매는 그의 팔을 깨물었다. 이에 닿는 느낌이 짜고 비렸다.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두고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골목, 골목, 좌회전, 우회전. 파출소가 보이자마자 뒤도 안 보고 그대로 들어왔다. 안에서 에어컨을 쐬던 순경이 강진하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강진하는 순경의 책상에 있던 박카스를 봤다. 말리기도 전에 병째로 집어 한 병 꿀꺽꿀꺽 마신 그는 정말 비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절도 신고… 자수할게요.”

취조라고 할 것도 없는 질문은 몇 분 만에 끝났다. 성함, 출생연도, 거주지를 간단하게 물어본 순경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들어오는 사람들한테 서비스로도 주는 박카스였다. 그거 하나 까먹었다고 절도라며 유치장에 보내 달라 매달리는 게 퍽 안타깝다는 태도였다.

“뭘 데리고 있어. 그냥 노숙자 쉼터로 보내.”

크게 하품한 소장이 말했다. 순경이 목을 벅벅 긁으며 소곤소곤 대답했다.

“근데 소장님 저 남자 노숙자 맞긴 할까요. 조회해보니까 거주지가 창원이던데. 뭐 안 좋은 일에 휘말렸거나 그런 걸 수도 있잖습니까.”

소장이 한숨을 쉬었다. 신고한 것도 아니고, 지가 절도 자수한다잖아. 대낮부터 술이라도 좀 먹었나 보지. 어린놈이 벌써부터 저러고 다니나. 내 자식이면 속 터진다.

구시렁거리는 목소리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강진하는 숨을 죽였다. 노숙자 쉼터. 그런 것도 있었구나. 돈 없이 살아는 봤어도 갈 곳 없이 살아본 적은 없어서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기를 들어가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입소 자격은 어떻게 되고? 만에 하나 제한 사유라도 있으면?

“실례합니다.”

달그랑,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순경이 인근 구청에 막 전화를 걸려던 차였다. 부채질하던 소장이 건성으로 용건을 물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중앙지검 남승혁 검사입니다. 김 소장님이십니까?”

“어, 어이구. 이거 검사님께서 경찰서도 아니고 파출소에 웬일이십니까?”

“여기서 중요 증인을 보호 중이라는 이야기 들었는데 맞습니까.”

“중요 증인…이요? 나흘 전에 서울 전체 메일 돌린 건 보긴 했는데 그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보호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직 없는데….”

“그러고 보니 소장님. 그 메일에 쓰인 이름이요. 저 남자분이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

순경이 속닥거리는 말에 소장이 가볍게 탄식했다. 일제히 시선이 쏠린 곳은 문 옆 대기석이었다. 남승혁은 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뚜벅뚜벅 문가로 다가갔다.

웅크린 강진하가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위를 쳐다봤다. 떼꾼한 눈이 잔뜩 겁에 질려 움츠러들어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남승혁이 눈치를 보느라 주저하는 소장에게 확인시키듯 말했다.

“예, 이 사람 맞습니다. 혹시 체포된 겁니까?”

“아유, 아닙니다. 그냥 무턱대고 들어와서 쉼터로 보내려던 차였는데… 가 아니라, 혹시 싶어서 안 그래도 내역 조회 중이었습니다.”

“그럼 인계 없이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고생하세요.”

말을 마친 남승혁이 강진하의 팔을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팔을 붙잡는 순간 몸에 전류가 튀는 듯해 강진하는 저항하듯 몸을 돌렸다. 남승혁이 다그치듯 말했다.

“그만 일어나.”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병원부터 가서 붕대 좀 다시 감자. 여름에 발 그렇게 하고 다니면 곪아.”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었잖아. 내가.”

남승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먼저 문밖으로 나섰다. 힘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던 강진하는 파출소 사람들의 눈길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를 따라나서야 했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고 순경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 예, 서초파출소 박인태 순경입니다. 성매매 신고요? 그건 관할 내 담당부서로 연락을 돌리… 네, 네. 아, 근처에 현행범이요. 목소리는 유리문에 닫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앞에 세워둔 차 문을 연 남승혁이 타라며 눈짓했다. 강진하는 보자마자 흠칫 뒷걸음질 쳤다. 비슷한 검은색 세단이었다. 이미 운전자가 누구인지 아는데도 괜히 망설여져 선뜻 올라탈 수 없었다.

“얼른 타.”

건너편에 순대국밥 전문점이란 글씨가 보였다. 멍하니 간판을 쳐다보던 강진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먹을 만한 음식을 입에 댄 지가 일주일이 가까웠다.

“나… 밥부터 사주면 안 되냐.”

국밥집은 점심시간도 저녁 시간도 아니라 한산했다. 파리를 쫓던 여자가 손님 둘을 보고는 반색하다 의아한 듯 눈썹을 꿈질거렸다. 한쪽은 훤칠하니 정장까지 입었고 다른 한쪽은 어디 병원에서 도망이라도 나온 듯한 행색이니 대조적이었다.

자리를 잡은 강진하가 여자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사장님, 여기 순댓국 두 개랑요.

“난 됐어. 너 먹으려면 먹어.”

“그럼 순댓국 특으로 하나랑 참이슬 한 병이요.”

밑반찬이 깔리자마자 강진하는 조급하게 젓가락을 집어 김치를 입에 넣었다. 물도 마셨다. 미약한 비린내가 나지 않는 정수 물이 설탕 탄 것처럼 달았다. 텔레비전에선 총선 관련 뉴스로 떠들썩했다. 여당은 누구누구를 공천으로 세웠고, 야당에서는 이를 더러 손가락질하는 개싸움 공방이 한창이었다. 남경욱의 얼굴도 순간 스쳤지만 두 남자는 텔레비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기소하자.”

뜨겁게 팔팔 끓는 순댓국을 한 술 크게 뜨던 강진하는 갑작스러운 남승혁의 권유에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남승혁이 다시 한번 강하게 악센트를 실었다.

“기소하자고.”

“누구를?”

“성재현.”

이름 석 자에 강진하는 방금까지 미친 듯이 돌던 식욕이 뚝 떨어졌다. 곤두박질쳐서 내핵에 목구멍을 처박는 듯했다. 여름이라 더위를 먹었나 보다, 하는 태도로 숟가락을 억지로 붙잡은 강진하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로 기소하고 싶은데.”

“그날 증거로 남겨뒀어.”

“무슨 증거?”

“앞부분 십 초 정도 빼고는 끊기 전까지 총 오 분 십오 초였어. 녹음했고 사본이랑 원본 둘 다 내가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뭘?”

“성재현이 너 강간하는 내용.”

그 말에 강진하는 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별장에서 성재현한테 붙들려 섹스 하고 신음하던 걸 녹음했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자 온몸에 전기가 튀어 올랐다. 찌르르 등줄기가 떨리고 다리 사이가 시큰거렸다. 침이 고이고 입속이 깔깔한 돌멩이로 찬 듯 버석거렸다.

눈앞에 버젓하게 앉아있는 남승혁은 자신에게는 동창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만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거기다 얹는 말이라는 게 안부도 아니고 ‘섹스 녹취’라는 것이 더더욱 기가 막혔다.

못 들은 척 강진하는 국물에 팅팅 불은 순대를 입에 쑤셔 넣었다. 입천장이 아플 정도로 뜨거운 순대를 꽉꽉 씹었다. 소주를 따닥, 까고는 잔에 붓지도 않고 병째로 마시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발령 어디로 났어? 서초? 너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했겠다.”

“진하야, 나 농담으로 하는 거 아니다.”

“지금 사주는 밥은 월급턱인가? 수육이라도 시킬 걸 그랬나.”

“말 돌리지 말고.”

“내가 지금… 말을 안 돌리면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그래, 기소하자. 남 검사님 덕분에 성재현 콩밥 먹이게 돼서 너무 다행이다! 잘됐네! 이런 반응?”

매몰찬 대답에 남승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주를 꼴깍꼴깍 마신 강진하가 키득키득 웃었다. 눈을 크게 뜬 그가 말했다.

“다 됐고, 지워. 없던 척해. 성희롱당한 기분이라면 미안하다.”

할 말은 그것뿐이라는 듯 강진하는 소주병을 대고 단숨에 마셨다. 취기가 오르진 않았지만 기분은 훨씬 붕 떴다. 팔짱을 낀 남승혁이 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가 막힌 숨을 내뱉듯이 말했다.

“나도 이게 불리한 싸움인 것도 알아. 추잡하게 돌아갈 것도 알아. 안 그래도 지금 세한, 특히 성재현 전무가 검찰 길들이기 중이야. 압박을 대놓고 하면 차라리 낫지. 자칫 눈 밖으로 튀면 바로 강원도나 제주 지검행. 혹은 일반부서 재발령, 지방 파견.”

남승혁이 하는 말이 수증기처럼 귓속에서 뭉크러졌다. 텔레비전 소음이 시끄러웠다. 경적이 쩡쩡 미친 들개처럼 울어댔다. 소주 한 병을 더 시킨 강진하는 몽롱한 얼굴로 주변 소리를 흘려 넘겼다.

“나한테도 세한 상대로 목줄을 잡아 쥘 건 있어야 하잖아.”

목줄. 그러니까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성재현을 억압해보겠다는 건가. 피식 웃은 강진하가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남승혁을 빤히 쳐다봤다.

“목줄로 쥘 만한 게 너무 허접하잖아. 설마 세한 전무님께서 그런 일로 눈이나 꿈쩍할 거 같아서 비장의 카드라고 내놓은 거야?”

“타격은 주겠지. 일신상에 흠집 하나 없던 전무 개인사에 추저분한 자국은 주는 거니까. 주주나 이사회 사이에서도 말이 오르내릴 거고.”

“그럼 나는? 나한테는 아무 타격이 없어?”

그러자 남승혁이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청산유수처럼 설득하려면 이럴 때 한 방을 먹여야 하는데, 남승혁은 이런 데서 물렀다.

“미안. 널 이용하는 것처럼 들렸겠네.”

“이용해서, 성공할 자신은 있었고?”

“가능하다면 그렇게 만들거야.”

아니,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약소한 자극으로는 세한을 쳐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남승혁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남경욱이 거머쥔 권력은 세한이 채워준 목줄 덕분이었다. 충직하게 움직인 그는 마침내 원하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니 배신할 이유가 있겠는가. 아버지인 남경욱을 곁에서 본 남승혁이라면 더더욱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지금 남승혁이 불리한 상황이란 뜻일 터였다. 강진하는 남승혁에 대해 다는 아니더라도, 반은 알았다. 그의 아버지처럼 대단한 야망 대신 정직하고 반듯한 사고를 가졌다. 재벌가에서는 안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어쩌면 ‘검찰 길들이기’의 대상이 남승혁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몰랐다. 검사장 출신에 공천 확보. 머지않아 법무부 장관 감투마저 쓰게 될 그 남경욱의, 외아들이었다. 그 연쇄의 고리에서 발버둥이라도 쳐보겠다는 심정이겠지. 너나 나나 피차일반이겠구나. 허탈하게 웃음을 흘린 강진하가 손사래를 쳤다.

“너 지금 하는 말, 하나같이 패기인 거 너도 잘 알지? 응?”

“…알아. 그래도 권유는 해보고 싶었어. 네가 마음만 먹으면 도와줄 수 있다고.”

“그럼 기소를 전제하에 내가 한 가지 가르쳐줄까?”

입가에 한 손을 동그랗게 말아쥔 강진하가 속닥거렸다.

“그날 성재현이랑 한 섹스. 이십억짜리거든.”

20억이란 단어를 입에 담으면서도 실소가 자꾸 흘러나왔다.

“한두 번도 아니야. 통장 내역 뒤지면 바로 나올 텐데, 이런 걸 세한 법무팀에서는 뭐라고 할까. 금품 수수에 의한 사기? 명예훼손? 사람들은 뭐라고 하려나. 남자 꽃뱀?”

남승혁은 대답이 없었다. 할 말이 있으려 해도 나오지 않을 만했다. 알아차렸든 몰랐든 목줄을 쥐고 흔들어보려는 대상과 친구가 돈과 섹스를 교환했다는 말이 고깝게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좆같게도 사실이었다. 강진하가 저질렀던 인생의 실수 중 최악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돈이 급해서 저지른 짓이라지만 추악한 판단이었다.

그 때문에 이 꼴이 된 셈이기도 했다.

불어 터진 순대를 억지로 먹어 치운 강진하는 소주를 추가했다. 세 병째였다. 소주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데 오늘따라 술술 잘 들어갔다.

“그딴 권유 집어치우고… 대답 좀 해봐. 너 나 어떻게 찾아왔어? 텔레파시라도 쓰냐?”

“이름, 실종자 명단에 올렸어. 해당하는 사람 발견되는 대로 연락 들어오게끔 했고.”

“정말로 고작 그 정도로 날 찾아냈다고?”

침묵에 뒤섞이듯 기상 캐스터가 전하는 태풍 소식이 대화 사이에 스며들었다. 강진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남승혁이 둘러대듯 “그래.”라고 대답했다. 어딘가 미적지근한 태도에 강진하가 세수하듯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그렇게 쉬웠다고? 근데 왜, 왜….”

그 새끼는 여태 잠자코 있을까.

팔이 흐느적거렸다. 소주 세 병 만에 세상이 빙그르르 돌 것만 같았다. 거꾸로 돌아서 아무 일도 없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10년 전, 하다못해 3개월 전, 삼성동으로 돌아가기 전날로.

성재현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칠 것만 같았다. 망할 개자식. 눈앞에 있다면 멍이 들 정도로 때려주고 싶었다. 사람 인생을 이렇게 짓밟아놓고, 친구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게 했다.

개새끼, 좆같은 빌어먹을 새끼.

나타나서 얼굴 보고 말이라도 해봐. 개소리 잘하잖아. 씨발놈, 미친 새끼. 맨날 그렇게 귀신같이 불쑥 나타날 때는 언제고.

빈 병을 쾅, 식탁에 내리친 강진하가 벌떡 일어났다. 취했다. 더 취하고 싶은데 여기서 더 취하면 진짜로 돌 거 같았다. 정신이 휙 돌아버린 나머지 온갖 미친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어질어질한 몸에 억지로 힘을 주고 뻣뻣하게 걸었다.

계산하느라 잠시 문가에 멈춰 선 남승혁을 등 뒤에 둔 채로 강진하는 보도블록 깨진 자리만 골라 밟았다. 잰걸음으로 쫓아온 남승혁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던 강진하를 붙들었다.

“병원부터 가. 붕대 좀 갈고, 입원실 비어있으면 입원도 하자. 아니면 큰아버지한테 연락해볼게.”

“발목에 붕대만 갈면 돼. 입원은 됐고 진통제 처방만 받으면 될 거야.”

“둘 다 해.”

“뭐? 입원할 정도는 아니야. 나 그냥 몇만 원만 좀 빌려주면….”

“허튼소리 하지 말고 입원해.”

눈을 치켜뜬 남승혁이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맹렬히 쏘아붙였다. 어깨를 붙드는 악력에 강진하는 얼어붙은 것처럼 그를 마주했다. 제가 알던 남승혁과 다른 분위기였다. 남승혁은 성품이나 태도가 점잖고 부드러웠다. 화를 내더라도 이런 식으로 몸을 붙들지 않았다. 지금의 남승혁은 이질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시킨 걸 충실히 이행하는 기계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킨 강진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입원 안 하면, 누구 하나 죽기라도 해?”

“아니.”

“그럼? 왜 이렇게 강요하는 건데. 너 지금… 나 체포하는 것처럼 밀어붙이잖아. 내가 병원 안 가면 무슨 사달 날 사람같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누가 나 좀 병원에 붙잡아두래?”

실수였다며 손을 떼어내길 바랐다. 걱정돼서 그런 거다, 간단한 말이면 충분했다. 괜찮다고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고 밥 한 끼 잘 얻어먹었다고만 할 생각이었다.

콧숨을 길게 내쉰 남승혁이 탄식하듯 말을 꺼냈다.

“너 여기 있는 거, 성재현도 다 알아.”

심장에 바위가 쿵 떨어지는 듯했다. 숨을 누군가가 앗아가기라도 하듯 목구멍이 졸아붙었다.

남승혁은 굳은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네 이름으로 신고든 뭐든 들어오는 즉시, 세한 비서실에 바로 연락 달라는 하달이 있었어. 서울 강남 관할서 총경 몇 명한테도 전달된 내용이야. 구역까지 지정해서.”

“그래서?”

“서초파출소에서 들어온 보고도 진즉 세한으로 넘어갔을 거야. 몇 시 경에 서로 들어왔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등.”

그 말에 강진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성재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차로 몇 바퀴만 돌아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을 배회했다. 멀리 갈 만한 여력도 여건도 되지 않은 탓이었다.

성재현에게서 달아나던 그날, 정영호가 제 알량한 협박에 순순했던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삼성동 바깥으로 나와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걸 아니까? 아무리 애써봐도 손바닥 안이니 헛고생일 뿐이라는 걸 몸소 체험시켜 줄 셈이었던 건가.

비단 오늘 일만 알고 있진 않을 터였다. 서울 전 지역 경찰서도 아니고 일부러 강남 관할서에만 전달했단 것만 봐도 뻔했다.

근처에 있는 걸 버젓이 알면서도 일부러 지켜본 것이 틀림없었다.

가만히 있을 린 없다고 예상했지만, 기가 막혔다. 저택 안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먼 곳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사지를 압박하고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쉰 강진하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나… 병원에 데, 데려가려는 것도, 성재현이 시켰어?”

“이건 내 독단이야. 성재현 전무랑 관계없어.”

“독단? 독단이라면 다른 건 아, 아니란 거야? 나 찾아온 건? 정말 시, 실종 신고 들어온 걸로 안 거 맞아?”

딸꾹질처럼 자꾸 말이 끊겼다. 머리가 고장 난 것도 아닌데 입이 의지대로 열리지 않았다. 강진하는 혀를 일부러 깨물어가며 쥐어짜 내듯이 물었다. 몇 마디 쏘아붙였는데도 숨이 찼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남승혁이 입을 열었다.

“걱정돼서… 그냥 걱정됐어. 어디 있는지만 전해 듣고, 내가 보러 가겠다고 했어. 그뿐이야.”

“…아예 접점이, 없는 건 아니구나.”

힘없이 중얼거린 강진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의아하긴 했다. 몇 달간 연락 한 번 안 됐던 남승혁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지나치게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이런 꼴이 된 걸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몰랐다면 보자마자 물었을 것이다. 어디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 파출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그의 얼굴은 사뭇 비장했다. 마치 다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놓고 이곳으로 가보라고 지시받은 건 아닐 것이다. 애당초 남승혁 성격에 성재현을 제 발로 만나러 갔을 리는 없었다. 몇몇 지검 관계자한테 하달을 보냈다고 하니, 그쪽을 통해 전달받았겠지. 실종 신고했던 강진하가 서초파출소에 있다는 보고가 관할서 통해 들어왔다더라.

친구니까 쉽게 의지할 거라고 여긴 걸까. 그렇다면 정말 영리하고 악랄한 계산이었다. 파출소로 들어온 남승혁을 보는 순간 안도부터 들었으니까. 졸리고 배고프고 힘들었다. 조금만 더 지쳤더라면 입원하자는 강권에도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몰랐다.

그조차도 성재현이 연출한 시나리오였을까. 어쩌면 성재현은 강진하가 단념하길 기다린 걸지도 모르겠다.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어느 순간이 되면 금세 포기하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제 발로 삼성동으로 돌아오리라 믿은 걸까.

더는 의지할 곳이 자신밖에 없을 거라고 믿어서?

분통이 차오른 나머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새살이 돋은 부분이 다시 쓰라렸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실컷 짓뭉개고서 내친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검경까지 동원해가면서 포위하고 있었다. 술김을 빌어 키득키득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고작 달아난 장난감 하나 잡겠다고 들인 시간과 인력치곤 너무 지나친 낭비였다.

피가 맺힌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른 강진하가 몸을 돌렸다.

“병원은 갈게. 그 대신 입원은 안 해. 거기서 놓친 걸로 하자. 혹시라도 물어보면 수속 밟던 중에 사라졌다고 해. 그러면 될 거야.”

“진하야.”

“입원하면, 성재현이 나 쉽게 찾아올 명목까지 만들어주는 거야. 나는 그 꼴은 못 봐.”

이를 바득 갈았다. 그간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병문안이랍시고 들어오겠지. 너그러운 미소까지 지으면서 꽃다발이라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속삭이겠지.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면서 왜 도망쳤냐고. 싸늘한 눈이 매도하듯 비웃을 터였다.

강진하는 제 발로 그가 친 덫에 들어가진 않을 생각이었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리라.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를 안달 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만 분통이 조금은 누그러질 것 같았다.

그러니 삼성동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강진하가 간절하게 말했다.

“나 돈 좀 빌려줘.”

**

라면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찬장에는 소금, 설탕뿐이었다.

별수 없이 골목 앞 슈퍼까지 나가 소주 두 병과 컵라면을 샀다. 슈퍼 주인은 오지랖이 넓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슈퍼에 들러 현금으로만 계산하는 강진하에게 이런저런 관심이 많았다. 없는 형편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낸 제 아들이 생각난다던가. 학생은 주말에 데이트도 안 해? 술만 마시지 말고 나가서 연애도 해. 그러다 속만 탈 나.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강진하는 대답 대신 씩 웃으며 검은 비닐 봉투만 받아 들었다.

꽤 묵직한 무게에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 소주 외에도 귤 몇 알이 함께 들어있었다. 슈퍼 주인이 저 몰래 챙겨준 과일이었다. 또 이러시네. 저번 추석 때도 남는 거라면서 전이며 떡을 싸주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애먹었는데. 그래도 예상하지 못한 호의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강진하는 그중 가장 반지르르한 귤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적당히 시고 달았다.

휑한 골목을 쓸어내린 싸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으… 춥다.”

저녁부터 한파라더니 해가 지자마자 살 떨리게 추웠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질 정도였다. 총총걸음으로 언덕길을 오른 강진하는 [명성빌딩]이라 쓰인 고시원 건물로 들어섰다.

방문이 쭉 늘어선 복도는 새카맣고 조용했다. 말만 고시원이지 고시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외국인 근로자였다. 주말이라 그런가. 옆방에서 툭하면 쨍알쨍알 들리던 중국말도 오늘은 씻은 듯이 조용했다. 딱히 옆방 사람이 뭘 하든 말든 신경 쓰진 않지만 조용하니 편안한 건 사실이었다.

얇은 점퍼를 벗은 그는 공용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사람이 많으면 더운물이 잘 안 나오니 한산할 때 씻는 게 편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적기였다. 덕분에 뜨거운 물로 만족스럽게 샤워를 마치니 추위가 한결 가셨다. 방으로 들어서자 백색 소음용으로 틀어둔 텔레비전에서는 개그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그것 말곤 볼 게 없었다. 뉴스는 일부러 안 본 지 좀 되었고 드라마는 흥미가 가질 않았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걸친 채 강진하는 컵라면을 깨작거리며 소주를 마셨다. 먹는 것보다도 마시는 횟수가 더 많았다. 금세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이때가 딱 좋았다. 취기로 머리 아프지도 않고, 적당히 알딸딸했다. 좀만 더 마시면 잠도 편하게 올 텐데, 아쉽게도 몇 시간 뒤면 출근이었다. 퉁퉁 불어 터진 컵라면을 치운 강진하는 작은 침대에 구겨지듯 누웠다.

문에 걸어둔 달력은 어느덧 12월이었다. 오늘이 금요일이던가. 여름쯤 이곳에 들어왔으니 벌써 4개월 정도 지난 셈이었다.

그러니까 4개월 전 여름, 그날 강진하는 남승혁과 작은 외과 병원으로 향했다. 상황이 급하다는 말과 남승혁이 비보험처리에 웃돈을 얹어 부른 덕분에 수술 날짜를 잡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간신히 팔에 주입된 칩을 제거할 수 있었다. 말로 들을 때만 하더라도 긴가민가하던 의사는 팔에서 나온 작은 마이크로칩을 보고 경악했다. 중범죄에 연루된 건 아닌지, 그게 아니면 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강진하는 모른 척 감사 인사만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그런 다음 남승혁에게 딱 50만 원을 빌렸다. 싸구려 모텔에서 3박 정도를 묵으면서 민증이며 통장과 체크카드까지 싹 재발급을 받았다. 통장에는 받기로 했던 돈이 마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은행권 대출 이자로 아직 다달이 나가는 금액이 남아 있다 보니, 여윳돈은 끽해야 몇백이었다.

그걸로 고시원을 몇 개월 치 계약부터 했다. 며칠은 피시방과 역 근처를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봤다. 몸만 성했더라면 택배나 공사장 노가다라도 뛰었을 텐데, 직업소개소 소장은 강진하가 오른 다리를 살짝 끈다는 걸 눈치챘다. 인대는요, 장기 치료로 봐야 해요. 다 나은 거 같아도 안 그래요. 젊을 때 잘 관리해요. 더 다치지만 말고요. 붕대를 풀어주던 의사가 말한 대로였다. 천천히 걸어야 티가 안 났다. 빠릿빠릿한 걸 좋아하는 곳에서는 반기지 않는 걸음이었다.

일반 사무직은 이상하게도 서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학점이 부족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나마 면접이라도 보러 가면 대개 외근 영업직이거나 다단계였다. 말을 너무 떠시네요. 원래 그러시나요. 그런 지적이 나오면 성대가 얼어붙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사람이 많은 곳에 서거나 당황하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천천히 두세 번은 발음을 가다듬어야 겨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이러니 면접을 보더라도 붙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별 수 있는가. 어떻게든 악착같이 먹고살 길을 찾았다. 단기 장기 안 가리고 구하던 끝에 간신히 평일 야간 편의점 하나, 술집 주말 주방 보조 자리를 구했다. 사무직 회사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당장은 찬밥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핸드폰은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비상연락처로 적어 둔 고시원 번호를 확인한 편의점 사장은 요즘 애들 같지 않다며 의아해했다. 핸드폰을 만들어본들 연락할 곳도 없으니 만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없어도 살 만했다. 아니, 없어서 더 편한 걸지도 몰랐다.

천장에 난 얼룩을 바라보며 강진하는 남승혁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곱씹었다.

‘공항이든 항구든 해외로 나가려는 즉시 구속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되도록 공항 쪽은 가지 마.’

요컨대 외국으로 나를 방법은 당장 없단 소리였다. 그런 식으로 궁지로 몰면 굴에서 기어 나오리라고 믿는 거겠지. 어차피 외국으로 튈 돈도 없었다. 보란 듯이 금천구에 서식지를 틀었다. 5만 원을 더 주고 창문 있는 방으로 배정받았다. 전에 살던 집은 창문도 시원치 않았는데 그에 비하면 탁 트인 창문이 딸린 3층 고시원 방은 그런대로 살 만했다.

자기 전에 술 마시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예전에 어머니가 그렇게 술을 찾는 게 참 보기 싫었는데 이제는 제가 그러고 있었다. 술을 마셔야만 편히 잠이 왔다. 안 그러면 꿈에 성재현이 선득하게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소주를 달고 살았다. 5만 원짜리 사치스러운 창문에 기대 바깥을 내다보는 버릇도 생겼다. 밖에 익숙한 세단은 없는지, 못 보던 사람이 있진 않은지. 그 못 보던 사람 중에 제게 익숙한 사람이 없는지.

매일같이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를, 성재현을 생각했다.

성재현은 강진하를 처참하게 망가트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증오했다. 견딜 수 없어서 달아났다. 그런데도 가끔은 불현듯 성재현 생각이 났다. 우스웠다. 어떻게 그 새끼를 떠올릴 수가 있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제어가 안 됐다. 다리 한쪽이 망가지더니, 말하는 것도 망가지고, 결국에는 머리도 어딘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망가진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강진하는 가끔씩, 혹은 곧잘 걷잡을 수 없이 회상에 빠졌다. 악몽처럼 자꾸 생각이 났다. 가끔은 그게 끔찍한 기억이기도 했고, 가끔은 헤아릴 수 없는 그의 표정이 반복되었다.

제게 애원하라고 했으면서 그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마치 저에게 애원하는 듯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성재현은 저에게 애원할 리 없는 사람이었다. 부탁은 강진하가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종종 뇌리를 휘감고 내려치는 그 시선은 제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시넝쿨처럼 휘감겨서 애달프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도 혼자면 외로워.’

‘가지 마.’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듯한 목소리, 손길, 눈짓.

여전히 검은 세단을 보면 걸음부터 주춤거렸다. 내리는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고서야 발걸음이 떨어졌다. 뒷모습만 비슷해도 선득해져 머릿속이 쿵쿵 울리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4개월이나 지났다. 성재현은 여전히 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안도가 되어야 하는데도 가끔은 오래된 방에 혼자 갇힌 것처럼 불안해지곤 했다. 불안해서 잠이 안 왔다. 잠이 안 와서 소주를 입에 쏟아야만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악독한 굴레였다. 습관처럼 성재현이 순간마다 배었다. 곰팡이처럼 피어서 온몸을 감염시켰다. 머릿속에서 끝내 털어내려면 지금보다도 더 오래 걸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반년보다도 한참 더, 어쩌면 십수 년은 더 걸릴지도 몰랐다.

**

이태원 클럽에서 하는 일은 시급이 높은 것에 비해 간단했다. 들어오는 잔과 접시를 설거지하고, 과일이나 치즈 안주가 들어오면 그에 맞춰 준비해 서빙 보내는 일의 연속이었다. 서빙이 아니니 손님을 직접 대면할 일도 없었다. 부엌으로 들어와 설거지나 하는 주방 보조 얼굴을 굳이 보겠다고 하지 않는 한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과일 안주만 연달아 몇 접시였다. 손을 씻고 사과, 멜론을 부지런히 깎았다. 정해진 모양이 있었다. 토끼 모양부터 시작해 휘황찬란하게 깎아다 그럴듯하게 만든 과일 안주 한 접시가 5만 원이 넘었다. 그야말로 날로 먹는 장사였다.

“와, 진하 형은 과일 진짜 엄청 예쁘게 깎는다. 요리 배워서 들어온 거예요?”

제대를 막 마치고 들어왔다는 주방 보조 아르바이트생 김태섭은 붙임성이 좋았다. 클럽에만 들어오면 말 한마디도 않고 일만 하는 강진하한테도 굳이 살갑게 한마디라도 붙이려 애썼다. 대놓고 말을 거는데도 강진하는 말없이 반듯하게 깎은 사과를 연한 설탕물에 담갔다.

옆에서 과일 부스러기를 쏠랑 주워 먹던 부주방장이 태섭에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태섭아, 괜히 말 걸지 마. 저 새끼 벙어리야. 벙어리. 여기 들어오고서 대답하는 꼴을 못 봤어.”

“예? 아니에요. 저번에 보니까 희진 누나가 묻는 말에 대답하시던데요?”

“야, 그거 계좌 같은 거 물어봐서 대답한 거야. 이번에 크리스마스 보너스 들어오잖아. 저 새낀 지 필요한 거만 대답해. 실장이 얼굴 보고 뽑았다는데 드릅게 재수 없을 줄 누가 알았겠냐.”

“형, 다 들어요.”

“씨발, 들으라 그래. 어차피 한마디도 안 하잖아. 병신 새끼.”

대놓고 앞담을 한 부주방장을 붙잡고 태섭이 쉿, 쉿, 말렸다. 강진하는 태연하게 할 일만 했다. 어차피 벙어리라는 사실도 진짜가 아니니 반박할 필요도 없었고, 저런 사람과 말 섞어봤자 피곤할게 뻔했다. 긴장하면 약간 말을 더듬는 증상이 생긴 뒤로 강진하는 일하는 중에 쓸데없는 잡담은 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새벽 근무를 마치면 주거니 받거니 회식처럼 술을 마시는데도 단 한 번도 낀 적 없었다. 부주방장은 그런 태도가 영 아니꼬운 듯했다. 다른 직원들처럼 살살 형, 형, 소리 붙여가며 애교스럽길 바랐는데 그게 아니니 재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수 없든지 말든지 딱히 상관없었다. 어차피 저 남자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클레임이 들어온 적은 없었고 클럽 소유주나 실장한테도 이렇다 싶은 지적 한 번 듣지 못했다.

주방 보조라서 편한 게 이런 점이었다. 서빙이었으면 분명 손님 상대로 입이 마르도록 대답을 하고 다녀야 했을 터였다. 가뜩이나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데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무슨 시비를 당할지 몰랐다. 그뿐인가, 술 들고 걷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실수로 엎기라도 했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주방에서도 걸어 다닐 일은 많았지만 설거지 잘하고 과일 잘 깎으니 재깍재깍 주급이 나왔다. 급하게 돈 모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안주 열 접시가 금세 준비되었다. 손에 밴 단내를 깨끗하게 헹군 강진하에게 실장이 다가와 휴식 시간을 알렸다.

모자와 앞치마를 벗은 강진하는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양말을 걷었다. 서 있는 시간이 길었더니 발목부터 발꿈치까지 퉁퉁 부어있었다. 다음 주에 병원 가면 잔소리 실컷 듣게 생겼다. 제때 물리치료 좀 받으라는 둥, 스테로이드 주사에 너무 의존하면 회복도 힘들다는 둥. 상비하고 다니는 파스를 발목에 붙이고 양말을 두툼하게 신었다. 스태프 룸에 들어온 김태섭이 걱정스럽게 말을 붙였다.

“형, 기분 나빴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부주방장님 원래 좀 저러시잖아요.”

“네. 괜찮아요.”

이번에도 뚱한 단답이었다. 머쓱해진 김태섭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강진하를 훔쳐봤다. 그러다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 친구에게 의미 없는 문자만 두다다다 썼다. 몇 주 전 강진하가 새로 들어오면서 막내를 벗어나게 된 김태섭은 막내 탈출에 대한 희열보다 일종의 쇼크를 느꼈다. 그냥 예쁘장하다는 느낌이랑은 달랐다. 섹시하다는 말로는 약간 아쉽고, 자극적인 느낌까지 드는 묘한 외모였다. 어딘가 축축하고 음기가 가득 흐르는, 음울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주방장이 유독 강진하를 갈구고 싫어하지만 사실 술자리에선 걸핏하면 신입 누구를 두고 음담패설을 일삼는다는 걸 주방 직원들 대부분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신입이 다름 아닌 강진하라는 것도 눈치가 있다면 바로 알아차릴 만큼 쉬웠다. 못 먹는 감 찔러 보지도 못하니 괜히 신경만 득득 긁어대는 격이었다. 그럴수록 더 착하고 순하게 굴어야 하는 법인데. 태섭은 혀를 츳츳 차며 부주방장을 속으로 욕했다. 자신은 강진하랑 단 일주일 만에 말도 트고, 사는 곳도 대강 틀 정도로 친해졌는데 말이다. 물론 그 이상은 한 번도 이야기를 들어보진 못했다. 조용한 성격만큼 입도 무거워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실장 말로는 뭔가 사연이 있다는 듯했는데.

“아, 저 야식 사 올 건데 형 드실래요? 아, 아니다. 형도 같이 먹어요. 저쪽 길에 야채곱창 트럭 왔는데 진짜 개맛있거든요.”

강진하가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김태섭은 퍼뜩 문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경쾌하게 오르는 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챙겨주니 고맙기야 하지만. 유흥업소라는 장소에 대한 편견이 무색하게 직원들은 대부분 성격이 좋았다. 박 실장만 하더라도 융통성이 넓다 못해 가끔 뇌가 빠진 사람 같았다. 큰돈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판이라 그런 건지.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였다. 클럽 마감 시간은 오전 6시. 퇴근하려면 아직도 4시간이나 더 있어야 했다. 어깨를 주무르며 강진하는 하품이 나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김태섭은 야식 사러 간다고 나간 뒤로 아직이었고, 다른 직원들은 담배라도 피우러 나갔는지 탈의실 안이 조용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슬쩍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카운터 담당인 서희진 부실장이었다. 그녀는 강진하를 보고는 반색하며 손짓했다.

“저기, 진하 씨 미안한데 바빠?”

“아뇨. 쉬는 시간입니다.”

“지금 위층에 VIP 한 팀이 좀 심하게 취했거든. 대리 부르긴 했는데 부축할 인원이 좀 돼. 서빙 애들은 어디서 똥 싸다 뒤졌는지 코빼기도 안 보여서….”

“며, 몇 명이요?”

“어, 그러니까 세 명인데, 지금 기사 온 건 한 명이라 그분만 좀 거들어주면 돼. 쉬는 거 아는데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실장한테 쿠사리 먹을까 봐 좀 그래.”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에 강진하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취한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 그걸 여자인 서희진 혼자 다 감당하긴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VIP라지 않는가. 이런 예약제 유흥업소에서 VIP라 하면 최소한 강남에 건물 몇 채는 아무렇지 않게 소유한 부자들뿐이었다. 내버려뒀다가 괜한 일이라도 생기면 불똥이 튈지도 몰랐다.

지하에 지어진 클럽에서 더 아래층은 일명 ‘VIP 전용’이었다. 들어갈 일은 없지만 가끔 계단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담배라고 할 수 없는 쓴 냄새가 지독할 정도로 났다. 그게 대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출근한 지 2주째 되던 날이었다.

아래층에 내려가자 음습한 적막이 맴돌았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침침한 복도에 강진하는 구역질을 느꼈다. 어둡고 좁은 곳만 들어가면 초조해진다.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서서 나가고 싶었다. 그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돈을 생각했다. 사채는 지웠어도 아직 은행 대출은 남았다. 부축 한 번 도와주면 수고했다며 팁이라며 10만 원씩 쥐여 준다고 들었다. 입막음 겸해서 주는 돈이겠지만, 어쨌든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들어가 보니 젖은 이불들처럼 손님들이 널려있었다. 거하게도 마셨다. 약도 했는지 다들 반쯤 넋 나가 있었다. 희진이 능숙하게 그들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직함이 하나같이 번듯했다. 이사님 일어나세요. 대표님 일어나세요. 사장님 일어나세요. 번듯하고 중후한 직함과 달리 끽해야 20대 중후반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남자들이 덜 마른 수건처럼 흐느적거렸다. 희진이 재차 상냥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김 대표님, 대리 불렀어요. 아, 그리고 위에 기사분 와계신다는데,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그 말에 늘어져 있던 수건 하나가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야, 야, 권재림 일어나.”

권재림이란 이름에 흠칫 몸을 떨었다. 동명이인인가. 저절로 고개가 이름이 불린 쪽으로 돌아갔다. 툭툭 치는 손길에 소파에 웅크리고 자던 남자가 부스스 일어났다.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권재림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뼈가 우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야.”

“뭐긴, 니네 엄마한테 전화 존나 많이 왔어. 빨리 꺼지세요.”

“아, 씨발….”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권재림이 휘청거렸다. 테이블이 흔들거리며 위에 있던 접시 몇 개가 소파로 쏟아졌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권재림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으, 씨발. 이거 후유증 왜 이렇게 쎄냐. 뒷맛 존나게 구려. 차라리 대마에 감기약 빠는 게 더 맛있겠다.”

“그게 구리다고? 너 자제 좀 해야겠는데. 진짜 그러다 골로 가겠어.”

“너나, 골로 가기 전에 조용히 해라.”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권재림이 휘적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밀어야 하는 문인데도 한참 당기다가 간신히 문을 연 그가 짜증 섞인 욕을 내뱉었다. 희진이 강진하에게 권재림 쪽을 눈짓했다. 빨리 부축하라는 신호였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은 물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이제 와서 서희진 보는 앞에서 내뺄 수도 없었다. 강진하는 죄인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붙어 섰다. 눈이 풀렸다. 생선 눈깔이란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비켜….”

옆에 강진하가 붙어서자 권재림이 신경질을 내며 손을 휘저었다. 불도저처럼 자꾸 혼자 앞서나가는데 엉뚱한 방향이었다. 보다못해 억지로 붙드니 대놓고 팔을 내치기까지 했다.

“아, 뭐야. 냅둬. 귀찮게.”

만취해서 누군지도 못 알아보는 듯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작게 한숨을 쉰 강진하는 권재림을 단단히 붙잡아 출구로 몸을 돌렸다.

술에, 약까지 한 탓에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무거워서 팔이 자꾸 미끄러졌다. 체격 차이가 나는 데다 자꾸 중심이 쏠리니 몸을 잡고 걷는 것도 일이었다. 서희진한테 팁 두 배로 달라고 해야겠다. 권재림을 귀가시키는 게 제일 힘드니까 일부러 쉬던 강진하를 불러온 게 틀림없었다.

잔잔한 척 무드 잡던 음악마저 점점 멀어졌다. 클럽 입구로 등반을 마치자 멀리서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거렸다. 운전석에서 남자가 벌떡 튀어나왔다. 수행 기사인 듯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그를 보니 안타까웠다. 언제 연락 올지 모르는 철없는 도련님 상대로 몇 시간을 대기하느라 조마조마했을 터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중년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아, 아니요. 조, 좀 취하신 거 같은데… 그, 가는 길에 물, 계속 드시게 하세요.”

“예, 예. 알다마다요.”

눈치 보며 굽신거리는 기사에게 강진하는 권재림을 넘겼다. 할 일은 완수했다. 내려가서 다리 쭉 뻗고 죽은 듯이 쉬고 싶었다. 다음부터는 지하에 내려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뒤도 안 보고 돌아서려는 그때였다.

“어디, 가.”

옷자락을 꽉 붙든 권재림이 씨근덕 더운 숨을 내쉬었다. 두 손이 슬그머니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끌어안았다.

“어디… 가냐고.”

젖먹이 강아지가 끙끙대는 것처럼 권재림이 훌쩍거렸다. 등에 뺨을 문지르고 비비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디 가. 그 말만 몇 번이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한마디만 입력된 녹음기 같았다.

설마 알아본 걸까. 하지만 아까 전까지도 내색조차 안 했는데, 갑자기 얼굴을 알아봤단 말인가. 혹시 목소리 때문인가. 강진하는 허리를 감싼 두 손을 내려다봤다. 뼈대부터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은 완강하게 제 몸을 붙들고 있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좀 많이 취하시면 옆 사람 붙잡고 그러시거든요.”

“예….”

그러니까 술버릇이란 소리였다. 술 먹고 뭣도 모른 채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있는 셈이리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얼굴을 알아보긴커녕 기억도 못 할 성싶었다. 당황한 기사가 서둘러 권재림을 붙잡아 당겼다. 도련님, 이사님께서 화 많이 나셨어요. 얼른 들어가셔야 해요. 안 가, 씨발, 안 간다고. 혀 꼬인 발음으로 온갖 투정을 부리면서도 도무지 손을 풀진 않았다.

결국 강진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마침내 손깍지가 벗겨졌다. 질질 늘어지는 그를 뒷좌석에 눕힌 기사가 땀을 훔치며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별것 아니지만 이거라도….”

“저, 괘, 괜찮습니다. 저, 저나 기사님이나 못 본 일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 그래야 서로 편하니까요.”

“아, 예. 그럼요.”

기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지갑을 다시 품에 넣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가 서둘러 두 손으로 핸드폰을 받았다. 예, 예. 이사님. 도련님 픽업했습니다. 곧 들어갑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예.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강진하는 서둘러 주차장을 벗어났다. 긴장해서 또 말을 더듬었다. 그나마 대화가 길어지지 않아 망정이었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아프게 때린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클럽 라운지로 들어섰다.

“어머,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위에서 뭔 일 있었어요?”

카운터에 먼저 돌아와 있던 서희진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강진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스기에서 5만 원짜리 네 장을 꺼낸 희진이 손에 쥐여 주며 재차 물었다.

“석영 막내랑 무슨 일 있었어요? 금방 내려올 줄 알았는데.”

“별건 아니고요. 조, 좀 많이 취하셔서, 사람 붙잡으시더라고요. 기사님 말론 술버릇이라고 하시던데.”

“그래요? 다른 애들 보낼 땐 딱히 그런 적 없었는데, 진짜 엄청 취했나 보네. 하하.”

턱을 괸 희진이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지 않았다, 는 말이 미묘하게 걸렸다. 단순히 술김에 그런 게 아니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손에 쥔 돈뭉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진하가 달력으로 눈을 힐끗 돌렸다.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일주일. 2주 후면 새해였다. 일한 지 딱 3개월이었다.

“부실장님. 저…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뭐? 갑자기? 왜?”

“사실 저 오른 발목이 좀 안 좋아요. 인대가 찢어졌거든요. 그래서 오래 서 있으면 안 되는데 이거 말하면 안 뽑힐 거 같아서… 수, 숨겼어요. 죄송합니다.”

“아니, 진하 다리 아팠어? 어떡해. 진즉 말해주지. 그럼 주방 말고 좀 앉아 있는 데로 보낼 텐데. 윤 실장이 진하 씨 되게 예뻐한단 말이야. 말수 없고 은근히 싹싹하고 뒷매너 아는 게, 이런 쪽은 눈치 빠르고 익숙한 거 같다고 엄청 칭찬하고 그랬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 건 예의 없다는 거 압니다. 그, 근데 주사 맞아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데 이러다가 괜히 사고라도 낼까 봐 걱정돼서요.”

“으응, 일단 윤 실장한텐 말해둘게. 근데 다시 생각해봐. 정 안 되면 다른 쪽으로 업무 돌려줄게. 쉬는 시간도 쪼개서 가. 너무 바쁠 때 아니면 버틸 만할 거야. 응? 크리스마스 때는 빼줄게. 좀 쉬어.”

“네, 생각해볼게요. 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진의 회유를 가볍게 흘려 넘긴 강진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일개 아르바이트생을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권재림이 여기 드나드는 걸 안 이상 계속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얼굴이라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곤란했다. 비단 권재림만이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석영은 세한과도 혼맥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즉, 권재림과 만나게 되면 성재현한테도 그 소식이 들어간단 뜻이었다.

찾아오는 걸 막진 못해도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걸어가고 싶진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으로 인해 엮이고 뜯기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러니 선을 그어야만 했다. 원천 차단만이 지금으로선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

크리스마스를 앞둔 편의점은 온갖 시즌 상품으로 알록달록했다. 예약용 크리스마스 케이크부터 중가 와인, 종류별 콘돔 등등. 본사에서 지침이 내려왔다지만 대책 없을 정도로 발주량이 많았다. 숫자를 잘못 체크한 거 같다며 한숨을 쉰 점장이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도 벌어졌으면 좋겠다. 다 팔렸으면 좋겠다.

점장의 바람은 놀랍게도 이뤄졌다. 크리스마스이브 내내 강진하는 눈코 뜰 새도 없이 손님을 맞아야 했다. 도시락 먹다가도 손님이 불쑥 들어와선 똑같은 걸 물어봤다. 와인 있어요? 케이크 예약해야 해요? 이날만을 기대하기라도 한 듯 들어오는 손님마다 콘돔과 와인, 무알콜 샴페인 등등을 사 갔다. 그리하여 예약 제품 말고도 들어온 케이크도 거의 다 팔렸다는 보고에 점장은 전화선으로도 느껴질 만큼 들떠있었다. 철 지나면 팔리지도 않을 상품이니 안 팔리는 만큼 손해 볼 게 아득했을 터였다.

“네, 그럼 내일 아침에 뵐게요.”

-오냐, 메리 크리스마스.

전화를 끊은 강진하는 널브러진 박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데웠던 도시락은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폐기라서 어차피 버려야 했으니 아쉽지도 않았다.

눈에 젖은 신발 자국으로 바닥이 지저분했다. 물걸레를 가져와 벅벅 문질러 닦은 강진하는 저도 모르게 크리스마스 캐럴을 따라 흥얼거렸다. 크리스마스를 즐긴 게 벌써 6년은 된 것 같았다. 대학교 때 마니또 선물 교환으로 장갑을 받았던 게 마지막이던가. 그 뒤로는 아르바이트하고 이자 내고, 아버지 뒤치다꺼리하느라 달력마다 있는 휴일을 모두 바쳤다. 크리스마스라고 해봤자 돈 좀 더 받는 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릴 때는 특별한 날이라 더 좋아했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삼성동에 가면 제 이름으로 된 선물도 있었다. 누가 준비했는지는 몰라도 항상 갖고 싶은 것들이었다. 스키장도 갔었다. 가면 항상 그곳에서 도련님을 마주쳤다. 나중에서야 그가 따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철없을 때는 그런 게 다 이유 없이 주어지는 호의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닌 제가 쉬이 누릴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엮이고 엮인 어떤 불행에 대한 대가였다.

그걸 알았더라면 받지 않았을 텐데.

느지막한 점심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캄캄한 저녁이 지나도록 그칠 기미가 없었다. 새하얗게 흩어지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술집 골목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거렸다.

납품용 박스를 내려둔 다음 강진하는 삽으로 눈을 밀어냈다. 문 앞에 누군가가 서서 담배라도 진득하게 피웠는지 구두 자국이 단정하게도 남아있었다. 별생각 없이 그 자리를 운동화 발로 쓱쓱 문질렀다. 몸을 돌리던 강진하는 문득 멀리 떨어진 가로등 아래에 눈을 뒀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근처에 회사도 있고 공영주차장과 쇼핑몰도 나란히 있었다. 널리고 널린 게 검은 차였다. 그런데도 강진하는 그 흔하디흔한 검은색 승용차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보닛 위에 눈이 얇게 덮인 세단은 마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포식자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차를 노려보던 강진하는 안으로 돌아갔다. 점장이 엊그제 제설용으로 가져다 둔 굵은 소금이 창고 안에 있었다. 봉투째로 들고나온 강진하는 문 앞에 한 움큼 크게 흩뿌렸다.

한두 시간마다 삽으로 눈을 쓸고 치워서 편의점 앞은 깨끗했다. 딱히 제설 작업을 더 할 필요는 없는데도 강진하는 소금을 한 움큼씩 쥐고 미친 듯이 사방에 뿌렸다. 제설보다는 잡귀를 쫓아내는 듯한 의식 같았다. 차가 있는 방향을 향해 꺼지라며 온몸으로 고함을 지르는 듯한 태도였다.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진하는 그제야 차 번호판을 확인했다. 알고 있는 번호와 달랐다.

봉투를 쥐고 멍하니 찬 바람을 맞았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 바람만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우는 소리를 냈다. 한숨을 쉰 그는 점내로 돌아와 기계적으로 진열대를 정리했다. 그러다 다시 골목을 바라보니 이미 차는 자리를 떠난 뒤였다.

거봐, 착각이 맞잖아. 강진하는 속으로 스스로를 타박했다. 예민해진 탓이다. 얼마 전 클럽에서 권재림을 만나는 바람에 불안해졌다. 그래서 솥뚜껑 보고 괜히 날을 세우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개새끼 때문에 애꿎은 소금까지 낭비했다. 소금만이 아니라 제 시간마저 낭비되었다. 갉아 먹혔다.

관두자. 강진하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홱 몸을 돌렸다. 안 팔리는 물건에 쌓인 먼지나 쓸었다. 편의점에 있기엔 어정쩡한 가격대의 지포 라이터와 손톱깎이 세트, 와인 오프너. 창고는 어두운 걸 불편해하는 강진하 때문에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CCTV가 보이는 모니터를 지나친 그는 비어있는 음료수 칸을 차곡차곡 채웠다. 수입 맥주, 소주, 주스.

달그랑, 문에 달린 종이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틈 사이를 들여다봤다. 음료수 사이로 인영이 보였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길쭉한 다리 아래로 단정한 디자인의 구두가 얼핏 보였다. 점내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그는 물건을 골랐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팝송 캐럴 사이에 엇박자로 울렸다.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은 강진하는 계산대로 돌아가려 했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몸을 돌렸다.

빙긋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주머니를 뒤적거린 강진하는 가위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손님은 아무렇지 않게 진열대에서 물건을 집었다. 계산대 앞으로 걸어간 그가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강진하는 가위를 움켜쥐고 고양이 걸음으로 걸었다. 가까이 가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비상 경고가 삐삐 울렸다. 삐삐 울린 건 비단 머릿속 경고음만이 아니었다. 문에 달린 종도 울렸다. 공교롭게도 손님 두 명이 더 들어왔다.

여자와 남자가 도란도란 웃으며 삼각김밥과 컵라면, 속옷 등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에 서 있는 훤칠한 회색 코트를 보고는 남자가 뒤로 슬그머니 섰다.

“먼저 하세요.”

그는 온화한 얼굴로 그들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그를 보고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연이어 들어왔다. 철이라도 맞은 듯했다. 밀물처럼 들어온 손님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캐럴이 고요히 울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관람하는 것처럼 천천히 안을 둘러보던 손님이 비로소 텅 빈 계산대 앞에 섰다. 단란하게 단둘뿐이었다.

그가 집어온 물건을 차분하게 내려뒀다. 지포 라이터, 손톱깎이 세트, 와인 오프너, 그리고 와인. 조금 전에 강진하가 손으로 만진 것들이었다.

“안녕.”

손님이 웃으며 골라온 것들을 가리켰다.

“계산해줄래요.”

그의 여유로움에 속이 화끈거렸다. 신경이 올올이 뒤틀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견디며 강진하는 성의 없이 바코드를 찍었다. 10만 2천 원. 금액을 입으로 다시 알리는 대신 강진하는 봉투를 꺼내 물건을 담아 그의 눈앞으로 밀어냈다.

손님은 물건을 받아 드는 대신 강진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선이 사지를 붙잡고 헐벗기는 듯했다. 날카롭고 진득했다. 강진하는 떨리는 팔에 힘을 주고 덤덤한 척 말을 내뱉었다.

“아, 안녕히 가세요.”

“나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안녕히, 가, 가세요.”

“그래도 사 개월 만에 보는 거잖아요. 우리.”

“안녕히, 가… 가세요. 제발.”

도돌이표였다. 정해진 대답은 하나만 하겠다는 듯이 강진하는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혀가 굳어 말이 자꾸 떠듬떠듬 끊어지는 게 꼴사나워서 목에 힘을 주고 쏘아붙이듯 인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러자 손님이 웃었다. 날 선 인사말에 주눅 하나 들지 않은,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미소였다. 아랫입술을 습관처럼 깨문 강진하는 옆으로 비켜났다. 심호흡을 했다. 다가오기라도 하면 보안업체로 다이렉트 연결되는 버튼을 누를 생각이었다.

“잘 지냈어요?”

“…….”

“별로 잘 못 지냈을 거 같지만 예의상 물어보는 거예요. 이야기 하면 들어주려고.”

그가 말했다. 강진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무시했다. CCTV가 보이는 자리만 빙글빙글 배회했다. 이미 정돈된 진열대를 괜히 다시 부산하게 정리했다.

“사 개월 정도는 별것 아닐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더군요.”

무시하자.

“나 화 안 났어요.”

무시하자.

“그러니까 더 질질 끌지 말고 돌아와요.”

무시하자.

“강진하.”

“부, 부르지 마세요.”

“나 파혼했어.”

그 말에 강진하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파혼했다니. 약혼한다던 걸 엎었다는 말인가. 그룹 간의 혼맥은 상당히 중요했다. 약속을 전제로 하는 만큼 오가는 거래도 서로를 위한 이득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강진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성재현은 반듯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혼했어. 그거 수습하느라 한동안 애먹었어요.”

“…그래서요.”

“신문에만 이 주일 내리 실렸다던데. 인터넷 검색어까지 오르고.”

“그, 래서요.”

“나 흠집 났어.”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이를 악문 강진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그거 책임이라도 지라고 찾아왔어요? 약혼 못 해서 그거 때문에 문제 생겼으니까 내 탓 하려고? 그러려고 찾아왔어?”

앙다문 어금니가 까드득, 갈렸다. 파들파들 떨리는 몸이 진열대에 전이되었다. 경계선처럼 가로놓인 벽이 흔들렸다. 성재현은 그 너머에서 진득하게 강진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카맣게 가라앉았던 눈동자에 기묘한 활기가 섞여 있었다.

“진하 씨가 나한테 낸 흠집인데, 기쁘지 않아요?”

“기쁘냐고? 내. 내가 왜 기뻐야 하는데? 고작 그거 하나 좀 망쳤다고?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낸 흠집이야?”

“진하야.”

“나는, 난 너 때문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흐, 흠집? 나는 내 인생 전체가 흠집 났어. 남은 것도 없어. 하나도. 단 하나도!”

“진하야.”

“발목마저 난도질해놓고 이젠 뭐할 건데? 죽여서 박제라도 할 거야?”

“진하야.”

“부르지 말라고. 내 이름!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진하야.”

성재현은 듣지 않았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그는 강진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진하야, 진하야. 강진하는 그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시지도 않은 독한 술을 입에 쏟아부은 것처럼 메스꺼웠다. 몸을 돌린 강진하는 창고로 달아났다. 머릿속으로 굴리던 생각마저도 흐려졌다. 피하고 싶었다. 닿는 눈길, 섞이는 목소리, 체온. 넉 달 동안 방치하듯이 외면하듯이 내버려 두더니 갑자기 찾아와 이름을 불러대는 저 미친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오지 마. 개새끼야.”

주머니에 든 가위를 힘껏 쥐고 그에게 겨눴다. 다가오면 그대로 찌를 생각이었다. 잃을 것도 없었다. 그를 죽이면 살인죄로 감옥이나 가겠지. 감옥에 가든, 그의 감시 아닌 감시하에 배회하며 살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러니 제 발로 자신의 공간에 끼어들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찌를 터였다.

성재현은 눈앞에 놓인 가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붙이는 날카로웠다. 휘두른다면 얼마든지 상처 낼 수 있는 흉기였다. 그런데도 성재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 보였다. 한껏 행복해 보였다.

강진하가 무신경하지 않아서.

강진하가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어서.

“그걸로 나 찌를 거예요?”

“바로 뒤에 벨 있어. 나, 나한테, 손 하나라도 대면 보안업체 부를 거야.”

“나, 죽이고 싶어요?”

죽이고 싶냐는 살벌한 물음에 강진하는 딸꾹질을 삼켰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린 성재현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움직임에 강진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가위를 쥔 손이 떨렸다. 오지 마. 나 가위 들고 있는 거 안 보여? 미쳤어? 나 정말 휘두를 거야. 두 눈으로 형형하게 그를 다그쳤다. 말렸다. 쏟아부었다.

그 절박한 눈빛에도 성재현은 기어코 간격을 좁히고 좁혔다. 한 걸음, 반걸음.

“오지 말라고!”

참다못한 강진하가 가위를 휘둘렀다. 움직임은 얄팍했다. 휘둘렀다고 할 수도 없었다. 성재현은 오른손으로 가위를 꽉 움켜잡았다. 가윗날이 손바닥을 짓누르며 살점이 패는 게 손끝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손에 잡힌 가위를 내려다보던 강진하는 힘없이 손잡이를 놓았다. 가위가 철퍽, 바닥으로 추락했다. 은색 날 사이에 핏방울이 들러붙어 있었다. 성재현은 가만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얼굴이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 칼날에 찢겨나간 살갗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피가 흘러내려 소매를 적셨다. 고통과 통증이 선명했다.

“아.”

작게 탄식한 그가 손을 들어 강진하에게 보였다.

“피 났어요.”

손을 다쳤다고 알리는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들떠 보였다. 벌벌 떠는 강진하를 마주한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속삭임이 강진하의 귀 끝에 닿았다.

“나 아파요.”

“이, 이거 놔요.”

“진짜 아픈데.”

엄습하는 온기에 강진하는 헛발질을 하듯 뒤로 물러났다. 겁만 주려고 했는데 정말로 그를 찌를 줄은 몰랐다. 찌른 게 아니다. 저 남자가 손을 댄 거야.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허둥지둥 구석진 자리까지 달아나던 강진하가 미끄러졌다. 넘어지려는 몸을 성재현이 답삭 끌어안았다. 쿵, 시멘트 바닥에 두 몸이 엉켜 떨어졌다. 강진하는 악다구니를 썼다. 팔이 엇나가며 성재현의 어깨와 얼굴을 쳤다. 성재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늘에 달라붙는 그림자처럼 강진하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진하야.”

“그만, 그…만 좀 불러요.”

“나 다쳤잖아.”

“저리 가.”

“집에 돌아와서 나 위로해줘야지. 도와줘야지. 나 망가졌어. 흠집 났어.”

“그만, 해. 제발.”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아무것도 못 하는데.”

등을 대고 눕힌 몸 위로 올라탄 성재현을 두 팔로 밀어내며 강진하가 흐느끼듯이 말했다. 피로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는 성재현의 얼굴은 미아 같았다.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애가 타는 얼굴이었다.

“안 아픈 곳이 없어. 머리도, 손도.”

강진하의 손을 움켜쥔 성재현이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툭툭 두드리는 자리에 박동이 울렸다. 세찼다. 뜨거웠다.

“여기도.”

아파서 미칠 거 같은데.

귀를 씹는 것처럼 속삭이는 목소리. 절박한 문장에 강진하는 황망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침묵. 음산하게 깔린 눈동자가 시야를 집어삼킬 듯이 마주 보고 있었다.

일순간 입매가 비틀렸다.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폭삭, 먼지 같은 빛무리가 눈가를 적셨다.

강진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위를 점거했으니 볼 수 있는 시야가 한정적인 탓도 있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강진하는 지금의 성재현을 주시해야만 했다.

“무, 무, 슨 말을 하시는 겁, 니까. 지금….”

“말했잖아요. 아프다고. 다 아프다고. 그러니까, 위로해줘야지.”

술이라도 마셨냐고 물으려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처량하게 휘어진 눈썹, 샐쭉하니 우울하게 내리깐 눈, 삐죽한 입매. 얼핏 보면 측은했고 가련하게도 애달파하고 있었다. 동정, 연민을 기대하는 것처럼 온순한 태도는 애원이었다.

낯설었다. 생경하고 이질적이었다.

웃는 얼굴은 부드럽고 애가 타고 달콤했다. 이런 표정, 이런 태도, 이런 말투. 위압감 한 조각 없는데도 강진하는 오싹함을 견딜 수 없었다.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숨만 들이쉬고, 내뱉길 반복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화를 내야 하는 건 강진하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화를 낼 수 없었다. 분노, 경악, 당황. 감정이 죄다 가로막힌 듯했다. 입과 턱, 목구멍까지 바짝 힘이 들어갔다. 감정마저 그의 손길, 눈짓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응? 이제 집에 갈 마음이 들었어요?”

목과 어깨에 기대듯이 달라붙은 성재현이 뺨을 살살 비비며 속삭였다. 커다란 고양이가 털을 비비는 듯한 몸짓이었다. 간지러움에 턱을 들고 호흡을 내뱉은 강진하가 몸을 약하게 틀었다. 하필이면 그의 단정한 귀가 턱 바로 옆에 있었다. 침 삼키는 소리도, 숨도, 맥동 하나도 남기지 않고 들릴 간격이었다. 에워싸듯 올라탄 몸은 그 모든 감각을 죄다 집어삼킬 듯했다.

강진하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살짝 위로 끌었다. 지뢰를 건드리지 않고 걸으려 살금살금 발끝을 든 것처럼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드러난 목덜미에 그가 쪼듯이 입 맞췄다. 쪽, 소리가 났다. 솜털이 곤두설 만큼 섬뜩한 감촉에 강진하는 신음을 삼키며 눈을 피했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뭐 해요?”

“우, 우선… 일어나서.”

“일어나서? 그다음은?”

호선을 그리던 눈이 번뜩였다. 아, 하고 나른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도망가려고?”

일시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몸을 단단하게 세운 성재현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코트를 입은 몸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듯이 움직였다. 피에 흥건하게 젖은 손이 강진하의 뺨을 툭 건드렸다. 슬슬 내려온 손끝이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긴장감으로 혀가 굳었다.

목소리가 어둠에 먹혔다.

“살살 구슬리면 얌전히 따라올 줄 알았는데.”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고개를 까딱 흔들며 속삭였다.

“안 통하는 모양이네.”

눈동자가 낯선 색으로 반들거렸다. 허물을 벗은 뱀을 보는 것처럼 느리면서도 섬뜩한 태세였다. 그를 덮은 빛이 흘러내려 그늘이 되었다. 그늘이 강진하를 눌렀다. 붙잡힌 팔목에 힘이 들어갔다.

“모처럼… 내가 찾아왔는데 피할 생각만 하고.”

“흐읍, 윽, 놔, 앗!”

“서운하게.”

종아리를 붙잡아 당긴 성재현이 드러난 발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감전이라도 오른 듯 펄떡이는 통증에 경박한 비명이 튀어나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프다. 아파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는 절박한 투정조차 거짓말이었다.

손을 뻗었다. 박스 옆에 튀어나온 맥주병이 잡혔다. 강진하는 그대로 눈앞을 향해 병을 날렸다. 빗나간 병은 벽에 부딪혀 와장창! 소리만 요란한 파편이 되었다.

“아깝네요. 한 대 맞아줄 걸 그랬나.”

깨진 병 사이로 흘러내린 거품을 보며 성재현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를 악문 강진하가 쏘아붙였다.

“그럼, 마. 맞아주지 그러셨어요.”

“그럴까요? 그러면 재판이며 면회 때마다 무조건 나랑 봐야 하니까, 편하겠네.”

그러자 강진하가 분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누그러진 모습에 성재현이 피식 웃었다.

“나 고소하라고 기회도 줬잖아.”

“고소, 하라고…?”

“내심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안 와서 솔직히 서운했어요. 법정에서 재회하는 게 좀 더 재밌었을 텐데.”

고소라는 단어에 강진하는 넉 달 전 남승혁이 꺼낸 제안을 다시금 떠올렸다. 녹취를 갖고 있으니 한 번 찔러보자던 그의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 세한 상대로 엮이기 싫다는 대단하고도 사소한 이유였다. 그조차도 사실 의도했던 거란 말인가. 어디까지 덫을 쳐놨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삼성동을 나가봤자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애써 망각하던 사실을 다시금 인지한 강진하는 그를 두 손으로 힘껏 밀어냈다. 엎치락뒤치락 엉망으로 뒤엉켰다. 문으로 빠르게 기어가려던 강진하를 성재현은 놓치지 않고 붙잡아 챘다. 놓으라는 발악 섞인 고함은 들리지도 않는지 그는 심드렁하게 아래로 강진하를 끌어 내렸다.

난동으로 발에서 헐떡거리던 싸구려 운동화가 기어코 벗겨졌다. 끈에서 탈주한 인형 다리를 잡아 들 듯 성재현이 종아리를 들어 올렸다. 양말을 여러 겹으로 덧신은 발목은 앙상했다. 성재현은 검지부터 약지, 세 손가락을 양말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아, 앗.”

“상처가 핑크색이 됐네.”

“아, 아으.”

발꿈치 위쪽 언저리를 따라 손가락이 빙그르르 어루더듬었다. 인대가 찢어지며 났던 상처는 옅은 빛깔의 흉터 자국으로 남았다. 그새 발목이 부어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통증이 스멀스멀 발끝부터 뿌리를 틔었다. 약하게 미간을 찌푸린 강진하를 내려다보던 성재현이 말했다.

“안 아프게 해줄까요?”

야릇한 웃음이 입꼬리를 스쳤다. 그는 흉터를 집요하게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더는 하지 말란 뜻으로 손을 뻗자 성재현이 발목 뒤에 입을 맞췄다.

“흐, 아윽.”

기습적인 접촉에 강진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몸을 바르작 떨었다. 무슨 짓이냐고 날카롭게 언성이 나오려던 입은 차마 말을 담지 못했다. 종아리를 한 손으로 단단히 붙든 성재현은 강진하를 똑바로 마주 본 채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서슴없이 핥아 내렸다.

“흡, 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강진하가 다리를 떨어댔다. 미쳤어. 미친 짓이다. 지금 뭘 하는 건지 똑똑히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성재현이 보란 듯이 제 발목을 핥고 있었다. 안 아프게 만든다느니 그딴 개소리는 둘째 치고,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모멸감 이전에 수치심부터 들었다. 그만하라는 몸부림을 냉랭하게 무시한 그는 흉터가 난 발목 뒤쪽부터 종아리까지 집요하게 빨기 시작했다.

“아, 으, 그만! 그, 만, 아으, 응.”

쭙, 즈읍, 쩝, 즙. 뜨끈하고 습한 혀가 앙상한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남김없이 빨고 핥았다. 단정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게걸스럽고 적나라한 애무였다.

머리 위로 캐럴이 울렸다. 점장이 틀어놓은 캐럴 모음집은 흥겨운 노래보다 고즈넉한 찬송가가 더 많았다. 성스럽고 고아한 노래 사이로 끈덕진 숨소리가 부정하게 섞였다. 난잡하고 지저분했다.

“흐윽…!”

이를 세운 성재현이 흉터를 약하게 깨무는 순간 전율이 머릿골까지 튀었다. 강진하는 아프다는 말을 세뇌처럼 머릿속에 계속 떠올렸다. 이건 아픈 거야. 아픈 게 틀림없다. 등허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들썩거렸다.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은 강진하는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늘어진 목각인형처럼 반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따끈한 디저트를 즐기는 것처럼 부드럽게 훑던 입술이 발목에 세게 잇자국을 냈다. 소리 내, 신음 해. 그렇게 명령을 입력하는 것처럼 고집스러운 애무였다. 그때마다 강진하는 온몸을 비틀며 뭉개지는 신음을 겨우 삼켰다.

“하아.”

고개를 든 성재현이 길게 숨을 쉬었다. 상기된 얼굴은 전보다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까칠하게 부르튼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포만하고 느긋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손이 여유롭게 강진하의 앞치마를 젖히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봉곳하게 솟은 아래를 쓰다듬은 그가 씩 웃었다.

“다친 곳 좀 핥아줬을 뿐인데 여긴 왜 세웠어.”

“으응, 으, 흐읏.”

“아니야? 이러고도 아니에요?”

“아, 아으, 흑.”

“여기 밑구멍에 박아줬으면 좋겠어? 응?”

사타구니를 쿡쿡 누르는 직접적인 자극에 강진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만 흔들었다. 부정할수록 성재현은 더욱 거세게 손을 움직였다. 굳이 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맹목적인 태도였다.

쾅쾅! 창고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진짜, 뭐 하는데 안 나오는 거야.”

신경질이 잔뜩 난 여자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손님이었다. 문을 닫아둔 건 아니니 안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민망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제삼자가 끼어드는 게 싫었다. 몸을 덮듯이 누른 성재현의 소매를 붙잡은 강진하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계산해야 돼요.”

강진하가 문 쪽을 눈짓하며 재차 말했다. “소, 손님 왔잖아요.” 성재현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관련 없는 일반인 앞에서까지 추잡한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미련하진 않았다.

머지않아 그는 약간의 틈을 줬다.

계산대로 나오자 손님이 바구니를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클레임을 걸고 싶은 것처럼 험악한 눈이었다. 강진하는 차라리 그녀가 클레임을 길게 걸어주길 바랐다. 트집을 길게 걸어도 얼마든지 죄송하다며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 정도는 대수였다. 그러나 막상 캐셔로 나온 강진하를 확인한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저기요. 옷에, 다 뭐예요. 피… 아니에요?”

“아.”

고개를 숙여 옷을 살피자 녹색 유니폼 조끼며 받쳐입은 티셔츠에도 핏물이 배어있었다. 자신의 피는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하는 대신 강진하는 고개를 숙이고 바코드만 찍었다.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지만, 건너편에 서 있는 성재현의 시선이 따가웠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도 겨우 꺼냈다. 여자는 귀신이라도 본 듯 달아났다.

다시 둘만 남았다. 난파에서 기어 올라왔는데 다시 난파당한 기분이었다. 주저앉고 싶은 몸에 억지로 힘을 주고 똑바로 선 강진하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무심하게 편의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갔어요. 손님.”

적막을 견디지 못한 강진하가 말했다. 성재현도 이미 눈으로 본 사실이었다.

신경전처럼 계산대를 두고 서로를 마주 봤다. 의외로 성재현은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섬세한 탐색이라도 펼치는 듯이 팔짱을 끼고 강진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진하도 굳이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울 코트에 피가 군데군데 묻었다. 저거 피 묻으면 세탁하는 것도 일인데. 쓸데없는 걱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털어내듯이 접었다. 강진하는 계산대 아래 수납 칸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워낙 덜렁대는 성격인 데다 엄살도 심한 점장 때문에 파스부터 몸살약까지 없는 게 없었다.

“손 좀 보여주세요.”

“왜.”

“피. 아직 나요. 손에서.”

부탁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지쳐서 갈라진 목소리는 그에게 충분히 무례하게 들릴 법했다. 성재현은 구급상자에서 약을 찾느라 어질러진 카운터를 보더니 의외로 순순히 손을 보였다.

물티슈로 피를 닦아내자 너절하게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작지 않은 상처였다. 아프다고 소리도 안 낸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강진하는 상처에 거즈를 댄 다음 붕대를 감았다. 붕대를 감아주면서도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창고에서 온갖 악다구니는 다 써놓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치료해주는 꼴이 가관이었다. 코미디도 이런 막장 코미디가 없으리라.

“으, 응급실 가세요. 가위가 녹슨 건 아니지만 파상풍 주사도 맞으시면 좋겠네요.”

어차피 이 정도 말은 덧붙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할 걸 안다. 그런데도 강진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었다. 살면서 배운 거라곤 이런 식으로 남 뒤치다꺼리하는 짓뿐이었다.

성재현은 말없이 손바닥만 바라봤다. 붕대 감긴 손은 아까보다는 멀쩡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붕대가 무슨 요란한 치장이라도 된 것처럼 하염없이 손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봤다. 매듭을 잘못 맨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지 무서웠다.

“부, 불편하세요?”

또 말을 걸었다. 강진하는 제 주둥이를 치는 대신 아랫입술을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일부러 천천히 발음을 다듬는데도 말이 떨렸다. 말 더듬는 꼴 보여서 어쩌자고 이러는 건지. 무심하게 노려보는 강진하를 바라보던 그가 작게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솜씨 좋네요.”

“그래도 응급실 가시는 게 좋습니다. 그, 그거 가지곤 안 돼요.”

“걱정해주는 거예요?”

“폭행으로 고소하시기 전에 참작 받으려고요. 우발적 폭행이면 징역이라도 덜 살 테니까.”

그 말에 성재현이 또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 재밌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농담으로 한 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강진하는 진심이었다. 고소 운운은 애초에 성재현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지 않던가.

“바깥에서 지내는 게 재밌어요?”

“저, 노숙 안 합니다.”

“그 낡은 건물에서 자는 거나, 길에서 자는 거나 비슷한 수준이겠던데.”

“전무님 눈에는 길거리 같아도 저한텐 집이에요. 주, 주소지 이전은 안 했지만.”

“그래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그럴 생각 없어요. 안, 안 갈 겁니다.”

강진하는 태연하게 따박따박 받아쳤다.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렵지 않기도 했다. 구태여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질질 끌고 가려나. 뛰어봤자 손바닥이라면 그 손바닥을 물어뜯을 셈이었다. 잃을 것 하나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아쉽지도 않았다.

“죽여서 데려가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안 가요.”

엄포를 놓은 강진하는 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대놓고 못을 박았다. 안 가겠다고 했으니 이제 때리든지, 끌고 나가든지. 그도 아니면 창고로 데려가서 입에다 좆을 처박든지. 간단하게 세 가지 경우 정도를 떠올렸다. 그중 하나 정도는 제 예측이 맞으리라고 의심치 않았다.

“그럼 제정신 못 차리게 만들면, 된단 거네.”

“…이미 반 정도는 미친 거 같습니다. 그걸로도 모, 자라세요?”

“반은 안 됐잖아. 그럼 소용없는 거지.”

“제발! 좀! 씨발,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울컥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올라 소리를 냅다 질렀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이명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더 끈질기고 악독하게 괴롭혀야만 하겠냐는, 발악이었다.

정신 나가기 전에는 안 간다고? 틀린 말이었다. 강진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삼성동에 갇혀 지내는 내내 정신은 사라졌다. 문드러져서 이미 곰팡이가 다닥다닥 몸에 피어난 꼴이었다. 설령 제정신이 아니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꾸 저를 끌고 가려고 했다. 존중 하나 없는 이기적인 태도였다. 저에게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입을 다물고 평생 살라 한다면 평생 살 텐데, 뭐가 모자란단 말인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은 목에 힘을 줬다.

“대체, 나 왜 찾아왔어. 왜, 찾아왔냐고. 뭘 어떻게 더 해주길 바라는데. 뭘 더 바라냐고!”

골이 얼얼했다. 숨이 턱 막혀서 기침을 했다. 이만하면 화를 낼 법한데도 성재현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놀라지도 않은 얼굴은 무척 태평해 보였다.

붕대를 감은 손바닥이 계산대를 짚었다.

기울어진 몸이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강진하를 내려다봤다. 마냥 빙긋 웃고 있을 줄 알았던 얼굴은 담담했다.

한참 만에 그가 말했다.

“눈 내린 날이면, 정원에 눈사람이 항상 두 개씩 놓여있었는데.”

“…….”

“하나도 없어서.”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생긋 웃었다. 그럴듯한 정답을 찾아낸 것처럼 뿌듯한 얼굴이었다.

“너 말고, 만들 사람이 없잖아.”

눈사람.

엉뚱하다 못해 기가 막힌 대답에 강진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복수 같은 거창한 대답이 차라리 나을 뻔했다. 정작 성재현은 의연하게 제 눈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괜찮은 대답이지 않냐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약 하셨, 습니까?”

“약?”

“아니면, 술이라도 드셨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우아한 얼굴일 수 없었다. 성재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음, 내가 취한 거 같아요?”

“제정신은, 아니신 거 같습니다.”

“이런. 강진하 씨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었나 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성재현이 눈 쌓인 주변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눈 오는 날에 만드는 눈사람. 낭만적이잖아요.”

퍽이나 낭만적이었다. 저런 되먹지도 못할 이유를 들어가며 저를 찾아온 걸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정말로 약을 했거나 만취했거나. 그도 아니면 어디서 머리라도 부딪친 게 틀림없었다.

두 남자는 서로를 노려봤다. 엄밀히 말하자면 강진하만 그를 짓이기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달아나듯 유리문 쪽으로 가로질렀다. CCTV에 태만하기 짝이 없는 근무 현장이 적나라하게 찍히는 중이지만 상관없었다. 불청객의 집요한 눈길이 훨씬 거추장스러웠고 강진하는 당장이라도 그를 이곳에서 치우고 싶었다.

어느덧 문밖에 휘날리던 눈발이 잦아들었다.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강진하는 뭉텅이로 쌓인 눈을 마구잡이로 뭉쳤다. 젖은 손이 금세 차가워졌다. 목장갑이라도 낄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를 삼키며 그는 눈을 뭉치는 데 집중했다. 마침내 손바닥만 한 크기로 뭉친 눈덩이 네 개가 생겼다. 그는 눈덩이를 문 앞에 턱턱 세웠다.

“이제 됐어요?”

눈짓으로 바닥을 가리킨 강진하가 쏘아붙였다. 날카롭고 차가운 언성이 골목에 어릿하게 울렸다. 동시에 강진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자신도 비정상이었다. 당장 그를 쫓아내고 발악하고, 비명을 질러도 아쉽지 않은데. 왜 저는 한 번도 그렇게 냉정해지지 못하는 건지.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눈덩이를 보던 성재현이 눈사람을 구두 코로 찔렀다. 머리를 쿡쿡 건드리자 눈사람은 힘없이 폭삭 찌그러졌다. 그러자 그는 눈덩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흐물한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올라갔다.

“눈사람 만들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눈길은 강진하 자신을 향해있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성재현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귀여워라.”

담담하지만 무심하지 않은 음색이었다. 성재현은 종종 그런 얼굴로 저를 보곤 했다. 여유롭고 태연하지만, 집요한 눈. 옭아매고 죄어들 것처럼 찐득한 어둠. 그러면서도 검게 메마른 늪이었다. 갈증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가져가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흐음.”

“그럼, 안녕히 가, 세요.”

보란 듯이 그의 앞에서 강진하는 문을 쾅 닫았다. 쨍그랑, 문에 달린 종이 깨지는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는 뒤돌아서서 숨을 골랐다. 왜 그랬지. 왜 눈사람 같은 걸 만들었지. 지금 와서 그딴 걸 이야기하는 저의가 뭐지. 무의미한 싸움에서 패배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강진하는 철저한 패배자였다. 우위를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포식자에게 뜯긴 먹잇감이었다. 성재현과 있으면 강진하는 무력해졌다. 나약해졌다. 나쁜 습관이 되었다. 그러니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히터 바람에 뺨이 발갛게 익었다. 문득 손가락 마디마디가 따끔거렸다. 강진하는 축 늘어트렸던 손을 뒤집었다.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맨손으로 눈을 조물조물했더니 동상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손까지 말썽이다. 어떻게 된 게 제게 있는 것 중 정상인 게 없었다. 등 너머에 있는 불청객도, 심지어 저 자신조차도.

자조적인 웃음을 삼키며 강진하는 구급상자를 뒤적거렸다. 연고라도 바르려고 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까짓거 이 정도 얼얼한 거야 일생에서 아픈 축도 되진 않겠지. 그는 말없이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저릿저릿한 감각도 잠시, 강진하는 퍼뜩 달려드는 날카로운 온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무, 뭐 하는 짓이에요!”

세차게 팔을 턴 강진하가 성재현을 노려봤다. 영역 밖으로 밀어내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듯 매몰찼지만 성재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손…!”

“놓으라고?”

뒷말은 혀끝에서 잘려 나갔다. 숨이 막힐 듯한 시선이 저를 집어삼켰다.

“아무리 나 좋으라고 한 짓이래도.”

“…….”

“함부로 다치고 다니면 안 되는 거야.”

실소처럼 혀를 찬 성재현은 보란 듯이 제 눈앞에서 코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에 딸려 나온 건 털이 둘레에 달린 두툼한 가죽장갑이었다. 손을 잡아당긴 성재현이 손등 위에 장갑을 가져다 댔다. 싫다고 손을 비틀어도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그럴수록 거꾸로 솟은 비늘처럼 손목을 강하게 그러잡을 뿐이었다.

약간의 틈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손목과 손등을 느릿하게 스쳤다. 손부터 팔, 가슴까지 요동치는 온기. 마치 키스당하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잡아 올려 그대로 하나하나 핥을 것처럼 집요했다. 단단하게 손목을 붙잡은 손바닥의 온기, 흥건한 전율. 자칫 입속을 배회하는 신음을 욱여넣으며 강진하는 고개를 돌렸다.

한 트랙을 돈 캐럴이 다시 첫 노래로 돌아왔다. 바닥에 홀로 선 눈사람은 어느덧 흥건하게 녹아 바닥으로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장갑 한 짝이 손을 덮자마자 강진하는 그대로 성재현을 밀쳐냈다. 숨이 찼다.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얼굴만 보고 돌아갈까 했는데.”

이윽고 성재현이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유로운 목소리와 달리 눈동자에는 일그러진 이채가 돌았다. 불길한 미소였다. 소스라친 강진하가 재빨리 그를 밀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성재현은 당황하기는커녕 더욱 힘껏 팔을 움켜쥐었다.

“놔!”

“미끄러지면 크게 다칠 텐데. 그럼 이깟 붕대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그리 말하며 성재현이 팔을 약하게 비틀었다. 부러트릴 듯한 강한 악력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윽…!”

아프단 말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강진하가 잡힌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눈길에 두 사람 몫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엉켰다. 성재현은 세워둔 차 앞까지 강진하를 질질 끌고 왔다. 뒤로 젖혀진 강진하 몸이 그대로 차 보닛에 눕혀졌다. 성재현이 두 손으로 강진하의 양팔을 잡아 누르며 말했다.

“내가 미끄러진다고 했죠.”

“저리 비키….”

“비키면 어떻게 하려고? 아… 저번처럼, 또 술래잡기할까?”

강진하는 눈앞을 장악한 그를 반듯하게 올려다봤다. 그리 말하는 얼굴은 잔혹한 즐거움으로 환했다. 경외로 몸이 떨렸다. 혹은 기대감에 허벅지 사이가 들썩거리거나.

가로등을 등진 그에게서 광채가 난다. 강림한 천사 같은 고아한 아름다움. 그러나 한편으론 누군가의 세상을 집어삼킬 만큼 잔인했다.

“갑자기 얌전하네.”

“으읏!”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응?”

손바닥이 내려와 차게 식은 뺨을 덮었다. 섬뜩하고도 기묘하게 다정한 손길이었다.

“나랑 놀 생각? 아니면….”

슬금슬금 내려온 손가락이 목 아래를 가만히 누른다.

“어디로 다시, 숨어야 하나 머리라도 굴리나.”

맥박을 잡는 듯 부드럽게 목덜미를 건드리던 손가락이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덜컹, 열린 차 문 사이로 떠밀린 강진하는 뒷좌석에 웅크리듯이 처박혔다. 실룩거린 차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뒤에 올라탄 성재현을 힐끗 확인하고는 가타부타 없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삑삑, 차 문이 닫히는 기계음이 불안을 가로질렀다. 입을 벌리고 숨 한 번 고를 새 없었다. 벌어진 잇새를 단단한 손바닥이 억눌렀다.

“읍, 으브, 윽!”

“쉬잇.”

코끝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입술에 닿는 까칠한 붕대 면이 척척했다. 상처가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미친 새끼. 속으로 욕을 삼키며 강진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처를 헤집으면 제아무리 성재현이라도 빈틈을 드러낼 터였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피 냄새가 지독하게 눈앞을 지배했다.

“착하기도 하지.”

몸을 바짝 기울여 뒤에서 끌어안은 성재현이 피식 웃으며 귓불에 쪽 입을 맞췄다. 이어지듯 입술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스쳤다. 쪽, 쪽, 땀방울을 훑기라도 하듯 부드러우면서도 끈적한 입놀림이었다. 오소소 돋는 소름에 도리질 치자 성재현이 턱을 꽉 붙잡고 움직임을 저지했다.

이윽고 성재현은 흐트러진 유니폼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맨살을 더듬던 그가 소리 없이 웃는 게 등을 타고 울렸다.

“젖꼭지가, 서 있어요.”

“으, 응.”

훌러덩 셔츠를 걷어 올린 그가 툭툭 유두 주변을 건드렸다. 단단하게 선 유두가 손가락을 따라 약하게 흔들렸다.

“빨면 젖이라도 나올 것처럼 꽉 차 있기까지 하네.”

“아, 으음, 으.”

“다른 놈 만나고 다닌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가슴을 한 움큼 손바닥으로 감싼 성재현이 억세게 살을 주물러댈 때마다 강진하는 미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던 성재현이 바짝 선 유두를 통통 검지로 가볍게 튕겼다. 찌르르한 감각. 등줄기까지 튀는 자극에 강진하는 턱을 내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차창에 비친 눈이 번뜩거린다.

“아…!”

엎드렸던 몸이 뒤로 젖혀졌다. 머리채를 잡힌 채로 강진하는 좌석 아래로 질질 끌어 내려졌다. 벌린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잡아 들이밀게 한 성재현이 말했다.

“나, 섰어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벌어진 코트 사이로 보이는 바지춤이 불룩했다. 완강하게 몸으로 버티자 성재현이 입술을 무릎으로 툭툭 두드리며 재차 말했다.

“입으로 빨아야죠.”

“…안 해요.”

“왜?”

음험한 눈과 다르게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강진하는 눈을 돌렸다.

“상대할 생각, 없으니까 비키세요.”

“그래요?”

웃는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다. 강진하는 아랫입술을 꽉 피나게 깨물며 되받아쳤다.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십니까. 싫다고요. 안 한다고!”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거든.”

“무슨… 으, 웁!”

별안간 성재현이 잇새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치열을 훑다 경직된 혀를 꾹 눌렀다. 침이 손가락에 끈적하게 묻어 질척이는 소리가 입가에서 났다. 손을 빼낸 성재현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내 좆 빨면서 좋아한 게 하루 이틀이던가.”

“전, 저는 결코 그런 적….”

“없다고?”

순간 그의 발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꽉 누르는 압박감에 강진하는 비명 섞인 숨을 내뱉었다. 아프면서도 강렬한 자극에 허벅지 사이가 달달 떨렸다.

“이래도?”

“으, 흑!”

구둣발로 다리 사이를 자근자근 거칠게 찧어댈 때마다 시트에 손톱이 박혔다. 강진하는 목 졸린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매끈한 구두 등이 고간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순간 팔이 맥없이 떨렸다.

“이렇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발정이 나는데. 뭐가 아니라는 걸까. 응? 진하야.”

“나, 나는….”

“음탕하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어요?”

“아, 앗…….”

“그런데 어떡해.”

머리카락을 움켜쥔 성재현이 측은한 미소를 지었다.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댄 그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아까, 내 얼굴 볼 때부터 침 삼켰잖아.”

**

늘 그렇듯 지루한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어디선가 먹은 듯한 음식과 술에 이골이 났다.

성재현은 모든 사치스러운 광경을 뒤로하고 차를 탔다. 그때 기다렸다는 것처럼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 번호가 없는 전화는 박 차장이 따로 고용한 강서흥신소 김 대표였다. 길고 긴 연말 인사를 조잘거린 김 대표는 성재현의 심드렁한 반응에 눈치껏 본론을 꺼냈다.

특별한 보고는 아니었다. 매번 듣던 것과 같았다. 오전 7시에 일어났고 식사는 슈퍼에서 사 간 컵라면으로 추정, 낮에 구청에 들렀고 버스는 504번을 탔고. 성재현은 주중에 한 번씩 김 대표에게 강진하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전해 들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만나는 놈년은 있는지, 있다면 그게 누군지. 원한다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알 수 있었다. 그게 벌써 넉 달이었다.

제풀에 지쳐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갈 곳도 없는 그를 거둘 수 있는 건 오로지 저뿐이었다. 그래야만 했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백일 남짓이 흘러도 강진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달아나 봤자 제 손바닥 안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무슨 바람이 들었던가. 평소와 다르게 근무일정이 바뀌었다며, 지금 편의점 야간 근무 중이라는 말에 성재현은 연락을 끊었다. 수행 기사가 일정표대로 귀가지를 자택으로 움직이던 그때 그는 무심코 말했다. “차선을 바꿔요. 가산동으로 가죠.” 붐비는 대로변에서 크게 유턴한 차를 향해 빵빵 경적이 사납게 울렸으나 누구도 말 꺼내지 않았다.

차는 우중충한 골목에 멈췄다. 눈 내리는 늦은 저녁이었다. 수행 기사를 두고 그는 홀로 내렸다. 낡은 녹색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통유리로 된 한산한 매장에는 손님 두엇이 있었다. 그리고, 강진하가 서 있었다.

강진하는 성재현의 세계에서 도망쳤다. 완벽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 그는 못 보던 차림새로 못 보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던 그는 다가온 손님과 대화를 했다. 무심한가 싶던 얼굴에 희미하게 상냥함이 묻어났다.

우두커니 선 성재현은 그것을 줄곧 지켜봤다. 지켜본다니, 그의 일생에 이런 단어가 쉬이 나올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관람을 멈출 수 없어 코트에 눈이 쌓일 정도였다. 수행 기사가 우산을 가져다줬지만 그마저도 거절했다.

한편으론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달아난 대로 내버려 두고도 싶었다. 눈 밖에 나겠다는데 마음대로 하라며 냉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전전긍긍하느라 짜증이 났다. 그런데 전전긍긍하는 건 오로지 자신뿐인 듯했다. 억울할 정도로, 서러울 정도로. 그래서 이렇게 넉 달 동안 일부러 내버려 둔 게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거 빨게 해줄 테니까, 잘 빨아봐요.”

말을 마친 성재현은 강진하의 입 안으로 사납게 좆을 쑤셔 넣었다.

“커, 흡, 으웁!”

“목구멍까지, 제대로 써야지.”

당황한 강진하가 몸부림치는 걸 붙잡아 당긴 성재현이 명령했다. 무릎을 짚은 손가락이 꿈지럭거린다. 꿀꺽, 기어코 목구멍 너머까지 침범한 좆을 머금은 목구멍이 호흡을 가다듬느라 좁아졌다. 고개를 젖힌 성재현이 뜨거운 탄식을 뱉었다.

엉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솜씨였다. 강진하는 입으로 하는 데 서툴렀다. 하지만 성재현은 그런 서툰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닳고 닳지 않은 움직임은 그간 어떤 접촉도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꿈질거리는 혀의 말랑한 감촉하며 이가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입술. 제 나름대로 열심히 빨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피식거린 그는 한 움큼 쥔 강진하의 머리카락을 살살 비볐다. 고개를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봐야 하는데, 고개를 들 생각이 도통 없는 듯했다. 그렇게 빠는 데만 집중할 줄이야. 하여간 교태 부릴 줄 모르는 건 여전했다. 그는 사정감이 고양되자마자 즉시 입속에서 좆을 빼냈다. 푸욱, 하고 빠져나온 좆에 침과 쿠퍼선액이 실처럼 엉겨 붙었다.

“빠느라 정신이 없네. 응? 그렇게 내 좆이 맛있어요?”

“흐으, 으….”

“묻잖아요. 맛있냐고.”

턱을 잡은 성재현이 재차 되물었다. 뺨을 달싹거리며 대답을 고르던 강진하는 결국 눈만 내리깔았다. 성재현은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별로였어요? 그런데 왜 나 쳐다보지도 않아요.”

“…….”

성재현은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그는 감정을 대놓고 보이는 편이 아니었다. 화가 나도 웃는 편이었다. 위선적으로 사는 게 가치있는 삶이었으므로. 그런데 강진하에게는 그저 화가 났다. 감히 제 품에서 달아났다. 공들여 만든 정원에서 자라라고 했더니 싫다고 뿌리째로 뛰쳐나갔다. 그러니 눈앞의 그는 분명 초라하고 볼썽사나워야 했다.

성재현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동안 살이 붙었는지 보드라운 뺨은 해사했고 내려간 눈꼬리는 나붓하게 떨렸다. 괘씸하게도 예뻤다. 정숙하고 성실하고, 순종이란 단어로 빚은 듯한 하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정신 나간 요부 같았다. 머리를 잡고서 성재현은 거리낌 없이 그의 얼굴에 사정했다.

“하아.”

희뿌연 정액이 눈꺼풀과 콧잔등, 그리고 입술까지 치덕치덕 흘러내렸다. 강진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가로등 불빛이 얼핏 스친 얼굴은 창백하고 처량했다. 팔자로 기운 눈썹 아래 우물 같은 눈동자가 황망히 저를 올려다본다. 그렁그렁한 눈은 곧 울 것만 같았다. 그러다 금세 눈빛이 사나워졌다. 온몸의 털을 부풀리고 발톱까지 세운 고양이 같은 눈초리였다.

“왜 화가 난 표정이에요. 화는 내가 내야 하는데.”

주제에 귀엽기도 한 반항이라, 아랫배가 뜨끈해졌다. 한 번 사정했는데도 좆은 금세 기세를 세웠다. 손으로 정액을 닦아내려는 걸 붙잡은 그가 혀를 찼다.

“내가 언제, 닦으라고 했어요?”

“아!”

성재현은 좆으로 그의 얼굴을 쳤다. 퍽, 퍽, 굵은 기둥에 맞은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사정없이 좆으로 그의 뺨을 내리치던 성재현이 두 손으로 그의 목줄기를 잡아 올렸다. 가는 목이 파르르 손아귀에서 떨렸다. 목이라도 조를까 봐 겁먹은 얼굴에 성재현이 명랑하게 웃었다.

“왜 그래요? 내가 목 졸라서, 죽일까 봐 무서워요?”

“히으, 읏.”

“설마. 그랬으면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죠. 굳이 깜짝 방문할 필요도 없이.”

안 그래요? 그는 의미 없는 동조를 구하며 너른 차 시트에 강진하를 깔아 눕혔다. 편의점에서 산 것들이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콘돔, 여행용 로션 등등. 성재현은 오일을 손바닥에 듬뿍 짰다. 머리 아플 정도로 달달한 향기가 음울한 차내를 채웠다. 헐렁한 청바지를 잡아끈 성재현은 허벅지 사이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침입에 버둥거리던 몸이 얼어붙었다.

“아, 잠시만! 윽… 읍!”

“좆 빨다가 흥분해서 구멍까지 젖었어요?”

“아흐, 아니야. 아니란, 말, 흑!”

“아니라기에는, 너무 젖었잖아요. 조금만 풀어주면 주먹도 들어가겠는데.”

정말로 박을 것처럼 주먹을 입구에 문지르자 허리가 움칠거렸다. 그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가 틈을 메웠다. 강진하가 손으로 더듬더듬 문고리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잡이를 잡아 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 탓이었다. 안쓰러운 저항에 성재현은 자비를 베풀 듯이 주먹 쥔 손을 풀었다. 곧이어 검지와 중지를 모아 구멍에 푹 박아넣었다. 등이 펄쩍 요동치다 파들파들 어깨만 떨렸다. 손가락 두 개를 세게 조여오는 감각에 성재현은 즐겁게 웃었다.

둔부 사이로 흘러내린 오일이 늘씬한 허벅지를 반지르르하게 적셨다. 이윽고 그는 삽입된 손가락을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쿨쩍, 쿨쩍. 잘착한 물기로 젖은 내벽이 손가락에 감기듯 들러붙었다. 쑤시는 소리가 퍽 음탕하게 들릴 정도였다. 강진하도 그리 느꼈는지 두 귀가 붉어지고 신음이 눈에 띄게 탁해져 있었다. 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재현은 일부러 손가락을 안에서 부드럽게 놀렸다. 그러자 흡사 지저귀는 것처럼 자그만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발로 성재현을 걷어찬 강진하가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벽에 가로막힌 차 문은 간신히 반만 열릴 뿐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퇴로가 막힌 걸 바라본 강진하가 허망하게 숨을 뱉었다.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렸네.”

등 뒤에서 두 팔로 몸을 꽉 끌어안은 성재현이 속삭였다. 으득, 이를 간 강진하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떴다.

“제, 정신 아닌 건, 그쪽이잖아.”

“내가?”

“그럼, 이게 제정신으로 하. 할 짓이라고 생각해?”

“제정신이 아니라고? 내가?”

말이 반복될수록 음조가 낮아졌다. 음험하게 가라앉은 성재현의 두 눈에 강진하가 침을 삼켰다. 턱을 쓰다듬은 성재현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하긴 제정신이 아니긴 해.”

머지않아 그가 손으로 거칠게 강진하를 잡아챘다. 가죽이 뜯길 것처럼 억센 손힘에 시선이 가까워졌다. 두 눈이 형형했다.

“허윽, 윽.”

“정신이 나갔으니 이딴 거나 찾으러 오고, 크리스마스에. 그런데….”

희게 웃던 그가 눈을 번뜩 떴다.

“너무 외롭고 슬프고, 화가 나더라고. 내 건데, 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구는 건지. 자꾸.”

나를 비켜가려고만 하는지.

쿵! 순식간에 앞머리가 차창 유리에 부딪혔다. 강진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개 같은 빛무리가 눈앞을 덮칠 정도로 얼얼한 통증이었다. 곧 손바닥이 둔부를 때렸다. 짝, 미끈하게 젖은 살에 단단한 손바닥이 닿는 소리가 둔탁하고 묵직했다.

“아윽!”

다섯 번 넘게 때리자 엉덩이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문고리를 붙잡은 손은 힘없이 벌벌거리고 있었다. “그만….” 하고 신음하는 목소리가 고장 난 라디오 같았다. 작고 애처로운 중얼거림이었지만 성재현은 무시했다. 오히려 손가락으로 구멍을 더욱 거칠게 쑤셨다.

“이제 좀 반성할 생각이 들었으려나.”

“흡, 으… 으, 응, 읏으.”

“그렇게 서럽게 우니까 화를 못 내겠네.”

생글생글 웃으며 성재현이 어르는 말투로 말했다. 강진하는 시트에 이마를 대고 모든 소리를 죽이느라 애썼다. 이마에 멍이 들었을 터였다. 멍든 모습이 안쓰럽긴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성재현은 그를 아프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강진하가 문고리를 잡기 전까지는 적당히 봐줄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고는 강진하의 탓이었다.

도망가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나사 빠진 놈처럼 찾아올 필요도 없지 않았던가. 강진하는 저를 우롱했다. 보란 듯이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윽, 으흐, 악.”

쩍, 쩍, 마찰 때문에 하얗게 거품이 일어난 오일이 애액 같았다.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낸 성재현은 기세가 수그러든 그의 성기를 붙잡았다. 음낭을 굴리며 만지자 허벅지 사이가 벌벌거렸다.

“이렇게 만져주니까 좋아요?”

“으응, 흑.”

좋다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숨소리가 아까보다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성재현은 손바닥으로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체모가 얕게 자란 둔덕이 가칠하지만 그게 오히려 흥분되었다. 연약하게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금세 강진하의 아래가 발기했다. 숨이 뜨겁다. 애가 타서 끙끙거리기도 했다. 성재현은 흥분한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불시에 그를 당겨 일으켰다. 엎드려있던 몸이 휘청거리며 가슴팍에 안겼다. 성재현은 제 허벅지에 강진하를 앉혔다. 앞 좌석 백미러에 몸을 겹친 두 사람이 비쳤다.

“흥분해서 얼굴 빨개진 것 봐.”

“아.”

“응? 야한 얼굴이 됐어요.”

왼손으로 턱을 잡고 백미러를 보게 한 성재현이 귀를 빨았다. 오일로 젖다 못해 움직이기만 해도 아래가 잘팍거렸다. 불뚝 일어선 성기를 둔부 골에 쓱쓱 문지르던 성재현이 단숨에 구멍에 삽입했다.

“아!”

들썩, 몸을 떤 강진하가 작게 입술을 벌렸다. 눈 아래에 얄팍하게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좁은 내벽을 가르고 들어온 성기는 감당하기 힘든 크기였다. 그저 삽입만 했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렸다. 방망이로 배를 후려친 듯했다.

“하아, 너무, 좁아졌네.”

“윽, 으흑, 아, 아으.”

“괜찮아. 금방 익숙해질 거니까.”

쪽, 소리를 내며 눈 옆에 흘러내린 눈물을 핥은 성재현이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퍽, 하고 살이 맞부딪쳤다. 뻑뻑했고 좁았다. 더 들어가면 찢어지고 너덜너덜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재현은 욕심껏 깊숙이 처박았다. 이 살을, 촉감을, 온기를 느끼는 게 얼마만인가. 그리 원하는 대로 탐하니 갈증을 깨달은 것처럼 아래가 뻑적지근했다.

몸을 받쳐 안고 그는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덜컹덜컹, 차체가 두 사람의 흔들림을 따라 위아래로 실룩거렸다. 그때마다 강진하는 팔로 입을 막고 비명을 삼켰다. 구멍이 성기 두께만큼 힘겹게 벌어지며 성기를 꿀떡 삼킨다. 그러다 뒤로 밀려나며 귀두와 기둥이 내벽을 긁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서도 콕콕거리며 약한 전류가 튀는 자극에 발가락이 자꾸 곱았다.

“읍, 으, 으흑, 읍.”

팔을 세게 깨물며 신음을 억누르자 성재현이 팔을 떼어내며 제 손가락을 물렸다.

“깨물지 말고.”

“흐우, 읍.”

혀를 누른 검지가 입속을 헤집었다. 가지런한 치열을 두드리다 오돌토돌한 입천장을 간질이기도 했다. 반대편 손이 셔츠 사이로 들어와 유두를 꼬집었다. 아프진 않았다. 야살스럽고 세심한 손길이었다. 볼록하게 솟은 유두를 집게손가락으로 비비 돌리기도 하고, 유륜 주변을 손톱으로 갉작거리며 애태웠다. 심지에 불을 붙이는 듯한 정성스러운 애무였다.

눈을 가늘게 뜬 강진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혀를 얽었다. 붉은 혀가 날름거리며 길고 흰 손가락을 핥을 때마다 성재현은 더운 신음을 몰아쉬었다. 손길과 다르게 깊숙이 박힌 아래는 거칠고 격동적이었다. 과격한 허리 짓에 구멍이 벌름거리며 힘겹게 성기를 받아들였다. 푹, 푹, 젖은 내벽을 가로지르던 성기가 안을 뭉툭하게 쑤실 때마다 허벅다리가 바르작거렸다.

“그때 골라준 인테리어 기억나요?”

“아, 아학, 으, 으응!”

“우리 집 분위기랑 알맞을 거 같다고 했었죠. 응? 무채색에 흰색 목재 문. 카펫도 그에 맞춰서 골라줬잖아.”

해묵은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성재현은 허리를 더욱 세게 움직였다. 쩌억, 샅에 음낭이 덜커덕 부딪치며 성기가 깊은 안쪽을 찔렀다. 강진하가 입속에 든 손가락을 쪽 빨며 흐느낌을 참았다. 성재현은 흐느적거리는 그의 목덜미를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원하는 대로 다 바꿨어. 정말, 하아, 잘 어울리더라고. 보는 눈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는데. 윽.”

“아, 아으, 읍, 윽, 흐으.”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 나에 대해서?”

“으응, 윽, 으흐, 읏!”

“응? 진하야. 응? 말해. 궁금한 적, 없었어?”

애타는 듯한 물음이 반복되었다. 아래가 들썩거리며 엇박으로 박히고 그때마다 강진하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아니라고 했는지, 싫다고 했는지. 혹은 그렇다, 였는지. 들리지 않는 벙긋거림이었다. 성재현은 그저 히죽 웃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게 틀림없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아래에 맞물린 교접부를 비비며 그는 벌겋게 잇자국이 남은 어깨를 핥았다.

“그러면 책임져야지. 내가 너 때문에, 파혼했는데.”

퍽, 뿌리까지 삽입할 기세로 쳐올리며 성재현이 발기한 성기를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올라붙은 성기가 막히자 강진하가 사지를 바들바들 괴롭게 떨었다.

“으, 으윽, 응.”

“그 여자는, 원목으로 바꾸자고 하더라고. 화사한 베이지로, 바꾸재.”

푹, 재차 힘껏 쳐올린 허리에 강진하가 자지러지며 눈을 크게 떴다. 배 속에 뭉근한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절정으로 익은 몸이 감전된 듯 발발거리며 흔들리다 멈췄다. 성재현은 그제야 아래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팍, 물기가 손바닥을 적셨다. 확장된 동공에 거울 속 성재현만이 오롯하게 담겼다. 성재현은 젖은 손가락을 들어 혀끝으로 핥았다.

“네가 원하는 집이 되었어.”

올라가는 입꼬리가 야릇했다.

그래도 오기 싫어?

**

“흐으….”

깨끗한 타일 바닥에 옹송그린 몸이 힘없이 떨렸다. 성재현은 소매를 걷은 채 팔짱을 끼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시원 개별 열쇠와 USB가 달린 낡은 인형 고리가 그의 손안에서 짤랑거렸다. 성재현이 빼앗은 강진하의 물건이었다.

알몸으로 선 강진하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뺨과 입, 머리카락에 정액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강권 어린 시선이 강진하를 내리훑었다. 그때마다 강진하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택에 갇혔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모든 선택권이 성재현에게 놓인, 자신은 그저 놀이용 인형으로 전락된 상황. 그러나 도주로는 없었다. 그저 성재현의 열 오른 눈길만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부딪친 무릎이 시큰거렸다. 비틀거리며 쪼그려 앉은 강진하는 무릎을 붙잡고 허벅지를 좌우로 크게 벌렸다. 듬성듬성 자란 체모 아래에 축 처진 성기가 드러났다. 성재현은 열쇠를 짤랑짤랑 흔들며 그 광경을 오페라나 발레 공연 보듯 탐미롭게 감상했다. 체온에 녹아내린 오일이 끈적해진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소변보는 자세를 취한 강진하는 서서히 배 아래에 힘을 풀었다.

“아, 흐윽, 앗….”

아랫도리에서 정액이 덩어리져 후둑후둑 흘러내렸다. 얼마나 정액을 받았는지 쉴 틈 없이 졸졸 흐르고 또 흘렀다. 턱을 살짝 젖힌 강진하는 성재현의 얼굴을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올려다봤다. 성재현은 문가에 기대서서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망하고 있었다. 살짝 벌린 입술부터 하도 만져대느라 부푼 왼쪽 젖꼭지, 멍이 든 사타구니, 성기를 받느라 빨갛게 부은 구멍. 질척한 응시였다. 머리에 정액을 받는 것처럼 뜨겁고 능란했다.

“야하네.”

성재현이 피식 웃었다. 슬리퍼 신은 발끝이 사타구니를 툭툭 건드렸다. 그때마다 아랫도리가 찌르르 울렸다. 야하고 천박한 암캐, 정액을 갈구하는 창부. 가늘게 뜬 눈이 그리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강진하는 병든 어린 짐승처럼 애타게 허덕였다. 아래로는 성재현이 싸지른 정액을 줄줄 흘리고 있건만, 여전히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배 속까지 좆을 처넣은 것만 같았다. 허리가 흔들리고 어깨가 앞뒤로 들썩였다.

“하아, 으응, 흣.”

넉 달 동안 강진하는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담백하다 못해 결벽적으로 무심한 일상에 스스로를 가뒀다. 왜 그랬던가. 새로운 관계가 두려워서 그런 거라는 안일한 부정을 했다. 그러나 종종 밤마다 꿈에, 그가 나타났다. 목을 조르며 아래를 쑤시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내 천박한 꽃, 내 것. 진하야, 너는 나밖에 갈 데가 없잖아. 머무를 사람이 없잖아. 그랬던 시간이 무상하리만큼 그는 위태로운 절정에 휩쓸리고 있었다. 불붙은 심지가 타오르는 듯했다.

몸을 아래로 숙인 채 강진하는 눈을 깜빡거렸다. 욕실 조명이 뿌옇게 눈앞을 지웠다가 선명하게 새겼다. 성재현은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강진하를 느릿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뭘 하라는 다음 지시가 없었다. 강진하는 멍하니 손을 내렸다. 구멍을 더듬거리다 안쪽 정액까지 손가락으로 헤집어 긁어냈다. 마디가 가늘고 손톱 끝이 둥근 손가락에 정액과 질척한 애액이 엉겨 붙었다. 정신없이 아래를 문지르며 강진하가 앓는 신음을 흘렸다. 바닥에 후두둑, 정액이 튀었다.

“씻으라고 시간 준 건데.”

“흐으… 응.”

“귀여운 짓을 다 하고.”

몸을 숙여 강진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붙잡은 성재현이 눈높이를 맞췄다. 시선이 서로를 얽었다. 절정에 풀어진 눈이 헐떡이며 눈앞의 인영을 좇았다. 성재현이 몸을 기울였다. 모양 좋은 입술이 가까워졌다. 그대로 입술을 물어뜯고 입 안을 혀로 헤집고 싶은 듯이.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뺨을 핥은 혀끝이 뒤이어 귓불을 간질였다.

성재현은 키스 대신 등 뒤에 놓인 샤워기를 집어 들었다. 쏴아아아, 온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아 얼음물처럼 차갑고 세찬 물줄기가 하얗고 마른 몸 위로 쏟아졌다. 옷자락까지 젖었지만 성재현은 그대로 턱을 붙잡고 강진하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등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옆구리와 허벅지를 간질였다. 옷 하나 걸치지 못한 몸은 춥고 습하면서도 몸은 용암을 헤엄친 듯 뜨겁고 얼얼했다. 강진하는 턱과 어깨에 힘을 주고 앞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팔로 바닥을 디딘다면 더 편할 테지만 등 뒤에 가죽으로 구속된 팔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턱을 들고 앞을 바라보면 문 하나가 보였다. 그러나 닿을 수 없었다. 꿈틀거리던 몸부림은 머지않아 손 하나에 붙들렸다.

“아! 흐으, 응…!”

오금을 막무가내로 잡아 누르는 힘에 강진하는 몸을 구부리고 퍼덕였다. 그러나 성재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강진하를 온몸으로 제압했다. 차가운 물로 씻은 몸은 군데군데 말간 분홍빛이 돌았다. 물기가 맺힌 가슴팍에서 물줄기가 도르륵 흘러내렸다. 도화지에 물감을 덧칠한 것처럼 군데군데 불그스름한 손자국으로 가득했다. 씩 웃은 그가 멍이 든 자리를 손바닥으로 꽉 누르며 말했다.

“만지기만 해도 자지러질 정도로 좋아?”

“흐, 아읏, 아!”

“밝히기는.”

허리를 숙인 성재현이 허벅지 사이에 입술을 묻었다. 면도날이 스쳐 얇게 피가 맺힌 배 아래쪽에 혀가 닿았다. 날름거리며 가칠하게 핥아댄다. 쓰라린 감촉에 강진하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혀는 아래로 점차 향했다. 점점 습해지는 입김에 강진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성재현은 아직 물기가 도는 허벅지에 코를 대고 숨을 깊숙이 마셨다.

“여기서, 정액 냄새나.”

“히윽, 으.”

“아, 내 냄새겠구나. 내가 계속 썼으니까.”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그가 중얼거렸다. 세 번, 아니 네 번이던가. 횟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박히고, 박히고, 또 박혔다. 호텔로 끌려온 뒤로 내내 침대를 떠나지 못하고 그의 좆을 받아야만 했다. 정액이 안을 채우다 못해 허벅지까지 범벅이었다. 모조리 씻어냈는데도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정액이 안에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후, 미지근한 입바람이 구멍에 닿자 엉덩이가 바르작거리며 들썩였다. 몸을 가까이 낮춘 성재현이 눈을 번뜩이며 입맛을 다신다. 즐거운 유희를 앞둔 표정이었다. 기어코 둔부 안쪽에 혀가 닿는 순간 강진하는 거세게 전신을 흔들었다.

“아, 싫어! 흐윽, 거기, 아, 아으, 안 돼…!”

손이라도 풀려있었다면 그의 머리를 붙잡았을 터였다. 단단히 결박된 양 손목은 아무리 비비고 흔들어도 매듭이 풀리지 않았다. 미쳤다. 미쳤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성재현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흐아, 으응, 앗, 아!”

두 손을 주먹 쥐고 펴며 강진하는 가는 신음을 흘렸다. 성재현은 그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구멍을 쩝쩝거리며 과즙 삼키듯 빨아댔다. 후루룩, 하고 일부러 침 삼키는 소리까지 내며 게걸스럽게 핥고 빨았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구멍을 쑤시기도 했다. 그때마다 강진하는 가슴을 들썩거리며 애타게 헐떡였다. 허벅지를 움츠렸다가 폈다가, 가늘게 떨며 흐느꼈다. 그만, 제발, 싫어. 호소하는 목소리에 성재현이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

“아래 빨아주는 게 싫어?”

“히으, 응…!”

“난 빨아주기만 했는데.”

희고 긴 손가락이 아래를 향했다. 그는 서슴없이 강진하의 성기를 잡아 우그러트렸다. 일어선 성기 끝은 벌써 젖어 축축했다.

“또 섰잖아요.”

“아, 아… 아, 흐윽.”

“이러면서 뭐가 아니라는 건데. 씹물 줄줄 흐르는 거 안 보여요?”

손가락으로 툭 성기를 건드릴 때마다 가랑이 사이가 발발 떨렸다. 손을 저지하려 급히 움츠렸지만 구렁이처럼 사타구니를 파고든 그의 손이 통통한 음낭을 꼬집어댔다. 선명한 고통에 강진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재현은 흐르는 눈물조차 감질난다는 것처럼 눈에 입을 대고 눈물을 핥아 올렸다.

그러나 이런 걸로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물기를 닦아내지도 않은 채 질질 끌고 나온 몸을 침대로 던졌다.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침대 위에 파동이 일어난 것처럼 주름이 구겨졌다. 성재현은 버둥거리는 강진하의 몸을 깔아 눕히고 전신을 빨고 핥아댔다. 어깨부터 종아리까지 하얗고 부드러운 살이란 살은 죄다 깨물고 또 깨물었다. 그 탓에 멀쩡한 곳이 남아나질 않았다. 허벅다리에 입술을 묻은 성재현이 잇자국 남은 부분에 또 한 번 깊이 이를 박았다.

“아!”

섬뜩한 아픔은 곧 유약한 쾌락이 되었다. 성재현은 이로 깨문 자리를 혀로 미끈하게 핥아댔다. 집요한 혀 놀림에 강진하는 울음 섞인 신음을 목구멍으로 밀어내며 도리질 쳤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떤 움직임도 그저 무기력한 저항에 불과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아래에서부터 슬금슬금 밀려온 잔열이 옆구리와 가슴팍을 간질였다.

조금만 더. 아래를 살짝만 더 건드리면 될 것 같은데. 아슬아슬한 쾌감에 몸이 달았다. 간악하고 지독한 욕구에 마른침이 자꾸 넘어갔다. 아래를 흠뻑 적신 성재현이 자세를 잡았다. 그는 선단을 입구에 대고 푹 쑤시는 대신 툭툭 때리며 문질렀다. 그때마다 구멍이 발름거리며 도톰하게 부어오른 주위 살이 볼록거렸다.

“여기다, 박아줬으면 좋겠어요?”

“아, 아으, 하.”

“자지 받고 싶냐고 묻잖아요.”

상스러운 말을 고상한 어투로 속닥이며 성재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은 음험하게 들끓어 당장이라도 강진하를 엉망으로 짓이길 듯했다. 강진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이마저도 부정 어린 습관이었다. 뺨을 한 손으로 움켜잡은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치열을 훑었다.

“진하야.”

“하아, 으….”

“응? 진하야.”

아래를 느른하게 비비며 성재현이 불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지시라기보다는 부탁처럼 들렸다. 마치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벅차오른 음색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을 리 없는 그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낯선 반응에 강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성재현이 손가락을 떼어내고는 빙긋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 고집 부려. 그렇게.”

그래도 난 재밌으니까.

찔꺽, 부어오른 구멍을 선단이 비집고 들어섰다. 익숙한 압박감에 강진하는 반사적으로 아래에 힘을 풀었다. 좆은 단번에 안을 가득 채우며 들어왔다. 이미 길이 날 대로 난 구멍은 안을 가득 채운 살덩어리를 꿈질거리며 조여댔다. 짙은 탄성을 가늘게 내쉬며 성재현은 허리를 움직였다.

느릿하던 움직임에 서서히 속도가 붙었다. 질퍽, 질퍽,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성기를 받기 쉬워진 구멍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일었다. 체액으로 흥건해진 구멍 깊숙이 좆을 쑤셔 박았다가 방아질 하며 뒤로 물러날 때마다 불그죽죽한 기둥에 혈관이 꿈틀거렸다.

“아, 흐으!”

안쪽 깊숙한 지점에 성기가 닿자 강진하가 새된 소리를 흘렸다. 전신이 찌릿했다. 약한 전류가 구멍을 타고 머리까지 관통하는 것 같았다. 몰려드는 쾌감을 거부하려 몸을 좌우로 요란하게 뒤틀었다. 그때마다 등 아래 놓인 침대 시트가 팔랑거렸다. 성재현은 허리를 붙잡고 세차게 들이박았다.

질퍽, 질퍽. 습한 진창을 거칠게 밟아대는 듯이 질척한 교접이었다. 쩍쩍 들러붙는 내벽이 긴하게 죄어대며 기둥을 두드렸다. 몸을 납작하게 눕힌 성재현이 아예 몸으로 누르듯이 쿵쿵 찧어 박았다. 심장 박동 같은 울림이 두 몸에 크게 울렸다.

“아, 아앗! 윽, 아, 흐윽, 그, 마, 흑!”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강진하는 눈을 크게 뜨고 할딱거렸다. 머릿속에 거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성재현은 일부러 잘 느끼는 부분만 헤집어대며 보란 듯이 강진하를 몰아붙였다.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음에 색이 물들었다. 교성을 막으려 입술을 깨물어도 소용없었다. 아래를 푹푹 처박는 성재현의 허리 짓이 더욱 맹렬해졌다. 침대가 들썩거리며 파도치고 반듯하게 서 있던 협탁까지 흔들렸다.

“하아, 야한 소리, 크게 내봐.”

“흡, 으, 아, 아앗, 아!”

“여기 위층, 아래층, 후우, 다 비워둬서 소리 질러도 아무도, 몰라.”

“그, 흐만, 더는, 아, 으응!”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성재현은 말랑한 둔부에 복부를 밀착하고 있는 힘껏 꾹 눌렀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내벽을 지나쳐 결장까지 닿을 듯한 깊숙한 삽입이었다.

“여기까지 닿으면 어떨까.”

“하으, 아, 안, 망가, 망가져.”

“망가져? 여기?”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툭툭 치며 성재현이 되물었다. 천진한 듯한 말투와 달리 두 눈은 신선한 쾌락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는 강진하를 안아 들고서 그대로 힘껏 박아 올렸다. 뿌리까지 들어간 성기는 밑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굵직한 성기를 모조리 삼킨 구멍 주변이 벌겋게 익어 벌렁거렸다. 힘이 들어간 아랫배가 어릿했다. 일어난 성기가 탄탄한 복부에 비벼졌다. 성재현은 그대로 느릿느릿 몸을 흔들었다.

“아, 아, 그, 마안, 히윽.”

안쪽을 자극받을 때마다 강진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산산이 부서질 듯한 통증과 함께 몸을 적시는 쾌락을 분간할 수 없었다. 질퍽, 살짝 빠져나온 좆이 다시 힘차게 안을 들이박았다.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던 성재현이 어깨에 이를 세우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뒤섞이던 그때, 강진하가 몸을 달달 떨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 치는 움직임에 성재현이 그를 꽉 잡고 한 군데만 집요하게 쑤셔 박았다.

“그만, 그, 그마, 하으, 도려, 도련님, 아, 아! 전, 전무님….”

절정을 강제로 묶인 강진하가 애걸복걸했다. 숨까지 참느라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러나 성재현은 원하는 대로 박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안에 깊이 삽입한 채 눈에 흐르는 눈물을 쪽쪽 빨아먹다 목에 맺힌 물기를 핥았다. 희고 보드라운 종아리가 허리에 감겼다. 가죽에 묶인 두 팔이 바르작거리느라 매듭이 팽팽해졌다.

“이대로 임신시켜줄까요? 이번에는 잘할 수 있죠?”

“아, 아, 흐으, 제발, 그, 흑, 제발….”

“제발?”

“흐으, 가고, 가게, 갈게요. 할게요, 하, 할게요. 제발, 제발.”

눈물범벅이 된 강진하가 알 수 없는 대답을 반복했다. 고장 난 것처럼 멍청해진 눈은 초점을 잃은 채였다. 들썩거리며 몸을 가까이 밀착한 강진하가 성재현의 입술을 핥았다. 구멍이 움찔거리며 아래를 죄어댔다. 그야말로 보채고 있었다. 성재현은 강진하를 부술 기세로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아, 흐, 아, 가흐, 가, 가…!”

찔꺽, 찔꺽, 탱탱하게 부어오른 아랫도리가 한계까지 벌어지며 기둥을 삼켰다. 파드득, 성재현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정을 안에 듬뿍 쏘아 올렸다. 한동안 그는 강진하를 몸으로 누른 채 삽입과 사정을 만끽했다. 움찔거리는 안은 뜨겁고 말캉했다. 보드라운 젤리에 묻힌 듯한 느낌이었다. 강진하는 숨소리만 겨우 내고 있었다. 절정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앞을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좆을 빼내자 골을 타고 정액이 주르륵 흘렀다. 성재현은 성기를 엉덩이에 툭툭 털어 남은 정액마저 닦아냈다.

“얌전하니까, 귀엽고 좋네요.”

등 뒤로 끌어안은 성재현이 가슴을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귀를 핥았다. 팔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였다. 이미 감각도 희미했다. 눈물로 얼룩진 뺨을 움찔거리며 강진하는 지독한 여운에 힘없이 흐느꼈다.

짤랑, 열쇠가 얼굴 옆에 던져졌다.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젖은 뺨을 톡톡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약속대로, 돌려줄게요.”

낡은 인형 고리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돌려받았어도 더는 필요 없게 된 물건이었다.

**

삐빅, 삐빅. 맞춰 둔 타이머가 울렸다. 서서히 속도가 줄어든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성재현은 연신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러닝머신을 달린 덕에 얼굴과 목덜미가 땀투성이였다.

수건으로 가볍게 얼굴을 닦아낸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습관적으로 확인했다. 오전 7시. 슬슬 채비할 시간이었다. 샤워실로 들어선 성재현은 머릿속으로 오늘 일정을 정돈했다. 11시에 주간회의, 오찬은 세한전자 김 상무와 선약. 오후는 홍콩 바이어와 골프, 그리고 저녁 연주회 참석.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성재현이 부스 밖으로 나서자 정영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눈인사를 먼저 나눈 그가 비닐로 감싼 정장과 쇼핑백을 내밀었다.

“급히 준비해서 평소 쓰시던 거랑 다를 겁니다.”

“그래요?”

안을 대강 확인한 성재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새 와이셔츠, 구두, 양말 등등. 일회성으로 걸치기엔 값어치가 꽤 나가는 브랜드였다.

“이른 아침부터 정 비서님을 고생시켰군요.”

“별일 아니었습니다. 잠은 편히 주무셨습니까.”

“그럭저럭? 어깨가 좀 뻐근하긴 하네요.”

성재현이 고개를 까딱 좌우로 흔들며 어깨를 두드렸다. 정영호가 말을 이었다.

“많이 불편하시면 박 교수한테 연락할까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정리하죠.”

“예. 전무님.”

젖은 머리를 닦아낸 성재현이 앞장섰다. 실내용 슬리퍼에 밟히는 러그 감촉이 폭신했다. 두 남자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목적지는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객실과 복도를 가르는 붉은 카펫 끝자락에서 멈춘 정영호가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끼익, 이내 문이 닫혔다.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방 안은 다른 세계였다. 불빛도 스미지 않는 적막한 어둠에 몽롱한 온기가 군데군데 스며있었다. 성재현은 저벅저벅 안쪽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커튼으로 꽁꽁 감싸인 암실(暗室). 비로드 장식이 헝클어진 이불 위에 강진하가 웅크리고 있었다.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잠그며 성재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까이 붙인 몸에서 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자요?”

슬쩍 허벅지에 손을 올리자 등줄기가 움찔거린다. 성재현은 일부러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진하야.”

그는 대답을 요구하듯 이름을 불렀다. 음란한 습기를 머금은 굴곡을 따라 다리 사이를 건드릴 때마다 콧숨이 작게 색색거렸다. 그러나 대답하진 않는다.

“생각보다 잠꾸러기네.”

“…….”

“그래서 나 배웅도 안 해주려고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젖은 넝쿨처럼 이불에 쏟아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자 가냘픈 호흡을 따라 가슴팍이 느리게 들썩거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은 흐드러지기 전에 꽃잎을 웅크린 겨울꽃처럼 하얀색이었다.

문득 성재현은 마틴 존슨히드의 작품 중 하나인 <푸른 벨벳 위 목련화>를 떠올렸다. 등장하는 건 그저 목련꽃 한 송이건만 색과 정물의 생동감만으로 관능을 자극하던 그림.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강진하는 성재현에게 있어 가장 관능을 자극하는 흥미였다. 그걸 대변하듯 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겼다. 가볍게 입맛을 다신 성재현은 두 팔을 구속하던 매듭을 풀어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팔이 날아왔다. 아마도 성재현을 가격하려 했을 손은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아…!”

턱을 스친 팔목이 성재현의 손에 맥없이 붙잡혔다. 성재현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어요?”

“나! 놔, 줘, 요…!”

“어디? 아, 이 팔?”

“으, 윽.”

움켜쥔 팔에 힘을 강하게 주자 강진하가 신음했다. 어둠에 익은 시야로 그의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눈썹은 절정에 시달려 애걸하던 때와 흡사했다. 그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야릇해 성재현은 그를 끌어안고 이를 세워 목덜미 아래를 크게 깨물었다.

“아, 악! 흡, 흐윽.”

“음.”

이미 온몸이 잇자국으로 가득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흔적을 음미하듯 핥았다. 강진하가 흐느낌을 참는 소리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바르작거리면서도 결국 어깨에 두 팔을 두르진 않는다. 그러면 금방 끝날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부득불 편리를 거스르는 태도가 발칙했다.

그러나 성재현은 그 작은 손짓 하나하나가 즐거웠다.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저항하며 몸부림치는 모습은 갸륵하다 못해 귀엽기까지 했다. 강진하는 결코 저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도록 길들였고 그러도록 태어났다. 처음부터 그런 몸이었다.

“오랜만에 진하 씨가 넥타이 매줄래요?”

“…….”

“여기요. 평소 이 색 잘 골라줬잖아요.”

쇼핑백에서 남색 넥타이를 꺼낸 성재현이 태연하게 그에게 내밀었다. 입술을 깨문 얼굴이 새치름하게 성재현을 노려봤다. 성재현은 고개를 좀 더 가까이 숙여 그를 채근했다.

“이렇게 늑장 부리면 나 지각하겠는데.”

이불을 꽉 움켜쥐고 있던 손끝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강진하가 두 손으로 넥타이를 받아 들었다.

사부작거리며 매듭을 묶는 손끝이 벌벌 떨렸다. 급소를 내어줬음에도 성재현은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진하가 넥타이를 매는 내내 숨을 거듭 고르고 또 골랐다. 눈을 내리깐 채 허둥거리며 매듭을 묶는 손이 조급해 보였다. 이대로 넥타이를 잡아당기면 성재현을 제압하는 건 능사였다. 강진하는 망설이듯 손가락으로 매듭 줄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동안 성재현은 느긋하게 강진하의 내리깐 눈꺼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매듭을 마무리 지은 강진하는 비틀거리며 두 손을 내렸다. 잇새로 흩어지는 숨소리가 고단했다. 거울 앞에 선 성재현은 느슨하게 조인 매듭을 고쳐 맨 다음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산뜻하게 몸을 돌린 성재현이 뒤이어 말했다.

“이제 배웅도 해줘야죠.”

“…….”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 인사말이 어떤 의미인지 강진하는 알고 있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신세임을 당부시키는 경고.

강진하는 고개를 옆으로 숙인 채 작게 속삭였다.

“안녕히… 다녀, 오세요.”

눈꼬리가 휘어졌다.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한껏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조식은 아홉 시에 올라올 거예요. 마음에 안 들면 서비스 담당자한테 바로 이야기해줘요. 만약 나갈 거면 영 번 누르고 내 이름 대요. 아, 그래도 열 시 전에는 돌아오고.”

“…….”

“시간. 까먹지 말라고 시계 빌려줄게요.”

손목에 찬 시계를 푼 성재현이 팔목을 잡아끌었다. 황급히 빼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친절하게 시곗줄까지 채웠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목을 타고 전이되었다. 성재현의 체온. 강진하는 그 묘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찰칵, 메탈 시계가 파리한 손목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성재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마주한 눈이 어둑하고 깊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파문처럼 퍼졌다. 차가 도착했다는 신호는 두 남자 전부 알아들을 정도로 간단하고 익숙했다.

문을 열기 전 침대 쪽을 한 번 돌아본 성재현이 말했다.

다녀올게요.

강진하는 어둠 속에서 좁아지는 빛줄기를 바라봤다. 끼익, 묵직한 문이 닫히며 모든 소리와 빛을 압살했다.

그는 한동안 어둠 속에서 홀로 떨었다. 히터 바람이 쏟아지는데도 오한으로 몸이 섬뜩했다.

기회가 있었다. 얼마든지 성재현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강진하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반대 손으로 꽉 쥐었다. 머리로는 몇 번이고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목을 조른 다음 그가 기절한 사이에 달아나는 그럴듯한 계획. 그런데도 도무지, 그의 목을 두 손으로 누르지 못했다.

강진하는 무릎에 놔둔 제 두 손을 힘없이 내려다봤다. 어째서일까. 그리 발악하고 애원해도 성재현한테는 벗어날 수 없었다. 간신히 멀어졌다가도, 결국 제자리였다.

**

조식은 정확하게 그가 알려준 대로 9시에 룸에 올라왔다. 객실 안쪽에 걸린 전자시계를 확인한 강진하는 비로소 날짜를 알 수 있었다. 그를 만난 날로부터 나흘이나 지나있었다.

마음 같아선 조식이고 뭐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강진하는 억지로 식탁에 앉았다. 속이 메스꺼워 몇 입 먹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었다. 스위트룸 투숙객을 서비스하는 직원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마저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터였다. 아니면 굳이 어리고 신입처럼 보이는 직원만 골라 조식 서비스를 보내게 한 성재현이 영악한 것이리라.

시계를 보자 원래라면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강진하는 사흘 동안 연락 두절로 걱정했을 편의점 사장을 떠올렸다. 다행히 입었던 옷은 호텔 측에서 세탁을 마친 뒤였다.

리셉션 데스크에 성재현 이름을 대자 직원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택시는 입구에서 대기 중입니다.”

의외였다. 박균홍이든 정영호든 따라붙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건만 성재현은 신용카드 한 장만 쥐여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제어가 없었다. 이대로 나가도 되는 걸까. 모범택시를 끌고 온 운전기사는 평범한 남자였다.

가산동으로 향하는 내내 강진하는 사장에게 둘러댈 말을 적당히 생각했다. 갑자기 집안 문제로 마산에 내려갔다 왔다는 어설픈 핑계. 그도 아니면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장례식. 강진하는 거짓말이 서툴렀고 고민하는 동안 익숙한 편의점 골목에 도착했다.

종이가 펄럭거린다. 편의점에 덜렁 붙어 있는 [임대]라는 글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매번 일하기 싫다고 능청 떨던 사장이었지만 갑작스러웠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급한 대로 택시 기사한테 핸드폰을 빌려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았다.

그는 곧바로 고시원으로 차를 돌렸다. 다행히 고시원 방은 그대로 입실상태였다.

“거기 오백삼호죠? 어제오늘 전화 왔었어요.”

“어제, 오늘이요?”

고시원 총무가 강진하를 보더니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핸드폰이 없는 대신 급한 전화는 고시원 번호로 올려둬 사장이나 클럽 전화는 대부분 고시원으로 오곤 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전화할 때 그쪽 오면 바로 와달라고 전하던데. 목소리가 좀 다급하더라고요….”

남자가 떨떠름하게 말을 전달했다. 포스트잇에는 클럽 전화번호와 이름 하나가 쓰여있었다. 서희진. 부실장의 이름이었다.

**

저녁에 문을 여는 클럽 뒷문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우중충했다. 평소 강진하만 보면 잡아먹느라 득달같이 투덜거리던 셰프도 눈을 피할 정도였다. 크리스마스 후로는 그만둔다고 분명 말을 전달했었다. 설마 그게 묵살된 걸까. 그래서 실장한테 쓴소리라도 나온 걸까. 그러기엔 강진하는 일개 계약직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화장실에서 나오던 디제이가 강진하를 보더니 위아래로 훑고는 휙, 휘파람을 불었다. 심상찮은 상황에 서둘러 카운터로 향하자 아래층에 음악이 시끄럽게 쿵쾅거리며 울렸다. 그 순간 강진하를 옆에서 누군가가 급히 잡아당겼다.

“진하 씨!”

“부실장님….”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카랑카랑하게 언성을 높였던 희진이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이마를 한 번 짚은 희진이 환기시키듯 손을 크게 휘저었다.

“일단 됐어요. 일단은, 와줘서 고마워요.”

“저, 무슨 일인데요.”

“그게… 진하 씨 우리 사이 괜찮았죠?”

난데없이 친목을 요하는 말에 강진하는 눈썹을 까딱 찌푸렸다. 서희진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응? 나 한 번만 용서해줘요.”

“부실장님.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희진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강진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향한 건 VIP 룸 전용 층이었다. 느낌이 불길했다.

“부실장님. 지금 저 오자마자 여긴 왜….”

그러나 강진하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희진은 어느덧 옆으로 밀려나있었다. 몸을 뒤에서 감싸는 굵은 팔에 강진하는 부들부들 떨었다. 온몸을 제압하는 강한 포옹이었다.

“왔어?”

독한 술 냄새와 야릇한 향수 냄새가 뒤범벅되어 숨 끝을 찔렀다. 입술을 귀밑머리에 가볍게 댄 상대가 히죽 웃으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진하 형.”

묵직하고 낮은 음성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권재림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그날 분명 권재림은 약과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만큼. 그 운전기사가 결국 실토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마른침을 꿀꺽 삼킨 강진하가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일부러 나, 부른 거야?”

“형은 참 매번 날 서운하게 만든다니까.”

“권재림.”

“그래도 어쩌겠어. 착한 내가 기꺼이 용서해줘야지.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져주는 법이거든.”

귓불에 입을 쪽 맞추며 권재림이 킥킥 웃었다. 몸을 비튼 강진하가 품 안을 빠져나가려 하자 혀를 가볍게 찬 권재림이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껴 손을 맞잡았다. 풀어진 입술이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그날, 내가 형인 것도 모르는 줄 알았어? 차 타고 가는 내내 얼마나 기분 엿 같았는지 형은 모르지?”

“나는! 나는… 너랑 엮일 생각 없어. 그러니까 이쯤 해.”

“형 생각은 필요 없어.”

“권재림…!”

쿵, 몸이 문으로 밀려났다. 두 팔로 강진하를 가둔 권재림이 입술을 부딪쳤다. 윗입술을 머금어 빨다가 치열을 혀끝으로 훑었다. 앙다물고 고개를 도리질 쳤지만 턱을 억지로 붙잡은 손은 순순히 놓지 않았다.

“흐읍, 으.”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두꺼운 혀가 밀려들었다. 턱을 꽉 움켜쥔 권재림은 강진하의 입술부터 입속까지 제 영역처럼 마구 헤집었다. 입천장, 볼 안쪽 살을 미끄러지듯 문지르던 혀가 강진하의 혀를 문대고 비볐다. 잘착거리며 혀가 서로 엉켰다. 한쪽은 피하고 다른 한쪽은 절박하게 들러붙느라 삼키지 못한 침이 잇새를 타고 흘렀다.

“씨발.”

“하아, 아흡…!”

가쁜 숨을 한 번 고른 다음 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강진하는 옷깃을 붙잡은 손끝을 떨었다. 급기야 권재림이 입속을 혀로 푹푹 쑤셔댔다. 거칠고 농후한 놀림에 목구멍까지 어릿했다. 팔을 뻗은 강진하가 온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가슴을 때렸다. 단단한 바위 같은 몸이 되레 자극이라도 받은 듯 크게 들썩였다.

손을 뒤로 더듬어 문고리를 당긴 권재림이 끌어안은 그대로 자리를 옮겼다. VIP 룸 중 하나인 빈방은 조명등도 꺼둬 어두컴컴했다. 윤기가 흐르는 가죽 소파에 강진하를 철썩 눕힌 권재림이 헐떡이며 입술을 핥았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문 강진하가 뒤로 물러났다. 손으로 입을 가린 권재림이 키득거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혀에 형 잇자국 남았어.”

“또라이 새끼….”

“또라이 새끼답게 진짜 미친 짓 하는 거 볼래?”

강진하의 머리채를 잡은 권재림이 반문했다. 핏발 선 두 눈이 번뜩였다. 히죽 웃고 있지만 날이 시퍼렇게 내려앉은 얼굴이었다. 눈을 가늘게 찡그린 강진하가 이를 꽉 맞물었다. 맞닿은 몸에 실린 무게가 버거울 정도로 답답했다. 더운 숨을 길게 내쉰 권재림이 말했다.

“솔직히, 그날 나 버리고 도망간 거 생각하면 보자마자 뺨이라도 한 대 갈기려 했는데.”

“으, 윽.”

“얼굴 보니 또 못 때리겠네.”

짙은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졌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한껏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저택을 나서며 흘낏흘낏 돌아보던 어린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강진하는 시선을 피했다. 제풀에 지친 몸이 서서히 느슨하게 풀렸다. 권재림이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래서 형한테 못 이긴다니까.”

“너,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맞아. 나 제정신 아니지. 기분이… 존나 좋거든.”

“권재림….”

“그거 알아? 형이 나 어린 동생 취급하는 게, 존나 짜증 나는데도 좋은 거.”

“…….”

“형이, 약보다 더 독해. 지긋지긋한데도 좋아.”

그래서 미치겠어. 손목을 움켜쥔 권재림이 결박 자국을 손가락으로 벅벅 문질렀다. 그 순간 욱신욱신한 감각에 말문 대신 신음이 터졌다. 호텔에 있을 때는 아픈지도 몰랐는데 그제야 퍼렇게 든 멍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얼룩덜룩한 자국을 본 권재림이 코웃음을 쳤다.

“아주, 난리도 아니네.”

움츠린 몸을 꽉 잡아 편 권재림이 더운 숨을 씨근덕 내쉬었다. 힘이 들어간 손이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 눌렀다.

“아, 아.”

“누구는 씹질 못 하는 줄 아나.”

상스러운 투정을 부리며 입술을 삐죽인 권재림은 강진하의 목덜미에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손을 붙잡아 당긴 권재림이 고간에 대고 손을 비볐다. 정장 바지춤이 두툼했다. 형 때문에 섰어. 책임져. 숨소리가 뜨끈하게 피부에 달라붙는다. 힘으로 단추를 뜯어낸 권재림은 목과 가슴 쪽에 퍼렇게 남은 잇자국에 입을 대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히윽!”

지레 놀란 강진하가 허리를 달싹였다. 찌르르한 통각과 간지러움이 동시에 급습했다. 가는 팔과 다리를 몸으로 저지한 권재림은 흰 목덜미 구석구석을 사탕처럼 빨아댔다. 잇자국을 덮듯이 붉은 멍이 새로 맺혔다. 쪽쪽 빨아대느라 옆구리가 허전해졌다. 힘껏 밀어낸 강진하가 주먹으로 권재림을 세게 때렸다. 뺨을 손으로 감싼 그가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난 안 때렸는데 너무하다.”

“너무해? 지금 네가 하는 짓을 보고도?”

주먹을 꽉 쥔 강진하가 부들부들 떨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터진 입술을 닦아낸 권재림이 뿌득 목을 좌우로 까딱였다.

“그러는 형은 왜 나한테만 비싸게 구는데.”

주머니에서 그가 무언가를 꺼내 탁자로 내던졌다. 찌그러진 흰색 USB에 쓰인 로고가 낯익었다. 세한. 그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황명수. 얼떨떨한 얼굴로 권재림을 바라본 강진하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너, 이거 설마….”

“내용물 지웠어. 나오는 얼굴 중에 형 말곤 다 좆같아서 꼴도 보기 싫더라.”

그 말에 강진하는 확신했다. 섹스 동영상. 그걸 권재림이 본 것이다. 어떻게 손에 들어간 건진 몰라도, 그 끔찍하고 역겨운 모습을 본 것이다. 발끝이 시렸다. 몸이 붕 뜬 것처럼 너울거린다. 황명수, 어머니, 아버지. 올가미 같은 얼굴이 눈앞을 스칠 때마다 오한으로 구역질이 일었다.

저벅저벅. 한 발, 두 발,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권재림이 시야를 장악했다. 허리를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춘 권재림이 입술을 우그러트렸다.

“그 좆같은 놈한테도 다리 벌리고 오빠 소리 하면서, 나한테는 왜 싸구려같이 안 굴어줘?”

“나는, 난 그러려고 한 게…….”

“괜찮아. 형.”

눈물이 뚝뚝 흐르는 눈시울을 핥은 권재림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형이 여기저기 몸 팔고 다닌 걸레라 해도 좋으니까.”

“…….”

“그런데, 형을 걸레처럼 쓴 건 내가 용서가 안 되네.”

몸을 튼 권재림이 방 안쪽으로 향했다. 잠겨있던 문고리를 해제한 그가 활짝 연 청소 도구실에는 인영 하나가 널브러져있었다. 훅 끼치는 피 냄새에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늘어진 남자의 멱살을 잡아든 권재림이 탁자로 내동댕이쳤다. 와장창! 재떨이가 밀려나며 거추장스러운 소음을 냈다.

코뼈가 주저앉고 눈은 퉁퉁 부어올랐다. 이가 빠졌는지 피거품이 입술에 질질 흘러내렸다. 지린내까지 나는 꼴이 걸레짝이었지만 강진하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몇 벌씩이나 소장하던 아르마니 정장, 구두, 향수. 죄다 눈과 코에 익숙했다. 황명수였다.

“자, 자모, 잘못했, 어요. 형님.”

잠시 늘어져 있던 황명수가 웅크려 두 손 모아 빌었다. 권재림은 구둣발로 그를 툭툭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씨발, 누구더러 형님이야. 나보다 이십 년은 늙은 게.”

“으, 으흑. 죄, 제, 재송합니다. 죄숭해, 요.”

황명수는 꺽꺽 울며 연신 같은 말만 반복했다. 듣다못한 권재림이 짜증 난다는 듯 턱을 세게 발길질했다. 쿨럭, 피 섞인 침이 카펫을 적셨다. 깨진 이빨 조각이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아, 얼굴 보니 또 좆같은 모습 생각나네.”

“아, 아, 잘못, 잘못했습니다. 사장님, 도련님, 도, 도련님…!”

두 손 모아 싹싹 빌던 황명수가 우스꽝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부산 내 대형조직은 물론 오사카 야쿠자랑도 연줄이 있어 경찰도 눈감아 주던 유지(有志) 같은 남자였다. 서울에도 적잖은 인맥이 있다며 매번 강진하를 협박해대곤 했다. 어디를 도망가든 소용없으니 얌전히 제 말대로만 하면 된다던 그 음침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더 비굴하고 구질구질해진 몰골은 측은지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측은하다는 게 우스웠다. 지난 5년간 사사건건 괴롭히던 남자의 추한 말로였다. 그런데 하나도 통쾌하지 않았다. 기묘한 두려움이 들었다.

“형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닌데, 타이밍이 좋네.”

“어떻게 된 거야….”

“공항에서 몰래 들어오던 거 잡아왔어. 요즘 브로커는 일을 참 잘해서 좋더라. 필리핀에 있어서 하마터면 찾지 못할뻔했는데.”

“…필리핀?”

필리핀에 있었다니. 그럼 별장에서 만났던 그날 이후로 죽 필리핀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그날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던 걸까. 그래서 여태 소식 없이 조용했던 거고? 그런데도 다시 국내에 들어온 건 분명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필리핀이라. 황명수는 일본 오사카 쪽에 연고가 있어서 가끔 검찰 감시가 삼엄해지면 일본에서 몇 달을 보내곤 했었다. 필리핀이란 단어는 그의 행선지와 동떨어진 곳이었다.

불안감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권재림이 어깨를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 새끼 잡아다 족치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좀 들었거든. 마침 형 왔으니까 리플레이 할까?”

“으흑, 흑.”

“처음부터 상세하게 다시 말해. 병으로 대가리 깨버리기 전에.”

“그, 그렇지만….”

“나한테 죽을래, 아니면 차라리 내가 뒤를 봐줄까. 어느 쪽이 좋을지 알면서 그래?”

방 안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황명수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만 한동안 울렸다. 소파에 털썩 앉은 권재림이 품에서 꺼낸 대마에 불을 붙였다. 훅 불어낸 매캐하고 퀴퀴한 연기가 황명수에게 쏟아졌다. 매운 기침을 하며 숨을 고른 황명수가 입을 연 건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는 권재림이 아닌, 강진하에게 눈을 돌렸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던 입술이 간신히 소리를 냈다.

“지, 진하야, 아니, 진하 씨… 죄송합니다. 나, 나는 그런 장사 안 해요! 나도 가오가 있지 언제적 이자놀음으로 사람을 조지겠냐고, 요. 그런데… 그러니까, 저, 전… 님이… 시켜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데요.”

“그게, 나는, 원래 네 어머니 어디 안 가게 감시만 하라고 지시받았었는데… 갑자기 빚 좀 지워줘야겠다고 하면서 다짜고짜 나한테 시키셔서….”

“…누가요.”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어머니, 빚, 듣고 싶지 않았던 단어의 조합. 단순히 어머니의 허술하고 철없는 짓이라 여겼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빚에 허덕이느라, 그저 꿋꿋이 갚아가느라 아무것도 계산할 수 없었다.

“누가 그랬냐고요.”

딱딱하게 내뱉는 말을 들은 황명수가 허옇게 뜬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타다 만 담배꽁초를 내던진 권재림이 턱짓했다.

“그러니까, 그게 저, 전무님께서….”

“전무님…?”

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안개 낀 듯 탁해졌다가 선명해졌다. 둘 사이에서 ‘전무님’이라는 명칭이 나올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세한전자 전무, 성재현.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있었던 남자였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그 모든 일이 성재현한테 비롯되었다고, 황명수는 그렇게 실토하고 있었다. 강진하는 벌레처럼 몸을 옹송그린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황명수가 고통스럽게 신음했지만 강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말해요. 성재현이… 시켰다고? 언제부터…?”

“네, 네가, 아니 진하 씨가 창원 올 때부터… 빠져나갈 틈이 없도록 서류 조작하라고,”

“정확히 언제.”

“오, 오 년 전, 그, 대학교 이 학년쯤에… 요.”

구체적으로 언급된 시기에 강진하는 문득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기울어진 집안 사정 때문에 이래저래 아르바이트를 뛰느라 성적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런 제자를 측은하게 여겼던 담임교수는 강진하에게 괜찮은 조건을 제안했었다.

일본 중견 무역회사 입사 권유. 마침 한국인 직원을 뽑고 있는 데다 회사 측에서도 어학수업비용을 대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빠듯하게 벌어들이는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수입도 좋았고 안정적인 자리. 강진하에게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서슴없이 일본행을 결정했다. 모든 게 다 괜찮으리라 믿었던 스물셋의 봄날, 그 모든 계획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

어머니에게 생긴 억대 빚.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사고를 당해 쓰러진 아버지. 들이닥친 일수꾼과 사채업자. 그중 한 명이 황명수였다.

“빚 액수만큼 곱절로 페이백 해줄 테니까 안 들키게 처신만 잘하라고 하셔서.”

“그럼 처음부터 그 빚도… 없었던 거잖아.”

“일, 일억은 빌려 가긴 했는데… 네 아버지가 금방 갚았으니까. 게다가 네 삼촌인가 뭔가가 니 엄마한테 사기 친 것도 맞고. 나는 중개인 같은 거였다니까? 네 어머니도 솔직히 몰랐을 리 없어. 가, 가서 물어봐!”

“닥쳐요. 나한테, 그 짓거리를 했잖아! 돈 못 갚을 거면 몸이라도 팔라고 한 거, 당신이었잖아!”

“그건 아무래도 적당한 협박거리가 필요할 거 같아서… 나도 그때 정신이 나갔나 봐. 미안해, 내가 미안했어. 응?”

“…미안해? 미안하다고? 내가 한 번만 봐달라고 할 때는 비웃더니, 이제 와서?”

“나도 그 뒤로 반성했다니까, 요… 제가 너무 과했던 거 압니다. 예? 진하 씨, 우리 그래도 오래 알고 지냈잖아요. 응? 이렇게 빌게. 이거 봐, 나 어금니도 다 빠졌어.”

손바닥을 모은 황명수가 싹싹 빌었다. 그 순간 눈앞이 빙글 돌았다. 이를 악문 강진하는 그대로 황명수의 뺨을 주먹으로 쳤다. 탁자로 밀려난 황명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헐떡였다.

처음부터 없던 빚이었다. 그저 타인의 목적을 위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그 정점에 성재현이 있었다. 강진하는 아무것도 몰랐다. 모른 채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매일 악착같이 살았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숨만 쉬어도 돈이 필요했다. 좆같아서, 죽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부 다, 성재현이 시킨 일이라고 했다.

주먹 쥔 손이 벌벌 떨렸다. 몸을 일으킨 권재림이 발로 황명수를 걷어찼다.

“씨발 새끼야. 한 대 갖고 끝날 줄 알아? 넌 오늘 나한테 뒤졌어.”

“악, 도련님, 도련님, 제, 제발…!”

황명수가 비명을 지르며 권재림의 구둣발에 매달렸다. 도련님이라 애걸하는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빌빌거리며 사정하는 그의 처지가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강진하는 입을 틀어막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변기에 머리를 박고 토악질을 했다. 속을 게우고 또 게워도 메스꺼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눈 속까지 얼얼하게 열이 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툭 터졌다.

“흐흑, 흑….”

소매로 닦아도 눈가가 도통 마르질 않았다. 강진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훌쩍였다. 외할머니를 부르는 목소리가 입속에서 맴돌았다. 이렇게 울 때마다 달래주던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어린 손주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울던 그녀의 손이 떠올라서, 강진하는 도무지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던 그에게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강진하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어 상대를 올려다봤다.

“왜 이런 데서 울고 있을까.”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강진하가 뒤로 퍼뜩 물러났다. 손수건을 내민 건 다름 아닌 성재현이었다. 어떻게 나타났는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사람을 붙여놓고 상황을 전달받았겠지. 그러니 허둥대지도 않고 곧바로 화장실 구석에 있던 자신을 찾아낸 것이 아니겠는가.

“얼른 받아요. 손이 무안하잖아.”

그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상냥한 미소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저 남자가 자신을 망가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렁텅이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보면서 즐겼겠지. 늪인 줄도 모르고 아득바득 헤엄치는 게 얼마나 우스웠을까. 이가 빠드득 갈렸다.

“…나가.”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너무 서럽게 우네.”

“나가라고! 당장!”

두 손으로 그를 밀쳐낸 강진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흐트러졌다.

“화가 단단히 났네요.”

화장실 벽면으로 밀려난 성재현은 의아한 듯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의아하다는 저 얼굴조차도 작위적일 터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왜 강진하가 저에게 화를 내는지 어찌 모를까. 처음부터 이 모든 걸 꾸민 장본인이 아니던가.

“아침만 해도 살랑살랑 귀엽게 굴더니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을까.”

“돌변? 지금 그걸 몰라서, 나한테 물어봐요?”

“모르겠는데?”

“…당신은 미쳤어. 미쳤다고.”

“그래? 미친 거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어?”

성재현이 싱글거리며 반문했다. 저 여유로운 태도에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주먹으로 그를 흠씬 두들겨 패고 짓밟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러나 강진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질까. 그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알량한 진실에 무너진 건 강진하뿐이었다. 지긋지긋하게 분노하는 것도 자신뿐이리라. 저 남자는 그 어떤 것에도 흠집 나지 않을 테니까.

강진하는 손목에 찬 시계를 풀었다. 품에 있던 카드도 세면대에 올려뒀다.

“갈 거예요.”

“어디를?”

“어디든 상관없어요. 전무님 없는 데면 돼요.”

“그런 곳이 있어?”

“따라오지 마세요. 따라오면 그땐, 감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정말 찔러버릴 거니까.”

차갑게 내뱉은 강진하가 몸을 돌렸다. 순간 열 오른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지럼증이 몰려왔지만 그는 벽을 짚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고속 터미널로 가서 가장 빠른 버스편을 잡자. 서울만 아니라면, 적어도 그의 손바닥 밖으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화장실을 나서려는 순간 강진하는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문지르던 권재림과 마주쳤다.

“진하 형, 괜찮…!”

말을 잇다 말고 권재림이 눈을 부릅떴다. 강진하를 지나친 그가 성큼성큼 화장실로 들어서더니 곧바로 성재현에게 주먹을 날렸다. 콰당,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고 묵직했다.

“개새끼야. 어디라고 면상을 들이밀러 왔냐? 어?”

“보자마자, 참 과격하네. 사촌지간의 예의라고는 개한테 줬어?”

“빌어먹을 그 아가리 좀 닥쳐!”

주먹을 높이 든 권재림이 다시 한번 내리꽂았다. 빗맞은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발로 권재림을 세게 밀어낸 성재현이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벌써 멍이 푸릇푸릇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거 제대로 한 방 맞았네. 혀를 츳츳 찬 성재현은 아무렇지 않게 세면대로 가서 찬물을 틀었다. 멍이 든 자리를 찬물로 씻어내는 그에게 권재림이 다시 달려들었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엎치락뒤치락 육탄전이 벌어졌다. 권재림은 눈앞에 있는 성재현을 잡아먹을 기세로 주먹을 꽂았다. 성재현 또한 맞고 있기만 하진 않았다. 몸에 올라타 주먹으로 외사촌의 턱과 코를 늘씬하게 두들겨 패는 모습은 폭력에 꽤 익숙해 보였다.

“헉, 씨발, 새끼.”

“하아. 아직도 더, 싸우고 싶어?”

약 기운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권재림이 헐떡거리며 성재현의 넥타이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성재현이 미간을 크게 찌푸리더니 그대로 손을 뿌리쳤다.

“약 때문에 나보다 네가 더 먼저 죽겠는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차가웠다. 늘어진 권재림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히죽거렸다.

“좆이나 까.”

“음, 내 좆은 알아서 필요할 때마다 까고 있으니까 신경 꺼.”

소란이 바깥까지 들렸을 테지만 화장실 주변엔 개미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볍게 턴 성재현은 뚜벅뚜벅 강진하 곁으로 걸어왔다.

“넥타이가 삐뚤어졌어요.”

가까이 다가온 성재현이 아무렇지 않게 턱을 들며 말했다.

“좀 고쳐줄래요?”

“…정말, 왜 이러는 겁니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왜, 왜…?”

“넥타이 좀 다시 고쳐달라는 게 어려워요?”

“절 그렇게까지 몰아세워야만 했어요? 빚쟁이로 만들어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꼴로 만들어야 했냐고!”

언성을 높인 강진하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숨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마를 바짝 붙인 성재현이 손을 거두고 눈물로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자꾸 우네.”

“흐흑, 흡, 흑, 흐윽.”

“열 시가 다 되도록 돌아올 기미가 없어서 데리러 왔는데, 이러면 내가 화를 못 내잖아.”

“개, 씨발, 흐흡, 개자식아….”

“쉿, 그만 울어야지. 이러다 탈진하겠어요.”

성재현이 강진하의 등을 토닥거리며 자상하게 말했다.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눈꺼풀을 가만가만 핥았다. 끔찍하고 잔혹한 상냥함에 강진하는 그의 품을 밀쳐내고자 팔꿈치로 그를 때렸다. 코트로 감싼 몸은 그럴수록 더욱 단단하게 감겼다. 꽃다발처럼 끌어안긴 강진하는 훌쩍거리며 도리질 쳤다.

“놓으라고! 제발!”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몸을 단단하게 휘감은 팔이 억지로 걸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닫힌 문을 열어젖힌 성재현이 문을 나서려는 순간, 그의 옷자락이 반대편으로 휙 끌렸다.

“귀먹었냐? 놓으라잖아.”

오른쪽 눈이 퉁퉁 부은 권재림이 바닥에 피 섞인 침을 퉤 뱉었다. 눈을 한 번 깜빡거린 성재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기서 자려던 거 아니었어?”

“씨발, 형 놓으라고 말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네가 여태 한 짓을 다 까발려줬거든. 형이 가만히 있겠냐?”

“아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성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충격받거나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래? 그래서?”

“뭐?”

“뭐 어디서부터 알려줬어? 내가 강진하 씨 창원 갔을 때부터 사람 붙인 거? 아니면… 일부러 다리 부러트려서 나한테 고용인 붙일 구실 만든 거? 아니면, 뭐? 이수진 씨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부분?”

성재현은 아무렇지 않게 줄줄 앞뒤 사정을 늘어놨다.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건 권재림이었다. 내심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바늘도 안 들어간 듯한 태도가 아닌가.

“너, 지금 비웃냐?”

“재밌지 않니? 난 너무 재밌는데. 네 반응도 너무 재밌고.”

“씨발놈이 진짜….”

“그런데 나만 재밌는 게 아니더라. 이 상황이, 다 내가 만든 것만은 아니거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허, 지금 남 탓이라도 하겠다? 그러면 뭐가 달라져? 왜, 우리 엄마 탓이라도 하려고? 해봐. 우리 여사님이 뭘 얼마나 잘난 짓을 하셨는데? 지껄여보라고, 씨발놈아!”

성재현은 빙긋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동거리는 강진하를 끌어안은 채 유유히 화장실 밖으로 천천히 걸었다. 권재림이 다급히 그를 쫓아 나왔다.

“성재현!”

어깨를 붙잡은 권재림이 그대로 성재현을 구석에 몰아붙였다. 세워뒀던 맥주 박스가 와르르 흔들리며 바닥에 병이 굴러떨어졌다.

“말해. 씨발. 뭘 말하려고 한 건데.”

“피곤하게 굴지 마.”

“말하라고!”

그러자 가만히 있던 성재현이 권재림의 옷깃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방향이 역전된 권재림을 마주 본 성재현이 손등으로 탁탁 뺨을 쓸어내렸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단 한 번도 안 들었어?”

“뭐…?”

“네가 원할 때마다 쥐어지던 약 말이야. 왜 그렇게 쉽게, 네 주변을 맴도는 건지 의심조차 안 했냐고.”

그 말에 권재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약?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이제 와서 같잖은 잔소리라도 늘어놓을 생각이란 말인가. 그가 즐기는 약은 대부분 클럽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각성제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것들. 하지만 왜 성재현의 목소리가 이토록 즐겁고 유쾌하게 들리는 걸까.

“아주 예전에, 고모께서 재밌는 일을 벌이신 적이 있어. 자기 남동생과 작당하고 어떤 여자한테 약을 계속 먹여서 말 못 하는 인형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그런 다음 요양원에다 가둬뒀어. 가끔 필요할 때는 써먹는 거지. 죽일 필요도 없어. 언젠가 알아서 말라죽을 테니까.”

“개소리, 하지 마.”

“사람을 무너트리는 방법치고는 참 재밌더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망가지면 티가 나잖아. 특히 그게, 사랑받고 자란 어느 집 귀한 막둥이라면.”

성재현이 권재림의 어깨에 살짝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닥였다.

“얼마나 망가트려야 내가 편할지 가늠이 안 됐는데, 내가 힘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원하는 대로 해주더라. 그래, 여태 좋다고 들러붙던 애들, 마음에 들었어? 나름 네 취향 생각해서 붙여준 건데.”

“너…….”

“여태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놀아나 줘서 고마워. 그런데.”

네가 아무리 빌어도 강진하는 못 가져.

귀에 목소리가 또박또박 박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권재림을 다 쓴 폐품처럼 밀어낸 성재현이 손을 털었다. “그만 가죠.”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성재현이 강진하의 손목을 잡았다. 숨이 목구멍에서 뜨겁게 끓어올랐다. 네가 아무리 빌어도 강진하는 못 가져, 못 가져, 못 가져. 비웃음이 메아리처럼 머리와 귀를 배회했다. 쿵, 쿵, 심장 박동이 점차 커지며 주변 소음을 집어삼켰다. 질질 끌려가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권재림의 눈에 문득 깨진 병이 보였다. 아까 몸싸움을 하다 깨진 모양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병을 집어 들었다. 뾰족한 날 부분에 엄지손가락이 베여 피가 흘렀다. 권재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쭉 가로질렀다. 점차 걸음이 빨라지며 이내 멀어진 폭이 몇 미터도 안 되게 가까워졌다.

앞서간 두 남자가 막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였다.

와장창! 맥주병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어둑한 지하를 메웠다.

**

“위에 차 대기시켰어요. 피곤하니 슬슬….”

“안 간다고 했잖아요!”

냉랭하게 쏘아붙인 강진하가 붙들린 손목을 홱 뿌리쳤다.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손끝이 허전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성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왜? 왜냐고요? 지금… 그게 저한테…….”

“아침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열 시 전에는 올 테니까 그때까진 돌아오라고요.”

“…….”

“연락도 안 되는 걸 일부러 찾아왔더니.”

뒷말을 이은 성재현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말했다.

“서운해라.”

장난스러운 어투와 달리 조명을 등진 얼굴은 싸늘했다.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건드린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온몸으로 위협하는 듯했다. 가늘게 치뜨고 내려보는 눈, 비틀어진 입꼬리. 곳곳에서 성재현이 속삭이고 있었다.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느냐고.

위층에서 요란한 음악 소리가 적막을 두드렸다.

“서운하세요? 참 다행이네요. 서운함이라도 느끼게 해드려서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인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강진하가 재차 쏘아붙였다.

“전무님께선 그저 장난질 정도셨는지 몰라도 전 그 돈 때문에 몇 년간… 지옥 같았어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고요! 그래도 만회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게… 다 짜고 친 판이었다고요?”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써 울음을 참느라 힘껏 뜬 두 눈이 타는 듯이 따가웠다. 목구멍에 맺힌 응어리가 심장으로 툭, 굴러떨어지는 듯했다. 그간 닥쳤던 모든 절망이 계획이었다. 공들인 울타리였다. 목을 죄고, 숨통을 짓누르는 악랄한 유희를 위한 장치. 언제든 원하는 대로 당기면 기어오도록 만든 덫.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는데요? 왜요? 왜?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악을 쓰느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기어코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 방울방울 맺혔다.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부드럽게 깜빡이는 눈은 그 어떤 동요도 죄의식도 없었다. 잘 빚은 마네킹처럼 고요한 묵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흰 얼굴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강진하는 다시금 깨달았다. 이 진흙탕 같은 관계에서 엉망진창이 된 건 오로지 강진하 저뿐이었다. 성재현은 손해 하나 없었다. 무너질 부분도 없어 그저 오롯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추잡하고 불공평한 관계. 참으로 잔혹하고 이기적인 남자가 아닌가.

이것이 불가항력이라면. 차라리 마음껏 미워하고 싶었다. 저주하고 욕하고, 그를 밀쳐내고 두 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고 싶었다. 몇 번을 다짐했었더라. 제 시간에서 영영 지워버리겠다고. 설령 보게 되더라도 그전처럼 당하진 않겠다고.

그런데 왜일까.

왜 저는 이 순간에도, 성재현이 단 한마디라도 여지를 주길 바라고 있는 건지.

끼익끼익, 은은한 조명이 음악에 맞춰 흔들거렸다. 그 빛무리에 아홉 살 초여름, 마당에서 우연처럼 만난 날이 필름처럼 되감겼다.

미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던 볕 아래. 풀꽃 더미를 사박사박 밟으며 역광을 건너오던 그를 기억한다. 어리숙했던 저는 천사를 만난 것처럼 황홀하게 생각했다. 사근사근하던 손길, 달콤했던 케이크. 어렸던 저는, 그를 동경했었다. 닿을 수 없는 벼랑 위란 걸 알면서도 그의 다정한 호의가 고팠다. 그래서 탐욕스럽게도 친절이 오래도록 저에게만 향하길 바란 적도 있었다. 사춘기가 올수록 무심코 그를 의식했다. 점차 두려워졌다. 언젠가는 질려버릴 그의 냉담함이 가시화될 때마다 현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회성이라는 걸 받아들이고자 스스로 그늘 밖으로 달아났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제자리로 왔다. 처음부터 삼성동에 들어간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알면서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지럽게 혀를 휘어잡는 말을 꿀꺽 삼켰다. 독배를 마신 듯 목구멍이 시큰거렸다. 강진하는 문득 성재현의 등 뒤로 걸어오는 인영을 의식했다. 점차 뚜렷해지는 손에 맥주병을 든 권재림이 살벌한 얼굴로 돌진하고 있었다. 두 눈이 살기로 희번덕거렸다.

“씨발 새끼야!”

맥주병이 날아드는 순간 강진하는 반사적으로 성재현을 밀쳐냈다. 팍! 머리에서부터 둔한 타격음이 울렸다. 휘청거리던 강진하는 그대로 계단에 폭삭 쓰러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권재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진하… 형…?”

암전에 모든 말소리가 먹혔다. 어둑한 조명에서도 피는 붉었다.

**

인근 주민들을 통제하느라 좁은 복도를 지키고 선 경찰들을 지나쳐온 정영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말이 나가지 않도록 손을 쓰느라 새벽 초장부터 그의 핸드폰이 뜨끈뜨끈하게 열 올라있었다.

오후 11시를 막 넘어선 심야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석영그룹 삼남 권재림이 성미를 참지 못하고 휘두른 맥주병에 사람이 맞았다. 때마침 강남 클럽에서 유명 연예인이 주기적으로 갖는 뽕 파티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의도적으로 풀린 이슈 때문에 대부분 기자진들의 초점도 강남으로 쏠렸다.

구급차가 빠져나간 골목은 스산한 웅성거림만 남아돌 뿐이었다. 경찰과 대화하던 박 검사가 멀찍이 서서 슬쩍 눈인사를 했다. 전 검찰총장인 남경욱의 가까운 후배이자 세한의 녹으로 부장 자리에 앉은 남자는 다루기 단순했다. 몇 번 눈도장을 찍은 사이인지라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처리할 터였다.

여러 대 늘어진 경찰차 안에는 권재림이 풀죽은 얼굴로 얌전히 앉아있었다. 석영에도 이미 소식이 들어간 뒤였다. 정영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석영 측에선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영호보다 더 능숙할 테니 시시콜콜한 잡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정영호는 골목으로 몸을 틀었다. 차 안에 있을 줄 알았던 성재현은 세단 보닛에 걸터앉아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낯선 분위기였다. 괜찮으시냐는 물음에 성재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늘 무심하던 눈길에는 오묘한 동요가 섞여 있었다. 한참 숨을 고르던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미끄러져 일어난 단순 사고로 처리될 것 같습니다. 강진하 씨 쪽에는 합의금 지불하는 방향으로 가게끔 조처했고요. 부장들한테 전부 연락 돌렸으니 쓸데없는 기삿거리는….”

“병원 쪽에서, 뭐라고 연락 왔는지 묻는 겁니다.”

“아, 병원이라면… 이제 막 이송되었을 겁니다. 문제 생기면 박 교수가 바로 연락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잇던 정영호는 성재현의 손에 자연스럽게 눈을 뒀다. 길쭉한 손가락 마디에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어있었다. 구급차가 왔을 때 다친 곳은 없다고 했었으니 그의 피는 아닐 테고. 그제야 정영호는 당시 지하로 내려갔을 때 목격한 광경을 떠올렸다. 멱살을 붙잡고 바락바락 고함치던 권재림의 붉어진 얼굴. 단추가 뜯어진 셔츠를 갈무리하지도 않은 채 성재현은 강진하를 부축하고 있었다.

올라오느라 흐트러진 숨을 내뱉은 그는 긴급한 어조로 “구급차”라는 단어만 겨우 내뱉었다. 그 뒤로는 줄곧 방관자처럼 이 모든 시끌벅적한 풍경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혹은 혼백이 빠진 사람처럼 넋을 놓은 듯했다.

불현듯 성재현이 몸을 일으켰다. 경사와 가벼운 담소를 나누던 박정기 검사가 놀란 얼굴로 몸가짐을 정돈했다.

“전무님. 아직 안 들어가셨습니까? 놀라셨을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시지요.”

“박 부장님. 부탁 하나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예? 물론입니다. 하하,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려야죠.”

“그럼 오늘 일, 기소로 넘기세요.”

그 말에 박정기가 눈을 깜빡거렸다.

“…예? 기소라니요? 지금 기소라고 하셨습니까? 권재림… 부관장님을요? 단순 사고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요?”

“살인미수, 폭행치사 미수 등, 되는 대로 죄목 추가해서 잡아넣으세요.”

“예? 자, 잠시만…….”

“그리고 합의 볼 생각 결코 없다고 변호인 측에 전달 넣어주고요. 진술서 필요할 테니 연락주세요.”

“…….”

“그럼 수고해요.”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벌린 박정기의 어깨를 두드린 성재현은 경찰차 쪽을 바라봤다. 권재림이 차 안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단순 사고라지만 일단은 진술 조서를 위해 동승을 권유할 것이리라. 곧 수갑까지 차게 될 어린 사촌에게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권재림이 싸늘하게 노려봤다.

“씨발, 너 때문에… 형이… 진하 형이 너 때문에!”

쾅! 창문을 내리치는 바람에 차체가 흔들거렸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아니라, 네가 한 짓 때문이야.”

“닥쳐! 씨발, 닥치라고!”

창문을 내리누르듯 짚은 성재현이 입꼬리를 살풋 올렸다. 측은한 어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닥쳐. 지금 생각 같아선… 널 외국에 송치 보내서 영원히 한국 땅 못 밟게 하고 싶으니까.”

“너…….”

“그러니 입이라도 다물렴. 재림아.”

수틀려서 네 목부터 잘라내기 전에. 우리에 갇힌 난폭한 야생짐승을 보는 듯한 경멸스러운 시선에 권재림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성재현은 두 말도 더 않고 몸을 휙 돌렸다.

차에 올라탄 성재현은 피곤한 몸을 시트에 가누고서 눈을 감았다. 기사가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돌렸다. 새벽 1시 하고도 20분. 시간이 꽤 지체된 뒤였다. 어둠 속에서 장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돌아서서 걷던 저를 붙잡아 당기던 손, 그리고 깨진 유리병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아 안았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소매를 적시는 것도 몰랐다. 그저 무심코 안은 몸이었다. 사라질 것처럼 가볍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꽉 안았다. 왜일까. 숨이 붙은 걸 눈으로 봤는데도 왜, 그 순간 강진하가 제 손을 영영 벗어날 것만 같았는지. 그것이 왜 그렇게 두려운 것처럼 몸이 떨렸는지도.

오래전, 어머니라는 파편 하나를 떠나보낸 이후로 성재현은 온전히 혼자였다. 남은 건 약해진 채 버림받거나 아니면 강자가 되어 모든 걸 거머쥐는 것뿐이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모든 권위를 독식하려면 악독해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성윤명이 원하는 것보다도 한 발자국 앞섰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은 온전히 제 몫이어야만 했다. 그게 설령 피붙이라 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낮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두려울 필요도 없었다. 온실에 뿌리를 박았다. 뿌리는 점점 뻗어 나가 마침내 온실 전체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모든 게 제 것이었다.

어린 눈망울을 기억한다. 볕 아래, 밟으면 연약하게 으스러지던 토끼풀 무더기 속에 아홉 살의 강진하가 있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처음부터 제 것이 당연한 존재. 그러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응당 제 곁에 있어 마땅한 것을 원점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울음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면서도 성재현은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다. 모든 게 순리 같은 것이었으므로 감정이 혼탁해질 이유도 없었다.

처음부터 온전히 나만이 가졌던 것. 그렇기에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에 얼룩처럼 스몄다. 성재현은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끌어안은 몸이 바짝 제게 붙는 순간 느껴지던 심장의 고동이 귓가를 맴돈다. 손끝이 떨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 주차장이었다. 성재현은 제 입으로 “세한병원 응급실”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썩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은 기사가 뒷좌석에 앉은 성재현의 눈치를 살폈다. 한숨이 나왔지만 그에게 화를 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갑자기 행선지를 변경해 미안하다는 형식적인 사과 후 그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복잡한 응급실 안에서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강진하는 일인용 특실 침상에 누워있었다. 보호자 신분으로 동행했던 박홍균 차장이 성재현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났다. 머리에 열창으로 몇 바늘 꿰맸으며, 다행히 더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지만 블라블라. 다행히 병원 측에서 성재현 이름을 듣고 남은 특실을 내주었다는 사설까지 곁들인 구체적인 진료 결과를 다 듣고 나서야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있을 테니 가보세요.”

“하지만 전무님….”

만류하려던 박홍균이 서늘한 눈빛에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자리를 물러났다. 쉬익, 가습기 소리가 창백한 응급실 침상 위를 맴돌았다. 그는 플라스틱 스툴에 앉아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정제를 맞고 잠든 그는 평온해 보였다. 그 평온하고 나른한 얼굴에 도리어 머릿속이 들끓었다. 시트에 내려둔 손끝을 꽉 쥐었다. 분노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아둔한 감정이었다. 화가 난다고? 대체 왜 화가 난단 말인가. 강진하가 스스로 몸을 내던져 벌어진 사고였다. 그런데도 화가 났다. 속이 뒤집힐 정도로 분노로 치가 떨려 견딜 수 없었다. 복잡하게 헝클어진 머릿속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비명을 질렀더라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며 울기라도 했더라면. 마치 그 순간에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강진하는 덤덤하지 않았던가.

그가 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자진했다. 영정 사진 속 어머니는 고단함이라곤 없는 것처럼 화려하게 웃고 있었다. 왜 죽은 어머니가 떠오른 건지. 그런 식으로 제게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구질구질하다는 것처럼 떨쳐내듯이. 자신이 사랑한 것들은 그렇게 저를 증오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닿지 못하는 곳으로 가려고만 했다. 심지어, 강진하조차도.

성재현은 잠든 그의 목 위에 손을 올렸다. 가느다란 흰 목 중간에 손바닥을 얹자 규칙적인 숨소리가 느껴졌다.

이대로 목을 조르고 싶다. 그래서 눈을 뜨게 하고 싶다. 조르는 손을 붙잡고 헐떡거리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웃으리라. 너는 결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다고. 그러니 부디 애걸해봐. 내게, 목숨을, 간청해. 전무님,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렇게 비는 거야.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눈물을 흘리며 매달릴 그를 상상하며 성재현은 그의 목줄기를 천천히 눌렀다.

“흐윽…!”

눈을 질끈 감은 강진하가 눈을 부릅떴다. 끅, 끅, 숨 막히는 소리를 내는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성재현은 힘껏 그의 숨을 짓눌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크게 뜬 그를 보며 성재현은 황홀감에 도취했다.

“괴로워요?”

“으윽, 읍…!”

“날 놀라게 한 벌이에요.”

달달 흔들어대는 두 다리에 침상이 드드드 미끄러졌다. 고통에 발긋하게 익은 눈가가 축축했다. 입술이 절로 희열에 비틀렸다. 이거 봐. 진하야. 내가 네 모든 걸 쥐고 있어. 이래도 네가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결코 날 못 벗어나. 아무리 바라고 원해도 너는 날 벗어날 도리가 없어. 그러니 애원해. 원해봐. 나 아니면 널 구제해줄 사람은 결코 없어. 조롱하며 그의 젖은 뺨을 핥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강진하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애걸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체념한 것처럼 축 늘어진 손끝이 시트 아래에 늘어졌다. 그 어떤 손길도 필요 없다는 것처럼 처연한 얼굴이 말했다.

“전무님… 뜻대로, 하세요. 늘 그러셨…으니까.”

그 말에 머릿속에 전기가 오르듯 찌릿했다. 그 어떤 기대도 상실했다는 듯 덤덤한 눈동자에 껌뻑 복도의 불빛만 스칠 뿐이었다. 강진하는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성재현은 정전기에 밀려난 듯이 손을 거뒀다. 그는 무지한 사람처럼 모든 단어를 잃은 채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왜…?”

왜 내게 살려달라고 하지 않아? 그는 아둔하게 서서 몸가짐을 정돈하는 강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태도에 손이 벌벌 떨렸다. 시선조차 두지 않는 정갈한 무표정에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링거줄이 엉켰다. 성재현은 그의 목을 두 손으로 재차 눌렀다. 도리질 치는 턱을 붙잡자 아래에 깔린 몸이 펄쩍 몸부림쳤다. 형형한 눈으로 성재현이 난폭하게 쏘아붙였다.

“내 뜻이 뭔지는 알고?”

“웁, 으읍….”

“뜻대로 하라고? 내가 여기서 강진하 씨 목 졸라 죽여도 괜찮다는 건가?”

기어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를 붙잡고서 성재현은 씨근덕 숨을 내뱉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돈할 틈도 없었다.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집어삼키듯 깨물었다.

눈앞으로 선득하게 다가온 성재현은 마른 입술을 집어삼키듯 깨물었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강진하를 힘껏 누른 채 성재현은 혀끝으로 입술 안쪽을 거칠게 훑었다. 벌어진 사이를 놓치지 않고 침범한 혀가 질컥거리며 안쪽 살을 농염하게 문질렀다. 호흡 한 올마저 빨아먹으려는 듯 숨 가쁜 입맞춤이었다. 혀끝에 혀를 대고 물장구치듯 게걸스럽게 섞었다. 춥, 츠웁, 첩. 끈적끈적한 물소리가 입과 입을 타고 전이되었다. 얼굴이 빨개진 강진하가 차오른 숨을 헐떡거렸다.

“하아, 하으, 아.”

“입 벌리고, 혀 내밀어봐요.”

왼손으로 목줄기를 쓰다듬으며 성재현이 부드럽게 명령했다. 벌어진 입술을 타고 혀가 푹푹 목구멍까지 쑤셔댔다. 그는 강진하의 입 안을 마음껏 탐닉했다. 부드러운 볼 안쪽 살은 온기를 듬뿍 머금었고 촉촉한 목구멍은 훑을 때마다 꿈틀거렸다.

“흡, 그흐, 만!”

세차게 도리질 친 강진하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를 노려봤다. 끔찍하게 증오하는 한편, 울음이 일렁거리는 축축한 눈동자가 갸륵할 지경이었다. 성재현은 혀끝으로 입가를 가볍게 핥았다. 식사를 기다리는 뱀처럼 고요한 눈길로 강진하를 내리훑으며 그가 비웃었다.

“왜? 아까 내 뜻대로 하라면서?”

“흐웁.”

입술 사이로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은 그는 턱을 억지로 벌린 다음 마음대로 휘저어댔다. 질컥질컥 젖은 소리가 교접으로 흘레붙은 아랫도리처럼 음탕했다. 이대로 목구멍까지 쑤시면 얼굴이 꽤 볼만할 터였다. 성재현은 그가 고통스럽게 느낄 때마다 짓는 표정이 좋았다. 눈썹은 팔자로 휘어지고, 눈시울은 축축하게 젖어 괴로워하면서도 천박함을 견디지 못해 연해지는 동공까지. 고개를 뒤로 빼려는 강진하를 저지하며 그는 기대 어린 미소를 지었다. 반발심에 붉어진 눈시울과 다르게 입속 살은 온순하고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돌린 강진하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숨소리마저 야살스러워 성재현은 턱을 붙잡고 숨을 빨아 마셨다. 꿀꺽, 그의 온도를 머금은 숨결을 삼키자 달콤했다. 사람의 숨 따위가 달콤하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감상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달고, 따뜻했다. 아삭아삭 씹어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창백한 조도 아래 흐트러진 얼굴을 즐겁게 감상했다. 독 오른 눈망울과 달리 제 입술과 손짓과 온도에 반응해 달아오른 얼굴이 발칙했다. 그리고 좆같을 정도로 야하고 예뻤다. 환자복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성재현이 단숨에 투둑 단추를 뜯어냈다.

“어떻게 해줄까? 아래가 찢어질 때까지 박아줄까요?”

“아! 앗…!”

“아니면, 여기 뒤통수 구멍에다 박아볼까. 이쪽도 아래만큼이나 잘 조이는지 궁금한데.”

“아악!”

머리채를 잡은 성재현이 시선을 맞댄 채 빙글빙글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좆을 꺼내 머리통에다 비비고 싶을 지경이었다. 움켜쥔 손바닥이 저릿할 정도로 황홀한 상상에 그는 만족스럽게 탄식했다. 머리채를 잡아 베개에 꽉 눌렀다. 몸부림치며 강진하가 성재현에게서 벗어나려 바동거렸다. 콰당, 거치대가 아래로 쓰러졌다.

“어디, 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아.”

“놔, 놓으라고, 아, 아파. 윽, 흐윽.”

“착하지. 이리 와.”

간이 침대로 떨어진 강진하가 엉금엉금 기었다. 그러나 결국 발목이 붙들렸다. 기진맥진한 몸은 손쉽게 성재현 아래로 쓱 끌려 들어왔다. 무방비한 틈을 가리고자 강진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성재현은 두 팔을 잡아 뽑을 듯이 위로 젖혔다.

“흐윽, 흑.”

강진하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가슴팍에 올라탄 성재현은 제 아래에 흐트러진 강진하를 내려다봤다. 땀과 눈물로 축축해진 얼굴은 희었고, 멍든 뺨과 입술이 붉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하늘하늘 흩어져 그 위를 어지럽혔다. 외설적이고 난잡스러운 모습이었다. 더운 숨을 새근새근 몰아쉰다. 숨소리가 교차할 때마다 아래가 들쩍지근하게 끓는 감각이 들었다.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거듭 핥는다. 더욱더 강진하를 망가트리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제 품에서 엉망진창으로 부수고 울리고 싶다. 그리하여 제 손안에서만 노닐게 하고 싶었다. 설령 완전히 홀려버린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자꾸만 황량하던 눈동자가 맴돌았다. 둔탁한 소음을 가리던 창백한 얼굴. 어디론가 달아나려는 듯 손 너머로 멀어지던 온기. 두 팔을 움켜쥔 손이 문득 발발 떨렸다. 아직도 품에 안아 들었던 무게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듯했다. 성재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오로지 제 주변뿐이어야만 했다. 이곳이 아니면 피어나지 못하도록.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이거 놓… 아흑!”

손자국이 남은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 댄 성재현은 만찬을 맛보듯 깨물었다. 신음을 참느라 목덜미가 바르르 떨렸다. 귀 아래 목선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위에 혀를 대고 빨아먹고 또 빨아먹었다. 쪼옥, 쪽. 알싸한 소독약에 가려졌던 살냄새가 비로소 코끝에 느껴졌다. 달았다. 달다 못해 이대로 그를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달고 감미로운 냄새였다. 성재현은 자꾸만 그를 핥고, 만지고 싶어졌다. 그러면 이 말도 안 되는 허덕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낯선 더위에 헐떡이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성재현은 전신으로 그를 누르고 탐욕스럽게 핥아댔다. 바깥에 새어든 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서로 겹쳐졌다. 시트가 구겨지고 철제 침대가 끼익끼익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그, 흐… 그만, 이거, 놓으… 하지 마!”

바닥에 눌렸던 손목을 힘껏 비틀어 빼낸 강진하가 발버둥 쳤다. 그러나 간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성재현은 아량을 베풀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누르던 힘을 조금 풀었다.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본 채 나란히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기어코 상처가 벌어졌는지 베갯잇에 핏방울이 듬성듬성 맺혀있었다. 한바탕 막혔던 숨을 진정시킨 강진하는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눈에 맺혔던 물기가 귀밑머리에 방울방울 맺혔다. 바들거리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제게 대체… 뭘 바라세요. 이미 다 빼앗아가 놓고….”

“뭘 바라냐고?”

“제가 그렇게 미우시면, 차라리 아버지 대신 절 죽이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건데.”

“…….”

“아니면, 저를….”

눈을 한 번 깜빡거린 강진하가 힘없이 내뱉었다.

“절 사랑하기라도 하세요?”

고요함의 빛깔은 어둡고 짙었다. 긴 침묵이었다. 사랑한다. 지극히도 낯설고 벼린 문장이었다. 사랑이라니. 먼저 말을 머금은 강진하조차 스스로 자조했다. 그럼에도 묻고 싶었다. 난폭한 집요함의 이유를, 이기적이고도 갈급한 구속에 대해서 물어야만 했다.

눈앞을 독식한 성재현은 활짝 웃고 있었다. 코끝을 맞댄 성재현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랑하냐고요? 내가? 너를?”

“…네.”

“그러면 달라지나?”

“…….”

“사랑이면, 달라지기라도 해?”

“네.”

못 박듯이 대답한 강진하가 말을 이었다.

“미움도 아니라면 차라리 사랑이길 바랐어요. 절망하고, 후회하고, 애타고, 스스로를 원망해도 소용없도록.”

“아하하, 하하! 하하하!”

그 말에 성재현은 크게 웃었다. 웃음을 견딜 수 없었다. 절망, 후회, 원망.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단어의 모음인가. 사랑이란 단어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표독스러운 저주 같은 말이었다. 흠뻑 젖은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더듬던 성재현이 어깨를 확 잡아당겨 그의 귀에 입 맞췄다. 쉬잇, 열 오른 입김에 말소리가 실렸다.

“그게 바람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겠네요.”

“아윽…!”

턱을 붙잡고 온몸을 바닥으로 세게 누른다. 목을 조르는 것처럼 강한 압박감이었다. 마주 보던 시선이 어느덧 일방향으로 쏠렸다. 오롯이 성재현만이 강진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성재현이 속삭였다.

“사랑해달라고 애원해봐요.”

“…….”

“그러면 되는 거잖아. 절망하고 후회하고, 애타고, 원망하도록.”

내게 사랑해달라고 해. 어서. 씩 웃은 성재현이 재차 독촉했다. 강진하는 제 뺨을 쓸어내리는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사랑해달라고, 어디 한 번 애원해보라며 보란 듯이 웃는다. 조롱이 분명한데도 도리어 간청하는 것처럼 들렸다. 부디 나를 사랑해줘. 비아냥거리느라 비틀어진 입술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애정에 굶주리고 쓸쓸함에 사무친 저를 꺼내 달라는 듯 간절했다.

성재현을 증오한다. 제 인생을 한낱 장난감처럼 여긴 그의 가식과 오만, 그리고 이기심을 증오한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어느 순간에는 익숙함으로 물들어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지쳤다. 강진하는 제 분수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어머니는 헛된 욕심을 부렸다. 외할머니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 선에서 끊고 싶었다. 엉망으로 엮이고 꼬인 관계의 결말은 비극뿐일 터였다. 그러니 버려지기 전에 그를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나른한 목소리가 귀 끝을 헤집는 건지.

그 여름, 찬란했던 볕 아래에서 처음 만난 순간, 그는 어른스럽되 고독한 소년이었다. 온실 속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화초처럼 음울한 미소가 선연하다. 이제 그는 어른이 되었고 모든 걸 다 거머쥐었다. 완벽하게 독식했다. 그럼에도 외로움에 지쳐 쓸쓸하고 바랜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외로움을 잊은 적이 없다는 듯이.

숨소리가 서로를 확인하듯 오갔다. 목을 조르는 손힘이 이따금 강진하를 쓰다듬듯 약하게 풀렸다가 다시 죄길 반복했다.

문밖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무님. 박 차장입니다.” 문을 연 박균홍은 병실 안을 들여다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늑함은 온데간데없이 아수라장이었다. 박균홍이 서둘러 강진하를 부축해 제자리에 눕혔다. 침상에 기대선 성재현은 태연하게 단추를 고쳐 꿰며 말했다.

“새벽에 미안하지만 상처가 터진 걸지도 모르니 전담의 좀 불러주세요.”

“전무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피곤한 것 빼곤 아주 멀쩡합니다.”

호출을 받은 간호사와 당직의가 부랴부랴 병실로 들어섰다. 다행히 꿰맨 자리가 크게 터진 건 아니었다. 모든 상태를 확인한 성재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병실을 나서려 했다.

“전무님.”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강진하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들어보고 생각하죠.”

“아까… 저희 어머니 계신 곳을 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어머니랑 만나게 해주세요.”

그 말에 성재현은 짐짓 말을 고르는 것처럼 손끝으로 문고리를 두드렸다. 탐탁진 않은 부탁인 듯했다. 강진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뒷말을 이었다.

“만나게 해주시면, 삼성동으로 얌전히 돌아가겠습니다. 더는 전무님 심기 거스를 일도 없을 겁니다.”

“내가 그 제안을 굳이 받아줘야 할 이유가 있어요?”

“제발….”

일전에 없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던 성재현은 그대로 문을 닫았다.

**

서울을 빠져나온 지 벌써 1시간이 넘게 흘렀다. 차는 점차 좁은 길로 향하고 있었다.

강진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고속도로에서 국도, 이제는 울퉁불퉁한 외곽 길로 들어섰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흔적이 드문 한산한 길 주변에는 나무만 울창하게 군집해있었다.

무릎에 올려둔 손끝을 몇 번이고 주물렀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부탁을 무턱대고 꺼내긴 했지만 사실 강진하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이 길 끝에 정녕 어머니가 있는지, 아니면 또다시 별장에 끌려간 것처럼 끌려가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강진하는 힐끔 곁눈질로 성재현을 살폈다. 그는 전화로 업무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허벅지에는 조간신문이 곱게 접힌 채 놓여있었다. 사실 오전만 하더라도 강진하는 어머니에 대한 부탁을 거절하리라고 단념했었다. 퇴원 수속을 밟고 나오는 길목에 익숙한 세단이 서 있었다. 데리러 마중 나온 차 안에는 성재현이 먼저 앉아있었다. 그리고 차는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성재현은 사랑하길 바라냐고 말했다.

사랑하길 바랐냐고. 그랬다. 강진하는 차라리 이 모든 게 사랑이었길 바랐다. 적어도 놀이로 끝나지 않을 거라면 자신에게도 그를 절망할 기회가 오길 바랐다.

사랑해달라고 애원해보라던 목소리. 마치 강진하 저 자신이 사랑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절박한 호소 같았다.

“의사 말론 바로 차를 타기엔 좀 현기증이 있을 거라던데.”

어느 틈에 성재현이 전화를 끊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강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어지럽긴 한데 바람 쐬면 괜찮습니다.”

“굳이 봐야겠어요? 어머니랑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아는데.”

“사이가 좋든 나쁘든, 연락 두절된 분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죠.”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에 강진하는 잠시, 그가 어떻게 그 부분을 알았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가벼운 두통에 어지럽던 생각이 증발되었다.

마지막으로 스쳐 간 고가도로 표지판에는 평택, 시흥이 적혀있었다. 남쪽으로 향한다는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굽이굽이 산을 파헤치듯 들어선 차가 이윽고 마지막 비탈길을 올랐다. 강진하는 정문에 쓰인 한자를 눈으로 읽었다.

[은혜요양병원恩惠療養病院]

“병원…?”

자갈밭을 드륵드륵 지나쳐온 차가 이윽고 멈췄다. 병원 앞에 조성된 작은 정원에는 나이 든 노인들이 느릿느릿 볕을 받으며 산책 중이었다. 어머니가 이곳에 있단 건가. 병원이었다면 진즉 보호자 관련으로 연락이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치료를 받은 전적도 있으니 병원에 있다 해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곳을 수소문해봐도 어머니의 행적은 묘연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감춰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느덧 전화를 마친 성재현이 차에서 내렸다. 미리 연락을 들었는지 원장이란 명찰을 단 남자가 현관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는 극진한 귀빈을 맞기라도 하듯 차근차근 병원 안내를 했다. 세한에서 기부금도 냈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도 간단하게 나왔다. 강진하는 원장을 따라 안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걱정한 것과 달리 특별히 이상한 구석은 없는 병원이었으나 마음 한구석이 석연찮았다. 어머니의 안위 이전에 왜 하필 소식도 없이 병원에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급한 별고였던가.

원장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별동으로 분리된 특실 층이었다. [환자: 이수진]이라 쓰인 일인용 병실 안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연한 회색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항상 초조하게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창살로 들어오는 볕을 받는 얼굴은 졸린 고양이처럼 나른했다. 그렇게 사람 고생을 시킨 것치곤 그녀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할 말이 아주 많았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연락 두절되었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어디가 크게 아파서 여기까지 들어온 건지, 그리고 죽은 아버지에 대해서. 이수진 앞으로 다가간 강진하가 짜증과 안도가 섞인 어투로 말했다.

“병원에 들어왔으면 들어왔다고 연락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요. 아파서 연락 한 통 못 할 정도였어요? 나는 엄마가 죽은 줄 알고….”

“…누구세요?”

“네?”

“우리… 진아 못 봤어요?”

낯선 이름에 강진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수진은 강진하 뒤에 서 있던 성재현을 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오늘 전무님 오시는지도 몰라서 청소도 안 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성재현은 익숙하게 그녀를 의자에 앉히며 안부를 물었다. 세심한 손길에 이수진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손사래 쳤다.

“호호, 전무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에 좋아진 거 같아요. 매번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괜찮아 보이시니 저도 안심이 되네요.”

“참, 부사장님께선 잘 지내고 계세요? 요즘 통 못 봬서…. 그나저나 이분은 누구세요? 새로 들인 비서?”

“엄마…?”

“예? 나 그렇게 아줌마로 보여요? 음, 화장을 못 해서 그런가. 그래도 아줌마라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데요?”

실실 웃는 얼굴에선 장난기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엉뚱한 대답이 돌아오자 강진하는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두 손을 꽉 붙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설마 또 몰래 술 마셨어요? 나 화날까 봐 지금 둘러대는 거예요?”

“네? 그쪽이야말로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술이라니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수진 앞으로 원장이 끼어들었다. 간호사 두 사람에게 붙들려 병실 바깥으로 끌려 나온 강진하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 앞을 가로막고 선 원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환자분 뇌가 상당히 손상돼서 회복 불가입니다. 그렇게 몰아붙이시면 오히려 발작만 오세요.”

“뇌… 손상이라고요?”

“설명 못 들으셨습니까? 이수진 환자분은 퇴행성 치매입니다. 거기다 역행성 기억상실 증상도 보이고 있어요. 현재 기억은 전무하고 자신이 스물일곱인 줄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마저도 특정 시기만 기억해요.”

“스물일곱, 이라고….”

“들어올 때 약물 및 알코올 의존 증상이 있던 걸로 봐서 최근에 술과 약물 영향을 받은 걸로 추정되고요. 이 정도로 병증이 빠르게 진행된 경우에는 손쓸 만한 방도가 더는 없어요. 악화되지 않도록 최대한 안정시키는 게 최선이에요.”

“잠시만요, 그럼 보호자는 누가…!”

그사이에 병실 안에서는 성재현이 정영호에게서 받아온 꽃다발을 이수진에게 내밀고 있었다. 흰색과 붉은색이 고르게 섞인 장미 꽃다발을 받아 든 이수진은 활짝 웃으며 꽃다발에 코를 묻었다.

“아, 냄새 너무 좋네요. 난 장미가 좋더라. 그러고 보니 요즘 정원에 장미 많이 피었죠?”

“네, 많이 피었습니다.”

“그렇죠? 여름에 장미가 가득 펴서 정원이 정말 예쁘거든요. 그나저나, 전무님은 정말 윤명 씨랑 많이 닮으셨네요. 처음엔 쌍둥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다들 그런 말씀 안 하셔요?”

“하하.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 거 같더라. 호호. 저요, 요즘 술도 안 마시고 몸조리 잘하고 있답니다. 윤명 씨가 아이 소식 듣고 좋아하셨겠죠? 우리 진아 얼굴도 못 봐서 속상하네요.”

“따님분은 걱정 마시고 수진 씨 몸부터 생각하세요. 전부 괜찮을 겁니다.”

“그래야죠. 얼른 나아야지. 보내준 약도 잊지 않고 잘 먹고 있어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이 화기애애한 대화에 강진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애칭이었던 ‘진아’라는 이름은 저를 잘못 부른 게 아니었다. 강진하는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울며 말하던 죽은 누나를 떠올렸다. 태어나지도 못 하고 죽은 누나의 이름이었을까. 어째서 자신의 이름과 이토록 비슷한 걸까. 마치 모든 걸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인 듯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병실 밖에 있는 대기석에 앉아 강진하는 멍하니 두 손만 어루만졌다. 이윽고 병실을 나온 성재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 벌떡 일어난 강진하는 저도 모르게 성재현의 멱살을 붙잡았다.

“대, 대체, 이게 뭔데요. 뭐냐고! 장난치는 거죠? 그런 거죠? 응?”

“강진하 씨!”

끼어드는 정영호를 손짓으로 만류한 성재현이 웃는 눈으로 강진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 척 인사하는 게 대화하기엔 더 편할 거예요.”

“어, 어떻게… 우리 어머니가 왜 저러는 건데요!”

“아까 원장이 설명해줬을 텐데요.”

“거짓말이야. 어, 엄마는… 분명 멀쩡했는데….”

“거짓말이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네요. 이수진 씨 상태가 저렇다는 걸 굳이 보겠대서 직접 보여줬고, 보다시피 저 상태입니다.”

“…….”

“강릉 별장에 숨어지내던 걸 관리인이 발견했다더군요. 그때부터 이미 기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요. 보호자 자격으로 연락된 친오빠라는 분이 합의하에 병원으로 보냈고요. 돈은 넉넉히 받았을 테니 오히려 그쪽이 이득이었으려나.”

“외삼촌은… 나한테는 모른다고…….”

“안다고 할 리가 있겠어요. 그러면 돈을 못 받을 텐데. 고작 십억으로 입을 싹 다물겠다고 자발적으로 빌빌 기던걸요.”

“…….”

지극히 담백한 성재현의 어투에 강진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깝기만 하던 어머니가 저렇게 변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알코올 중독, 그리고 약물 중독. 어머니에 대해 함구하는 조건으로 친오빠라는 작자는 10억을 챙겨 받았다. 몇 달 전 어머니에 대해 묻고자 했을 무렵 벌컥 화를 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근래 공장 운영이 어려운 탓에 예민해진 것이라며 애써 말을 돌리던 외숙모. 갑작스럽게 찾아와 의도적으로 사고를 일으킨 작은외삼촌.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한 번 정도는 찾아와도 될 텐데.”

“…….”

“자기 애를 가졌던 여자가 가엾지도 않았나 봐요.”

성재현이 강진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거리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말과 달리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어머니가 사랑해 못지않던 성윤명이 그녀를 버리고자 한 방식이었다. 닳고 닳은 장난감이 이제 찾아와 사람으로 대해달라는 그 모습이 꼴사나워서, 이런 산골에다 내다 버린 것이다. 영원히, 사랑하던 기억만 가진 채로 죽을 때까지 사랑하도록. 이것이 그녀가 바라던 사랑의 대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자유를 되찾은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장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강진하는 성재현을 밀치고 병실로 들어섰다. 야윈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고 악을 썼다.

“엄마, 나야, 진하야! 제발!”

“가족분, 이러시면 안 되세요!”

“왜, 왜 나만 잊어버렸는데! 왜! 내가 그렇게, 끔찍했어? 내가… 내 존재가 그렇게, 싫었냐고….”

대답 좀 해봐. 엄마.

젖어 든 목소리가 점차 목에 잠겼다. 사랑받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이길 바랐다. 끔찍한 기억을 돌이키는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부 잊었다. 지나간 순간이 전부 끔찍했다는 듯이, 저 자신조차 완벽하게 뇌리에서 지웠다. 강진하는 결국 나이 든 여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이수진은 멍한 얼굴로 무릎에 파고든 이방인의 등을 토닥거렸다.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다정한 손길에 강진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소리를 냈다.

울음을 도통 그치지 못한 강진하는 대기석에서 말없이 손등으로 눈을 문질러 댔다. 눈 주변이 눈물 때문에 발갛게 퉁퉁 부어있었다.

“눈이 퉁퉁 부었어요.”

허리를 숙인 성재현이 젖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흰 얼굴이 눈물과 땀 때문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측은하게도 예쁜 모습에 성재현은 작게 웃었다.

“이럴까 봐 내가 데리고 오기 싫었던 건데.”

부어오른 눈가에 그는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혀끝으로 미지근한 눈시울을 부드럽게 핥았다. 강진하는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미끄러져 내려온 입술이 잇새로 파고들었다. 물기에 젖어 축 가라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성재현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집에 갈까요.”

**

장마가 지나기 무섭게 정원에 여름 장미가 발갛게 피어났다. 풋내 어린 장미 향이 열풍을 머금고 곳곳에서 만개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아한 풍경이었지만 남승혁은 오히려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성재현은 우아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발끝이 싸늘하다 못해 쥐가 날 무렵에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더 오래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용케 생각을 돌렸군요.”

“…아둔한 모습을 보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오히려 남 검사가 그런 고지식한 면을 갖고 있단 걸 알게 되니 더 믿음이 갔던 거고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린 성재현이 그를 다독거리듯 말했다. 남승혁은 차마 그를 따라 미소 지을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반듯하다 못해 경직된 자세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성재현과의 통화 아닌 통화 이후, 좌천을 각오했던 남승혁은 뜻밖에도 특검팀 소속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검찰 개혁을 부르짖던 동기 검사가 제주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남승혁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미 검찰 내부에서는 남승혁에게 든든한 인맥이 있다는 소문이 달라붙은 뒤였다. 그 배후에는 세한 성재현의 입김이 있다는 것 또한 자명했다.

승패는 이미 결정지어졌다. 남승혁은 결코 성재현을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승패를 정할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세한의 개로 살아남든지, 아니면 오명을 뒤집어쓰고 세간에서 나락으로 끌어내려지든지, 둘 중 하나였다. 깨끗하고 투명한 정의라는 건 더는 그에게서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버지가 해온 비리를 어렴풋이 알면서도 묵인해오지 않았던가. 그래놓고는 반재벌 언론사였던 ‘국민의 신문’에서 익명으로 기고까지 하던 객원기자였다는 점이 특히 재밌는 부분이었다. 정의감 투철하던 언론사 대표가 빚에 시달리다 결국 성재현의 ‘사고 조작’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결말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만일 그의 익명 행적에 대해 검찰에서 알아차리고 수사라도 들어간다면 단순히 경질이나 해고만으로 그칠 이슈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재현은 남승혁을 제 손으로 거뒀다. 뭐든지 약간의 흠집이 있을 때 오히려 사용하기 더 편리한 법이었다.

이번 방문은 성재현이 아니라 남승혁이 직접 연락해 잡은 개인 방문이었다. 가져온 기밀문서를 다 확인한 성재현이 남승혁 앞으로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이만하면 괜찮겠군요. 다른 증빙 부분은 준비되는 대로 박 차장 통해서 전달드리죠.”

“그런데… 이번 특검 때문에 세한에도 여파가 가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초점은 석영에게 있고, 우리만이 아니라 몇몇 기업도 끼어있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성 회장이 미래미술관을 통해 전시품으로 비자금을 숨겼다는 걸 내가 직접 인정하되 사회에 환원한다면 오히려 이미지 손실보다 챙길 게 더 있겠죠. 어차피 그 그림은 내가 가져가더라도 증여세가 만만치 않은 물건들이거든요.”

성재현은 남승혁을 특검팀 검사로 전격 지지해주는 대신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석영그룹 미래미술관 비자금 사건. 관련 기업만 해도 손가락 열 개가 넘어갈 만큼 제법 큰 규모의 사건이었다. 세한에도 타격이 갈 만한 사건을 굳이 성재현이 들쑤시는 이유는 간단했다.

친고모 성미령을 세한의 상속권 범주에서 공식적으로 배제한다. 그리고 이사회에 친아버지 성윤명 회장의 경영권까지 받아낸다. 당장 급한 지주회사와 세한전자부터 해결한 다음 순차적으로 하나씩 정돈할 생각이었다. 단기간에 해결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민사 문제만 치더라도 짧아도 최소 2년에서 길게는 7년은 끌릴 가능성이 컸다. 그 이후에도 완전하게 정리될 거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완벽할 필요는 없었다. 꺾어만 둔다면 잔재를 뜯는 일 정도야 어렵지도 않았다.

이를 두고 성미령과 성윤명 두 남매는 복수라고 오해할 게 틀림없었다. 안타깝게도 성재현은 그런 너절한 감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4살까지 살아계셨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지나간 계절 사이에 휘발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상속으로 불어난 자산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의도뿐이었다. 아, 그래도 복수라고 포장하는 것이 좀 더 그럴듯한 드라마가 될 수는 있으려나. 극적인 것이 더욱 즐겁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검찰 소환에 응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야 일정만 미리 알려준다면 성심성의껏 맞춰주죠.”

“…예.”

더는 물어볼 말이 없다는 듯 남승혁이 몸을 일으켰다. 슬슬 검찰로 돌아가려는 듯한 분주한 몸짓이었다. 너그럽게 웃은 성재현이 커피잔을 내려두며 깍지를 꼈다.

“얼굴은 안 보고 갈 겁니까?”

“얼굴이라면…?”

“못 본 지 꽤 됐을 텐데요. 보면 많이 반가워할 텐데. 요즘 많이 우울해하거든요. 친구로서 대화라도 좀 하다 가지 그래요.”

“…….”

누구를 말하는 건지 분명했다. 강진하를 가리키는 것이다. 침을 꼴깍 삼킨 남승혁을 바라보던 성재현이 맞댄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사고 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정조대 채워놨으니까.”

승용차는 조급하게 현관을 빠져나갔다. 마치 맹수에게 쫓겨 달아나는 사냥감 같은 꽁무니였다.

“보고 가겠다는 대답을 예상했는데 의외라면 의외였어요. 생각보다 분수를 잘 헤아리는 타입이더군요.”

마지막으로 봤던 남승혁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경악을 애써 참으려 찌푸린 미간 아래 단정한 얼굴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들끓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분노, 절망, 좌절, 그리고 질투.

성재현은 턱을 괸 채 그가 넘겨준 문서를 훑었다. 반듯한 필체에 어울리지 않게 성급하게 휘갈긴 사인. 비밀서약서에 사인한 남승혁 검사는 성재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돌아가겠다는 말과 함께 정중히 묵례로 대답했다. 결국 남승혁은 강진하에게서 잘려 나가길 선택했다. 잘려 나간 그는 과연 무슨 품종으로 자라날까. 투견, 충견, 광견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광견이라면 굶겨 죽일 것이고, 투견이면 싸움터로 내보낼 것이며, 충견이라면 충성심을 고깝게 받아들여 주면 그만이리라. 아버지가 우수한 품종이었으니 충견에 좀 더 어울릴까.

“그래도 얼굴은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서운하겠네요.”

“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에 강진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는 성재현 허벅지 사이에 무릎 꿇고서 정성스럽게 성기를 빨던 중이었다. 침에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에 다시 입술을 댄 강진하가 쪽 선단을 빨았다. 분홍색 혀가 감질난다는 듯이 기둥의 도드라진 핏줄을 고루 핥았다.

“으음.”

귀두 사이 요도구를 간질이는 혀끝에 성재현이 나른하게 신음했다. 자세를 고쳐앉은 강진하가 턱을 크게 벌리고 성기를 깊숙이 머금었다. 컥, 걱, 괴로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의무처럼 성기를 머금고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였다. 비좁은 목구멍이 주는 쾌감에 성재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머리카락과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손놀림은 어느덧 목덜미로 넘어왔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매만지듯 더듬거리며 내려온 손가락이 옆구리를 간질였다. 그러자 무릎에 이마를 댄 강진하가 약하게 허리를 비틀었다.

“프, 하아.”

입에서 성기를 빼낸 강진하가 숨을 헐떡거렸다. 성재현은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정조대는, 잘 채우고 있었죠?”

“아, 으읏.”

물음과 함께 매끈한 구두코가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우아한 침입에 허벅다리가 파들파들 떨리며 성재현의 발끝을 조였다. 반사적인 저항에 성재현은 눈짓으로 허리띠를 가리켰다. 벗으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입술을 깨물고서 주저하던 그의 두 손이 조심스럽게 바지를 벗어 내렸다.

군데군데 멍이 남은 무릎과 그나마 살집이 붙은 허벅지.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배꼽 아래부터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부위는 가죽으로 덮여있었다. 가죽을 다루는 전문가에게 따로 제작을 맡긴 정조대 속옷이었다. 장인 정신이 얼마나 투철하던지 직접 용도에 맞게 사이즈까지 책정한 속옷은 싸구려 매춘부가 입을 법한 착장이었다.

처음 이걸 내밀었을 때 강진하의 표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즐거웠다.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저항하지 못한 채 수줍어 발그레해진 콧잔등과 뺨이라니. 어차피 아무도 못 보는 꼴이건만 강진하는 매번 정장을 덧입었다. 단정한 차림 한 꺼풀을 벗기면 드러날 몸을 떠올리며 성재현은 발등으로 선단을 문질렀다.

“하루 종일 이거 채우고 기다리느라 심심했겠어요.”

“읍, 흐으.”

“살짝만 건드리기만 해도 이렇게 울먹거릴 정도로 밝히는데.”

짓궂은 목소리로 말하며 성재현은 불룩하게 솟은 중심을 발로 약하게 눌렀다. 그때마다 강진하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길 반복했다. 신음을 애써 참느라 두 뺨이 천박한 빛깔로 달아올라 있었다. 쉽게 자지러지는 몸으로 사정은커녕 자위 한 번을 못 했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 고작 반나절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강진하는 제풀에 지쳐 헐떡이고 있었다. 머리채를 움켜잡은 성재현이 시선을 마주한 채 산뜻하게 웃었다.

“그만 풀어줄까요? 응?”

저항할 수도 없게 단단하게 붙잡힌 시선은 성재현에게 얽힐 수밖에 없었다. 눈을 한 번 깜빡거린 강진하의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울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성재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대로 눈가에 입술을 머금고 빨아 먹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물방울이 어룽진 긴 속눈썹이 나붓거렸다. 그러나 성재현은 먼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네, 네….”

먼저 포기한 쪽은 결국 강진하였다. 무릎에 뺨을 비비며 그는 간절하고 애타게 부탁했다. 풀어주세요. 주인님. 제발. 세 문장으로 이뤄진 애원은 달콤한 울림이었다. 독기가 빠진 헐떡거림만이 남은 목소리에 성재현은 다정하게 웃었다. 나긋하게 놀리던 발을 치우자 강진하가 버둥거리며 성급히 자세를 취했다.

성재현은 엎드려 허벅지를 벌리고 있는 제 것을 내려다봤다. 선단쯤에 달린 백금 지퍼가 부추기는 것처럼 달랑달랑 흔들렸다. 와이셔츠만 걸친 낭창한 등 뒤로 가까이 다가간 그는 손을 아래로 내려 굳게 잠겨있던 지퍼를 풀어줬다. 지익, 지퍼 매듭이 풀리는 소리에 강진하가 군침을 삼켰다. 꼬리뼈 부근까지 쭉 지퍼를 올리자 땀과 체액을 머금어 촉촉하게 젖은 속살이 드러났다.

성재현은 사이로 손을 넣고 매끈한 사타구니를 주물렀다.

“앗, 아아, 앗, 싫! 흐윽, 안, 으안, 아… 아앗!”

잔뜩 예민해진 성기는 몇 번 주무르는 것만으로도 금세 체액을 뚝뚝 흘려댔다. 얼굴을 바닥에 댄 강진하가 흐느끼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더는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그는 냉정하게 사타구니를 마음껏 주물렀다. “아, 으흑, 앗, 그, 마, 안아!” 결국 쾌감을 참지 못한 성기가 옅은 정액을 울컥 뱉어냈다.

뚝뚝, 카펫에 번진 얼룩을 내려다보던 성재현이 싱긋 웃으며 손바닥으로 힘껏 엉덩이를 때렸다.

“누가 마음대로 사정하라 했어요?”

“아, 흡, 읍, 으윽!”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응? 발정기예요?”

화난 어투와 달리 성재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흡사 조롱이라도 하는 듯 그는 엉덩이를 꽉 주물렀다. 짝, 짝! 땀에 젖어 반들거리는 엉덩이에 커다란 손자국이 붉게 남았다.

팔에 얼굴을 묻은 강진하가 울음을 끅끅 참았다. 얻어맞은 양쪽 엉덩이가 여름철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익다 못해 살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옹송그린 강진하가 더듬거리며 굼벵이처럼 앞으로 기었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는 안쓰럽고 간악한 바동거림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또 도망부터 치려고 하네.”

“아!”

“쉿, 얌전히 있어야 박아주지. 진하야.”

달아나려던 목덜미를 잡아챈 성재현은 서둘러 성기를 꺼내 손으로 훑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흉측하게 발기한 성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지퍼 사이로 드러난 골에 쓱쓱 성난 기둥을 문지르던 그가 선단을 구멍에 끼워 맞췄다.

“아! 흐읍, 흑…!”

단숨에 푹 찌르고 들어오는 묵직한 감각에 강진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좁다란 길을 넓게 벌리며 굵은 살덩어리가 밀려 들어왔다. 구멍에 성기를 반쯤 욱여넣은 성재현은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가 힘껏 쑤셔 박았다. 굵다란 성기만큼 활짝 벌어진 구멍 주변이 옴질거렸다.

퍽, 퍽 내벽을 가르며 뭉툭하게 안을 두드리는 성기를 반사적으로 안이 꽉 조여들었다. 조붓한 속살에 성재현은 난잡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퍽, 퍽 구멍을 가르고 쑤실 때마다 안쪽 내벽이 아양이라도 떨듯 움찔거리며 달라붙었다. 성재현은 흠뻑 젖어 오물거리는 강진하의 안을 만끽했다.

너무 좋았다. 좋다 못해 가끔은 이대로 연결된 채 평생을 해도 괜찮을 거라는 우스운 상상마저 들 정도였다. 몸의 주인과는 다르게 솔직하고 음탕한 반응이었다. 원한다고 온몸으로 조르고 애원하는 것만 같아 성재현을 희열감에 빠트리곤 했다. 정작 고개를 숙인 몸은 표정 하나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건만.

갈증이 났다. 느끼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결국 손이 매섭게 앞으로 향했다. 강진하의 턱을 붙잡아 돌리자 찡그린 눈매가 야릇하게 처져 있었다. 성재현은 벌어진 그의 입속에 혀를 밀어 넣었다. 이리저리 빗나가는 혀를 눌러 엉겨 붙었다. 질컥거리며 입술 사이로 혀가 섞인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저도 모르게 빨아먹었다. 접붙은 아랫도리에서도 질꺽질꺽 끈적한 교접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랫배를 더듬거리며 성재현이 으르렁거렸다.

“임신시켜줄까요?”

“아, 아윽, 흑, 히윽, 흐, 응!”

“좆물 잘 받을 수 있죠?”

“자으, 아, 하아, 윽, 으응, 아, 앗!”

머지않아 사정감이 온몸을 저릿하게 흔들었다. 허리를 양손으로 꽉 움켜잡고 안쪽까지 깊숙하게 쑤셔 넣은 성재현은 안에 사정했다. 장내에 쏟아지는 정액 세례에 구겨지듯 웅크린 흰 등이 힘없이 떨렸다. 하아, 느른한 탄식을 내뱉는 얼굴에 앞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단정함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은 열락으로 끓어오른 채였다.

거칠어진 숨을 고른 성재현이 쭉, 성기를 빼냈다. 정액을 듬뿍 머금은 구멍 사이로 묽은 체액이 비질비질 흘러내렸다. 성재현이 구겨진 옷매무새를 고치는 동안 강진하는 며칠 동안 해온 대로 그의 성기를 꼼꼼하게 핥았다.

뚜르르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다음 일정을 알리는 전화였다. 와이셔츠 단추 마지막 하나까지 잠근 성재현은 힘없이 카펫에 주저앉아 있는 강진하 앞에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바닥에 쓸린 뺨이 발갛다. 멍이 드는 건 아닐까. 살짝 부어오른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주며 그가 말했다.

“저녁은 이따 이 방으로 가져다줄 거예요. 먹고 싶은 게 없대서 적당한 메뉴로 골랐어요.”

“…네.”

“만일 목욕하고 싶으면 아래층에 전화해요. 욕조 준비해줄 테니까. 정원이라도 걷고 싶으면 박 차장한테 문자 넣어요. 바로 올 거예요.”

“…네.”

다정하게 하나하나 알려주던 성재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눈짓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망설이던 강진하는 그의 손등에 천천히 입을 맞춘 다음 눈을 들었다.

“다녀오세요. …주인님.”

성재현은 잠시 말없이 강진하를 내려다봤다. 검은 유리창 같은 눈동자에는 무표정한 강진하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담길 뿐이었다.

전화벨이 재차 울렸다.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찰칵, 도어락 잠기는 소리에 강진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시계를 올려다봤다. 어느덧 저녁 6시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강진하는 무릎에 남은 멍을 보고는 손바닥으로 쓸었다. 최근 멍이 쉽게 생기곤 했다. 꾹꾹 눌러도 감흥 없는 통증이 아릿했다. 샤워실로 들어간 그는 정조대를 벗었다. 텁텁한 가죽 덩어리를 구석에 내던지고서 물을 틀었다. 쏴아아아, 물이 쏟아지는 아래에 강진하는 쪼그려 앉았다. 머리부터 고인 물줄기가 눈과 뺨을 흠뻑 적셨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물을 마구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물기가 그대로였다.

제 발로 이 자리에 돌아왔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강진하의 세계에선 더는 그를 반겨줄 이도,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제 손에 남은 푼돈으로는 어디로 도망가든 똑같았다. 영원히, 성재현의 노리개로 살 것이다. 그러다 병들고 쓸모가 없어지면 내쳐질 터였다. 제 어머니처럼 요양원 어딘가에 미친 사람이 된 채 멈춘 세계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눈 아래를 가만히 쓸어주던 손길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애인을 달래는 듯하던 손길이라니. 다정한 척해봤자 결론은 같았다. 성재현이 원하는 건 이런 좁은 방에 가둬놓고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 장난감 노릇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강진하는 원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이런 신세를 바라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습게도 그의 다정한 손길에 자꾸 위안받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는 감정을 바라면서, 헛된 기대에 재차 절망할 걸 알면서도. 사랑을 바라고 있었다. 차라리 어머니가 말하던 대로 누나였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만약 자신이 여자였더라면, 아이를 밸 수 있었다면 이렇게 좁은 우리 같은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을까. 이를테면, 이를테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강진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이 어떻든 결론은 같았으리라. 결코 동등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꼬리를 무는 비틀린 망상을 견디다 못한 강진하는 히죽히죽 몽롱하게 웃었다. 어쩌면 어머니처럼 이미 미쳐버린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그는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아주 한참 동안, 만들어진 비는 멈추지 않았다.

**

여름 내내 폭염 주의보였다. 저택과는 그리 상관없는 일기예보였다. 24시간 돌아가는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 덕분에 저택 실내온도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재현은 주말 내내 폭염 아래에 뙤약볕이라도 맞은 듯이 불쾌감을 견딜 수 없었다.

강진하가 벌써 닷새째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증상은 지난 월요일 저녁부터였다. 모처럼 저택 식당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식사를 들려고 했다. 그날 저녁 메뉴는 민어로 차린 정식이었는데 난데없이 헛구역질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강진하가 입을 가렸지만 딸꾹질 비슷한 헛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번이고 식사 메뉴를 바꿨다. 식사 메뉴만이던가. 조리사마저도 새로 고용했다. 각종 과일 샐러드부터 냄새가 적은 수프에, 유기농 잡곡 죽, 급기야 묽은 미음이 식탁에 올랐지만 강진하는 한 입만 먹어도 입을 가로막곤 했다. 이쯤 되니 슬슬 화가 날 지경이었다. 도망칠 구색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반항하는 건가 싶어 짜증이 울컥 났다.

보다 못 한 정영호가 주치의 호출을 권했다. 뭔가 큰 병이 있는 걸지도 모른단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밤늦게 노교수가 주인이 없는 저택에 방문했다. 이미 한두 번 만난 사이인데도 강진하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불안하게 손가락을 맞잡고 어루더듬었다. 노교수가 차근차근 달래며 청진기를 귀에 꽂고 가슴부터 등을 검진했다. 몇 가지를 묻는 동안 강진하는 엉덩이를 슬금슬금 움직여 거리를 뒀다. 이따금 성재현의 눈치라도 보듯 시선이 아무도 없는 반대편을 향했다가 아래로 향하기 일쑤였다.

딱히 이상이 없다. 주치의가 내린 소견이었다.

“정말 아무 이상도 없는 게 맞습니까?”

가방을 챙겨 드는 노교수를 배웅하며 박균홍이 다급하게 물었다. 저녁 일정을 마치고 성재현이 돌아오면 그럴듯한 병명이라도 대야만 했다. 벌써 일주일 넘게 헛구역질에 오한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이상이 없다니, 박균홍으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붙잡힌 교수가 곤란한 듯 씁, 입맛을 다시더니 대답했다.

“그게… 음, 굳이 치면 더위 먹은 거랑 비슷하다 보시면 됩니다.”

“비슷하다? 병명이 없단 겁니까? 국내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병이라도 된답니까?”

“그렇다기보다는… 그게, 그러니까.”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노교수가 잠시 강진하를 흘낏 쳐다봤다. 강진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발을 힘없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한숨을 푹 쉰 노교수가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박균홍에게 작게 속닥였다.

그게 증상만 보자면 임신 초에 보이는 증상이 가장 흡사합니다. 네, 그 흔히 입덧이라고 말하는 그런 부분이에요. 그런데 환자분께선 남성분이니 애초에 불가능한 현상이죠. 그래서 혹시 몰라 몇 가지 질문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상상 임신?”

“네. 박 차장이 전하기론 그렇답니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 받은 소식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 드물게 보이는 증상이라고 했다. 남성이라 추후 어떨진 모르지만 환상이 심한 경우에는 몸에도 변화가 올 수 있을 거란 진단이 의사가 내린 결과였다. 증상이니 병이니 하지만 저속하게 말하자면 제정신이 아니란 뜻에 불과했다. 성재현은 이 모든 보고를 전해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조용하게 바깥 풍경을 응시하는 얼굴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하기야 믿기지 않을만도 했다. 정영호만 하더라도 처음에 박균홍에게 전해 듣고도 몇 번을 재확인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진짜 임신도 아니라면.

운전대를 잡은 채 정영호는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조치해야 할까. 조심스럽게 머릿속을 정돈한 정영호가 그럴싸한 방안을 제안했다.

“상상 임신이니 정말로 임신한 건 아니라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완화될 거라고는 합니다만, 혹시 모르니 정신과 전문의를 붙일까요.”

“아니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계속….”

당황한 정영호가 백미러를 흘낏 살폈다. 그 속에 비친 성재현은 웃고 있었다. 그 말 같지도 않은 소식을 꽤 귀엽게 여기기라도 한 듯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무릎에 둔 손을 모아 쥔 성재현이 말을 이었다.

“상상으로라도 내 아이를 임신하겠다잖아요. 좀 어울려준다고 뭐, 문제 되진 않겠죠.”

**

주치의가 돌아간 뒤로도 강진하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몸에 큰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노교수는 메스꺼움을 완화시켜 줄 약을 처방해주겠단 말 외에는 별다른 언질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메스꺼운 것만이 아니라, 뭔가 몸이 이상해졌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꺼림칙한 변화였다.

구석에서 통화를 마친 박균홍이 고개를 저었다. “곧 오신답니다.” 그 말에 오금이 부들부들 떨렸다. 박균홍이 분명 오늘 의사와 나눈 말을 전부 다 전했을 터였다. 그가 뭐라고 했을까. 고칠 때까지 어디 산속 요양원에라도 두라고 했다거나.

우르릉, 언덕을 오르는 바퀴 소리에 강진하는 안고 있던 쿠션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저택은 늘 고요해서 바깥소리가 세세하게 다 들렸다.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현관이 열리며 저택의 주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하던 고용인들이 눈인사를 하는 가운데 성재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소파 쪽에 엉거주춤 서 있는 강진하에게 향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 니다. 금방 오신다고 전해 들어서.”

옷깃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강진하는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방금까지만 해도 약 한 알 먹으려고 받아 든 물 냄새조차 역겨웠건만, 막 돌아온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기분 좋았다. 꼭 끌어안고 듬뿍 냄새 맡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등 뒤로 뒷짐 진 손을 꼼지락거리며 강진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는지 성재현은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축하해요. 강진하 씨.”

입꼬리를 나긋하게 끌어당긴 그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내 애를 가졌다면서요.”

“…예?”

그 말에 강진하는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농담이라도 하자는 걸까. 하지만 성재현은 유쾌한 농담이나 하는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조롱이라면 모를까. 침을 꿀꺽 삼킨 강진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 하지만 저는 남자입니다. 임신이라니 말이 안 되는… 걸요.”

“의사 말론 증상이 같다더군요. 혹시 몰라 임신테스트기를 써봤는데 진단도 동일하게 떴다고 하고요. 상태로 봐선 삼 개월 같다던데.”

“하지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같은 말만 반복하는 강진하를 향해 성재현이 성큼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은 강진하의 뺨에 성재현의 커다란 손바닥이 닿았다. 눈 아래를 부드럽게 쓸어주던 손이 머리통을 토닥거렸다. 크게 숨을 고른 강진하가 마지막으로 저항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 정말로, 제가 임신… 그렇지만, 저는…!”

“못 믿겠으면 다시 박 교수 불러올까요? 원한다면 초음파 검진도 해보죠. 그럼 명확해질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임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강진하는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려 고개를 도리질 쳤다. 자신은 분명히 남자였다. 주민등록상으로도 남자였다. 생식기도 분명 남성이었다. 그런데 임신을 했단다. 머리로는 그럴 수 없다고 되뇌면서도, 마음 언저리에선 또 다른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드디어 네가 저 사람의 아이를 가졌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들뜬 목소리로 깔깔 웃어대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 적막 속에 있었다. 망령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진하야. 네가 내 바람을 이룬 거야. 이제야, 내 소원이….’

“엄마…?”

몽롱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강진하의 머릿속에 속살거림이 울렸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잖아. 성재현도 그렇다고 하잖아. 이제 편해질 수 있어. 버림받지 않는 방법이 생겼잖아. 인정해인정해인정해인정해인정…. 자신의 목소리로 빙글빙글 웃는다.

강진하는 천천히 성재현을 돌아봤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초조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 정말로, 전무님 아이를… 가진 거면 저는… 그럼 어떻게 해야….”

아이를 낳는다. 성재현의 친자식을 낳는다. 감히, 결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성재현의 아이를 가졌다. 성재현의 아이. 멍하니 말을 곱씹던 강진하가 제 아랫배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최근 배가 조금 올라온 것도 같았다. 한숨 제대로 이룬 적 없던 낮잠도 늘었고, 입덧처럼 수시로 토하고 메스꺼웠고, 아랫배가 뻐근하면서 요의가 자주 올라오기도 했다.

만약 성재현이 아이를 지우라고 한다면, 강진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강진하는 소파 앞에 무릎 꿇고 조심스럽게 용서를 구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지?”

“멋대로 아이를 가져서, 저 때문에 만약 결혼이나 후계 문제라도 생기면, 그러면….”

말을 하는 내내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아이를 가지려고 한 건 결코 아니었는데.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뒤죽박죽 얽혔다. 설마 그때, 차라리 여자였더라면 좋았을 거라던 망상이 이뤄진 걸까. 결단코 이런 상황을 예기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맹세할 수 있었다.

눈꺼풀을 깜빡거릴 때마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또록또록 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갸륵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성재현이 파안대소할 것처럼 크게 웃었다.

“강진하 씨, 여기 앉아요.”

그가 가리킨 곳은 성재현의 허벅지였다. 망설이는 강진하의 손을 잡아당긴 성재현이 제 허벅지에 그를 앉혔다.

“내 아이 가진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면서 왜 울어요?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지우시라면 지우겠습니다.”

“지운다니? 왜?”

“…….”

“누구 마음대로 지워요?”

화난 어조로 반문한 성재현의 얼굴이 싸늘했다. 강진하는 대답 대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아이가 정당한 관계에서 생긴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이상, 함부로 낳을 수 없을 뿐이었다.

밋밋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성재현이 다정하게 강요했다.

“내 아이인데, 당연히 낳아야죠.”

“그렇지만, 전무, 님….”

“낳아서, 여기로 젖도 먹이고.”

“아….”

아랫배를 쓸던 손길이 가슴팍을 간질였다.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도 온몸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열이 올랐다.

품에 안긴 강진하가 몸을 뒤로 빼내려 하자 성재현이 억지로 눌러 앉혔다. 그는 눈물로 흠뻑 젖은 눈가를 혀로 가만가만 핥았다. 야릇한 혀 놀림에 강진하는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고 달뜬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에다 싸줬더니, 정말로 임신을 다 했네.”

“아….”

“기특하기도 하지.”

귓속을 핥는 듯한 나른한 음색에 등줄기가 오소소 떨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보이는 친절함이 기쁘기까지 했다. 아이를 갖고 싶어 했구나. 한 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아서 생각도 못 했다. 후계를 이어야 하니 당연한 결과였을까.

자리를 잠깐 비웠던 정영호가 그사이에 커다란 꽃바구니를 가져왔다. 오는 길에 보이는 꽃집에서 아무거나 사왔다는 성재현의 부연설명과 달리 꽃바구니는 꽤 큼직하고 화려했다. 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더라도 반색할 정도로 예쁘고 화사한 꽃바구니였다. 감사하단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안개꽃과 붉은 장미가 꽂힌 바구니에서 풍기는 생화 향기에 강진하가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장미 싫어해요?”

“아니요. 그게, 냄새가 너무 강해서… 우읍.”

입을 틀어막은 강진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참으려 했지만 뒤틀린 속이 자꾸만 날뛰었다. 결국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강진하가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기침 섞인 구역질에 목구멍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모처럼 성재현이 기분 좋아 가져온 꽃바구니였다. 임신 소식에 들떠있던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아닐까. 고용인 중 한 명이 가져다준 물을 몇 모금 홀짝이며 곁눈질로 탁자를 살폈다. 놓여있던 꽃바구니가 사라져있었다.

“플로리스트 안목이 별로였네요. 꽃은 버리라고 할게요.”

“아니에요. 그렇게 할 필요는….”

머리가 아찔하게 돌았다. 미지근한 숨을 길게 내쉬던 강진하가 슬그머니 성재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코에 닿는 성재현의 체향에 거북하던 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강진하는 그의 품에 기대 옷깃을 손으로 꽉 잡았다.

“많이 불편해요?”

“아니요, 그냥… 전무님이랑 있으니까, 속이 좀 괜찮은 거 같습니다.”

“다행이네. 이제 초기니까 몸 건강 잘 챙겨야죠.”

품을 파고드는 강진하의 등을 도닥거리던 성재현이 시계를 흘끔 살피며 말했다.

“그럼 저녁은? 먹을 수 있겠어요?”

“…조금은요.”

“임신까지 했으니 잘 먹어야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먹고 싶은 게 없냐는 말에 강진하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햄버거…요.”

“햄버거?”

“감자튀김이랑,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랑 콘샐러드….”

메뉴를 하나하나 나열하면서도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뭔가 그럴듯한 고급 음식도 아니고 하필이면 패스트푸드라니. 그러나 한 번 떠올리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식욕이 당겼다. 정말 임신해서 그런 걸까. 햄버거라면 한때 지겨울 정도로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럴 때 간절할 줄이야.

“정 비서님. 힘들겠지만 퇴근하기 전에 햄버거 좀 사다주시겠어요?”

“네. 알아보고 지금….”

“여기서 말고.”

대화를 끊는 목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강진하에게로 쏠렸다. 옷깃을 잡은 강진하가 우물쭈물 말을 고르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같이… 나가서, 먹고 싶어요.”

“나가서?”

“일전에 계약서에서 보기로는… 저택에선 외부 음식 반입하지 않는다고도 했고, 그리고 저도 매장에서 먹는 게 마음 편할 거 같아서….”

“매장? 가게에서 먹겠다고요?”

“네. 괜찮으시다면….”

한 박자 늦게 흘러나온 대답은 말끝이 흐렸다. 성재현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흰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둥글둥글하게 다듬은 손톱이 복숭앗빛으로 빨개져 있었다.

“흐음, 글쎄. 곤란한데.”

옷자락을 움켜쥔 강진하의 손가락을 살짝 두드린 성재현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빠져나간 다음, 또 도망가려고요?”

“아….”

뼈가 담긴 말에 강진하가 힘없이 탄식을 흘렸다. 그래, 강진하는 벌써 몇 번이나 그에게서 도망갔었다. 두렵고 무서워서, 성재현의 마음을 도통 헤아릴 수 없어서 도망치고 또 도망쳤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칠 곳도,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이번엔 정말로, 얌전히 있겠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때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고서 얼마 안 가 가출했었잖아요. 잊었어요?”

“그건… 그때는…….”

당신이 다리를 부러트리고도 그 어떤 일말의 사과도 하지 않아서. 이대로는 모든 걸 잃게 될까 봐.

“다친 다리로도 잘만 도망쳤었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겠어요.”

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가락 힘이 서서히 풀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강진하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버릇처럼 죄송하단 말부터 나왔다. 당장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강진하는 휩쓸리듯이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단정하게 모아쥔 두 손등이 발발 떨린다. 유순하게 내리깐 두 눈꺼풀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흘릴 것처럼 붉었다.

성재현은 그런 강진하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좀 더 애걸복걸하며 빌 줄 알았는데 순순한 태도에 도리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쉽게 용서를 바랄 거면서 왜 지금까지 저에게 그렇게 도망치려고 했을까. 이렇게 쉽게, 저에게 돌아올 거면서.

턱을 들어 올리자 그렁그렁한 눈이 보였다. 당혹감, 동시에 두려움으로 주눅 든 시선을 가볍게 마주한 성재현이 한숨처럼 말했다.

“마지막으로 믿어주죠.”

“네, 네.”

“그 대신, 이건 빼지 말고 나가는 거예요. 밖에서 툭하면 다른 놈들을 꼬여내는데 내가 매번 손쓰기 귀찮거든요.”

“으읏….”

“설마 내가 이 정도로 양해해줬는데, 참을 수 있죠?”

옷 위로 엉덩이를 꽉 움켜쥐자 강진하가 작게 신음했다. 아래에 채워둔 정조대가 입구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짓궂게 문지르던 손을 거둔 성재현이 뒤에 서 있던 정영호를 돌아봤다.

“정 비서님. 미안하지만 차 키 좀 빌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이 제가 운전을….”

“아닙니다. 내가 다녀올 테니 두 분 다 퇴근하세요.”

단호하게 못 박는 말에 박균홍 차장이 헛기침하며 정영호 어깨를 툭툭 쳤다. 눈치껏 자리를 비키자는 신호였다. 정영호는 회사용 차량 키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받아든 성재현이 강진하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자, 더 늦기 전에 얼른 갔다 올까요.”

고압적인 태도와 달리 부드러운 권유였다.

**

고즈넉한 저택 골목을 빠져나오자 시내에 널리고 널린 게 패스트푸드 전문점이었다. 그중 그나마 가장 크고 번듯한 가게에 주차한 성재현이 강진하가 내리는 모습을 주시했다. 오른쪽 발을 미약하게 끄는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걸음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도망쳐봤자 금세 붙잡히고도 남을 만큼 연약한 움직임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성재현이 손을 뻗어 강진하를 붙잡았다.

“이리 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내가 잡아주는 게 싫은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요.”

그 말에 강진하가 주춤거리며 성재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부축하며 걷는 내내 일부러 기대지 않으려 한쪽 다리에 힘을 싣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여간 고집 부리는 건 여전하다. 성재현은 일부러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제 쪽으로 강진하를 붙였다. 잘 먹지 못한다 싶더니 그새 더 말랐다. 한 손으로 허리를 감을 수 있을 듯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가게는 한산했다. 늦게 식사 중인 대학생과 직장인 몇몇이 각각 테이블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카운터 앞에 선 강진하는 홀린 것처럼 메뉴를 하나하나 불렀다. 불고기버거, 치즈버거, 밀크셰이크, 아이스크림, 너겟, 윙 등등.

“더 안 시켜도 되겠어요?”

“…그게, 이미 엄청 많이 시켰는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럼, 콘샐러드도.”

그 말에 직원이 무안한 얼굴로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콘샐러드는 안 팔아요.” 그 말에 아쉽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모은 강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서는 강진하에게 성재현이 웃으며 말했다.

“내일 사다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 하지 말고.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나왔는진 알고 있죠?”

“…네, 알아요.”

두 남자는 가장자리에 앉았다. 강진하는 일부러 받아온 물티슈를 뜯어 테이블을 한 차례 더 닦았다. 딩동, 딩동, 주문한 음식이 순서대로 나오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강진하가 주문한 번호가 불렸다.

“가만히 있어요.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벌떡 일어난 강진하를 제자리에 앉힌 성재현은 직접 트레이를 받으러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한 음식은 트레이 두 개에 나뉘어 나와 있었다. 한 사람이 먹기에 지나칠 정도로 과했다. 며칠은 굶주렸어도 소화 못 할 분량이었다.

햄버거를 받아 든 강진하가 환해진 얼굴로 포장지를 벗겨 한 입 베어 물었다. 전복과 닭, 인삼을 달여 끓인 죽이나 수프도 못 먹겠다며 토하던 게 엊그제였다.

“예전에 대학생 때 진짜 많이 먹었거든요. 런치 메뉴는 삼천 원밖에 안 하니까….”

“삼천 원?”

“네. 여긴 점심때 몇몇 메뉴는 삼천 원이에요. 김밥만 먹기 지겨워서 햄버거도 자주 먹곤 했어요.”

김밥, 햄버거. 아마도 아버지 빚 때문에 그런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원흉이 저란 걸 알면서도 성재현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강진하도 더 말을 잇지 않고 햄버거를 먹는 데 집중했다. 턱을 괴고서 성재현은 오물거리는 그의 입술과 콧잔등, 살짝 처진 눈매를 내리훑었다. 고작 햄버거를 산해진미처럼 즐기는 얼굴이 퍽 귀여웠다. 제아무리 가짜 입덧이라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햄버거를 먹고 싶어 하다니. 속으로는 그의 저렴한 입맛을 비웃으면서도 성재현은 그 모든 일련의 몸짓과 손짓, 눈짓 하나하나를 예술품 바라보듯 차분하게 감상했다. 햄버거 한 입을 베어 물고 감자튀김을 콕 찍어 작은 입술에 쏙 넣는 모습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데도 성재현에게는 희한하게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그렇게 맛있어요?”

햄버거 두 개를 먹었을 무렵에 성재현이 재밌다는 듯이 물었다. 강진하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식사 자리에선 이맘때쯤 숟가락을 내려두곤 했는데, 오늘따라 입이 궁했는지 잘도 야금야금 먹었다.

햄버거 세 개째를 개봉하던 강진하가 잠시 망설이다 햄버거를 성재현 쪽으로 내밀었다. “한 입 드시겠어요?”라는 말이 생략된 행동이었다. 난데없는 배려에 성재현은 웃으며 기분 좋게 사양했다. 사실 냄새만으로도 기분이 껄끄러웠지만 강진하 때문에 이 자리에 참고 앉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굳이 얼씬도 하지 않을 곳이었다. 철없는 부르주아처럼 햄버거조차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선 햄버거 같은 것보다도 더한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오로지 강진하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있는 셈이었다. 그 사실이 성재현은 새삼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쓸모없는 행동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그러고 있다니.

건너편 자리에 남자 손님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햄버거를 대강 베어 물며 석간신문을 펼쳤다. 지하철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신문이지만 그만큼 파급력이 높은 일간지였다. 첫 페이지에 ‘석영 가(家) 미래미술관 비자금 사태 특검팀 수사 착수’라는 타이틀이 헤드라인으로 쓰여있었다. 며칠 내리 언론사며 온갖 화두를 장식한 이슈는 점점 불씨가 번지고 있었다. 그간 미래미술관을 통해 석영 일가가 수백억 원에 다다르는 탈세를 해왔으며 그 외에도 각종 로비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그 와중에 그룹 삼남이 마약 사범이란 문제까지 대두되면서 그룹 이미지에 연달아 타격을 입혔다. 단순히 루머만으로 돌던 이야기가 아예 사진까지 나오니 변호인 측에서도 두 손을 들 정도였다. 어디서 나온 사진인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던가. 아마 알게 되더라도 권재림이 손 쓸 방도는 없을 터였다. 사진은 성재현이 만든 자료였다. 권재림에게 파파라치를 붙인 게 허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석영 때문에 외사촌지간인 세한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평소 예술복지재단 등을 막대한 후원을 해오면서 예술에 큰 관심을 보여왔던 성윤명 회장 또한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돌려막고자 한 위선적 행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 봤자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잠깐 흔들릴 정도에 불과한 이슈인만큼 성재현도 더는 성윤명을 크게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조만간 남승혁을 비롯해 친(親)세한을 중심으로 꾸린 특검팀을 통해 그럴듯한 근거를 만들어내는 순간, 성윤명에게 나쁘지 않은 병환 명을 만들어 요양원으로 보내둘 계획이었다. 상류 세계에서 요양원으로 간다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았다. 더는 쓸모가 없다고 낙인찍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성윤명도 똑같이 그렇게 공들여 고이 묻어줄 생각이었다.

“전무님…?”

부르는 목소리에 성재현이 눈을 깜빡였다. 강진하가 두 팔을 탁자에 걸치고서 몸을 제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아니요. 별일 없습니다.”

성재현은 미간에 들어간 힘을 풀며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두 눈을 잠자코 바라보던 강진하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전무님께선 늘 과할 정도로 일하시니까, 피곤하신 것도 당연할 겁니다.”

“음, 요즘 내가 피곤해 보였어요?”

“네, 지금도 사실 좀 피곤해 보이셔서…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참견을 드렸습니다.”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만지는 흰 얼굴을 기꺼이 바라봤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나붓하게 움직이는 속눈썹, 그리고 혈색이 붉게 도는 입술을 차근차근 바라봤다. 시선이 계속 이어지자 급기야 강진하의 두 뺨이 붉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온순한 눈동자였다. “잘 먹었습니다.” 짧은 침묵 끝에 강진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무릎에 둔 손을 들어 올린 그는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정말로… 여기 안에 아이가 들어있는 걸까요?”

“아까 말했듯이, 못 믿겠다면 초음파 검진받아 봐도 됩니다. 병원까지 가는 게 싫다면 기계를 실어올 수도 있습니다.”

“…전무님은 제가 임신했다는 걸 믿으세요?”

그 말에 성재현은 일순간 침묵했다. 아주 짧아서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얕은 적막이었다. 곧 성재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네.”

가벼운 웃음.

“그 배 속에 내 후계자가 있겠죠.”

말없이 배를 둥글게 쓰다듬던 강진하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조심해야겠네요.”

“조심?”

“예전에 듣기로는 삼 개월 때 가장 위험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만약 진짜라면, 저도 조심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 말에 성재현은 목 끝까지 차오른 웃음을 삼켰다. 상상 임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성재현은 그저 농지거리에 맞춰줄 정도로만 여길 참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실을 받아들인 강진하는 생각보다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도 못할 임신을 상상으로라도 했다니. 성재현은 가짜 임신을 한 강진하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징그럽거나, 어리석다는 생각보다도 그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순진한 얼굴이 보기 좋을 뿐이었다.

“그래요. 조심해야지.”

생글생글 웃으며 성재현이 태연히 말했다.

“이제부턴 허튼 생각 말고 몸만 신경 써요.”

성재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강진하는 전처럼 피하지 않고서 다가온 성재현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손가락에 닿는 머리카락이 보들보들했다. 마치 손에 길들인 연약하고 작은 동물을 만지듯 성재현은 가만가만 그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배가 부른 탓인지 감은 눈은 경계심 하나 없이 포근하고 나른했다.

이왕이면 아이를 하나 입양해볼까. 서류를 조작하는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역시 여자아이가 좋겠지. 빈 젖을 먹이겠다며 끙끙댈 모습이 벌써부터 눈앞에 선연했다. 금이야 옥이야 제 자식이라 예뻐하며 키우느라 강진하는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할 것이다. 들킬 거라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다. 지금의 강진하는,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 그대로 믿을 테니까.

**

여름이 머문 저택의 나날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강진하는 태교를 시작했다. 태교라고 해봤자 얌전히 앉아 피아노가 흘러나오는 오디오를 듣거나, 손바느질 교습서에 나오는 대로 뜨개질을 하거나, 볕이 너무 뜨겁지 않은 이른 저녁에 정원을 거닐며 스프링쿨러가 한 바퀴 스쳐 간 파릇한 잔디를 사박사박 걸어 온실에 들렀다. 새 정원사를 구한 온실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파릇하고 싱싱하게 꽃이 만개했다. 이번 겨울에는 저택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를 만들거라던가. 정갈한 티 세트 옆으로 설계도를 펼쳐 보이며 건축가가 공손하게 설명하는 동안 강진하는 대저택 사모님처럼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해요. 전무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부르지도 않은 배에 손을 얹은 채 그는 건축가를 배웅했다.

성재현은 늦어도 저녁 7시면 귀가했고, 강진하는 이제 막 혼인한 새 신부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오늘을 설명했다. 대개 뭘 했는지 성재현이 물어보면 강진하는 그에 대답하는 식이었다. 온실에 시스템을 새로 바꾸기로 했어요. 새 공기 청정기래요. 내달에 전기기사 불러서 설치하기로 했어요. 성재현은 무릎에 앉은 강진하를 어린아이처럼 어루만지고 귀에 입 맞추며 그 모든 지저귐을 조용히 들었다.

이따금, 불안감이 수마에 섞여 찾아왔다. 눈과 입을 틀어막은 어둠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실 모든 게 사실 거짓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히죽 웃는다. 어둠이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의 음색으로 변한다. 너 혼자 살아남았어. 너 혼자야, 너 혼자, 혼자혼자혼자혼자.

“아니야! 제발!”

강진하는 귀를 틀어막았다. 서둘러 물 한 모금과 약 한 알을 찾아 입속에 밀어 넣었다. 선명하던 웃음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비로소 모든 게 평화로웠다. 평화로워야만 했다.

축 늘어져서 허공을 보던 그는 엉금엉금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까, 아니 몇 시간 전까지 성재현이 있던 드레스 룸 옆 침실이었다. 오늘도 그의 출근을 도왔다. 넥타이핀을 고르고, 넥타이를 매주며, 다녀오란 말을 했다. 그리고 남은 건 텅 빈 온기뿐이었다. 시트를 아직 정리하지 않아 구김이 간 자리마다 손가락을 따라 이었다. 풀썩 웅크려 앉은 강진하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숨을 참았다가, 이내 크게 들이마셨다.

괜찮아.

아무도 없는, 성재현의 침대 위에 강진하는 작은 태아처럼 둥글게 웅크려 앉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괜찮을 거야.

전부 다.

**

서점에 가고 싶어요. 아침을 먹던 중에 나온 말이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새로 따른 커피를 마신 성재현이 강진하를 쳐다봤다. 설득해보라는 표정에 강진하는 우물쭈물 생각했던 대로 말을 이었다. 동화책 전집을 사고 싶은데, 기왕이면 신간이 어떤 게 있는지도 보고 싶어요.

“그런 거라면 어시스트를 불러서 카탈로그를 봐도 되잖아요?”

“아….”

성재현의 말에 강진하는 며칠 전 새로 들어온 고용인을 떠올렸다. 옷, 구두, 가방은 물론이고 성재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그 즉시 괜찮은 업체를 연결해 가격대부터 디자인까지 꼼꼼하게 골라왔다. 아마 동화책을 부탁하면 출판사를 섭렵해 전집을 비교해가며 알아서 골라 올 거란 건 알고 있지만….

“오랜만에 서점에 가보고 싶어서….”

“편하게 사람 시키면 되는데 굳이 왜요?”

“그냥 사람도 좀 보고 싶고, 그냥 바깥은 어떤지도 좀 보고… 싶었어요.”

그 말에 성재현이 곤란한 듯 눈썹을 모았다. 강진하는 금세 주눅 든 강아지가 되었다. 저택 밖을 못 나간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정원, 후원, 심지어 연못이 흐르는 중정까지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 강진하는 가끔 지루했고, 가끔은 우울했고, 때로는 외로웠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불러오지 않는 배를 안은 채 고용인들 눈을 피해 외딴곳에서 퇴근할 성재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겠지. 자신은 이미 두 번이나 그를 버리고 도망쳤으니까. 거절당해도 합당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성재현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요.”

“네?”

“박 차장이 따라다닐 거고, 경호원 차량이 하나 붙을 테니까 별일은 없겠죠.”

요컨대 혼자 다른 길로 새지 못하리라는 은연한 경고였다. 강진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를 한 번 가볍게 두드린 성재현이 재차 말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저녁도 밖에서 먹을까요.”

“저, 녁이요? 정말이세요?”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어요?”

“아….”

“그러니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와서 기다려요.”

너무 기쁜 나머지 강진하는 성재현의 넥타이를 매는 동안 두 번이나 잘못 맸고 뺨에 입 맞추는 걸 까먹어서 몇 분 동안 쉼 없이 그의 것을 빨아야만 했다. 목구멍까지 깊게 찌르는 바람에 목 안쪽이 얼얼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성재현이 화내지 않고 아량을 베풀지 않았는가.

곧 승용차가 도착했다. 정말 나가도 되는 걸까. 분명 허락까지 받았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 한참 동안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박균홍은 별말 없이 코엑스 주차장까지 강진하를 데려다줬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코엑스는 사람이 많았다. 박균홍을 따라 도착한 서점에서 강진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육아/태교] 코너에서 머물렀다. 필요한 책이 많았다. 걱정되면 바로 주치의를 불러준다고는 했지만 아이를 낳는다는 일은 상상되지 않았다. 역시 배를 가르게 될까. 초음파 사진으로 찍힐 수는 있을까. 태명을 붙여줄 걸 그랬나. 4개월 정도 되면 보통 이만한 크기라는데 나는 왜 배가 별로 부르지 않을까. 좁은 통로를 지나치던 여자와 부딪쳤다. 여자는 강진하를 흘끔 보고는 고개만 숙이고 재빠르게 지나쳤다. 아무것도 아닌 시선인데도 강진하는 마치 저를 비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울렁거린다.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책을 급히 덮은 강진하가 크게 심호흡하며 책장을 짚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아이가 놀랐나 봐. 그는 허겁지겁 가방에서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쓴맛에 눈앞이 흐려질 정도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강진하를 보고는 박균홍이 놀라 팔을 붙잡았다.

“강진하 씨? 괜찮으십니까?”

“죄,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에 나왔더니 긴장했나 봐요.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삼성동으로….”

말을 잇던 중에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고 보니 삼성동이 제집이었던가. 아니, 그 집은 성재현의 것이다. 그럼 내 집은 어디에 있지. 그 집에 살고있는 나는 대체 뭐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박균홍이 서둘러 강진하를 부축했다. 주차장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박균홍은 두말도 묻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비탈길을 오르던 차가 머리를 돌리던 그때였다. 쾅!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스포츠카가 승용차를 들이박았다. 방향을 잃은 차가 옆으로 밀려나며 벽에 부딪혔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속이 울렁거렸다. 운전석에 앉은 박균홍은 이마를 붙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119에 신고해야 한다. 당황한 강진하가 핸드폰을 찾으려 조수석 앞으로 손을 내미는 순간 깨진 유리창 사이로 불쑥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차 문을 열어젖힌 손이 무작정 강진하를 끌어냈다. 싫다고 버둥거리는 강진하를 기어코 밖으로 끌어낸 그가 힘껏 강진하를 끌어안았다.

“형. 나야. 나라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자 권재림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경호 차량을 발견한 그가 다짜고짜 강진하를 제 차에 밀어 넣고는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문이 구겨진 스포츠카가 빠른 속도로 골목을 질주했다. 한참을 달려 한적한 한강공원에 차를 댄 그가 뒤를 돌아봤다.

“괜찮아?”

“…….”

토할 것 같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권재림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튀어나온 강진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헛구역질했다. 등을 두드려준 권재림이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놀라게 해서. 하지만 도통 형을 만날 방법이 없어서, 나로선 최선이었어.”

“박 차장님… 피 흘리고, 있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알아서 남은 사람들이 수습할 거야. 내가 아까 봤을 땐 숨 쉬고 있었고.”

“너, 너, 나한테 대체 무슨….”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끌어 잡은 권재림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깨를 만지던 손이 목을 타고 올라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보고 싶었어.”

“이거, 놔.”

“싫어. 내가, 얼마나, 형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비켜.”

“한 번만, 원하는 대로 말해 주면 안 돼? 보고 싶었다고, 걱정했다고… 나 없는 동안 매일 내 생각했다고, 응?”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한 권재림이 뺨을 손으로 마구 쓰다듬었다. 강진하는 도리질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급하게 입술을 부딪쳐온 권재림이 거칠게 혀를 쑤셔 넣었다. 입 안을 거칠게 휘젓는 혀 놀림에 강진하가 눌린 몸을 들썩거리며 애원했다. 오히려 그 움직임이 도발이라도 된 듯 권재림이 혀를 약하게 깨물며 차 문을 열어 강진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몸 위를 덮듯 올라탄 권재림이 입술과 뺨, 귀를 게걸스럽게 빨고 핥았다.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고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호흡이 가빴다. 헐떡거리는 강진하의 두 눈이 축축하게 젖은 걸 내려다본 권재림이 입술로 눈물을 핥아 먹었다. 손이 아래로 내려온다. 바지춤을 더듬는 손길에 강진하는 펄쩍 몸을 흔들었다. 배가 어릿하게 아팠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아이는 어떻지. 만약 사고로 문제라도 생겼다면.

“아, 안 돼. 제발… 하지 마. 나, 못 해. 하면 안 돼.”

“씨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배에, 배 속에, 아기… 아기 있어.”

그 순간 급하게 움직이던 권재림의 손끝이 멈췄다. 눈썹을 모아 찌푸린 그의 표정은 당혹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아기…? 무슨 소리야.”

“전, 전무님 아기야. 잘 못 되면 안, 돼. 이제 사 개월 됐어. 제발….”

“허, 진하 형, 왜 그래? 미쳤어? 형이 무슨 아기를 가져!”

“아니야. 아니야. 나 안 미쳤어. 나 미친 거 아니야. 정말로….”

“누가 그래. 설마 성재현이 형 임신했대? 씨발, 그 미친 새끼 말을 믿어?”

“이, 임신했어. 분명히 나, 임신했다고….”

“씨발, 정신 차려!”

풀린 눈으로 같은 말만 반복하던 강진하를 확 끌어당긴 권재림이 으르렁거렸다. 머리가 아찔하다. 정신차려정신차려정신차려. 메아리처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소용돌이쳤다. 이마를 맞댄 권재림이 재차 입을 벙긋거렸다.

“마음 같아선 나도 형 임신시켰어. 백 번, 천 번도! 내 아이 품게 했을 거야. 그런데,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 라고….”

“성재현이 대체 형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건데! 그 개새끼가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성재현은 그 다음 날 곧바로 강진하에게 초음파 사진을 들이밀었다. 복부에는 작은 씨앗만 한, 태아가 있었다. 그게 두 사람의 아이라고 말했다. “소중하게 대해줘야 해요.”라며 웃었다. 한 치의 거짓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다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 거짓말일 리 없었다. 거짓말이어선 안 된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 야! 거짓말하지 마. 나는, 분명히….”

분명하다고?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잖아. 초음파 사진도 직접 찍은 게 아니었다. 성재현이 어느 날 갑자기, 두 사람의 아이라며 보여준 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태교 서적에서 뭐라고 적혀있었지. 넉 달째 되면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손으로 배를 더듬거렸다. 밋밋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처럼 헛헛할 뿐이었다.

이게 거짓말이면, 성재현은 왜 대체 내게 그런 말을 해준 건데. 왜, 어째서. 아니야. 아니야. 그러니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성재현의 아이를 가졌다. 그러니 버림받지 않을 거야. 그의 아이를 낳고 나면, 나는, 나는. 문득 병원에서 홀로 앉아 웃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끼익, 어머니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향해 속삭인다.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약을, 약을 먹어야 한다. 이 모든 건 아이에게 나쁜 말이다. 강진하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납작한 약 봉투가 차시트 위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다급히 그걸 빼앗아 든 권재림이 약 봉투를 살피더니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이거, 형 어디서 났어.”

“돌려줘.”

“이거 어디서 났냐고. 누가 줬어. 설마 성재현이야? 어?”

“돌려줘. 나 그거 먹어야 해. 그래야 괜찮아져.”

“이게 뭔 줄 알고 먹고 있는 거야? 이거, 형, 각성제야. 마약이라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강진하를 위해 성재현이 처방해 온 약은 보름치였다. 먹으면 전부 괜찮아지는 약이었다. 아무 소리도, 걱정도 사라지고 그저 멍해졌다. 몸이 붕 뜨고 황홀해지면 성재현은 그런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지고 예뻐해줬다.

“씨발, 이 개새끼가, 이 빌어먹을 좆같은 새끼가!”

약을 바닥에 내던진 권재림이 운동화를 신은 발로 짓이겼다. 손을 뻗은 강진하가 힘없이 “아” 하고 탄식했다. 머릿속에 울림이 커졌다. 속이 메스껍다가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도리질 친 강진하가 이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성재현이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니 강진하는 시키는 대로 가서 기다려야만 했다. 규칙이고 법이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벌벌 떠는 강진하를 꽉 끌어안은 권재림이 “씨발” 하고 작게 욕을 내뱉었다.

“형, 형. 제발….”

“나 가야 돼. 가야 해. 주인님이, 전무님이….”

“씨발, 병원부터 가자. 병원부터 가고 나서!”

핸드폰을 찾던 권재림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창가 앞에 드리운 그림자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권재림 씨, 검찰입니다.” 바깥에 있던 남자 목소리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었다. 문을 열자 남승혁을 비롯한 경찰차가 그 옆을 막아서듯 대기 중이었다. 남승혁을 확인한 권재림이 차에 몸을 걸치고는 똑바로 노려봤다.

남승혁이 발부받은 영장을 내밀며 말했다.

“미래미술관 비리 건으로 검찰 출석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갑니다. 어차피 내가 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 영장은 다른 겁니다. 권재림 씨를 황명수 씨 폭력 치사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뭐?”

뒤에 서 있던 형사들이 그를 에워싸고 수갑을 채웠다. 미란다 원칙을 읊어주는 목소리와 함께 권재림의 고함이 섞였다. 그는 경찰을 뿌리치고는 남승혁을 고고하게 노려봤다.

“개새끼 노릇하니까 행복하냐?”

“…최선이었습니다.”

“최선? 씨발, 넌 지금 성재현이 무슨 짓 하고 있는 건지 알잖아! 자기 손만 안 더럽히고 개수작 부리는 거. 그걸 최선이랍시고 용납해? 너, 진하 형이랑 친구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성재현 편들고 싶냐고!”

“연행하세요.”

후회할 거야. 개자식아! 쩌렁쩌렁한 목소리, 쿵쿵, 두드리는 소리. 그러다 어느 틈엔가 고요해졌다. 강진하는 여전히 차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남겨진 스포츠카 안을 들여다본 남승혁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진하야.”

“…….”

“나와. 집까지 데려다줄게.”

고개를 든 강진하는 차 밖에 서 있던 남승혁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마치 여기 있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한 말투였다. 어떻게 알았을지 뻔했다. 성재현이 그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다. 권재림이 데려간 걸 듣자마자, 바로 즉시.

“승혁아.”

검은색 SUV에 올라탄 강진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안전벨트를 매던 남승혁이 강진하를 응시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힘없이 배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너도… 내가 미쳐버린 거 같아?”

간곡한 질문에도 남승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강진하의 해쓱하고 우울한 흰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드드득, 시동이 걸렸다. 남승혁은 삼성동으로 가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흔했던 안부 인사조차도 없었다.

**

이태원동 저택 주변은 냄새를 맡고 몰려든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상시 경호인력이 세 배로 늘었고 성윤명 회장은 병을 이유로 열흘째 칩거 중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연합뉴스를 시청하는 성윤명을 바라보던 성재현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한 석 달 정도 남유럽 쪽에 출장 명목으로 계시다 보면 잠잠해질 겁니다. 기자나 경찰이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론 때문에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요. 이탈리아 쪽으로 머무르실 택사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로마 좋아하셨으니 관광이라도 편하게 하시면서….”

“재현아.”

성윤명이 입을 열었다. 성재현은 아주 오랜만에 그에게서 이름을 불린 것을 깨달았다. 얼마만일까. 못해도 이십 년은 더 되었을까. 직함이 생긴 뒤로는 줄곧 전무라 불렀고, 그전에는 비서를 통해 지시만 내려왔었으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예. 말씀하세요. 아버지.”

“이렇게까지 들쑤셨으니, 만족스럽겠구나.”

석영 미래미술관 비리를 선두로 석영그룹에는 폭격이 쏟아졌다. 결국 석영에서는 성미령이란 카드를 검찰에 내놓는 걸로 둑을 막았다. 성미령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자백했다던가. 그러나 성미령이 붙잡혔다 해서 세한 성윤명에게 쏠린 세간의 여론마저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니 저렇게 바깥에 하이에나들이 득실거리며 늙은이의 뼛조각을 물려 들지 않겠는가. 그 하이에나 무리를 이끌고 온 건 다름 아닌 성재현이었다. 성윤명도 그걸 모를 정도로 아둔한 양반은 아니었다.

“저도 고모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별수 없는 일이죠. 이런 식으로 치고 나올 거라고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이렇게 판을 벌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경영권은 내게 넘어갈 일이었다. 설령 내가 원하지 않아도 결국은 그렇게 됐겠지. 그런데도 너는… 날 믿지 않았구나. 그런 식으로라도 네 어머니 값을 치르고 싶었던 거겠지.”

“피곤해 보이십니다. 슬슬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옆으로 물러나 있던 비서에게 눈짓하자 남자가 서둘러 휠체어를 붙잡았다. 텅 빈 거실에서 성재현은 시끄럽게 떠드는 연합뉴스 속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의 값. 그런 걸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어머니의 망령을 오래도록 친아들에게서 보아온 건 다름 아닌 성윤명 그 자신이지 않던가. 그 망령이 두려워서, 결국 곁에 두는 여자란 여자는 족족 사별하거나 이혼하길 거듭했다. 그러니 친아버지께서 원하는 대로 망령의 저주를 베풀어준 셈이었다. 적당한 연극 놀이였다.

당장 경영권을 앗아가진 않겠지만 내부에서는 점차 성윤명의 권한이 줄어들 터였다. 그 권한의 일부는 몇몇 이사회에 흡수될 것이고 남은 건 성재현의 몫이 되리라. 그러면 족했다. 성윤명의 말 대로 세한은 응당 제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십수 년을 고독하게 질기게 버텼다. 아무도 제 편이 아닌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괘종시계 울리는 소리에 그는 왼쪽 손목을 살폈다. 벌써 6시였다. 강진하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을 터였다. 오후에 자잘한 사고가 있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감시가 풀린 권재림이 차로 기습하는 바람에 박균홍 차장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그 과정에서 강진하가 잠시 시야 밖으로 사라졌었다. 다행히 한강공원에서 권재림을 구속하면서 강진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라는 보고를 들은 게 약 3시간 전이었다. 많이 놀랐던 것 같다던가. 하기야 놀랄 만도 했다. 소식을 들은 성재현조차도 생각지 못한 사고에 놀랐으니 오죽했을까.

그렇게 놀랐으니 오늘은 더 나가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성재현은 잡아뒀던 예약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차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길에 기분을 풀어줄 만한 선물을 샀다. 강진하는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이 없긴 하지만 성재현은 그의 몸에 귀걸이나 목걸이를 달아주는 게 좋았다. 가끔은 벗은 몸에 진주만 치렁치렁 달아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피어싱을 권해볼까. 젖꼭지, 배꼽, 그리고 음경과 회음부. 문신은 바꾸기도 어렵지만 피어싱은 보석이니, 하얗고 부드러운 몸에 무척 잘 어울릴 터였다.

집에 돌아오자 현관에서 강진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삼성동에 돌아온 뒤로 강진하는 줄곧 성재현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왔다.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듯한 표정에 성재현은 귀를 살살 만지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정영호가 가져온 주얼리를 어시스트와 함께 나열했다. 강진하가 고르는 대신 성재현은 어울릴 만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골라 그에게 걸어줬다. 일부러 목둘레에 딱 맞게 조정해온 백금 링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 가느다란 목과 귀를 입술로 쓰다듬으며 성재현은 그에게 몇 번이고 예쁘다고 칭찬해줬다. 귀가 붉어진 강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저녁이 준비되었다. 고용인들을 모두 내보낸 커다란 식당에서 두 남자는 나가지 못한 외식을 대신해 근사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성재현은 아끼던 고급 와인을 한 병 땄고 강진하는 묵묵히 차려진 음식에 집중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저녁이었다.

“전무님….”

젓가락을 내려놓은 강진하가 입을 열었다. 적당히 기분이 풀어진 성재현이 눈썹을 들어 나른하게 강진하를 응시했다. 잠시 말을 고르던 강진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한테, 뭔가 해주실 말씀 없으세요?”

“할 말이요?”

“네… 뭐든지, 좋으니까요.”

초조하고 복잡한 얼굴이 성재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성재현은 할 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강진하에게 해줘야 할 말이야 많았다. 이수진이 계단에서 사고를 당해 사실상 뇌사 상태에 들어갔다든지, 그의 작은외삼촌은 구치소에서 폭력 시비에 휘말려 독방으로 들어갔으며, 고작 몇 푼에 조카와 누이를 팔아치운 큰외삼촌은 결국 공장이 폐업해 가족 전체가 야반도주하듯 해외로 도망쳤다든지 하는 이야기 등등. 그리고 황명수는 그날 이태원에서 도주하던 중 안 좋게 얽힌 제 ‘형님’에게 붙잡혀 린치당하다 시신 안치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네 인생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 얼마나 황홀한 엔딩인가.

그러니 더는 이런 자질구레한 뉴스에 속박받을 필요 없었다. 강진하는 그저 성재현이 원하는 대로 웃고, 신음 하고, 애원하고, 아양 부리며 살면 그만이었다.

아, 차라리 그 말을 해주는 건 어떨까. 생긋 웃은 성재현이 잔을 내려두며 몸을 앞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이번 주에 별장으로 휴가라도 갈까 생각 중이에요.”

“…별장이요?”

“아무래도 오늘 좀 그런 일도 있었고, 많이 놀랐을 테니 기분 전환하면 좋을 거 같더군요.”

“…….”

“그러고 보니 산다던 태교 책이랑 동화책은 샀어요?”

“아, 니요. 사려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그냥 나왔습니다.”

“그래요. 민경 씨한테 따로 이야기하면 아마 좋은 걸로 골라줄 겁니다.”

“네….”

짧게 대답을 마친 강진하가 포크를 내려뒀다. 오늘 디저트는 그가 좋아하는 말차가 들어간 우유 푸딩이었지만 속이 아프다는 이유로 강진하는 디저트를 거절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유령 같았다. 이마에 손을 살짝 대자 미열이 느껴졌다. 놀랐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지.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네요.”

“그럴게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진하가 몸을 돌려 성재현을 빤히 쳐다봤다. 시선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얇게 서린 살얼음을 건드리듯 자그만 목소리로 강진하가 말했다.

“전무님, 저는… 전무님이랑 지금처럼 사는 게 즐거워요. 아침에 전무님 넥타이를 매드리고, 저녁엔 전무님이 오시길 기다리면서, 같이 뭘 먹을지 고민하다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일들. 제 삶에서 아마 이렇게 평화롭고 아무 걱정 없는 날은 없었을 거예요.”

“…….”

“감사하단 말은,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성재현은 그의 감사 표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다시 침묵이었다. 천천히 돌아선 강진하가 식당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섰다.

그날은 서재에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밀린 업무를 정리하고 나니 새벽이었다. 성재현은 이미 식은 커피에 눈을 돌렸다가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더듬거렸다. 피곤하니 그만 잘까. 침실에는 아마 강진하가 먼저 웅크려 누워 잠들어있을 터였다. 성재현은 이미 누군가가 잠든 침대로 들어가는 게 그렇게나 즐거운 일이라는 걸 최근 깨달았다. 이미 누군가가 따뜻하게 데워둔 온기의 자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안온했고 아늑했다.

차라리 그런 말을 해줄 걸 그랬나. 네가 잠든 동안 네 옆에서 눕는 게 좋았더라고. 그런 간지러운 말이라도 속삭여줬더라면, 울 것 같던 얼굴이 조금은 평온해졌을까.

뚜르르, 전화벨이 울렸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핸드폰도 아니고 자택 전화벨이 울리는 일은 드물었다. 필요 고용인을 제외하면 전부 퇴근한 시간인데. 도둑이 들었다면 경비 업체에서 알아서 해결하고 이른 아침에 통보할 터였다. 대체 누구지. 전화를 받자마자 들리는 건 당황한 경비원의 목소리였다. “전, 전무님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지, 지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쨍그랑! 요란하게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성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온실이 불꽃으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볕 아래에 피어난 토끼풀 사이로 손을 헤집었다. 네잎클로버를 찾는 대로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최근 우울한지 걸핏하면 밤마다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오랜 병을 앓는 탓이라며 어린 손주의 등을 도닥거릴 뿐이었다. 네잎클로버는 행운. 그러니 어머니에게도 가져다주면 분명 좋아할 터였다.

발소리를 대신해 그림자가 길쭉하게 강진하를 덮었다. 기척에 등을 돌린 강진하가 작게 입을 벌렸다. 그때 만났던 성재현 도련님이 서 있었다.

막 네잎클로버를 찾은 직후였다. 함부로 정원을 훼손했다고 혼나는 건 아닐까. 할머니가 말하기론 이 저택에 있는 건 전부 이 집주인의 물건이니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고 했다. 토끼풀을 마음대로 꺾었으니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나 할머니한테까지 그 여파가 미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죄, 죄송해요. 도련님. 잘못했어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강진하가 손에 쥔 토끼풀 다발을 내밀었다. 뭉크러진 풀 꽃다발을 빤히 내려다보던 성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왜?’

‘그러니까 마음대로, 꺾어서… 여기 있는 건 전부 도련님 거라고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그랬는데?’

‘제가 마음대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싫어하실 거 같아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어린 마음에 겁이 나 눈물이 자꾸 쏟아졌다. 도련님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삼성동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셨다. 설령 그 말이 아니더라도 강진하는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와 가까워지고 싶기도 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방울이 자꾸 마음대로 뚝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을 숙인 성재현이 볕을 받아 밤색으로 빛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며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돌려주는 거야?’

‘으응, 도련님 거니까….’

‘돌려준다니까, 그럼 용서해줄게.’

생긋 웃은 성재현이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 바람에 민들레 홀씨가 탁 부딪치며 바람결에 날아갔다.

‘저기, 아까 한 말 다시 해주면 안 돼?’

‘아까 한 말?’

‘여기 있는 건 전부 내 거라고 한 거.’

‘네…. 도련님 거예요.’

‘그럼 너도, 내 거인 거야?’

강진하는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그의 가족들은 전부 이 집 안에서 일했다. 공장을 운영하는 외삼촌부터, 아버지, 할머니, 심지어 어머니까지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강진하도 응당 그렇게 될 터였다. 아홉 살의 세계에서는 적어도 그랬다.

‘네. 그럴 거예요.’

‘그럼 이제부터 주말마다 나 보러 와. 그래야 내가 내 걸 확인할 수 있잖아.’

‘주말마다? 정말요? 놀러 와도 돼요?’

‘차 보내줄 테니까, 꼭 타고 와. 알겠지?’

그러니까 울 필요 없어. 뺨에 흐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성재현이 웃었다. 강진하도 마주 웃었다.

화르륵, 한 폭의 동화 같은 기억에 희뿌연 연기가 휘감겼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추억이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모든 게 행복했었다. 그때는 도련님의 친구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나이를 먹고 점점 머리가 굵어질수록 그 말이 얼마나 가소롭고 우스운 꼴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제 발로 노리개가 되겠다고 들어간 셈이었다.

그럼에도 성재현을 탐냈다. 그의 시선을 탐내고, 그가 주는 것들을 누렸다. 하지만 결국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였다. 강진하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결코, 성재현은 저와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을 터였다. 그저 예쁜 장난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감히 들을 수 없는, 그런 관계.

강진하는 그래서 모든 걸 내려놓았다.

처음엔 목을 매달 생각이었다. 온실에서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목도리를 매달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죽는 것은 두려웠고, 쉽지 않았다. 몇 번을 헛손질하다 결국 목도리 올이 풀어졌다. 제풀에 지친 강진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한참을 문질러 닦다가 그것이 눈물이란 걸 깨달았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비참한 걸까. 성재현이 거짓말해서? 그래서 가짜 평화 속에 살다 정신 차린 것이 우스워서? 정녕 뭘 기대했단 말인가.

그래, 사랑한다는 말을 기대했다.

조금이라도, 당신이 나를 기꺼이 아끼고 원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가엾게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삐익, 삐익,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매운 연기가 금세 온실을 감쌌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던 강진하는 이내 제자리에 앉았다. 점점 불이 번져오고 있었다. 합선으로 난 화재일까. 많고 많은 값비싼 화분에 불이 붙는 걸 바라보며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강진하도 그저 20억을 주고 사들인 화분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성재현에게 했던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행복했었다. 마치 다시는 이루지 못할 행복처럼, 너무나도 달콤해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게 거짓이란 걸 알게 된다면 그 뒤론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까. 두려워서, 무서워서.

언젠가 버림받을 날이 올 걸 알기에.

뜨거운 열기가 나부꼈다. 불길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저택에 불이 난 게 아니라 온실이라서. 성재현에게는 닿지 않을 화재라서. 그런 와중에도 당신 생각을 하는 제가 우스워서 피식 실소가 나왔다. 그는 절룩거리며 불이 치솟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끼쳐오는 화기에 몸 전신이 따끔거렸다. 어느 틈에 옷자락에 불이 붙어있었다. 불이, 온몸으로 번져 든다. 아, 이제 정말 죽는구나. 타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던데. 어쩌면 그 고통이야말로 자신의 업보에 어울리는 죽음일까.

매운 냄새에 더 이상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던 그 순간,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등 뒤로 다가온 기척이 강진하를 붙들어 잡았다. 소방관일까. 아니면 급하게 화재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호원이거나. 뜨거운 불길이 사방에 솟구치고 있었다. 분명 그 사람에게도 불이 붙었을 터였다. 그냥, 두세요. 강진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에게 재차 말했다. 내버려 둬요. 당신까지 이러다가.

그는 담요를 강진하를 씌우고는 재빠르게 불 속을 내달렸다. 우르르, 녹아 무너져내린 기둥과 쓰러진 화분 때문에 통로가 엉망진창이었다. 무작정 헤치며 나온 두 사람이 열풍에 내던져지듯 잔디밭을 굴렀다.

스프링클러로 축축해진 잔디밭 위를 구르던 몸이 멈췄다. 위잉위잉, 멀리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누가, 물 좀 가져와요! 전무님!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누가 화상 처치 좀 해봐요! 구급차 불렀습니까? 어쩌다 화재가…. 공사 중에 전기선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전무님, 손이. 흐릿한 의식 가운데 대화가 빠르게 물살처럼 흘러갔다. 강진하는 가슴을 꾹꾹 누르는 압박감과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숨결을 느꼈다. 숨이 막히기보다는 마치 부드러운 걸 삼키게 하는 듯 다정한 호흡이었다.

“제발.”

가슴을 꽉꽉 누르며 누군가가 애타게 말했다. 가늘게 감은 눈꺼풀 위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진하야.”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강진하는 저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했다. 후두둑, 눈꺼풀 위로 한두 방울 떨어지던 물기가 어느덧 비가 되어 퍼붓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철제 기둥이 끼익, 흔들리며 폭삭 무너졌다. 화염을 등지고서 성재현은 강진하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가려고 하지 마.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

“…….”

“내가 너를 가졌어. 그리고, 나도 너에게 줬잖아. 응?”

붉어진 손이 재가 묻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너도 내가, 망가진 것만 같아? 그래서 견딜 수 없었어? 몇 번이고 도망쳐야 할 만큼, 내가 두려워?”

헝클어진 얼굴이 재로 얼룩져있었다. 부어오른 입술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날 감당해줘.”

울고 있는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희뿌연 시야에서 흐느적거린다.

“나는, 너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성재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뭘 바라냐고, 내게 물었었지?”

“…….”

“그럼 나를… 사랑해줘.”

절박한 애원이, 속삭임이 멀어진다. 사랑해줘. 몸을 꽉 끌어안은 팔이 바들바들 떨린다.

“네가… 날 사랑하길 원해.”

아, 희미하게 미소 지은 강진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랑해달란 말은 너무나도 무거웠으나, 그럼에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이루던 것을 바야흐로 마침내 손에 거머쥔 것만 같아서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아주, 편안하게도.

**

─오늘 오전 열한 시, 석영 미래미술관 관장 성미령 고문이 미래미술관 비리 및 횡령에 대한 책임을 모두 지고 사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에서는 성미령 비자금 사건에 대하여….

“정말 휠체어 없어도 괜찮겠어요?”

“네. 목발로도 충분해요.”

“저번에 보니까 많이 절던데.”

“오래 방치해서 별수 없대요. 재활 치료 열심히 해야죠, 뭐.”

같은 병실을 쓰던 남자가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강진하가 한쪽 발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편의점에서 사 온 알로에 주스 세트를 마지막 선물로 건넨 강진하는 카디건을 챙겨 천천히 병실을 나왔다.

병동 앞 가로수가 가을 색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강진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목발을 짚고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 내려왔다. 배낭이 좀 무거운 탓에 걸음이 자꾸 기우뚱 흔들렸다. 그는 목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오전 버스 정류장은 한산했다. 버스 노선을 살펴보던 강진하는 바로 오는 버스 문 앞에서 기사에게 물었다. “청담역 가는 거 맞나요?”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그가 목발로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좌석에 앉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강진하는 바깥을 멍하니 내다봤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 엄마 손을 두고 먼저 촐랑촐랑 뛰어가는 어린아이. 평온한 일상의 풍경에 강진하는 넋을 놓고 버스 바깥을 내다봤다.

버스는 한참을 돌고 돌아서야 청담역 정류장에 멈췄다. 언덕을 올라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게다가 청담역보다는 봉은사가 그나마 더 가깝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한 달 사이에 이렇게나 아둔해지다니, 기껏 받은 정신과 치료가 무색한 건망증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택시를 타는 게 나았을 텐데. 속으로 한탄하면서 강진하는 천천히 비탈을 올랐다. 사람이 많던 사차선에서 점점 멀어지자 화려한 벽으로 둘러싸인 저택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가려는 목적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었다. 긴 시간을 들여 끝자락에 도달한 강진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저택의 현관을 바라봤다.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실 앞면으로 [공사중-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차단기 앞에 놓여있었다. 그 앞에는 장비를 실은 트럭과 포크레인 등등이 대기 중이었다. 출입구를 가로 막고 서 있던 경비원들은 언덕을 오르는 강진하를 가로막지 않았다. 강진하는 목발을 짚고 뚜벅, 뚜벅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 올랐다.

화재 이후로는 처음 들어와 보는 저택이었다. 무성하게 핀 정원수를 지나치자 넓게 피어난 잔디가 파릇파릇하게 빛나고 있었다. 익숙한 저택의 정경을 지나쳐 오르자 마침내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잿더미가 된 온실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불타 무너져 잿더미가 되어버린, 무너져버린 낙원이었다. 강진하는 까맣게 타버린 수목과, 깨진 유리 조각만이 그 순간의 절망을 남기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성재현은 병실에 오지 않았다. 매주 한 번씩 꽃바구니를 보내긴 했지만 직접 얼굴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일주일에 세 번 면회 온 박균홍 차장이 “잘 지내신다”고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성재현은 마치 강진하의 삶에서 스스로를 잘라낸 것처럼 흔적을 지웠다.

결국 질려서 버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강진하는 그가 꽃바구니마다 남긴 카드를 버리지 않고 모았다. 그가 보내는 장미 꽃바구니에는 늘 꽃말이 적혀있었다. 분홍 장미, 사랑의 맹세, 붉은 장미, 정열적인 사랑, 흰 장미, 새로운 시작.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성재현, 이라는 글씨가 담담한 필체로 쓰여있곤 했다.

이름 한 자, 한 자, 결코 잊지 말라는 것처럼.

점심 식사를 하러 나오는지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우르르 길목을 따라 내려왔다. 오도카니 서서 한참 동안 저택 출입구를 바라보던 강진하가 목발을 짚고 몸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모양의 세단이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목발을 짚고 강진하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게 칠한 차창 앞에 서서 강진하는 시위하듯 한참 동안 창문을 마주했다. 스르륵, 차창이 내려갔다.

강진하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정영호에게 먼저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창문 안쪽에 앉아있는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잘 지내셨어요. 전무님.”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네.” 하고 대답했다.

“강진하 씨도 잘 지냈습니까.”

“예, 전무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요.”

다시 말이 끊겼다. 쿵, 쿵, 공사판에서 울리는 소음이 적막한 가운데를 메웠다. 화재로 소실된 온실을 허물면서 저택 재공사에 들어간다는 뉴스는 이미 접한 뒤였다. 오랜 세월 변화라곤 도통 없던 저택을 아예 허물고 새로 짓는다는 선택을 하리라곤 강진하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여기로 나온 걸 보니 무사히 퇴원한 모양이군요.”

“통원 치료는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요.”

성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고르던 강진하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절, 버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간 찾아오지 않으신 이유도 그래서라고 생각했고요.”

그는 가만히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강진하가 말을 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병원에서, 내내, 전무님이 제게 한 말을 떠올렸어요.”

“무슨 말을요?”

“…사랑해달라고 했던 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던, 원하는 게 없다던 남자의 고백이었다. 애원이었으나 명령이었고, 명령이었으나 절박하여 귀를 막을 수 없던 울음 같은 호소였다. 강진하는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그 말을 수없이 되뇌고 곱씹었다. 눈을 감으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고 귀를 막으면 귓속에 목소리가 새겨질 것처럼 웅웅 울렸다.

강진하는 소매와 붕대로 가려진 성재현의 오른손을 응시했다. 불에 짓이겨진 상흔이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시선을 느낀 성재현이 손을 뒤로 가리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생각한 결론은 뭐였는데요.”

“아직… 고민입니다.”

저런. 가볍게 혀를 찬 성재현은 빙긋 웃었다.

“영영 잊어버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라도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그럼,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저 놓아버리시려고 했습니까.”

“아니.”

시계를 한 번 매만진 그가 대답했다.

“만약 내게 오지 않겠다면… 어디 한 번 정도는, 기다려볼까.”

심호흡 한 번.

“그래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번에도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죠.”

심장 고동 소리.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더라고. 난 누군가를 직접 찾아가는 것도, 여유를 부리는 것도 이미 해봤거든요.”

밤과 파랑에 젖은 것처럼 깊은 눈에 강진하의 얼굴이 담겼다. 성재현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답을 새겨듣는 흰 얼굴은 진지하면서도 고요했다. 그리고 사로잡힐 것처럼 온유한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진 않으면 좋겠네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늘 외로웠거든요. 아주 많이.”

슬쩍 불어든 가을바람이 볕과 달리 축축하고 차가웠다. 두 남자는 서로를 놓지 않을 것처럼 마주 보고 있었다. 단단하게 맞물린 나뭇가지처럼, 혹은 엉켜 자라난 꽃과 줄기처럼 억세고 질긴, 인연 같은 시선이었다. 카디건을 살짝 여미는 손끝을 바라본 성재현이 차 문을 열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타요. 가는 길까지, 태워다줄게요.”

강진하는 열린 차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는 길이 어딘지 아직 정하지도 않았다. 아직 머물 거처도, 살 집도, 돌아갈 곳 하나 없는 맨몸이었다. 그러니 괜찮다고 거절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다. 그러면 영영 그와는 다시 만날 일도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엔딩을, 강진하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찰나이자 순간이었다.

강진하는 열린 차 문을 향해 천천히 들어섰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붉은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저택을 등지고 부드럽게 비탈길을 내려섰다.

지극히도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온실낙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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