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온실낙원 3권-3. Under the wheel (2) (6/8)

온실낙원 3권

3. Under the wheel (2)

나한테 문자며, 음성 메시지로 시답잖은 개소리를 늘어놓았던 게 바로 엊그제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만난 황명수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얼굴이 곤죽이 되어 있었다. 명품 로고가 커다랗게 들어간 실크 셔츠는 피와 흙먼지로 지저분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고, 잇새로 피가 섞인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저, 전므님, 이십니까.”

한쪽 팔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킨 그가 벌벌 떨며 말했다. 빤히 내려다보던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제, 제가 잘모해씁니다. 하, 한 번만 기회 주시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잘못…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하겠, 으윽.”

카펫에 머리를 조아린 황명수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끔찍했다. 방금 먹은 것들이 죄다 역류할 것만 같았다. 성재현은 반송장 같은 꼴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이 더욱 차가워졌다.

“설마 그딴 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기어올라 왔어요?”

“아, 아니, 아닙니다. 아악!”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지켜보던 사내 하나가 그를 걷어찼다. 그들이 신은 운동화는 밑창이 뾰족한 축구화였다. 그 때문에 황명수를 발로 걷어찰 때마다 피가 픽픽 튀었다. 고개를 돌려도 소리가 생생할 정도였다. 살가죽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역겹고 구역질이 났다. 황명수는 다 죽어가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전무님, 전무님, 하고 애걸복걸했다. 황망하게 숨을 골랐다. 제대로 눈을 들지 못하는 나를 성재현이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는 손으로 내 턱을 붙잡고 앞을 억지로 보게 했다.

“똑바로 봐요.”

귓불에 닿는 숨이 은밀하다. 성재현의 왼손이 옷자락 사이로 들어왔다. 달라붙는 악력에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오늘 강진하 씨 보여주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쇼인데. 좀 더 기뻐해야죠.”

나직하고 음산한 속삭임이었다. 눈앞이 혼곤했다. 온몸의 피가 죄다 식은 듯이 한기가 몰아쳤다.

“저, 전, 저, 전무님. 살려, 살려주세요.”

바닥을 기어 온 황명수가 퉁퉁 부어오른 손을 휘적거린다.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구타는 끝이 없었다. 보고 있는 나조차 온몸이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황명수가 불쌍한 게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이 광경을 본다면, 끔찍하다 느낄 터였다.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지푸라기라도 잡듯 휘적이며 뻗은 황명수의 손이 내 구두코에 닿았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나를 올려다본 순간 황명수가 앓는 신음을 멈췄다. 경악으로 들어찬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덜덜 턱이 떨리며 입을 쩍 벌린 황명수가 몸부림쳤다.

“전무님.”

뒤에 서 있던 정영호가 성재현에게 다가왔다. 정영호가 내민 건 세한전자 로고가 박힌 양산품 USB였다.

“다른 건 더 없던가요.”

“확인한 바로는 이게 전부였습니다.”

정영호의 대답에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황명수 눈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USB를 바닥에 내던지고 구두 굽으로 지르밟았다. 으드득, 금속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서늘했다. 부서진 USB가 납작하게 으깨진 벌레 같았다. 구둣발을 떼어낸 성재현이 황명수에게 물었다.

“원본 맞습니까?”

대답이 없자 혀를 찬 성재현이 황명수의 머리채를 세게 잡아당겼다.

“내 말이 우스워요?”

두 눈을 크게 뜬 황명수가 도리질 쳤다. “네, 네!” 하고 대답을 쥐어짜는 목소리가 멱을 따는 것처럼 들렸다.

비로소 성재현이 머리채를 손에서 놨다. 황명수는 바닥에 머리를 둔 채 꺽꺽 울었다. 듣기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성재현이 황명수의 입을 잡아 벌렸다. 그대로 USB를 쑤셔 넣는 순간 눈을 까뒤집은 황명수가 컥컥, 거리며 발악했다. 그러나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역한 지린내가 풍겼다. 기절한 황명수가 소변을 지린 탓이었다. 인상을 구긴 성재현은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황명수에게 뿌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장정들이 황명수를 카펫 채로 둘둘 싸 들고 발 빠르게 퇴장했다.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요.”

서류철을 정영호에게 돌려주며 성재현이 예사롭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구두 굽 소리가 딱딱 멀어진다. 나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강진하 씨, 내 생각보다도 더 비싼 구멍이더군요. 백억이나 되는 씹질 영상이라.”

“…….”

“그러니 내가 이십억에 사줬는데도, 만족을 못 한 거구나.”

성재현이 웃으면서 내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잘 길들인 줄 알았더니 여기저기 다리 벌리고 다녔을 줄은 몰랐지.”

“아윽….”

머리 가죽이 벗겨질 듯한 통증에도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억지로 잇새를 침범한 그의 손가락이 혀를 눌렀다. 힘이 풀린 턱이 벌어진다. 그가 입속을 휘젓는 소리가 고막을 질컥질컥 흔들었다.

뚜루루, 진동과 벨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내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였다. 핸드폰을 잡아 꺼낸 성재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눈으로 읽었다.

남승혁.

“미래에 검사가 되셔야 할 친구분이 눈치가 없네요.”

핸드폰을 쥔 손등으로 내 뺨을 툭툭 쓰다듬은 성재현이 말했다.

“여기로 오라고 할까요?”

“아…….”

“아니면, 전화 받아볼래요?”

어서 받으라는 듯 성재현이 핸드폰을 내 귓가에 가까이 댔다. 웅, 웅. 착신 음이 혼탁하게 섞인 진동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남승혁한테도 소식이 갔을까. 내가 알고 있는 남승혁이라면 선배라는 사람한테 근황을 묻고도 남았다. 그저, 친구였던 내가 부탁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일처럼 여길 녀석이었다.

그칠 줄 모르고 울리던 핸드폰이 잠잠해졌다.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시계 초침이 틱틱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무결한 침묵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긴장이 풀린 사지가 미미하게 떨렸다.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웃는 듯도 하고, 의뭉스럽기도 한 표정이었다.

“왜? 중요한 연락일지도 모를 텐데.”

“근무 중에는, 업무상 필요한 연락 외에는… 나중에 확인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고 나는 냉정한 척 대답했다. 성재현은 조금 전 내가 보고 있는 눈앞에서 황명수를 짓이겼다. 황명수가 그에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단 이유만으로 성재현은 황명수를 벌레처럼 뭉갰다. 지난번에 남경욱을 불러 하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니 성재현한테 고삐를 쥐여 주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휩쓸려서는 안 된다. 오늘 있던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안 된다. 무심하게 대응해야 한다. 무심하게. 암시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흠, 나중에, 확인하고 있다?”

마뜩잖은 숨을 내뱉은 성재현이 핸드폰을 손바닥에 대고 툭, 툭 쳤다. 오만하게 나를 주시하던 그가 말했다.

“내가 이 전화로 남승혁 씨하고 통화해보면 되겠네요.”

“전무님, 잠시만…!”

당황한 내가 그를 붙잡을 새도 없었다. 성재현은 보란 듯이 내 눈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부러였다. 나는 다급히 성재현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온 힘을 다해 소파로 그를 밀어붙였다. 반동으로 살짝 휘청거린 그가 소파에 팔을 기댔다. 손에서 핸드폰이 튕겨 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흐윽!”

손으로 내 머리채를 잡은 성재현이 소파 시트에 나를 내던졌다. 뿌득, 가죽으로 감싼 푹신한 쿠션이 무게에 눌리며 납작하게 구겨졌다. 달아나려는 나를 한 손으로 가뿐히 내리누른다. 우위를 독식한 성재현이 내 몸에 올라탔다.

-진하야. 지금 통화 괜찮아?

“하, 윽.”

잡음조차 섞이지 않은 선명한 음성에 탄식했다. 핸드폰, 핸드폰만이라도 저 멀리 치워야 해. 바깥으로 향한 오른팔을 뻗었다. 핸드폰을 흘깃 살핀 성재현이 내 팔을 잡아 뽑을 듯이 당겼다. 비명을 삼켰다.

“괜찮냐고 묻는데요.”

악랄하고,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유유히 나를 응시한다. 몸을 비튼 나는 핸드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승, 혁아, 전화 끊어…!”

숨이 턱 막혔다. 성재현이 내 입을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여보세요? 진하야? 강진하? 무슨 소리야?” 남승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쉿, 하고 숨소리를 낮춘 성재현이 손가락으로 내 턱과 입술을 문질렀다.

“벌써 끊으려고요?”

“끊으라, 고, 제발!”

“그러면 저쪽이 서운할 텐데.”

“팔 좀, 놔요….”

이를 악다물고 쏘아붙였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팔을 힘껏 휘두르며 안간힘을 썼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저항이었지만 그저 성재현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발버둥 쳤다.

“팔이 싫으면 여긴?”

“아…!”

성재현이 셔츠를 양쪽으로 잡아 벌리고 손바닥으로 맨살을 더듬었다. 살 위로 스며드는 듯한 습한 공기가 이질적이었다. 파드득 몸을 떤 나는 성재현의 손을 막으려 했다.

“윽, 그러지, 아!”

가슴을 부드럽게 더듬던 손가락이 유두를 약하게 꼬집었다. 손가락 날로 유륜을 비비는 감각에 오금이 떨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둥글게 굴린다. 축축한 한기와 끈질긴 자극에 유두가 뾰족하게 솟았다. 손가락으로 꼭지를 통통 튕기며 성재현이 말했다.

“이래도, 싫어?”

“으응, 흡.”

신음이 나올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가소롭다는 듯 웃은 그가 훤칠한 몸을 둥글게 숙였다. 습윤한 입김이 맨살에 흩어졌다. 입을 벌린 성재현이 유륜을 혀로 휘감고 둥글게 튀어나온 꼭지를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즙, 쭈읍, 즙을 빨아 먹는 것처럼 입에 힘을 주고 빨아 당겼다. 그때마다 고인 침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게걸스럽고 추접한 소음에 귀가 뜨거워졌다.

“그, 흐만, 읍.”

“흐음.”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쇄골을 간질인다. 나는 그의 머리를 두 팔로 밀어내다 말고 멍청하게 흐느꼈다. 입술을 깨물고 도리질 쳤다. 목 아래가 답답했다. 아니, 간지러운 것에 가까웠다. 배 안을 깃털로 살살 긁는 것처럼 가렵고 따가웠다. 살이 발갛게 부르틀 정도로 물고 빤 뒤에 성재현은 입술을 떼어냈다. 쪽, 하며 빠져나온 유두가 침에 젖어 번들번들했다.

미지근한 그의 손이 바지 사이로 들어왔다. 엉덩이를 꽉 그러쥐고 주물렀다. 음낭을 감아쥐는 손에 당황해 무릎으로 그를 걷어찼다. 성재현이 약하게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고 나는 바닥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몸을 가누고 일으키려던 순간 그가 손으로 목덜미를 붙잡아 눌렀다. 쾅, 하고 바닥에 뒤통수를 찧었다.

무릎을 잡아 누른 그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봐줬나. 아직도 날뛸 기운이 있네.”

여유롭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눈앞이 불시에 어두워졌다. 철썩, 소리가 났다. 고막이 찡 울릴 정도로 세찬 타격음이었다. 순식간에 오른쪽 뺨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앙칼진 것도 어느 정도여야 귀엽게 봐주지.”

“아, 아.”

성재현이 손을 다시 들었다. 찰싹, 하고 손바닥이 얼얼한 뺨을 재차 때렸다. 코 안쪽이 뜨끈뜨끈하다. 코로 숨을 들이마실 수 없어서 입을 벌렸다. 후, 하, 하고 몰아쉬자 찝찔한 피비린내가 입 안에 감돌았다.

아팠다. 아프기도 하고, 기가 막혔다. 성재현한테 잘못 찍혔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어쩌면 분풀이로 여기에 불려온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격식과 우아를 갖추던 성재현답지 않았다.

몸 위에 올라탄 성재현이 내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죄어드는 힘에 기도가 막혔다. 나는 그의 팔목을 손으로 붙잡고 떼어내려 했다. 발악하며 몸을 마구 들썩였다.

“그렇게 허리 안 흔들어도 충분히 자극하는데.”

“커, 흑, 으윽.”

“괴로워요?”

숨이 막혀 눈앞까지 흐릿했다. 퍼덕거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성재현은 풀어주는 대신 더욱 강하게 내 숨통을 압박했다. 끅, 끅, 딸꾹질 같은 소리가 났다. 성재현은 내 목을 누르고 있는 손힘을 세게 쥐었다가, 어느 순간 약하게 풀었다. 손힘이 풀리는 순간마다 쥐가 난 듯 손이 찌르르 떨렸다. 눈앞이 휙휙 검은색과 흰색으로 교차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쉼 없이 밀어냈다. 성재현의 흰 소매에 피가 듬성듬성 배어있었다. 발버둥 치느라 손톱으로 할퀴고 찍힌 상처에서 흐른 피였다. 헐떡거리며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애썼다. 호흡곤란으로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손을 모으고 성재현의 손을 붙잡았다. 흡사 신에게 기도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경련마저 희미해지던 그 순간 숨통을 누르던 악력이 느슨해졌다.

“얌전히 말 잘 들으면, 심하게는 안 해요. 늘 그랬잖아요. 응?”

경건한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어투는 퍽 다정했다.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이 완전히 풀렸다. 급하게 밀려드는 숨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다 사레가 들렸다. 기침하느라 가슴이 뻐근했다. 성재현은 그런 내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두려움, 공포. 그리고 묘한 안도감에 머리가 아찔하게 핑핑 돌았다. 패닉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버클이 찰캉, 풀리는 소리가 났다.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곧이어 둔부 골에 굵직한 살덩어리가 퉁 닿았다. 성재현은 반 정도 발기한 성기를 붙잡고 골 사이에 기둥을 쓱쓱 문지르며 비볐다. 허벅지 사이가 달아오른 귀두에서 흐른 체액으로 금세 미끈거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삽입하기 힘들었다. 뒤를 돌아본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간곡한 몸짓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아까 기회 줄 때, 가만히 있지 그랬어요.”

“제발, 잘못했, 아, 그마, 하윽…!”

아래를 관통하는 묵직한 감각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성기가 아니라 가죽을 씌운 방망이를 아래에 쑤셔 박은 것만 같았다. 바닥을 짚은 팔이 달달 떨렸다.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야에 벌린 무릎 사이가 들어왔다. 거대한 흉기가 푹, 삽입되었다. 배가 찌르르 울린다. 내벽이 침범한 이물감을 밀어내려 움죽였다.

“후우, 빡빡해.”

“윽, 흐으.”

“힘 빼요. 좆집 구실 제대로 해야죠.”

피식, 실소한 그가 손으로 허벅지를 때렸다. 따가운 느낌에 저절로 아래에 힘이 풀리자 성재현이 허리를 뒤로 빼냈다가 힘껏 들이박았다. 퍽, 하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세찼다. “흑!” 하고 반사적인 신음을 잇새로 튀어나왔다. 주먹으로 아래를 치대는 것만 같았다. 불에 그슬린 것처럼 부딪치는 살 주변이 뜨거웠다.

“앗, 으, 아, 흐읍.”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소리를 참아 눌렀다. 차라리 성재현이 빨리 사정하고 끝내길 바랄 뿐이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가 뺨에 흘러내렸다. 철퍽철퍽, 기둥이 불쑥 침입할 때마다 벌어진 구멍이 움쭉거렸다. 점점 깊숙하게 삽입되는 성기의 양감이 생생했다. 예민하게 부푼 안쪽이 눌렸다.

“아, 아, 싫, 싫으. 아…!”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발발 떨렸다. 싫다, 이런 식으로 느끼고 싶지 않다. 맨들맨들한 마룻바닥에 얼굴을 문대며 나는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진하야, 제발 대답 좀 해! 강진하!

반대편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에서 남승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흘깃 내려다본 성재현이 깨달았다는 듯이 아, 하고 감탄 어린 숨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남승혁 씨랑 통화 중이었죠?”

“아, 하지, 윽.”

“저렇게 애타게 찾는데, 대답이라도 해줘야지.”

움직이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나 성재현은 나를 붙잡은 채 핸드폰이 있는 곳까지 끌고 왔다. 열려있는 핸드폰 액정에서 여전히 빛이 나고 있었다. [통화 연결 02:55] 피하려 고개를 마구 젓는 내 머리채를 잡은 성재현이 핸드폰 옆에 처박았다.

“소리 내봐요.”

“으읍, 흑.”

“지금 뭘 하는지, 이 아랫구멍이 얼마나 천박하게 좆을 잘 씹어대는지 남승혁 씨한테 제대로 들려줘야죠.”

“저, 전화, 끊…!”

목소리를 간신히 낸 순간 푸릅, 하고 빠져나갔던 성기가 더듬더듬 입구를 건드렸다. 단숨에 성기가 깊숙이 안을 박아 올렸다.

“아, 아!”

“이거 봐, 박아주기만 해도 이렇게 안달 내면서.”

“흐으, 으.”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안착한 성기가 내벽을 마구잡이로 쑤시고 두들겼다. 어느 틈에 내 성기도 통통하게 부풀어있었다. 성재현은 꼿꼿하게 발기해 배에서 까딱거리는 내 것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반죽을 치대듯 쥐고 둥글게 손바닥으로 감싸 위아래로 비볐다. 가뜩이나 팽팽하게 부푼 성기에 자극이 가해지니 갖가지 감각으로 하반신이 욱신거렸다.

“기분 좋아요?”

“으, 으응.”

귀를 핥으며 성재현이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하, 흑, 아냐, 아니, 싫….”

“뭐가 싫어. 응?”

성기를 꽉 움켜쥔 성재현이 힐난하듯 물었다.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강하게 쓰다듬으며 그가 혀를 찼다.

“좆만 박아줬을 뿐인데 앞이고 뒤고 물이 질질 흘러. 그런데 뭐가 싫단 거예요.”

“아, 아니, 아.”

“얼마나 더 박아줘야 순순히 인정할까. 박아주면 들떠서 아래가 벌름벌름하는 주제에.”

“아, 니, 흑, 제바, 앗! 히, 아응.”

흐느끼며 뭉개진 발음으로 나는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성재현과 하는 섹스를 원한 적이 없었다. 이건 내가 느끼려고 한 게 아니다. 나는, 나는 그저 빚을 없애고 싶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아, 흐, 그흐, 히!”

깊은 안쪽까지 푹 찌르고 들어온 선단이 휘적이다 뭉툭하게 부푼 자리를 두드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하얀빛이 파악, 터졌다.

“아!”

눈꺼풀을 슴벅거릴 때마다 눈물이 귀밑머리를 축축하게 적셨다. 아팠다. 수치스럽고, 역겨웠다. 그런데도, 황홀했다. 온몸을 갈아먹는 듯한 쾌감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미친 게 틀림없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섹스였다. 섹스라고 하고 싶지도 않은, 폭력이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아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래를 꽉 메운 두껍고 단단한 성기를 정신없이 조였다. 기둥이 내벽을 거칠게 긁을 때마다 감질나는 것처럼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흐으, 응, 흑.”

입을 열면 달뜬 신음이 애원하듯 새어 나왔다. 허리를 꽉 붙잡은 성재현이 몸을 앞뒤로 빠르게 움직인다. 단단한 배와 허벅지가 내 엉덩이를 퍽퍽 강타했다. 헝클어진 호흡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삼키지 못한 침이 뚝, 뚝 떨어졌다.

분명 남승혁이 수화기 너머로 뭐라고 외치고 있는데도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진흙탕에 얼굴이 박힌 듯 컴컴하고 먹먹했다.

“하, 흐윽!”

엎드려있던 몸이 홱 돌아갔다. 캄캄하던 시야에 성재현이 들어왔다. 그는 내 눈앞에서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남승혁 씨, 잘 듣고 있습니까.”

“아, 읍, 으, 윽.”

성재현은 나를 똑바로 바라본 채 성기를 깊숙이 안으로 쳐올렸다. 좁은 내벽을 가르며 꿀떡꿀떡 들어온 성기에 배가 가득 찼다. 턱을 젖히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핸드폰 액정이 환했다. 전화는 여전히 연결 중이었다.

“나는 내 전화인 걸 알면, 바로 끊을 줄 알았는데, 남승혁 씨 의외로 솔직하시군요.”

무릎을 잡고 있던 그의 두 손에 힘이 강하게 실렸다. 오므렸던 다리가 양쪽으로 쫙 벌어졌다. 성재현은 벌린 다리 사이에 핸드폰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뭘 하려는지 깨달은 내가 발로 바닥을 딛고 물러나려 했지만 성재현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강진하 씹질하는 소리 들으니까 어때요.”

“히으, 앗!”

결합부에 핸드폰을 바짝 붙이고는 그대로 쾅, 힘껏 쳐올렸다. 체액으로 푹 젖은 아래에서 질꺽질꺽, 추잡한 소리가 울렸다. 음낭만 남기고 뿌리까지 죄다 들어온 성기에 배가 불룩해진 기분이었다. 찌걱, 찌걱. 적나라한 소음이 핸드폰을 타고 메아리쳤다. 반대편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차마 못 끊겠지. 강진하 우는 소리 들으면서 자위라도 해야 할 테니까.”

“히윽, 으, 흑.”

다리를 움직이며 어떻게든 박혀있는 성기를 빼내려 애썼다. 바르작거리는 나를 내려다본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곤란하다는 듯 웃는다.

“마저 들려주고 싶지만, 지금 내 밑에서 강진하 씨가 자꾸 박아달라고 보채는 중이라서.”

“아아, 그, 흐, 아!”

귀두만 살짝 걸칠 정도로 길게 빼냈던 성기가 한꺼번에 삽입되었다. 푹, 찌르는 감각. 발끝에서 솟은 전류가 오금을 타고 찌르르 전신을 휘감았다.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소리도, 색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심장 박동만 들렸다.

성기를 힘껏 조이며 나는 아득한 절정을 쫓았다. 미간을 찡그린 성재현이 “하.” 하고 낮게 탄식했다. 깊이 들어온 성기가 한 지점을 들이박았다. 쩍, 쩍. 체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사타구니에 음낭이 콱 뭉개지듯 부딪쳤다. 꽝, 하는 환청이 들리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 흑, 아아, 아!”

섬광을 마주한 듯 사방이 하얘졌다. 나는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둥글게 감싸고 양손으로 팔목을 움켜잡았다. 몰려오는 절정에 휩싸이며 그에게 매달렸다. 픽, 픽 하고 묽은 물줄기가 위로 튀었다. 가슴팍이 축축해졌다. 늘어진 내 몸을 붙잡고 빠르게 허리를 움직인 성재현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안에 물컹하고 뜨끈한 체액이 우르르 터지는 게 느껴졌다.

사정으로 한껏 고양됐던 몸은 한동안 계속 발발 떨렸다. 성재현이 성기를 빼내는 순간 부푼 입구가 움찔거렸다. 정액이 샅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아, 이 말 하는 걸 깜빡했네.”

대리석에 반사된 빛이 그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성재현은 핸드폰에 대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 전화번호는 사용 안 할 겁니다.”

싸늘한 눈이 싱긋 웃는다.

“그러니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삑, 종료 버튼을 누른 핸드폰이 창문으로 날아갔다. 너덜거리던 핸드폰이 두 동강 났다.

**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내 손을 잡는 걸 싫어했다.

어머니는 잔병치레가 심했다. 심한 알코올 중독이 가져다준 헛헛함이었다. 고치려고 온갖 용하다는 병원은 죄다 찾아다녔지만, 어머니의 고약한 술주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두 삼촌은 그런 어머니가 모자라다고 욕했고, 할머니 당신께서는 종종 가슴을 팍팍 쳤다. 가끔 할머니께서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느지막한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술 퍼마신다고 뭐가 달라져. 그냥 잊어.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어머니는 빨개진 눈을 치켜뜨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대부분은 욕이었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잖아! 엄마가 내 인생을 망쳤어. 망쳤다고!’

쨍그랑,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모녀가 한바탕 싸우는 날이면 나는 문을 꼭 닫은 방 안에 혼자 앉아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날 반찬은 전부 맛있는 것뿐이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좋아하는 만화가 나오고 있었지만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얘야, 진하 들을라. 제발 그만 진정하고 나가서 이야기해. 말리는 할머니 목소리에 어머니는 울고불고했다. 들으라 그래, 들어, 제발 들어. 그러면 내 속이라도 시원하잖아. 차라리 쟤한테도 말해줘! 어?

딸꾹질하느라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쿵, 쾅,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어머니가 대문 밖을 나선 것이었다. 한참 뒤에 슬그머니 방에 들어온 할머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응?’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눈가가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할머니, 왜 울어요, 엄마가 나쁜 말 했어요? 엄마가 할머니 속상하게 해요? 나는 번번이 그런 말을 물었지만, 할머니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잘못 없어. 너는 잘못이 없어. 아가야. 그리 말하는 얼굴은 꼭 나를 탓하고 싶어 하지 않는, 웅크린 얼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진하야, 우리 갈 곳이 있어. 나는 어쩌면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두려움에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꽉 잡고 어머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돌아오는 길을 놓치지 않으려 버스 정류장마다 보이는 버스 번호를 외웠다. 600, 501, 506, 9401. 백화점에서 어머니는 내게 코끝이 반질반질한 어린이용 가죽구두를 신겼다. 입학 선물이라고 했다. 입학식을 치른 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보며 예쁘다, 착하다, 하는 말에 나는 싫다고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그녀가 내민 카드를 보곤 반색하며 ‘사모님.’ 하고 깍듯하게 불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웃는 일이 잘 없었다. 그래서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아버지가 종종 말하던, 웃는 얼굴이 예쁘다던 게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반대편이 부산스러웠다. 직원들이 가판대를 치우고 길을 텄다. 어머니가 아끼는 빨간 구두의 사뿐한 굽 소리도 그곳에서 멈췄다. 붉은 카펫 끝에 성윤명 부사장 내외가 있었다. 그 옆에는 있는 ‘진짜 사모님’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몰락한 여왕 같았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멍해질 때’가 두렵다고 했다. 언제든 획 돌아버릴 수 있는, 노란 신호등 같은 상태라고 했다. 나는 손을 꽉 잡고 그녀를 흔들었다. 버스 번호를 다시 외웠다. 501, 600, 506, 9401.

수행원 중에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곳에서 아버지를 만난 게 기뻤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려고 여기에 온 걸까. 같이 집에 돌아가려고 그런 걸지도 몰라. 어머니는 달려가려는 내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엄마, 저기 아빠야.’

그러나 어머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엄마는 저 남자가 싫어.’

‘저 남자?’

‘죽었으면 좋겠어.’

그녀가 내 어깨를 꽉 잡고 소리를 질렀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나를 바라보는 눈이 무섭다. 저놈이 나를 망쳤어. 저놈 때문이야. 씩씩거리던 어머니가 내 뺨을 붙잡았다. 내 얼굴을 구길 듯이 세게 붙잡는 바람에 나는 울먹거렸다.

‘엄마 대신 네가, 삼성동에 들어가는 거야. 들어가서 엄마가 못 한 걸 해줘.’

뺨에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딸꾹질이 나오는 걸 혀를 깨물고 참았다. 마주 본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그림자가 졌다. 두 눈을 깜빡, 감았다 뜬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도련님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도카니 얼어붙었다. 어느 틈에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나를 꽉 끌어안은 그가 느른하게 속삭였다.

‘다음에 만나면, 다시는 안 보내줄 거라고.’

암전에 휩싸였다. 나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러그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폈다. 전신이 쥐어짠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팔다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쉰 소리가 났다.

“으윽, 머리 아파.”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해괴한 악몽까지 꿨더니 머리가 아팠다. 습관적으로 진통제부터 떠올랐다. 가지고 다니던 진통제가 아직 남아있을 텐데. 문을 열고서 한 걸음 내디뎠다. 모델 하우스에 있을 것 같은 부엌이었다. 흰색 아일랜드 식탁, 얼룩 하나 없는 상앗빛 식탁보, 차곡차곡 쌓인 신문과 노트북.

“잘 잤어요?”

태평한 인사말이 산뜻하다. 성재현은 잔을 내려두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호선을 그리는 눈과 입술이 유려하고 나긋나긋하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포트를 가리켰다.

“커피 마실래요? 방금 내려서 따뜻하거든요.”

“…….”

대답하지 않았으나 성재현은 두말없이 정리대로 걸어가 잔을 꺼냈다. 사뿐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새것으로 보이는 셔츠, 바지, 구두. 늘 그렇듯이 정갈하고 완벽한 차림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시계를 차고 다니던 팔목에는 시계 대신 붕대가 감겨있었다. 소독제 자국이 직선으로 불긋불긋 천에 배었다. 마치 칼이나 손톱에 긁힌 것처럼 보이는 상처였다.

손톱에 긁힌 상처.

멍하니 손을 내려다봤다. 전날 밤 추태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목을 감싼 성재현의 손에 매달려 흐느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정에 오른 순간들이 귓가를 속삭였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나를 보며 성재현은 무심하게 허리를 붙이고 박았다. 기어코 내가 눈물을 흘린 다음에야 몸을 누르던 힘이 풀렸다. 불행하게도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 전부 나한테 일어난 생시였다.

“앉아요.”

성재현이 잔을 식탁에 두며 말했다. 나는 대담하게도 그를 지나쳐 냉장고로 갔다. 목이 아플 정도로 말랐다. 생수 한 통을 꺼내 단번에 마셨다. 흘러내린 물기에 입술 옆이 화끈거렸다. 나도 모르게 뺨을 손으로 더듬었다. 열감이 느껴졌다.

“아파요?”

“으읏.”

나를 홱 잡아당긴 그가 턱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기분 나쁜 통증에 손가락까지 저릿했다. 그는 내 턱을 잡고 좌우로 돌리며 살폈다.

“여기, 부었네요. 멍은 안 들 거 같긴 하지만.”

오른쪽 뺨을 슬슬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흠집 난 물건을 만지는 듯한 태도였다. 기가 막혔다.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누구인데. 그사이에 기억상실이라도 걸렸단 말인가. 뺨을 부드럽게 토닥이던 성재현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이건 좀, 아팠겠네요.”

“아….”

“이 정도로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힘이 실리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이 자꾸만 나를 더듬거렸다. 귀밑, 목선, 그리고 목덜미. 그저 만지는 것뿐인데도 입속에 침이 고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명치가 어릿했다. 한 걸음 물러났다. 성재현은 나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빈손을 거두고 물끄러미 나를 주시할 뿐이었다.

“…씻고, 오겠습니다.”

급히 욕실을 찾아 들어간 나는 거울 앞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기운은 진즉 달아났는데도 나는 간밤의 절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목을 더듬더듬 쓸어내렸다. 붉은 선이 목둘레에 희미하게 남았다. 심하진 않더라도 눈썰미가 좋다면 알아챌 정도였다. 꼴이 우스웠다. 목에 생긴 상처야 언젠간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남승혁한테 성재현과의 관계를 들켰다. 아니, 들켰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드러내고 남승혁을 잘라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경욱과 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남승혁한테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질투라니, 코웃음이 나왔다. 우습다 못해 한심한 상상이다. 성재현이 나를 연인으로 대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그의 스트레스, 분노, 그리고 음습한 욕구를 처리할 도구였다. 침대 머리맡에 얌전히 앉아있는 인형, 창틀에 놔둔 선인장. 상대의 기분과 비위를 맞춰가며 위안해주다, 필요 없으면 갈아치우는 게 당연한 대용품이었다. 만일 애인 노릇을 하게 된다 해도, 어디까지 애인 ‘놀음’이겠지.

찬물로 얼굴을 수차례 헹궜다. 체액으로 엉망일 줄 알았던 아랫도리는 그나마 깨끗했다. 내가 샤워를 했었던가. 기억을 더듬던 나는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안에 몇 번이나 사정한 바람에 흥건하게 고인 정액을 그의 앞에서 긁어냈다. 그리고 두 다리로 설 수 없을 때가 될 때까지 벽에 기대서 그를 받아내야 했다.

지금 몇 시지.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핸드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처참하게 박살이 났었지. 진즉 약정이 끝난 고물이라 망정이었다. 꼬리를 무는 잡념들을 털어내고자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멍하니 몸을 문질렀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며 슬쩍 부엌을 내다보니 정영호를 비롯한 비서실 직원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접이식 간이 식탁을 펼치고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포장을 푼 것이긴 했지만. 스콘, 크루아상, 바게트 등등 간단한 빵류, 오믈렛과 키쉬를 비롯한 달걀 요리, 그리고 많은 양의 소시지가 있었다. 정영호는 욕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나 역시 정영호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을 알 만큼 알았을 텐데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뗄 상황은 아니었다.

“식사로 빨리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거뿐이라더군요.”

그의 옆에 놓여있던 의자가 지익, 뒤로 끌렸다. 앉으라고 눈짓으로 권한다. 허기고 뭐고 그저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었다. 포장지에서 일회용 나이프를 꺼내며 성재현이 중얼거렸다.

“멀쩡한 걸 보니까 내가 어제 살살하긴 했나 봐요.”

능글거리는 말투였지만 뼈가 느껴졌다. 결국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유리병에 든 주스를 따라 마셨다. 새큼하고 차가운 맛에 복잡하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식는 듯했다.

크루아상을 깨작거리던 내게 정영호가 노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아버지 명의로 쓰인 서류, 그리고 복사된 인감도장이 붙여진 조잡한 통장 사본 등이 들어있었다.

“강준구 씨 앞으로 쓰여있던 차입 매물 내역이에요. 이런 곳에서 나라가 지정해둔 이자를 지킬 것 같진 않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율이 너무 억지더군요.”

“…….”

“아마 매달 내는 이자가 지나치게 높았던 것도 이런 부분이었겠지.”

소시지를 칼로 뚝뚝 자르며 성재현이 대신 설명했다. 경찰한테 신고하려고 할 때마다 덤터기처럼 불어난 채무였다. 거기엔 빌리지도 않은 돈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강 눈치는 채고 있던 사실이지만, 직접 들으니 손이 떨렸다.

간밤에 본 황명수가 떠올랐다. 부산에서도 제법 세력이 큰 조직이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는 데다가 경남권 내 정치인들과도 인맥이 두터웠다. 성재현은 그런 사람을 손쉽게 짓이겨버렸다.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어제 있었던 일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피와 오물로 지저분했던 바닥은 깨끗하다 못해 반지르르 윤이 났고 어제만 해도 거실을 장식하고 있던 가구도 전부 바뀌어 있었다. 완벽한 증거인멸에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검사실에다 보냈던 증거용 사본은 수거했어요. 김 검사가 어디다 말 흘릴 일은 없을 테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이력도 전부 삭제하라고 했어요.”

“도와주셔서 감, 사합니다. 전무님….”

“감사할 것까지야. 권재림이 헛돈 쓰기 전에 내가 샀을 뿐인데.”

“…샀다고요?”

“어제 말했잖아요. 석영에다 권재림을 들먹이며 팔려고 했던 걸, 내가 샀다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지금 성재현은 나를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라 황명수한테 약점을 샀다는 말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재현이 나를 힐끔 올려다봤다.

“왜, 내가 재림이 대신에 강진하 씨를 샀다는 말이 싫어요?”

“그 말은 제가, 전무님께… 채무가 생겼다는 말입니까?”

“서류상으로도 없는 돈이니 채무는 아니지. 좀 더 그럴듯한 단어를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채무가 아니면 이게….”

“나는 강진하 씨한테 채권자가 될 생각은 없는데.”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 딱 두드리는 손길이 잔인하리만큼 우아했다. 저열한 우아함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황명수는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죽었을까. 마지막으로 볼 때는 숨이 붙어있었다. 대체 성재현하고 무슨 대화를 했길래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황명수 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음? 그 사람은 왜 찾아요?”

“물어봐야겠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설마, 죽이셨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성재현이 피식 웃었다. 탁, 포크를 내려둔 그는 핸드폰을 열었다. 그가 보여준 핸드폰 속 이미지는 지도였다.

“이 근처에 가공육 공장이 있거든요. 부지가 팔리지 않아서 버려진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시설은 아직 남아있겠죠. 가령 소시지용 분쇄기라든지….”

나는 식탁에 놓인 소시지를 쳐다봤다. 검붉게 익은 소시지가 마치 손가락처럼 보였다.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먹던 게 역류하는 느낌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성재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입맛이 까다로워서, 그런 저급한 건 못 먹어.”

포크를 집어 든 그가 소시지를 푹 찔렀다. 육즙이 접시에 흥건하게 고였다.

“뭐, 태우기 좋게 분쇄했을지는 모르겠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달아났다. 화장실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졌다. 난기류가 지나갔다는 신호였다. 꽉 잡고 있던 팔걸이를 간신히 놓았다. 쥐가 난 손을 주무르며 창문을 흘깃 내다봤다. 바깥이 새하얗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처럼 구름밖에 보이지 않았다.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누르며 모니터를 확인했다. 비행시간 두 시간. 목적지는 첵랍콕 국제공항(HKG), 홍콩이었다.

경쟁사에서 준비한 신규 디스플레이 기술 발표회가 주말 동안 마카오에서 열렸다. 예정보다 한 달이나 빠른 기습 공개였다. 성재현은 마카오 지사에서 상황을 전달받자마자 주말 일정을 전부 취소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카오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나절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붙은 수행원은 평상시 인원보다 절반으로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외여행은커녕 여행이라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제주도에 가 본 게 유일했다. 나는 비서실 소속도 아니었고 유한 회사를 통해 계약한 잡역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나를 굳이 홍콩에 동행시켰다. ‘언론사에 보도자료도 안 보낸 비공식 스케줄’이니 관계자가 아닐수록 더 낫다는 게 이유였다. 억지스러운 변명이었지만 나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신청한 적도 없는 여권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공문서 위조일 게 틀림없었지만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이깟 여권 제작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반듯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성재현이 보였다. 승무원이 가져다준 담요가 그의 무릎에 얌전히 포개져 있었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고단했는지 숨소리조차 나붓거리는 듯이 조용했다. 내리감은 속눈썹이 길고 얼굴은 희고 단아했다. 물감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처럼 낭만스러운 온화함에 담겨있었다. 누구든 그를 처음 본다면 쉽사리 동경에 빠질지도 모를 터였다.

동경이라, 확실히 아주 어렸을 적에는 나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 양지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소년은 어른처럼 웃을 줄 알았고 그건 어린 내게 낯선 자극이었다.

하지만 저 얼굴은 가짜다. 성재현은 엊그제 사람 하나를 별장으로 끌고 왔다. 넝마가 된 손을 발로 짓이기며 웃었다. 발버둥 치는 나를 온몸으로 누르고 업신여겼다. 나는 그의 손목을 응시했다. 소매에 감춘 붕대가 끄트머리만 삐죽 드러났다. 내가 낸 상처 때문에 감은 붕대였다.

언젠가는 질릴 때가 오겠지. 나는 그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손에 쥔 목줄이 풀리면 그때는 달아나더라도 붙잡지 않을 테니까.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냈다. 읽고 있던 여행용 회화책을 덮은 나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별장에서 받았던 황명수의 문서였다. 찬찬히 다시 살펴볼 생각으로 꺼낸 문서에는 아버지의 재산 내역 말고도 다른 내용이 있었다.

황명수가 어머니를 추적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도 어머니의 카드 내역을 뽑아 정리한 기록이 있었다. 2월 29일 오후 2시 53분 강원도 사북역 ATM. 여기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현금을 인출했고 그 후로 행적이 묘연했다.

사북역. 사북역이 어디지. 많이 들어본 곳인데.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나는 그곳이 정선에 있는 기차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선을 고향처럼 드나들던 외삼촌 때문이었다.

정선, 강원랜드, 카지노장.

설마 외삼촌을 만나러 갔던 걸까.

작은외삼촌은 거듭 사업 실패를 전전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카지노에 틀어박혔다. 필리핀 해외원정, 일본 빠칭코, 강원랜드. 어머니를 꼬드겨 십수 억을 빌리게 한 것도 도박 빚 때문이었다. 연고도 없을 강원도에 어머니가 갈만한 이유는 외삼촌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슨 이유로 외삼촌을 보러 간 걸까. 갑자기 이유 없이 외삼촌을 보러 갔을 리는 없고, 아마 먼저 연락을 해왔을 텐데. 설마 또다시, 돈을 빌려주려고? 그렇게 당해놓고도?

빚에 시달린 건 나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협박 전화, 시도 때도 없는 욕설에 어머니는 핸드폰이 울리면 벌벌 떨곤 했다. 자신도 구제하기도 버거운 마당에 불능자나 마찬가지인 외삼촌을 찾아갔을 리가 없었다. 설령 외삼촌을 찾아갔다 해도 이미 돌아왔어야 했다. 한 달 동안 어머니는 전화기만 가끔 켜둘 뿐, 연락은 하지 않았다. 찝찝했다. 황명수가 나한테 말도 없이 어머니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부분도 거슬렸다.

툭,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느슨하게 튼 성재현의 왼쪽 다리가 내 무릎을 건드리고 있었다. 잠결에 잘못 건드린 건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고요했다. 좌석 간격은 충분히 넓었지만 조금이라도 닿지 않도록 다리를 바짝 모았다. 그러자 성재현의 발이 내 발등을 약하게 눌렀다. 억지로 무신경하게 책에만 집중했다.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슬며시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성재현이 다리를 들어 내 정강이 사이를 뭉근하게 건드렸다. 무릎 사이를 슬금슬금 침범한 그의 구두코가 좌우로 까딱거렸다. 마치 내 안에 삽입하고 쿵쿵 쑤셔 박는 듯한 동작이었다. 아래가 저릿저릿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내가 기우뚱 흔들렸다. 일어선 몸이 무게추에 밀려나듯 휘청거렸다.

“아앗…!”

강한 힘이 답싹, 내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복도로 넘어질 뻔한 몸이 반대로 기울어졌다. 등받이를 손으로 짚고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 몸을 따라 그늘진 자리에, 성재현은 내 팔을 꽉 잡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숨소리가 가까웠다. 이대로 몸을 숙이면 입술에 닿을 듯했다. 아니면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잡아도 소리조차 숨길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고 가벼운 간격.

딩, 동, 안내 방송 시작 음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현재 기류로 인해 기내가 흔들리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표시등에 다닥다닥 불이 켜졌다. 성재현의 입술이 호선을 부드럽게 그렸다.

“조심해야죠.”

뱀처럼 가늘게 뜬 눈초리가 야릇하다. 옆구리에 닿은 손가락이 거미처럼 기어올라 등줄기를 더듬는다. 움찔, 떨리는 몸을 그가 강하게 붙잡아 지탱했다.

“다치면 어쩌려고.”

허리로 내려온 손바닥이 바지 허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주변을 의식하듯 살폈다. 다들 일제히 앞만 볼 뿐이었다. 지시라도 받은 듯 성재현에게는 눈길도 두지 않았다.

“흐읏.”

엉덩이 안쪽을 힘껏 움켜쥔 손이 차가웠다. 손날이 둔덕 사이를 거칠게 유영한다. 당장이라도 나를 주저앉히고 온몸을 주무를 것처럼 조급한 손길이었다. 정작 그는 평온하고 권태로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미묘한 변화까지 죄다 눈에 들어온다. 검은 홍채가 세로로 좁아졌다가 다시 팽창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재밌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목이 깔깔하게 마른다. 자꾸 숨을 마시듯 침을 삼켰다.

“잠시 후 이 비행기는 첵랍콕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기장이 정중히 도착 안내를 전했다. 신호탄을 들은 것처럼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차례 추격전이라도 벌인 듯 숨이 가쁘게 찼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교차되는 안내 음성이 잇따랐다. 터질 듯한 박동과 숨소리를 목구멍으로 꿀꺽 눌렀다.

**

타일 벽에 몸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바짓단을 걷어 올리자 발목 뒤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목이 짧은 양말에 사이즈가 큰 구두를 신고 다니느라 뒤축에 살갗이 벗겨진 탓이었다. 일회용 밴드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피가 맺힌 자리를 물 묻은 휴지로 콕콕 닦아냈다. 따가우면서도 시원했다.

홍콩에 도착한 지 벌써 10시간째였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홍콩 지부장이 미리 방문 소식을 듣고 차와 숙소는 준비했지만 그뿐이었다. 급하게 따라오느라 준비가 제대로 된 게 없었다. 공항에서 발을 뗀 이후로 성재현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홍콩에서 지사 임원과 간단하게 회동했고, 발표회를 염탐했다.

정영호 대신 책임자 권한으로 온 부팀장은 전화를 받는 것만으로도 바빠 보였다. 비서팀이 어지간한 의전 수행을 책임지는 동안 나는 성재현의 뒤에 서서 기다렸다. 간단한 심부름, 혹은 받아적을 메모가 있으면 체크 후 전달. 그런 자질구레한 일이 내 역할이었다. 그마저도 항상 동석하는 기업인, 임원 등등이 있다 보니 성재현이 나를 따로 부를 일은 없었다. 성재현은 한창 임원진과 정찬 중이었다. 말 그대로 접대를 위해 만든 자리였다. 고루한 대화를 가벼이 넘기고 웃던 그는 이따금 나를 힐끔 돌아보곤 했다. 마치 물건이 제자리에 있나 확인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이마를 만졌다. 피곤해서 그런지 열이 좀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려 주머니를 뒤적였다. 보호 필름도 안 뗀 새것은 성재현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이 부서졌으니 ‘임시’로라도 갖고 다니라며 성재현이 준 것이었다. 사용한 적이 거의 없는지 연락도 문자도 없다시피 했다. 개인 연락용이라면서 저장된 번호라고는 삼성동 자택이 유일했다. 심심하다 못해 텅 빈 차가운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었다. 더 늦어지면 쉬는 시간 교대가 어그러질 터였다. 왔던 길을 돌아가던 나는 바깥에 늘어진 열대수와 조명 불빛을 쳐다봤다. 화려한 수영복을 입은 남녀가 깔깔거리며 춤을 췄고 한편에서는 칵테일 잔을 세워두고 술을 한 번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오기 전에 직원이 파티 때문에 시끄러울 거라고 간단하게 안내해준 게 떠올랐다.

“아.”

몸을 돌리다가 앞사람과 부딪쳤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던 나는 상대를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수안이었다. 비키니에 비치 가운 하나를 걸친 그녀는 휘청휘청 위태롭게 서 있었다. 부딪쳤는데도 그녀는 아프다거나, 뭐라는 말도 없었다. 어디론가 향하는 듯 휘적거리며 걸어가던 스텝이 꼬였다.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오수안 씨?”

이름을 부르자 마구 헝클어지고 푹 젖은 머리카락을 그녀가 붙잡고 넘겼다. 나를 올려다본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응, 미안해요. 어지러워서.”

“괜찮으십니까.”

“응, 응, 미안해요. 어지러워.”

그녀는 자꾸 했던 말만 반복했다. 아무래도 나를 못 알아본 듯했다. 하기야 한두 번 본 정도로 기억할 사이는 아니긴 하지. 대화했던 것도 아니고 끽해야 권재림과 같이 있을 때 잠깐 본 게 전부였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가까운 벤치로 데려다줬다. 그러나 오수안은 고개만 흔들며 꼬부라진 발음으로 “짜이게이(再给)”만 반복했다. 술 냄새는 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취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두고 가자니 걱정이 되었다. 리셉션 데스크에다 말해주는 게 나으려나.

나는 그녀의 팔을 약하게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수안 씨 매니저분은 어디 계세요.”

“응, 몰라… 나 갈래.”

“방이 어딘데요.”

“방? 응, 나 여기.”

“여기?”

오수안이 생긋 웃으며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에 든 건 [3002]라 음각이 새겨진 검은색 금속 카드 키였다. 고작 출입용 카드인데도 고급스러웠다. 아마 이 호텔 스위트룸이라든가, 펜트룸 등등 고급 객실용으로 분별되는 카드 키겠지. 나는 그녀가 걸친 가운을 단단히 여며준 다음 고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방 앞에만 데려다주고 갈 생각이었다. 리셉션 데스크에는 매니저에게 메모를 남기고 가면 되겠지. 오수안은 어지러운지 내 몸에 바짝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휴가 오신 겁니까?”

“응.”

“혼자서?”

“응.”

나는 그녀가 잠들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하는 반사 반응이었다. 술에다 약이라도 탄 건가. 기분 나쁜 추측이 오갔다. 얼른 오수안의 매니저한테 연락할 방도를 찾는 게 좋을 듯했다.

카드 키를 문에 갖다 대자 삐릭,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마자 잡스러운 향기가 풍겼다.

안은 어두웠다. 조명이라고는 무드 등 하나가 덩그러니 켜진 게 전부였다. 짙은 교성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혼잡하게 섞였다. 침대에 두 사람이 엉켜있었다. 모로 봐도 그 광경은 적나라한 정사였다. 잘못 들어온 건가. 분명 카드 키로 열린 걸 보면 여기가 맞는데.

“하, 좋아. 계속, 그렇게.”

감탄을 내뱉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불그스름한 조명 빛에 인영이 비친다. 무릎 사이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부산하게 몸을 위아래로 움직이던 동작이 순간 멈췄다. 찌르르 떨리는 몸. 캑, 캑거리는 불규칙한 호흡. 남자가 움켜잡고 허리를 거세게 쳐올렸다. 아래에 있던 사람이 욱, 하고 헛구역질처럼 숨을 내뱉었다.

“씨발, 강진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낮고 탁했다. 그리고 드물게도, 익숙했다.

고개를 돌린 남자가 오수안을 바라본다. 살짝 찡그린 얼굴이 느릿하게 내 쪽으로 향했다. 가늘게 뜬 눈에 오묘한 이채가 돌았다. 히죽,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 하고 탄성을 뱉는다. 낮고 습윤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권재림이었다.

급작스러운 대면이었다. 권재림이 이 호텔에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파티가 있다고 했지만 그 대상자는 전부 외국인 이름으로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놓친 걸까. 그러다 나는 뒤늦게 권재림이 미국 국적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마카오에 있는 거지. 그것도 성재현이 방문한 호텔에서?

적잖이 놀란 나와 다르게 권재림은 당황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면서 제 허리를 더욱 힘차게 움직였다. 퍽, 퍽, 남자의 입에 성기를 깊숙이 찔러넣은 그가 잠시 몸을 떨더니 입 속에서 성기를 쑥 빼냈다. 캑, 캑, 기침을 토해낸 남자가 입을 문질러 닦더니 권재림에게 들러붙었다.

내게 기대있던 오수안이 팔을 뿌리쳤다. 타박타박 소파로 걸어간 그녀는 대담하게 권재림의 허벅지에 주저앉았다. 입고 있는 가운 안쪽을 뒤적인 그녀의 손에는 자그만 비닐 팩이 들려있었다. 비닐 팩에 든 백색 가루. 설마 마약인가.

“나, 오빠가 좋아하는 거 가져왔는데. 응?”

교태 섞인 목소리에도 권재림은 심드렁했다. 헤벌쭉 웃은 그녀가 권재림을 끌어안고 비비적거렸다.

끽, 끽, 스프링이 마모되는 소음과 달뜬 교성이 질척거리며 무너진다. 소파 옆에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 뻐끔거리던 남자가 황홀한 얼굴로 흐흐 웃었다.

“와, 이거 순도 엄청 높은 거잖아! 전부터 한 번 해 보고 싶었는데.”

밀봉된 마약 가루를 본 남자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야, 나 이거 주면 안 돼? 응?”

“시끄러워.”

미간을 찡그린 권재림이 매몰차게 말했다. 살얼음이 파사삭 깨지는 듯한 살벌한 말투에 남자가 아연실색했다 “뭐?”라고 되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머리를 쓸어 올린 권재림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질렸어. 그러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꺼지라고.”

“허, 참나. 아까는 내가 귀엽다면서요?”

“그랬나? 내가 잠깐 눈이 삐었나 보네.”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씨발….” 욕을 내뱉었다. 권재림은 남자가 욕을 하든 말든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오수안이 들고 있던 비닐 팩을 잡아챈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야! 그거 무지 비싸. 십 그램에 백 달러란 말이야.”

당황한 오수안이 만류했지만 남자는 듣지도 않고 그대로 문밖으로 나섰다. 꽝, 하고 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권재림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주변을 느릿느릿 둘러봤다. 퇴출은 한 명으로 그치지 않았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남녀 여럿이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신했다. 이불, 침대 시트, 옷이 될 만한 건 죄다 몸에 두르고 나가는 모습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같았다.

“오빠, 나도 나가?”

오수안이 서운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가기 싫다는 뜻이 강력하게 담긴 투정이었다. 탁자에 둔 담뱃갑을 집어 든 권재림이 그녀의 입술에 두툼한 시가를 끼워줬다. 사탕이라도 문 듯 볼을 볼록하게 부풀린 오수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이 안쓰럽고 처량했다.

순식간에 킹사이즈 침대 두 개와 넓은 카펫 위가 황량해졌다. 그저 오수안의 안전 때문에 같이 올라온 곳이었으니 나도 더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돌아갈 생각으로 몸을 돌린 찰나였다.

“형한테는 나가라고 한 적 없는데.”

절로 두 발이 멈췄다. 권재림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치익, 불이 타들어 가며 연기를 뿌옇게 그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림자로 번져 천장을 덮었다. 어둑한 조명과 반쯤 열린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든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 오래된 필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옆에 앉아.”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빤 권재림이 소파 쿠션을 퉁퉁 내리치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정찬은 오후 8시에 시작됐고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이 10시에 가까웠다. 슬슬 모임이 파할 무렵이었다.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다는 말도 이제는 한계점을 지났다. 돌아가지 않으면 비서실 직원들도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마카오에는 어쩐 일이려나. 아… 재현이 형 왔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동행?”

“…어.”

“그사이에 출세했네.”

능글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출세라는 말은 틀렸지만 나는 군말을 더 하지 않았다. 눈치를 봐서 여길 나갈 생각뿐이었다. 권재림은 담배를 피우며 느긋하게 나를 음미했다. 음미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발목부터 목까지 훑을 때마다 괜히 간지러워 벅벅 긁고 싶고 싶을 정도였다.

담뱃재를 툭툭 턴 그가 소리 나게 숨을 내쉬었다.

“문자에 답장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분명 내 연락은 무조건 잘 받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

“아~ 성재현이랑 노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구나.”

비아냥거리는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문고리만 잡고 있었다. 그간 긴 사정이 있었지만 그걸 권재림에게 설명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않은가. 말한다고 해도 권재림 성격상 “그랬어?” 하고 넘길 것 같지도 않았다. 달칵, 달칵. 문고리만 연신 잡고 돌렸다. 고풍스러운 문장식만 박자에 맞춰 달랑거릴 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지. 그사이에 문이 고장 났나.

“참, 말해주는 걸 깜빡했네. 여기는 나갈 때도 키가 필요하거든. 그냥은 안 열려.”

“뭐?”

“이거 말이야.”

권재림이 검은색 카드 키를 손에 들고 흔들어 보였다. 아까 나가던 사람 중에도 카드 키를 찍고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소방 안전법을 무시하고 그런 식으로 문을 만들 리가 없었다. 들은 척도 않고 문고리를 계속 돌렸다. 그러나 달칵거리는 소리만 날 뿐 열리진 않았다.

“내가 열어줘야 나갈 수 있다니까. 내 말을 그렇게 못 믿어?”

쯧, 하고 혀를 찬 권재림이 내 등 뒤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도 가도 못한 채 우뚝 서 있는 나를 둥글게 감싸 안 듯 등 뒤에 선 그가 문고리를 붙잡은 내 손에 손을 올렸다.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을 뿐인데 정말로 문이 열렸다.

“거봐.”

그렇게 말하고는 권재림은 문을 다시 쾅 닫아버렸다. 눈앞에 출구를 두고 갇혔다. 카드 키로만 열리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은 권재림만 이 문을 열 수 있었다. 한숨을 입속으로 질근질근 깨물며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권재림은 히죽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키가 큰 그의 그림자가 흘러넘쳐 나를 덮고 있었다.

“강진하 얼굴 보기 드럽게 힘들다.”

두 팔로 나를 푹 끌어안은 권재림의 가슴팍이 등에 밀착했다. 달라붙은 몸이 뜨거웠다. 어깨에 턱을 올린 권재림이 시무룩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우리 형 많이 바쁜가 봐. 내 얼굴도 안 보고 가려고 할 정도로.”

“…….”

“나 이렇게 애타게 하는 건 형밖에 없을걸.”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탁하고 나른하다. 뜨거운 입김까지 고막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내 뒤에 바짝 몸을 붙인 권재림의 체온, 몸의 선. 특히 아랫도리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거슬렸다. 발기한 성기로 자꾸 나를 쿡쿡 찔러댄 탓이었다. 어찌나 큰지 허벅지로도 형태와 굵기, 부피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문에 이마를 기댄 채 나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옷은 좀… 입고 말해.”

“왜? 어차피 내 방인데.”

“네 방이라 해도… 사람 있을 때 벗고 다니진 않잖아.”

“설마 지금, 부끄러워서 그래?”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민망해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내 뺨 가까이에 얼굴을 바짝 붙인 권재림이 피식 웃는다. 숨결이 미지근하게 귀밑을 간질였다.

“이럴 땐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 냉정한 척은 다 하면서도 옷 입으라고 툴툴대질 않나.”

“…….”

“지금 귀 엄청 빨개졌다.”

귓불에 까칠한 입술이 닿는다. 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터틀넥으로 가린 목덜미에 그가 코를 박았다. 흠, 하고 숨을 들이쉬던 권재림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에서… 파스 냄새랑 향수 냄새가 같이 나는데도 좋네.”

몸을 잡아당긴 권재림이 나를 앞으로 돌렸다. 파스 냄새라는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목에는 아직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터틀넥을 끌어 내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팔로 그를 밀쳤다. 훤칠하고 육중한 몸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대로 권재림의 팔을 막느라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입을 열었다.

“나… 이제 가봐야 해.”

“간다고?”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권재림이 으르렁거렸다.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신경 쓰였다.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기분이다. 언제 성재현한테 연락이 올까 조마조마했다. 나는 결국 타협하듯 권재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하던 중에 오수안 씨 데려다주려고 온 것뿐이야. 너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말 그대로….”

“방해하긴 했지. 그런데.”

문에 납작하게 밀린 나를 그가 두 팔로 가뒀다. 터틀넥 위로 입술과 코를 바짝 대고 권재림이 숨을 깊이 마시며 말했다.

“형 같으면 진짜가 있는데 그딴 거 따먹고 싶겠어?”

입술을 핥으며 씩 미소 짓는다. 제정신이 아닌 말투였다.

“이거 놔….”

“놔? 내가 언제 형 납치한 것처럼 말하네.”

고개를 갸우뚱 흔든 권재림이 눈을 가까이 대고 느른하게 말을 이었다.

“형이 이 방에 들어온 거잖아. 내가 억지로 끌고 들어온 게 아니라, 자기 발로.”

“그게 무슨 말이, 악…!”

순식간에 권재림이 우악스럽게 나를 잡아당겼다. 비틀거리며 질질 끌려가는 동안 눈앞이 캄캄해졌다. 권재림은 나를 소파에 억지로 앉혔다. 밀려나면서 머리가 소파 팔걸이에 부딪혔다. 얼얼한 통증에 눈을 찡그렸다가 떴다. 권재림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몽롱하게 젖은 눈이 기묘하게 뒤틀려있었다. 가운 사이를 여민 끈을 푼 권재림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목을 좌우로 까딱거린 그가 내 위로 올라탔다.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 흥분되지… 나는 남이 내가 찍어둔 거에 손대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으르렁거리는 말투가 선득했다. 권재림은 원래도 상당히 낮은 음색이긴 했지만 명랑하게 말하던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달랐다. 발톱으로 몸을 찍어누르고 살을 찢어발길 준비가 다 된 맹수 같았다. 위압감이 온몸으로 전이됐다. 권재림은 나를 밀어붙인 채 내 입술을 혀로 날름 핥았다. 마치 음식을 맛보는 듯한 태도였다.

“좋은 말 할 때 비…켜.”

나는 목에 힘을 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나를 덮쳐 누른 건장한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내 몸에 바짝 겹친 채 아래를 문질러댔다. 그때마다 발기한 그의 성기가 내 허벅지를 텅텅 두들겼다. 그러다 셔츠 사이로 손이 들어와 등과 날갯죽지를 더듬어댔다.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순간 권재림이 돌진하듯 입술을 맞췄다.

“읍.”

숨이 턱 먹히고 입 안으로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꿈틀거리는 살덩어리가 내 입 속을 거칠게 파헤쳤다. 물컹한 감축이 꾹꾹 입천장을 누르고 혀를 휘감았다. 질척거리며 혀가 섞이는 사이로 딱딱하고 동그란 게 입속을 굴렀다. 약이었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 걸 권재림이 내게 먹이려 들고 있었다. 뱉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권재림은 내 목구멍에 혀를 삽입할 기세였다. 육중한 입맞춤에 숨이 가빴다. 파득거리며 두 팔을 휘젓자 권재림이 내 팔을 붙잡아 소파에 꽉 눌렀다. 침이 입술 옆을 타고 질질 흘렀다. 고개를 도리질 쳐도 쫓아와서 계속 숨을 삼키듯 빨아먹고 입천장을 혀로 간질였다. 쿡쿡 목구멍까지 쑤실 기세로 거칠게 혀를 밀어 넣었다.

“흐, 아.”

그러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겨우 한 번 떨어진 입술에 나는 수면에 올라온 사람처럼 급하게 숨을 삼켰다. 숨이 막히고 얼굴은 열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우윽, 흐으, 윽.”

“하아, 형, 존나 맛있네. 씨발.”

“너, 지금 나한테 뭐… 먹인, 거야.”

“그냥 기분 좀 좋아지고, 착해지는 약?”

“약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안 돼, 아, 안 돼.”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다시금 몸부림쳤다. 그런 나를 온몸으로 잡아 누르면서 권재림이 내 손가락을 잡고 쪽, 가볍게 빨았다. 이채로 번득이는 두 눈에 몸이 오소소 떨렸다.

“나쁜 거 아니야. 긴장 좀 풀라고 주는 사탕 같은 거니까. 형은 그냥 가만히, 내 말만 들으면 돼.”

“비, 켜, 비켜. 제발, 나, 나가야 돼. 여기, 있으면, 안 되, 는데.”

권재림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젤리처럼 빨았다. 이로 잘근잘근 깨무는 통에 혀와 입술이 너무 아팠다. 아파서 입을 벌리고 헐떡였다.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끼운 권재림이 내 아래를 퍽퍽 치댔다. 몸이 둔탁하게 흔들리면서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핑핑 돌았다.

어지러워서 손을 위로 휘저었다. 권재림이 흐느적거리는 내 손을 붙잡더니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그 상태로 내 뺨에 자기 얼굴을 대고 슬슬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속삭였다.

“형아. 예전처럼 같이 놀자. 내가 재밌게 해줄게.”

그 순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진 두 번째 노크 소리는 더욱 선명했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홍콩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했다. 너무 빨라서 들을 수 있는 단어라곤 ‘서비스’ 하나였다. 권재림은 노크 소리에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묵직한 몸이 달라붙어 내 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둥글게 입을 벌려 즈읍, 하고 빨아대는 통에 살가죽이 얼얼했다.

“밖에, 흐, 사람.”

“응.”

“사람 왔, 잖아. 룸, 서비스.”

“두고 가겠지.”

무성의하게 대답한 권재림이 내 무릎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온몸으로 버텼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두 다리가 힘없이 벌어졌다. 무릎을 사이에 끼운 권재림이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뿌득, 등 아래에 댄 소파 쿠션이 밀려났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헐떡였다. 무겁고, 어지럽다. 머릿속에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 찬 듯이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부웅, 부웅. 핸드폰 진동이 허벅지를 타고 단전까지 울렸다. 일부러 10시에 맞춰둔 알람이었다. 성재현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을 터였다. 돌아가야 하는데. 안 그러면 성재현한테…. 사고(思考)조차 뚝뚝 끊겼다. 눈을 감았다가 느릿하게 떴다. 형광등 불빛이 망막을 시큰시큰하게 적셨다.

“폰은 언제 바꿨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권재림이 유심히 외관을 살폈다. 납작한 검은색 핸드폰은 누가 봐도 새것이었다. 의문스러운 눈길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내 것 아니야. 그 핸드폰은 성재현이 나한테. 그러니까 지금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말이 좀처럼 이어지지 않아 그저 입술만 달싹거렸다. 권재림은 내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쪽, 입을 맞췄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귓속이 울렁거렸다.

“아, 씨발, 신경 거슬리게.”

참다못한 권재림이 몸을 일으켰다. 소파가 느슨히 출렁거렸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다. 초점이 흐려져 멍멍한 눈으로 옆을, 위를, 아래를 두리번거렸다. 소파 등받이에 가려진 건너편은 보이지 않았다. “대충 두고 가면 될 거 아냐.” 끼익, 문을 연 권재림이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 시킨 적도 없는 게 오셨네.”

느릿한 비아냥거림에는 멸시가 가득했다. 침묵의 간극이 길어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어지럽게 고막을 흔들었다. 멀미가 나는 듯했다.

저벅저벅, 들어오는 구두 굽 소리가 단정했다. 눈앞에 드리운 커튼에 현관 불빛으로 맺힌 그림자가 움직였다.

“안녕.”

누군가가 말했다. 지극히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너무 낮지도 않고, 적당한 톤과 어조는 우아했다. 차마 문 쪽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 창가의 커튼만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 천장에 달린 주황색 불빛이 커튼에 비친 그림자를 둘러쌌다. 마치 한 폭의 성화(聖畫)같았다.

“뭐냐? 너?”

“보다시피 네 사촌.”

“내가 지금 그거 묻냐? 여긴 왜 기어올라 왔냐고.”

“출장 온 김에 너 잘 지내나 얼굴도 좀 보려고.”

“그래서 내가 시킨 적도 없는 룸서비스를 대동해서 들이닥쳤냐? 와, 프라이버시란 게 없나.”

“노크해도 반응 없길래, 졸도라도 한 줄 알았지. 약 먹고.”

태연한 대꾸에 권재림이 이를 이득 갈았다. 고개를 살짝 돌린 성재현이 호텔리어를 돌려보냈다. 카트 바퀴가 탈탈거리며 급하게 떠났다. 문가에 기댄 권재림이 으르렁거렸다.

“보자마자 시비 거냐?”

“시비라니.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네.”

“그럼 날 찾아온 이유가 ‘얼굴 보러’라는데 내가 믿을 거 같아?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또 뒷조사라도 하고 다녔냐?”

“아니, 고모님께서 먼저 연락주셨어. 너 홍콩에 잠깐 피신시켰다면서.”

사근사근한 말투에 권재림이 자조했다.

“아, 피신이라… 그런 좆같은 표현으로 들으니 웃기네. 그런데 전무님 생각과는 다르게 피신이 아니라 여행 왔거든요. 한국에서 얌전히 지내자니 따분해서.”

“권 회장님이 아예 미국으로 쫓아내려 했다면서. 그래서 고모님이 설득하느라 애쓰셨던 모양인데.”

“…….”

“그래서 걱정되더라고. 네 사촌 형으로서.”

썰렁한 적막이 감돈다. 미미한 두통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대부분의 호텔 객실이 그렇듯이 창문 구석에 비상구가 있었다. 내가 있는 소파는 현관에서 90도로 꺾어야 보이는 자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야에서 안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온다면 충분히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거리였다. 하다못해 어디 구석에라도 숨고 싶은데 쥐라도 났는지 몸이 물에 젖은 솜이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였다간 들킬 게 틀림없었다. 지금으로선 권재림이 적당히 호응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걱정 좋아하시네. 언제부터 날 그렇게 걱정했다고. 차라리 조롱하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지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운하네.”

“실컷 서운해하든지.”

앞머리를 쓸어넘긴 권재림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 얼굴 봤는데 안 질려? 나는 전무님 얼굴 질리는데. 좀 가지?”

“하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찾을 게 있어서.”

“찾아? 뭘?”

“강진하.”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커튼에 비친 그림자가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숨을 한 번 들이쉰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강진하.

그것은 마치 권재림에게 대답하는 게 아니라, 나를 불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아니, 틀림없었다. 성재현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올라온 걸까. 그렇지만 어떻게 알고서? 몸에다 위치 추적기를 달았다 해도 층수까지 찾아낼 리가 없는데.

“진하 형?”

“같이 왔거든.”

“같이?”

“그런데 한 시간 전부터 안 보여서. 호텔 밖으로 나간 것 같진 않은데… 어디 있으려나.”

모로 웅크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머리는 분명 차가운데 몸속은 불길처럼 뜨거웠다. 며칠 전 나를 아무렇지 않게 짓뭉개던 얼굴이 떠오른다.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싼 채 성재현은 화사하게 웃었다.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그 사실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나가는 게 좋을까. 아니야, 그랬다간 더 오해만 살 수도 있다. 왜 지금까지 권재림과 같이 있었는지 해명해야 할 테고, 그 과정에서 나한테 무슨 수치심을 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한테 그건 왜 말하는데?”

“혹시 너랑 만났나, 하고.”

“진하 형이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난 전무님이 마카오 온 줄도 몰랐는데.”

“그래?”

“어, 전혀 모르겠는데.”

퉁명스럽게 받아친 권재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연하게 주머니를 뒤적인 그는 담배를 꺼냈다. 불이 붙고 그림자 머리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줄곧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흡사 문을 지키는 경비견과 영역을 침범한 포식자 간의 팽팽한 기 싸움을 보는 듯했다. 조용히 바라보던 성재현이 이내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시큰둥하네.”

“뭔 소리야?”

“여기에 강진하 데려왔단 걸 알면 눈 돌아갈 줄 알았는데. 너무 무덤덤하길래. 이미 알고 있었나, 싶어서.”

“…….”

그 말에 권재림이 입을 다물었다. 손에 들린 담배가 타들어 간다. 속이 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벅벅 긁은 권재림이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뭔데? 내가 강진하를 만났는데 아닌 척 한다고?”

“그랬어?”

“아니?”

“그럼, 저기 있는 건 누군데?”

“뭐?”

“소파에. 사람 있잖아.”

팔을 들어 올린 그림자가 가리킨 곳은 내가 있는 소파였다.

그 순간 등줄기가 벌벌 떨렸다. 그림자가 비친 건가. 최대한 보이지 않게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아까부터 기척이 느껴지는데, 거슬려서.”

나는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두 다리를 팔로 움켜 안고 고슴도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숨소리까지 눌렀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하, 씨발. 갑자기 찾아와선 존나 귀찮게 구시네.”

삐딱하게 기대 있던 권재림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소파 등받이를 가운데 두고 권재림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조명 빛이 물든 눈동자가 부드럽게 일렁거린다. 소파로 훌쩍 넘어온 권재림이 갑작스럽게 나를 끌어안더니 입술을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 키스라니. 당황한 나는 몸을 뒤틀며 그를 만류했다. 하지 마.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며 부탁했다. 그러나 권재림은 오히려 내 머리카락부터 뺨과 귀, 온 곳에 마구 입을 맞췄다. 쪽, 쪽, 살에 닿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쉿, 괜찮아. 금방 올게.”

입술을 떼어낸 그가 웃으며 내 뺨을 도닥였다. 그가 내 등 뒤에서 꺼낸 건 검은색 브래지어였다. 손가락에 끈을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던 권재림이 브래지어를 소파 너머로 휙 내던졌다.

“이거면 이해되냐?”

“음, 그러네.”

“알겠으면 이제 좀 나가.”

퉁명스럽게 내뱉은 권재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빛을 노려봤다. 그림자가 어둠 속을 걸어온다. 뚜벅뚜벅, 기척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애인이야?”

소파를 붙잡은 그의 손이 눈앞에 놓였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것처럼 섬세하고 흰 손가락. 나는 그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내 목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았다.

“애인이든 말든 알아서 뭐 하게.”

“꼭꼭 숨기는 걸 보니 많이 귀여워하는 거 같아서.”

“귀여워하든 뭔 상관인데?”

“네가 뭘 하든 나야 상관없겠지. 그렇지만 그냥 적당히 갖고만 노는 게 좋지 않겠어?”

“뭐?”

“괜히 애정 주다가 상처받지 말라고.”

권재림은 말없이 성재현을 노려봤다. 소파를 짚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럼 나중에 봐.”

끼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발걸음이 점점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갔어.”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권재림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여전히 권재림의 품에 있었다. 한차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했다. 아직도 손이 떨려 반대 손으로 움켜쥐었다.

똑, 똑, 초침이 움직인다. 조명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얼굴은 차분하다 못해 냉랭했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시선으로 나를 훑는 듯했다.

“강진하.”

권재림이 말했다. 나를 부르는 그 이름이 순간 이상하게 역겹게 들렸다. 송곳으로 픽, 내 몸을 찌르는 듯한 섬뜩함에 몸부림쳤다. 권재림이 내 목깃에 손을 가져다 댔다.

“너… 목에 난 멍은, 뭐야? 어?”

몸이며 턱까지 벌벌 떨렸다. 손을 쳐냈다. 고개를 숙이고 나는 머리를 가로로 마구 흔들었다.

“놔, 나… 줘. 놔, 이거 놔, 놔.”

“야, 진정해.”

“싫어, 하지 마! 싫어!”

정신 나간 것처럼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힘이 빠진 팔은 공기 빠진 풍선처럼 휘적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악을 쓰다 사레가 들렸다. 목이 졸리는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목을 긁었다. 호흡 방식을 잊어버린 것처럼 캑캑거렸다.

“쉬이, 가만히 있어. 지금 약 때문에 경련 와서 그래.”

“가, 나가, 갈래.”

“지금 너 못 걸어.”

“나 좀, 가만히.”

가만히 놔둬. 제발.

시큰거리는 눈을 부릅떴다. 권재림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다가온다. 때리는 줄 알고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권재림은 내 눈 아래에 엄지를 대고 쓱쓱 밀어냈다.

“울지 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뜨거운 물기가 눈 옆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가 아파서,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이었다. 멈추려고 해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에 내가. 질질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는 그를 노려봤다.

“개새끼.”

개새끼, 개자식, 나쁜 놈. 힘 빠진 주먹으로 권재림을 약하게 때리며 나는 했던 욕만 계속 반복했다.

“나도 알아. 나 개새끼인 거.”

내 팔을 잡은 권재림이 씩 웃었다. 욕을 했는데도 화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유쾌해 보였다. 내 얼굴을 쓱쓱 문지르던 권재림이 이내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어차피 개새끼 된 거, 잠깐만 이러고 있을래.”

“뭐 하는….”

나란히 소파에 풍덩 누웠다. 나는 소파와 권재림 사이에 꽉 끼였다. 오도 가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안고만 있을 테니까.”

그가 손가락 사이를 벌려 깍지를 꼈다. 단단한 손이 나를 옭아맸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권재림이 말을 이었다.

“나, 밀어내지 마.”

**

눈을 들어 권재림을 살폈다.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잠든 와중에도 어찌나 나를 꽉 끌어안았는지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권재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똑바로 일어서자 살짝 어지러웠지만, 아까보단 견딜 만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식은땀 때문에 온몸이 불쾌하게 끈적거렸다.

씻고 나오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새벽 1시였다. 셔츠 소매 단추를 채우며 소파를 확인했다. 부산한 내 움직임에도 권재림은 깨지 않았다.

“권재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손으로 그를 툭툭 흔들며 재차 말했다.

“침대 가서 자.”

“으음.”

깊이 잠든 건지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돌아올 뿐이다. 소파에서 자면 피곤할 텐데. 아무리 이쪽 날씨가 덥다고 해도 감기 걸릴지도 모르고.

망설이던 나는 결국 권재림을 부축했다. 체격이 커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너른 곳에 누우니 어색한지 권재림은 몇 번 자리를 뒤척거렸다. 어디 불편한가. 나도 모르게 자리를 살펴보다 이내 쓸데없는 짓이란 걸 깨달았다. 권재림 보모 노릇 하던 게 언제적인데 아직도 그를 챙기려고 드는 거지. 괜히 선만 넘는 걱정이었다.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내게, 자신을 밀어내지 말라고 하던 목소리가 아득하게 맴돌았다.

이건 밀어내는 게 아니다. 제대로 구분을 하는 거지. 권재림은 석영그룹의 삼남이고 나는 그냥 일반인이다. 현대에 와서 천부 인권이니 귀천이 없다느니 해도 결국 돈 아래 사람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나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눈과 귀와 몸으로 배웠다.

침대 등을 끄는 대신 조도를 아주 미미하게 낮췄다. 어릴 적 권재림은 어두운 곳에서는 혼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들이 늦은 시간까지 모임을 하는 날이면 나는 권재림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옆에 가만히 붙어서 계속 책을 읽고, 동요를 불러주곤 했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파에 떨어져 있던 카드 키를 챙겨 문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굳게 잠겨있던 문은 카드 키를 대지 않았는데도 거짓말처럼 쉽게 열렸다. 문고리를 더듬더듬 만져보고 나서야 나는 이중 도어락이 걸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았다니. 우습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오수안이 앉아있었다. 수영복에 비치 가운만 걸친 그녀는 퍽 쓸쓸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 나 오빠 기억난다. 저번에 세한… 거기서 봤었죠. 그때 무슨 비서라고 하지 않았나.”

아는 척하는 말에도 나는 대꾸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다가온 오수안이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오빠 이름 뭐예요? 나는 알죠?”

“…….”

“뭐야, 원래 그렇게 무뚝뚝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러면 되게, 되게 좋아하던데.”

오수안이 심통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린다. 쉴 새 없이 쏘아붙이는 게 병아리 같았다. 나는 그녀가 꽉 붙잡은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대로 밀쳐내자니 휘청거리는 모양새가 신경 쓰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속은 어떠세요?”

“속? 오빠 때문에 나 쫓겨난 거 보고도 몰라요? 내가 아까 얼마나 서러웠는데. 존나 어이없어… 진짜 짜증 나.”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미안합니다.”

“네? 미안? 미안하다고? 뭐야, 그렇게 쉽게 미안하다고 말하면 나만 나쁜 년 된 거 같잖아요.”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고깝게 들리진 않는다. 오히려 좀 귀엽게 보였다. 이래서 권재림이 퉁명스럽게 대하면서도 같이 다니는 걸까. 나는 어깨만 가볍게 으쓱거렸다.

“지금 보니까 오빠, 되게 예쁘게 생겼다. 피부도 무지 하얗고… 숍 같은 거 안 다니죠?”

팔에 기댄 오수안이 초롱초롱 눈을 빛낸다. 누가 해야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뭐라고 받아칠 말도 없어서 그저 눈을 피했다. 흐흥, 하고 웃은 그녀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요, 오빠는 재림 오빠랑 무슨 사이예요? 저번에도 재림 오빠가 먼저 아는 척하던데. 오빠한테 물어보니까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라고만 말해줬거든요.”

친한 사이라.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시중든 것도 지인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하긴, 내막을 아는 것도 아니고 겉보기엔 그런 오해를 할 만했다.

“재림 오빠는 처음 만났을 때도 번호 바로 안 줬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 어디 드라마 나왔다고 하면 호기심에라도 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내가 육 개월이나 쫓아다녔어요. 오디션도 그렇게는 안 봤을걸? 근데 오빠는 그럴 필요도 없고, 재림 오빠가 먼저 알아보던데. 재벌 비서들은 재벌이랑도 친하게 지내요?”

흐느적거리는 몸을 기대며 오수안이 “부럽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실상을 알면 부럽다는 말은 나오지 않겠지만, 굳이 환상을 깨트릴 필요는 없겠지. 알려줘 봤자 나한테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잠자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줬다.

땡,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도착했다. 팔짱을 부드럽게 푼 나는 오수안에게 카드 키를 내밀었다.

“들어가 봐요. 지금 자고 있을 거예요.”

“그치만 들어갔다가 혼나면 어떡해?”

“아니요. 재림이… 아니, 권재림 씨 혼자 자는 거 싫어하니까, 옆에 있으면 좋아할 거예요.”

“네?”

그 말에 오수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사소한 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한, 궁금증이 가득한 눈망울이었다. 나는 모른 척 엘리베이터 닫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서야 한숨을 길게 몰아쉴 수 있었다.

**

호텔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리조트 주변은 불야성이었다.

난간에 기대서서 잠시 바람을 쐬던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부재중 전화’로 가득하리라 예상했던 수신 목록은 의외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영호 실장 대리로 따라온 박균홍 차장이 보낸 문자 한 개가 유일했다. 내일 스케줄에 대한 간략한 전달 사항, 그리고 귀빈들이 곧 자리를 뜰 예정이니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간략한 내용이었다. 발신 시각은 홍콩 시간 기준으로 밤 10시를 조금 지나있었다.

그렇다면 먼저 리조트로 돌아갔을까. 내일 스케줄도 있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쉽사리 넘길 수 없었다. 아까 호텔 방으로 찾아왔던 그 남자. 분명 목소리도 말투도, 심지어 미미하게 느껴지는 향수조차도 성재현이 틀림없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너무 긴장한 나머지 헛것을 본 건가. 그렇지만 단순히 헛것이나 착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일단 연락 온 게 없으니 권재림하고 같이 있었던 건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일 걱정하던 것도 성재현이 내가 어디 갔는지를 알아차렸냐, 아니냐였다. 그거만 아니라면 나머지는 대강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박균홍 차장한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지적이었다.

둘러댈 말은 대강 정해뒀다. 몸이 안 좋아서 리셉션에 간단한 진통제를 받아오느라 잠깐 이탈했다, 는 평범한 사유였다. 거짓말이었지만 어차피 사실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가 부재하는 바람에 크게 일정이 뒤틀린 것도 아니니, 형식적인 시말서에 사유만 적으면 그만이었다.

호텔 측에 부탁해서 택시를 잡아달라고 하면 되겠지.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답답하게 누르던 가슴 통증과 두통은 한결 나아졌지만 아직도 취한 것처럼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호텔 앞에 잘 정돈된 야외 정원이 보였다. 벤치에 앉아서 쉬어야겠다. 넘어지지 않도록 계단을 천천히 내려섰다. 늦은 시간이지만 차가 아예 다니지 않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 스포츠카, 그리고 호텔에서 부른 걸로 보이는 택시.

그리고 차도 건너편에 차 한 대가 덩그러니 있었다.

내가 가려는 길목을 정면으로 막고 있는 차는 특별해 보일 것 하나 없었다. 검은색 SUV, 독일제,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차종.

계단을 내려서자 지익, 창문이 천천히 열린다. 차 안은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뻥 뚫린 구멍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암흑이었다.

그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왔어요?”

나는 오도카니 서 있었다. 웃는 얼굴, 그러나 전혀 웃지 않는 것만 같은 눈이 나를 바라본다. 차 문이 덜컥 열렸다.

“얼른 타요.”

그가 말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두 다리가 벌벌 떨렸다. 그는 나를 관찰하듯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채근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사무치게 무서웠다. 가면 안 돼. 거기로 가지 마. 귓속에 환청처럼 내가 발악했다. 그러나 거스를 수 없었다. 나는 무거운 다리를 질질 이끌고 그의 차 앞에 섰다.

“내 생각보다는 좀 늦었네요. 흐음, 보자, 몇 시지.”

성재현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가 다 됐네.”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산뜻했다.

성재현은 내게 어디 갔다 왔는지 묻지도 않고, 늦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너무 당연하게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아까 있었던 일의 전말을 깨달았다. 내가 그 방에서 봤던 건 어설픈 착각도, 헛것도 아니었다. 성재현은 권재림의 방에 왔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리라.

그럼 그때 내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한 것도, 착각이 아니라 나를 정말 불렀다는 거다. 내가 거기 있을 걸 알고 일부러. 아랫입술이 자꾸 벌벌 떨렸다. 따끔따끔할 정도로 질끈 깨물고 숨을 참았다. 운전대를 붙잡은 성재현이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안 타고 뭐 해요?”

“전무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당연히 강진하 씨 데려가려고 기다렸죠.”

나는 머릿속으로 그럴듯한 변명을 마구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에게 무슨 말을 해본들 아무 의미가 없을 텐데.

“차 앞에서도 기다리게 하려고요?”

“아….”

“오늘따라 많이 기다리게 하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까딱, 움직였다. 부드러운 재촉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 했어요.”

“흐음, 잘못? 강진하 씨가 나한테 뭐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늦게 오고, 전무님을 기다리게 해서….”

중언부언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이었다. 성재현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에 숨이 막힐 즘에 성재현이 말했다.

“그거 말고는?”

“허락 없이… 다른 방에 갔어요.”

“그리고, 또.”

“전무님께서 온 건, 알고는 있었는데….”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안 나왔어요?”

성재현이 나긋하게 다그쳤다. 그러나 벌컥 화를 내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말투였다.

“…무, 서워서.”

차분하게 잇던 목소리가 순간 무너졌다. 무서워서, 나올 수 없었다. 거기서 들켰다가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또 맞을 게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벌 받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울고 있는 내가 한심했지만 눈물이 도무지 그치지 않았다. 나는 성재현이 두려웠다. 나에게 그는 감히 거부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날 별장에서, 성재현이 똑똑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황명수를 벌레처럼 밟아 누르면서, 우위를 똑바로 확인시켜 줬었다.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은 목구멍을 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숨을 골라도 덜덜 떨리긴 매한가지였다. 반대편 차 문이 열렸다. 덜컹, 차체가 흔들리며 그가 내렸다. 그는 차를 한 바퀴 빙 돌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강진하 씨 생각보다 눈물이 많네.”

“흑, 흐읍….”

“아직 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울면 어떡하려고. 응?”

핀잔을 주는 말투였지만 화난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나는 눈물로 흐리멍덩해진 눈을 들어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성재현은 나를 가뿐하게 일으킨 다음 조수석에 앉혔다.

“무서웠어요? 내가?”

“흐으, 네, 네.”

“저런. 내가 뭘 했다고 울고 그래요. 난 그저, 여기서 쭉 기다렸을 뿐인데.”

성재현이 내 눈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쪽 빨았다. 눈이 쓰라렸지만 감을 수 없었다. 이윽고 흘러내린 눈물 선을 따라 내려온 혀가 뺨을 약하게 핥는다. 얼굴을 간지럽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숨을 할딱거리며 내쉬었다. 입술에는 닿지도 않았는데 집요한 키스라도 받은 것처럼 숨이 찼다. 몸을 숙여 나를 찬찬히 살피던 그가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눈이 풀려있네.”

“아….”

눈이 풀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성재현이 피식 웃으면서 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숨소리가 귓가를 달굴 때마다 손끝부터 저릿저릿했다.

“거기서 뭐 하다 왔어요?”

“아, 무것도, 으응, 안 했… 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네, 정말로….”

“거짓말.”

그가 톡 쏘아붙이며 말을 이었다.

“입술이 퉁퉁 부었는데. 키스한 것 티 내는 것처럼.”

섬뜩한 속삭임과 함께 성재현이 귓불을 꽉 깨물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났을 게 틀림없는, 강한 통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팠지만 비명을 지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목덜미로 쭉 흐르는 물기를 그가 혀로 날름 핥았다.

“난 권재림이 그런 식으로 감싸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잘못, 했어요. 잘, 못했어요. 전무님.”

허락된 말은 그게 전부인 것처럼 나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잘못했어요. 그 말밖에는 내가 살 길이 없었다. 목덜미를 차가운 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침과 눈물로 축축하게 부은 눈을 힘없이 깜빡거렸다. 성재현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잡아 쥐고 상냥하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입으로만 적당히 빨아봐요.”

“으흑.”

“잘하면, 오늘 일은 눈감아 줄게요.”

보조석 시트가 뒤로 힘껏 밀려났다. 나는 그대로 차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동차 아래는 매우 좁았다. 자그만 우리에 갇힌 듯했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버클을 풀고 허겁지겁 드로어즈를 내려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성재현은 무심하게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여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우울한 노래를 불렀다. 춥춥, 젖은 점막이 살을 빠는 소리와 음울한 외국어 노래가 기괴하게 섞였다. 성재현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아는 노래인지 따라부르는 톤이 익숙했다.

“난 외국에 데려오면 내 옆에 붙어서 안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숨을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어요.”

“흐욱, 읍.”

“…그대로 뒀으면 아예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네.”

“흐, 욱, 우응, 으훕.”

“목구멍까지, 더 깊이 머금고 빨아요.”

뒤통수를 꽉 누르는 힘에 목구멍이 막혔다. 눈물이 흐르는 눈을 질끈 감고 입에 힘을 줬다. 머리 위로 성재현이 느른하게 신음하며 내 머리카락을 비볐다. 나는 열심히 게걸스럽게, 그가 원하는 대로 입을 놀렸다. 어느새 스피커에선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재현이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얼굴에 미지근한 점액이 후두둑 쏟아졌다. 나는 그대로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다. 더운 숨을 길게 고른 그가 내 눈에 시선을 맞췄다.

“예쁘기도 하지.”

애완동물을 칭찬하는 것처럼 그가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쓱쓱 문질렀다. 가늘어진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지극히도 상냥한 미소였다.

**

“그러니까… 저는 분명히 그 방이 제 이름으로 예약됐다고 들었습니다. 오전에 짐을 맡기면서 저희 차장님께서 사인도 하셨고요.”

“죄송하지만 확인해본 바로는 체크인에 딱히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배정되었던 내 방은 이미 다른 사람이 카드 키를 받아 간 다음이었다. 여분의 카드 키를 달라고 해도 규정상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직원은 피곤한 얼굴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도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곤 싶진 않았지만 곤란한 건 매한가지였다. 이 시간에 박균홍한테 전화를 걸어 “제 숙소가 없어졌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와서 새로 묵을 호텔을 찾을 수도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급하게 해외로 따라온지라 갖고 있는 체크카드가 해외 결제가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 안 되면 로비 의자에서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없겠지. 한숨 쉬며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무슨 일이죠.”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성재현이었다. 주차하고 올라갈 테니 먼저 들어가서 쉬라고 했었는데, 그사이에 이미 주차를 마친 모양이었다.

성재현은 나를 끌어안을 듯이 등 뒤에 바짝 붙어 데스크를 내려다봤다. 습윤한 숨이 귓가에 빙그르르 닿는다. 나른한 숨소리에 나는 조금 전까지 차 안에서 그의 성기를 빨고 왔다는 사실을 재차 떠올렸다. 입 속을 묵직하게 채우던 감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성기를 빠느라 고개 숙인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도. 오싹오싹한 간지러움이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듯했다.

맞잡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예약된 방이 없다고 해서, 확인 중입니다.”

“방이 없어요?”

“네. 분명 점심에 미리 직원들 체크인할 때만 하더라도 방이 있었는데….”

“세한으로 된 예약 리스트 좀 다시 보여주시겠어요?”

성재현이 부탁하자 직원이 급하게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그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성재현이 내역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가까이 밀착된 그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숨소리, 심장 뛰는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내 고막을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만에 성재현이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남은 방을 급하게 예약하면서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이네요.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경우가 생기다니, 나중에 제대로 문의해보는 게 좋겠어요.”

“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

“일단은 그럼, 내 방을 같이 쓰죠?”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방을 같이 쓰자는 말에는 그 어떤 성적인 함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예측할 수 없던, 두려움을 마주한 것처럼 초조해졌다.

괜찮다는 거절도 부적절했다. 당장 오전 7시가 소집 시간이었다. 길게 잡아도 3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다. 엄연히 상사인 성재현으로선 나름 파격적인 제안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앞뒤가 착착 맞는 걸까. 마치 처음부터 계산해둔 것처럼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올라갈까요?”

직원에게서 여분의 카드 키를 건네받은 성재현이 내 손에 키를 쥐여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따라갔다.

워낙 급하게 예약 잡은 터라 성재현에게 배정된 객실은 평소처럼 스위트가 아닌, 그 아래 단계 프리미어 룸이었다. 그래도 남아있는 방 중에서는 컨디션이 제일 좋다며 직원이 거듭 양해를 구하던 말이 떠올랐다. 방은 스위트 못지않게 훌륭했다. 문제는 다른 점이었다.

침대가, 더블 베드였다.

원래라면 성재현 말고는 다른 사람이 들어올 일이 없었으니, 침대가 하나인 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가장 나쁜 상황이었다.

차라리 로비 소파에 앉아있는 게 낫지 않을까. 여긴 그리 추운 편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샤워라면 피트니스 룸에 마련된 공용 샤워실을 이용해도 충분할 터였다.

“씻고 와요.”

차 키를 일인용 소파에 내던진 성재현이 말했다. 열심히 계획을 세우던 머리가 그대로 정지했다.

“저는, 나중에 씻을 테니 전무님께서 먼저….”

“씻고 와요.”

단호한 음성이 냉엄했다. 성재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럽게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성재현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전에, 여기서 벗어요.”

“네…?”

“자꾸 두 번 말하게 하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소파에 털썩 앉은 성재현이 다리를 꼬았다. 턱짓을 까딱 한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키스 말고 아무것도 안 했는지 확인해 봐야지.”

“하지만 아까는 없던 일로 해주시겠다고….”

“그건 약 이야기였죠. 언제 내가 전부 다 눈감아준다고 했던가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성재현은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언제든 그의 마음대로 바뀔 수 있었다. 주도권은 언제나 그에게 있었다. 이 순간에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내가 벗길까요, 아니면 강진하 씨가 직접 벗을래요?”

“전무님.”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내게 다가왔다. 그대로 넥타이를 잡아당긴 성재현이 나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잠시만…!”

반사적으로 팔뚝을 붙잡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내가 입은 와이셔츠를 양쪽으로 벌렸다. 단추가 툭툭 떨어졌다. 한기가 스며든다. 성재현이 유두를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지나치게 깨끗한 걸 보니까.”

“아… 흐으.”

“샤워했네요.”

나는 두려움으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 때문에 샤워한 게 이런 식으로 오해할 소지를 만들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내 몸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확인하던 그가 손을 아래로 뻗는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가로젓자 성재현이 손힘을 풀었다.

“해봐.”

압박할 듯이 몰아붙이던 기척이 한 걸음 멀어졌다. 소파로 돌아가 앉은 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힘껏 떴다. 벨트에 더듬더듬 손을 가져다 대고 매듭을 풀자 헐렁해진 바지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는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마저 벗으라는 지시였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속옷, 그리고 양말까지 전부 벗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로 그의 앞에 섰다. 나를 내려다보는 두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타고 남은 그을음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어둠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한기가 온몸에 비수처럼 박혔다.

소파 바로 앞에 바로 섰다.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살살 문지르던 성재현이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엎드려서 다리 벌려봐요.”

“전무님.”

“하기 힘들다면 박균홍 차장 불러오죠. 출장 인원 관리 허술하게 한 건 전적으로 박 차장 책임이니까.”

“…….”

“강진하가 나 안 보는 동안 다른 좆은 안 받고 다녔는지, 직접 전부 확인하고 보고하라고 하면 되겠네요.”

핸드폰을 든 그가 느른하게 웃었다. 싸늘한 시선은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엎드렸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다리를 벌렸다. “똑바로 벌려.”라는 말에 두 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양쪽으로 벌렸다. 찬 공기가 허벅다리 안쪽을 스친다.

시선이 여기저기를 헤집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찔 흔들었다. 끼익,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미지근한 안쪽 살에 그의 구둣발이 닿았다. 쓱, 쓱 문지를 때마다 마치 삽입된 것처럼 몸이 턱턱 흔들렸다.

미끈한 구두 가죽이 허벅지 안쪽을 비빈다. 불현듯 뺨이 달아올랐다. 입을 열면 신음이 나올 것만 같아 나는 얼굴을 바닥에 꾹 누르고 있었다.

몸을 굽힌 그가 내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몸을 비트느라 엉덩이를 실룩 흔들었다.

“이거 봐. 가만히 있어도 좆 넣어달라고 엉덩이를 흔들어대면서.”

“흐으, 윽.”

“왜, 허전해요?”

생수병을 집어 든 그가 생긋 웃었다.

“이거라도 박아줄까요?”

한 눈으로 봐도 손목 굵기만 한 생수병이었다. 나는 몸서리 치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성재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내 머리에 구둣발을 그대로 올렸다. 병목이 사타구니 사이에 닿았다.

“싫어?”

“흐윽….”

“싫어, 진하야?”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싫어요. 성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짓궂고 잔인한 미소였다. 애달프게 흐느끼며 내가 다시 말했다.

“차라리 전무님이… 전무님이, 해주시는 게 좋아요.”

그야말로 되는 대로 담은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냥 그런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성재현은 한동안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표정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다.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까드득, 병뚜껑이 내 얼굴 옆에 떨어졌다. 쏟아진 물이 등을 타고 엉덩이로 콸콸 쏟아졌다.

“아, 으응.”

허벅지 사이가 젖고 카펫에 둥그렇게 얼룩이 졌다. 몸에 맺힌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늦었으니, 자는 게 좋겠네요.”

빈 병이 바닥을 굴렀다. 성재현은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욕실 문이 닫히고도 나는 한참 동안 카펫에 웅크린 채 일어날 수 없었다.

**

출장 스케줄은 비교적 단순했다.

느지막한 오전에 성재현은 홍콩 지사에 방문했다. 전략 회의에 참석해 간략한 보고를 들었고, 정오에는 지사장을 비롯한 임원과 식사를 했다. 마지막 일정은 결혼식 피로연으로 인민대표, 한국으로 치면 지역구의원 정도 되는 인사가 초청한 자리였다. 앞서 끝낸 일정보다는 훨씬 개인적이었지만 피로연은 이번 출장에서 중요한 일정 중 하나였다. 국가 간의 법망은 사기업인 세한이 건들지 못하겠지만, 지역인사의 입김은 다르다. 시장 진출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를 상대적으로 보호해줄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나는 성재현이 가는 곳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성재현이 업무를 보거나 대화를 하는 동안 얌전히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어디를 가든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직원들은 나를 지나칠 때마다 서로 속닥거렸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분명하게 듣진 못했지만 대강 감은 잡혔다. 그들에게 나는 이해되지 않는 존재일 터였다. 학력, 스펙, 어느 것 하나 세한 입사 기준치에 맞지 않았다. 붙임성도 없고 말을 걸어도 형식적인 대답이 끝이니 퉁명스럽고 오만하게 보인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직원들은 차 안에서 쪽잠을 자거나 담배를 피우러 갔다. 나는 목줄이 걸린 개처럼 오도카니 그곳에 남아있었다. 서너 시간씩 홀로 서 있으니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성재현이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새벽에는 그렇게 무서워했으면서 지금은 성재현이 나오길 바란다니.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게 휙휙 바뀌어도 되는 걸까.

박하사탕을 마른 입에 넣으며 나는 새벽에 있었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치욕스럽고 수치스럽던 그 순간이 어지럽게 맴돈다. 바닥에 웅크려있던 내가 일어났을 땐 성재현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침대는 깨끗했고 사람이 누웠던 흔적도 없었다.

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그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재현은 돌아오지 않았고 박균홍 차장이 전화로 나를 불러냈다.

또 뭔가 기분 나쁘게 한 건 아니겠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솔직히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전에 만났을 때 나한테 별말이 없었던 걸 보면, 그저 같은 방을 쓰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여기는 게 나로선 덜 피곤한 결론이었다.

피아노 연주가 이제는 소음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느낌에 졸린 눈을 비비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성재현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요.”

“아.”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됐는데요.”

그 말에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성재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시간가량 토막잠을 짧게 잔 다음 곧바로 일어나서 오전 일정을 준비했다. 이후에도 식사시간과 차량 이동을 제외하면 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옅게 있는 걸 빼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 하며, 연미복 차림은 안 그래도 완고한 그의 우아함을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나는 성재현의 눈을 쉬이 마주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불쾌하지 않도록 눈을 살짝 내리깔고 “괜찮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지금 한 말이 오히려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한 건 아닐까. 차라리 피곤하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나. 온갖 불미스러운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성재현은 나를 쳐다볼 뿐 뭐라고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마치 내가 말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줄곧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떠듬거리던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전무님께서도 피곤하시잖아요. 걱정했습니다.”

“걱정?”

“아침까지, 안 들어오셔서….”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피곤한 나머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성재현은 생긋 웃었다. 손을 위로 드는 동작에 어깨를 움츠렸다. 성재현은 내 머리채를 잡거나 때리지 않았다. 나긋나긋한 손길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가볍게 조깅 좀 했어요. 원래 아침마다 운동하잖아요. 한 시간씩. 다리 나은 이후로는 더더욱 신경 써서 챙기고 있고요.”

아, 그랬었지.

“그런데 아침까지 안 들어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나 없다고 잠도 못 잔 거예요?”

“…….”

“응? 그랬어요?”

차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벽 내내 제대로 한숨 못 잤던 이유를 나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이후로 성재현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불안했던 건 사실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성재현은 내가 모시는 상사이자 고용주였으니 그의 신변과 안전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 당연한 걱정임이 틀림없었다.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자 성재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눈 아래를 가볍게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귓불로 옮겨왔다. 살살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오늘은 그래도 귀여운 말을 다 하네요. 새벽 동안 반성을 많이 했나.”

“…….”

멀리서 전무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균홍 차장을 비롯한 수행원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거둔 성재현이 말했다.

“먼저 차에 가서 쉬어요.”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괜한 고집 부리다 쓰러지지 말고. 밤 비행기라서 지금 아니면 쉴 틈도 없어요.”

“저 혼자 쉬면 다들 안 좋게 생각할 겁니다.”

“쓸데없이 고집 부리기는.”

그러면서도 성재현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앞장서는 성재현의 등을 바라보던 나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어차피 한두 시간만 참으면 끝나는 일정이었다. 그 뒤에는 간단한 저녁 모임만 있었고 그마저도 수행원 중 일부만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만 버티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피로연이 길어졌다. 나는 연회 홀 구석에 서서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피곤한 것보다도 두통이 문제였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다 못해 눈 주변까지 아팠다. 아침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마를 손등으로 눌러 열을 잰 나는 옆에 있던 남자에게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내 상태가 썩 안 좋아 보였는지 남자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크로 가서 신원을 밝히고 차분하게 증상을 설명했다. 다행히 상비하던 아스피린을 얻을 수 있었다. 약을 삼키고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찬물로 세수까지 했지만 두통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아 그대로 회장으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피로연이 시작되었는지 회장이 어두컴컴했다. 위에 달린 조명이 번쩍거릴 때마다 멀미가 났다. 중국어와 영어로 뭐라 소개하는 말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고작 몇 분 단위로 이뤄진 시간이 정체된 것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던 나는 회장 중간 테이블에 앉아있는 성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에선 지친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휘어잡고 압도했다.

무대 한편에서 준비 중이던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자 대화에 집중하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시선은 한동안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독주 파트를 맡은 바이올린 선율이 절정에 치달았다. 나 또한 성재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통 때문에 어지러운 탓일까. 아니면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상냥해 보인 탓이었을까. 그저 홀린 것처럼, 아니면 그 행동만이 허락된 것처럼 나는 성재현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주변에 그 많던 사람들이 소거되고 그의 영역에 오로지 나 홀로 담긴 것만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가. 분, 초, 그런 단위마저 희미한 찰나가 길게 늘어진 필름처럼 유려하게 이어졌다. 그의 눈짓, 손길, 서서히 내게서 멀어지는 시선 하나하나가 내 신경을 자극하는 것처럼 옭아맸다. 나는 박수 소리와 함께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피로연이 끝난 건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성재현을 태운 차는 먼저 주차장을 떠난 뒤였다. 두 번째 차량에 올라타자 방향제 냄새에 정수리를 찌르는 두통이 다시 강렬해졌다. 전화 통화로 서로 상황을 공유하는 수행원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아파도 꾹 참는 버릇이 있었다. 아픈 것보다도 어머니가 혼을 내는 게 더 무서운 게 더 컸다. 그럴 때마다 나를 가엾게 여기며 달랜 건 외할머니였다.

‘내 강아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나를 이불에 눕힌 할머니가 이마를 가만가만 쓸었다. 할머니 손, 약손. 적당히 시원한 손이 이마를 식혔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는 몸을 틀어 할머니에게 좀 더 가까이 붙었다. 어루만지는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 할머니, 보고 싶어. 나 너무 힘들어.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힘들다고 어딘가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나를 달래는 할머니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마지막 순간에 내 손을 잡고 울던 그때 같은 표정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진하야. 너한테 죄가 많구나. 죄가 많아. 할머니가 내게 울먹이며 속삭였다.

차체 아래가 살짝 덜컹거리는 느낌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여전히 차 안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창밖이 어느새 어두워져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차창에 비쳤다. 거기다 나는 분명 차 문 가까이 기대앉아있었는데, 지금은 뒷좌석에 길게 누워있었다. 머리맡에 있는 단단한 게 내 몸을 받쳐주고 있었다.

“깼어요?”

눈을 재차 깜빡거렸다. 안개 같던 잠기운이 거둬지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성재현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있었다. 몸에는 그의 외투로 보이는 코트까지 덮인 채였다. 기겁하며 허둥지둥 일어나려는 내 몸을 살짝 눌러 저지한 성재현이 말했다.

“좀 더 누워있어요.”

“저, 제가, 지금 왜 이렇게….”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기미가 없길래 일단 좀 재웠어요. 안색도 나빠 보이고 끙끙 앓길래 응급실에 가려던 차였는데.”

“아….”

“그러니까 내가 쉬라고 할 때 쉬지 그랬어요.”

가볍게 다그치는 목소리에 나는 그저 죄송하단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단순히 피로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몸살이 난 모양이었다. 성재현이 손을 뻗어 내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아무튼, 머리 아팠던 건 어때요?”

“아까보다는, 좋아졌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정말로….”

나는 유순히 대답하다 말고 문득 왼손으로 무언가를 꽉 쥐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시선을 손으로 돌려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터지는 듯했다. 잠결에 할머니 손이라 생각하며 잡았던 게 다름 아닌 그의 손이었다. 출장 수행 중에 깜빡 졸은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그의 손을 꼭 붙들기까지 하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짓이었다. 몸을 일으킨 다음 다급히 손힘을 풀었지만 도리어 성재현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꿈이 뭐가 그렇게 슬펐는데, 그렇게 서럽게 울기까지 했어요.”

“아, 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꿈?”

“…….”

“자면서 할머니를 찾던데요. 아니었어요?”

성재현이 되묻는 말에 나는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잠꼬대까지 했구나.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린 성재현이 말을 이었다.

“함흥댁 할머니. 기억나네요. 다정하고 좋은 분이셨죠. 가끔은 내 친할머니보다도 더 진짜 친할머니처럼 느낄 때도 많았어요. 돌아가신 회장님께서도 많이 믿고 의지하셨고요.”

그의 말대로 할머니는 성재현을 손주 그 이상으로 여겼다. 가끔은 나보다도 성재현이 우선일 때도 있을 정도였다. 나에게 세한 일가에 대해 늘 공경하도록 가르쳤던 사람 또한 할머니였다. 병석에서조차 매번, 먼저 돌아가신 회장님 이야기를 할 정도로 할머니는 세한에 애정이 넘쳤다. 평생 세한, 그리고 회장님에게 헌신해왔던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세한에 깊숙이 관여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성재현과 접촉하는 걸 반가워하지 않았다. 가끔은 무언가를 염려하듯 불안한 얼굴로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었다.

‘도련님께 너무 다가가진 말렴. 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알겠니?’

할머니께선 무슨 의도로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다가가지 말라는 게 단순히 아랫사람으로서 선을 지키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성재현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란 경고였을까.

눈을 호선으로 접어 부드럽게 미소 지은 성재현이 말했다.

“공항까지 좀 더 가야 하니까 그때까진 쉬어요.”

“네….”

내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긴 차 안은 차에서 나는 소리를 빼면 적막했다. 두통은 한결 가라앉았지만 나는 여전히 편안할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성재현 때문에 긴장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손을 붙잡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그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빼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성재현은 보란 듯이 손에 힘을 줬다.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아프다기보다는 약한 전류가 자극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뒤늦게 열이라도 오르는 건지 뺨과 귀 주변이 뜨끈뜨끈했다.

결국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그의 손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

한국으로 돌아오니 서재에 있던 화분이 전부 시들어있었다.

고작 며칠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꽃은 시들고 잎사귀는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나는 시든 화분을 버리는 대신 온실 앞에 차례대로 내다 놨다. 마침 양지조경에서 봄을 맞아 정원 나무를 손질 중이었다. 보호 안경을 쓰고 향나무 가지와 잎을 자르던 필준 삼촌이 화분을 보고는 혀를 찼다.

“어이고, 다 시들었네.”

“이거 살릴 방법이 있을까요?”

“음, 글쎄. 영양제를 주면 아마 살아날 수도 있지만 완전히 썩은 건 못 살릴 거야. 나도 이런 작은 화분은 잘 모르겠네.”

“해를 잘 못 받는 건지 물을 제때 줘도 이러네요. 왜 이렇게 시드는 건지.”

“뭐, 과유불급이라고 물도 너무 꾸준히 주면 뿌리가 썩을 수 있어. 특히 이런 작은 화분에 키우는 관상분이 생각보다 키우기 까다로워. 뿌리 내릴 수 있는 깊이가 한계가 있다 보니 넉넉하게 준다고 해도 그걸 다 못 받아들이거든.”

“그런가….”

나는 힘없이 마른 잎사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조경 관련 서적에서 본 대로 물도 주고 틈틈이 바람도 쐬어줬는데도 내 손을 거친 화분 중에 멀쩡한 게 거의 없었다. 뭘 키우는 데 소질이 없는 걸까. 그래도 어릴 때 연못에 있던 잉어들이나 학교에서 키우던 토끼는 잘 자라기만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느이 아버지는 어떻다던?”

“아버지요? 안 그래도 어제 병원에서 전화 왔었는데 생각보다 재활 치료가 효과가 있대요.”

“그래? 그거 정말로 다행이구나.”

“네. 이젠 휠체어에 앉아서 병원 밖 산책도 하신다고 해요. 다행이죠…. 정말로.”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의 쾌차는 내게 있어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사실 거의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지난 6년 동안 고생했던 게 이렇게나마 전화위복이 된 모양이었다. 목장갑을 벗은 필준 삼촌이 내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간 마음고생 심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구나.”

“그러게요. 엄마도 이 사실을 아시면 좋을 텐데, 통 연락이 없으세요.”

그 말에 필준 삼촌의 안색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웃고는 있지만 어색한 표정이었다. 필준 삼촌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필준 삼촌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네 엄마도 참… 시간이 그렇게 흘렀으면 잊을 만도 한데.”

“네? 뭘요?”

“아니… 예전에도 네 아버지를 좀 막대하고 그랬잖냐. 네 아버지가 어디 인물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그만하면 얼마나 훤하냐. 성실하고 가정적이었고. 결혼도 했으면 오순도순 잘 살아보지. 에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삼촌이 금세 아무렇지 않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뭔가 말을 일부러 돌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삼촌 말대로 어머니는 아버지를 하찮게 여기곤 했었다.

문득 지나간 기억들이 희미하게 스쳤다. 붉은색 구두를 신고 백화점에 우두커니 서 있던 어머니, 나를 붙잡고 흐느끼며 아버지를 욕하던 어머니.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면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을 테고,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실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나는 문 옆에 옹기종기 피어난 토끼풀을 내려다봤다. 봄볕이 들기 시작하니 이런 좁은 데도 풀꽃이 자랐다. 삼성동 정원 곳곳이 전부 녹색이었다. 차가 들어오는 신호음이 들렸다. 뒤로 돌아보자 검은색 세단이 막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영호가 문을 열기도 전에 성재현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나는 공손하게 그를 마중했다. 바로 지나쳐 저택으로 들어가는 대신 성재현은 내 앞에 우뚝 섰다. 한 뼘 가까이 차이 나는 신장 때문에 그의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가렸다.

“뭐 하고 있었어요?”

“아, 화분이 상태가 안 좋아서 햇볕 잘 드는 데로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온실 상태도 확인했는데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네. 그리고 오전 중에 저택 쪽으로 부재중 연락이 두 건 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로 정 비서님께 전달 드렸는데 혹시 몰라 메모는 서재에 놔뒀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나는 상세하게 보고했다. 가만히 듣고 있는 그의 얼굴은 봄볕에 물든 것처럼 부드러웠다.

“곧바로 새 화분으로 바꾸겠습니다. 카탈로그에서 원하시는 품종에 체크해 주시면, 꽃시장에다 연락을….”

“그럴 필요 없이 강진하 씨가 골라서 바꿔둬요.”

“네? 하지만 전무님 서재에 들일 화분인데, 제 마음대로 고르면, 마음에 안 드실 겁니다.”

“강진하 씨 눈에 예쁘면, 나도 싫어하진 않을 거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생긋 웃은 성재현이 손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급하게 아래로 내려오느라 바람에 앞머리가 헝클어졌다.

“머리에 풀이 붙었어요.”

“예?”

그 말에 머리 위를 더듬거리니 자른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이파리가 나풀나풀 떨어졌다. 온실에서 주차장까지 급하게 내려오느라 차림을 정돈하지 못한 탓이었다. 옆으로 몸을 돌리고 머리를 만지려는 내 손을 밀어낸 성재현이 손가락으로 내 앞머리를 넘겼다.

“이제 됐다.”

그 말에 나는 귀 끝이 간질간질해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 성재현은 줄곧 바빴다. 늦게 들어와서 일찍 출근하는 날이 빈번했다. 그래서인지 나를 일부러 불러내는 날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상냥해졌다. 섹스도 하지 않았다. 가끔 나를 서재로 불러내 시키는 일이라곤 결재할 서류 파일을 정돈하거나, 서재에 꽂아둔 책을 다시 가지런히 정돈하는 자질구레한 일이었다. 그리고 성재현이 일하는 동안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그날 일과는 끝이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실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오늘 저녁은 좀 일찍 먹자고 하죠.”

“네. 오늘 조리사님이 도미 요리로 준비했다고 하셨습니다.”

“도미? 아침에 내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것 같은데. 생선 요리 중에는 도미가 제일 입에 받는다고.”

“그래서 오전에 이야기 드렸더니, 안 그래도 제철이기도 하고, 오늘 받아온 도미가 물이 좋아서 회랑 찜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성재현이 빙긋 웃는다.

“그런 것도 기억해주고, 강진하 씨는 섬세하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겸연쩍은 얼굴을 감추려 일부러 시선을 내렸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내 옆을 지나쳐 사박사박 잔디 위를 걷는다.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의 뒤를 바라봤다. 선들선들 부는 바람에서 겨울의 기운이 완연히 사그라졌다. 이제야 조금은 봄처럼 느껴졌다.

계약 종료일까지 보름. 보름만 지나면 이곳에서 떠난다. 비밀 유지금을 받는 대가로 나는 여태 있었던 일을 완전히 함구하면 된다. 성재현도, 삼성동 저택도 내게는 더 이상 관계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만졌던 머리에 손을 댔다가, 슬그머니 뜨끈해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어차피 전부 끝나야만 했다. 지금 성재현이 보이는 상냥함도 나한테는 그저 지나가는 일에 불과했다. 성재현에게는 내가 지나치는 직원 중 한 명이듯이.

부스스 머리를 흩트린 나는 천천히 저택의 그늘로 들어섰다.

**

정신없이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미지근한 약품 냄새가 풍겼다.

인파로 득시글한 대기실을 지나친 나는 응급실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뛰다가 지나치던 사람과 부딪쳤다. 붙잡고 사과할 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응급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난무하는 곳에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찾았다.

“아주머니!”

“아이고, 아이고. 진하 씨.”

간병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 대신 침상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얼굴이며 몸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아버지인 걸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게, 이게 대체…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는데, 왜….”

“그게 오늘 오전에 처남이 병문안을 왔는데 이야기 좀 하자면서 산책 나갔거든요. 재활 치료 꾸준히 한 덕에 이젠 휠체어도 탈 수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 그사이에 내가 잠깐, 정말 잠깐 은행에 갔었는데… 사고가 났다잖아.”

“처남…? 누구요?”

“꾀죄죄하고 마른 남자였는데, 준구 씨도 알아보더라고요.”

손이 벌벌 떨렸다. 처남이라면 큰외삼촌이거나 작은외삼촌이었다. 두 사람 다 아버지가 다친 후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방문했단 말인가.

혼잡한 틈을 타고 경찰복을 입은 남자 두 사람이 우리 쪽으로 왔다. “환자 가족분 계십니까.”라고 묻는 말에 나는 급하게 사정을 물었다.

“사고 경위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병원 안에 있었는데 왜 사고가….”

“그게, 저쪽 육교 계단에서 휠체어를 밀었다더군요. 목격자도 있었고, 체포도 곧바로 이뤄졌습니다.”

“육교 계단이라고요?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해요? 미치지 않고서야 아픈 환자한테 누가 그런 짓을 해요!”

안주머니를 뒤적인 경찰이 내게 내민 건 프린트된 증명사진이었다. 사진 속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작은외삼촌이었다.

**

작은외삼촌은 늘 좋은 것만을 고집했다. 명품 구두, 퇴계로 양장 전문점 맞춤 정장, 최소 300만 원부터 시작하는 준명품 시계. 사업은 연이어 실패했고 그는 역삼에 있는 불법 빠칭코장에서 투자금을 회수하느라 매달렸다. 그러면서도 잘 나가는 임원처럼 고급 정장만 입었고 향수 냄새가 손목에서 진동하곤 했다.

십수 억을 유령회사 투자에 날렸을 때, 아버지는 작은외삼촌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갈 버스비라도 쓰라면서 용돈을 쥐여 주시던 당신이었다.

혼잡한 경찰서로 들어선 나는 아까 병원에서 만났던 오경석 형사를 찾았다. 커피를 마시던 경찰들은 금세 내게 사무실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일부러 병원에서 거리가 있는 육교로 데려갔고, 계단에서 강준구 씨를 밀었다는 말씀이시죠? 씨씨티비 확인해볼 거긴 한데 상황 진술은 이대로 가는 거 맞습니까?”

“예.”

“하이고, 참.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잘 대답하시는데 왜 그런 짓을…. 아, 무슨 일이십니까?”

크게 숨을 내뱉던 수사관이 나를 올려다보며 신원을 물었다.

“이윤기 씨 외조카입니다.”

“아, 조카분….”

그 말에 남자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나는 체포된 ‘피의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작은외삼촌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늘어난 티셔츠 목, 밑창이 해진 운동화를 신은 남자에게선 고릿한 악취가 풍겼다. 어머니를 꼬드겨 십수 억을 탕진할 때조차 차림새만큼은 여느 기업가 못지않았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며 내가 따졌을 때 외삼촌은 유들유들 웃으며 말했다. 그깟 몇억은 곧 회수할 거야. 내가 너네 돈방석에 앉혀준다니까. 뻔뻔하게 호언장담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앉아있는 곳은 돈방석도 번듯한 회사 사장실 의자도 아니었다. 작은외삼촌은 경찰서 구석 낡은 철제 스툴에 웅크리듯 앉아있었다. 그것도 피의자 신분으로 말이다.

“진술은 다 받았고 피해 사실 관계만 재확인하면 됩니다. 조카분께서 합의하실 마음이 혹시 있다면.”

“형사님.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부탁이요?”

“네.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만… 한 오 분만 단둘이 대화하게 해주세요.”

“아. 예, 예. 그래요. 여기 앉으시고, 문제 있으면 옆에 있는 김 형사님한테 말씀해주시고요.”

담당 형사는 흔쾌히 내게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줬다.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린다. 어수선한 경찰서에 앉아 나는 외삼촌을 묵묵히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종이컵을 우그러트렸다.

“삼촌. 오랜만입니다. 몇 년 만이지. 한 사 년만인가요? 할머니 기일 때 뵌 뒤로 연락도 안 받으셨는데, 여기서 다 보네요.”

냉랭하고 무정한 말투에 삼촌은 마른 입술을 연신 침으로 축이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왜 그러셨어요?”

흐린 눈을 껌벅 감았다 뜬 외삼촌이 두 손가락을 서로 비볐다. 얼마나 오래 방랑한 건지 손톱에 때가 덕지덕지 껴있었다. 한참 만에 삼촌이 입을 열었다.

“돈 달라고 했더니… 안 준다잖아.”

“그래서 육교까지 굳이 끌고 가서, 밀었어요? 돈 안 준단 이유로?”

“그랬어.”

“허, 저희 아버지가 무슨 돈이 있어서요? 있던 재산 다 삼촌이 털어갔잖아요. 서울 빌라 팔고 남은 돈, 평택 땅. 그나마 있던 차도 삼촌이 팔아치웠잖아요. 근데 무슨 돈이요?”

“…돈 때문에 그랬다고. 아까 형사한테 다 말했어.”

“돈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 했는데 사람을 밀었냐고요!”

숨이 찰 정도로 크게 소리 질렀다. 외삼촌은 아버지에게 더는 빼먹을 게 남지 않자 매정하게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인제 와서 한다는 말이 돈 때문에 자기 매형을 죽이려고 했단다.

아버지 수중에 있던 돈은 겨우 3만 원이었다. 간병인에게 만일을 대비해 비상금으로 넣어달라고, 그래서 환자복 주머니에 들어있던 그 3만 원이 아버지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몰라.”

“몰라? 모른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다 생각이 있으니까 찾아온 거잖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던 십만 원 생각이 났어요? 그깟 십만 원 뜯어먹으려고 사람을 밀었냐고요!”

“모른다고, 나는 모, 몰라.”

“모른단 말 좀 그만해요!”

울컥 쏘아붙인 말에도 외삼촌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어떤 말도 할 생각이 없는지 꺼칠한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나는 문득 정선으로 향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강원도로 갈 이유라고는 외삼촌 말고는 달리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전히 어디 있는지, 마지막 문자 이후로는 소식이 없었다.

“삼촌. 우리 엄마… 만났죠?”

그 순간 삼촌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앉아있던 형사를 불렀다.

“혀, 형사님, 나 화장실 좀 가도 됩니까. 오, 오줌보 터지겠어.”

대놓고 대화를 끊으려는 태도였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삼촌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엄마 만났냐고 물었잖아요!”

“이봐요, 학생! 이러면 안 됩니다!”

“엄마 만났어? 만났냐고! 왜 대답을 피해!”

발악하듯 삼촌의 옷깃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멱살을 잡힌 외삼촌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핏발로 충혈된 눈자위.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아무것도 말하지 말랬어.”

“뭘? 뭘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모른다고!”

나를 홱 밀쳐낸 외삼촌이 손발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이 뒤집힌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고 몸이 팔딱팔딱 경련했다. 발작이었다. 들것에 실린 외삼촌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서를 빠져나간다. 나는 멍하니 구급차가 경찰서를 떠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외삼촌은 쇼크성 발작이었다. 약물 검사를 진행해봐야 알지만 실신한 원인은 진통성 마약이었다. 기억에도 문제가 있을 만큼 심각한 중독 상태로 이미 간과 뇌에도 치명적인 손상이 있었다. “그래도 기소는 그대로 진행할 겁니다. 술도 아니고 마약이라 혐의가 더 추가돼서 아마 어지간하면 못 나갈 겁니다.” 형사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는 갑자기 이런 일을 연달아 겪은 나를 진심으로 측은하게 여기는 듯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간이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삐, 삐.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돌아간다. 진통제와 진정제를 맞고 잠든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버지의 상태는 끔찍했다. 정강이뼈 골절, 늑골 골절로 인한 장기손상, 뇌출혈. 의식 불명이 되진 않았지만 그나마 회복되어 가던 중추 신경은 사실상 마비 판정이었다. 큰 병원을 간다고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대로 누운 채로 평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간병인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난 사고 때문에 내게 거듭 미안하다며 호소했다. 이번 일 때문에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운 눈치였다. 나는 그녀를 탓하지 못했다. 그저 며칠은 쉬시는 게 좋겠다며 간병인을 돌려보냈다.

짐을 챙기려 아버지가 쓰던 병실로 향했다. 방에는 환자들이 요란스레 대화 중이었다.

와, 저 짝 아이씨 아까 나가가꼬 사고나서 다쳤다대. 사고? 사고가 났나? 휠체어 타고 가다 고마 자빠짓다드라. 옴매야. 나가서 술 처뭇나. 민 놈이 처남이라 카든가. 개놈 새끼 아이가. 와 밀었노. 내가 그걸 우째 아노? 민 놈이 알긋지. 와 외출 보내 줬냐고 간호사 윽시 깨지드마. 근데 그 놈아, 안 그래도 저번에 무시 조폭인가? 와가꼬 난리 함 났지 않나? 사람 좋키 생기 가지고 뒤론 무신 호박씨를 까는가. 얼굴 멀쩡하게 생긴 건 암 소용도 없는 기라. 내도 모른다 마. 자식새낀 즈그 애비 아파죽는데도 코빼기 안 뵈다가 인자 기와가지고 을매나 다칫는가, 구경이라도 하러 왔나.

“저기, 무슨 일이세요?”

“아….”

병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내게 간호사가 말을 붙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실로 들어서자 침대 한쪽에 모여있던 환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헛기침하거나, 내 눈치를 보며 담배를 챙겨 들곤 부랴부랴 문밖으로 나섰다. 남은 사람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중요한 짐은 미리 병실로 옮겨둔 터라 남은 건 서랍에 든 자질구레한 소지품뿐이었다. 서랍을 열어보니 물건도 몇 개 없었다. 아버지가 아끼는, 낡은 양장 다이어리, 사진첩, 고지서 뭉텅이. 그거 말고는 아버지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루라도 좋으니 아버지 곁에 있고 싶었다.

정영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내일 오후에 올라가고 싶다고 부탁하자 정영호는 한참 동안 대답에 뜸을 들였다. 아무리 단순 계약직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 게 딱히 좋아 보이진 않을 터였다. 곤란한 듯 말을 끌던 정영호가 한숨을 쉬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차피 전무님께서 며칠간 바쁘실 거라고 괜찮다고 하시는군요.

성재현이 허락한 거구나.

“그럼 전무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나중에 올라가서 인사….”

달칵거리는 소음이 작게 울렸다. 이어진 목소리는 정영호가 아니었다.

-급하게 내려갔다고 하더니, 아버지 일이었어요?

성재현 목소리란 걸 깨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예.”라고만 간단하게 말을 이었다.

-늦어도 괜찮으니 아버지 잘 챙기고 올라오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미리 이야기드리고 내려갔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늦게 연락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목소리가, 많이 안 좋네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목을 가다듬었다. 설마 목소리가 쉬었나. 불쾌할 정도로 이상하진 않은데.

-너무 많이 울진 말고요.

“…….”

-알겠죠?

다정하고 부드럽게 어르는 말투, 음색. 그 성재현이 나한테 울었냐고 묻는다. 낯간지럽고 이상해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네. 전무님도 얼른 쉬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달아나듯이 대답을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돌리며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시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성재현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그는 내게 울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죄었다. 욱신욱신했다.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여태 매정하고 잔인하게 굴어놓고, 끝에 도달해서야 내게 이러는 저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마저도 그저 지나가는 놀이인 걸까.

진통제를 투여받고 잠이 들었던 아버지의 손가락이 꿈질거린다. 의자에 앉아 침대 끄트머리에 엎드려있던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늘게 뜬 눈이 나를 올려다본다. 의식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바싹 마른 입술이 벙긋거린다. 깨끗한 면수건에 물을 적셔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아버지가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는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했다.

나는 몸을 가까이 기울여 아버지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가는 숨을 토하며 속삭였다.

진아야.

미안해.

내가 전부 미안해.

용서해줘.

호흡이 점점 느려진다.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두 눈에 축축하게 고인 눈물이 흐르는 걸 내려다봤다.

아버지는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서,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진아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를 때만 쓰던 애칭이었다.

**

아버지는 나에게 늘 다정한 분이었다. 나는 그를 홀로 놔둘 수 없었다. 은행권 대출이 아직 남았지만 전보다는 형편이 넉넉해졌다. 남은 돈으로 괜찮은 요양병원을 찾아 아버지를 모실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어디든 취직해서 돈을 벌자. 결혼도 연애도 싫었다. 아버지는 그토록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결국 허무하게 배신당하지 않았던가.

나만이라도 아버지를 배신하지 말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오전에는 기차를 타야 했다. 그래야 정영호한테 이야기했던 시간에 맞춰 서울역에 도착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타지 못했다.

새벽 다섯 시, 아버지는 유언 없이 고요히 돌아가셨다.

한때 다니던 회사 상사였던가, 아니면 군대 선임이 담배를 빨며 던진 말이던가. 기억나진 않지만 누군가가 농담처럼 툭 그런 말을 했었다. 결혼식이야 부모님들 자식 내놓는 곳이지만, 장례식은 그야말로 내 인맥이더라.

건너편 방에서 우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린다. 국화 화환을 옮기느라 바쁜 직원들, 검은 옷을 입고 급히 지나가는 사람.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는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텅 빈 감옥에 갇힌 듯이 나는 그저 방석에 웅크려 앉아있었다. 손님맞이를 도우려 파견된 장례식장 직원조차 바쁜 곳으로 다시 호출되었다. 그리하여 빈소에는 아르바이트생과 처음 보는 아버지의 동료란 남자 둘뿐이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더 오래 살다시피 했다. 창원과 마산에 있는 연고라고는 아버지 고향 친구들뿐이었지만 이미 10년 전 그 사건으로 전부 등 돌린 뒤였다. 그나마 둘째 날에는 택시 기사로 일했던 아버지의 옛 동료분들이 찾아왔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저 손을 맞잡고 “그래. 억수로 힘들겠네.”라는 형식적인 말만 웅얼거렸다.

힘없이 웅크려 앉아 팔에 걸어둔 완장을 만지작거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술만 마시느라 정신없는 어머니를 대신해 방문객을 맞았다. 상주로 있던 큰외삼촌은 단체로 추모하러 온 세한 사람들에게 굽실거렸고 작은외삼촌은 소주만 연신 들이켰다. 나한테 장례식장은 그런 무의미한 곳이었다. 죽고서도 편할 수 없는 곳.

아르바이트생이 나한테 뭐라도 드시라며 떡과 전, 그리고 건더기 없는 육개장 국물을 쟁반에 올려다 줬다. 입맛은커녕 입을 벌리면 그대로 구역질이 나올 듯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꽂아둔 향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만 무성했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분향소를 한참 올려다봤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영정 사진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20년도 더 된 옛날 얼굴이 검은 액자에 들어있었다.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다. 뭐가 좋다고 저리 웃는 사진을 넣었을까. 이딴 죽음이 뭐가 기쁘다고.

현관이 부산했다. 조문객이 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을 문 앞에 세운 누군가가 저벅저벅 홀로 들어온다. 분향소 앞에 국화를 내려두고 묵념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에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돌린 남경욱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무슨 염치로 여길 찾아오셨습니까.”

“부산에 계신 은사님 뵙고 가려는데, 강준구 씨 부고 소식이 있다더구나.”

“됐으니까 나가주세요.”

나는 문밖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버지를 사지로 내몬 작자다. 나는 남경욱의 방문이 기만처럼 느껴졌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나를 냉정하게 지나치던 그 남자가, 아버지 앞에 국화를 내려두는 꼴이 가소로웠다. 무슨 관계가 있어 아버지의 빈소를 찾아온단 말인가. 뒤늦은 죄책감이라도 털어내려고? 그러나 남경욱에게는 가벼운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내 아들이랑 연락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혹시나 내가 직접 끊어내야 하는 건 아닌가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지. 너라도 사리 분별을 해서 다행이야.”

“그딴 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남승혁 건드리지 않은 게 고마워서요? 그딴 건 고맙고 나한테는… 아버지한테는 죄스러운 마음은 하나도 안 드세요?”

“지난 기소 이야기라면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던가. 기소 유예로 줄여줬고, 형도 살지 않고 사회봉사로 끝났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럴 거 같더냐?”

“애초에… 처음부터 없던 죄를 뒤집어씌운 거나 마찬가지였잖아!”

마른 숨을 헐떡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아버지가 남경욱 너머로 보인다. 웃고 있다. 우리 집을 풍비박산 낸 사람을 앞에 두고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놔둔 물컵을 남경욱에게 던졌다. 컵에 담긴 물이 그의 얼굴과 어깨에 쏟아졌다. 당황한 수행원이 서둘러 달려온다. 남경욱은 그가 앞다투어 내민 손수건으로 젖은 물기를 탈탈 털어냈다.

“처음부터 없던 죄라. 확실히 네 아버지는 그 사건에 지나치게 무겁게 연루되긴 했지. 하지만 정말로 결백했을까?”

“닥쳐요.”

“너한텐 내가 아무한테나 벌을 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가 돌리는 수레바퀴에 기웃거리던 벌레나 쥐는 죽지만, 멀찍이 있던 벌레는 죽지 않거든.”

“아버지가 마약 운반용이던 차를 몰았으니까 공범이란 개소리로도 모자라 이젠 벌레 취급입니까? 나한텐, 나한테는 당신이 더 벌레 같아. 썩은 내 풍기는 고기 위나 앉는 파리나 구더기 같다고!”

“…….”

등 돌리고 나가면 그만인 자리였다. 하지만 남경욱은 꼿꼿하게 서서 내 욕설을 전부 듣고 있었다. 어차피 들을 소리였으니 각오라도 하고 온 걸까. 지나칠 정도로 무덤덤한 얼굴이 사무적이었다.

수행원에게 눈짓하자 젊은 남자가 품에서 봉투를 내밀었다. [弔意]라 쓰인 하얀 봉투였다. 받지 않으려는 나를 꽉 붙잡은 남경욱이 손에 억지로 봉투를 쥐여 줬다.

“승혁이가 자기 이름으로 보낸 돈이다.”

“…….”

“적어도, 네 친구였던 녀석의 성의는 무시하지 말거라.”

봉투를 쥔 손을 한 번 꽉 붙잡았다 뗀 남경욱이 한 걸음 물러났다. 등 돌린 남자가 힐끔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것도, 네 어머니가 바랐던 결말이겠지.”

남경욱은 그대로 수행원들과 함께 빈소를 나섰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소는 휑뎅그렁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 쥔 봉투를 그대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경멸스러운 사람이 주고 간 돈이었다. 그런데 돈 때문에 시달리고 나니 화풀이로 내던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빈속에 든 거라곤 물뿐이었다. 게우고 또 게운 탓에 쓴 입에 비리고 떫은맛이 맺혔다. 흐르는 코피를 물로 씻어내고 거울을 바라봤다. 물때가 낀 거울 속에 든 얼굴.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아주 많이 닮았다. 그 사실이 지금은 끔찍했다. 어머니 당신이 증오스러운 탓이었다.

거울을 주먹으로 콱 내리쳤다. 얼굴이 보이는 자리를 마구 내리치다가 멍이 든 손으로 얼굴을 긁었다.

“죽어, 죽어버려!”

이제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차라리 어디선가 죽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바랐던 결말이라고? 나는 그딴 개소리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망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읊게 한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

술상을 비우던 조문객도 떠났다. 새벽까지 방문객은 없었다. 나는 담요를 끌어안고 시계만 바라봤다. 조문 명단은 몇 장도 되지 않았다. 필준 삼촌이 밤중에 못 가서 전화로 미안하단 안부만 남겼고, 대학 때 얼굴만 조금 알고 지내던 조교와 동기들이 방문한 게 끝이었다.

손에 쥔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남경욱은 이 봉투가 남승혁이 보내는 돈이라고 했다. 제 발로는 가지 못하게 하니 아버지에게 조문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다. 내가 자기 아버지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날 별장에서 그런 전화를 받고도 나한테 이런 돈을 보낼 생각을 한다니. 나라면 징그러워서 얼굴도 보지 않을 텐데. 남창 같아서, 역겨워서.

복도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건너편 빈소는 아직도 사람이 많은지 불빛이 환했다. 나는 물을 마시고 주머니에 구겨 넣어둔 봉투를 꺼냈다. 안에 희미하게 비치는 건 수표였다. 얼마인지 액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표만 든 게 아니었다. 수표 한 장으로 이렇게 부피가 두툼하진 않을 터였다.

윗면을 찢었다. 액수가 적히지 않은 빈 수표, 그리고 고이 접힌 에이포 용지. 나는 수표가 아니라 종이를 펼쳤다. [탄원서]라 복사된 글자가 먼저 눈에 보였다. 탄원서, 피고인 강준구, 탄원인 정윤례. 외할머니의 글씨.

분향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한산한 분향소 앞에 놓인 국화가 시들었다. 잎사귀와 꽃잎으로 너저분한 자리 앞에 서서 나는 너덜너덜한 종이를 펼쳤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피해자의 친어머니 정윤례라고 합니다. 이번 사건의 피고인인 강준구 씨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으며, 아들처럼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리고 내 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앞으로 태어날 제 손자에게 친아버지 강, 준구 씨를, 죄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 습, 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일이었다. 밤 10시, 삼성동 주택 차고지에서 강간이 벌어졌다. 사건은 재판까지 올라갔지만 이미 피해자의 배 속에는 아이가 생긴 뒤였다. 합의하에 가정을 꾸리고 싶으니 부디 너그럽게 봐달라며 피해자의 어머니가 호소했다.

가해자는 강준구, 피해자는 이수진. 나의 부모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차가워지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다. 편지를 든 손을 내리고 멍청하게 영정 사진을 바라봤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헌신하고 사랑하는데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미워할까. 그래서 아버지가 가여웠고, 어머니가 야속했다.

어머니는 항상 술을 약처럼 마셨다. 술을 마시다 나를 보면 그리도 화를 냈다. ‘너 따위를 낳는 바람에! 내가!’ 발악하고 소리치고 나를 꼬집고 밀고, 어느 순간 펑펑 울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무서워서 울다가 매달리다가, 사랑해달라고 빌었다. 어머니를 경멸하면서도, 나는 어머니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조차도 나는 어머니의 탓이라고만 여겼다.

나를 감싸고 있던 세계가 전부 다 모독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거다. 강간범의 자식을 사랑하기엔 그녀는 이미 너무 망가진 것이다. 아무도 보호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그녀의 어머니마저도, 그녀의 친형제마저도.

“왜, 왜….”

구겨진 종이가 떨어졌다. 바닥에 시신처럼 놓인 종이를 밟았다. 상에 올려진 국화를 마구 잡아 뜯었다. 영정 사진을 집어 든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아악! 아아아!”

깨진 영정 사진을 발로 마구 밟으며 흐느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끝까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어머니의 패악에도 아버지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속죄였던 걸까.

미안한 마음이었던 걸까.

그딴 마음 때문에 나는, 나는 이 지경이 되었는데.

“하, 하하, 하, 아하하.”

깨진 액자 조각을 움켜쥐고 웃었다. 피가 뚝뚝 흐른다. 흘러내린 피가 아버지의 얼굴에 들러붙는다. 아버지가 지옥에 갔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죽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어머니는 지금 이 모습을 보고 후련해할까. 수십 년간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던 악마가 드디어 죽어서 만족스러울까? 그런데,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새벽이었다. 방문객 하나 없는 심야의 빈소. 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를 내려다본다. 다부진 체격을 감싼 검은 정장, 검은 넥타이, 검은 셔츠.

“강진하. 너… 왜 이래. 왜 이러고 있어! 씨발, 이게 뭐야. 야, 피 나잖아!”

권재림이 나를 붙잡고 다그쳤다.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낸 그가 손바닥에 손수건을 묶어준다.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을까.

“씨발, 안 그래도 제정신 아닐 거 같아서 김해 오자마자 튀어왔는데. 씨발, 이게 무슨 꼴이야.”

“재림아.”

“아파? 병원 가? 차 끌고 왔어. 나 술 안 마시고 제정신이야.”

“권재림.”

연달아 부르자 그제야 권재림이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피가 묻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등신 같다. 너나, 나나 둘 다 등신이다. 어지러운 머리로 픽 웃었다. 사나운 눈이 누그러졌다. 눈 아래 물기를 입으로 핥은 그가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미끄러지듯 닿는 입술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

손바닥에 난 상처는 길게 베이긴 했지만 꿰맬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응급실 안 가봐도 돼?”

“이런 걸로 응급실 가면 대기 시간만 길어.”

지혈만 하고 거즈를 붙인 손바닥에 붕대를 둘둘 감았다. 권재림은 능숙하게 붕대를 매줬다. 취미로 하는 권투에선 이런 붕대 감기는 기본보다도 더 쉽다던 거드름이 빈말은 아니었다. 꽉 조이지 않게, 착 감은 붕대 덕분에 오른손에서 느껴지던 따끔한 통증은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사람도 안 와 냉랭하고 스산한 장례식장이 더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정돈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이라도 아버지와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깨진 액자를 내버려 두고 상 앞에 앉았다. 한바탕 악을 썼더니 갈증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냉장고에서 소주 두 병을 가져온 권재림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괜찮아?”

나는 대답 대신 탑처럼 쌓인 소주잔 중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내 손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재림이 병을 땄다. 경쾌한 소리 끝에 칙, 기포가 튀어 오른다. 권재림이 잔에 따라준 건 소주가 아니라 단내 풀풀 나는 사이다였다.

“소주 줘. 내가 애도 아니고.”

“그 꼴로 무슨 술을 마신다 그러냐? 사이다로 짠, 해. 색도 기포도 비슷하구만.”

“하… 됐다. 됐어. 그냥 내가 따를게.”

손을 뻗어 소주병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권재림은 가뿐하게 내 손을 막으며 “어허” 하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기가 찬 나머지 입술을 삐뚜름하게 구기고 쏘아붙였다.

“그러는 넌 왜 마시는데.”

“나야 형 대신 두 배로 마시는 거지.”

“너는 되고 난 안 돼?”

“난 조문객이잖아.”

어깨를 으쓱 추스른 권재림이 씩 웃었다. 저 능글맞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말싸움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직접 가져와서 마시고 말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냉장고에서 직접 소주를 가져왔다. 오른손에 맨 붕대 때문에 왼손으로 병뚜껑을 잡고 돌렸다. 따다닥, 경쾌한 소리는커녕 힘 빠진 손은 번번이 미끄러지기만 했다. 권재림은 혀를 츳츳 차며 내 손에 든 소주병을 가져갔다.

“형 힘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병도 못 따냐.”

“손 다쳐서 그래. 붕대 감아서 감각이 둔한걸.”

“거봐, 그러니까 마시면 안 되지. 다쳤을 때 술 마시면 존나 느리게 나아.”

신경도 안 썼다. 느리게 낫든, 빠르게 낫든 상처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찰랑거릴 만큼 가득 채운 잔을 싹 비웠다.

빈속에 차갑고 뜨거운 게 들어오니 아찔하다. 간만에 마시는 술이 쓰고 달았다. 나는 그대로 술 몇 잔을 들이켰다. 사이다나 마시라며 핀잔주던 권재림은 내가 마시는 모습을 재미난 구경인 양 보고 있었다.

“은근히 잘 마시네. 형은 얼굴만 보면 술은 입에도 안 댈 것처럼 생겼는데.”

“내가 순진하게 생겼어?”

“그거보단, 정숙한 느낌?”

“딱딱하고 재미없단 소리네.”

한두 번 듣는 평가도 아니었다. 회사 다닐 때도 나는 남자 사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노래방 접대 같은 것도 잘 못 끼고, 그렇다고 얼굴값만큼 애교가 많지도 않다던가. 그들이 지금의 날 본다면 아마 비웃고도 남을 것이다. 점잖은 척은 다 하면서 사실은 이랬느니, 저랬느니.

“난 형 재미없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런 분위기라며.”

“괜히 한 번 쿡 찔러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라고.”

그게 뭐가 재밌다는 거지. 킥킥 웃은 권재림은 내가 든 잔에 잔을 맞붙였다. 쩡, 하고 소주잔이 부딪쳤다. 그사이에 벌써 한 병은 넘게 마셨지만 도리어 팔팔한 기색이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각자 술만 마셨다. 대화도 없어 침묵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이따금 나를 바라보는 권재림은 뭔가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긴 물어보고 싶을 만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반쯤 미친 것처럼 상을 엎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권재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궁금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저 갑작스러운 부친상에 슬퍼한 것처럼 여긴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나로선 다행이었다.

“권재림.”

한참 만에 입을 연 건 나였다. 권재림은 내가 입을 열자마자 귀를 쫑긋 세운 개처럼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선이 짙고 굵은 눈매가 동그래지니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병목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 장례식장 어떻게 알고 왔어? 부고 문자 보낸 적도 없는데.”

“아, 그거… 성재현이, 알려줬어.”

“…전무님이?”

의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권재림이 뒷목을 긁적거리며 못마땅한 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할아버지한테 귀국령 떨어져서 비행기 탈 준비하는데, 전화 오더라고. 또 뭔 소리로 사람 긁어놓으려나 했더니, 형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직접 이야기 전해주더라. 들렀다 올 거면 김해로 비행기 편 바꿔서 오라고….”

권재림이 물어본 것도 아니고 성재현이 직접 이야기해 줬다는 것도 뜻밖이었다. 그렇게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임원급이나 직속 부하도 아니고, 말단도 못 되는 일개 계약직. 거기다 사적이기까지 한 부고였다.

물론 사적이니 일개 계약직이란 단어만으로 퉁 치기만은 어렵다. 나와 그는 섹스와 돈으로 엮인 불순한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그조차도 내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무엇보다도 성재현은 내가 권재림한테 붙어 있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마카오에서 저급한 트집을 잡힌 게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굳이 권재림한테 알려서 여길 오게 했다니. 무슨 속셈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안 와도 되는 자리잖아.”

“혼자 있을 거 같다고… 그래서.”

나는 그 말에 긴장이 풀린 두 눈을 힘없이 깜빡거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은 장난기 하나 없었다. 오히려 무겁고 비통했다.

“자긴 지금 사정 안 되니 위로라도 하고 오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어이가 없더라. 성재현이 아무리 내 사촌 형이래도 좀 그렇잖아. 자기가 내 상사도 아니고, 나더러 이래라저래라, 하나 싶어서. 근데… 정말로, 너 혼자 있는 걸 보니까, 짜증이 났어. 이번에도 성재현이 나보다 더 빨리, 형을 알아차렸구나.”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켠 그가 손에 쥔 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성재현한테 형이 보스턴에 갔단 말 들었을 때도 그랬어. 성재현한텐 알려줬으면서 나한테는 그런 말 한마디도 없이 가버렸다고 생각해서, 존나 짜증 나고 서운했어. 매번 그랬지. 나는 항상 늦는 거 같아. 심지어 거짓말이란 걸 알아차렸을 때조차 이미 형이 성재현네 집에 들어가 있었고.”

“그건…….”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선택이긴 했지만 그렇게 흘러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미간을 험악하게 찡그린 권재림이 잔을 꽉 쥐었다.

“매번, 매 순간 형한테 다가간 순간이 늦어졌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내가 짜증 나. 지금도 조금 많이 늦었잖아.”

“…사람 죽는 걸 누가 미리 알아차리고 와. 그러면 무당이지.”

“그래도, 직접 이야기 듣지도 못하는 건 기분 더러워. 형 탓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가볍게 피식 웃은 권재림이 잔을 내려뒀다. 늠름한 선, 다부진 얼굴이 나를 찬찬히 바라본다. 나는 시선을 마주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왜 내가 좋아?”

“예뻐서.”

대번에 나온 대답이 너무 허술했다. 나는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치지 말고. 내가 뭐가 예뻐.”

“진짠데. 그리고 형이 뭐가 예쁘냐니. 거울도 안 보고 살아?”

권재림이 같이 다녔던 여자들이 죄다 내로라하는 미인인 걸 생각하면 황당한 대답이었다. 내가 대체 뭐가 예쁘단 건지. 그런 미려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려면 차라리 성재현 같은 얼굴에다 하는 게 좀 더….

줄줄 파도치던 사고가 뚝 멈췄다. 자연스럽게 성재현을 떠올리고 있는 나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순간에 성재현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 그 사람이 생각난 거지. 술이 들어가니 머리에 각인된 두려움도 말랑말랑해진 모양이었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다.

“예쁜 게 끝이야? 그 정도면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예쁜 사람이 한둘이야?”

“내 눈에 예쁜 건 하나야.”

“난… 나는 이해 안 돼. 넌, 집도 정말 잘 살고 돈도 많고 가진 것도 넘치잖아. 내가 뭐 잘 살기를 하냐, 잘 배웠나 왜 나를….”

나 같은 걸 좋아하지.

입술이 달달 떨렸다.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예쁘다는 말로 포장할 만한 가치가 없다. 어머니가 바라지 않은 아이, 아버지의 추악한 위선. 얼마나 늪 아래로 내려가야 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뿐이던가. 나는 성재현한테 몸을 팔았다. 구렁텅이가 지긋지긋해서 기꺼이 그의 두 손에 목숨줄을 내던졌다. 그러곤 허우적거렸다. 숨을 쉬라고 하면 숨을 쉬고, 참으라 하면 참아야 했다. 권재림은 그런 사소한 사실도 몰랐다. 그저 내가 성재현한테 고용됐으니까 별수 없이 휘둘리는 거라고 여기고 있을 터였다.

“나… 여섯 살 때던가.”

권재림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주 예전에, 엄마 따라서 윤명 삼촌 사시는 삼성동에 왔었을 때 말이야. 삼촌 비서가 웬 남자애를 소개해줬는데 그게 형이었어. 나랑 놀아줄 형이라면서. 우리 집은 형이랑 누나가 나랑 터울이 너무 많이 나서, 나 같은 건 귀찮은 철부지였거든. 그래서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형이 나는 마음에 들었어. 얼굴도 되게 하얗고… 인형같이 생겨서 더 그렇더라고. 그땐 좋은 정도였어. 유치원에 가도 친구는 적당히 있으니까 그냥, 이 집에 오면 나한테 맞춰서 놀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데…. 언제지, 그게 겨울이었던가. 정원에서 눈사람 만들기도 지긋지긋해서, 내가 형 붙잡고 나가자고 졸랐어.”

그랬던가. 기억은 희미하다. 매달 한 번씩 삼성동 집에 놀러 오던 권재림 응석을 받아줬던 건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권재림은 유독 나한테 어리광이 심했고 고집도 부렸다. 까다로운 요구에 나는 절절매며 그의 눈치를 살피고, 그러다 성재현의 눈치도 살피고 정신이 없었던 건 얼핏 기억에 남아있었다.

“나가봤자 열세 살이 열 살이랑 뭘 하겠어? 삼성동은 그때나 지금이나 놀 게 없었잖아. 심지어 그 집은 언덕을 쭉 올라가야 하는데 차라리 차 타고 동물원을 가는 게 낫지. 형이 곤란해했던 거 같은데 내가 존나 고집을 부렸어. 엄마도 내 고집은 못 꺾었는데 버거워했는데 형이라고 오죽하겠어? 뭐 내가 가서 이르느니 그런 개소리를 했던 건지, 아무튼 형이 나를 데리고 나갔어. 손잡고 천천히 걷는데 지칠 만도 한데 내 손을 한 번도 안 놓고, 나보고 업어줄까? 그러기도 하고. 내가 배고프다고 했어. 그게 엄청 멀리 나왔었나 봐.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는 떼란 떼는 다 쓰고. 근데 형이 그때 날 데리고 편의점에 가선 사준 게 주스랑 자그만 짜장 라면이었어. 그마저도 나더러 다 먹으라고 양보했어. 의자에 앉아서 먹다 말고 창문을 봤는데 거기 비친 형이, 날 보고 있었어.”

갸름하게 벌어진 입술이 미소를 띤다.

“아주 사랑하는 무언가를 보듯이. 아무런 호의나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참 이상하게도 그 순간부터 라면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 주스가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나. 사과나 오렌지였겠지.”

“…….”

“그러고는 돌아가서 형은 엄청 혼났는데 형이 또 무슨 고집인지 내가 괴롭힌 건 한마디도 안 하더라. 자기가 밖에 데려가서 이것저것 보여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기가 차서, 나중에 내가 엄마한테 아니라고 대답했지. 진짜 웃겨, 강진하. 어릴 때부터 쓸데없이 형 노릇 하는 건 못 고친다니까. 내가 자기 친동생도 아니면서.”

“그래서… 그게 이유야? 내가 예뻐 보였단 게? 벌써 십오 년도 더 된 일이잖아.”

“나한테 그런 순간이 한 번이었으면 이러겠냐.”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손님. 권재림이 자랄수록 나는 당연히 나이 먹은 만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냥 권재림을 밀어내진 못 했다. 형제가 없던 나로선 6살 때부터 본 그가 막연히 동생 같았다. 나보다 키가 훌쩍 커버렸을 때조차도.

“내가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반응이 미적지근하니까 참 슬프네.”

“난, 잘….”

“그러면서 내가 아까 키스할 땐 밀어내지도 않았잖아.”

어느 틈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와이셔츠로 보이는 탄탄한 팔뚝. 스물다섯의 권재림이 내 앞에 섰다. 몸을 숙이고 내 눈에 시선을 맞췄다.

“어떨 땐 사람 빡치게 만들다가, 어느 날엔 또 사람 살살 녹일 것처럼 다정하고. 그렇게 자꾸 무르게 굴면.”

내가 어떻게 널 무시해.

콧잔등이 툭 닿았다. 아랫입술을 야금야금 깨문 그가 조심스럽게 입 맞춘다. 그러나 그다음은 맹렬했다. 거침없이 입술을 깨물고는 사냥감을 찢어 삼키듯 입술을 마주 비볐다. 뜨겁고 얼얼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도리어 팔목이 잡혔다.

“흐으, 아, 잠시, 읍.”

끼익, 상이 옆으로 둔탁하게 밀려난다. 그대로 바닥에 눌린 내 몸을 권재림이 올라탔다. 무거워서 숨을 크게 내뱉으려 입을 벌리자 혀가 밀려 들어왔다. 팔딱거리는 산 것이 내 입속을 마구 헤집는다. 입을 다물려고 하자 손이 턱을 꽉 잡았다. 입천장, 볼 안쪽 살, 목구멍까지 들이닥친 살덩어리가 이리저리 유영했다. 무릎으로 그의 배를 밀어낸 나는 겨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숨이 덥다. 끈적끈적하다. 삼키지 못한 침으로 입술이 젖어 미끈미끈했다.

“권, 재림. 그만, 아…!”

말이 뚝 잘렸다. 더 듣기 싫다는 듯이 권재림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한참 만에 떨어져 나간 그를 올려다보던 나는 건너편의 소음에 멍하니 눈을 돌렸다. 뒤를 흘끔 살핀 권재림이 씩 웃으며 나를 덮듯이 올라탔다.

“밖에도 소리. 다 들리게 할까?”

내려다보는 두 눈이 희번덕거린다. 권재림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의기양양했고 잔뜩 들떠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깨를 누르던 손이 내려와 바지를 붙잡았다. 벨트가 풀리며 허리춤이 느슨해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하지, 마…!”

“쉿.”

목구멍까지 차오른 거부는 그의 행동 한 번으로 멈췄다. 뺨에 입술을 맞춘 권재림이 귀 옆으로 입술을 옮겼다. 습윤한 숨이 귓바퀴를 문질렀다. 고개를 돌리자 턱을 잡은 그가 내게 속삭였다.

“내 눈, 한 번만 더 피하기만 해봐.”

“이거, 놔.”

“묶인 채로 하고 싶어?”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경고음처럼 박힌다. 어딘가 광기가 느껴지는 눈을 올려다보며 나는 싸늘하게 받아쳤다.

“너… 미쳤어? 여기, 장례식장이야.”

“그게 뭐?”

“돌아가신 분 앞에서, 예의 차려.”

“그런 것치곤 너야말로 아까 영정 사진이며 향까지 다 박살 냈잖아.”

“내가… 내가, 너랑 같은 줄 알아?”

“남이 보기엔 발정 난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나 똑같아.”

유들유들한 조롱에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설득해도 통하지 않았다. 멍청하게 착각했다. 권재림은 원래 이런 놈이었는데. 애틋한 추억담 때문에 홀린 것처럼 경계를 풀어버린 탓이었다.

건너편 방에서 몇몇 사람들이 한숨 쉬며 지나쳤다. 칸칸이 지어진 장례식장은 방음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건너편 사람이 우는지 웃는지 다투는지, 달리는지 걷는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좁고 가까웠다.

“밖에, 경비 있어. 사람, 사람 온다고.”

“그래? 사람들 보는 데서 박히는 게 더 좋아?”

“흐윽.”

몸에 실린 힘이 더욱 강해졌다. 그저 무게로 누를 뿐인데도 포박당한 것처럼 답답했다. 몸을 좌우로 힘껏 비틀었다. 권재림은 한때 프로 선수까지 준비했었다. 체격도 힘도 훨씬 압도하는 그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피식 웃은 권재림이 내게 말했다.

“형, 목소리 내봐.”

“흐윽.”

“듣고 싶어. 형 신음 소리.”

헐렁한 바지를 쭉 끌어당긴 권재림이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었다. 정확하게 중심을 짓누르는 자극에 팔꿈치부터 배까지 발발 떨렸다.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입을 벌리지도 못 했다. 목에 얼굴을 묻은 그가 살을 쪽 빨며 다리를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였다. 그러다 몸을 가까이 붙이고 아래를 들이댔다. 바지 너머로 부푼 고간이 불룩했다. 저질스러운 희롱이 아니다. 권재림은 정말 여기서 일을 치를 작정이었다. 팔로 얼굴을 막은 내가 숨을 헐떡거리며 애원했다.

“제발, 여기선 하지 마.”

“여기만 아니면 돼?”

“나중에… 차라리 다른 데서.”

나는 그쯤에서 대답이 정리되길 바랐다. 빈소는 나갈 수 없었다. 아무리 부정한 아버지라도 상은 상이었다. 그러니 권재림이 누그러지길 바랐다. 일말의 상식이라도 있다면 이쯤에서 물러나라고.

“그래. 다른 데.”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비웃음을 지은 권재림이 나를 확 잡아당겼다. 어지럽힌 상 옆을 지나친 권재림은 나를 방 안으로 떠밀었다. 가림막 하나로 분리된 방은 상주가 쉬도록 만든 휴게실이었다.

“이 정도로 양보해줬으면 형도 좀 해봐.”

주저앉은 나를 붙잡은 권재림이 가랑이를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물러나지 못하게 머리를 꽉 붙잡은 손이 닻처럼 눌러앉았다. 찰캉, 벨트를 직접 푼 권재림이 빙긋 웃으며 눈짓했다. 불뚝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검은색 드로어즈를 꽉 차고도 모자를 만큼, 크고 묵직한 부피였다.

“으, 윽.”

“싫어도 입으로 한 번 빼는 게 나을걸. 나야 이대로 박아도 상관없지만.”

부리처럼 불룩 튀어나온 성기를 뺨에 툭툭 비비며 권재림이 이죽거렸다. 싫다고 뻗대본들 소용없었다. 도망갈 구석도 없었다. 결국 나는 항복하듯이 입을 벌렸다. 천 위를 살살 핥자 권재림이 씩 웃었다. 속옷에 감싼 성기를 입술로 머금었을 뿐인데도 위용이 평범하지 않았다.

“후우.”

차가운 얼음을 핥듯 할짝거리는 게 감질났는지 권재림이 내 머리를 잡고 앞으로 바짝 당겼다. 입술로 밴드를 잡아 내린 나는 눈앞에 드러난 성기에 잠시 얼떨떨해졌다.

크다. 아니, 거대했다. 암만 덩치가 좋다고 해도 이런 걸 다리 사이에 달고 다닐 수 있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주먹만 한 두꺼운 귀두에 방망이같이 퉁퉁한 기둥은 핏줄까지 불거졌다. 거기다 탁한 붉은빛이 도는 피부는 보는 것만으로도 뜨끈뜨끈해 김이 모락모락 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권재림이 입으로 한 번 빼는 게 나을 거라 말한 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작게 벌린 입으론 귀두 끝을 무는 게 고작이었다.

“입, 더 크게 벌려.”

눈썹을 까딱 움직인 권재림이 명령조로 말했다. 망설이던 나는 턱을 좀 더 아래로 내렸다. 살 기둥을 혀로 핥아 부드럽게 적시며 흡, 하고 한 마디만큼 집어삼켰다. 절반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입을 움직이기 버거울 만큼 가득 찼다.

“웁, 으, 흐움.”

“하아, 이로 살살 긁어봐. 아, 씨발, 어, 좋아.”

“흐우, 욱, 으, 츱.”

입도, 목구멍도 꽉 틀어막혀 답답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빨리 사정하는 게 낫다. 혀를 둥글게 움직여 기둥뿌리부터 핏줄까지 골고루 문질렀다. 충분히 젖은 성기를 가득 입에 문 채 쪽, 숨을 끌어 삼켰다. 홀쭉해진 입 안이 성기 표피에 달라붙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여 성기를 쭉쭉 빨았다. 찔꺽찔꺽. 미끄덩한 점막을 스치는 소리가 습하고 끈적거렸다.

“하, 씨발.”

머리를 잡고 성기를 단숨에 빼낸 권재림이 숨을 씨근덕거렸다. 아직도 묵직하게 발기한 성기가 퉁 튀어나오면서 입술과 뺨을 때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왜 빼는 거지. 자기가 빨아달라 해놓곤 별로였나. 찡그린 얼굴은 만족감과 기묘한 불쾌감으로 뒤숭숭했다.

“너, 씨발, 왜 이렇게 잘 빨아? 어디서 좆만 빨고 다녔어?”

“아, 흑.”

“와, 장난 없네. 씨발, 후우… 훅.”

성마른 숨을 내뱉은 권재림이 욕을 뇌까렸다. 입으로 성기를 빠느라 목까지 얼얼했다. 나는 혀끝으로 입 언저리를 가볍게 핥았다. 체모가 걸리적거린 탓이었다. 그 순간 권재림이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벌린 입 안으로 성기가 푹 침범했다. 깊숙이 들어온 선단이 입속을 난폭하게 문질러댔다. 음낭이 딴딴해지고 기둥이 꿈틀거렸다. 금세 입 안에 걸쭉하고 찐득한 정액이 덩어리졌다. 찝찔한 풋내가 입 안에서 진동했다.

“전부 삼켜.”

권재림이 말했다. 개를 교육시키는 것처럼 엄히 어르는 말투였다. 뱉고 싶었지만 붙잡힌 뒤통수 때문에 별수 없었다. 양 뺨을 불퉁하게 머금고 있던 정액을 삼켰다. 씩 웃은 권재림이 그제야 입에 박히다시피 한 성기를 빼냈다. 성기 주변에 흥건하게 맺힌 체액이 타래처럼 주룩 이어졌다. “씨발, 존나 꼴리네.” 눈도 발기한 것처럼 핏발이 섰다.

“아! 흐윽, 뭐, 뭐 하는 건데.”

“씹, 가만히 있어.”

거칠게 내 속옷을 끌어 내린 권재림이 무릎 뒤에 입을 가져다 댔다. 미끄러지듯 혀로 살을 핥다 입을 크게 벌려 살을 한 움큼 빨았다. 낯선 간지러움에 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나를 눕힌 채 종아리와 오금을 핥던 권재림이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숨소리에 나는 불안정하게 손을 휘적거렸다. 급기야 사타구니로 권재림의 얼굴이 다가온 순간 나는 허벅지를 꽉 모으고 고개를 저었다.

“왜? 형도 빨아줬으니까 나도 빨아주려는데 싫어?”

“싫, 어. 그런 거, 하지 마. 그, 냥, 그냥 해. 제바… 아흡.”

투박하고 두꺼운 손가락이 구멍 위를 지분거릴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파닥파닥 발을 들썩거렸지만 권재림은 내 다리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다리 사이에 낀 팔을 앞뒤로 비비적거렸다.

“하지 말라니까 더 빨고 싶은데.”

“씨, 발, 놓으라고. 그냥 박아! 아, 윽.”

“아까부터 자꾸 그냥 박으라는데, 진짜 박아줘? 이거 박아줄까? 가끔 정신 나간 새끼들은 이걸로도 씹질하던데.”

큼직한 손에 든 소주병을 흔들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미친 새끼가 저건 어느 틈에 챙겨온 거야. 창백하게 질렸을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권재림이 까드득, 병뚜껑을 돌려 땄다. 형형한 눈이 기묘한 색으로 뒤틀려있었다.

배꼽 아래로 싸한 액체가 줄줄 쏟아졌다. 차가운 술 냄새에 눈앞이 뜨겁고, 어질어질했다. 흘러내린 술이 허벅지 사이를 척척하게 적셨다. 권재림이 지금 뭐 하려는 건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다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위쪽으로 올라간 둔부를 쫙 벌린 권재림이 구멍을 핥았다. 등허리가 펄쩍 뛰었다.

“아, 흐으, 아, 앗, 하, 으… 읍!”

빨아 먹는 소리가 차지고 걸쭉하다. 구멍을 쓱쓱 혀로 문지르던 권재림이 이내 게걸스럽게 샅을 빨았다. 민감해진 구멍이 혀의 능란한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낀다. 술에 축축하게 젖은 둔부를 빨던 권재림이 구멍에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윽!”

나는 비명처럼 크게 흐느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배가 어릿했다. 자글자글 튀는 전기가 배 속을 달구고 있었다. 쿵, 쿵. 빠르게 뛰는 맥박, 몸속을 두드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발소리 같았다.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권재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멍을 핥았다. 혀를 세우고 골을 따라 쭉 느릿하게 핥다가 안으로 푹 쑤셔 넣고 혀를 미끈하게 좌우로 움직여댔다. 그때마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고 숨을 참았다. 하지 말라고 빌고 싶은 나머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였다. 입술을 모은 권재림이 젖은 살을 쭙쭙 빨았다. 뭉근하고 끈질기고 추잡하고 성가신 애무였다.

미친 새끼, 개자식, 좆같은 놈. 생각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읊조렸다. 수치심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각이었다. 좋으면 안 되는데, 좋았다. 그러나 동시에 불쾌하고 치욕스러웠다. 이런 것에 흥분하는 내가 싫을 정도였다. 바르르 몸이 형편없이 떨렸다. 걷잡을 수 없었다. 발기한 아랫도리가 점점 절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더, 더 해주면 좋겠다. 아니, 싫어. 그만해. 역겨워. 권재림의 머리를 붙잡고 나는 애타게 흐느끼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맛있네.”

허벅지를 움켜잡고 안쪽 살과 사타구니를 빨던 권재림이 얼굴을 들었다. 의기양양한 얼굴이 물기에 젖어 반드르르했다. 맛있다는 말이 이토록 상스럽게 들리긴 처음이었다.

“근데 넌 털도 왜 이렇게 없어?”

“아, 아!”

“솜털도 아니고. 미쳤네. 형 진짜 야하다.”

성기를 확 움켜쥔 손이 우악스럽게 주물렀다. 직격타를 맞은 듯한 손길에 허리를 들썩였다. 반응이 재밌는지 손이 더욱 세게 성기를 눌렀다. 반은 고통, 반은 무력한 쾌감이었다. 몽롱하게 눈을 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간신히 발에 힘을 주고 그를 걷어찼다. “씹, 팔.” 꽤 아프게 찼는지 권재림이 욕으로 신음했다.

“하, 난 부드럽게 해주려고 했는데.”

나를 뒤에서 잡은 권재림이 내 몸을 바닥에 억지로 깔아 눕혔다. 엎드린 채 온몸을 바르작거리자 성가신 듯 혀를 찬다. 이윽고 투박한 손바닥이 허벅지를 세게 때렸다. 팍, 하고 부딪치는 마찰음. 피부는 얼얼하고 열감이 쓰르륵 오를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어지간히도 열 받은 모양이었다.

눈앞에 포장을 대충 뜯은 검은색 상자가 휙 굴렀다. 편의점에서도 파는 콘돔. 농담이 아니고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입으로 포장지를 뜯어 바닥에 퉤 뱉은 권재림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여기 들어올 때부터 너 따먹을 궁리만 했어.”

“하으, 윽.”

“뭐, 예상은 했으려나? 근데 내가 저번엔 봐줬잖아. 나 그 정도면 정말 많이 참은 거다? 성재현이 그 지랄 떨고 가지만 않았어도 그날 형 두 다리로 멀쩡하게 못 나갔어.”

등허리에 뭉툭한 것이 닿았다. 그대로 성기를 붙잡고 둔부 골에 쓱쓱 문지른 권재림이 입구에 선단을 눌렀다.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권재림이 허리를 힘껏 앞으로 들이박았다. 질컥, 좁은 구멍을 벌리며 들어오는 부피는 무지막지했다.

“으, 으, 읍.”

앞으로 쏠린 몸을 바닥에 기대고 발발 떨었다. 입을 다물어도 신음이 나왔다. 귀두 부분만 겨우 들어왔는데도 아래가 반으로 쩍 갈라지는 듯했다. 반쯤 집어넣은 권재림이 한숨을 쉬며 내 귓가에 입술을 쪽 맞췄다.

“그러니까 내가 봐줄 때 가만히 있지.”

“흐으, 헉, 아, 아으, 빼, 흑, 빼줘.”

“늦었어. 형. 지금 씨발, 이걸 어떻게 빼.”

그대로 성기를 쑤셔 박은 권재림이 이를 악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배 속이 와르르 울렸다. 그의 성기가 안에서 꿈틀거리며 장을 뒤집어 놓는 듯했다.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은 권재림이 몸을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당겼다. 무릎이 바닥에 쓸리며 몸이 덜컥 흔들렸다. 아파서 몸이 굳었다. 삽입된 성기를 어떻게든 막으려 자꾸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하, 씨발 존나, 이걸 여태 안 먹고 참은 내가 병신이지.”

“으윽, 흑.”

“아, 윽, 아래로 좆을 씹어, 먹냐.”

거친 숨이 헉헉거리며 귀에 들러붙었다. 권재림은 내 등에 바짝 몸을 붙이고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아픔은 아까보다 훨씬 줄었다. 이런 크기도 적응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적응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흐으.”

몸이 뒤로 바짝 당겨졌다. 허리 짓에 속도가 조금 더 붙었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박아대진 않았다. 내키는 대로 박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리로 내뱉진 못 했다.

덜컹덜컹, 붙들린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멀미가 나는 듯해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등 뒤에서 팔이 뻗어져 나와 턱을 움켜잡았다. 옆으로 몸을 튼 권재림이 내 입술에 혀를 들이밀었다.

“하으, 웁, 음, 응.”

츱, 춥, 혀가 뒤섞인다, 구멍에 박힌 성기도 맹렬하게 안을 치댔다. 아래도 위도 죄다 권재림한테 틀어막혔다. 권재림은 숨이 찰 때쯤, 입술을 떼어냈다가 다시 키스하길 반복했다. 어미한테 먹이를 받아먹듯이 굶주린 입맞춤이었다. 잔뜩 흥분한 몸이 뜨끈뜨끈했다.

엉성하게 쳐둔 가림막 너머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영정 사진이 그대로 누워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역겨운 피를 이어받아 나도 역겨워진 건가. 장례식장에서 개처럼 흘레붙는다. 음탕하고 추악하다. 아버지를 욕할 게 없었다. 제대로 저항 한 번 못 하고 질질 끌려다니는 사나운 꼴.

그 순간, 겹쳐진 몸이 살짝 어긋났다. 안에 박혀있던 성기가 밀려나면서 안쪽을 꾹 눌렀다.

“아, 아!”

머리까지 쥐고 주무르는 것처럼 비극적인 쾌감이 솟구쳤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발발 떨렸다. 붕 뜨는 듯한 감각. 허리를 위로 들고 디딘 발끝에 힘을 줬다.

몸을 바짝 붙인 권재림이 나직이 속삭였다.

“응, 여기?”

“아! 아앗… 히윽!”

고장 난 것처럼 아래가 바르작거린다. 권재림이 입술을 날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엎드렸던 몸이 모로 눕혀졌다. 허벅지를 잡아 위로 누른 권재림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인상을 쓴 그가 허리를 퍽 쳐올렸다.

“아악, 아! 아아, 으, 흑.”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입을 벌리자 할딱거리는 신음만 멍청하게 흘러나왔다. 입맛을 다신 권재림이 종아리를 잡고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구멍을 비집고 자리 잡은 성기가 점막을 비벼댄다. 질꺽질꺽, 윤활제로 미끌미끌하게 젖은 입구 주위로 허연 거품이 들러붙었다.

“하아, 형, 지금, 존나 꼴리게 굴어. 알아, 어?”

“으, 흑, 으응, 읏, 흡, 히윽.”

“씨발, 우는 것도 예뻐죽겠네.”

두 팔로 내 몸을 꽉 끌어안은 권재림이 혀를 세워 눈가를 핥았다. 눈물이 혀에 쓸려나간다. 눈꺼풀과 눈 아래가 따끔따끔했다. 몸을 가두듯이 구석에 몰아세운 권재림이 허리를 빠르게 쳐올렸다. 쩍, 쩍, 난잡한 교접이 점점 급박해졌다.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밀려난 몸이 벽에 쿵쿵 부딪혔다. 현기증 비슷하게 머리가 울렸다.

“후욱.”

머지않아 권재림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몸이 동시에 정지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비틀어 잡고 있던 손힘이 약해졌다. 권재림은 허리를 뒤로 빼냈다. 퉁퉁 부은 입구에서 빠져나온 성기는 아까보단 크기가 줄어있었다. 정액으로 콘돔 끄트머리가 불룩했다.

몸을 일으킨 권재림이 손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줬다. 멋대로 몰아붙인 섹스에 어울리지 않는 뒤처리였다. 셔츠에 점점이 튀어 오른 정액을 보곤 그가 멋쩍게 웃었다. “새로 사다 줄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력도 없는 탓이었다. 힘이 빠진 몸은 실처럼 흐늘거린다. 문득 그림자가 나를 보는 것만 같다. 비난하는 듯이 일렁거린다. 나는 자조하듯 웃었다. 누구더러 더럽다고 하는 거야. 당신이나 나나 똑같아. 그런데 저것은 누구일까. 나는 누구를 생각하려 했지.

어둑어둑하다. 나는 그대로 암전 속에 가라앉았다.

**

“같이 가줄까?”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려 쓴 채 권재림이 방글거리며 말했다. 대답할 가치도 못 느낀 나는 잠자코 구두를 고쳐 신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이 창백했다.

가기 싫다며 들러붙는 권재림을 힘으로 밀어낼 도리가 없어서 와이셔츠를 사달라 부탁했다. 물론 싫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은 있었는지 뭉그적거리면서도 일어났다. 두 손 가득 사 온 것 중엔 별별 게 다 있었다. 살림을 차릴 기세였다. 돈 많다고 쓸데없는 걸 다 사 오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나는 그중 절반을 환불시켰다.

“진짜 그거 입고 갈 거야?”

권재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와이셔츠를 잡아당겼다. 편의점에 있던 거라 딱 봐도 일회성 싸구려인 게 티 났다. 옷감은 얇았고 기름 냄새가 난다.

“정액 냄새가 나는 와이셔츠보단 낫지.”

“왜, 난 형 냄새 좋기만 하던데.”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권재림의 이마를 손으로 내리쳤다. 권재림이 뒤로 물러나선 아픈 척 엄살을 떨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왔다. 아까 맞을 땐 아픈 척도 안 해놓고 이제 와서 아프다고 우는 시늉을 하다니.

새벽에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권재림을 때렸다. 가볍게 때린 게 아니라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주먹으로 때렸다. 권재림은 가만히 맞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나를 피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샌드백이라도 된 듯 그대로 있었다. 그 탓에 턱이 뻘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거기다 또 대일밴드를 붙여놓은 모양새가 기괴했다. 대일밴드가 아니라 멍 크림을 발라야 할 텐데.

“형, 진짜 힘없더라. 나중에 내가 복싱 가르쳐줄까? 체력 길러야 섹스 할 때 기절 안 하지.”

“그만 좀, 하고 가.”

“이따 와서 돼지국밥 먹자. 나 부산에서 국밥 한 번도 안 먹어봤어. 형 여기 살았으면 아는 데 있을 거 아냐?”

“가라니까.”

“형.”

“그만 가라고 했잖아!”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권재림은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나를 보고도 피식 웃기만 했다. 고개를 불쑥 가까이 들이민 그가 고개를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가기 싫은데. 자꾸 그렇게 굴면 더 감질나잖아.”

“미친 새끼. 너 진짜… 왜 그러는 건데.”

“형이야말로, 성재현이랑 뭐 하는 건데.”

“뭐?”

“그 새끼 집에 왜 기어들어 갔냐고.”

나는 대답 없이 권재림을 바라봤다. 돈 때문에 들어갔었다. 빚 갚고 싶어서. 단순히 그뿐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성재현이랑도 잤냐?”

“…전무님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 전무님이 너 같은 줄 알아?”

“이거 봐. 또 이러지.”

“무슨 말이야.”

“너 지금 성재현 감싸잖아. 내가 보기엔 성재현이 너 따먹었으면 따먹었지, 내버려 둘 놈이 아니거든. 그런데 왜 나랑 같지 않다고 말해?”

“…….”

권재림 말이 맞았다. 아니, 더하다면 성재현이 더 했다. 악독하고 냉혹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내게 어떤 수치와 굴욕이라도 줄 수 있었다. 그런 선택권이 성재현한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성재현을 비호하고 있는 거지. 권재림한테 몸 판 사실을 들키는 게 싫어서? 세한 전무가 일개 단기 계약직과 불순한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단순히 그뿐인 걸까.

그래, 그것뿐이었다. 저택 안에서 있던 일은 저택에서만 존재했다. 침묵, 비밀유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성재현과 나 사이에 있던 일은 일절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예전부터 넌 성재현한테만 그런 식이었어. 걔가 지나가기만 해도 조용해지고, 쳐다보면 눈도 못 마주치면서 오라고 하면 가고. 대체 그 새끼가 뭔데?”

“상관하지 마.”

“야, 강진하!”

“적어도 전무님은… 장례식장에서 우는 날 깔아뭉개진 않았으니까.”

그 말에 권재림이 이를 드러냈다. 미간을 험악하게 구긴 얼굴은 당장이라도 나를 짓누를 듯이 위압적인 기세였다. 씨근덕거리던 권재림이 주먹으로 거울을 쳤다. 쩍, 하고 금이 갔다. 살이 터진 주먹에서 피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차라리, 그냥 개새끼라고 욕을 해. 비교당할 바에는. 욕이 나아.”

“…….”

주먹을 내린 권재림이 길게 숨을 내쉬곤 옆을 지나쳤다. “나 간다.” 쓸쓸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권재림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벌컥 화를 내다가도 금세 풀어지던 평소의 권재림답지 않았다.

**

영구차에 아버지의 관과 함께 올라탔다. 화장터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내내 비틀비틀 흔들렸다. 울퉁불퉁한 길에 험한 운전. 아픈 허리 때문에 오히려 차멀미는 느낄 새가 없었다.

섹스의 여파는 끔찍했다. 허벅지부터 엉덩이, 심지어 등까지 욱신거렸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바짝 기댔다가 옆으로 몸을 비틀길 반복했다. 등허리에 붙인 파스가 땀 때문에 끈적거린다. 손을 뒤로 넣어 파스를 떼어냈다. 그래도 효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닌지 아까보다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

눈을 감자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사흘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머리가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막막했다. 조작된 가짜가 아닐까 수십 번도 생각했지만, 사본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외할머니 필체, 그리고 인장마저 거짓이 없었다.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가족이 없었다. 외가 쪽 친척과 어머니, 나를 제외하면 혈혈단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친아들처럼 여기셨다. 외할머니는 대체 무슨 마음으로 아버지를 품으신 걸까. 그저 배 속에 든 손자, 나 하나 때문에 자기 딸마저도 그렇게 무정하게 버릴 정도로.

외할머니는 나를 참으로 가여워했다. 어머니한테 구박받는 나를 감싸고돌던 것도 외할머니셨다. 그래서인지 삼성동 저택에 내가 올 때마다 편안치 못한 얼굴이면서도 나를 차마 밀어내진 못 하셨다.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당신은 그저 내게 미안하다고만 하셨다.

차에서 내린 나는 장례 지도사가 시키는 대로 걷고, 이동하고, 움직였다. 발인은 간소했다. 값비싼 장례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도 평범하고 볼품없었다. 염을 한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나는 천에 덮인 아버지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하실 말씀이 없냐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의 관이 화장장에 들어간다. 직원들이 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장송곡이 울러 퍼진다. 직원들은 고인에 대한 예의 치레로 눈을 감았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타오르는 연기를 뚫어져라 지켜봤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내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추모는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내 기억을 들추고 튀어나온 상념이었다. 당신은 내게 참으로 다정하셨다. 바쁜 나날 중에도 하나뿐인 자식이라며 나를 애지중지 여겼다. 나는 어머니와 대조되던 당신의 애정이 좋았다. 그래서 당신을 연민했고, 존경했었다.

다 타고 남은 골분이 함에 담겨 나왔다. 둥그런 항아리는 작았다. 갓 태어난 아이보다도 작았다. 죽음이란 무릇 그러하다는 듯이 작고 볼품없었다.

나는 함을 안고 납골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내다 버렸다.

**

연못에서 퐁당, 잉어가 꼬리로 물장구를 친다. 익숙한 풍경은 삼성동 정원이었다. 나는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삼성동은 사계절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지금은 돌아가신 회장님 때부터 공들여서 가꾼 곳은 작은 왕의 궁전 같았다.

바람에 풀냄새가 흥건했다. 고개를 내리자 발아래 클로버 꽃이 한가득 핀 게 보였다. 하얗고 싱그러운 모습에 나는 손으로 꽃 무더기를 살살 헤집었다. 외할머니한테 드릴 클로버를 종종 찾던 게 나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손을 대자마자 꽃이 바삭거리며 시들었다. 꽃만이 아니었다. 연못은 텅 비었고 그리도 무성하던 향나무들조차 마른 가지뿐이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내 앞을 향하고 있었다.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다.

어머니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벌벌 떠는 나를 어머니가 노려본다. 뚜벅뚜벅 다가온 그녀가 내 목을 두 손으로 콱 붙잡았다. 손가락이 파리지옥처럼 오므라졌다.

‘전부 너 때문이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외쳤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갈라진 목소리였다. 어머니 눈, 코, 입에서 피가 흐른다. 죽은 사람처럼 흉측하고 가여운 꼴. 엄마 잘못했어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몰랐어요.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어머니의 손에 매달려 빌고 또 빌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울었다. 울면서 웃고 있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보이던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손을 뿌리친다. 나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온몸이 가라앉는다. 손을 힘없이 든 채 나는 미친 것처럼 웃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나한테 대체 뭐가 남았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가진 것들은 다 엉망진창이란 말이야. 그러다 흐느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하야.’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마치 붙잡는 듯이, 나를, 저편에서 끌어당기는 목소리였다. 어리지만 단단했다. 그리고 무척 익숙했다. 상냥하지만 무섭고, 온화하지만 어딘가 어두웠다.

‘진하야.’

그가 다시 불렀다.

‘나를… 외롭게, 하지 마.’

팔목을 붙잡은 손이 나를 힘껏 당겼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떴다. 물기로 흐려진 시야에 낯익은 인영이 보인다. 성재현은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손목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괜찮아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나는 두 눈을 찡그리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하나, 둘. 조금씩 눈과 귀가 선명해졌다.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곁에 딱 붙어 앉아있는 성재현에게 천천히 시선이 향했다.

“전무님….” 하고 그를 불렀다. 볼품없이 쉰 목소리 때문에 발음마저 이상한 것 같았다. 성재현이 탁자에 있던 물을 내게 권했다. 상반신을 일으킨 나는 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온몸이 아팠다. 마디마디가 쑤시는 게 가벼운 통증으로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현관에 쓰러져있던 걸 상주 직원이 발견했습니다.”

“쓰러졌었다고요…? 그럼 제가, 지금 어디에….”

“내 방이에요.”

성재현이 대답했다. 그의 방. 내가 아직 삼성동에 있는 건가. 나는 지끈거리는 눈가를 찌푸리며 듬성듬성 끊긴 기억을 더듬었다.

장례를 마치자마자 나는 서울행 기차를 탔다. 삼성동으로 돌아왔을 때가 오후 5시였던가. 그쯤이었을 것이다. 성재현은 늦은 저녁에 귀가할 예정이라고 다른 직원이 대신 말을 전했다. 다들 내가 초상을 치르고 왔다는 걸 아는지 말을 삼가는 분위기였다.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거실로 나왔다. 몸살 기운인지 머리며 윗배가 아팠다. 급한 대로 감기약을 삼켰고, 잠시만 쉴 생각으로 현관 옆에 앉았다. 거기서 기억이 끊겨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의 방에 누워있었다.

그의 방, 그리고 그의 침대.

성재현의 침대라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성재현 침대에 누워있다고? 임시 거처로 주어진 방도 있는데 성재현 침대라니. 그럼 지금은 몇 시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나는 이불을 걷었다.

“죄송합니다! 얼른 일어나겠… 윽.”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머리가 찡, 울렸다. 두개골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강렬한 두통이었다. 속이 뒤틀린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아팠다. 몸이 휘청거린다. 손으로 침대를 붙잡았다. 그러나 이불자락만 손에 휘감길 뿐이었다.

몸이 바닥으로 기울어지던 순간이었다.

단단한 품에 뺨이 닿았다. 실크 넥타이, 매끈매끈한 양장 옷감. 향수 냄새가 난다. 그가 출근하고 난 오전에 드레스 룸에 들어가면 나는 향수 냄새였다.

“강진하 씨.”

성재현이 부른다. 나는 벌벌 떨었다. 떨지 않으려 했지만 턱이 자꾸 떨려서 이가 딱딱 부딪쳤다. 발을 헛디뎠을 뿐이었다. 일부러라도 그의 품에 안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성재현이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것이었다. 그거 말고도 화낼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연락 보고를 늦게 했고, 현관에서 기다리지 않고 잠들었고. 그리고, 권재림이랑. 설마 알아차렸을까.

성재현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안고 있었다. 그의 팔이 내 겨드랑이 아래를 단단히 지탱했다. 허리를 붙잡은 손이 줄기를 쓸며 올라와, 내 뒤통수를 잡았다. 완벽하게 품에 안긴 채 나는 가슴에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품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주 규칙적이고 빠르고, 맹렬했다.

머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내 속에서 뛰는 맥박을 헷갈린 걸까. 성재현한테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는 산 사람이지만, 이렇게 뜨겁게 고동치는 소리는 너무 낯설다.

미지근한 숨이 가마를 느른하게 스친다. 성재현은 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두 팔에 실린 힘이 더 강해졌다. 숨이 막히는 듯한 체온에 갇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들 수 없었다. 그가 무슨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지,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가, 힘없이 스르륵 놓았다.

차분하게 한 발자국 물러나 그의 표정을 살폈다. 성재현은 딱히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주 평온한 시선이었다.

“장례 치르느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인데, 좀 쉬어요.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나는 대답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늘어진 링거줄을 잡아 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따 링거줄 빼러 사람이 올 겁니다. 부탁할 게 있으면 탁자 옆에 내선전화 사용하시고요.”

“…전무님은 나가십니까.”

“네. 한, 다섯 시에 오려나.”

오후 5시. 평소보다 조금 이른 귀가 시간이었다. 부드럽게 웃은 성재현이 팔을 드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움츠렸다. 손가락이 이마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그러니까.” 멍을 슬쩍슬쩍 문지르며 그가 속삭였다.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머지않아 두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성재현이 부른 의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수액 팩이 다 빈 걸 확인한 의사는 주삿바늘을 빼줬다. 대화는 거의 없었다. 몸에 딱히 큰 탈은 없지만 멍 부기는 며칠 지나야 한다. 두통이 계속 있을 테지만 사나흘이면 가라앉는다.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계속 아프면 추가로 검사를 받아보잔 말이 끝이었다.

링거대를 치운 그들은 불까지 끄고 방을 나섰다. 따각따각 계단을 오르는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한 것처럼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그래도 이 침실에 계속 있을 생각은 없었다. 쉬더라도 다른 방에서 다리를 쭉 뻗고 눕고 싶었다.

계단 앞에 서니 평소보다 계단이 더 높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혼자 잘못 움직였다가 굴러떨어질 거 같았다. 결국 방으로 돌아가 내선 전화로 사람을 불렀다. 계단을 내려온 가정부가 나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몸을 붙잡아줬다.

그녀는 나보다 왜소했다. 아무리 가사 노동으로 잔뼈가 굵다 해도 성인 남자를 홀로 부축하긴 어려울 터였다. 고민하던 나는 성재현이 전에 쓰던 목발을 떠올렸다. 그걸 어디다 뒀더라. 한국말이 서툰 가정부에게 영어로 물어보려 했는데, 머리를 부딪친 탓인지 단어가 곧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손짓 발짓으로 설명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알아들었는지 가정부는 서재 옆 창고에서 목발을 가져다줬다.

캐리어는 내가 잠가 둔 그대로 방에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일단은 다 제쳐두고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 있으면 복잡한 생각도 조금 사라질 것만 같았다.

샤워부스로 들어가 물을 세게 틀었다. 벗은 몸을 거울로 살펴보자마자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개가 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잇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엉덩이는 빨갛게 부었고 허벅지와 무릎에도 멍이 들어있었다. 권재림한테 조금이나마 미안했던 일말의 마음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미치겠네.”

잠든 사이에 성재현이 이걸 본 건 아니겠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권재림이 장례식장에 왔던 걸 알고 있었으니 만약 흔적을 봤다면 이미 말을 꺼냈을 것이다. 넥타이도 와이셔츠도 그대로였으니 성재현은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스펀지에 거품을 가득 내서 몸을 여러 번 세게 문질러 닦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잇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대일밴드로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여 자국을 가렸다. 붕대만 안 감았지 미라가 따로 없었다.

방에 돌아와 앉은 내게 가정부가 늦은 아침을 가져다줬다.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니니 부엌에서 먹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다시 설명할 기운도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놋그릇에 담긴 건 닭죽이었다. 테두리가 둥근 수저는 나무라 가벼웠고, 물컵 대신 페트병으로 된 물병이 나왔다.

환자식인 건 그렇다 쳐도 나무 수저에 페트병은 희한한 조합이었다. 이 저택에 드나들면서 나무 수저는 처음 봤다. 성재현이 그사이에 친환경에 관심이라도 가졌나. 게다가 놋그릇이라니, 이건 성재현을 비롯해 세한 일가 가족들이나 쓰는 그릇이었다. 건드리면 안 될 왕의 왕관이라도 본 것처럼 나는 그릇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입이 깔깔해서 아무것도 먹기 싫었지만, 며칠 내리 굶었더니 배가 찌르르 아팠다. 수저를 들자 손이 발발 떨렸다. 힘을 꽉 주고 한술을 떴다. 심심한 간이었다. 성재현이 아침부터 이런 밍밍한 죽을 먹었을 것 같진 않다. 아마도 따로 준비한 듯한 식사였다.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사려 깊은 대접이었다. 마치 승은 입은 후궁이나 신하라도 된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틀린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성재현이 나한테 왜 이러지. 저택에서 쓰러진 게 그렇게 신경 쓸 일이었나.

의사 말론 갑작스러운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진 거라고 했다. 저혈압에 수면 부족. 저번이랑 비슷한 이유였다. 아주 미약한 뇌진탕을 빼면 심각한 부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슨 중병 환자처럼 간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체 성재현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그래도 아픈 꼴은 못 보겠다는 건가.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창원으로 내려가기 전에도 좀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알던 성재현 같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외적으로도 보이던 친절이 단둘만 있을 때도 여파를 미치고 있었다.

나를 감정 없는 장난감이라 비웃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섹스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음담으로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았다. 가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만졌다.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값비싼 조각품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 보편적으로는 성인 남자한테 쓰다듬는 일을 받는 게 썩 좋아 보이진 않을 터였다. 하대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그가 날 쓰다듬는 게 싫지는 않았다.

성재현은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좋다, 싫다를 말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서 침묵은 암묵적인 긍정이고, 외면은 완곡한 부정이었다. 그런 성재현이 나를, 쓰다듬는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었다.

그 눈빛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성재현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온화했다.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고, 존재를 예뻐하는 것처럼 사근사근했다.

성재현이, 나를 예뻐한다.

잠시 그 어색한 단어를 입 속으로 뇌까렸다. 저택에서 쉬게 해주고 융숭한 식사 대접 하나로 생각이 너무 멀리 치닫고 있었다. 성재현이 나를 예뻐한다니. 모순된 명제였다. 차라리 애완동물처럼 대한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사람이 고단하니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침대 머리에 등을 받치고 눈을 감았다. 처방받은 약을 먹었는데도 두통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쉬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오후에는 움직일 생각이었다. 앉아만 있을 여유는 없었다.

육필준. 삼촌을 만나서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한테 어머니에 대해 대강 아는 것처럼 얼버무리지 않았던가. 덮어두고 싶지만, 이미 알아버린 이상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달력을 확인하니 화요일이었다. 점심이면 조경 업체에서 사람이 온다. 나는 반 정도 비운 죽그릇을 내려두고 젖은 머리를 말렸다.

**

“그만, 두셨다고요?”

“네. 제가 듣기론 그렇다고 하던데.”

“혹시 인수인계 받으실 때 들으신 말은 없고요?”

“전혀. 우리도 저번 주부터 갑작스럽게 계약 들어온 거라서…. 뭣하면 그쪽 업체에 한 번 연락해보시든가.”

목장갑을 고쳐 낀 남자는 귀찮다는 얼굴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목발을 지팡이처럼 짚고서 앞에 있는 트럭을 멍하니 쳐다봤다.

흰색 트럭에는 처음 보는 업체 이름이 적혀있었다. 분명 저번 주까지만 하더라도 육필준이 운영하는 양지조경에서 삼성동 정원 일대를 맡았다. 관리 업체를 바꾸는 일은 빈번했지만 하다못해 언질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인수인계도 없이 덜컥 업체가 변경되었다니.

핸드폰으로 필준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흐르지만 받지는 않았다. 양지조경에 전화를 걸어도 똑같았다. 설마 연락을 피하나. 하지만 핸드폰 번호도 바꿨으니 나인 걸 알고 피할 리는 없을 텐데. 혹시 몰라 저택 전화기로도 걸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비단 바뀐 건 조경 업체만이 아니었다.

삼성동 저택을 관리하는 직원은 나와 니콜을 빼고도 하루에 최소 열 명까지 배치되었다. 대부분 요일을 교대하면서 왔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서로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못 보던 사람들이 부엌에 있었다. 외국인 조리사를 포함해 네 명.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으로 전부 여성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깔보거나 텃세를 부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건드려선 안 되는 것처럼 피하는 눈치였다.

단 일주일 만에 저택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죄다 사라졌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약 2년째 가정부로 근속 중인, 필리핀 국적의 니콜 살라자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직원을 죄다 바꾼 거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던 걸까. 그나마 타당한 사유였지만 성재현은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며, 일관적인 걸 선호했다.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야 해고하는 일도 드물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은 기억이 있었다.

목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조심스럽게 복도를 지나쳤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나는 성재현이 방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의 침실에 계속 누워있는 건 이상했다. 고민 끝에 타협점으로 결정 내린 장소는 서재였다. 5시가 되자마자 차 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머지않아 서재 문이 벌컥 열렸고 그는 앉아있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들어왔다.

“전무님, 어서 오세요.”

의자 팔걸이를 잡고 일어선 나는 평소처럼 그를 반기려고 했다. 그러나 성재현의 동작이 더 빨랐다.

“내가 나가기 전에 분명히, 방에 있으라고 했는데.”

“아.”

그는 내 양팔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팔목이 시큰거렸다. 아픈 것보다도 그의 난폭한 반응에 당황해서 변명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한차례 숨을 내쉰 내가 떠듬거렸다.

“전무님 침실에… 계속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예의?”

말을 따라 한 그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실렸다. 잘못 짚었나. 얌전히 침실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았던 걸까.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나는 결국 꼬리를 말았다.

“죄송합니다. 다음엔 안 그러겠습니다.”

성재현은 내 두 팔을 꽉 그러쥔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급하게 뛰어온 사람처럼 거칠었다. 가슴팍이 들썩거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성재현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낯설었다. 그는 조급함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여유로웠고 어느 순간에도 동요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철부지 소년 같았다. 약이 오르고 애타고, 심통이 나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짓기도 하는구나. 참 신기했다. 항상 단단한 사람이란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입을 갸름하게 벌리고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나도 모르게 터진 웃음이었다. 그러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렸다. 진짜 내가 미쳤구나. 지금 누구 앞에서 웃고 있는 거야. 혹시 아까 먹은 약에 마약 성분이 들어있던 게 아닐까. 마약성 진통제라던가. 이번 일은 내가 전적으로 잘못한 게 맞다. 입술을 꽉 깨물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였다.

“앗.”

벽으로 세게 밀려난 몸에 달라붙듯 그가 고개를 가까이 밀었다. 성재현의 눈이 더욱 기묘하게 깊어져 있었다. 뒤틀린 어둠이 열렬하게 나를 담는다.

아랫입술에 달라붙는 감촉이 뜨겁고 습윤했다. 꽉 잡혀 벽에 눌린 두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핀에 배와 날개가 찔려 상자 속에 박제된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성재현은 입으로 머금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할짝거렸다. 까칠한 혀가 마른 입술을 핥을 때마다 전기가 찌르르 올랐다. 맛을 보는 것처럼 입술을 쪽쪽 빨던 성재현이 과감하게 혀를 휘감았다. 입속에서 두 혀가 한 덩어리로 얽혔다. 물컹하고 단단한 살이 질컥거리며 입 안을 휘젓는다. 혀를 서로 비빌 때마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줬다.

“읍, 흐… 으읏.”

맞닿은 가슴이 나를 있는 힘껏 벽으로 밀어댄다. 버티느라 잔뜩 힘이 들어간 목까지 경련이 왔다. 턱을 들고 단 숨을 내뱉었다. 목표물을 쫓아오는 것처럼 입술이 다시 달려들었다. 집요하게 입 안을 헤집는다. 맹목적이고 끈질긴 키스는 마치 숨까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시곗바늘이 움직이던 미세한 소리도 귓가에서 멀어졌다. 그저 심장만 격렬하게 맥박쳤다. 두근, 두근. 팔을 휘어잡은 그의 손바닥이 소매 사이로 파고들었다. 속살을 더듬는 손길에 전류가 튀었다.

“하아.”

나직한 한숨과 함께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가쁜 숨을 골랐다. 눈앞을 점령한 성재현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길 반복했다. 살짝 벌린 그의 입가가 반지르르 젖어있었다. 비비고 문지르느라 발갛게 부르튼 아랫입술.

조명을 등진 눈동자 속 동공이 새카맸다. 성재현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묵 어린 시선을 마주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은 더위에 녹아내린 유화처럼 엉망이었다. 상기되어 붉어진 관골과 콧잔등,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마에 듬성듬성 들러붙었다. 당황스러운 한편 갈증을 숨기지 않는 시선. 그러나 동시에 생생했다. 산 자처럼 펄떡거리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여태 내가 알던 성재현과 너무나도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왜 당신은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나는 어째서, 당신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성재현에게 온 연락이었다. 일부러 모른 척할 수도 없을 만큼 쨍한 소음이었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눈이 나를 붙잡는다. 팔을 꽉 움켜잡은 손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문득 꿈에서 그의, 덜 자란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를, 외롭게 하지 마.’

“전무님.”

그를 불렀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뒷말을 이었다.

“핸드폰… 전화 왔습니다.”

뚜렷하고 별것 아닌 사실이었다. 태연히 보고했다. 성재현은 대답이 없었다. 팔을 꽉 누르던 손끝이 멀어졌다. 핸드폰을 꺼낸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말하세요.”라고 통화를 이으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문이 닫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석 달 동안 성재현은 내킬 때마다 나를 불러다 욕구를 풀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보인 얼굴은 호기심이 전부였다. 쥐나 개구리를 잡아다 실험을 하는 악랄한 즐거움에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이 관계에서 담백할 수 있었다. 날 때부터 주인으로서 존재하던 그를 경외했다. 성재현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두려움뿐이었다.

입술을 떼어내던 그 순간이 맴돈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분노였다. 그러나 동시에 욕정처럼 느껴졌다. 열을 해갈하고 싶은 것처럼 억누른 얼굴.

저녁 식사 때 성재현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서 저녁은 건너뛰겠다는 전달만이 돌아왔다.

늦은 시간에 2층 서재에 올라갔다. 문 앞에 가져다 둔 식사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 차갑게 식어있었다.

**

“이러면 될까요?”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옥선 팀장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합의서]라 쓰인 서류를 눈으로 훑은 김옥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유지금은 일주일 안에 적어주신 계좌로 송금될 거예요. 이후에도 두 달에 한 번은 저희 쪽에서 전화 드릴 거고요. 이 부분도 다 동의하시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으음, 그리고 별다른 사항은… 네! 없네요. 참, 이건 사족이지만 강진하 씨 글씨 잘 쓰시네요? 읽기 편하다.”

“감사합니다.”

꽉 쥐고 있던 볼펜을 내려둔 나는 그녀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계약 만료일을 하루 앞두고 김옥선 팀장이 나를 방문했다. 이중으로 계약된 지라 퇴직 절차도 그녀를 거쳐야만 했다. 다행히 퇴직 과정에서 특별한 걸림돌은 없었다. 불리하고 권리 침해적인 조항을 애써 무시하며 사인하는 게 전부였다. 비밀유지를 조건으로 나오는 보상금은 5천만 원. 3개월밖에 안 되는 근무 기간을 생각하면 상당한 액수였다.

그토록 길게 느껴지던 석 달이 비로소 마침표를 앞두고 있었다. 정말 다 끝난 건가. 홀가분하기보다는 얼떨떨했다. 문서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앞으로는 권고한 대로 세한에 대해 그 어떤 발언도 삼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김옥선은 호치키스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접대용으로 나온 율무차를 홀짝거리며 나는 이미 몇 번이고 읽었던 계약서를 눈으로 훑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삼성동에는 다시 올 일이 없다. 그리 생각하니 이상야릇했다. 서른 남짓 살아오는 동안 삼성동은 내게 있어 또 다른 터전이었다. 외할머니부터 어머니, 아버지에 이어, 그리고 나까지 대물림하듯이 일을 했다. 이곳에 내 모든 핏줄이 박혀있었는데, 내 손으로 그걸 뽑아낸 것이다.

문득 성재현이 내게 키스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혼란스러운 색으로 덧칠된 눈동자. 서재에 틀어박혔던 성재현은 별일 없다는 듯이 내 시중을 받았다. 키스한 이유를 변명하지도, 내게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도 않았다. 일시적인 충동조차 아니었다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얼굴은 나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편히 마음을 털었다. 들척지근한 마무리를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서류를 탁탁 털어 정돈한 김 팀장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자 정영호가 있었다. 그는 내게 눈인사만 하고는 김옥선에게 서류를 건네받았다. 비서실 쪽에도 사본을 갖고 있어야 할 테니, 필요한 서류는 오늘 미리 받아두려는 듯했다.

김옥선이 탄 택시가 떠났다. 정영호는 바로 가지 않고 정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찰칵,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우던 정영호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하루 이르긴 하지만, 그간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정 비서님이야말로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못 보일 꼴을 정영호에게 죄다 노출했다. 일손을 덜려고 들인 고용인인데 손이 더 많이 가지 않았던가. 정영호는 입술을 끌어 올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덕분에 두 시간씩 늦게 출근하는 날이 많아서 편했습니다. 강진하 씨가 의전에 익숙해서 수월하기도 했고요.”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아니요. 입바른 말 하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담뱃재를 깨진 화분에 턴 정영호가 숨을 골랐다.

“비서실로 들어올 의향은 혹시 없습니까?”

“비서실이라면….”

“네. 세한전자 전무 비서실. 제 직속이자, 전무님 전담 비서실 스카우트 제안 이야깁니다.”

그 말에 나는 입술을 가지런히 다물었다. 정영호가 꺼낸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매년 비공개로 사내 인사 채용을 통해 비서실 발령이 결정된다. 임원, 특히 회사에 경영 결정권과 영향력이 있는 상사의 밑 사람들도 그만한 힘을 가졌다. 승진하기에 따라서는 등기이사, 나아가서는 한 계열사 사장 직함도 받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타 계열사, 심지어 다른 회사 이직에도 훨씬 유리한 이력이었다. 이러니 어지간한 스펙만으로는 비서실에 채용되기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길게 고민할 필요 없이 곧바로 승낙하고도 남았다.

내게는 과분한 자리였다.

그래서 나는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세한 일가를 보고 자란 사람이라 해도 비서실은 능력 밖의 업무였다. 게다가 솔직하게 말하면, 성재현 밑에서 비서 생활을 한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비서실 소속이라 해서 그의 얼굴을 매번 보진 않을 터였다. 주요한 의전과 관리는 정영호 휘하 몇몇 근속 비서가 담당할 테고, 말단 비서인 나는 서포트 전담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해도 내키지 않았다.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서로 치부를 알 만큼 알았고 드러낼 만큼 드러낸 관계였다. 이만하면 충분히 충심을 바치지 않았을까.

“정말 감사한 제안이지만 저는 학력도 형편없습니다.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는 정 비서님께 폐가 될 테고요.”

“외부 스카우트에 대해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게다가 전무님 밑에서 일했다는 걸 알면 더더욱 말 나오기가 어렵겠죠.”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싶습니다.”

정영호는 말이 없었다. 연못을 바라보는 표정이 차분했다. 내 말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였다. 성재현과 나는 불순한 합의로 관계를 맺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영호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제삼자였다. 말은 어떤 방식으로든 새어 나가기 마련이었다. 미연을 방지하려면 나서지 않는 게 해답이었다.

“나중에라도 원하는 회사가 있으면 연락 주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 인사를 답하며 나는 연못을 바라봤다. 물속에서 화려한 색색의 잉어들이 살랑거리며 헤엄쳤다. 꽃이 피지 않은 연잎들이 슬슬 분포를 넓히고 있었다. 침묵을 삭히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음, 뭔가요.”

“저, 복귀하고 보니 정원 업체를 비롯해서 관리인들이 대거 바뀌어있던데. 제가 자리 비운 동안 업체 간의 문제라도 있었는지. 양지조경이라고….”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인 정영호가 꽁초를 깡통에 던져넣었다.

“양지조경이라면 지금 사장이 검찰에서 조사받는 중입니다.”

“검찰 조사…?”

“대마초를 대량으로 밀수입했다는 혐의로 긴급 구속되었다더군요. 당연한 말이지만 계약은 바로 파기되었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질까 봐 관련 사항은 전부 삭제했습니다. 기소 진행을 봐서 저희도 손해 배상 책임을 물 겁니다.”

긴급 구속, 밀수입. 듣기만 해도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정영호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십 년 전 석영 임원진 마약 파티… 조달 건도 알고 보니 그 사람 책임이었다더군요.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 사건… 강진하 씨 아버지가 당시 피의자로 조사받았을 텐데.”

“잠시만요. 그럼, 설마 삼촌이 저희 아버지한테…?”

“아마도. 일단 자수하기로는 그렇다고 하더군요. 가뜩이나 부친상 치르느라 힘들었을 텐데. 강진하 씨한테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 일부러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

나는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집안 전체를 망가트린 사건이었다. 그게 아버지가 아니며,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의 짓이었다. 여태 결백이 통하지 않았는데 비로소 10년 만에 그 모든 게 끝났다.

혼란스럽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스웠다. 그래서 육필준이 아버지를 그토록 걱정했구나. 겨 묻은 개를 걱정하는 똥 묻은 개나 마찬가지였다. 두통이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같이 이 집에서 벌어졌고 이 집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나, 지긋지긋할 정도로 악연인 걸까.

정영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없이 위로했다. 아니, 위로라고 해야 할까. 그저 모른 척하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

노트북으로 자취생들 카페를 뒤적였다. 부동산에 전화해 방을 내놓긴 했지만, 일주일 안으로 정리하려면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다행히 건대 근처라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쪽지를 남겨두고 노트북을 껐다.

쓰던 방은 오전에 이미 깨끗하게 정돈했다. 그래 봤자 시트를 갈고 이불을 세탁실로 옮긴 정도였다. 나머지는 내가 굳이 손을 댈 필요는 없었다. 방에 있던 캐리어를 현관 앞으로 옮겼다. 캐리어가 기우뚱 자꾸 움직였다. 뒤집어보니 너덜거리던 바퀴가 아예 부러져있었다. 세 발이 된 캐리어가 기우뚱 선 꼴이 초라했다. 너나, 나나 좋은 꼴로 나가진 못 하는구나. 흠집이 심하게 난 몸통을 때리자 텅텅 빈 소리가 났다. 든 거라고는 첫날 가지고 왔던 겨울 외투, 여벌의 옷뿐이라 캐리어 안은 빈 공간이 더 많았다.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한 부엌은 고요했다. 남은 사람은 서넛이었다. 아는 사람은 역시나 없었다. 여기서 인사를 나눌 사람이라곤 니콜뿐이었다. 그러나 저녁 내내 니콜은 저택에서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3개월 동안 지냈지만, 나는 그녀와 별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니콜은 워낙 말수가 적었다. 게다가 한국말이 아직 서투른 걸 알다 보니 필요한 요구만 영어로 주고받았는데, 그마저도 내 영어 실력이 유창하진 않아 대화는 단답으로 이뤄지곤 했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가려 했는데. 아쉬운 대로 메모지에다 잘 있으라는 간단한 인사를 쓰고, 영양제 통에 붙여 창고에 놔뒀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나름의 성의였다.

나가기 전에 서재를 한 번 확인했다. 새로 주문한 화분은 다행히 이번엔 시들지 않았다. 한 바퀴 둘러보고서 내려오니 밤 10시였다.

성재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정영호 말로는 회사에서 업무를 마저 보고 늦게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래도 10시까진 안 오는 건 지나치지 않나. 어제 식사도 안 했는데 잠은 제대로 잤을지 모르겠다. 혼자 골몰히 생각하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내가 성재현 걱정할 팔자냐. 그 남자는 뭘 해도 잘 먹고, 잘 살 터였다. 너무나도 완벽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지 않은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니면 이것도 직업병의 일종으로 쳐야 하는 건가. 혼자 실실 웃던 나는 정원을 느릿느릿 걸었다.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린 잔디에서 풋내가 넘실거렸다. 연못에 드리운 빛이 물결을 따라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여름의 문턱이었다. 머지않아 저쪽 담장에는 장미가 만개할 테고, 가지마다 파란 잎이 빛이 스며들 틈도 없이 무성하겠지.

밤에 젖어든 고요한 정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대 회장 때부터 공을 들여서 키운 정원수, 화단은 사시사철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처음 여기 왔을 때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매일 삼성동에 갔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핀 풀꽃을 가지고 놀면서 하염없이 외할머니와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나는 가로등 아래에 섰다. 커다란 나무, 그리고 환하게 불 켜진 온실이 보였다. 온실에 불을 켰었던가. 점심때 상태만 확인하러 들렀었다. 전원을 건드린 기억은 딱히 없는데. 턱이 낮은 언덕을 올랐다. 거대한 유리 온실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봤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햇볕이 들어오는 것 때문에 착각하고 불을 안 끄고 나왔나.

“여기서 뭐 해요?”

불쑥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듯해 가슴을 쓸었다. 성재현이 문 옆에 서서 싱긋 웃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온 거지. 입차 신호는 듣지도 못했는데.

“언제, 오셨어요?”

“음, 저녁에?”

“저녁에…?”

“아마 한 시간 정도 됐으려나. 일부러 저택 밖에서 내렸어요. 조용히 들어오려고.”

그래서 입차 신호가 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재현이 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택이 아무리 넓다지만 이곳이 산이나 숲속도 아닌데 말이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성재현이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짜 내가 온 줄 전혀 몰랐나 보네요.”

“네.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놀라게 할 걸 그랬나.”

성재현이 작게 웃으며 농담을 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태연하고 여유로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돌아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내심 걱정했었다. 오전만 하더라도 냉랭했던 표정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온실. 불을 켠 게 전무님이셨습니까.”

“네. 강진하 씨가 나 대신 잘 돌봐줬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들어와서 보곤 하거든요.”

성재현은 내 곁을 지나쳐 성큼성큼 온실로 들어섰다. 나는 문가에서 주저하다 한 발 들어섰다. 미지근한 바깥 공기와 다르게 온실 내부는 조금 싸늘했다. 평상 온도를 낮게 유지하도록 시스템이 항상 가동 중이었다. 매끄러운 관엽 식물 중 하나를 손으로 매만지던 성재현이 나를 돌아봤다.

“정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비서실, 거절했다고.”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아쉽네요. 마음 바꿀 의향은 없는 거죠?”

호선을 그린 눈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대답해도 되는 걸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돌변하진 않을까 내심 두려운 탓이었다. 가령 어제처럼 나를 붙잡고 무턱대고 키스를 한다든지.

침착하게 그의 표정을 살피며 나는 말을 이었다.

“당장은, 없습니다. 일단은 내려가서 정리도 해야 할 거 같고요. 전무님께서도 저를 이렇게 생각해주셔서 기쁘지만, 더 출중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완곡하고 정중한 거절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장례 치른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내려가서 정리도 해야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나도 아버님 일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해요. 꽃이라도 보내려 했는데, 그때 강진하 씨가 조화는 전부 거절했다고 해서요.”

“생각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보내드릴 수도 있었고요.”

대답을 얼버무리면서도 나는 혹여나 그가 권재림에 대해서 묻지 않을까 걱정했다. 게다가 어째서 성재현이 권재림에게 장례식장을 흔쾌히 알려준 건지도 의문이었다. 눈치를 전혀 못 챈 건가. 아니면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건가. 골몰히 신경 쓰다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성재현의 일거수일투족에 자꾸 집중하고 귀 기울이고 있었다. 숨소리, 심장 고동, 성재현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지.

여기서 나가면 얼굴도 안 볼 사람이다. 설령 성재현이 창원까지 나를 만나러 온다 해도 나는 그곳에 없을 예정이었다. 창원에서 일할 적에 거래처로 메일을 주고받던 일본계 무역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둔 뒤였다. 불합격을 예상했건만 운 좋게도 답장이 왔다. 시간 날 때 면접을 보러 와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향후 10년 정도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의 이 순간이 성재현과 마지막 한때였다.

얼어붙은 여름 속에 든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신록 속에서 성재현은 우두커니 서서 잎사귀를 쓰다듬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어떤….”

“그냥, 옛날이야기.”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창백한 손끝이 푸른 빛을 건반처럼 두드렸다.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이 온실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어요. 듣기로는 백 년도 더 된 나무라던가. 아버지는 그 나무를 싫어했지만 나는 이 층 창문에서 밤마다 이 나무를 쳐다보곤 했어요. 그러다 다섯 살 때였던가, 나무 아래에 여자가 서 있더군요. 무서워하면서도, 나는 여자가 궁금했나 봐요. 사람들 몰래 나무로 가보니, 어떤 여자가 목에 두른 줄을 붙잡고 울고 있었죠.”

자살하려던 여자. 살벌하고 스산한 이야기였다. 꺼림칙한 기분에 입술을 구겼다. 정작 그는 생긋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여자한테 물어봤어요. 누나, 왜 울어요? 여자는 나를 보고 서럽게 울었어요. 자기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나. 자기는 내 여동생을 낳아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 나는 배 속에 든 아이가 궁금했어요. 이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나 말고 없었거든요. 그런데 죽은 내 여동생 대신 생긴 아이라니, 귀하잖아요. 그런데 여자는 그 아이 때문에 죽을 생각이라더군요. 아이를 낳아도 마음껏 사랑할 자신이 없다나. 그래서 내가 제안했죠. 그럼 그거 나한테 줘요. 어차피 여기 있는 건 다 내 것이 될 텐데, 굳이 죽일 필요 있어요? 라고.”

여기 있는 건 다 내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성재현은 고개를 들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며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희미하고 창백한 어둠 가운데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말 무슨 치기였는지. 참 어이없지 않아요? 아마 그 여자도 내가 정말 희한한 애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 애가 어떨지 어떻게 알고 갖고 싶다고 했을까요? 배를 갈라 꺼내볼 수도 없는데도요. 그런데, 손에 쥐고 보니 생각보다 더 괜찮더군요.”

“…….”

빗물을 머금은 바람이 등 너머에서 슬며시 불어왔다. 시선을 들었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창이 보였다. 듬성듬성 맺히던 창문이 뿌옇게 흐려지고 사방은 빗소리로 물들었다. 성재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거짓말이에요. 겨우 네 살이었을 때 일인데, 여태 기억할 리가 없죠. 안 그래요?”

단정하게 몸을 세운 성재현이 손을 털었다.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며 걸어오는 소리가 묵직했다. 저릿해진 손끝을 꽉 쥐었다. 하나밖에 없는 길을 걸어오듯 그는 내게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옆에 멈춰 선 그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타닥타닥, 어느덧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커져 있었다.

“비도 오니, 슬슬 들어갈까요.”

대답 없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 성재현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내일부턴… 모든 게 많이 바뀌겠네요.”

그가 생긋 웃었다. 야릇한 미소였다.

살며시 손을 거둔 그가 서서히 멀어진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성재현이 지금 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아이를 갖고 죽으려 했다던 여자. 왜 그 여자가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릴까. 이마저도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내 앞에서 한들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쿠구궁, 천둥이 하늘을 힘차게 두드렸다. 사방이 비와 물안개로 흐려진 가운데 또 다른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온실 문이 닫혀있었다. 조짐이 불길했다. 나는 급히 문으로 달려갔다. 문고리를 잡고 힘껏 당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온실 밖에는 성재현이 있었다. 그는 문 너머에 있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갸름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눈앞에 있는 광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절정을 맞은 것처럼 환희에 찬 얼굴.

등골이 쭈뼛 섰다.

“씨발, 문 열어!”

나는 소리 지르며 두 손으로 온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안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주먹으로 문을 세게 두드렸지만 깨지지 않는다. 머리가 울렸다. 눈을 찡그렸다. 문에 이마를 기댄 내 앞으로 성재현이 살짝 몸을 숙였다. 입술이 벙긋거렸다.

그럼, 잘 자요.

평온한 밤 인사.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집어 든 성재현이 등을 돌렸다. 창백하게 질린 손으로 문을 두드리던 나는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성재현!”

목에 비린 맛이 날 정도로 소리 지르며 문을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 어떤 짓을 해도 열리지 않을 것처럼 견고했다.

두드리는 힘이 서서히 약해진다. 문을 짚은 손바닥을 느리게 내리쳤다. 열어, 제발, 날 내보내 줘. 빗소리가 두꺼워진다. 어둠 속에서 우산을 쓴 성재현이 나를 한 번 돌아봤다.

즐거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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