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Round 0 (1) (7/8)

4. Round 0 (1)

닷새 동안 퍼붓던 비가 그쳤다.

성재현은 느지막하게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평소 한식을 선호하던 그였지만 오늘은 일부러 다르게 부탁했다. 시금치 키쉬, 팬케이크, 블루베리, 각종 잼과 버터 그리고 시럽. 처음 미국 기숙학교를 들어갔을 때 먹었던 아침 식사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했다.

열두 명도 앉을 수 있는 긴 사각형 식탁에는 성재현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남은 공간에는 신문 세 개가 나란히 늘어졌다. 울산 공단에서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 10조가량 되는 비자금을 홍콩 은행에 무기명계좌로 숨겼다가 기소된 모 그룹 회장이 질환으로 검찰에 출석하지 않았고, 연예인 한 명이 강남 피부의원에서 프로포폴 다량 투약으로 응급실행.

그 많은 기사들 가운데 세한은 단골 글자였다. 하반기 초에 세한전자에서 출시될 신규 디스플레이 산업 전망, 책임경영권과 차세대 후계, 재벌 3세의 행보를 주제로 한 논평. 이외에도 자잘한 몇 가지 기사. 평온하고 무난하고 무탈하고 조용한 신문을 읽으며 그는 팬케이크를 입에 넣고 씹었다. 말랑말랑하고 푹신푹신한 단맛이었다.

띠르르, 내선 전화가 한 번 울렸다. 머지않아 식당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한 그녀는 성재현에게 방문객이 왔다는 사실을 전했다. 성재현은 대답 없이 둥그런 팬케이크를 사각형으로 잘랐다. 쿵, 쿵, 발을 굴리는 소리가 우렁찼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촌은 성재현 목전까지 걸어왔다. 씩씩 더운 숨을 내뱉은 권재림이 다급하게 말했다.

“강진하 어딨어?”

인사도 없고 들이닥치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성질 급한 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성재현은 빙긋 웃으며 접시를 가리켰다.

“마침 잘됐네. 아침 들어.”

“내가 너랑 아침이나 먹으려고 온 줄 알아?”

“선희 씨, 여기 손님상도 좀 부탁하죠.”

여자가 발 빠르게 매트를 깔고 포크, 나이프, 냅킨과 컵을 준비했다. 손님이 올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몇 분도 되지 않아 따뜻한 팬케이크와 소시지 등이 곱게 담긴 접시가 놓였다. 성재현은 눈짓으로 재차 앉으라고 권했다. 권재림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재현은 다시 묵묵히 식사를 했다. 팬케이크에 버터를 덕지덕지 바르고, 잼을 덩어리째 얹고, 시럽을 질척하게 뿌리고, 블루베리를 으깨서 올렸다.

“강진하 어디 갔는지만 알면 갈 거니까 빨리 말해.”

성재현은 버터와 소스에 절인 팬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당연하게도 달았다. 끔찍하게 단맛에 목구멍부터 등줄기가 찌릿찌릿 울렸다. 쾌감과 비슷한 단맛을 씹어 삼킨 성재현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강진하 씨는 이미 닷새 전에 계약 만료로 나갔어. 비상 연락처로 남겨둔 주소는 창원에 있는 집이고.”

“집에 없어. 이미 확인했다고. 자양동에 있는 원룸도 다 뒤져봤어. 안 온 지가 한 달은 넘었다더라.”

“하하, 집이 어딘지 알고는 있었나 보네.”

“말 돌리지 말고, 어디 있냐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성재현은 나이프를 내려뒀다. 물로 입가심을 하고 냅킨으로 젖은 입술을 살금살금 닦았다. 우아한 동작은 대화의 살벌함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평화로웠다. 이윽고 그는 눈썹을 팔자로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주말 아침부터 찾아와서,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나도 너 이해 안 돼. 그러니까 대답이나 하지 그래?”

“미안하지만 몰라.”

“몰라? 웃기고 있네. 너말고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재밌네.”

두 손을 모아 깍지 낀 성재현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장례식장에서, 강진하랑 잘 놀아줬어?”

그 말에 권재림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놀아줬다는 표현은 지나친 순화인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턱을 괸 성재현이 생글거리며 되물었다.

“음? 안 했어?”

“뭘 말하는 거야.”

“섹스.”

어릴 때 병으로 죽다 살아난 탓인지, 권재림은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했다. 남이 가진 것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기가 갖고 싶어 했다.

참으로 고약하고 귀여운 취향이 아닐 수가 없다.

장례식장 주소 하나만 알려줬는데도 앞뒤도 안 보고 튀어갔다. 저 성질머리에 가만히 있었을까. 호텔에서도 약 때문에 나사가 빠져서 놓친 먹잇감이지 않았던가. 애가 타다 못해 녹아 문드러질 만큼 참았을 터였다.

권재림은 “아.” 하고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존나 좋았지. 얼굴은 얌전하게 생겨서 잘 빨더라.”

“그래?”

“생각 같아선 임신도 시키고 싶은데, 아쉽게도 불가능하더라고. 그나저나 왜? 설마 전무님 몰래 강진하 좀 따먹었다고 화내게?”

빈정거리는 말투로 권재림이 이죽거렸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은 사나웠다. 언제든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저급하고 과장스러운 권재림의 표현에 성재현은 반듯하게 웃었다. 진즉 예상한 상황인데 화낼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화를 왜 내겠어.”

적어도 권재림한테는 화나지 않았다. 다른 쪽이라면 모르겠지만. 식탁에 몸을 기댄 권재림이 턱을 들고 매섭게 노려봤다.

“그럼, 뭐 하자고 시비를 거는데? 어디 해봐, 나는 형 안 무서워.”

“나야 네가 뭘 하든 상관없어. 그런데 고모님께선 좀 걱정스러우실 거 같아서 말이야.”

“아하, 그래서 패륜아 취급을 해보시겠다?”

“겨우 회장님 달래서 한국 들여왔는데 또 사고를 쳤다. 근데 그게 섹스 문제다? 가뜩이나 스캔들 찌라시로 말 돈다면서. 고모님께서 손쓰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하하, 진짜 황당하네. 강진하랑 잔 걸로 무슨 그런 난리가 나냐. 우리 할아범이 날 좀 성가시게 여긴다지만 억측이 심하네.”

“어떤 머저리가 너한테 강진하 핑계 대고 돈 뜯으려고 협박했던 건, 좀 위험하지 않겠어?”

굵은 눈썹이 실룩거렸다. 성재현은 안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맞은편으로 휙 내던졌다. 검은색 USB가 흰 식탁보에 쓰러진 장기말처럼 뒹굴었다.

“원래 너한테 갈 물건이었어. 내용물 보고 싶으면 보든지.”

“이게, 대체 뭔데.”

“흐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으려나. 강진하 씨가 좆 잘 빨게 된 이유?”

저질스러운 말을 내뱉는 얼굴은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담백하고 고아했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볕이 따사롭다. 성재현은 다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오래 우려서 떫었다. 이런, 너무 여유를 부렸던 모양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권재림이 식탁을 쾅 내리쳤다.

“너… 일부러 나한테 장례식장 알려준 거지.”

“내가?”

“이딴 식으로 사람 갖고 놀려고 거기다 보냈냐?”

“글쎄. 조문은 네 선택이었지. 내가 강요한 적은 없어.”

“씨발, 의도한 건 맞잖아!”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식당 한편에 준비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콸콸 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적막을 채웠다. 걸어둔 수건에 손을 문질러 닦은 성재현이 권재림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물로 식은 손이 어깨를 두드렸다.

“의도했든 아니든,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씨발, 성재현!”

“한 번 따먹게 해줬으면, 닥치고 있어.”

빙긋 웃는 얼굴이 권재림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시끄러워서 식사에 방해되잖아.”

으스러트릴 듯한 살기가 어깨를 짓누른다. 겉보기에는 다정한 모습이었지만 오장육부가 뒤집힐 듯한 광기였다. 참다못한 권재림이 벌떡 일어나 성재현의 멱살을 잡았다. 목을 죄는 강한 힘이었다. 숨이 막힐 법한데도 성재현의 두 눈에는 파란(波瀾) 한 조각 담기지 않았다. 잔잔한 심해였다. 무서우리만큼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놔.”

느슨해진 목소리로 성재현이 명령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더 소란피우면 그다음은 말다툼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한껏 노려보던 권재림은 결국 움켜쥔 주먹을 풀었다. 성재현은 구겨진 셔츠를 털었다. 오물이라도 묻은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기분이 역겨워진다. 발로 의자를 세게 걷어찬 권재림은 식탁보에 있던 USB를 낚아챘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운동화 신은 발이 바닥을 찍찍 사납게 긁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목 아래 긁힌 자국이 남았다. 의사를 부를지 묻는 말에 성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식당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하얀색 상자가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검은 리본을 맨 상자는 고급스럽기도 했다. 아침에 미리 부탁한 멜론 케이크였다. 성재현은 상자를 챙겨 들었다.

창 너머 드러난 볕이 눈부시게 화창했다. 비가 그친 정원은 산책하기도 좋았다. 만날 손님도 없고, 무례한 방문객도 이미 떠났다. 성재현은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별과 그늘이 땅 위로 얼룩덜룩했다.

돌아가신 조부께서는 당시 삼성동에 터를 잡으시면서 정원을 화려하게 짓길 바라셨다. 교회에 수억을 후원하며 천국을 바라던 그는 자신이 사는 땅에 작은 천국이 생기길 바랐다. 땅을 평평하게 깎는 대신 일부러 굴곡을 남기고 곳곳에 값비싼 꽃과 웅장한 정원수를 공들여서 심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에덴동산이었다.

거대한 온실 입구 앞에서 성재현은 자물쇠를 하나씩 풀었다. 꽉 닫혀있던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과 섞인 풋내가 코끝에 서렸다. 얌전하게 서서 가지를 내밀고 있는 나무 사이를 지나친 그는 한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강진하는 바닥에 옹송그리고 있었다. 등 뒤로 두 팔이 줄에 칭칭 묶인 채였다. 불편하겠지만 별수 없었다. 두께가 최소 몇 센티미터는 되는 방탄유리를 부수겠다고 사흘 동안 난리를 쳤다. 그 바람에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 등이 퉁퉁 부어올랐다. 예쁜 손을 스스로 망가트리는 꼴이 보기 딱하고 가여워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재갈을 물리고 사지를 묶어다 앉혀놓은 모습이 꼭 화분에 꽂힌 분재 같다. 성재현은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풀잎이 들러붙어 엉망이 된 검은 머리카락, 흰 얼굴, 하도 깨물어서 피딱지가 붙은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입속. 벌어진 틈에 쑤셔 박으면 반사적으로 꿈틀거릴 혀를 떠올렸다. 고통과 괴로움을 참느라 찡그린 눈매는 발긋해질 테고, 광대 아래는 황홀경의 빛으로 물들 것이다. 그 위에 정액을 퍼붓고 싶다.

열기로 탁해진 숨을 길게 내뱉었다. 성재현은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묵직해졌다. 존재만으로도 상스럽고 음탕하다. 참으로 천박한 핏줄다웠다.

만들어진 곳에 어울리는, 만들어진 내 꽃.

기척을 느꼈는지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뜬다. 성재현은 몸을 숙여 시선을 마주했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잘 잤어요?”

뺨을 만지작거리며 성재현이 물었다. 재갈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저 눈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경멸, 혐오, 분노. 성재현은 상자를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식사를 가져다줘도 안 먹길래, 케이크 가져왔어요. 멜론 케이크. 기억하죠? 아홉 살 때, 그거 먹겠다고 여기 들어온 거.”

리본을 푼 성재현은 안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멜론과 크림 냄새가 진동했다. 달고 싱그러웠다.

재갈을 내려주자마자 입술이 벙긋거린다. 목이 쉬어서 풀벌레가 우는 듯했다.

풀어줘.

기껏 귀를 기울인 성재현은 혀를 찼다. 어릴 때는 그래도 고분고분했는데, 바깥세상에 너무 오래 풀어준 탓이었다. 케이크를 한 손에 든 채 성재현이 서운한 얼굴로 웃었다.

“케이크 안 먹을 거예요?”

대답이 없다. 노려보는 시선에 독이 바짝 올랐다. 표독스러운 얼굴에 뱃속이 뒤틀렸다. 열기가 폐까지 달궜다. 손에 든 케이크를 내려둔 성재현은 무심하게 강진하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대로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았다.

뭉그러진 단내가 지독하게 피어오른다. 소매며 바지가 생크림으로 엉망이 되었다. 성재현은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생크림이 엉망진창으로 묻은 그의 얼굴을 붙잡아 바지춤에 가져다 댔다. 눈물과 생크림으로 엉망이 된 입술에 부푼 고간을 느긋하게 문질렀다.

짜릿했다.

**

온실에 있는 나무는 대부분 다루기 까다로운 품종이었다. 병충해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덥거나 추우면 잎사귀 끝부터 노랗게 시들었다. 성재현은 관상용으로 들인 자신의 나무와 꽃을 좋아했다. 비록 손은 많이 가지만 그만큼 길들이는 즐거움이 있었다.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누군가가 와서 돌보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오로지 보고 가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 그렇기에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을 단념할 수도 없고, 영역 너머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죽음과 생애가 전부 타인의 손 하나에 달려있었다.

온실 안은 적막했다. 소음이라곤 물소리와 환풍기로 공기가 들락이는 바람뿐이었다. 지나치게 아늑한 고요는 마치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 같았다. 쓰러진 화분에서 튀어나온 흙과 나무로 바닥이 엉망이었다. 화분에 심은 종자는 성목 한 그루가 억대를 호가하는 희귀종이었다.

“힉, 으흑.”

버둥거리던 강진하의 머리를 붙잡은 성재현이 자세를 강제로 고정시켰다. 괴로운 듯 일그러진 얼굴에는 닦아내지 못한 생크림, 흙과 풀이 들러붙어 있었다. 성재현은 강진하의 귓가에 성기를 비볐다. 귓바퀴 둥근 선을 따라 기둥을 느릿하게 문지르다, 귓구멍에 귀두를 조준하고 삽입할 것처럼 쿡쿡 쑤셨다. 생크림으로 미끈미끈한 뺨에 기둥을 비비적거리자 반응하듯 입술을 오물거린다. 차라리 입에다 하라는 듯 자꾸만 부추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성재현은 키들거렸다. 마음 같아선 입에 삽입하고 싶었다. 저 입속에 넣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축축하고 이들이들한 볼 안 살, 기둥으로 살짝 문지르기만 해도 움칠대는 입천장. 말캉한 혀는 부드럽고 찰진 반죽처럼 성기를 감쌀 터였다. 좁다란 목구멍까지 힘껏 쑤셔 박고 움칠거리는 감각을 만끽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볼을 홀쭉하게 오므리고 정액을 꿀꺽꿀꺽 받아마실 얼굴이 얼마나 색정적일까.

하지만 성재현은 그 모든 욕구를 참아 누르며 손에 잡힌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귀 뒤를 살살 손가락으로 만질 때마다 목줄기가 떨렸다. 고개를 든 강진하가 귀두에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하도 시끄럽게 악을 쓰는 바람에 풀어줬던 재갈을 다시 물려뒀다. 그 때문에 입놀림은 부자유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성기를 빠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귀두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는 모습은 여태 본 것 중에서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 교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재현은 강진하가 원하는 대로 입 안 가득 좆을 물려주지 않았다. 입 구멍에 쑤시는 대신 성재현은 그의 입술에 대고 귀두를 쿡쿡 찧었다. 입술과 혀만으로도 사정감이 빠르게 솟구쳤다. 허리를 앞뒤로 털레털레 흔들며 성기로 뺨을 밀어댔다.

“후우.”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며 성재현이 신음했다. 머지않아 정액이 후두둑 흰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에 물감처럼 튀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을 타고 정액 덩어리가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입에다 사정했으면 삼키고 끝났을 텐데, 별수 없게도 애석한 일이었다.

안주머니에 손수건이 있지만 그는 일부러 성기를 머리카락에 대고 닦아냈다. 더운 숨이 새근덕거리며 흩어졌다. 팔자로 기울어진 눈이 성재현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방싯거렸다.

“하으, 아, 하, 힙.”

“음? 뭐라고요?”

성재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뭉개진 발음은 흡사 짐승이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벨트를 혀로 할짝거린 강진하가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허벅지가 초조하게 달싹거렸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으, 으.”

강진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닷새간 강진하는 빈 화분을 화장실 대용으로 썼다. 첫 나흘 동안은 일부러 손을 묶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요강으로 쓴 화분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성재현은 비웃지 않았다. 상냥하게도 화분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뿐이었다.

반응이 시큰둥하니 강진하가 서둘러 성재현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댔다. 열기가 조금 가신 성기에 자진해서 얼굴을 비볐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성재현이 물었다.

“급해요?”

“에, 네.”

“소변?”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그러나 강진하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올라 발긋한 뺨이 크림과 정액으로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이런 표정으로 애원하니 성재현도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진하의 목에 채운 목걸이를 잡아당겨 몸을 일으켜줬다. 별관에 외부업체 직원 전용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본관에는 화장실만 해도 여섯 개였다. 성재현은 그중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열 걸음 정도 강진하를 끌고 간 그가 멈춘 곳은 배수구였다.

경악한 강진하와 다르게 성재현은 느긋하게 강진하의 바지를 풀었다. 몸부림쳐봤자 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힘들여 제압할 필요도 없었다. 바지를 내리고 속옷에 손을 대자 강진하가 “그, 안! 그, 망!” 하고 부탁했다. 어깨에 턱을 대고 뒤에서 몸을 바짝 끌어안은 성재현이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

“쉬 안 할 거예요?”

“흐으, 으, 윽.”

“얼른.”

드로어즈에 감싼 성기를 손으로 꽉 움켜쥐며 성재현이 “쉬이이.” 하고 속닥거렸다. 미온한 숨에 강진하가 들썩이며 고개를 숙였다. 성재현은 손으로 배를 더듬었다. 얼마나 참았는지 납작한 윗배와 다르게 아랫배는 조금 부풀어있었다. 생리 현상을 너무 오래 참으면 병날 텐데.

그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성재현은 혀를 찼다. 강진하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았다. 죽어도 자신한테는 그 어떤, 수치스러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멍청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성재현은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귀엽게 봐줄 용의가 있었다. 지금도 내심 그의 아랫배가 통통한 게 마음에 들었다. 만질 때 말랑말랑하니 감촉이 좋았다. 혀로 입술을 핥은 성재현은 그의 속옷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아, 흡!”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성재현은 그의 아랫도리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쌀 것처럼 발기했다. 흰 피부에 유독 도드라지는 탁한 분홍빛이었다. 외설적이었다. 손끝으로 툭 건드리다 손바닥을 넓게 펴 성기를 도톰하게 쥐었다.

“으, 흐아, 읏, 읍.”

“얼른 싸요. 응?”

“아아, 앗, 윽.”

약한 힘으로 주물렀을 뿐인데도 막힌 입에서 자지러질듯한 신음이 터졌다. 정작 성재현은 어리고 연약한 짐승을 돌보는 것처럼 차분하고 진중한 얼굴이었다. 재갈을 꽉 깨문 강진하는 신음을 삼켰다. 뒤통수에 달린 이음새 고리가 떨렸다. 요의를 억지로 참느라 허벅다리가 꽉 움츠러들었다. 성재현은 뒤를 무릎으로 콱 가격했다.

“여기서 싸기 싫어요? 그럼 어디서 하려고요? 경비실 앞? 아니면 대로변 전봇대?”

“아, 냐, 아으, 야.”

강진하는 고개만 연신 가로저었다. 눈물이 뚝뚝 흘러 엉망으로 뜯어진 셔츠에 맺혔다. 성재현은 더 이상 부드럽게 타이르지 않았다. 성기를 움켜쥐고서 “쉬이.” 하고 싸늘하게 속삭였다.

쪼르륵, 찔끔거리며 소변이 흘러나왔다. 머지않아 막혔던 보가 터지기라도 하듯 세차게 터졌다.

“흐읍, 흑, 으흑.”

소변을 보면서 강진하는 결국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엄청난 참변을 겪은 것처럼 서러운 소리였다. 고작 소변 좀 봤다고 이렇게 울다니.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성재현은 배수구 옆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호스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며 배수구에 고인 물을 흘려보냈다. 젖은 손을 물로 씻고 강진하의 아래를 씻겨주려던 그때였다.

“아!”

조용히 울고 있던 강진하가 갑자기 고개를 세게 휘둘렀다. 그 바람에 성재현은 턱을 얻어맞았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강진하를 붙잡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렸다.

“쓰읍.”

숨 삼키는 소리를 내며 성재현은 턱을 손으로 매만졌다. 입 안을 깨물었는지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다. 어느 틈에 강진하는 온실 문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이 물기 때문에 미끄러웠다. 결국 중심을 놓친 강진하가 기우뚱 화분 더미로 쓰러졌다. 안간힘을 다해 다시 일어난 그가 열려있는 온실 문으로 나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빠르게 걸어온 성재현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넘어진 몸을 내려다보며 성재현이 쓸쓸히 말했다.

“그렇게 움직이면 다치잖아요.”

“아.”

고개를 잡아 뒤로 젖히자 강진하가 성재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노려봤다. 독살스러운 눈빛에 성재현은 빙긋 웃었다. 고양이를 물 때를 기다리는 작은 생쥐 같은 꼴이었다. 아까만 해도 살랑거리며 겁먹은 꼴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러니 원하는 대로 해줄 수가 있나. 저 입에 좆을 물려주면 얌전히 빨기는커녕 살점이 으스러지도록 이로 깨물 것이 뻔했다. 그러면 도망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참으로 깜찍하고 측은한 계획이 아닌가.

모로 누운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엔 생크림이 묻은 채 굳었고 셔츠는 넝마였다.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아 허연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재현은 오른발로 그의 사타구니를 거칠게 비볐다.

딱딱한 자극에 강진하가 퍼뜩 몸서리를 쳤다. 구두 자국이 발갛게 피부에 남았다. 구두를 신은 발로 둔부 골을 헤집어 벌린 그는 구두코로 입구를 거칠게 쑤셨다.

“벌써부터 벌름대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하윽, 읍, 으읏.”

“이대로 안에 깊이 박아줄까요? 좆이 아니라서 아쉬워하려나.”

음산한 조롱과 함께 그는 발차기를 하듯 푹푹 발끝을 움직였다. 고통스러운지 강진하가 헐떡거렸다. 난폭한 삽입이었지만 오히려 성기는 점점 발기하고 있었다. 바짝 일어선 성기를 자근자근 밟자 강진하가 연약한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이렇게 밝히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싫어서 도망치려고 하는 걸까. 설마 권재림한테 마음이 동했을까. 그럴 리 없었다. 그랬다면 권재림이 그런 식으로 지랄하고 가진 않았을 터였다. 아니면 그 예비 검사 친구.

그러다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쓸데없는 잡생각이 이리저리 튀는 것이 성재현에게는 무척 낯설었다. 굳이 이런 것들을 왜 생각하는 거지. 가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상념이었다. 깔깔한 입술을 핥은 성재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이 무척 묘했다. 아니, 묘한 게 아니라 불쾌한 상심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으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네가 나를 선택할 수 있을 리가.

싸늘한 얼굴로 강진하를 내려다보던 성재현은 벨트를 풀었다. 성기는 아플 정도로 두툼하게 부풀어있었다. 등 뒤에 몸을 바짝 붙이자 강진하가 간격을 벌리려 허리를 들썩였다. 성재현은 그의 허리를 붙잡아 엉덩이만 들게 했다. 입구에 선단을 조준하고서 단숨에 찔러넣었다.

“흐악!”

입구가 뻑뻑해 반도 들어가지 못했다. 성재현은 개의치 않았다. 엉덩이를 세게 때리자 잠시나마 조임이 느슨해졌다. 그대로 힘껏 안으로 밀어 넣자 입구가 성기 절반을 간신히 머금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주변 살이 오물오물 맞물렸다. 성재현은 양 손목을 결박한 끈을 고삐처럼 움켜잡고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두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사타구니가 끈적하게 젖었다. 철퍽, 철퍽. 엉덩이에 배가 닿을 때마다 축축한 물기로 끈적거렸다. 교접부에서 찌꺽거리며 포말이 일었다. 더럽고 난잡한 꼴이었다.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성재현은 상당히 결벽한 성향이었다. 이런 온실에서 짐승처럼 교미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강진하 같은 것에 그리 큰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가지고 놀 만큼 놀다가 망가지면 버릴 뿐이었다. 소모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에 목을 맬 필요가 있던가. 여기 들어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일회용이었다. 물건도, 사람도 다 동일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이것을 곁에 두겠다고, 난생처음 사람을 붙잡아 가뒀다. 성재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콧숨을 씨근덕거리며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성이 꺼진 눈은 정상적인 빛이 아니었다.

퍽, 퍽, 엉덩이에 하복부가 닿을 때마다 구겨지는 듯한 강한 타격음이 났다. 땀으로 젖은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그는 거칠게 빨아당겼다. 만찬을 즐기는 포식자 같았다.

“하아.”

“아으, 으, 윽, 읍.”

강진하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성재현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우는 소리도 없이 그저 탁한 신음만 재갈에 가로막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기력해졌다. 차라리 지칠 때까지 하다 어서 끝내라는 듯 체념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성재현은 도리어 감질났다. 저것이 흐느끼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애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스스로 자신을 원하게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미친 생각인데도 도저히 시동을 끌 수가 없었다. 귀를 물고 빨던 성재현은 그의 성기를 더듬더듬 손으로 잡고 부드럽게 쓸었다. 일부러 쾌락을 자극하려는 듯한 손길에 강진하는 도리어 반발했다.

“읍, 으!”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비통하게 떨렸다. 고개가 절로 위로 향했다. 강진하는 두 눈을 뜨고 벌벌 떨고 있었다. 반질반질 젖은 재갈 사이로 삼키지 못한 침이 질질 흘렀다. 쾌감에 눈꺼풀이 몽롱하게 풀렸다. 분홍빛이 도는 눈시울이 미약하게 경련했다.

“하아, 윽.”

꽉 오므라드는 쫀쫀한 내벽에 성재현은 평상시답지 않게 거칠게 신음했다. 팔을 움켜잡고 번식기를 맞은 수컷처럼 애타게 움직여댔다. 깊은 안까지 침범한 성기를 내벽이 옴찔거리며 조여댔다. 뿌리까지 삼킬 기세로 엉덩이가 흔들거렸다.

“으웅, 윽, 흐, 읏.”

“씨발.”

탄식에 젖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성재현은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뿌리부터 간질간질했다. 손을 아래로 뻗어 아랫배를 더듬었다. 납작한 배에 성기 윤곽이 만져지는 듯했다. 배를 찬찬히 만지자 강진하가 당황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그 순간 사정감이 고양되며 배 속이 지끈거렸다. 문득 권재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임신시키니, 마니. 성교육도 덜 된 수준의 멍청한 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지금은 불현듯 충동처럼 저지르고 싶은 걸까. 성재현은 강진하의 귀를 핥으며 속삭였다.

“안에다 싸줄까요. 응? 운 좋으면 임신할지도 모르잖아요.”

“으윽, 읍, 흐윽.”

“응? 원한다고 말해봐요. 갖고 싶다고. 전무님 애 배고 싶다고.”

옹송그린 몸에 바짝 기울이고서 성재현은 재차 물었다. 명령하는 어조, 동시에 대답을 갈구하는 것처럼 애타는 목소리였다. 강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흐느낌조차 사그라지고 숨소리만 나약하게 새근덕거렸다. 완고한 거절이었지만 성재현은 어차피 그의 말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팍, 깊숙하게 밀어 넣은 채 사정했다. 꿀렁거리며 쏟아지는 정액을 담느라 위로 들어 올린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토닥거렸다. 성난 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성재현은 강진하를 바짝 끌어안고 있었다. 이윽고 묵직했던 아래가 산뜻해졌다. 등에서 상체를 떼어내며 성재현은 성기를 빼냈다. 힘없이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릎으로 겨우 지탱하고 버티던 강진하의 몸도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옷을 추스른 그는 젖은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엉망이 된 온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끼던 화분이며 옹기종기 모여있던 관엽목조차 벌목된 우림처럼 쓰러져있었다. 어차피 손봐야 했으니 상관없었다. 후텁지근한 숨만 내쉬며 잠자코 강진하를 내려다봤다. 울음을 참느라 빨개진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고혹적이었다.

호스에서 여전히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홍수라도 난 듯 엉망이 된 바닥에 웅덩이가 졌다. 호스를 집어 든 성재현은 강진하의 몸 위에 물을 뿌렸다. 일부러 다리 사이를 겨냥해 물줄기로 흠뻑 적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물을 뿌렸다. 달달 떠는 얼굴에 그제야 독기가 빠져있었다. 창백한 몸은 초라했다. 가엽고도 천박한 모습이었다.

저대로는 어디로도 달아날 생각조차 못 하겠지. 그럴 수도 없게 만들어주면 그만이었다. 조금 누그러지고 나면 방에 두고 친히 예뻐해줘야지. 침대 옆에 올려두는 어린애의 작은 인형들처럼 애지중지 여겨줄 생각이었다.

호스를 집어 던진 성재현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베일 같은 커튼을 한 손으로 걷은 채 성재현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폭양으로 뒤덮인 정원 위로 그림자 하나가 총총거렸다. 이곳 사람들은 함부로 저택 안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저런 산만한 침범은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애’구나. 성재현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애’에 대해서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애’를 함흥댁 외손주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강 비서 아들이라 지칭했다. 웃으면서 쓰는 말이야 한결같이 곱고 다정하기 마련이었다. 무리 지으며 수군거리기 좋아하던 몇몇 집안 도우미들은 그 애를 미친년네 아들이라 불렀다. 미친년이란 단어는 성재현에게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상스럽고 경박하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불운하게도 알고 있었다.

성재현은 개 우리 앞에 섰다. 커다란 개는 아버지가 데려온 사냥개로 무척 사나웠다. 그럼에도 개는 사람보다도 영특해서 어린 시절부터 저를 보살펴준 어린 주인에게는 순종적이었다. 성재현이 몸을 낮춰 우리 안을 들여다보자 엎드려있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쳤다. 산책 가자. 재밌는 게 있어. 목줄을 풀어 손에 건 그는 정원을 느릿하게 활보했다. 조급해할 필요 없었다. 정원이 아무리 넓다 한들 그래 봤자 담장으로 둘러싸여 밀폐된 곳이었다.

머지않아 성재현은 찾아다니던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풀밭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해를 등진 채 동요를 부르는 목소리가 낭랑했다.

성재현은 자그만 뒤통수를 바라봤다. 개를 지금 풀어버릴까. 주인 외에는 가차 없는 사나운 개는 저 목덜미를 물어버릴 것이다. 운이 나쁘면 죽을지도 모르지. 그래 봤자 사고로 끝날 것이다. 여태 있었던 일처럼 조용히 묵살되고 끝날 터였다.

성재현은 그토록 기다렸던 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주제를 모르고 아버지를 탐내던 여자의 아들이었다. 병으로 죽어가던 전 부인을 독살스럽게 저주하던, 여자의 아들이었다.

저것을 증오하냐고 묻는다면 굳이 그렇진 않았다. 증오란 자고로 가치 있어야 품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자신을 소모해야만 하는 질 나쁜 감정을 굳이 품을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저것은 불순물일 뿐이었다. 성재현은 여자에게서 저것을 받았다. 태어나기 위해 소유되었다. 배 속에서 죽을 뻔한 걸 자신이 살려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마음대로 해도 그만이었다. 정원에 함부로 피어난 잡초를 뜯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축.

할머님은 그들을 힐난하며 가축이라 불렀다. 집에서 대대로 나고 자란 것이라 가축이라 하였다. 가축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생각을 하겠는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렸다. 저것도 마찬가지였다.

불현듯 미지근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가지와 나뭇잎이 휘청휘청 나부꼈다. 순식간에 그늘이 파도처럼 앞으로 번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재를 머금은 커다란 나무. 기울어져 떨어진 그늘은 마치 손을 뻗은 모양처럼 보였다. 닿지 않을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갈망 어린 손길이었다.

개가 꼬리를 늘어트리고 으르렁거렸다. 날뛰는 개의 움직임에 목줄이 팽팽하게 성재현의 손목을 죄었다. 성가신 흔들림을 단단히 붙들어 매며 눈을 내리자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연못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가끔 바깥에서 울리는 차 경적, 갖가지 잡스러운 그 모든 소음. 그 모든 소리가 정지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살짝 흐트러진 호흡과 고요한 맥박, 살아있는 걸 증명하는 소리뿐이었다,

그 속에서 소년은 성재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채 물감처럼 물기를 듬뿍 머금은 눈동자였다. 볕을 쬐어 불그스름한 홍조를 띤 뺨이 흰 얼굴과 대비되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왜 천사의 뺨을 그리도 붉게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반듯하게 자란 과실처럼 예뻤다.

얕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볕이 붙어 반짝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래에 드리운 꽃과 나무의 그늘마저 선들거리며 소년의 연약한 복숭아뼈를 쓰다듬었다.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릴 때마다 갈색 눈동자가 연해졌다가 진해지길 반복했다.

참으로 이상했다. 왜 저것을 보니 문득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는 걸까. 날 때부터 친어머니와 떨어져서 자랐다. 매년 한 번씩 볼까 말까 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단편적인 순간뿐이었고 그마저도 애틋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병색으로 하얗게 질려 제게 손짓하던 어머니. 재현아, 하고 부르던 목소리.

생애에서 유일하게,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타인이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제 남은 건 그녀를 머금고 자라난 나무 한 그루였다.

어머니에게서 나온 재를 밟고, 그늘을 등진 자리에 그것이 있었다. 올려다보는 눈동자 가득 호기심과 옅은 두려움이 서렸다. 바람이 불며 잎사귀가 사그락거렸다. 구름이 지나가고 볕이 웅덩이졌다. 어느덧 올려다보던 그 애의 얼굴이, 보조개가, 발긋한 뺨이 따사로웠다. 만지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스러운 표정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개가 쓸데없이 짖었다. 그 순간 겁을 먹은 그것이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촉촉한 풀냄새가 피어올랐다. 성재현은 그것에게 손을 뻗는 대신 몸을 구부렸다. 생긋, 이유 없이 웃었다.

이름이 뭐야?

진, 진하요. 강진하.

진하?

확인차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강진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몸을 숙인 성재현은 강진하의 붉어진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렇게 타인과 이유 없이 가까이 있는데도 거북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땅을 짚고 있는 손목에는 하얀 꽃으로 엮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방울방울 매달린 토끼풀꽃이 탐스럽게도 어울렸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보기 드물게 예쁜 것이었다. 천천히, 충분하게 가지고 놀다가 내다 버려도 문제없으리라. 그러니 여유롭게 대해야 했다. 손바닥 안인 걸 깨닫고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차가 바퀴를 끄는 소리가 고요함을 꿰뚫었다. 사뿐하게 일어난 강진하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성재현은 개를 억세게 잡아끌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빙긋 웃었다. 웃는 것만큼 상대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안 보내줄 거야.

**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선 성재현은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한때는 그의 침실이자, 타인 중 누구도 들이지 못하게 했던 방 한가운데에 강진하가 누워있었다. 성재현은 마치 피조물을 바라보는 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굽어살폈다.

부산 세한호텔에서 그 여자와 다시 만났다. 어쩌면 처음부터 반은 예상된 재회였다. 그들 가족이 창원에 산다는 이야기야 캐낼 것도 없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여자는 창원에서도 정신 나간 소리를 일삼는다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여자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고왔다. 잃어버렸다 되찾은 아들이라도 대하듯 상냥한 얼굴로 도련님, 도련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마저 여전했다.

그 얼굴에서 성재현은 낯익은 예전을 떠올렸다. 그늘에서 천천히 움터 자라난 자신의 것. 서울에서 내려간 뒤로 눈 밖에서 뭘 하며 지내는지는 건너 건너 들은 말이 전부였다. 부친과 돈 문제로 고생을 한다던가. 측은하게도 저택에서 퇴출당한 사람들의 말로는 비슷비슷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맴돌다가 천천히 말라 비틀어졌다. 그들 모두 저택의 양분을 먹고 자라났으니 바깥 것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에게 아버지의 결백을 빌며 살려달라 매달릴 줄 알았는데 강진하는 그러지 않았다. 무엇을 눈치챘는지 제가 없는 사이에 오히려 보란 듯이 영역 밖으로 멀리 달아났다. 그러니 모든 게 강진하의 선택이었다. 성재현은 여느 때처럼 생긋 웃었고 여자에게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예전에 당신 아들, 나한테 준다고 했던 말 기억합니까?’

깔깔거리며 웃던 여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차분한 얼굴로 와인 잔을 세게 움켜쥐었다. 발발거리며 떨리는 손에 술이 넘쳐흘렀다. 손가락 사이로 엉킨 술이 핏물 같았다. 여자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럼 나한텐 뭘 주시려고요.’

협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갖고 있던 걸 되찾으러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물건을 거래하듯 말을 떠보고 있었다. 무엇이 필요할까. 정녕 자신의 아버지라도 내밀어줄까. 어차피 그 늙은이도 허무하게 버려질 터였다. 그런 게 필요하다면 성재현은 순순히 내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바란 건 뜻밖이었다.

복수.

그 단어에 성재현은 웃음을 삼켰다. 여자는 알고 있을까. 강진하를 낳은 순간부터 여자 또한 처절하게 응징당하고 있었다. 이 집안 남자들은 죄다 이 핏줄에 홀렸다. 평생을 성 회장 첩실로 산 함흥댁, 아버지의 주변을 맴돌던 여자. 강진하도 그들과 똑같아졌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질긴 인연처럼 이곳으로 돌아왔다. 당연한 운명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강진하가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이틀 동안 내리 죽은 듯이 잠만 자더니 이제야 눈을 뜰 힘이 난 모양이었다. 수액 줄을 밀어낸 성재현은 강진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혔다. 침대 머리에 등을 댄 강진하가 숨을 골랐다. 창백한 얼굴이 떼꾼했다. 그래도 열은 가라앉았는지 불긋불긋하던 뺨은 한결 색이 옅어졌다.

바싹 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던 성재현은 탁자에 올려둔 물병을 집었다. 입구를 열어 마실 것을 허락했다. 강진하는 고개를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아픔에 지친 몸은 저항조차 버거운지 얌전해졌다. 그는 목마른 사슴처럼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다 잘못 삼켰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뱉었다. 성재현은 기꺼이 그의 몸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토닥여줬다.

“나한테….”

강진하가 입을 열었다. 풀 죽고 쉰 목소리였다. 삐걱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대체 뭐야.”

“원하는 것?”

“이렇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내 어머니 때문에? 아니면.”

말을 잇던 강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성재현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머니를 꺼내며 자진이라도 하듯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냐고.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성재현은 아연했다. 강진하한테 성재현이 원하는 게 있을 수 있던가.

원한다는 건 곧 부탁이란 소리였다. 부탁은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자비를 바랄 때나 하는 짓이었다. 성재현이 그에게 무언가를 바랐던가. 강진하한테 어떤 것을 바란다. 원한다. 희망한다. 부탁한다. 맞지 않는 말이었다. 성재현이 강진하한테 뭘 바란단 말인가. 오히려 그 반대가 더 어울릴 터였다. 강진하가 성재현에게 어떤 것을 바란다. 원한다. 희망한다. 부탁한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오히려 강진하 씨가 나한테 바라야 하지 않을까요.”

“내 부탁, 들어줄 생각도… 없잖, 아.”

“그거야 들어봐야 알겠죠. 가능한 거라면 들어줄지도 모르죠.”

“그럼, 여기서, 나, 나가게 해줘.”

“그건 부탁이 아니죠.”

“제발, 얌전히 살 테니까.”

제발, 이란 말에 성재현은 어두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나가서 얌전히 산다니. 지금 여기 있는 게 싫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피하고 싶다는 건데, 그런 부탁이 통하기나 하겠는가. 안 된다는 말도 하기 싫을 만큼 성가신 대화였다. 강진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차라리, 죽이지 그래. 당신 내 목 조르는 거 좋아하잖아!”

그 말에 성재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모처럼 그의 말을 들어주겠다고 했건만 고작 한다는 말이 형편없었다. 죽이라느니, 목을 조르느니. 물론 둘 다 즐거운 일이었다. 강진하를 죽일 듯이 몰아붙이는 것도, 그가 울며불며 통곡할 때까지 목을 조르며 괴롭히는 일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죽이는 일은 더더욱. 그러면 아쉬울 걸 알고 일부러 도발하는 건가. 아니면 아파서 오락가락하는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바라던 반응은 아니었다. 성재현은 피식 웃었다. 침착하게 화를 누그러트렸다. 앞서 꺼낸 말은 완전히 묵살한 채 생긋 웃었다.

“감기가 아직 안 나은 거 같으니 얌전히 쉬어요. 약도 제때 먹고 식사도 거부하지 말고.”

“…….”

“내 말 알아듣겠죠.”

성재현은 턱을 붙잡아 그의 눈에 자신만을 담게 했다. 대답은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는 얼굴에 문득 성재현은 그에게 입 맞추고 싶어졌다. 주저하지 않았다.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며 혀로 주변을 핥았다. 순응하듯 입을 벌리는 모습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몸짓, 손짓, 눈짓 하나. 파도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가늠할 수 없어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아무래도 자신 또한 이것에게 홀린 모양이었다.

그래, 홀린 것뿐이었다.

유령 같은 감정이었다.

**

무려 7일 만의 귀가였다.

비서를 돌려보낸 성재현은 혼자 지하로 내려왔다. 침실 문에 새로 단 자물쇠는 열쇠로만 열 수 있는 구식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어두웠던 방에 서서히 불빛이 퍼졌다. 방 안은 이전보다 휑뎅그렁했다. 침대, 탁자, 소파 같은 큼직한 가구뿐이었다. 깨질 만한 유리나 거울, 찬장은 죄다 치우다 보니 허전하다 못해 카펫 깔린 공터 같았다.

시트가 구겨진 침대 위는 허전했다. 성재현은 돌아오기 전 확인했던 CCTV 장면을 떠올렸다. 굼벵이처럼 침대를 기어 다니던 몸이 중심을 잃고 침대 아래로 떨어졌었다. 예상대로 강진하는 침대 옆 바닥에 모로 누워있었다. 손발이 묶인 상태로 움직이다가 결국은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성재현이 부재한 일주일 동안 집 안에도 직원은 상주하는 가정부 한 명 말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즉 강진하는 성재현이 오기 전까지 이 방에 고립되어 있었다. 성재현말고는 이 방에서 그를 꺼내줄 사람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일부러 슬리퍼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성재현은 흐릿한 조명에 드러난 강진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죽이라며 가증스러운 말만 지껄이던 얼굴은 진땀으로 반들거렸다. 그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대로 눈두덩이에 입을 갖다 대고 말라붙은 눈물마저 핥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운 빛깔이었다.

“나 왔어요.”

힘없이 뜬 눈이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바짝 올랐던 독이 완전히 증발했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혹은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궁핍해 보였다. 버둥거리며 강진하가 성재현에게 기어왔다. 그래 봤자 제자리걸음이었다. 힘 빠진 몸으로 멀리 갈 수도 없었겠지. 성재현은 친절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잘 지냈을 리 없는 걸 알면서도 굳이 안부를 물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편의를 봐준 편이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소변 하나 못 볼 걸 걱정해 기저귀도 채워줬다. 혹시 몰라 욕실 쪽에 물을 담아둔 강아지 전용 그릇도 배치해두는 배려까지 해줬다. 비록 거기까지 기어갈 힘이 있었을진 모르겠지만.

“흠, 대답하기 싫은가?”

강진하가 눈꺼풀을 감았다 뜨길 두 번 반복했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지 않았다. 답답했겠네. 성재현은 물고 있던 재갈을 풀어줬다. 탁한 숨을 내뱉은 강진하가 중얼거렸다.

“물, 물 좀….”

성재현은 미리 가져온 물병을 깨끗한 손바닥에 부었다. 손을 내밀자 강진하는 거부감없이 고인 물을 열심히 핥아 먹었다. 말랑말랑한 혀가 손바닥을 핥을 때면 물을 다시 부었다. 줄줄 쏟아지는 물이 아깝다는 듯이 손에 코를 처박고 쪽쪽거렸다. 경배의 키스라도 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고 애잔해 성재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목 많이 말랐구나.”

“아, 아….”

“물 말고 다른 건? 배는 안 고파요?”

엄지로 눈 아래를 살살 쓸며 성재현이 물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강진하가 흐느끼듯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패배 선언이었다.

**

쏴아아, 떨어지는 물이 온몸을 적셨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눈앞까지 덮었다. 강진하는 따끔거리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씻겨 내려간 거품이 배수구에 고여 부글거렸다.

씻고 싶다는 말에 성재현은 욕실까지 강진하를 부축했다. 지금은 친히 제 손으로 씻겨주는 중이었다. 강진하는 이 상황이 참 웃겼다. 처음 이 자리에서 재회했던 때랑 정반대였다. 그날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다친 사람을 도우러 들어왔다가 지금은 그 사람 침실에 갇혔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성재현은 스펀지에 바디 워시를 듬뿍 묻혔다. 거품이 일어난 스펀지로 목덜미부터 천천히 문질렀다. 어깨, 겨드랑이, 옆구리를 따라 등과 엉덩이 사이. 아래로 손이 내려갈수록 강진하는 의자에 웅크려 앉은 몸을 약하게 실룩거렸다. 성재현은 일부러 그의 뒤를 집요하게 스펀지로 문질렀다.

“흐으, 읏.”

헐떡거리며 허벅지를 힘껏 모으던 강진하가 성재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눈빛이 냉험해졌다. 왜 잡았냐고 짐짓 묻는 표정에 강진하는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제, 제가 혼자 씻겠습니다.”

“혼자서? 손 다쳐서 힘들 텐데.”

앓던 감기는 거의 다 나았지만 두 손은 여전히 붕대 신세였다. 오른손은 금이 간 데다 퍼렇게 멍이 들었다. 왼손은 상처에 새살이 돋는지 딱지가 앉아 가렵고 뜨거웠다. 물이 안 닿는 게 낫다는 건 알지만 성재현이 손으로 희롱하도록 놔두는 것보단 통증을 견디는 게 나을 듯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이제 많이 나아서, 안 아파요.”

강진하는 순종적인 말투로 애원했다. 이 방에 들어올 때와 전혀 다른 태도였다. 죽일 듯이 노려보고 발버둥 치던 게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며칠을 방에 혼자 있었다. 며칠이 몇 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발악은 어둠 속에서 변질되었다. 굳건하던 의지는 수증기처럼 증발했다. 갈증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 죽는다는 결심은 생각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부끄러워서 그래요?”

딱히 수치심은 아니었다. 이미 볼 대로 다 본 몸이었다. 눈앞에서 직접 벗은 적도 수차례였다. 하지만 강진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재현도 강진하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 시키는 대답이었다.

성재현은 강진하의 모든 걸 통제하는 지배자였다. 적어도 강진하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먹고 마시는 것, 입는 옷과 잠자리, 심지어 씻는 것까지 전부 성재현의 손아귀였다. 움직이는 행동이란 행동은 전부 성재현이 원하는 대로만 제한되고 선택받았다.

“그게, 전무님 힘드실 거 같아서….”

긴장감으로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성재현은 쥐고 있던 스펀지를 강진하의 손에 올려줬다. 기꺼이 존중하겠다는 것처럼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그럼 얼른 마무리해요.”

샤워 헤드를 가리키는 눈짓에 강진하는 몸을 돌리고 물을 틀었다. 튀어 오른 물줄기에 부스 안은 금세 뿌옇게 흐려졌다. 강진하는 거품이 질척질척 일어난 몸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아무리 헹궈도 시선은 그대로였다. 구석구석 헤집는 것 같았다. 이제는 사방이 그의 영역이었다. 빠져나갈 구석은 한 곳도 없었다. 묵묵히 씻던 강진하는 욕실 구석에 반듯하게 놓여있던 면도기를 발견했다. 깨끗한 칼날이 번뜩였다. 저걸 잡아 목을 그으면 죽을 수는 있을까.

아니면, 죽일 수 있을까.

“면도도 하려고요?”

멍하니 면도기를 바라보던 강진하의 귓가로 성재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움찔 어깨를 움츠린 강진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순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순종적인 태도였다.

세면대로 강진하를 끌어당긴 성재현이 강진하의 턱을 붙잡았다. 뜨거운 물에 달아오른 뺨이 물감에 물들인 것처럼 발긋발긋했다.

“진하 씨는 수염도 잘 안 나나 봐요. 턱이 보송보송하네.”

물기로 반질반질해진 강진하의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손 줘봐요.”

“손… 이요?”

“면도하고 싶다면서요.”

강진하는 떨떠름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뜨거운 물로 불긋하게 달아오른 손 위에 성재현이 셰이빙 크림을 가득 짰다. 손안을 채우고도 넘쳐흐른 크림이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성재현은 강진하의 입가에 크림을 묻힌 다음 조심스럽게 면도기를 가져다 댔다.

강진하는 눈앞에 있는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어쩔 수 없었다. 턱을 붙잡은 성재현의 손 때문이었다. 눈을 돌릴 수 없으니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내리깐 속눈썹에 조명 빛이 내려앉았다. 반듯한 외모는 기품까지 느껴졌다. 살살 거품을 걷어내는 손길은 반죽을 빚는 것처럼 섬세하고 상냥했다. 상냥함은 성재현이 즐겨 포장하는 위선이었다. 그런데도 종종 강진하는 그의 얼굴에서 낯선 감정을 보곤 했다. 이를테면 지금 같은 얼굴.

강진하는 늘 성재현의 눈이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물감으로 입힌 그림 속 사람의 눈 같았다.

오렌지색 백열등 아래 그의 눈 색은 부드러운 커피색이었다. 성재현이 저런 눈동자를 가졌던가. 그렇게 자주 봤는데도 몰랐다. 생기를 머금은 듯 강렬한 시선. 강진하는 우물을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눈 속에 담긴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숨소리가 교차하는 순간 성재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인공적으로 지어낸 미소가 아니라 진짜 웃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귀 끝이 저렸다. 저 눈, 저 표정. 마치 강진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한다고? 성재현이 자신을 사랑한다니. 그럴 리 없었다. 이런 게 사랑일 리 없었다. 착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질 나쁘고 아둔한 생각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강진하는 확신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사랑할 리 없었다. 장난감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건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병정 인형을 사랑해 함께 달아나 버린 소녀에게나 허용되는 행복이었다.

강진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눈에 담기길 거부하는 외면이었다. 시선이 어긋났다. 빗겨나간 칼날이 피부를 날카롭게 스쳤다.

“아.”

얇게 벤 상처에서 피가 흘러 성재현의 손끝에 방울방울 맺혔다. 성재현은 제가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서 흐르는 핏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뚝, 뚝 흘러내린 피가 타일에 맺히는 걸 내려다봤다. 눈동자 속의 인영이 사그라졌다. 검고 불온한 시선 속 그늘이 짙어졌다.

붙잡힌 몸이 반대로 돌려졌다. 팔이 꺾이는 것처럼 아팠다.

“아, 윽.”

“면도하는 김에 여기도 밀려고.”

등 뒤로 바짝 몸을 붙인 성재현이 손을 아래로 뻗었다. 배를 지나쳐 성기를 움켜잡는 억센 감각에 강진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성기 주변에 거품을 덕지덕지 바른 성재현이 면도날을 가져다 댔다. 뭘 하려는지 비로소 알아차린 강진하가 팔을 부산하게 틀었다.

“하, 지 마… 제발.”

“가만히. 안 그러면 또 피나요.”

성재현이 즐거운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사각사각 면도칼에 체모가 쓸려 나갔다. 허벅지 사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순식간에 사타구니가 민둥민둥해졌다. 살은 매끄럽고 깨끗한 흰색이었다. 손가락으로 주변 살을 더듬던 성재현이 강진하의 귀 뒤에 소리 나게 입 맞췄다.

“이러니까 만지기 더 좋네요. 진즉 밀어버릴 걸 그랬나.”

“그만, 아, 흐….”

강진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래를 휘어잡는 강렬한 자극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성재현이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속삭였다.

“털 좀 밀어줬더니 그새를 못 참고 섰네.”

“흐으, 싫, 으응.”

“싫어? 뭐가 싫은데?”

“아… 히윽, 응, 으.”

성재현이 성기를 잡은 손을 앞뒤로 빠르게 문질러댔다. 비누 거품이 남은 손바닥에서 찔꺽찔꺽 젖은 마찰음이 반복되었다. 적나라한 소리에 강진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몸 안에 북이 든 것처럼 쿵쿵 요란하게 심장이 뛰었다.

“아, 으응.”

아래를 쥔 손바닥이 뭉근하게 주무를 때마다 꾹 다문 잇새로 신음이 흩어졌다. 성재현이 민감해진 귓가를 혀로 부드럽게 핥았다. 거품이 남은 몸을 왼손으로 더듬거렸다.

“흐으, 아, 아.”

손가락이 유두를 꼬집는 순간 등줄기가 흠칫 떨렸다. 성재현은 자유롭게 강진하의 몸을 가지고 놀았다. 발가락까지 찌르르 정전기가 오르는 듯했다. 불꽃이 튀어 머릿속이 탁해졌다.

“젖꼭지 빨아줄까?”

“으응, 응, 응.”

고개를 저었다. 괘씸하다는 듯이 성재현이 유두를 집게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아래를 문지르는 손힘이 강해졌다. 꾹 다무느라 힘주던 턱이 느슨해졌다. 벌어진 잇새에서 단 숨이 색색 밭아졌다.

“아, 아, 앗! 아…!”

고개를 젖힌 강진하가 신음했다. 가늘고 높은 교성이 욕실에 메아리쳤다. 눈앞에 수증기가 서린 듯 하얗게 흐려졌다가 캄캄해졌다. 사정은 찰나였다. 강진하는 그의 몸에 등을 기댄 채 헐떡거렸다. 진 빠진 몸이 종잇장처럼 후들거렸다. 가쁘게 숨을 내쉬던 강진하의 눈앞에 손을 들이민 성재현이 손가락을 느리게 벌려 보였다. 희고 탁한 정액이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싫다더니, 줄줄 싼 것 좀 봐.”

“흐윽, 흐, 으.”

나지막한 힐난에 숨을 고르던 얼굴이 붉어졌다. 저 말은 거짓말이었다. 지금 사정한 건 자극 때문에 느낀 생리 현상이었다. 그런데도 강진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 싫었다고 할 수 있을까. 쾌감이 전류처럼 떠돌았다. 고인 침을 삼켰다. 신 포도를 삼킨 기분이었다.

엉덩이에 닿은 그의 고간이 두둑했다. 성재현은 강진하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무릎과 종아리가 물기 고인 바닥에 닿아 찰박거렸다. 성재현의 시선이 음험하게 몸을 내리훑었다. 이윽고 성재현이 강진하의 입술에 제 성기를 대고 비볐다. 입 벌리고 빨라는 신호였다.

눈을 내리깐 강진하가 입을 벌렸다. 성기가 품을 찾듯이 힘껏 들어왔다. 입 안을 가득 채운 살덩어리를 혀로 핥고 게걸스럽게 빨았다. 습윤한 점막에 살이 부딪쳐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음란했다.

목구멍을 힘껏 조여 성기를 달게 빨았다. 성재현은 그의 목 안에 깊숙이 처박았다.

“하아.”

사정감으로 고양된 아래가 바르르 떨렸다. 나올 게 없을 때까지 목구멍에 흠뻑 정액을 갈겼다. 정복욕으로 도취된 두 눈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허기가 졌다. 굶주린 짐승처럼 그는 아래에 앉아있는 것에게 탐욕을 느꼈다.

이지러진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가. 인간은 무엇에나 적응하는 동물이며, 무엇에나 적응할 수 있는 존재다. 강진하는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지금의 자신이 딱 그런 상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적응이란 말의 체념 직전이거나.

강진하는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널따란 방에 남은 가구라고는 가죽 소파, 킹사이즈 침대, 대리석 테이블 같은 무거운 가구뿐이었다. 시계도 없어서 몇 시인지,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건 확실했다. 오른쪽 팔을 자꾸만 긁은 나머지 상처가 곪았다. 반려동물용 인식표, 미아 방지용 위치추적기. 사흘간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성재현이 제 손으로 직접 강진하에게 심은 칩이었다.

아파 누워있던 강진하에게 성재현은 직접 주사를 놓으며 상냥하게도 용도를 설명했다. 200미터 범주 내로 반경 이탈 시 사용자한테 즉시 문자가 간다. 도망칠 수 없다는 간접적인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기다림인지 아니면 무기력함인지 모르는 상태가 이어졌다. 강진하는 잡지를 펼쳤다.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북북 종이를 찢은 강진하는 종이비행기를 잔뜩 접었다. 여기저기 마구 날아간 비행기가 갈 수 있는 세계는 방문, 방의 모서리 끝이었다. 지루함에 지친 그는 결국 잡지마저 내동댕이쳤다.

방문으로 다가간 강진하는 문에 기대 귀를 세웠다. 마침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일하는 직원인가. 그러나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으로 향했다. 가지 마. 주의를 돌리려 문을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정말로 발소리가 멈췄다. 도리어 강진하는 그 반응에 놀랐다.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여기 있는 존재를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나가고 싶었다. 이 방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더 바라지도 않았다. 문밖에서 잠깐이라도 있게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야트막한 기대감에 강진하는 절박하게 문을 쿵쿵 두드렸다.

“여, 여기 사람… 사람 있어요! 누가 좀, 문이 안 열려요, 제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발소리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방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손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하도 문을 두드려 결국 손등에 났던 상처가 터졌다. 피가 붕대 위로 슬슬 배어 나왔다.

끼익, 곧 굳게 닫혀있던 침실 문이 열렸다. 드러난 인영에 강진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성재현이었다.

“아… 저, 전무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강진하는 그에게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변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중 나온 것처럼 보였을 거야. 어설프게 둘러대느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불쑥 침실로 들어온 성재현은 문을 닫았다. 겉옷을 벗는 모습에 강진하는 저도 모르게 내밀던 손을 멈췄다. 지금 자신은 이 방에 며칠째 갇혀서 나가지도 못 하는 상태였다. 행동반경부터 식사, 심지어 수면 시간까지 그에게 속박되어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당연하다는 듯이 저 남자 옷을 받아 들 생각부터 하다니.

의자에 옷을 걸던 성재현이 바닥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 접은 종이비행기였다.

“얼른, 치우겠습니다.”

당황한 강진하는 허둥지둥 바닥에 굴러다니던 쓰레기를 주웠다. 손에 든 비행기를 휙 날리며 성재현이 으쓱거렸다.

“어지간히 심심했나 봐요.”

생글거리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문을 두드린 걸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강진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성재현 눈치를 보는 건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 아무런 낌새를 발견하지 못하는 게 더 무서울 지경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박 차장이었다. 강진하는 그의 방문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며칠 전부터 숱하게 이 방을 들어오고 나갔던 사람이었다. 박 차장은 들고 온 종이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뒀다. 곁눈질로 확인한 성재현이 고개를 까딱했다.

“고마워요. 수고했습니다.”

“전무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편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대화가 오가는 내내 박 차장은 강진하가 있는 쪽으론 눈도 돌리지 않았다. 이 방에는 오로지 성재현만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강진하는 굳이 박 차장에게 도와달라 호소하지 않았다. 성재현 눈앞에서 매달려본들 피차 곤란해질 뿐이었다. 게다가 정말 도와줄 생각이 있다면 이미 무언의 신호라도 줬을 터였다. 이 집에 있는 사람은 전부 성재현의 발아래에 있었다. 도우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진하는 이미 기대를 저버린 뒤였다.

“오는 길에 생각나서 포장해 왔어요. 참치 싫어하진 않죠?”

종이 가방에서 포장 팩을 꺼내 든 성재현이 말했다. 방에 들어온 뒤로 강진하는 내내 약 아니면 미음만 먹었다. 그마저도 초반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승복하듯 곡기를 입에 댄 게 얼마 전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그러면서도 허기가 돌아 입속이 축축해졌다.

“왜? 초밥 좋아하잖아요? 내가 잘못 기억했나?”

“아뇨. 순간 냄새가 강해서….”

문득 강진하는 성재현의 평소 습관을 떠올렸다. 성재현은 방 안에서 뭔가 먹는 걸 딱히 선호하지 않았다. 서재에서도 어지간하면 물이나 커피 정도만 담백하게 마셨다. 음식물 냄새가 방에서 나는 걸 싫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식당에서 먹자고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전무님. 초밥은 위에 가서 먹으면 안 될까요.”

“위? 어디 위?”

“그러니까 일 층 식당에서… 전무님 방에서 다른 냄새 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환기도 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말하자면 밖에 나가고 싶다는 거네요.”

무심한 말투에 강진하는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잘못 판단한 걸까. 만약 성재현이 다른 생각을 했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강진하는 정말 추호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어김없이 들었지만 지금은 정말 밖에 잠깐 나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재현이 말했다.

“그러죠. 틀린 말도 아니고, 위생적으로도 그게 나으니까요.”

“네? 그럼 저도 같이….”

“방금 진하 씨가 올라가서 먹자면서요.”

강진하는 이 순간을 믿을 수 없었다. 이 방에서 나가도 된다고?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허락한단 말인가?

“설마 자기는 두고 나 혼자 먹으라는 말이었어요?”

“아니요. 저, 저도 먹고 싶어요.”

강진하는 자신이 지금 성재현에게 조르는 것처럼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거북한 말투였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도망 안 갈 거죠?”

“안, 갈게요.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려나.”

허리를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춘 성재현이 강진하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럼 올라가는 대신에 목에 목걸이 채우는 건 어때요? 그러면 나도 편하고, 강진하 씨도 올라갈 수 있잖아.”

“네? 목걸이면….”

“싫어요? 그럼 그만두고요.”

“…아니요. 아니, 좋아요.”

강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뭘 채운다는 게 좋진 않아도 갇혀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곧 성재현이 목에 목걸이를 채웠다. 굵고 튼튼한 개 목걸이에 리드 줄을 단 성재현이 문을 열었다.

방을 나서자마자 강진하는 가장 먼저 시계부터 찾았다. 8시, 드디어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위안이 들었다. 올라가는 내내 직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걸지도 몰랐다. 개목걸이를 달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생각은 강진하도 딱히 없었다.

식탁에 강진하를 앉힌 성재현은 초밥 도시락을 개봉했다. 손으로 먹여주기 전에 강진하는 젓가락을 어설프게 잡았다. 아까 문은 두드리지 말 걸 그랬다. 손이 좀 아팠다.

“맛있어요?”

“네.”

“다행이네. 많이 먹어요.”

손에 건 리드 줄을 만지작거리며 성재현이 상냥하게 말했다. 강진하는 아주 천천히, 최대한 느리게 초밥을 음미했다. 사실 맛은 도저히 느낄 수 없었다. 목에 감긴 목걸이와 사슬 소리가 거추장스러웠다.

식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강진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성재현을 힐끔거렸다. 초밥을 먹는 얼굴은 무척 평온하고 느긋했다. 사람을 집에다 감금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여상한 모습이었다. 하긴 지금 개목걸이를 하고 초밥을 먹고 있는 자신도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둘 다 나란히 미친 꼴일 터였다.

“전무님. 저, 이제 저는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뭘 하면 되냐니?”

“그러니까 제가 여기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이라든지, 전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싫어요? 설마, 또 도망치려고요?”

목줄이 팽팽해졌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지레 겁을 먹은 강진하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계속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강진하는 지금 이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비난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성재현이 화를 내고 자신은 그를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미 성재현은 강진하의 모든 걸 박탈했다. 소유하고 가졌다. 성재현은 주인이었고 자신은 예속된 무언가일 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강진하는 그에게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와 자신 사이의 이 관계의 합리성을, 그럴듯한 타당성을 바랐다.

설령 잘못된 구애라도 사랑한다는 말로 포장되길 바랐다. 그걸로 눈 가릴 수 있다면 차라리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 듣고 싶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래된 간극에 대한 대답을. 문득 알아차렸던 그 눈빛은 진정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모순이라는 걸 알면서도.

침묵은 길었다. 무언가를 씹는 소리만 묵묵했다. 그마저도 시계 소리에 먹혔을 때 성재현이 말했다.

“나가는 건, 글쎄요. 내 아이라도 낳으면 고려해보도록 하죠.”

“하지만 저는 여자가 아닙니다.”

“네. 나도 알아요. 강진하 씨가 여자가 아닌 걸 모르고 하는 말 아닌데.”

“그런데 왜 제게….”

“싫든 좋든 나한테도 후계자는 필요하니까요.”

강진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대답은 다시 말해 강진하를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후계 이야기를 꺼냈다.

관계가 재정립되었다. 아니, 변하지 않은 원점 그대로였다. 한 번도 나아간 적이 없는 부표였다. 강진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저는 결코 낳을 수 없는 아이를 저 남자가 원한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관계라면 감히 나오지 않을 요구였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붙이는 조건이었다. 자신은 성재현이 질릴 때까지 섹스하고 데리고 놀 장난감이자 애완견이었다.

망가질 때까지 즐기다 쓸모없어지면 어딘가 구석에 처박히겠지. 버려지듯이.

그것이 장난감의 숙명이었다.

**

편편하던 시트가 여러 갈래로 구겨졌다.

땀으로 찐득해진 허벅지를 무릎으로 벌렸다. 성재현은 더운 숨을 내쉬며 그의 귀를 입 안에 넣고 사탕처럼 빨았다. 귓속을 후벼 파는 질척한 소리에 강진하가 전신을 바르작거렸다. 몸 여기저기가 멍과 울혈로 얼룩덜룩했다. 귀에서 입을 떼어낸 성재현은 몸을 음미하는 것처럼 이곳저곳에 입 맞췄다. 목, 어깨, 부들부들한 겨드랑이. 살집이 봉곳하게 잡힌 유륜을 손가락으로 꼬집어 당겼다. 선명한 쾌감에 벌어진 입술이 실룩거렸다. 아흐, 으, 흑, 응, 으응. 둥글둥글 흐려진 신음이 야살스럽고 음탕했다. 울 것같이 일그러진 눈시울이 흐느낌에 따라 샐긋거렸다.

“히윽, 아, 으, 그흐, 그만… 아, 앗!”

“이렇게, 만져주는 건, 감질나요?”

“아, 히, 아니, 아… 냐, 앗, 아.”

고개를 세차게 젓는 강진하를 잡아 돌렸다. 질겁하며 몸서리치는 그를 붙잡고 성재현은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혀를 세워 날름 핥자 등줄기가 파드득 튀었다. 도도록하게 솟은 유두를 입 안 가득 담뿍 머금어 빨았다. 잇자국이 어지럽게 새겨졌다. 얼굴을 옆으로 젖힌 강진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신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려는 것이다. 가슴은 특히 강진하가 잘 느끼는 성감대였다. 지금 반응만 보더라도 부정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성재현은 일부러 소리 나게 젖을 물고 쪽쪽 빨았다. 후루룩, 말캉한 걸 삼키는 듯한 소리에 귀까지 빨갛게 젖었다.

“하으, 하, 아. 아앗, 아!”

달아오른 뺨이 달싹거렸다. 두 팔로 성재현을 밀어내던 강진하가 제 얼굴을 가렸다. 미간을 찌푸린 성재현이 팔목을 잡아 눌렀다. 초조한 흰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저 입에 담고 빨아줬을 뿐인데 눈시울과 입가가 흠뻑 젖어있었다. 색색거리는 콧소리가 애달프기까지 했다.

“이거 봐. 젖만 빨아줬는데도, 섰잖아요.”

“아!”

달아오른 성기를 무릎으로 누르자 강진하가 턱을 들고 뒤통수로 바닥을 비볐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작은 새집 같았다. 성재현은 가슴 주변을 입술로 핥으며 왼손으로 그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면도한 덕에 사타구니가 털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 감촉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자꾸 만지작거리고 싶을 정도였다. 꼿꼿하게 일어선 기둥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붙잡았다. 연결된 뿌리부터 음낭까지 가볍게 주물렀다. 머지않아 귀두에서 묽은 체액이 시럽처럼 질질 새어 나왔다.

“씹물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와요.”

“아, 아흐, 앗.”

“아직 박지도 않았는데. 이래서야 나 가기 전에 탈진하겠네. 응?”

나직하게 속삭이며 귓불을 콱 깨물었다. 강진하의 목덜미가 푸르딩딩한 잇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집요하게 목덜미를 깨물어댄 줄도 몰랐다. 가볍게 실소한 성재현이 두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누르자 강진하가 발버둥을 쳤다. 혀를 찬 성재현이 손으로 허벅지를 세차게 때렸다. 짝, 짝. 손자국이 허벅다리에 불그죽죽 남았다. 두 팔로 찍어누르듯 제압한 성재현은 양손으로 힘껏 둔부를 넓게 벌렸다. 샤워하고 남은 물기로 허벅지 안쪽이 습윤했다. 탁한 분홍빛이 도는 구멍이 찬기를 느끼고 성질 급하게 옴찔거렸다. 그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핏대가 불거진 성기는 흡사 절굿공이 같았다. 딴딴한 귀두를 슬쩍슬쩍 위아래로 문지르자 강진하가 발발 떨어댔다. 허벅다리를 가슴팍으로 밀 듯이 잡아 누른 성재현은 벌룩거리는 구멍에 좆을 조준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퍽, 좆이 내벽을 가르며 굵직하게 박혔다.

“아악! 아, 하윽… 힉!”

깊숙한 삽입에 눈을 크게 뜬 강진하가 비명을 질렀다. 접근을 막으려 뻗었던 두 팔이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위태롭게 떨렸다. 충격에 크게 확장된 동공이 흔들리며 눈앞의 포식자를 담았다. 성재현은 생긋 웃었다. 청량하고 고아한 미소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 짓은 추잡하고 거칠었다. 엉덩이에 허벅지가 팍 부딪쳤다. 당연하겠지만 내벽은 젖지 않아 뻑뻑했다. 탁자로 손을 뻗은 성재현이 로션 통을 집었다. 헐겁게 닫은 뚜껑 사이로 질질 흘러내린 로션이 배꼽과 성기에 치덕치덕 들러붙었다. 시트까지 흘러내릴 정도로 듬뿍 뿌린 그가 로션 통을 던졌다. 덜컥, 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기도 전에 조급하게 허리부터 움직였다.

“으응!”

두께가 굵직한 좆이 구멍을 쑤욱 파고들었다. 로션으로 흠뻑 젖어 삽입이 한결 손쉬워졌다. 묵직한 고환이 엉덩이 사이를 철퍽 때렸다. 푹, 점막을 파고드는 소리가 질척했다.

“하아, 으, 안, 안에, 히윽, 아, 아!”

“힘, 흐으, 힘 빼요. 그래야 더 깊이, 박아줄 거 아냐.”

“저으, 시히, 어, 싫, 으, 흐앗!”

우는 소리를 무시하며 성재현은 삽입한 방향을 틀었다. 도리질 치던 강진하의 몸이 순간 굳었다. 볼록하게 부푼 전립선을 성기로 거칠게 비빌 때마다 내벽이 벅차게 꿈틀거렸다. 창백하던 볼에 발긋한 핏기가 돌았다. 야릇하게 휘어진 눈썹은 웃는지 우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황홀한 몰락이었다. 흉포한 침입자를 비로소 손님처럼 맞았다. 쫀쫀한 내벽이 생동감 넘치게 성기를 질근질근 빨아댔다. 성재현은 아래로 몰아치는 쾌감을 즐겼다. 잘 익은 과육처럼 물크러진 구멍이 좆을 오물거리는 느낌에 관자놀이까지 아찔했다.

“이거 봐요.”

꽉 맞물린 교접부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성재현이 말을 이었다.

“진하 씨 씹구멍. 좆에 환장한 거 안 보여요?”

“으, 흐응, 읏, 힉.”

“하아… 빼지도, 못 하겠네. 꽉 물고 놓질 않아서.”

흐릿하게 뜬 눈을 옆으로 돌린다. 애써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래를 끊어먹을 듯이 조여대면서 정숙한 척이라도 할 셈인가. 깜찍한 건방이었다. 갸륵해서 절로 웃음이 터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성재현은 목줄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기우뚱 일어선 강진하가 성재현의 배 위에 찰파닥 주저앉았다.

“아, 으….”

바뀐 자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성재현은 그의 양 팔목을 단단히 잡고 끌어당겼다. 무게가 실리며 삽입된 성기가 더욱 깊숙이 내벽을 파고들었다. 움찔, 어깨가 떨렸다.

“앗, 자, 잠, 까, 으응!”

허리를 위로 쿡 쳐올리자 축축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껏 뭉크러진 목소리가 야살스러웠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싶어도 팔이 잡혀있으니 소용없을 터였다. 성재현은 태연하게 허리를 위로 가볍게 들썩거렸다. 매트리스 스프링의 반동에 튕긴 몸이 둥실 떠올랐다가 찰박, 배에 닿길 반복했다. 고개를 숙인 강진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기가 송골송골 턱 끝에 맺혔다.

“스스로 해봐요.”

“흐, 하앗, 아….”

“허리. 잘 흔들잖아.”

고삐처럼 양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성재현이 채근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숨을 고르던 강진하가 천천히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썩 능란하다고 할 수도 없는 몸놀림은 측은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아랫도리가 빠듯해 입술을 깨물었다. 부들부들한 내벽 점막이 좆을 오물오물 긴박하게 조여댔다. 뒤로 손을 뻗어 구멍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입구 주변을 손톱으로 긁어내리자 허리가 파드득 떨렸다. 욕지거리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성재현이 몸을 비틀었다.

“아, 으, 하앙…!”

몸이 다시 뒤집혔다. 쿵 떠밀리듯 눕힌 강진하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성재현은 아래에 깊이 삽입한 좆을 쑥 빼냈다. 핏줄까지 두툼하게 불거진 기둥에 체액과 로션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귀두만 걸치고 슬쩍슬쩍 박을 타던 좆을 단숨에 쳐올렸다. 철퍽, 묵직한 타격음이 아래를 들쑤셨다.

“아, 아악!”

난폭한 삽입에 턱을 치켜든 강진하가 입을 벌렸다. 손이 위태롭게 허공을 더듬다 시트를 움켜잡았다. 둥글게 벌어진 구멍으로 굵직한 좆이 뱀처럼 기어들었다. 배 속에 똬리 틀고 둥지를 틀 것처럼 깊숙한 교접이었다. 찰팍, 찰팍. 살 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주름까지 팽팽하게 늘어난 구멍이 좆을 한가득 품고 벌름거렸다. 땀과 정액으로 푹 절은 사타구니가 시럽을 바른 것처럼 반지르르했다. 뒤로 한 번 몸을 빼낸 성재현이 성기를 뿌리까지 구멍에 전부 박아넣었다. 난폭하게 직진한 성기가 구불거리는 장내까지 닿았다.

“아, 으윽, 너무, 깊, 기, 깊게, 헤, 흑.”

“여기까지, 들어갔어요.”

일부러 강진하의 손을 끌어온 성재현이 배를 스스로 더듬게 했다. 손가락이 힘없이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배에 올린 손등을 꽉 잡고서 성재현은 아래를 쿡쿡 쑤셔 올렸다. 그때마다 뱃가죽이 들썩거렸다. 얼마나 야만적이고 추잡한 모습인지. 입 속이 들큼했다. 흥분으로 열이 끓어올라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그의 몸에 자신을 완전히 각인시키는 것만 같았다. 허리를 세차게 움직여 안쪽까지 콱 찧어 올렸다. 오금이 오르르 떨렸다.

“아! 으읏, 으!”

“이러다 정말, 임신도 하겠는데.”

“아으, 아냐, 아니, 아앗.”

구명줄을 붙잡듯 두 팔로 성재현의 어깨에 매달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찡그린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열락에 푹 녹아내린 뺨을 적시며 턱에 방울방울 물기가 맺혔다. 뭉근하게 아랫도리를 흔들었다. 어깨에 기댄 이마를 느릿하게 비비적거렸다. 응석이라도 부리는 듯한 몸짓이었다.

“어떻게 해줄까요. 뺄까?”

“아, 아으, 흑.”

“강진하 씨 부탁 좋아하잖아.”

“으, 으윽, 그런 거, 없, 히으, 아!”

“저런. 또 거짓말부터 하네.”

“아, 아앗, 아!”

“그럼? 구멍에 딜도 몇 개 박아주고 방에 가둬둘까요?”

나긋한 협박에 대답 없이 고개만 젓는다. 여전히 고개를 들진 않았다. 괜히 심통이 났다. 성재현은 머리채를 잡아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괴로움, 서러움, 아쉬움, 그리고 또 어떤 묘한 눈빛. 온갖 감정으로 일렁거리는 눈을 핥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안에 싸달라고 애원해봐요. 응?”

“흐으, 아, 아앗.”

“얼른.”

듣고 싶었다. 강진하가 애원하는 게 좋았다. 보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이 외면하는 저 얼굴이 자신을 보도록 해야만 했다. 기어코 제 씨를 받겠다며 비는 목소리를 들어야 만족할 터였다. 몰상식한 명령이란 걸 알면서도 성재현은 그에게 채근했다. 또는,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한 애원이었다.

고집스러운 입술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눈썹이 세모꼴로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랫도리가 난폭하게 부딪쳤다. 퍽, 퍽. 젖은 구멍을 좆으로 흠씬 두드릴 때마다 자지러지며 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친 듯 두 팔로 끌어안은 강진하가 어깨에 턱을 기댔다. 희미한 중얼거림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안에다, 전무님, 얼른….

토막 난 말은 엉망이었다. 성재현은 뿌듯하게 웃었다. 이건 자신이 시킨 게 아니다. 강진하가 천박하게 멋대로 애걸했다. 갖지도 못할 아이를 품겠다 하니 원하는 대로 깊이 좆을 처박았다. 철퍽, 철퍽. 들러붙은 몸에 절정이 휘몰아쳤다.

마침내 절정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하아, 윽.”

“아, 아! 아으, 응…!”

감전된 것처럼 강진하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땅땅한 뿌리가 바르르 떨리며 사정으로 이어졌다. 전신이 녹아내리는 절정이었다. 쾌감에 침식된 아래가 들척지근했다. 여운을 만끽하며 성재현은 땀으로 젖은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젖은 피부가 부드러웠다.

“더… 하시려고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손이 우뚝 멈췄다. 성재현은 침대에 누운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절정이 가져다준 생기는 이미 꺼졌다. 공허한 표정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저 기계적이고 사무적일 뿐이었다.

“기절 안 했네요. 이번엔.”

목줄을 잡아당기며 성재현이 음산하게 말했다. 꽉 움츠리고 있던 무릎 사이가 힘없이 벌어졌다.

**

소스라치게 놀란 강진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릿한 눈가를 팔로 가리며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후우.”

선득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고서야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또 가위에 눌린 모양이었다.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다. 발작하듯 일어났다가 겨우 잠들기 일쑤였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시큰거렸다. 강진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찰싹 여러 차례 때렸다. 창백하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얼얼한 통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붙였던 파스가 너덜너덜 떨어진 손목에는 멍이 푸르딩딩했다.

침대 등에서 새어 나온 은은한 불빛에 방 안 벽지가 황혼에 물든 것처럼 주황색이었다. 불을 끄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두운 건 싫었다. 묶여서 방치당한 기억이 남긴 공포였다.

뒤이어 밀려오는 갈증으로 목이 갑갑했다. 마침 탁자에 생수병이 놓여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찰캉, 초커에 달린 고리가 걸리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망할 개 목걸이. 미간을 찌푸린 강진하는 버릇처럼 목을 만지작거렸다. 목이 답답하다고 호소해도 성재현은 잘 어울린단 이유로 풀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면 본인 목에나 직접 매든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던 강진하는 귓가에 들리는 기척에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가까운 곳에서 야트막한 숨소리가 사부작거렸다. 소파는 텅 비어있었다. 욕실도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누군가가 침대에 있다.

잠기운 때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강진하는 더듬더듬 기척이 있는 쪽을 흘낏 돌아봤다. 침대 맞은편 자리에 모로 누운 성재현을 발견한 순간 전신이 오싹했다.

언제 들어온 거지. 마지막 기억은 섹스 직후였다. 허벅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박아 댄 그는 강진하가 뒤처리하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문을 잠그는 소리까지도 들은 기억이 생생했다.

곤히 잠든 성재현이 몸을 뒤척였다. 돌아누운 얼굴이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 강진하는 멍하니 앉아 그를 바라봤다. 흡사 유령이라도 본 듯했다. 대체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물론 이 방은 원래 성재현의 침실이었다. 비단 이 방만이 아니라 이 집 전체가 다 그의 소유란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강진하를 이곳에 가둔 뒤로 성재현은 줄곧 다른 방을 썼다. 지금 침실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같은 침대에서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정한 이마 아래 길게 빠진 눈매. 우뚝한 콧날. 최근 업무가 과중한 듯하더니 살이 빠진 얼굴선은 날카로웠다. 수면 시간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걸까. 그래도 식사할 때 보면 입맛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강진하는 헛웃음을 속으로 터트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저 남자를 자신이 걱정한다?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격이었다.

저 남자는 자신의 모든 걸 무너트렸다. 살아가던 세계를 송두리째 눈앞에서 앗아가다시피 했다. 그러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걱정한다고? 이 지경이 되었는데.

탁자에 놔둔 물로 목을 축인 강진하는 조명의 조도를 낮췄다. 환했던 방 안이 삽시간에 어둑어둑해졌다. 차마 불을 완전히 끄진 못했다. 저번에 어두운 방에 혼자 방치된 뒤로 어두운 곳에선 눈도 안 감겼다.

잠든 얼굴을 다시 살폈다. 고단한 숨소리를 따라 가슴팍이 얕게 오르내렸다. 곧게 드러난 목 위에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사람이니 당연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니까.

그래서 이상했다. 평온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강진하는 성재현이 두려웠다. 통제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종종 베푸는 다정함은 그저 변덕스러운 놀이였다. 사정 후 짧게 찾아오는 키스도, 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도 그저 감정을 자극하려는 것뿐이었다. 반응 없는 놀이는 즐겁지 않았다. 그러니 어수선한 틈을 들이닥치고 헤집었다. 감정까지 지배하려는 것처럼 군림하고 흔들어대려는 이기심이어야만 했다.

“음.”

미간을 찌푸린 성재현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 깼다. 놀라지 않은 척 강진하는 반대로 몸을 돌렸다. 침대가 약하게 흔들렸다. 옆으로 길게 드리운 그늘에 강진하는 눈에 힘을 꾹 주고 자는 시늉을 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목을 누르며 추궁할 것만 같았다.

성재현의 시선이 뺨부터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침대가 철렁, 묵직하게 흔들렸다. 성재현이 일어서서 흐트러진 옷을 고쳤다. 그런 다음 조명에 다가간 그가 버튼을 눌렀다. 삑, 어두웠던 조명이 다시 환해졌다.

슬리퍼 소리가 멀어졌다. 문 닫히는 소리에 사방은 다시 적막에 먹혔다. 환한 방 안에서 강진하는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

“괜히 전무님 쉬시는 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소식으로 뵙는 건데 방해랄 것도 없죠.”

“그래 봤자 공천인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하하.”

가식 섞인 너스레에 성재현은 빙긋 웃었다.

내년 봄에 있을 총선에서 남경욱은 서울 강남구 여당 후보로 공천받았다. 특검수사 조작 혐의로 청문회까지 떠들썩했던 게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기였다.

언론사에서는 이번 공천이 한국 정치 판도의 개혁이자 순환점이라 입을 모았다. 비판 어조, 또는 긍정 여론. 이조차도 짜고 맞춘 밑작업이었다. 국가급 재난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남경욱이 서울 강남갑 지역구의원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아무리 고상함을 떨어본들 결국 거대한 돈 놀음판에 불과했다.

성재현은 눈앞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남경욱은 개였다. 그러나 사람보다도 똑똑한 개였다. 역할과 실리를 잘 알고 쓰임새에 걸맞게 행동했다.

십수 년간 남경욱은 중앙지검 소속 세한의 충견 노릇을 해왔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만연한 사실이었다. 총선 감투는 장식 수준이었다.

남경욱이 후보자 명단에 이름이 실리자마자 주말도 무릅쓰고 성재현을 찾아온 저의야 뻔했다. 재선을 이은 다선 의원의 삶에 세한 일가의 지지를 계속 얻고자 하는 야망. 그러기 위해서라면 아들뻘 되는 어린 남자한테도 코가 문드러지도록 절을 할 인간이었다. 성재현은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적어도 이용하고 다루기 쉬웠다. 배반도 그만큼 쉽겠지만 쳐내는 것 또한 만만했다.

“그러고 보니.”

다리를 고쳐 앉은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떠보는 듯한 어투였다.

“남승혁 씨는 잘 지냅니까? 건너 듣기론 서초로 발령이 났다면서요.”

“예. 일반형사부로 들어갔습니다. 믿을 만한 선임 밑으로 갔으니 몇 년은 얌전히 지낼 겁니다.”

“얌전히요?”

“거슬리게 굴 일은 없을 겁니다.”

짤막한 말이지만 성재현은 금세 이해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쉬운 특수부가 아닌 일반형사부. 눈 밖에 날 만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성재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남경욱으로선 제 아들이 밉보이는 걸 원치 않을 만했다. 요컨대 자숙시키고 있으니 예쁘게 봐달라는 간청이었다.

남경욱이 서둘러 주제 전환을 했다. 원하는 바는 이미 서로 충족했으니 이야기는 지지부진했다. 싱가포르 골프 클럽 이야기 즘에서 성재현이 잔을 내려뒀다. 시계를 흘낏 본 남경욱이 약속 이야기를 꺼냈다. 성미령과 만난다는 말에 성재현이 빙긋 웃었다.

“이사님 뵈시거든 잘 위로해주세요. 아마 많이 답답하실 겁니다.”

“예, 최대한 집중 타격은 받지 않게 노력하긴 했는데 타이밍이 영 좋지가 않았더군요. 그래도 금방 흘러갈 겁니다. 전무님께서도 신경 쓰신다고 하니 전해두겠습니다.”

남경욱이 어색하게 웃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열흘 전에 증권가에 재벌가 자제에 관련된 찌라시가 크게 돌았다. 유명 여배우와 재벌가 늦둥이가 마카오에서 마약 파티를 벌였다는 뉴스였다. 그러다 이틀 전 결국 몇몇 연예인 실명이 터지면서 작은 소문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성미령으로선 골치 아플 노릇이었다. 그리도 예뻐하는 막둥이를 한국에 들여다 놨더니 하필 거기 가서 벌인 마카오 마약 파티가 구설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 꼬장꼬장한 석영 회장 어르신이 권재림을 어리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을 터였다. 이번에는 어디로 유배를 가려나. 아예 돌아올 구실조차 못 주도록 뉴질랜드에 내다 버릴 가능성이 컸다. 함부로 남의 걸 넘본 것치고 이만하면 가벼운 처벌이었다. 적어도 사고사로 위장한 개죽음은 아니니 말이다.

차에 올라타기 전 남경욱이 온실을 보고는 크게 감탄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온실이 꽤 크군요. 보긴 좋은데 관리하기 힘들겠는데요.”

“특별히 관리하는 건 따로 집 안에서 기르니 상관없어요. 저기 있는 건 흔하기도 하고.”

“집에서 직접 기르신다고요? 아, 난이나 분재라면 그럴 만하죠.”

가볍게 수긍한 남경욱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약혼식 때 뵙겠습니다.”

차가 떠났다. 충견을 자청한 늙은 맹수가 갔다. 몸을 돌린 성재현은 느긋하게 지하로 내려갔다. 단단히 잠가뒀던 방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쳤다. 볕으로 푸르게 익은 바깥과는 사뭇 다른 온도였다. 차갑고 냉랭하고 이질적인 공간.

성재현은 짙어진 눈길로 침대를 응시했다. 온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미동도 없었다. 침대로 다가간 그는 널브러진 몸을 잡아당겼다. 강진하가 힐끔 자신을 보더니 눈을 피했다.

“이젠 내 얼굴도 안 보려고요?”

“…….”

“바람 쐬고 싶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요.”

몸을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춘 성재현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강진하는 끌어안은 무릎을 손바닥으로 쓸기만 했다. 무릎에 얇은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정원에 난 잔디를 짧게 깎은 게 얼마 전이었다. 날카로워진 풀에 살이 벤 모양이었다.

“저는… 개가 아닙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개가 아니란다. 성재현은 피식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머리가 나쁜 것 같진 않은데 강진하는 도통 제 처지를 헤아리질 못했다. 앞서 찾아온 충견과는 태도부터 달랐다. 얌전히 시키는 대로 말만 잘 들으면 예뻐할 텐데.

며칠 전 일이었다. 바람 좀 쐬고 싶다는 말에 성재현은 선뜻 허락했다. 목줄을 채우고서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중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애원하길래 나무에서 볼일을 보게도 해줬다. 이만하면 너그러운 처사였다. 나가고 싶다고 한 건 강진하가 먼저 부탁한 말이었고 성재현은 들어줬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성재현은 잇자국이 무성한 목덜미를 내려다봤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이 전보다 더 야위었다. 의사 말로는 심리적 요인 때문이라던가. 스트레스받으면 더 나빠질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 일단 화내진 않을 생각이었다.

불을 켠 성재현은 서재에서 가져온 카탈로그를 탁자에 내려뒀다. 인테리어, 장식용 가구 등이 우르르 실린 백화점 카탈로그를 흘깃 쳐다본 강진하가 의아한 얼굴로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일거리 만들어달라 그랬죠? 여기서 괜찮은 걸로 골라봐요.”

“인테리어, 바꾸시려고요?”

“이 층만. 공사 일정은 다음 달 예정인데 아직 결정은 못 했습니다.”

“이 층 서재만 바꾸시는 거면 이 정도는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싫다고 퇴짜놓을 줄 알았건만 그는 순순히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다. 팔락거리며 넘기는 모습을 바라보던 성재현은 시답잖다는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올해 겨울에 이 집에 사람이 들어오니까요. 준비는 해둬야죠.”

“사람…? 사람이요?”

“네. 약혼에 별다른 차질이 없다면.”

“그러니까 약혼자분이… 들어오신단 말입니까. 이 집에…?”

“명목은 그렇습니다. 애초에 여기 삼성동에 들어온 것부터가 약혼 전제였던 건 알고 있잖아요.”

“그럼 전, 저는… 그전에 내보내시려는 거고요?”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실긋거린 성재현이 대답했다.

“지하는 이 층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정 싫다면 별관을 새로 차려주죠. 그렇게 밖을 보고 싶어 했으니 오히려 별관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별관으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 근처에 집 하나 새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제 말은! 제 말은…….”

강진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숨처럼 그가 말을 이었다.

“전 전무님과 불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불륜?”

“그럼 이게 불륜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 전 전무님께… 사람도 아니에요?”

말을 잇는 강진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성재현은 죄악감 하나 느끼지 못한 채 그를 내려다봤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은 울 것만 같았다.

의아했다. 약혼이라면 이미 작년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세한에서 삼성동은 이른바 동궁이었다. 삼성동을 들어오는 전제로 합의된 혼맥이었다. 형식적인 의무에 지나지 않았다. 강진하가 그 정도도 몰랐을 리 없었다.

어차피 이 집에 들어올 ‘예비 안주인’도 그의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용인할 터였다. 강진하가 삼성동 지하실에 있든 별관에 있든, 두 집 살림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다 그러고 살았다. 성재현의 세상에선 이 정도는 평범했다.

정작, 강진하는 절망이라도 하는 듯했다. 대체 왜? 성재현은 그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미룬 약혼이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저 얼굴 하나를 편안하게 보려고 3개월이란 시간을 공들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버려질 것을 예감한 듯 비참한 말로 앞에 서 있는 눈빛이었다.

완연히 자라난 그는 메마른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무심하게 순종하기만 했다. 어떤 감정도 고스란히 내비친 적이 결코 없었다. 분노하거나 당황할지언정, 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럽고 서운하다는 듯이 눈꺼풀 가득 울음이 맺혀있지 않은가.

그는 손으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성재현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약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요?”

강진하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턱 끝이 약하게 떨릴 뿐 목소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성재현은 그의 침묵에 섬뜩할 만큼 강렬한 흥분을 느꼈다. 강진하가 자신의 약혼에 이렇게 반응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잔잔하던 수면이 파동으로 넘실거렸다. 싱그러운 절망이었다.

“싫어?”

성재현은 조심스럽게 이마를 마주 댔다. 꽃잎 사이 암술을 훑듯이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헤집어 살폈다. 참았다 내뱉는 숨조차 뜨거웠다. 생동감에 입꼬리가 기분 좋게 실룩거렸다.

“그럼, 약혼하지 말까요?”

평정을 무너진 눈동자가 흔들렸다. 명백한 동요에 성재현은 배 아래쪽이 묵직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강진하의 세상이 자신에게 뒤흔들리는 게 좋았다.

어차피 의미 있는 약혼도 아니다. 제도를 수단으로 편하게 이용하려는 목적에 불과했다. 비록 뒷말이 나돌겠지만 그래 봤자 일시적이리라. 반년 가까이 미룬 약혼인데 이제 와서 취소한다고 반발하려 드는 사람도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 봤자 하나둘.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성재현이 채근했다.

“응? 말해봐요. 약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대답해. 어서 내게 애원해. 약혼하지 말라고 빌어봐.

두 팔로 몸을 붙잡고 어리광을 부리길 기대했다. 그 한마디로도 성재현은 얼마든지 다정하게 대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 제게 매달리길 기대했다. 온몸으로 얽혀 다시는 달아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나무에 휘감긴 넝쿨처럼 제게 탐스럽게 사로잡히는 걸 보고 싶었다.

강진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하세요. 약혼.”

뺨을 붙잡은 손을 뿌리친 강진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문을 향해 걸어가자 성재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뭐, 하는 거지?”

“카탈로그에 페이지 접어뒀습니다. 기존 분위기에 맞췄지만 마음에 안 드시면 전문 코디네이터와 상의하시는 편이 더 빠를 겁니다.”

“강진하.”

“보고도 모르겠어요? 나갈 겁니다. 문 열어주세요.”

“나간다고?”

몸을 돌려세운 성재현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강진하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했다.

“네. 나갈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문 열어.”

“강진하.”

“약혼하라고! 해! 마음대로 하라고! 내가 뭐라 말해봤자 이미 난 결정이잖아! 난 당신 첩 노릇 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전무님 혼자 여기서 약혼하고 살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악에 받친 목소리에 성재현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 혼자?”

“당신 낯짝만 봐도 치가 떨리니까! 나가겠다고. 내 발로.”

핏발로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성재현을 악독하게 노려봤다. 성재현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가겠다는 말만큼은 반대로 난 비늘을 건드리는 것처럼 불쾌했다. 꽉 다문 아랫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를, 다시 들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는 알기나 해.

아무렇지 않게, 내 곁을 떠나면 그만인 것처럼 굴지 마. 나만, 나만, 이곳에다 두고….

몸 안의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우악스럽게 잡은 두 팔을 당겨 소파에 억지로 눕혔다. 팔을 휘젓던 강진하가 팔로 성재현의 얼굴을 내리쳤다. 얼얼한 통각에 성재현은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었다.

“나가겠다고?”

“비, 켜! 개자식, 헉.”

손으로 목줄기를 콱 잡았다. 수척한 저항은 쉽사리 꺾였다.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뒷말을 이었다.

“여기 나가면, 갈 데는 있어요?”

“윽, 흐윽.”

“없잖아. 아무 데도.”

그 말에 강진하의 눈가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성재현은 흐트러진 호흡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트로 그의 손발을 단단히 묶은 성재현이 머리채를 잡았다. 태연한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내 얼굴이 보기 싫다니까, 보고 싶어질 때까지 이러고 있어.”

“뭐, 뭐 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천을 뒤집어씌웠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몸을 어둠 속에 내버려 둔 성재현은 망설임 없이 방문을 쾅 닫았다.

4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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