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Dancing with the death.
동이 트자마자 저택으로 차가 들어왔다. 대외용 차량으로 쓰이는 SUV는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쌀쌀한 춘풍이 코끝에 스치는 정원에서 나는 재채기를 연신 삼켰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 아래를 손등으로 살짝 문질렀다.
곧 꽃피는 3월인데도 생각보다 바깥 공기가 쌀쌀했다. 차에 올라탄 성재현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적지가 아마도 인천이라고 했던가. 공단을 돌아보는 것도 아닐 테니 어지간하면 실내에만 있겠지만 혹시 몰라 가져온 목도리를 그에게 내밀었다.
“인천은 여기보다 좀 더 추울 거 같습니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진다. 성재현은 검은색 민무늬 목도리를 빤히 내려다봤다. 필요 없다는 건지, 아니면 이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눈길이었다.
“나한테?”
그럼 또 누가 있다고. 입 밖으로 괜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 전무님.” 하고 대답하니 비로소 성재현이 내게서 목도리를 받아 들었다.
“못해도 아홉 시는 넘어야 올 거예요.”
“네.”
“오늘 저택에 따로 방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네.”
“그렇다고 강진하 씨 쉬는 날이란 건 아니고요.”
“…네.”
얌전히 대답하는 나를 바라보던 성재현이 손가락을 까딱여 나를 불렀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올 때까지 얌전하게 집 보고 있어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
“좀 더 자야겠네. 눈이 토끼처럼 빨개서 내가 울린 거 같잖아요.”
눈 밑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그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스르륵 올라간 창문에 얼빠진 내 표정과 발긋한 눈이 비쳤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내가 무슨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나는 집 안으로 돌아왔다. 성재현이 하루 종일 외출하다 보니 직원들도 대부분 오전 근무만 하거나,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한산한 저택이 더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의자에 앉아 먼지 하나 없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부상 후유증이 어느 정도 나아진 성재현은 전처럼 집에만 머물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는 선릉 본사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느리긴 해도 목발이나 부축 필요 없이 걸을 수도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나를 상직 근무로 바꾼 걸까. 고민해 봤자 한 가지 결론뿐이었다. 빚을 갚아준 대가로 서로 나눈 터부를 완벽하게 밀폐하려는 속셈. 그게 아니라면 성재현이 굳이 이렇게 결정할 이유가 없었다.
새벽 내내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피곤했다. 벽이든 어디든 머리만 눕힐 수 있다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처럼 나른하고 졸렸다. 눈가를 비비면서도 나는 졸음을 쫓으려 부산하게 움직였다.
부엌에는 니콜이 혼자 간단하게 식사 중이었다. 입가를 훔친 그녀는 내게 커피와 갓 만든 스크램블드에그를 권했다. 그 밖에도 크루아상, 청포도를 비롯한 각종 과일, 그릭 요거트 등등. 성재현도 없는데 음식이 넉넉하다 못해 풍족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 차려둔 만찬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미리 준비해뒀던 아침이었을까.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도 삼성동 저택은 모자란 게 없다 못해 지나치게 뭐든 많은 곳이었다.
크루아상을 찢어 입 속에 밀어 넣으며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어머니에게 답장이 없었다. 이제는 화가 아니라 걱정이 앞섰다. 실종 신고라도 해야 하려나. 큰외삼촌한테 전화해서 연락 온 적 있냐고 물어보는 게 좋을까. 탐탁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꼴이 되었을 때도 자기 회사에 악영향 주지 말라면서 문전 박대하던 인간한테 어머니에 관해 물어본들 구시렁대기만 할 게 뻔했다.
드르륵, 진동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였다.
[어디야]
주어도 없는 세 글자인데도 보자마자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누가 보낸 문자인지 알 거 같았다. 권재림이었다. 답장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덮어두고 빵을 우물거렸다. 드르륵, 진동 드라이버처럼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린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우수수 도착해 있었다.
[어디냐니까], [전화 일부러 안 하는 거야 나 전화한다 이러면], [나 떼쓰는 애처럼 만들지 마].
떼쓰는 건 잘 아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핸드폰 번호는 아무래도 주인을 잘못 만난 거 같다. 독촉하는 연락만 몇 개를 받고 사는 건지.
[일해 바빠 무음으로 바꿀 거야 전화해도 안 받으니까 그만 좀 해]
그런 다음 아예 번호를 차단했다. 이러면 권재림도 제풀에 지쳐서 그만두겠지. 부디 그러길 바랄 뿐이었다.
**
정영호가 나서기 전에 내게 서류 하나를 부탁했다. 급한 건 아니라 했지만 빨리 처리할 겸 경비실에 외출하겠노라 알렸다. 성재현이 귀가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마치고 싶었다. 허투루 외출하기도 번거로우니 오늘 같은 날이 적당했다.
오늘 내가 알기로는 성재현의 스케줄은 특별히 대단한 건 없었다. 회의가 있어 퇴근 시간 전까지 회사에 계속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9시는 넘어야 귀가한다고 내게 직접 말해 줬다. 어디 잠깐 방문할 곳이라도 있나. 현재 성재현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공식적인 자리도 최대한 피하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당일 변경되거나, 새로 추가되는 등 유동적인 스케줄이 좀 더 잦아졌다. 정영호도 따로 말한 게 없으니 나한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걸 수도 있고.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했던지라 더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겹친 탓에 우체국은 인산인해였다. 번호표를 뽑고서 대기석에 앉자 잠이 슬슬 밀려왔다. 근래 쪽잠으로 연명했더니 걸핏하면 잠이 와서 미칠 지경이었다.
등기를 부치고서 가까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테이블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근무 중에 땡땡이를 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저택에 가봤자 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집도 아닌 데서 자는 것도 불편했다.
궁상맞기 짝이 없다. 집에도 못 가고, 남의 집에서 잠도 못 자고. 낡은 패딩을 베개 삼아 엎드린 채 한숨을 훅 내뱉었다. 어머니한테는 아직도 문자가 없다. 정말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가. 은행에서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니 체크카드 인출 흔적이 있었다. 이틀 전에 30만 원을 빼간 걸 보면 분명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뭔가 사고가 났거나, 아니면 사고를 쳤거나.
어머니는 집과 땅을 담보로 빚을 지고도 아버지한테는 생활비에 썼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우겨댔다. 황명수가 기어코 집에 들이닥친 후에야 외삼촌이 꼬드겨서 투자했다가 죄다 날려 먹었고 그걸 또 무마한다고 어디서 사채를 끌어쓴 거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머니랑 연을 끊고 싶었다.
그 순간을 돌이킬 때마다 다시금 어머니가 증오스러워졌다. 한때는 어머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악독한 상상도 수차례 했다. 그런데도 핏줄은 핏줄이라고, 이렇게 소식 하나 없을 때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안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는 게 싫기도 했다.
이러든 저러든 나는 어머니를 쉽게 버리지 못할 터였다. 끔찍하게 미워도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였다.
큰외삼촌한테 문자를 넣었다. 어머니랑 연락했냐는 내용이었다. 답장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삭제하든지, 무시하든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전화라도 하겠지. 좆같이 보는 조카라고 해도 자기 친여동생 유산까지 다 뜯어갔던 몹쓸 짓이 미안하다면.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선다. 여섯, 일곱 정도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남승혁이었다. 같이 앉아있던 사람들은 연수원 동기들인지 분위기가 점잖으면서도 화기애애했다. “그럼 나머지는 내일 마저 진행해요.” 종이 뭉치를 탁탁 정돈하고 마신 커피를 치우는 사람들 가운데서 코트를 챙기는 남승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불러도 되려나 고민하다 눈이 마주쳤다.
곤란한 얼굴이다. 마치 여기서 나와 맞닥트리면 안 된다는 듯한, 당혹스러운 표정. 우뚝 서 있던 남승혁을 보고 다른 남자가 툭툭 팔을 쳤다. “승혁 씨, 안 가?” 하고 말을 붙이자 그는 어, 어, 하고 뭉뚱그린 대답만 하며 일행과 카페를 나섰다.
내부 온기 때문에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지그시 바라봤다. 날 못 알아봤나. 하기야 이런 데서 나랑 마주친다고 생각하진 못했을 터였다. 남승혁이 알고 있는 내 거주지는 자양동이었고 여기는 서초동과 논현동 사이였다. 그래도 슬쩍 문자 넣어서 물어볼까.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아예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 신호가 가더니 연결이 되었다. “응.” 하고 받는 목소리에 바깥 소음이 섞였다.
“승혁아. 아까 전에 카페에….”
달그랑, 종이 울리면서 훤칠한 남자가 들어섰다. 남승혁이 핸드폰을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식은 커피를 치우고 카페를 나섰다.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말없이 걸었다. 남승혁도 내 옆을 나란히 걸었다. 그러다 남승혁이 나한테 “미안.”이라고 갑작스럽게 사과의 말을 꺼냈다.
“뭐가 미안한데.”
“아까… 모른 척한 거.”
빵, 하고 클랙슨이 서럽게 울린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뭐 네 연락 일부러 피하고 그랬는데 무시할 수도 있지.”
“무시한 게 아니라, 그게 상황이 좀 그랬어.”
남승혁이 내게 내민 건 판결문 사본이었다. 날짜와 사건번호가 익숙했다. 10년 전 마약 밀수입 관련 형사재판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해당 사료는 우리 아버지 판결이었다.
특검까지 구성해 가며 일대를 소란하게 만들었던 사건이니 연수원에서도 입에 오를 건 예상했지만 남승혁 손에 들린 걸 보니 입맛이 떫었다.
“실무 수습 때문에 소송서류 재작성 중이거든. 하필 나온 케이스가 이거라서….”
“근데 왜 다시 왔어?”
“아까 너, 표정 되게 서운해 보였어.”
“지금 네가 변명하는 게 더 서운해.”
“그래도 이야기는 해야 오해를 안 할 거 아니야. 내가 널 잘 아는데. 사서 걱정하는 거 뻔히 아니까.”
“승혁아….”
“난 너랑 또 틀어지기 싫고 그래서 말한 거야.”
다다다 쏘아붙인 남승혁이 두꺼운 어깨를 들썩이며 큰 숨을 내뱉었다. 무뚝뚝하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남승혁은 순둥한 구석이 많았다. 내가 남승혁 입장이었다면 도리어 오해하는 걸 서운하게 여겼을 텐데. 이러니 내가 남승혁한테 서운했다가도 결국은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일부러 힘을 푼 나는 한껏 생긋 웃었다.
“알았어. 고마워.”
그러자 남승혁이 안도한 듯 웃으면서 내 팔에 팔짱을 꼈다.
“근데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회사는?”
“아, 외근… 슬슬 들어가야지.”
“그래? 근처야?”
근처는 아니었다. 받아야 하는 서류 때문에 논현동으로 잠깐 건너왔을 뿐이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주변에 널린 게 회사라 그런지 남승혁은 곧바로 이해했다.
“그럼 나 이만 회사 들어가 볼게.”
“저녁에 시간 돼? 나 여덟 시에 끝나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성재현이 저택에 돌아오기 전에는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좀 바빠서 여덟 시에는 안 될 거 같고… 주말에 시간 비면 어때. 안 그래도 나 너한테 물어볼 것도 있거든.”
“나한테? 어떤 거?”
“음, 이것저것. 영어 학원 추천도 좀 받고. 이직 생각하고 있어서….”
“이직?”
이런. 말이 또 길어진다. 신호등 불이 초록색이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나는 서둘러 남승혁한테 손을 흔들면서 횡단보도로 뛰었다.
버스를 타고 삼성동 근처에서 내렸다. 핸드폰에 남승혁이 보낸 문자가 와있었다. [고생해]라는 세 글자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하여간 남승혁은 지나치게 착했다.
아스팔트가 깨끗하게 깔린 언덕을 오르는데 내 옆으로 차가 따라오듯이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미행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마치 동행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움직임. 그러다 평평한 길에서 내 앞을 가로막듯이 차가 멈췄다.
달칵, 문이 열리면서 그 사이로 새어 나온 방향제 향기가 찬 공기를 밀어냈다. 구두를 신은 발끝이 주춤 떨렸다.
“어디 갔다 와요?”
성재현이 웃고 있었다.
머릿속이 붕 떴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걸까. 분명히 저녁 7시에나 온다고 했는데. 지금은 5시도 채 되지 않았다. 성재현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에 정영호가 전화를 주고, 시간에 맞춰 준비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타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친다. 윤택한 가죽시트가 그의 손 아래에서 탕탕 흔들렸다. 올라간 눈매가 갸름하게 휘어져 있다. 웃고 있는데도 가면 같았다.
여기서 몇 분만 더 걸어가면 저택 현관이었다. 내 발로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였지만 타라는 권유를 거절할 명목도 마땅히 없었다. 뱀 굴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차에 올라타자 차는 비탈길을 직진하는 대신 도로 쪽으로 빠졌다. 귀갓길과 반대 방향이었다.
“전무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저녁 먹고 들어갈까 하고요.”
“아… 네.”
늦게 들어온다고 한 이유가 설마 저녁 약속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성재현과 맞닥트린 곳이 삼성동이란 게 마음에 걸렸다. 단순한 우연이라기에는 짜인 것처럼 정교한 흐름이었다. 하필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저택 진입로에서 마주치다니. 마치 내 행적을 따라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차마 나를 미행한 거냐고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 증거라고 할 만한 부분도 없었다. 그래, 우연일 수도 있지. 회사가 있는 선릉역이랑 삼성동은 그렇게 멀지도 않기도 하고. 인천에서 회사를 거쳤다가 돌아오는 길목에 마주쳤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드르륵, 진동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내 핸드폰이 아니라 성재현한테 온 연락인지 성재현이 핸드폰을 열어 보는 게 곁눈질로 보였다. 나는 말없이 문자를 읽는 그를 살폈다. 목에 감은 검은 목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내가 챙겨준 목도리였다. 줄 때는 시큰둥해 보였는데, 오늘 갔던 곳이 추웠던 걸까. 일기예보를 보고 급히 준비한 건데 다행히 쓸모 있었구나. 슬쩍슬쩍 그를 관찰하고 있노라니 성재현이 핸드폰을 내려두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강진하 씨는 어디 다녀왔어요?”
아까 했던 질문과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맞잡은 손가락을 주물렀다.
“우체국, 다녀오던 길입니다.”
“우체국?”
“네. 정 비서님이 오전에, 부탁하신 등기가 있는데… 오늘 두 분 안 계실 때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정 실장님, 그랬습니까?”
가림막 너머로 정영호가 목을 긁듯이 헛기침을 하더니 “예.”라고 대답했다. 짧고 굵은 긍정에 성재현이 음, 하고 숨소리를 뱉었다. 무릎에 둔 손을 깍지낀 그가 내게 몸을 기울였다. 쌍꺼풀이 얇게 진 눈 속, 동공이 검다. 고인 핏물이 말라붙은 것처럼 진득한 색이었다.
“그거 말고는요?”
“네?”
“나한테 더 할 말 없어요?”
탐지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방향제와 향수 냄새가 팽팽하게 섞인 차내 공기는 히터 때문에 미온했다. 온기를 머금은 냄새를 들이마실 때마다 목이 깔깔해졌다. 입속의 혀를 굴리다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입이 안 떨어져요?”
몸을 바짝 당긴 성재현이 손가락으로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아양 떨어보라고 기회를 줘도 못 하네.”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살짝 짚는다. 무게가 실리는 감각에 허벅지를 움츠렸다. 내 귀를 핥을 것처럼 입술을 가까이 댄 성재현이 사근사근 속삭였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라든지. 보고 싶었다든지. 그런 귀여운 말, 많잖아요. 응?”
귀여운, 에서 억양이 무겁고 나른하게 실렸다. 허벅지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안쪽 살을 약하게 비비는 손끝에 숨을 참았다.
“다, 녀오셨습니까.”
“응. 오늘 목도리를 챙겨줘서 안 추웠어요.”
손으로 짚은 내 허벅다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성재현이 귓불을 깨물었다. 움찔, 어깨가 떨렸다.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반응조차 재밌는지 성재현은 내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로 키득거렸다.
“긴장돼요? 내가 만져서?”
“아닙니, 다.”
“그런데 여기는 벌써.”
손이 우악스럽게 내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섰는데.”
“아.”
중지를 뻗어 아래쪽을 툭 건드리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가 입술에 박힐 정도로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가림막으로 운전석과 칸이 나뉘어 있다고 해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전무님….”
그다음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머릿속을 더듬었다. 울상을 지은 나는 힘없이 그에게 말했다.
“제발… 여긴, 싫습니다.”
갸륵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통한 걸까. 다행히 성재현은 거기서 더 이상 수모를 주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손을 치운 성재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다.
“잘하네요. 아양 떠는 거.”
피식거리는 그를 외면하며 나는 굼벵이처럼 등을 구부렸다. 닥치는 대로 주기도문, 애국가를 속으로 되뇌었다.
세단이 멈춘 곳은 논현동에 있는 일식당이었다. 번화가에서 흔하게 보이는 초밥, 스시 전문점은 아니었다. ‘白雲’이라는 한자가 간판 아래 흰색과 검은색으로 무장한 외관은 은밀하고 고요했다.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성재현이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전처럼 누군가 부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식당 현관에는 머리를 쪽 진 중년 여자와 함께 남자 여럿이 일렬로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전무님.”이라고 인사를 건넨 여자가 정중하면서도 익숙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전에 모셨던 방으로 내드리면 될까요.”
“어디든 조용한 곳이 좋겠죠.”
빙그레 웃는 얼굴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몇 분도 되지 않아 방이 준비되었다며 여자가 출입문을 열었다. 당연히 수석 비서인 정영호가 따라가리라 여기고 차 옆에서 대기하던 내게 성재현이 눈짓했다.
“이리 와요.”
“하지만 정 비서님도 계시고….”
“지금 시간부터는 강진하 씨가 날 책임져야죠.”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부른 성재현이 앞장섰다. 정영호를 쳐다봤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문제 생기면 연락하세요.” 그 말이 전부였다.
대나무가 촘촘하게 꽂힌 작은 정원에 물이 졸졸 흐른다. 지나치는 직원들은 발소리마저도 작았다. 미닫이로 된 문 안에 들어선 성재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직원의 눈짓에 따라 들어서긴 했지만 차마 맞은편에 앉을 수는 없었다. 뜨겁게 삶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성재현이 나를 올려다봤다.
“스시 싫어하진 않죠?”
물음이 아닌 재확인이었다. 지극히도 자연스럽다. 내 기호와 취향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저벅저벅 작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보자마자 나는 토기를 억눌러야만 했다. 희끗희끗 백발이 섞인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넘긴 중후한 남자는 남경욱이었다. 대검찰청 차장이자 검사장이었으며, 남승혁의 친아버지였다.
성재현을 향해 정중하게 묵례한 남경욱이 입을 열었다.
“전무님. 여기 계신단 말씀 듣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오랜만이네요. 남경욱 검사장님. 아, 이제는 후보님이라 불러드려야겠군요?”
“하하, 아직 공천이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쌍꺼풀이 없는 싸늘한 눈매가 호선으로 휘어진다. 성재현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권유에 망설임 없이 앉으려던 남경욱이 나를 발견하고는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실례지만 전무님 일행이 계셨습니까?”
“이런. 생각해 보니 자리가 모자랐군요.”
성재현은 안타깝다는 듯이 작위적인 한숨을 쉬었다. 방을 안내했던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자리를 둘러본 남경욱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전무님 식사 자리에 방해되는 거 같으니 저는….”
“아뇨. 남 검사장님 때문에 내가 일부러 시간 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앉으세요.”
명령하는 듯한 성재현의 말투에 남경욱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그는 성재현보다 나한테 호기심이 가는 눈치였다. 정장도, 넥타이도 싸구려인 내가 성재현 옆에 있는 이유가 뭘까, 하고 궁리하는 게 무뚝뚝한 표정 너머로 보이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누군지는 못 알아본단 점일까.
“두 분 식사에 방해되실 테니 나가보겠습니다.”
껄끄러운 자리를 피신하고자 서둘러 나가려던 나를 성재현이 붙잡았다.
“진하 씨는 어디 앉는 게 좋을까.”
“전무님, 저는….”
“여기 앉으면 되겠네요.”
성재현이 가리킨 곳은 그의 다리 사이였다. 남경욱이 보는 앞이었다. 치욕감에 귀가 달아올랐다. 허벅지를 툭툭 내리친 성재현이 눈썹을 모았다.
“왜? 싫어요?”
“…손님 계시는 자리입니다. 보기 껄끄러울 거 같습니다.”
“남 검사장님, 이게 껄끄러우십니까?”
화살이 남경욱에게 돌아간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얼굴은 서슬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목을 잘라 버릴 터였다. 남경욱은 당황한 얼굴로 험험, 헛기침한 다음 억지로 활짝 웃었다.
“아닙니다. 전무님.”
기어코 허락을 받아낸 성재현은 생글거렸다.
“상관없다고 하는데.”
“…….”
나는 말없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더 심기를 건드렸다간 또 어떤 말을 꺼낼지 몰라 얌전히 그의 자리 옆에 앉았다. 그러자 성재현은 내 허리를 콱 잡아당겨 부득불 허벅지 위에 날 앉혔다. 불편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자꾸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 움찔거리지 말고요.”
불편해하는 나를 달래듯 성재현이 등을 쓰다듬었다. 남경욱은 차만 연신 들이켜며 나와 성재현을 숨죽여 관전할 뿐이었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접시 하나 허투루 쓴 게 없는 정갈하고 기품있는 상이었다. 젓가락을 쥔 남경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가 먼저 뵙고 새해 인사도 드렸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 검사장님이 오늘 이쪽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일부러 왔는데. 다행히 타이밍이 잘 맞았네요.”
“그러셨군요. 참으로 전무님과 잘 통해서 기쁩니다.”
껄껄 웃는 얼굴은 함박웃음을 짓느라 주름이 가득 졌다. 3년 전 남경욱은 대검찰청 검사장직을 내려두고 ‘새마음한국당’, 줄여서 새마당의 당원으로서 정치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30대 초반에 불과한 성재현한테도 남경욱이 굽실거리는 이유는 세한의 전폭적 지지를 기대하기 때문일 터였다.
“참, 다치셨다던 다리는 괜찮아지셨습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소식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업장에 무단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전무님을 상대로 폭행이라니… 그런데도 너그럽게 선처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참 단순하고 상냥하죠. 선심 써주는 것만으로도 품격이 올라가고, 그게 브랜드 가치도 높여주니까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세한은 늘 국민과 함께 하는 기업이지 않습니까.”
허허 사람 좋게 웃던 남경욱을 보며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한겨울에 그가 사는 아파트 앞에 엎드려 빌던 나를 매몰차게 지나치던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하긴 성재현에게는 입속의 혀처럼 굴어야겠지. 그래야 원하는 걸 얻을 테니까.
따뜻하게 데운 사케가 나왔다. 같이 나온 술잔에 술을 따른 남경욱이 말했다.
“그런데 절 보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오셨다면 무슨 일로…?”
“별건 아닌데 그저 뭘 좀 물어보려고.”
“어떤 걸…?”
“길들이는 법에 대해서.”
“길들이는 법이라.”
“검사장님은 저보다 연륜도 높고, 그만큼 사람을 많이 다뤄보셨을 테니 잘 아실 거 같더군요.”
젓가락으로 회를 한 점 집어 든 성재현이 나른하게 말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남경욱이 대답했다.
“사람도 결국 동물이라 그런지 짐승이랑 비슷하더군요. 적당한 매질과 보상을 주는 거죠. 채찍과 당근처럼.”
“흠, 매질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하, 하긴 사람이 독 오르면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그래서 칭찬과 훈계를 병행하는 게 정통이겠죠.”
“그래서….”
그 순간 성재현은 내 넥타이 매듭을 잡았다. 그대로 확 당긴 넥타이에 몸이 반동적으로 그에게 바짝 부딪쳤다. 바둥거리는 몸을 팔로 안은 성재현이 연극 대사처럼 말했다.
“목줄을 잡아당겨서 반경을 제어하고.”
“아, 흐윽.”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걸 생각 중이에요. 잠도, 먹는 것도,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통제하는 방식으로.”
뒤통수까지 손바닥으로 누른 성재현이 쉬이, 하고 어른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대로 행동부터 숨까지 억제당한 채 나는 성재현의 손길에 지배받고 있었다. 결국 고개를 그의 어깨에 묻고 그를 끌어안았다. 남경욱과 눈을 마주칠 바에는 그게 나았다.
“내가 기분 나쁜 소식 하나를 들었는데. 비자금 관련으로 약점을 쥐고 있어서 세한이 딱히 두렵지 않다고 했다든가.”
“아니, 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그렇지. 헛소리죠. 국민과 함께 하는 기업인데 숨겨둔 돈이 어디 있겠어. 안 그렇습니까?”
내 뺨에 손가락을 가볍게 비비던 성재현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석영한테 마약 혐의 묻어주는 건으로 검찰관계자 몇몇이 돈 받아먹은 걸 비자금이라고 하면 또 모르겠네. 안 그렇습니까?”
“…….”
“아, 이런 경우에는 형법에서 수뢰라고 하던가? 미안합니다. 내가 법은 좀 모르거든.”
남경욱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긋 미소 지은 성재현이 상냥한 어투로 뒷말을 이었다.
“나는 검사장님이 좋은 국회의원이 되시리라 믿어요. 돌아가신 회장님께서도 검사장님만큼 좋은 인재가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셨거든. 나도 기왕이면 검사장님과 계속 이렇게 식사하는 사이로 가까이 지내고 싶고요. 그러니까 더더욱, 내년 선거 앞두고 조심하셔야죠. 십여 년 전 특검으로 맡으셨던 사건부터 줄줄이 도마에 올려서 청문 당하면 피곤하지 않겠어요? 그동안 벌린 판이 너무 많을 텐데.”
“…예. 그렇죠.”
남경욱은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마저도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짠 것처럼 힘겨운 어투였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보좌관이 들어왔다. 사모님께서 부르신다는 전언을 듣자마자 그는 도망칠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식사 감사했습니다. 전무님, 오늘 주신 충고 벗 삼아서 힘껏 뛰겠습니다.”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은 남경욱이 보좌관이 열어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성재현이 뒤늦게 말했다.
“가시기 전에 충고 하나 더 해드려도 될까요?”
“…뭐든지 감사합니다.”
“검사장님 자제분 중에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그래, 남승혁.”
익숙한 이름이 성재현에게서 튀어나오는 순간 나 또한 경기라도 하듯 몸이 떨렸다. 성재현이 젓가락을 탁탁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탁탁, 하는 소리가 냉엄하고 살벌했다. 남경욱은 들어선 안 될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굳어있었다.
“제 아들은, 어쩐 일로 이야기하십니까.”
“아들분께서 남이 키우는 애완동물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거 같거든요.”
“애완동물…?”
“요즘 발정기라서 자꾸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데, 남승혁 씨가 그걸 건드렸더라고.”
떨지 않으려 주먹을 힘껏 쥐었다. 침을 꼴깍 삼킨 남경욱이 입매를 우그러트리며 나를 노려봤다. 경박한 걸 나무라는 듯한 날이 선 눈동자였다. 탁, 젓가락을 내려둔 성재현이 뒷말을 이었다.
“내가 굳이 나서는 수고로움은 없으면 좋겠네요. 이해하시겠죠?”
“…….”
장지문이 닫히고 쿵쿵거리는 발걸음이 급하게 멀어졌다. 남경욱의 기척이 멀어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고개를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런, 꽤 성급하시네. 고작 이런 걸로도 놀라 도망가면, 앞으로 의원직 얻어도 견제하느라 피곤하겠는데.”
가만가만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성재현이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그럼 우리는 식사나 마저 할까요.”
젓가락으로 살점 하나를 집어 든 그는 묵묵히 입에 넣고 씹었다. 이 사이로 살코기가 질깃거리며 씹히는 소리가 섬뜩했다.
커다란 접시에는 배가 벌어진 붉은 도미가 아직도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숨을 쉬어도 숨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폐허 같은 모습이 나를 보는 듯했다. 차갑게 식힌 물 냄새가 피비린내 같아 속이 뒤틀렸다.
“또 입맛이 안 돌아요?”
성재현은 젓가락을 집지 않은 왼손으로 내 등줄기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생긋 웃었다.
“하긴 사실 맛은 그저 그런 곳이지. 여기서 끝까지 식사하고 가는 사람은 드물 정도거든요. 다 중간에 침묵하고 나가버리거나.”
“…….”
“눈앞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구분도 못 해서 장식까지 씹어먹거나.”
성재현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퍽 재밌다는 듯 두 눈이 반짝였다. 나는 지금 내가 어떤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두려운지, 아니면 경멸하는지. 그도 아니면 무엇으로 그를 대상화하고 있을지.
성재현은 풍성하게 차려진 상을 골고루, 조용히 맛봤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지런하고 깔끔한지 조금 전까지 불순한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반듯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회를 의무처럼 먹던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강진하 씨도 먹어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나 혼자 다 못 먹어요.”
두툼한 회를 손으로 집은 성재현이 내 입술에 갖다댔다.
“입, 벌려요.”
차마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휘어진 눈썹과 눈매가 조금씩 온화함을 잃었다.
“억지로 쑤셔 넣는 게 취향이에요?”
“…….”
결국 나는 입을 벌리고 그가 주는 회를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양념 되지 않은 날것에서 피를 머금을 때나 느끼는 씁쓸하고 비린 짠맛이 났다.
“잘 받아먹네.”
그는 내 순종을 칭찬했다. 보상하듯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깔깔한 입술을 혀로 핥은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숨을 죽이고 부유하던 문장을 목소리로 읊었다.
“남경욱 검사장님을… 일부러 여기로 부르신 겁니까.”
“일부러?”
태평한 얼굴이 도리어 되묻는다. 순진한 냉혈이었다. 나는 두 눈을 쏘아보듯이 응시했다.
“오늘 오후에… 제가 남 검사장님 자제분이랑 만난 거 알고 그러신 거냐고 여쭙는 겁니다.”
“아… 그랬어요, 강진하 씨?”
구태의연한 대답은 의도적이었다. 그는 예, 아니요, 같은 간단한 말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백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덫처럼 내놓은 말이란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밟아버린 지뢰였다.
“남승혁은… 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라 전무님께 굳이 말씀드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체국에 일 때문에 들렀던 건 사실이고요.”
성재현은 내 말이 이어지는 내내 입에 든 요리를 씹었다. 맥박과 호흡, 가슴팍이 들썩거리고 음식물을 삼키는 소리까지 가까이 들릴 만큼 적막으로 들어찼다. 이윽고 성재현이 젓가락을 내려뒀다.
“그래서 왜… 갑자기 변명하지?”
“전무님.”
“내가 언제 강진하 씨 사정을 설명하라고 했던가요?”
“먼저 꺼내신 이야기니까 제가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
“내가 남승혁을 해코지할까 봐 겁나나 봐요?”
“…….”
그의 말은 직설적이고 적확했다. 성재현이 남승혁 이름을 대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두려움이었다. 왜, 어째서, 같은 의문은 중요하지 않다. 성재현이 남승혁한테 불온한 관심을 가진단 것만으로도 발끝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표정 보니 정말 그랬나 보네.”
등줄기를 따라 내려온 손바닥이 엉덩이를 꽉 그러잡는다. 바지 사이로 손이 밀려들어 온다. 손바닥은 미지근하다 못해 차가웠다.
“검사장 출신 부친의 후광까지 입은 예비 검사님이신데, 적으로 돌리면 피곤한 일이죠. 나는 그저 곧 여의도에 입성하실 분한테 괜한 소문 돌게 하지 말라고 충고나 해준 거고.”
“흡.”
“요즘은 별 잡음도 안 나는 것으로도 국감 내내 시비를 걸거든.”
“앗, 흐윽.”
그가 내 귓불을 날고기 씹듯 억세게 깨물었다. 아팠다. 소름 끼치는 통증에도 비명조차 삼켰다. 잇자국을 따라 핥던 혀끝이 내 뺨을 스쳤다.
“그런 건 신경 쓰면서 내가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는 건 부정도 안 해요?”
“잡초든 애완동물이든… 전무님과 동등한 인격체는 이미 못 되지 않습니까. 전무님께 저는… 이십억짜리 무언가일 텐데요.”
여과 없는 빈정거림이었다. 하지만 지적할 부분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잡초라고 했고, 암캐라고 했다. 내 의견은 묵살되어도 상관없는, 숨만 부지하는 생명체. 그 말에 성재현이 잠자코 나를 바라보다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건 그렇죠. 어디다 강진하 씨를 내 애인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
“그런데도 본인한테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싸구려를 산 기분이네.”
바지 사이로 쑥 들어온 손이 예고도 없이 둔부 골을 쑥 파고들었다. 젖지 않아 뻑뻑한 입구 주변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가락의 단단한 이물감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헛웃음을 터트린 성재현이 말했다.
“대체 이 구멍에 몇 명이나 쑤셔 박았을까. 살짝 쑤시기만 해도 엉덩이를 이렇게 흔들어대는데.”
“아윽, 흑.”
“남승혁한테도 다리 벌려줬어요? 아니면… 남 검사장한테?”
그만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어떤 말도 신음처럼 흩어질듯해 그저 이를 악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그런 적 없다는 필사적인 부정이었다. 아래를 마구잡이로 쑤시던 손을 멈춘 성재현이 내 눈에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는 말했다.
“벗어요.”
“전무님.”
“확인해 볼 거니까 벗으라고.”
맹렬한 으름장이었다. 두 눈을 마주 보던 나는 눈을 내리깔고 넥타이 매듭을 잡아 풀었다. 성재현은 서서히 전라가 되는 나를 묵시하고 있었다. 피부 표면으로 그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아…!”
바지를 벗기도 전에 성재현이 나를 식탁에 깔아뭉개듯 눕혔다. 주변으로 식기가 쏟아졌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던 주광 조명이 내게 초점을 맞췄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가빴다.
“그래, 메인 요리가 된 기분은 어때요.”
“하, 윽.”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나를 짓누른 성재현이 씩 웃었다. 손에 쥔 날카로운 젓가락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성재현은 젓가락으로 내 입술 아래를 가만히 짚었다.
“먹음직스럽네.”
“아, 하으.”
“산 채로 잡아먹어 버릴까.”
금속 젓가락의 가늘고 차가운 감촉이 피부 위를 오싹하게 쓸어내렸다. 목을 타고 쭉 젓가락을 그어 내린 성재현은 유두를 젓가락으로 힘껏 집어 위로 쭉 당겼다.
“특히 여기.”
“아.”
“빨고 싶게 생겼어요.”
뾰족하게 솟은 살집을 젓가락 선단으로 꾹 찌르고 홈을 간질였다. 얼얼한 통각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색도 붉어서 예쁘거든. 민감하게 잘 반응하고.”
“히으, 읏.”
장식된 요리를 헤집는 것처럼 성재현은 내 몸 여기저기를 집요하게 젓가락으로 더듬었다. 눈앞을 뒤흔드는 빛의 입자가 뿌옇다. 오므린 다리를 우악스럽게 벌린 성재현이 젓가락으로 내 다리 사이를 쿡쿡 찔렀다.
“맛을 어디부터 봐야 하려나.”
머지않아 찰캉, 하고 젓가락이 떨어졌다. 그는 내 몸을 깊숙이 누르고 부어올라 벌겋게 표식이 남은 살결을 까칠한 혀로 마구 핥아댔다.
“아, 아응…!”
쪽, 쪽. 살을 빨고 핥는 소리는 추저분하고 게걸스러웠다. 성재현은 내 몸을 두 팔로 꽉 누르고 하염없이 내 가슴과 배를 깨물고 빨아대기 급급했다. 체액이 피부 위에 맺히고 살갗을 후룩 하고 삼키는 소리는 걸신들린 듯했다.
“아… 아, 전무, 니, 으응, 흑.”
나는 성재현의 머리를 밀어내려 버둥거리는 한편 내 가슴과 옆구리를 샅샅이 핥아대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쥐고 헐떡였다. 뺨이 뜨겁다. 눈 아래에 숯을 댄 것만 같았다. 소매로 입을 가렸다. 목에서 끓어올라 매캐해진 숨을 헉헉거리며 내뱉고 들이쉬었다.
미닫이문 한 겹만을 두고 바깥에서 종업원들이 지나다닌다. 졸졸 흐르는 물이 가득 고일 때마다 긴 대나무 통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북처럼 울렸다. 성재현은 내가 발발거리며 떠는 곳을 맥 짚듯이 입술로 빨아댔다. 누군가가 문가를 지나갈 때마다 숨은 막히는 한편 오금은 짜릿하게 저렸다.
“아, 아아.”
내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그가 혀로 아랫도리를 핥았다. 무릎을 모으려 해도 그의 머리에 가로막혀 좁혀지지 않는다. 성재현은 시럽을 잔뜩 묻힌 접시를 핥듯이 아래에 입술과 코를 비볐다. 어딜 보더라도 고상하다고 할 수 없는, 추잡한 몸짓이었다. 체액과 침으로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다리와 팔에 땀이 맺혔다. 힘이 풀려 고개를 젖힐 기운도 들지 않았다.
“하아.”
뒤늦게 고개를 든 성재현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코 아래 인중부터 턱까지 번들번들 불그스름하게 젖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문지르더니 내게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나도 담백한 모습이었다. 성재현은 나를 그 자리에 두고 문을 열었다. 밀폐된 공간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외부의 공기가 동풍처럼 차가웠다.
열린 문 밖에는 아까 잠시 봤던 중년 여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단추가 뜯기고 엉망이 된 옷을 추슬렀지만 복원할 수 없었다. 방 안은 나만큼이나 엉망이었다. 묵묵히 안을 둘러보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여자는 나를 보더니 공손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런 난장판이 익숙하다는 듯이 무미건조했다.
**
주중 회의가 잡혔다. 저택 회의실로 모여든 전략실 임원들로 주차장에 네모반듯한 세단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날이 많이 풀려 볕 아래 잔디는 파릇파릇했고 가동을 중단했던 분수에서 물이 줄기차게 터져 나왔다.
열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회의실에 여덟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들 앞에는 간단한 다과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간단하다고 해도 세한호텔에서 일하는 전문 파티셰의 솜씨였다. 먹음직스러운 티푸드가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었지만 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많게는 마흔에서 환갑을 오가는 사내 사이에서 파릇파릇한 성재현은 독재자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눈높이인데도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날이 어제보다는 덜 춥네요.”
멍하니 창문 밖 정원을 바라보던 내게 누군가가 친근하게 말을 붙인다. 김상훈이었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에 두툼한 팔뚝이 보인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김상훈은 부끄럽다는 듯이 소매를 내리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진하 씨는 추위 탄다 그랬죠?”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 나는 창밖만 바라봤다. 냉랭한 태도에 김상훈이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음… 진하 씨 오늘 많이 피곤해요? 아침에도 말 한마디 안 하더니.”
“네. 좀… 피곤하긴 해요.”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새벽에 일찍이 김상훈과 만났을 때도 묵례만 하고 지나쳤었다. 멋쩍게 웃은 김상훈이 말했다.
“가만 보면 진하 씨는 보면 매번 피곤하다 그러더라. 진짜 몸 약한 거 아니에요? 뭣하면 홍삼이라도 드릴까요? 집에 선물로 잔뜩 받았는데 나는 이런 거 잘 안 챙겨 먹어서 아깝더라고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진하 씨, 저기!”
자리를 벗어나려는 나를 김상훈이 붙잡아 챘다. 당황한 나는 손에서 힘껏 팔을 비틀어 뺐다. 우둑, 소리가 날 정도였다. 덩달아 놀란 김상훈이 손을 뒤로 빼냈다. 팔을 움켜잡고 나는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미안해요. 좀… 놀라서.”
“아, 어, 네.”
김상훈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표정에서 ‘왜 저러지?’라고 생각하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다.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었다는 건 나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택에서는 좀 사적으로 친하게 보이는 게 좋진 않을 거 같아서요. 노는 것처럼 보인다고… 정 비서님께서 주의를 주셨거든요.”
“억? 그랬어요? 나 참, 깐깐해라. 잠깐씩 말 붙이는 것뿐인데. 그럼 로봇처럼 일만 하라고요?”
“그래도 오인받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앞뒤가 어색한 해명이었지만 김상훈은 단순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날카로운 성향이었다면 진즉 왜 나한테만 그런 지적을 했냐고 의심했을 터였다.
저택에서 일하는 동안 김상훈과 친하게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악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직원 중 한 명에 불과한 그에게 무슨 악감정을 갖겠는가. 다만, 성재현이 겁박하듯 말을 꺼낸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괜히 성재현에게 트집 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김상훈과 거리를 둬야만 했다.
정원을 지나쳐 온 트럭 한 대가 저택 출입문 가까운 자리에 주차했다. 석영재단의 마크가 새겨진 하얀 트럭에서 직원들이 내렸다. 종이와 비닐로 꼼꼼하게 포장된 그림이 트럭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전부 오늘 저택에 새로 설치할 그림들이었다. 예술품 수집은 세한그룹 전대 회장서부터 대물림된 취미였다. 성재현도 예외는 아닌지라 몇 달에 한 번씩은 미래미술관에서 가져온 그림들로 집 안에 장식된 그림으로 교체했다. 현대 미술가 사이에서는 꽤 정평이 난 작가의 그림들이었다.
문을 활짝 열 겸 직원들을 맞으려고 나간 나는 뒤에 주차된 스포츠카에 멀뚱히 눈길을 줬다. 세단도, 중형 SUV도 아닌 스포츠카였다. 임원진들은 대부분 그랜저 같은 세단을 타고 다닌다. 성재현이 차고지에 가진 개인 소유 차량 중에서도 저렇게 화려한 차는 없었다.
“어, 도착했어.”
누군가가 말했다. 저음에다 굵은 목소리는 차량 배기통이 웅웅 울리는 것처럼 세찼다. 뒤돌아봤다. 구두 아래에 푹신하게 자라난 잔디가 그의 발아래에서 마구잡이로 으깨졌다. 뚜벅뚜벅 자리를 지나친 그가 핸드폰에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탁한 그림만 주고 나올 거야. 내가 전무님 얼굴 오래 봐서 뭐 해요. 어차피 그쪽도 바빠서 나랑 대화할 시간도 없다고 할걸? 아,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관장님. 예, 예. 나 끊습니다. 바이바이.”
뚝,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권재림이 씨발, 하고 짜증 섞인 욕을 내뱉었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연히 손님으로서 온 그를 맞아야 하는 입장이건만,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기껏 집 앞까지 행차해줬는데 사람 하나 안 나오고 대체 뭐 하….”
고개를 돌린 권재림이 나를 발견했다. 분수가 차르륵 쏟아지는 소리만이 맹렬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우뚝한 콧날 위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길게 빠진 눈꼬리가 찌푸려졌다가, 이내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야….”
입술을 벌린 권재림이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활짝 열어둔 현관문으로 사람들이 나선다. 정오 회의가 끝났다. 머지않아 성재현이 아래층으로 내려올 터였다.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성큼성큼 다가온 권재림은 나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내가 맞는지, 착각은 아닌지 눈을 번뜩 뜨고는 위아래로 훑었다.
허, 하고 잇새로 내뱉는 숨이 신경질적이었다.
“뭐 해, 여기서.”
짧은 질문에는 많은 게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대답도 돌려줄 수 없었다. 그저 사무적으로 그를 응접실로 안내하려 했다.
“누가 왔나 했더니.”
현관에 성재현이 있었다.
마주 서 있는 나와 권재림을 향해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섬뜩했다.
불온한 우연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거실에 캔버스 여러 개가 한 자리에 나열되었다. 큐레이터가 그림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아주 정성스럽게 설명을 늘어놨다. 대만에서도 호평을 받은 한국계 캐나다인 작가부터 현대회화에서 신예로 주목받는 화가. 대부분 과일, 꽃 같은 정물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성재현은 소파에 앉아 눈도 안 떼고 그림에 집중했다. 반면 권재림은 삐딱하게 앉아 나만 노려보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자꾸 ‘왜’냐고 묻는다. 아마도 저 ‘왜’에는 많은 질문이 함축되어있겠지. 왜 이곳에 있느냐, 왜 성재현하고 같이 있느냐, 왜 나한테 거짓말했느냐, 등등. 나는 천연하게 정면만 봤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좋네요. 저 두 가지로 하죠.”
성재현이 손으로 캔버스 두 개를 가리켰다. 지하에 걸려있던 그림 대신이었다. 검은 바탕에 녹색 잎사귀가 덕지덕지 그려진 그림은 묘하게도 그를 닮았다. 큐레이터가 금세 준비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너른 응접실에 남은 건 나와 정영호를 제외하고 두 사람이었다. 정영호는 응접실로 들어서는 문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들어올 고용인에게는 눈짓으로 나가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지금 장난해?”
한참 만에 권재림이 입을 열었다.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에 올린 성재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내가 고른 그림이 안목에 별로인가?”
“지금 성 전무님 그림 취향 따지는 것 같아?”
“재림이 넌 미술사학 전공까지 했으니, 나보다 훨씬 전문가잖아.”
부드러운 눈매가 동그란 선으로 벌어진다. 그러다 성재현이 아, 하고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안쓰러운 웃음과 함께 그가 말했다.
“두 학기도 못 다니고 사고 쳐서 자퇴했지, 참. 마약에 폭행까지 연타라서 입막음하느라 고모님이 고생했었고.”
“이, 씨발, 무슨 개지랄 같은 소리를…!”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권재림이 벌떡 일어났다. 소파가 쿵, 하고 뒤로 밀려나고 탁자에 놓인 커피가 출렁이며 접시에 고였다. 성재현은 엉망이 된 테이블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흥분하는 버릇 좀 고쳐.”
“사람 건드린 게 누군데.”
“귀국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서 증권가에 네 이니셜이 파다하다고 고모님께서 걱정하시더라.”
“그게 전무님이랑 무슨 상관인데.”
“석영이랑 세한이랑 얽힌 혈연이란 게 깊어서. 내치려고 해도 영향이 안 갈 수가 없거든.”
차분하다 못해 냉엄한 성재현을 내려다본 권재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실룩이는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전무님 안목이 어떠냐고 물었던가? 굳이 내가 말해줄 것도 없이 저질스러운 거 본인도 알잖아.”
“저급도 아니고 저질?”
“전무님 박제 좋아하잖아.”
독설에 악담이 랠리처럼 서로를 치고받는다.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날카로운 신경전은 한편으론 섬뜩했다. 건수를 잡았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권재림을 마주하며 성재현은 입꼬리를 살긋거렸다.
“그건 할아버님이 모아온 수집품을 내가 물려받은 거였어.”
“그거 아니더라도 전무님 취향이 좀, 이상하잖아? 나는 뭐 들은 게 없는 줄 알아?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온실은 왜 갑자기 지었어? 하다 하다 이제는 식물 말려 죽이면서 즐거워하려고? 미국에서 툭하면 들에다 토끼 풀어두고 사냥하던 것처럼?”
“재림아.”
성재현이 다정하게 부르자 권재림이 눈썹을 산처럼 구부렸다.
“왜.”
“내가 너랑 아무리 이종 사촌지간이라 편하다 해도.”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권재림을 향해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눈이 가까이 닿았다.
“선은 넘지 말아야지.”
“…….”
“이렇게나 무례하게 구는데도, 내가 너라서 참고 있는 거 모르겠어?”
빙긋 웃으면서 말하지만 냉기가 뚝뚝 흐르는 경고였다. 그 말에 기세등등하던 권재림이 입을 다문다. 욕하고 싶은 표정이지만 꾹 참아 누르는 게 보였다. 나 또한 숨을 죽이고 입 속으로 혀를 굴렸다.
박제는 성재현의 말대로 돌아가신 회장님의 취향이었다. 지금은 안 보이지만 옛날에는 저택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씩은 있었다. 단편적인 내 기억 속에도 호랑이 가죽으로 된 카펫이며, 정교하게 살린 독수리나, 사슴 머리가 걸려 있던 기억이 있었다.
세심하게 세팅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긴 권재림이 툭 내뱉었다.
“하아… 그래서 진하 형은 왜 여기 있어?”
“진하, 형?”
“뭘 모르는 척해. 전무님 뒤에 있는 사람 말이야.”
“아, 이거?”
성재현이 ‘이거’라고 지칭된 나에게 손을 뻗어 소파로 바짝 당겼다.
“내가 고용했으니까 여기 있지.”
“고용? 왜? 비서실에 있는 그 많은 직원은 어디다 쓰고?”
“비서랑은 다르지. 그건 사무 영역이고, 이쪽은 쓰임새가 꽤 다양하거든. 내 넥타이를 매주기도 하고, 배웅도 해주고.”
슬슬 아래로 타고 내려온 손바닥이 내 손등을 스쳤다.
“가택 업무 보조도 손색이 없는 데다가.”
보란 듯이 내 허리를 쓸어내렸다. 성적 암시를 내포한 감촉이었다.
“관상용으로도 눈이 즐겁잖아.”
일개 장식품이 된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경욱 앞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내더니, 이제는 거리끼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두 눈을 가늘게 치뜬 권재림이 팔짱을 꼈다.
“뭐, 잘됐네. 안 그래도 나 진하 형 찾고 있었는데.”
“그래? 왜?”
“나 강진하가 좋거든.”
난데없는 충동적인 고백이었다. 돌처럼 굳은 나와 다르게 성재현은 턱을 살짝 들고 경청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린 양의 고해 성사를 듣는 사제같이 거룩하고 경건했다.
“좋다고?”
“어. 좋아해.”
확인 사살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달려들어서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고 싶다. 목을 좌우로 까딱인 권재림이 말을 이었다.
“근데 통 안 보여서 무슨 일이 났나, 어디 사고 나서 실려 갔나 싶었는데. 우리 전무님께서 삼성동 궁전에다 고이고이 숨겨뒀었네?”
그 말에 성재현이 웃으면서 꼬아 앉은 다리를 까딱 흔들었다. 팔로 얼굴을 괴고 권재림을 응시하는 눈길은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둘을 관망하며 한숨을 삭혔다. 두 왕의 발아래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과가 된 것 같았다. 문제는 황금 사과가 아니라 곪고 병들어 푸석푸석해졌다는 것이다.
“숨긴 적 없어. 내 것이라 여기 둔 거지.”
“뭐?”
“내 거라고. 네 진하 형.”
열어둔 커튼 사이로 빛이 살랑거린다. 권재림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고용한 정도로 소유물 취급이야?”
“고용한 정도가 아니거든. 강진하 씨가 나한테 빚진 게 많아서.”
“빚?”
꽉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성재현은 내 치부를 드러내다 못해 와르르 쏟아내고 있었다. 나를 힐끔 올려다본 성재현이 혀를 찼다.
“사적인 일을 자꾸 입에 담으려고 드네.”
손을 잡아당긴 성재현이 내 손가락을 가만가만 더듬었다.
“이거 봐, 강진하 씨가 곤란해하잖아.”
상냥하게 들리지만 나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성가신 걸 무마하려는 권태로운 위선이었다. 선이 짙은 이목구비를 찡그린 권재림이 그르렁거렸다.
“지랄한다.”
성재현은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악의 없이 그저 천진한 풋내기를 다루듯 귀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오히려 권재림을 고깝게 만들고 있었다. 성재현은 내 손가락을 더듬던 손을 내려 잔을 집었다. 일상적이고 평온한 풍경의 한 폭 가운데 권재림은 표독스럽게 말했다.
“지난달에 기자 피습, 그거 쇼한 거지?”
“피습? 쇼?”
“기자진 몰렸을 거, 뻔히 알면서 정 실장만 데리고 내려갔잖아. 그래서 쇼한 줄 알았는데, 아니야?”
그 말에 성재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기발한 상상이네.”
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을 음산하게 건드리는 목소리였다.
이윽고 큐레이터가 돌아왔다. 그녀는 성재현이 고른 그림을 액자로 씌운 것과 저택에서 다시 수거해 갈 회화 목록을 고지했다. 성재현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영호가 나에게 일 마무리 짓는 걸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구세주에게 선택받은 것처럼 황급히 큐레이터를 따라나섰다.
미술관 직원들이 벽면에 걸었던 그림을 내리고, 다시 거는 동안 나는 옆에 서서 작업을 감독했다. 겉으로는 그런 척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광경을 되감고 있었다.
기자 피습 사건이 사실은 쇼였다는 주장. 그러고 보면 타이밍이 맞아떨어지긴 했다. 정영호가 나를 찾아왔다가 얼마 안 돼서 사건이 터졌고, 그 때문에 저택에서 수발들 사람을 고용해야만 했다.
설마 고의적인 사고였을까.
세한공장 피습 사건은 기자가 대놓고 성재현에게 돌격하다시피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앞쪽에 받쳐준 정영호가 없었더라면 성재현은 정강이뼈에 금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를 부딪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벌어진 돌발상황이었다. 성재현이 무슨 이득을 얻는다고 그런 사고를 만든단 말인가.
설령, 칩거를 위해 조작한 사고라고 해도 그래야 할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피의자였던 남자는 자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반(反)재벌을 주장하며 차세대 재벌 명맥을 이어갈 성재현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분명하게 말했고 이 때문에 온갖 언론이 한바탕 뒤집힌 일이었다.
쓸데없는 억측은 관두자. 뻐근한 어깨를 문지르며 올라오던 나는 권재림과 맞닥트렸다. 잔뜩 화가 났지만 애써 침착하려는 듯 심호흡을 한 그가 내게 말했다.
“성재현 때문에 나 피한 거지?”
“…아니.”
“거짓말. 티 나.”
“거짓말 아니야.”
“그럼 앞으로도 안 피하겠네.”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깨를 으쓱한 권재림이 말했다.
“그럼 또 봐. 형.”
현관을 나선 권재림이 차에 올라탔다.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붉은 스포츠카가 저택을 빠져나갔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성재현이 있었다. 분노도, 기쁨도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에선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의 볕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드리운 그늘이 길게 쏟아져 나를 덮쳤다.
어둠이 나를 예속했다.
**
주말 오찬을 준비하느라 저택은 평소보다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국내 신규 디스플레이 첫 출시를 앞두고 전자 계열사 사장단 회동이 있었다. 성재현은 모임 참석이나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사교는 의무적으로 따랐다. 특히 이번에는 세한호텔이 아니라 삼성동 저택에서 비공식적으로 열리는 회동이었다. 내부에서는 이를 두고 리허설이라고 불렀다. 요컨대 호텔에서 세한전자 타이틀을 걸고 기자까지 불러들이기 전에 하는 예행이었다.
정영호한테 미리 받은 명단에는 모르는 이름이 태반이었다. 엑셀로 정리해 둔 명단을 꼼꼼하게 살피던 중 물소리가 멎었다. 샤워는 아까 했으니 면도를 다 끝낸 모양이었다.
욕실로 이어지는 드레스 룸 앞에 서서 똑똑, 문을 두드린 다음 자연스럽게 열었다. 마침 머리 손질이 다 끝났는지 헤어 디자이너가 미용 도구를 챙기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먼저 나가길 기다린 나는 정영호에게 받아온 참석자 명단을 내밀었다.
“열두 시부터 차근차근 도착하실 듯합니다. 요리는 열두 시 반부터 거실 테이블에 풀 세팅될 거고, 별관에는 따로 자리가 필요하실 분들을 위해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뒀습니다.”
“음, 오늘은 이 디자인 어때요.”
서랍에서 장식 핀과 넥타이를 고르던 성재현이 그중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요즘 들어 성재현에게 넥타이를 매주는 게 하나의 준비 과정이 되었다. 넥타이를 받아 든 나는 능숙하게 넥타이 매듭을 맸다.
“아, 맞다. 제일 중요한 걸 깜빡했네요.”
성재현이 뒤늦게 생각난 듯이 말했다. 뭔가 시킬 일이 있으리라 여기고 가만히 서 있던 내게 성재현이 드레스 룸 구석에 둔 상자를 가리켰다. 리본까지 맨 정갈한 흰색 상자였다. 그새 새로 구두라도 주문했나 보다 여기고 포장을 푼 나는 그대로 상자를 떨어트렸다.
“왜요, 너무 좋아서 감격했어요?”
포장지에 둘둘 감싼 물건을 집어 들며 성재현이 생글거렸다. 나는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게….”
“어때요? 내 거보단 크기가 좀 작으려나. 가장 인기 많은 상품이래서 샀는데.”
손잡이를 잡고 위로 올리자 웅웅 울리는 소리가 무시무시하다. 탱글탱글 흔들리는 살색의 실리콘 덩어리는 모조 페니스였다. 바이브레이터라고도 불리는, 성인용 기구. 조명을 받아 번들거리는 바이브레이터를 흔들며 성재현이 뒷말을 이었다.
“오늘 안 그래도 손님이 많이 오는데 강진하 씨가 어디서 질질 냄새 풍기면서 남자라도 꾀면 곤란하니까.”
“아, 아….”
벌어진 내 입술에 바이브레이터를 가져다 댄 성재현이 억지로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정조대 대신, 이거라도 잘 박고 있어요.”
**
뜨끈한 이마를 손으로 짚고 벽에 붙어 있던 중에 장식물을 옮기던 직원과 마주쳤다. 지난번 김상훈 주도하에 모인 회식 자리에서 통성명했던 세한호텔 CS팀의 황유리였다. 푸른색으로 점철된 꽃꽂이를 품에 안은 그녀는 내게 걱정스럽게 말을 붙였다.
“진하 씨, 감기 걸렸어요? 얼굴이 빨개요.”
“아… 네.”
가짜 기침을 쿨럭쿨럭, 하며 소매로 입을 가로막았다. 감기, 몸살에 걸려도 출근하는 직원은 흔했고 저택은 손이 바빴다. 그녀도 내가 그런 평범한 직원으로 보였는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초대객분들은 많이 오셨어요?”
“아, 그게… 절반 정도 도착했습니다.”
A4용지를 허둥지둥 넘겨 눈으로 대강 리스트를 살폈다. 무릎에 힘이 풀린다.
“아, 으.”
허벅지를 힘껏 모으고 벽에 기댔다. 그러자 황유리가 당황한 듯 나를 부축했다.
“많이 아파요?”
“예, 아, 아닙니다.”
“땀도 많이 나는데, 약은요?”
“먹, 먹었어요. 타이레놀….”
침착한 척 대답하며 구두를 신은 발끝을 정신없이 툭툭 흔들었다. 주머니에 든 타이레놀을 꺼내 보이자 황유리는 거기서 더 간섭하진 않았다. 저택에 들이닥칠 서른여섯 명의 세한그룹 임원을 맞이할 준비로도 빠듯한 탓이었다. “힘내요.”라는 말만 남기고 그녀는 자리를 떴다. 간신히 안도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입 속에 고인 침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콧소리가 섞인 숨을 내뱉을까 봐 그저 코로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진동 소리가 누군가한테 들릴까 봐 넋 나간 사람처럼 팔을 문지르고 다리를 흔들었다.
높은 천장에서 빙글빙글 도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나는 아까 전, 침실에서 벌어진 일을 되감았다. 성재현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어때요, 맛있어요?”라고 물었다. 구멍에 차가운 젤과 바이브레이터가 들어와 배 속을 간질였다. 맛있냐는 물음은 경박했고 내 몸은 천박하게 떨렸다.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젓자 성재현이 내 허리를 꽉 손으로 안았다.
‘그럼 오늘 한번 잘 버텨봐요.’
‘하아.’
‘착하게 있으면 상 줄 테니까.’
꼬리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바지춤으로 손바닥을 쓸어내린 그가 내 둔부를 부드럽게 쥐었다.
‘그 대신에 허락 없이 마음대로 뺐다가는.’
‘아, 으응.’
압박에 신음이 혀 밑을 둥둥 맴돌았다. 성재현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 뺨에 면도로 매끄러워진 자신의 뺨을 슬쩍 비비며 중얼거렸다.
‘굳이 말 안 해도 눈치껏 알겠죠.’
웅, 웅. 핸드폰 진동처럼 규칙적인 진동이 끊이질 않는다. 우르르 울리는 다리 사이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아니, 이게 적응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
초조하게 까치발을 들었다가 힘없이 내렸다. 배뇨감과 흡사한 감각이 멈추지 않는다. 하필이면 바이브레이터가 깊숙이 들어와 예민하게 달아오른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물감만이 둔하게 몸 아래를 흔들었지만 걷거나, 다리를 구부리는 순간에는 안에서 움직인 바이브레이터가 삐끗, 하고 극점을 찌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일에 집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택에는 세한전자에서 온 비서실들을 비롯해 정영호가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점검 중이었다. 부엌에서는 호텔에서 출장 온 호텔 조리팀이 분주하게 식기와 잔을 나르고 있었다. 저택 관리 때문에 고용된 보조에 불과한 내가 나설 일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거실에 서 있는 성재현을 멀찍이 노려봤다. 그는 내가 엊그제 골라온 옷과 구두를 걸치고 사업부장과 대화 중이었다. 앞머리까지 단정하게 넘긴 얼굴은 지극히 근사했다. 우아함, 근사함, 아름다움, 그런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겉보기에만 그랬다. 나한텐 보인 모습은 개자식, 변태, 저질이었다. 정조대랍시고 바이브레이터를 아래에다가 쑤셔 넣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물러나는 나에게 한술 더 떠서 ‘직접’ 내 손으로 바이브레이터를 넣는 걸 지켜보기까지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제약이 늘어나고 있었다. 허리띠로 목을 조르는 거나, 유난히 내 행동에 제어를 두는 것도 솔직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성재현이 이상 성욕자임이 틀림없노라고 나는 진즉 확신했다. 목을 조르거나,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 걸 보며 재밌어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는 미친놈이었다. 억대 빚이 있고, 세한그룹에서 일했던 부모를 둔 나는 성재현에게 입을 막기 쉬운 자위 도구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나 또한 은폐해야 할 비밀이 생겼고 약점마저 있으니 오죽할까. 그러나 이 또한 어디까지나 둘만 있을 때였다.
“흐읍….”
부르르 떨리는 진동은 규칙과 불규칙을 넘나들었다. 생리적으로 발기한 성기 때문에 나는 A4용지 뭉치로 배 아래를 가리고 움츠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누군가한테 들킬 것 같았다. 차라리 배터리라도 얼른 닳아버리든지, 아니면 초대 인사들이 전부 모여 소란에 가려지길 바랄 뿐이었다.
사업부장의 말을 조용히 받아주던 성재현이 나를 힐끔 쳐다본다.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리고 검지로 배 아래를 휙 가리킨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비스듬히 걸어둔 장식용 거울에 내가 비친다.
괴로운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생생한 홍조로 빨개진 얼굴은 모순이었다.
**
그간 장식용인 줄 알았던 그랜드 피아노 뚜껑이 열렸다. 피아니스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연주하는 동안 셔츠만 제외하고 전부 검은색으로 통일한 직원들이 그림자처럼 돌아다니며 빈 잔에 물을 채우거나 다 마신 칵테일 잔을 치웠다.
부산한 움직임으로 저택 주차장부터 본관까지 떠들썩했다. 세한전자 임원만이 아니라 계열사 사장들도 참석한 데다가 지식경제부처에서 일하는 공직자, 한국 삼대 일간지의 부사장과 주필진도 참석해 있었다. 오늘의 모임은 말 그대로 판 깔기였다. 외견으로 보인 명목은 제품의 국내 및 중국 시장 출시를 앞둔 격려와 축하였다. 그러나 기저에는 성재현의 세한 승계를 두고 새로 이어질 줄을 붙잡으러 온 진드기들이었다.
세한전자에서 올해 전략을 은밀하게 비추면 그걸 토대로 신문사에서 밀어주기 기사를 쓰고, 법무부에서는 자잘한 사고를 눈감아주며, 정부 부처에서는 그들을 내세워 국가 경제의 원동력이라는 말로 왕관을 씌워주는 것이다.
전(前) 부장판사, 검사장 출신 변호사 로펌 대표 등등 전관예우를 받는 사람들도 초대객 리스트에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남경욱도 있었다.
며칠 전 백운에서 성재현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당했으면서도 기어코 이 자리에 끼어들었다. 어찌 보면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남승혁이 아버지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에는 저런 야욕적인 부분도 있을 터였다.
샴페인 잔을 들고 껄껄 웃던 남경욱이 고개를 돌린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서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한겨울 아파트 현관 앞에서 남경욱을 기다리던 나를 지나치던 표정과 무척 비슷했다. 그는 태연하게 술로 목을 축이고 다른 사람들과 말을 섞었다. 나 또한 그 자리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홀을 빠져나왔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파티 중 보안 문제로 저택 모든 방은 잠겨있었다. 갈 곳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온실 정도일까. 삭막하고 냉랭한 공간을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으.”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인데도 나도 모르게 받침이 둥글게 흐려졌다. 커튼을 쳐둔 통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숨을 참았다. 직원이 지나칠 때마다 억지로 기침을 했더니 목구멍만 시큰거렸다. 나도 모르게 허리춤에 올린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엉덩이를 꽉 쥐었다. 웅, 하고 울리는 미세한 미동이 피부 결을 타고 손바닥을 두드렸다.
해가 어둠에 걸쳐진 무렵이었다. 클래식한 세단이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서너 사람이 둘러쌌다. 망토처럼 수행원을 두르고 오는 남자를 발견한 그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부리부리한 콧대와 날카롭게 쭉 째진 눈매, 회갑을 지난 듯 희끗희끗한 머리였지만 그보다는 훨씬 젊은 육식동물 같은 인상이었다.
그 얼굴은 터무니없을 만큼 눈에 익었다. 성윤명. 세한그룹 회장. 어머니가 허구한 날 부르짖던 그 ‘세한 회장님’이었다. 한때 삼성동 저택에서 큰 주인님이었던 남자는 코트를 벗고 중심에 서 있던 성재현에게 다가갔다. 호선으로 눈을 접고 반듯한 미소를 유지하던 성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바쁘신 와중에 몸소 와주셔서 기쁩니다. 회장님.”
“나야말로 이 자리에서 보게 되어 기쁘구나.”
성윤명이 주름진 눈가를 곧게 폈다. 따뜻한 미소는 아니지만 풀어진 얼굴이었다. 부자가 상봉하는 게 꽤 오랜만인 듯했다. 유럽 출장 일정으로 성윤명의 부재가 며칠 있었던 탓인 듯했다.
나는 성윤명과 성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부자는 삼성동 저택에서 오래전부터 봤던 사람들이었다. 어머니는 성윤명을 ‘부사장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른 고용인들은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큰 주인, 그분, 어르신 등으로 부르곤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항상 부사장님이었다. 눈을 반짝이면서 그렇게 불렀고, 또 그렇게 부르고 나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머니는 내가 삼성동 저택에 갈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좋은 옷만 골라서 입히고 반드시 부사장님과 인사하고 돌아오라고 약조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성윤명을 알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성윤명은 꽤 무시무시한 인상이었다. 차갑고 독하고, 도깨비 같은 눈을 가진 대장 같은 남자였다. 차 문을 열어주는 아버지를 지나치는 얼굴은 늘 싸늘하고 무뚝뚝했다. 그래서 성재현을 처음 봤을 때는 두 사람이 같은 성씨라는 게 이상하다고 여겼다. 성재현은 봄날 목련 같은 하얗고 고상한 도련님이었으니 학교를 막 들어간 어린 눈에는 무척 다르게 보였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을 보니 분위기가 다르긴 해도 닮은꼴이었다. 뱀처럼 길쭉한 눈매는 맹독을 은밀히 품었다.
성윤명까지 합세하니 비공식이란 단어가 무의미해졌다. 기자만 없을 뿐이지 다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멀찍한 곳에 서 있었다. 아래가 욱신거리는 피로감으로 열기와 한기가 고루 섞였다. 한계까지 다다른 몸이 자꾸만 떨렸다.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숨을 내뱉었다.
다른 인사들과 담소를 나누던 성윤명이 문득 나를 응시했다. 주름진 눈을 찡그린 그는 꽤 오랫동안 나를 들여다봤다. 누군가가 말을 걸면 받아치다가도 다시 한번 나를 유심히 보곤 했다. 그 눈에서 기시감이 보였다.
그는 내게서 다른 누군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썩 내키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성윤명이 왜 나를 쳐다보는 거지. 일면식이라 해봤자 아주 까마득한 예전이었다. 몇 번 지나치듯 봤던 어린 나를 세한그룹 회장이 기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성윤명은 나를 탐닉하고 불빛을 쫓는 방랑자처럼 내게서 닮은꼴을 기억하려 들고 있었다.
불현듯 어머니가 그를 애타게 찾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나를 단정하게 입히고 저택에 보내면서 ‘부사장님’ 안부를 알려달라던 어머니가 스친다. “내 이야기는 없으셨니?”라고 묻던 얼굴에는 애달픔마저 느껴졌다. 아, 왜 미처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어머니의 열렬함은 단 한 번도 고용인의 충성심이 아니었을 텐데.
그 옆에서 성재현은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를 보지 않아도, 나를 향한 웃음이라는 게 여실하게 느껴졌다. 허벅지 사이가 달달 떨린다. 그는 내게 벌을 주고 싶은 걸까. 어울리지 않은 욕망을 탐하려 했던 비천한 핏줄이라고 힐난하고 싶은 걸까.
정영호가 나를 살핀다. 나는 “죄송한데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수긍이 이어지기 전에 샹들리에의 조명 아래에서 도망쳤다. 그들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기어오르듯 서재 옆 화장실로 들어섰다. 바지를 벗자 체액과 젤로 속옷이 엉망진창이었다. 배 속이 오르르 개미 같은 작은 벌레떼로 차올라 갉아 먹히는 듯했다. 요의까지 느껴졌다. 웅, 웅, 아직도 거세게 울리는 바이브레이터 밑동을 손으로 잡았다. 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어 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 망할… 으, 하윽.”
집중하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던 나는 문고리가 달칵 잠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 선 그늘이, 거울에 투영되었다. 센서에 반응하는 조명 때문에 어둠의 윤곽이었다.
눈이 선명하게 번뜩였다.
“아까 내가 빼지 말라고 했는데.”
몸을 구부려 내 뒤에 바짝 붙은 그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미끄덩하고 빠진 바이브레이터가 바닥에 구른다. 웅, 웅, 울리는 소리가 천둥 같았다. 성재현이 내 등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저런, 저런. 내 말을 하나도 안 지켰네요.”
어르는 듯한 말투로 그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늘처럼 몸을 송송 찔러 알알하고 섬뜩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바이브레이터가 홀로 울어댔다. 성재현은 구둣발로 내 허벅지를 자근거렸다. 힘을 실은 압박에 짓눌린 피부가 욱신거린다.
“손님도 많은 자리인데 좀 더 참았어야죠.”
쪼그려 앉아 내 셔츠 깃을 손으로 붙잡은 그가 속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면 내가 준 선물은, 받기 싫었어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이마를 맞댄다. 두 눈이 내 시야를 차단하듯 오롯하게 나만 보고 있었다. 몇 번이고 깨문 입술이 쓰라렸다. 땀이 들어간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말을 쏘아붙였다.
“손, 님들, 아직, 안 떠나셨, 습니다.”
층 하나를 아래에 두고 수십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 자리를 주최한 주인이자 요인인 성재현이 사라진 걸 의아하게 여길 터였다. 행방을 찾고도 남았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낌새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알아요.”
성재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회장님께서도 방문하셨으니, 못해도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해산하겠죠?”
“이대로는, 소리 나서 들킬 것 같아서, 피한 겁니다.”
“들켜? 누구한테 들키는데요?”
의아한 듯 되묻는다. 그러다 “아.” 하고 그가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회장님한테?”
숨이 목구멍이 달라붙었다. 어깨를 으쓱 흔든 그가 말했다.
“들키면 어때요. 그러려고 시킨 짓이었는데.”
고개를 바짝 붙인 성재현이 내 눈 아래에 흐른 땀을 혀로 핥았다. 포획한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였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울음 섞인 숨이 차올랐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 한마디를 잇기 어려웠다. 아니, 설령 그 말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소용없었다. 성재현은 내 말을 묵살하고 있었다. 마치 성윤명한테 치부를 전시하고자 나를 이용한 기분이었다. 성윤명이 노골적으로 나를 내리훑던 시선을 떠올렸다. 정녕 내가 유추한 사실이 맞는 걸까. 아니면 이조차도 성재현의 악취미에서 비롯된 악랄한 유희인 걸까. 두려움에 물음은 고개를 넘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구는지 궁금하다고 묻는 거예요?”
“그저… 장난감한테, 화풀이하고 싶으신 겁니까.”
말하면서도 입술이 달달 떨렸다. ‘장난감’이란 단어에 성재현은 눈을 사뿐하게 감았다가 떴다.
“강진하 씨는 가끔 주제 파악을 너무 잘해요. 어떤 사람이 자길 스스로 장난감이라고 말할까요?”
“…….”
“그리고 장난감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작동을 안 하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때리고 싶고, 부수고 싶고.”
입술이 양쪽으로 갸름해졌다. 부드럽지만 인위적인 미소였다. 뺨을 쓰다듬던 손끝이 이내 할퀴듯 힘을 주어 내 목을 잡았다.
“그런데 그거보다도 더 짜증 나고 기분 나쁜 건.”
“아, 윽…!”
“늘 손에 갖고 있던 게, 사라졌을 때.”
웃음기가 싹 가신 그의 눈이 형형하다. 한편으로는 참극을 조우한 듯 새파랬다.
“나는 그게 제일 화나.”
내 목을 억세게 붙든 그가 나를 끄집어 올리듯 일으켰다.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지만 그는 우악스럽게 꼭두각시처럼 나를 당겼다. 매끄러운 바닥에 몸이 부딪혔다. 무릎이며 팔꿈치가 욱신거렸지만 나는 행거를 붙잡고 도망치려 했다.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둔 옷가지들이 목매단 시신처럼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옷더미로 엉클어진 바닥에 표류한 사람처럼 발버둥을 치며 그곳을 빠져나가려 애썼다. 몸 위에 올라탄 그가 내 턱을 꽉 잡아 쥐었다.
“얌전히 있으라고 할 때는, 얌전히 있어야죠. 그것도 하나 못 하겠어요?”
내려다보는 눈이 나를 냉엄하게 다그치고 있었다. “쉿.” 하고 어르며 내 입술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이로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성재현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억센 저항을 무시한 그의 손가락이 혓바닥을 누르자 침이 입꼬리로 샜다.
“고분고분해지나 싶으면, 한 번씩 대드네.”
“아악!”
그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거울에 얼굴을 쾅 처박았다. 금이 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충돌이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비틀거리는 나를 세운 성재현은 내가 입은 와이셔츠를 양쪽으로 힘껏 젖혔다. 후드득, 뜯어진 단추가 내 몸의 파편처럼 굴러다녔다. 속바지와 셔츠 등 옷가지가 뭉쳐 발아래에 허물처럼 으깨졌다.
헐벗은 나를 거울로 음미하듯 응시하는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턱을 괸 성재현이 내 턱을 붙잡고 정면을 보게 했다.
“거울 똑바로 봐요.”
“흐읏.”
“강진하 씨 몸이 얼마나 야한지 지금부터 알려줄 생각이에요.”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던 손끝이 슬그머니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우선은.”이라고 말하면서 성재현이 유륜을 둥글게 어루만졌다. 따뜻한 실내에 있었는데도 그의 손은 얼음장이었다. 단정하게 다듬은 손톱이 유두를 강하게 꼬집었다.
“여기를 만져주면.”
“읍, 흐.”
“숨부터 참더라고. 그러다 젖을 빨아주면 입 벌리는 순간, 야한 소리가 나와.”
그의 손가락이 닿는 자리마다 따끔하면서도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입술에 힘주고 숨을 참았다. 성재현은 내 유두를 끈질기게 지분거렸다. 손가락으로 만질 때마다 발갛게 일어선 유두가 통통 흔들렸다.
입맛을 다신 성재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빨통에 장식이나 달아줄까.”
“흐읏, 아, 앗…!”
“피어싱 대신에 이건 어때요?”
넥타이에서 넥타이핀을 빼낸 성재현이 내 유두에 집게를 물렸다. 금속이 부리처럼 콱 위아래로 짓누르는 통각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났다. 집게를 매단 유두 주변을 둥글게 쓰다듬었다. 손길에 따라 넥타이핀이 위아래로 일렁거렸다.
“이러니까 젖도 달랑달랑 잘 흔들리네.”
“그만, 하, 으, 세요.”
“정말로?”
무릎 사이로 파고든 성재현의 발이 좌우로 넓게 다리를 벌리게 했다.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강진하 씨 자지는 아니라는데?”
발기한 성기를 압박하듯 주무르는 힘에 고개를 젖혔다. 피할 수도 없는 적확한 자극에 눈꺼풀이 떨렸다. 성재현은 반죽을 치대듯 내 성기와 음낭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일시적인 애무였는지 그는 성기에서 손을 떼어냈다. 체액이 손등을 타고 흐르는 걸 그는 유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을 만져주는 것도 좋지만.”
“하지, 아…!”
“여기를 더 좋아하네요.”
둔부 사이로 손이 밀려 들어온다. 방금까지도 바이브레이터를 넣고 있느라 이완된 구멍을 손가락이 건성으로 건드렸다.
“좆집에 정조대 박고서 무슨 생각했어요?”
“흐읏, 윽.”
“언제 전무님이 불러서 빼주실까. 상으론 뭘 주실까. 좆을 넣어주려나… 그도 아니면.”
낮고 근사한 목소리가 가늘어지면서 내 말투를 따라 하듯 속살거렸다. “성재현 개자식, 죽여버릴 거야.” 자신을 저주하는 말인데도 한껏 즐겁게 들리는 음색이었다.
“어느 쪽이 정답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고개를 비틀었다. 팔을 움직이며 벗어나려 했다. 성재현은 생글거리며 내 등에 몸을 바짝 붙였다.
“아무래도 묶어버려야겠네.”
“아읏, 하, 안, 아!”
목에 맸던 넥타이를 잡아 뺀 성재현이 내 양팔을 뽑아낼 것처럼 뒤로 젖혔다. 겹친 양팔을 넥타이로 묶었다. 무게가 가볍지 않은 그를 받치느라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거울에 이마와 팔을 대고 간신히 지탱했다.
“흐윽, 아.”
열감으로 부어오른 구멍에 미적지근한 공기가 닿아 저릿하다. 젤에서 알로에 향기가 풍긴다. 점성을 잃어 물줄기가 된 젤 때문에 허벅지가 흠뻑 젖었다. 흡사 애액이라도 줄줄 흘린 듯했다. 가볍게 혀를 찬 성재현이 내 입술을 더듬었다.
“씹물을 왜 이렇게 줄줄 흘렸어요.”
“앗, 흐읍… 응, 웁!”
검지와 중지가 구멍에 박혔다. 성재현이 망설임도 없이 깊숙이 쑤셔 올린 순간 좁은 내벽이 손가락 부피만큼 벌어졌다. 손가락을 뺐다가 다시 쳐올릴 때마다 손가락 등과 둔부가 부딪히면서 쩍쩍 끈덕진 소리가 났다. 듣기 싫은 소음에 몸서리를 치자 성재현이 웃었다.
“손가락 좀 넣어줬다고, 애타게 벌름거리는 게 가관이네.”
“그, 만. 제발, 그마, 아… 아.”
고개를 숙이고 도리질 쳤다. 그럴수록 성재현은 손가락으로 안을 거세게 들이박았다. 질퍽, 하고 둔한 마찰음이 이어진다. 안으로 전부 집어넣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내벽을 눌러댔다. 민감하게 달아오른 안쪽을 휘젓던 그가 방향을 틀었다. 뭉툭한 송곳으로 쑤시기라도 하듯 선명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아, 아앗!”
턱을 젖히고 뾰족한 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짧은 섬광이 튀었다. 그러자 성재현이 그 부근을 집중적으로 문질렀다.
“여기?”
“흐으, 아, 제바, 알, 아, 아아.”
“여기네.”
“앗, 아, 아! 흐윽, 안, 아으, 돼….”
입을 벌리고 애원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꺾인 무릎이 떨렸다. 푹, 푹 찔러 올리는 손가락을 쫓아 나도 모르게 옴찔거리며 구멍을 조였다. 불쾌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콕콕거리며 피부를 갉작였다. 목덜미에 입술을 박고 살결을 빨았다. 쪽, 흡입되며 당겨지는 피부가 따끔했다. 귓불을 깨물고 귀를 핥던 성재현이 속삭였다.
“구멍에다 좆 박고서 사람들 사이에서 있는 건 어땠어요.”
“흐윽, 으, 읍.”
“내가 보기에는 꽤 즐기는 거 같더라고요.”
“아니, 아니, 안, 그러, 흡!”
“아니긴 뭐가 아닌데. 구멍이 다 풀려서 주먹도 들어가겠어요.”
그 말에 아래가 빠듯하게 조였다. 성재현이라면 정말 주먹을 쑤셔 넣을지도 모른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손가락 네 개를 들척이며 아래를 쑤시던 성재현이 거울에 비친 날 보며 피식거렸다.
“겁먹기는.”
“흐읍, 윽.”
“주먹 넣으면 헐렁해질 게 뻔한데, 그러면 박을 맛이 없지.”
“아아, 읏.”
그러면서도 성재현은 안에 넣은 손가락을 주먹 쥐듯이 폈다가 오므렸다. 손가락이 구부러질 때마다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이윽고 성재현이 주르륵, 손가락을 빼냈다. 묶인 채로 잔뜩 긴장하느라 뻣뻣하게 뭉친 등과 날갯죽지가 아팠다. 거울에 기대 숨을 헐떡였다. 입김이 거울 표면에 하얗게 서린다. 여태껏 바닥에서 웅웅 박동하던 바이브레이터를 집어 든 성재현이 내 등줄기를 따라 문질렀다.
“모처럼 샀는데 일회용으로는 쓰긴 아깝잖아요.”
“흐윽.”
골을 가르듯 벌린 실리콘 덩어리가 입구 주변을 맴돌다 꾹 밀고 들어왔다. 내내 품고 있었다고는 해도 상당한 부피감에 힘이 들어갔다. 반쯤 집어삼킨 바이브레이터에 멍하니 침을 삼킬 때였다.
지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생생했다. 뜨끈하고 뭉툭한 살이 엉덩이에 느릿하게 비벼졌다.
“그리고 가짜 좆 말고, 진짜도 먹여주고.”
“안 돼, 아, 안, 아!”
달아나려 몸을 옆으로 비트는 나를 거울에 꽉 누른 성재현이 선단을 골에 꾹 눌렀다. 바이브레이터가 들어있는 구멍에 그의 성기가 삐죽 귀두를 들이밀었다. 주춤거림 한번 없이 성재현은 단숨에 성기를 안으로 찔러넣었다. 푹, 하고 찔러 들어온 성기에 바이브레이터가 옆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생생했다.
“아악!”
기둥을 삼키느라 빠듯하게 확장된 구멍이 화끈거렸다. 아직 다 들어오지 않았는지 성재현은 내 팔을 붙잡고 성기를 쑤셔 넣었다. 빈틈이 남으려야 남을 수 없는 구멍에 거칠거칠한 체모가 닿았다. 기어이 성기를 전부 쑤셔 박은 모양이었다. 목과 가슴팍에 진땀이 흐르고 욱, 하는 헛구역질이 입에서 질질 새어 나왔다. 내벽을 찌릿하게 뒤흔드는 진동만으로도 모자라 굵고 딴딴한 성기까지 박히니 정신이 없었다. 성재현은 몸을 살짝 틀더니 안쪽을 향해 방아쇠처럼 허리를 당겼다. 그러자 바이브레이터가 들썩이면서 안을 두드렸다. 눈앞이 번쩍였다.
“아, 아아! 아…!”
퍽 찌르고 나갔다가, 다시 강하게 들이박는다. 눈을 크게 떴다. 덜컥덜컥 맞붙은 몸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분명 고통이었던 감각은 스멀스멀 오르는 쾌감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사위에 거울이 보인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내 얼굴은 기묘했다. 홍조가 돌고 눈은 풀리고, 눈썹은 산이 내려앉아 우는 것 같은데 입술은 위로 올라갔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성재현이 머리를 잡아 거울에 정면으로 마주 시켰다.
“제대로 눈 뜨고 보세요. 강진하 씨.”
“아, 흐윽, 응!”
“내가 쑤셔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봐야죠.”
땀에 젖은 머리카락에 시야가 늪처럼 감긴다. 그러다 푹 박히는 성기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흐으, 응.”
딱 붙이려 했던 입술에 힘이 풀린다. 헤 벌어진 입가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시야가 벌벌 흔들렸다.
쾌감으로 지끈거리는 눈을 깜빡 감았다가 떴다. 전신 거울에 무언가가 비쳤다. 헤죽, 벌어진 입술에 멍청하고 천박해 보이는 얼굴은 다름 아닌 나였다. 뒤에 있는 성재현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유두에 달린 넥타이핀이 달랑거렸다. 미끈하게 맺힌 땀이 배꼽 아래로 흘렀다.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 끄트머리에, 묽은 체액이 고여 있었다. 성실하리만큼 흥분에 미쳐가는 모습이었다.
성재현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했죠.”
“으, 히윽.”
“강진하 씨 고용한 이유가 뭐겠어요. 의전에 익숙한 거랑 얼굴. 이 두 개?”
“흐읏, 아, 앙!”
한 박자 늦게 바이브레이터가 안을 드드득 울렸다. 온몸을 강타하는 쾌감이었다. 성재현은 뒤로 몸을 크게 빼냈다가 걸쳐진 성기를 안으로 쾅 박아 올렸다. 무너진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나무 기둥에 매달린 사람처럼 나는 거울을 붙잡고 흐느꼈다. 턱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카펫에 점점이 맺혔다.
허리가 거세게 앞뒤로 덜컥거리며 내 몸을 짓누른다. 값비싼 모직 정장의 가칠가칠한 면이 등허리와 어깨를 간질인다. 사포처럼 나를 긁어내렸다.
“애초에 이런 쓰임새였던 거라고, 그 사실까지 내 입으로 듣고 싶었던 거라면.”
“히으, 아!”
“예전에 나더러 섹스 상대 구해 온다고 하던 거 기억나죠? 난 필요 없다고 했고.”
철퍽, 젖은 구멍에 성기가 다시 박혔다. 꿈틀거리며 더 깊이 들어간 바이브레이터가 안에서 휘어졌다. 좁은 구멍을 구렁이처럼 파먹으면서 배 속을 탐닉하고 있었다. 성재현이 배 아래를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여기 내 손바닥 안에 있는데.”
진동이 배꼽 아래에서 부르르 울린다. 고개를 저었다. 한계까지 부푼 배를 쓰다듬듯이 성재현이 배를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그의 성기가 뱃가죽 너머를 뚫을 듯해 아래가 덜덜 떨렸다.
“그러니까 장난감답게 있어요.”
거울에 비친 나를 향해 그가 미소 지었다. 싫어, 싫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 모양으로 싫다고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녀에게 모든 걸 빼앗긴 인어처럼 펄떡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살이 문드러질 정도로 퍽퍽 치대던 그가 안에 사정했다. 걸고 끈적한 정액이 장내에 고였다.
“으, 으읍, 끄흑.”
성재현은 널브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소매를 잠그고, 지익 지퍼를 올렸다. 그런 다음 구두코로 내 다리 사이를 두드렸다.
“빼는 거 허락해 줄게요.”
“흐윽, 으.”
잠갔던 문을 열자 주홍색 불빛이 기다랗게 일직선으로 어두운 서재로 쏟아졌다. 정영호가 마네킹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새 넥타이를 건넸고, 성재현은 내가 보는 앞에서 능숙하게 넥타이를 맸다. 섬유용 미스트를 칙칙 뿌리는 옆얼굴이 나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천천히 나와요.”
나올 수 있다면. 스르륵 문이 닫혔다. 다른 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나는 힘없이 웅크리고 있었다. 버둥거린 덕에 넥타이 매듭은 풀린 뒤였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새벽 내내 나는 끙끙 앓았다. 기억도 흐릿한 악몽에 짓눌려 이리저리 뒤척였고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붙여둔 파스가 땀에 미끄러져 덜렁거렸다. 찍, 떼어내는 소리가 끈끈했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문은 잠겨있었다. 이 집에 들어온 뒤로 나는 잘 때 문을 꽉 잠그는 습관이 생겼다. 멍하니 사각형을 바라봤다. 고요함 속에서도 쉬이 안정할 수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이 뇌리에서 되감겼다.
몸을 추스르고 간신히 나왔을 때는 이미 뒷정리가 한창이었다. 참석한 손님들도 제 역할을 종료했다. 성재현은 그들 사이에 있었다. 2층에서 내려오는 나를 힐끔 쳐다본 성재현은 너그럽게 웃었다. “피곤해 보이네요.”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내 어깨를 쥔다. 몸이 가까워졌다.
‘정말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데.’
그가 손바닥으로 약하게 내 등을 토닥거렸다.
‘쉬지 그랬어요. 그러라고 냅둔 건데.’
허리로 내려온 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에는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게 해야 하려나.’
그가 손을 아래로 내려 내 허벅지를 건드렸다. 무릎 사이가 단단하게 경직되었다. 숨소리가 슬며시 멀어졌다. 이윽고 반듯하게 내 앞에 마주 선 성재현은 악의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그가 말했다. 무엇을 수고했는지, 목적어가 생략된 말은 불분명했건만 수치스러웠다. 창백한 얼굴을 숙이고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때 정영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은밀한 귓속말이 들릴 거리였다. 그러나 그는 침묵할 뿐이었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저택에 여전히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님을 배웅하는 자리에 있었다. 정리되는 동안 성재현의 탈의를 도왔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러니까 장난감답게 있어.’
성재현에게 짓눌려 엉망진창으로 박히던 순간이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거울을 앞에 두고 천박한 신음을 흘리며 흐느끼던 내가 자꾸 되감은 비디오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여태 악몽인 줄 알았는데 악몽이 아니라 전날의 기억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갈증처럼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아랫도리가 욱신거렸다. 무거운 이불을 들추자 잠옷 바지 가운데가 불룩했다. 습윤한 열기로 전신이 알알했다.
‘장난감답게 있어.’
홀린 것처럼 엎드려 무릎을 좌우로 벌렸다. 오른손을 뻗은 다음 사타구니를 문질렀다.
“으, 응.”
음산한 쾌락에 나는 턱을 옆으로 젖혔다. 터질 것만 같은 신음을 참아 눌렀다. 차차 호흡이 가빠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 아.” 하는 탄성을 가늘게 흘렸다. 시트에 뺨을 문질렀다. 헐떡거리느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나는 숨을 참았다.
그러다 머리카락이 삐죽, 우악스럽게 위로 끌려 올라가는 듯한 짜릿한 감각이 돋았다.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앞이 반짝 튀어 올랐다.
“흐윽!”
허리를 들어 올리며 침대 시트에 댄 발끝을 꽉 오므렸다. 탁한 숨을 가득 몰아쉬었다. 땀이 눈 옆을 타고 흘러내린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끈적끈적한 체액이 손가락 사이로 거미줄처럼 엉겨 붙었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몽롱하던 정신에 불이 켜졌다. 저택 지하에 도사리고 있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나를 짓누르며 발칙하고 상스럽게 대하던 음성과 손길을 따라 하듯 몸을 만지기까지 했다. 성재현한테 장난감 취급을 당하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위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절정에 올랐다.
분명 끔찍한 수모였다. 그런데 나는 찰나에서 황홀할 정도로 쾌감을 느꼈다. 부정하기에는 전신을 뒤트는 전율이었다.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섰다. 흐르는 물에 손에 씻었다.
정녕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혐오감에 속이 메슥거렸다.
**
거품을 뱉고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 눈 아래가 칙칙하다. 면도를 하다 피부를 살짝 베였다. 긁힌 뺨 아래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따끔한 자리를 살살 만지며 거울을 바라봤다.
우울하고 창백한 낯빛이 비쳤다. 최근 살이 빠지면서 더 커진 눈은 울 것처럼 처져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어머니를 닮아서 나 또한 어딘가 헤프고 고장 나 있는 건 아닐까.
어머니한테 매일 전화를 했다. 그러나 항상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는 기계음만 반복되었다. 죽지는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문자 한 통만이 안부를 대신했다. [나중에 연락할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전화는 받지 않는다.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말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는 늘 술에 절어 살았다. 입에는 늘 부사장님, 부사장님, 그 단어만 안줏감처럼 붙였다. 그 무렵 사업이 번창하던 큰외삼촌은 어머니더러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년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어릴 때는 그런 악담이 그저 어른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욕설의 일부인 줄 알았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내 덕인 줄 알라며 악다구니를 쓰곤 했다.
정말 어머니가 성윤명과 그런 관계였을까. 성재현과 비슷한, 그러나 분위기가 판이한 늙은 남자를 잠시 떠올렸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에는 기시감이 담겨 있었다. 찰나였지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한들 내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성재현에게는 충분히 거슬릴 터였다. 친아버지와 불순한 관계를 맺은 여자의 아들이라니. 드라마 속의 천박하고 식상한 소재지만, 그에게는 얼마든지 화풀이할 명목이긴 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화풀이할 거였다면 너무나도 소심한 복수가 아닌가. 고작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렇지만, 세한 같은 대규모 기업에서 고작 치정으로 이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그렇게 싫었다면 이렇게 옆에 두고 괴롭힐 바에는 도리어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 곳에 집어 던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차라리 건드리지 않았다면 알아서 자멸했을 텐데 성재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아.”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이런 걸 홀로 고민해 봤자 무슨 해결이 된다고. 어머니의 문자를 노려보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또 사고 친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진즉 연락 와서 울고불고했을 테니 그건 아니라고 잠정적으로 단정했다. 피곤했다. 걱정만으로도 이미 지쳤다.
옷차림을 정돈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노크한 다음 문을 열어보니 침대는 비어있었다. 그 대신 물소리가 쏴아, 쏟아졌다. 다리에 푼 깁스를 풀면서부터 성재현은 다시 예전 같은 스케줄을 소화했다. 아침 운동, 그리고 업무, 식사, 회의, 업무. 이런 순서가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어디까지나 오른쪽 다리에 무리 가지 않는 선이었다. 의사 말로는 뼈는 잘 붙었으니 오히려 근육을 자주 써주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꾸준히 주사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전보다 걸음걸이가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부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욕실 밖에 놓인 바구니에는 그가 입었던 운동복이 들어있었다. 옷을 들어 올리자 겉면이 뜨끈뜨끈했다. 체온과 체취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옷감을 만지작거렸다. 바스락, 쓸리는 소리가 가볍다.
그 순간 샤워기에서 떨어지던 물소리가 멎었다. 나는 서둘러 들고 있던 옷감을 다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가운을 걸친 성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좋은 아침이네요.”라고 첫마디를 꺼낸 성재현은 생긋 웃었다.
“잘 잤어요?”
“…네. 전무님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태평하다 못해 상냥한 인사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잘 잤냐는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제저녁에 성재현을 나를 상대로 폭주하듯 섹스했다. 거기다 나는 새벽에 그때를 곱씹으며 자위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성재현이 나를 장난감으로 못 박았든 간에 나는 내 일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더 밑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숨을 가볍게 들이쉰 그가 웃는다.
“파스 냄새가 많이 나네요.”
“…….”
“적당히 봐줬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많이 아팠나 봐요?”
나긋하게 속삭거리는 목소리에 생수병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모른 척 들고 온 약과 물병을 탁자에 올려두고 물러섰다.
몇 번의 파도에도 형태가 남은 모래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성재현은 나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뺨 아래를 유심히 살핀다. 가늘어진 눈매가 냉랭했다.
“얼굴은 왜 그래요.”
그제야 베인 상처가 생각났다. 피부색과 비슷한 반창고를 작게 오려 붙였지만, 티가 났다. 나는 뺨을 가리고 대답했다.
“면도하다 살짝… 긁혔습니다.”
“저런.”
성재현이 안쓰럽다는 듯이 탄식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축축하고 더운 샴푸 냄새가 났다. 불온한 향기였다.
“조심해야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긴 손가락이 뺨 위 상처를 살짝 스쳤다. 따끔따끔한 감각이 찌릿했다. 상처를 살살 건드리던 성재현이 순간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건 어떻게 했어요?”
“그건?”
앵무새처럼 따라 읊자 성재현이 야릇하게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어제 강진하 씨 구멍으로 실컷 품었던 정조대.”
얼굴이 홧홧해졌다.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성재현은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대답을 채근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내 구두코에 닿았다. 슬쩍 문지르는 듯 움직인다.
“…제자리에다가 돌려놨습니다.”
“제자리? 여기?”
허리 아래로 내려온 손이 엉덩이를 꽉 쥐었다. 강한 악력에 오금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요. 전무님… 책상 서랍에다….”
“내 서랍?”
“서재… 이 층 서랍에 넣었, 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바이브레이터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그의 서랍에 처박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음대로 버렸다가 또 그걸로 트집잡히긴 싫었다. 그뿐이었다.
내 대답에 성재현은 눈썹을 까딱거리더니 파안대소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흩트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내다 버렸을 줄 알았는데, 귀여운 짓을 다 하네.”
귀여운 짓, 이란 어감이 기묘했다. 성재현은 내가 건네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물을 삼키는 그의 얼굴이 사뭇 즐거워 보였다.
**
주말 아침 식사는 두 사람 몫이 차려져 있었다. 팬케이크, 소시지, 백후추를 살짝 곁들인 수란, 과일 절임과 딜버터 등등이 기다란 식탁에 아기자기하게 올라와 있었다. 나는 숟가락으로 자몽만 툭툭 건드렸다.
성재현과 저택에서 함께 식사한 지 어느덧 일주일째였다. 적응하긴 했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움이 남아있었다. 대체 성재현은 나한테 뭘 하고 싶은 걸까. 굳이 나를 저택에 끌어들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저지른 추잡한 부정에 대한 복수심? 그도 아니면 단순히 사용하기 편리해서? 늘 웃는 얼굴로 포장하고 있으니 더욱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성재현은 줄곧 그런 식이었다. 기억 속의 그는 항상 친절했고, 동시에 잔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성재현을 어려워했다. 삼성동의 작은 주인님, 도련님은 올려다볼 수 없는 까마득한 우물 위의 사람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까요?”
불쑥 질문이 들어왔다. 아마도 오늘 일정을 묻는 말인 듯했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 문자 함에 저장해 둔 스케줄을 확인했다.
“음, 오후 두 시에 예술의 전당에서 발레 관람 스케줄이 있습니다.”
“발레 관람? 아, 초대표 왔던 그거 말하는 건가.”
“네. 혹시 취소하실 거라면 지금 연락하겠습니다.”
평일에 비해 주말은 중요한 스케줄이 적었다. 정영호가 미리 보내준 일정표에 따르자면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들렀다가 저녁에는 이태원동 본가에서 가족과 식사할 예정이었다. 발레 공연도 국립발레단 단장이 직접 초청한 것으로 지극히 사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영호도 별다른 말을 전달하지 않았다.
갓 내린 커피를 가져온 직원이 새 잔을 뒤집어 따랐다. 새로 받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성재현이 말했다.
“오늘 바빠요?”
“저, 말입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일치기로 부산에 가고 싶긴 했다. 아버지 걱정도 되었고 어머니도 문제였다. 형편없이 방치된 집도 정리해야 할 텐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결론은 마땅하지 않았다.
“강진하 씨.”
성재현이 다그치듯 부른다. 슬쩍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대답이 늦어진 걸 깨달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무님 외출 채비 돕고 나서는 딱히 외출 예정은 없습니다.”
“일요일에도?”
“네.”
“그럼 영화나 공연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습니다.”
“발레는 어떨 거 같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번 기회에 보면 되겠네요.”
“네?”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성재현은 수저를 쥔 손을 지휘자처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공적인 스케줄도 아니니까 간단하게 준비하면 됩니다. 잠깐 들렀다가 인터미션 때 나오면 되고요.”
“하지만 제가 따라가는 건….”
“나 혼자 있는 건 불안하거든요. 저번에 사고도 있었고, 갑자기 기자가 습격한다거나 하면 곤란해지잖아요. 안 그래요?”
“…….”
“정 비서 대신이라 생각해요.”
혼자서 결정까지 내린 그는 태연히 물을 마셨다. 싫다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발레가 싫다거나 하는 사유는 아니었다. 성재현이 갑자기 나를 끌고 가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는 게 불안하다면 수행 비서들도 있는데. 하지만 내 입 속은 싫다는 말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듯 마른침만 넘어갔다.
**
커튼을 활짝 젖힌 1층으로 해가 하얗게 들어섰다. 볕이 베일처럼 내려앉은 복도를 서성거리며 엄지손톱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정말 이대로 가야만 하는 건가. 차라리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외출할 걸 그랬나. 초조하게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예술의 전당까지 멀진 않았지만 슬슬 준비하지 않으면 공연 시간에 늦을 듯했다. 서재로 들어서자 성재현이 사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를 확인한 그가 안경을 벗더니 몸을 일으켰다. 넥타이가 없는 캐주얼 정장에 두껍지 않은 코트를 걸친 그는 평소보다 가뿐해 보였다.
“기사님께서 이십 분 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거실에서 잠깐 기다리시면서….”
“기사 불렀어요?”
“네? 네.”
당연한 사실을 되묻는 말에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놓친 게 있었나. 기사를 너무 늦게 불러서 차질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내 옆을 지나친 그는 화장실과 연결된 통로에 만든 파우더 룸 경대 앞에 섰다. 찬장에는 향수가 브랜드별로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성재현이 소매에 향수를 뿌리며 말했다.
“기다릴 필요 없이 내 차 타고 가죠.”
“전무님, 차를요?”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택 내부 차고지에 그의 개인 자동차가 여러 대 준비되어 있었지만 타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개인 일정이라지만 기사도 대동하지 않겠다니, 대체 무슨 변덕인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럼 내가 차를 운전해야 할 텐데.
“전무님 정말 죄송하지만… 저 장롱 면허라 운전이 어렵습니다. 기사님이 오는 게 편하실 겁니다.”
“설마 진하 씨가 운전할 생각이었어요?”
“네? 그럼 누가….”
“당연히 내가 운전할 생각이죠.”
뜻밖의 대답이었다. 얼어붙은 내 앞에서 성재현은 보란 듯이 핸드폰으로 수행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달이 늦어 미안합니다. 오늘은 쉬세요. 네, 네, 그래요. 고생했어요.” 부드럽고 친절한 말투로 통화를 마무리 지은 그가 나를 살폈다.
“그러고 나갈 거예요?”
“아, 방에서 점퍼만 가지고 오겠습니다.”
“점퍼? 저번에 본 그 옷 너무 낡았던데요.”
“오늘 날이 그렇게까지 춥진 않아서 괜찮습니다.”
“이거 입어요.”
행거에 걸려있던 코트를 집어 든 성재현이 내게 내밀었다. 못 보던 베이지색 울 코트였다. 저번 카탈로그 신청 때 주문한 옷인지 택도 제거되지 않은 채 포장 비닐에 싸여있었다.
“이건 전무님 드레스 룸에 걸려있던 겁니다.”
“달리 입을 만한 코트 있어요?”
“…없습니다.”
“그럼 입어요.”
성재현은 손에 든 코트를 재차 내게 들이밀었다. 여기서 더 거절한다면 억지로라도 입힐 기세였다. 별수 없이 받아 든 나는 그의 눈앞에서 부스럭거리며 코트를 걸쳤다. 기장이며 어깨까지 사이즈가 내 몸에 딱 맞았다. 평소 그가 입는 사이즈와 맞지 않는 물건이었다. 주문을 잘못 넣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동안 성재현은 나를 묘한 눈길로 내리훑었다. 마치 전시된 물건을 감상하는 표정이었다.
“음, 크진 않아요?”
“네, 괜찮습니다. 사이즈도 맞고 편합니다.”
“다행이네요.”
고개를 끄덕인 성재현이 문을 향해 눈짓했다.
“그럼 슬슬 나가죠.”
정원에 서서 기다리자 지하 차고지에서 성재현이 차를 끌고 나왔다. 눈앞에 차가 멈춰 섰지만 나는 좀처럼 차 문을 열 수 없었다. 정말 단둘이 가는 게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기사를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빵, 빵! 클랙슨이 채근하듯이 울렸다. 별수 없이 껄끄러운 기분으로 조수석에 탔다.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저렸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능숙하게 차를 돌렸다. 언덕을 내려선 차가 도로로 나오는 동안 나는 롤러코스터를 억지로 탄 사람처럼 안전벨트를 붙잡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내가 사고라도 낼까 봐 그래요? 안전 운전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그냥 좀.”
“좀?”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전무님 차를 타는 건 처음이니까, 그래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하다는 말만으로는 지금 기분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성재현이 공연을 같이 보자고 하는 것도 그렇고, 차를 직접 운전하겠다고 하질 않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
어영부영한 답변에 성재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앞으로 자주 타면 되겠네요.”
“…….”
고개를 숙이고 손을 맞잡았다. 성재현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고요한 차내에서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엇갈렸다.
차가 막힌 탓에 예상보다 느지막하게 도착했다. 오페라극장 로비는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로 인산인해였다. 기다란 현수막이 원기둥에 걸려있었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연극 등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성재현 전무를 이런 자리에서 다 뵙네.”
“협회장님. 오래간만입니다.”
중년 남자가 껄껄 웃으며 다가오자 성재현은 그에게 가볍게 화답했다. 오가는 대화로 봐서는 아마 공연 투자자 중 한 사람인 듯했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와 성재현에게 인사를 청했다. 마치 성재현이 이 공연에 참석할 거라고 미리 언질을 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그를 두고 초대권을 교환 받았다. 성재현이란 이름을 대니 고급스러운 봉투에 담긴 티켓이 돌아왔다.
하우스 어셔가 공연 시간 임박을 안내했다. 갑자기 관객들이 수군거렸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가 남자 여러 명과 공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둘 다 낯이 익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여자 쪽은 저번에 청담동에서 본 배우 같았다. 연예인이 공연 초청받는 일은 흔했지만, 같이 들어서는 남자의 뒤태가 무척 익숙한 게 문제였다. 권재림이랑 너무 닮았는데, 착각이겠지. 내가 아는 권재림은 발레 공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이 더 길어지기 전에 나는 성재현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성재현에게 내어진 자리는 2층 사이드에 있는 오페라석이었다. 관람하기에는 썩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관람이 주목적이 아닌 손님에겐 편한 자리였다. 졸지에 보게 된 공연이 뭔지도 몰라 급하게 브로슈어를 챙겼다. 제목은 익숙했다.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올라오는 발레극으로 아마 오늘이 마지막 공연인듯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좌석이 딱 네 개였다. 그리고 앉는 사람은 나와 성재현 둘뿐이었다. 문이 닫히고 커튼까지 쳐졌다.
“사람 없어서 편하네요.”
코트를 벗은 그가 착석하며 말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암전되어 사방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허둥거리던 내 손을 그가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앉았다. 곧 오케스트라 단장이 인사를 올렸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화려한 무대 배경, 장식,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발레리나들이 춤을 춘다. 알고 있는 동화 내용이라 공연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인공인 클라라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두까기 인형을 받는다. 그녀는 남동생의 심술로 인해 고장 난 인형을 안고 서글퍼하고 드로셀마이어라는 노인이 이를 고쳐준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녀는 무시무시한 쥐 모습의 마왕에게 공격을 당하는 악몽을 꾸는데, 이를 구해주는 건 호두까기 인형이다.
나는 금세 공연에 빠져들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이런 공연은커녕 영화 한 번 볼 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흥미로웠다. 그저 춤만 추는 게 아니라 내용에 맞춘 안무가 인상적이었다.
한참 무대를 내려다보던 그때였다. 몸에 무게가 살짝 실린다. 성재현이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자는 것 같진 않았다. 피곤한 건가. 아니면 시야가 막히니까 불편해서 이쪽으로 몸을 튼 건가.
내 쪽으로 기울어진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미약한 공기가 뺨 아래에 닿는다. 팔꿈치가 내 팔을 건드린다. 노를 젓듯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소매가 내 팔에 쓸렸다. 손가락이 손등에 톡 닿는다.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나긋한 손길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당장에라도 그를 밀어내고 싶은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등을 매만지는 온기에 목이 말랐다. 공연에 집중했던 모든 신경이 그에게 쏠린다. 더는 발레리나의 우아한 춤 선도, 화려한 배경과 음악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막이 내려가고 박수가 쏟아졌다. 다음 공연 시간까지 20분간 휴식하겠다는 인터미션 안내 방송이 머리 위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성재현은 여전히 내게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지. 목이 말라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뒤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장 난 용수철처럼 성재현을 약하게 밀어내기 무섭게 곧 커튼이 옆으로 젖혀졌다. 어셔 뒤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분위기를 보건대 성재현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자리를 비켰다.
아래층은 잠시 쉬러 나온 관람객들로 시끌벅적했다. 화장실로 들어선 나는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문득 성재현의 온기가 닿았던 자리에 손이 갔다. 어깨, 팔, 그리고 손등. 이미 온기는 옅어지다 못해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데도 나는 하염없이 어깨를 매만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마치, 데이트하는 분위기가 아닌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데이트라니. 내가 생각했지만 기가 막혔다. 데이트라면 호감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재현과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좋게 포장해줘도 섹스 파트너 정도였다. 나쁘게 말하면, 나는 성재현한테 몸을 파는 창부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데이트라는 예쁘장한 단어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성재현은 나를 장난감이라 말했다. 장난감과 데이트하려는 사람은 없다. 동화 속 호두까기 인형조차 왕자가 되고 나서야 사랑을 쟁취했다. 지금 하는 것도 그렇다면 같잖은 놀이일 터였다. 질리면 그만인 유희에 어울려줄 소꿉장난.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벨이 울렸다. 선뜻 공연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영부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세수를 하고 미지근하게 열 오른 뺨을 식혔다. 옆에 비치된 종이 타월을 툭툭 뜯던 나는 거울에 훤칠한 인영이 비치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진하 형.”
“아.”
귀를 울리는 선명한 음성에 눈을 크게 떴다.
거울에 비친 내 뒤에는 권재림이 있었다. 그럼 아까 내가 본 사람이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오수안이랑 같이 왔다는 건데. 사고회로가 핑핑 돌아가는 와중에 권재림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형 지금 발레 보러온 거야?”
“…네.”
“누구랑?”
누구, 라는 질문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는 사람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인데도 순간 그 쉬운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았다. 딩동, 벨이 다시 한번 울렸다. 나는 대답 없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권재림이 나를 가로막았다.
“누구랑 보러 왔냐고.”
“그게 권재림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왜? 나한테 대답 못 할 사람이야? 대답을 다 피하고.”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쪽한테 일일이 대답할 의무가 없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설마 성재현이랑 보러 왔어?”
완벽한 정곡에 말문이 막혔다. 변명할 재간도 없어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자 권재림이 허, 하고 짜증 섞인 숨을 내뱉었다.
“진짜 성재현이랑 보러 왔다고? 둘이서만?”
“…임시 수행 비서로 동행했습니다. 이러면 만족하시겠어요?”
참다못해 말투가 까칠해졌다. 권재림이 인상을 쓴다.
“임시 수행 비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관람 되세요.”
매몰차게 권재림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권재림은 기어코 내 팔을 세게 붙잡아 당겼다. 우악스러운 힘을 떨쳐내려 했지만 기어코 권재림은 나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아니, 나 아직 만족 못 했는데.”
“좋은 말 할 때 놔요.”
“나쁜 말만 하면서, 뭘 놔달라고 해.”
“이거 놓으라고…!”
강한 압력과 함께 등이 벽에 밀착했다. 순식간에 권재림이 나를 침범했다. 입술이 부딪친다.
딩동, 극이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마지막 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권재림은 나를 다짜고짜 붙잡았다. 열일곱, 첫 키스였다.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꿈틀거린다. 나는 그의 혀를 깨물었다. 아플법한데도 권재림은 오히려 내 손목을 꽉 비틀어 누르며 더욱 깊이 혀를 빨아들였다.
“읍, 흐으.”
그에게 눌린 가슴이 부서질 거 같았다. 정강이로 그의 허벅지를 걷어찼지만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더 입술을 머금고 쪽쪽 빨아댔다. 이대로 나를 모조리 빨아먹을 기세였다. 손톱을 세워 권재림의 손등을 꽉 찍었다. 손톱이 살에 파고드는 게 느껴질 정도로 누르니 비로소 권재림이 물러났다.
“고양이야? 할퀴게.”
“미친 새끼야.”
“아, 이제야 반말하네.”
내 턱을 손으로 꽉 붙잡은 권재림이 반지르르 젖은 입술을 핥으며 다시금 키스했다.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흐읍.”
“체리 맛 난다. 립밤 같은 거 발랐어?”
권재림이 씩 웃었다. 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 물러난 나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한 대 얻어맞은 권재림이 턱을 붙잡았다. 바닥에 퉤, 하고 피가 섞인 침을 뱉는다. 히죽 웃은 권재림이 사나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봤다.
“예전에 키스했을 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뜨더니, 이젠 욕도 하네.”
“또라이 새끼. 내가 그렇게 우스워? 만만해?”
“그러는 형은? 내가 우습냐? 만만해서 사람이 말하는데 무시해?”
권재림이 크게 말했다. 화장실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닫힌 문을 확인했다. 문 너머에선 오케스트라 연주가 들려올 뿐이었다. 권재림은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손 맵네. 정신 번쩍 든다.”
“정신 들었으면 가. 사람한테 추잡하게 굴지 말고.”
“추잡? 내가 추잡하게 군다고?”
“싫다는 사람 붙잡고 억지로 키스하는 게 제정신이야? 성추행이지.”
“그럼 성재현한테 가서 말하든가.”
“뭐?”
노발대발하며 언성을 높이던 나는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팔짱을 낀 권재림이 재차 말했다.
“성재현한테 가서 말하라니까? 권재림이 나한테 억지로 키스했다고?”
“내가 왜 그걸 전무님한테 말해….”
“성추행당했다는데, 당연히 상사한테 보고를 해야지. 그래야 세한 법무팀 껴서 고소를 하든지 할 거 아냐?”
협박하는 어조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말을 곡해하는데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한 거야.”
“차마 성재현한테 말 못 하는 게 아니고?”
“…….”
“너, 성재현하고 뭔 일 있는 거지?”
간파당했다. 무력할 정도로 허무하게 권재림은 나를 꿰뚫고 있었다. 아니, 권재림은 그날 저택에서 이미 성재현에게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거기서 나온 추측이겠지만 운 나쁘게도 명확했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다섯부터 거꾸로 하나까지 세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지금 이건 네 실수였고 난 그걸 지적했어. 나는 전무님을 이런 사적인 부분으로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는… 재림이 너하고 대화하는 건데, 자꾸 전무님을 끌고 들어오는 거 불쾌해.”
“그럼 앞으로 나랑 대화할 의사는 있어?”
“그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
“너 나 피하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성재현 때문이라는 확신이 섰거든. 삼성동에 있는 거 거짓말한 것도 그렇고, 지금도 아닌 척하지만 성재현 의식하는 거 같거든.”
“…….”
“좋아. 그렇다 쳐. 그럼 이제부터 내 연락 재깍재깍 받을 건지, 아니면 말 건지 선택해.”
“권재림.”
“형이 나 안 피하면, 나도 성재현에 대해 굳이 말 안 꺼낼게. 물론 그 인간한테도 안 말할 거고. 나랑 형이랑 키스한 거라든지, 만나는 것까지도.”
분명 화를 내야 하는 건 나였는데 어느새 주도권은 권재림이 붙잡았다. 그는 내가 성재현한테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리고 약점으로 들이밀었다. 촘촘한 포위망이었다.
“…연락 피하려던 건 아니었어. 핸드폰이 낡아서 배터리가 금방 닳아. 문자 보면 늦게라도 답할게.”
속으론 천불이 올라왔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반은 진담인 거짓말이었다. 그제야 권재림이 만족한 듯이 씩 웃었다.
“나도 형한테 허락 안 받고 키스한 거 미안해.”
이건 뭐 엎드려 절받는 것도 아니고. 한숨이 나왔지만 더 말 섞어봤자 손해 보는 건 나였다. 얼김에 권재림한테 손까지 휘두르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넌 그 배우분이랑 온 거야?”
“배우분? 누구? 오수안?”
단번에 대답이 돌아왔다. 권재림은 귀찮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끔 만나는 정도야. 별 사이는 아니고.”
“그래도 데이트 왔으면 상대방한테 잘해야지.”
“데이트는 무슨… 걔도 나 이용해 먹는 입장이고 나도 그래서 어울려주는 거야.”
가벼운 대답만큼이나 가벼운 태도였다. 이용해 먹는 입장이라서 어울려주는 거라니. 나로선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극장 밖 대기석에 앉아 공중을 떠도는 음악을 멍하니 들었다. 권재림은 어떻게든 나랑 같이 있으려 했지만 나는 하우스 어셔를 불러 입장을 부탁했다. 권재림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순순히 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눈치껏 입장하면 되지만 도통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재현은 공연을 끝까지 보려는 걸까. 나는 그에게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로 둘러댈 핑계를 고민했다. 집안일로 급한 전화가 왔다든지. 머리가 아팠다든지.
주머니를 더듬자 텅 비어있었다. 자리에다 핸드폰을 두고 왔구나. 갈수록 태산이었다. 성재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뽑았다. 홀짝거리며 구두를 까딱거렸다.
서초동은 남승혁이 사는 동네와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남승혁 생각이 났다. 잘 지내겠지. 그날 이후로 남승혁한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한테 추태를 보인 마당에 연락이 오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도 막상 연락 두절 되니 허전했다. 남승혁도 이런 식으로 내가 연락 끊었을 때 서운했겠구나. 가뜩이나 짧은 주소록 목록이 점점 조촐해지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홀 밖까지 가득 울려 퍼졌다. 슬슬 공연이 끝나려는 모양이었다. 음료 캔을 들고 2층 오페라석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에 섰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면 성재현이 내려올 테니까.
“거기서 뭐 해요?”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캔을 떨어트릴 뻔했다. 성재현은 내 오른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 나온 거지. 서늘하면서도 날카로운 향수 냄새가 가까워졌다. 성재현이 내 앞에 우뚝 멈췄다. 떨리는 숨을 삼키며 나는 올바른 대답을 꺼냈다.
“전무님,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연 마저 보시고 내려오실 거 같아서요.”
“그랬어요?”
“네. 저는 입장 타이밍을 놓쳐서 미처 들어가지….”
“내가 아까 말한 거 잊었어요? 나 인터미션 때 나갈 거라고 했는데.”
성재현이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쨍,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여태 공연을 보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어디 있었던 거지.
“그런데 진하 씨가 이 공연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 기다렸지. 기다려도 안 들어오길래 걱정되더라고.”
“…죄송합니다.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아파요? 어디가?”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순간 성재현이 손을 뻗었다. 입꼬리에 닿은 손가락이 둥글게 내려와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좀 부었네요.”
“아….”
립밤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턱을 가볍게 스쳤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들킨 건 아니겠지. 하지만 권재림이랑 나올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는 인기척은 없었다. 일부러 떠보는 걸 수도 있다. 그러니 동요해선 안 된다.
다행히 성재현은 금세 입술에서 손을 떼어냈다. 화난 표정도 아니었다.
“사람들 나오기 전에 나갈까요?”
“네.”
“자리에 두고 간 물건은 내가 챙겼어요.”
성재현이 내게 핸드폰과 브로슈어를 내밀었다. 떨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로 그가 방향을 틀었다.
이다음은 이태원동이 목적지였다. 나는 이태원동에 갈 필요가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삑삑, 차 불빛이 번쩍했다. 운전석 문을 여는 성재현을 향해 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전무님, 저는 그럼 택시 타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디 가려고요?”
“저는 당연히 삼성동에….”
“설마 벌써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가 웃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성재현은 내 등을 떠밀어 조수석에 앉혔다. 문이 닫힌다. 성재현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저녁 먹고 들어갈 거예요. 어차피 지금 귀가해도 회장님 안 계실 테고. 게다가 점심 안 먹었잖아요.”
“아….”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저녁이라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점심도 거르고 공연장으로 왔으니 허기를 느낄 만했다. 그래도 그렇지, 저녁 먹는 자리에까지 나를 끌고 가겠다니.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럽고 껄끄러웠다. 그러나 이미 성재현은 행선지를 정한 뒤였다. 세한호텔 본점 주소가 내비게이션 화면에 떴다.
“그나저나, 오늘 여기에 권재림도 왔던데.”
하마터면 질겁할 뻔했다.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짚은 나는 모른 척 되물었다.
“권재림 씨면… 전무님 사촌분 말씀이죠.”
“아까 나한테 인사하러 온 관계자가 말해주더군요. 석영 쪽에서 사람 온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는데 그게 재림일 줄은 몰랐네.”
“…네.”
“강진하 씨는 알고 있었어요?”
덜컹, 자동차가 속도 제한선을 오르며 흔들렸다.
“아니요… 몰랐습니다.”
“그래요?”
나긋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표처럼 말했다.
“네.”
“하긴, 당연히 몰라야 하는 거지.”
성재현이 냉랭하게 말했다. 맞는 대답을 한 것 같은데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세한호텔 본점은 종로 광화문 근교였다. 한 번 와봤던 곳이라 길이 눈에 익었다.
호텔 내부에는 베이커리, 카페,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즐비했다. 그중 성재현이 선택한 건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성재현이 들어서자 왼쪽 가슴에 금색 배지를 단 매니저가 대기 중이었다. 그녀는 일언반구도 없이 능숙하게 성재현을 맞았다. 우리가 호텔 주차장에 들어설 때부터 연락을 받았는지 만반의 준비 상태였다.
안내받은 곳은 바깥이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성재현이 먼저 착석한 걸 확인하고서 맞은편 대신 옆에 앉았다. 메뉴판을 잠시 살핀 성재현이 따뜻한 차를 내온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늘 추천할 만한 요리가 뭔가요.”
“소 안심을 메인으로 한 코스가 괜찮습니다. 해산물은 관자와 방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자로 하죠. 진하 씨는 뭐로 하겠어요.”
“아… 그럼 저도 같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여자가 메뉴판을 정돈한 다음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손을 연신 닦았다.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닌데 손에서 한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봤자 식사였다. 저택에서도 했던 일과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서, 오늘 공연은 어땠어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수건을 접어 모서리에 두며 대답했다.
“…좋았습니다. 대극장도 그렇고, 발레도 처음인데. 동화로 알고 있던 내용이긴 하지만 무대로 재연된 건 색다르단 인상이었습니다.”
“발레 하면 지젤만큼이나 대표적인 극이에요. 다만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된 버전이에요. 마지막에 호두까기 인형은 불타지 않거든요. 발레리나 인형과 환상적인 세계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영영.”
영영, 이라는 말끝이 흐리멍덩한 중얼거림 같았다. 성재현이 말을 이었다.
“뭐, 해석에 따르면 이 각색 버전을 해피 엔딩이라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더군요. 인형의 주인이었던 소녀가 인간으로서의 세계를 버린 거니, 도리어 장난감이 그녀를 망가트린 것처럼 느껴지거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성재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스름한 야경과 조명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깊고 어두웠다. 성재현이 시선을 느리게 돌린다. 그러다 한곳에 짧게 머물렀다.
레스토랑 입구에 권재림이 있었다. 옆에는 오수안도 함께였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가던 권재림이 성재현을 발견하고는 픽 웃었다. 그는 성재현 앞까지 걸어왔다.
“서울이 참 좁네요. 많고 많은 레스토랑 중에 여기서 전무님을 다 만나고요.”
“그러네. 참 흥미로운 우연인데.”
하필이면 이런 데서 만나다니. 달갑지 않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미 맞닥트린 걸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권재림에게 묵례했다. 권재림은 나를 빤히 보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당겼다.
“그럼 모처럼이니 같이 앉아.”
“같이? 여자분과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데이트는 무슨. 그냥 식사만 하러 온 거야.”
퉁명스러운 대답에 오수안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맞은편으로 돌아가 그녀의 의자를 빼냈다. 오수안은 감사하단 말도 없이 내게 코트와 가방을 툭 맡겼다. 속상하고 서운한 감정이 섞인 태도였다. 쓴웃음을 삼킨 나는 조용히 직원을 불러 소지품을 맡겼다.
권재림은 메뉴판을 휘릭 보더니 와인부터 시켰다. 그러고는 매니저에게 “전무님이랑 비서님은 뭐 시켰어요?”라고 물었다. “소 안심 요리를 주문하셨습니다.” 매니저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럼 나도 그걸로 줘요.”
오수안은 샐러드만 시켰다. 드레싱도 빼고 수란만 넣어달라고 말했다. 매니저가 떠나고서 성재현이 오수안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못 드렸네요. 성재현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저, 전무님. 오수안이라고 합니다.”
“네, 알아요. 드라마 잘 보고 있습니다. 연기가 인상적이더군요.”
“감사합니다.”
뺨을 붉힌 오수안이 손으로 귀밑머리를 넘겼다. 무거워 보이는 귀걸이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주문한 와인과 조각 치즈가 먼저 나왔다. 권재림이 잔을 들자마자 오수안도 마시겠다며 잔을 받았다. 나는 마실 생각이 없어 소믈리에가 내미는 잔을 거절했다. 정작 와인을 받아 든 건 성재현이었다. 돌아갈 때는 다른 차를 타고 갈 생각인가. 아니면 대리 기사를 미리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나와 다르게 성재현은 와인을 천천히 음미했다.
식사는 순서대로 나왔다. 차가운 샐러드부터 수프와 길쭉한 비스킷, 이윽고 메인 요리가 나올 차례였다.
드르륵, 카트를 끌고 나타난 직원 옆에는 요리 담당자가 있었다. 김상훈이었다. 인사하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목한… 소를 도축한 최상품 육류로, 안심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부위…입니다. 소스는 두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가니쉬는 가지와 아스파라거스, 콜리플라워를 버터에 살짝 볶았습니다.”
설명을 마친 김상훈이 접시를 하나씩 앞에 가져다 뒀다. 내 앞에 접시를 둘 때는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그는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성재현은 그가 보는 앞에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었다. 보란 듯이 입에 넣고 조용히 음미하던 성재현이 빙긋 웃었다.
“나쁘진 않네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신경을 많이 써서 준비한….”
“소스가 좀 시고, 겉도는 건 좀 아쉽네요. 집에서 먹던 음식은 이 정도로 아쉽진 않았는데.”
담담한 품평에 방글거리던 김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지배인 또한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둔 성재현이 와인으로 입가심을 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걸로 준비해 오겠, 습니다.”
“아닙니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대로 둬요.”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상훈을 빤히 바라보던 성재현이 손을 저어 보였다. 잔뜩 기가 죽은 김상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가라앉다 못해 싸늘한 테이블 분위기를 못 참겠다는 듯이 권재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란을 떤다. 고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넌 햄버거 같은 것도 군말 없이 먹잖아. 그러니 별 차이를 못 느끼겠지.”
“참 밥맛 떨어지게 구시네. 우리 전무님께서.”
짜증 난다는 얼굴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권재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재현이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단장이 찾아와서 예술의 전당에 너도 있었다고 전해주던데.”
“시간 남아서 보러 갔어. 왜?”
“그냥. 네가 발레를 본다는 게 좀 신기했거든.”
“전무님만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건 아니지. 비록 햄버거 따위만 먹어서 싸구려 입맛인 나도 미적 감각이 꽤 높거든요. 예쁜 거 아니면 관심 안 가져.”
쉴 틈 없이 말을 잇던 권재림이 문득 씁, 하고 입으로 바람 소리를 냈다. 입가에 자그만 상처가 보였다. 몇 시간 전에 내가 그를 때린 흔적이었다. 오수안이 걱정스럽게 말을 붙였다.
“괜찮아? 쓰라리면 매니저한테 약이라도 갖다 달라고 할까?”
“됐어. 알코올로 소독하지 뭐.”
“그래도 따갑잖아. 덧나면 어떡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오수안이 양해를 구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몸을 돌린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 실장님, 어디세요? 당장 약국 가서 입 안에 바르는 연고 좀 사다줘요. 빨리요!” 조급하게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귀엽네.”
턱을 괴고서 오수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재현이 말했다. 귀엽다는 말이 썩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
“그나저나, 입술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
“이거?”
혀끝을 내밀어 입술 옆 상처를 핥은 권재림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말다툼하다가 한 대 맞았어.”
껄끄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샐러드를 입에 넣고 씹었다. 부드러운 식감에도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성재현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권재림을 응시했다.
“누구한테?”
“전무님이 알아서 뭐 하시려고.”
“사촌 동생이 어디서 맞고 왔는데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와, 정말 말만 들어도 눈물 나게 고마운걸. 그런데 이미 해결 봤어.”
“해결?”
“앞으로는 내 말을 잘 듣는다길래 이번만은 용서해줬어.”
권재림의 손가락이 와인 잔 허리를 매끄럽게 더듬는다. 나를 힐끔 쳐다보는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쁜 자식. 일부러 보란 듯이 돌려 말한 것이다. 아까는 성재현한테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해놓고선.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샐러드만 묵묵히 씹었다.
“그럼 평소에는 말을 안 들었어?”
“나한테만 좀 야박하거든.”
“야박하다, 라.”
성재현이 빙그레 웃었다. 포크를 든 내 손이 떨렸다. 오른발에 닿은 성재현의 구두코가 나를 질책하듯 자꾸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발을 뒤로 빼내자 아예 그가 구두로 내 발을 꽉 짓눌렀다. 발등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무시무시했다.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 포크를 잡은 손등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오른손으로 와인 잔을 든 성재현이 빙글빙글 가볍게 흔들었다. 왼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검지와 중지 두 개가 허벅지를 두드린다. 그러다 허벅지 안쪽을 쿡 두드렸다. 무릎을 일직선으로 모으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성재현은 내 허벅지 사이를 손바닥으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손가락으로 둥글게 표면을 움켜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포크가 텅,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에 서 있던 직원들과 손님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진하 형?”
권재림이 나를 올려다본다. 성재현은 왼손에 찬 시계를 매만지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입맛은 싹 달아났다. 그저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한다. 슬쩍 꺼내자 저장하지 않은 번호로 문자가 와있었다.
[형 왜 그래]
“강진하 씨.”
문자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성재현이 나를 불렀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를 바라봤다. 성재현이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차 키를 내밀었다.
“차에 가서 내 핸드폰 좀 가져올래요?”
“갑자기 지금 핸드폰이 왜 필요해?”
“너한테 핸드폰의 필요성을 굳이 설명해야 할까?”
덤덤한 대꾸에 권재림이 인상을 찡그렸다. 짜증이 역력한 눈빛에 성재현은 생긋 웃었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업무 때문에 필요해.”
“오늘 토요일인데?”
“신규 디스플레이 발표가 머지않은 만큼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거든. 신중한 시기니까.”
“아, 그래서 굳이 진하 형도 주말에 데리고 다니시나? 전무님의 그 대단하신 업무 때문에? 예술의 전당에도 데려가고,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을 다 드시고?”
대화 흐름이 불길했다. 이러다 권재림이 괜한 말까지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성재현은 입가를 냅킨으로 느긋하게 닦았다. 유려한 손동작이 멎고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내 것을 내가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이지.”
“내 것?”
“그럼 진하 씨가 네 것이겠어?”
그 말에 권재림이 눈썹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단단히 화난 얼굴은 곧장 테이블을 엎을 기세였다. 뒤숭숭한 분위기를 직감한 레스토랑 매니저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성재현에게서 차 키를 받아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몸을 돌려 테이블에서 벗어났다. 때마침 오수안이 매니저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휙 지나쳤다. “약국이 다행히 연 데가 있더라.” 등 뒤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테이블을 간지럽혔다.
화장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로 손부터 씻고 입 주변을 닦았다. 식사 내내 긴장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허벅지 사이가 간질간질했다. 성재현이 테이블 아래에서 나를 건드릴 때 흥분했다.
“미친 새끼.”
세면대를 붙잡고 욕을 중얼거렸다. 성재현이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났다. 정녕 나는 발정이 난 걸까. 수치심이라고는 도통 모르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성재현이 만진 것에 흥분하다니. 손으로 젖은 얼굴을 짝 때렸다. 두세 차례 때리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얼한 통각에 눈앞이 번뜩 트였다.
호텔 주차장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나는 비상계단을 이용했다. 어두컴컴한 사이에서 ‘EXIT’라 쓰인 글씨가 초록색으로 빛났다. 탈출. 내게도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탈출할 날이 올까. 타인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경계하고 긴장해야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빠듯하다. 여유라는 단어가 희미했다.
VIP 전용 주차장에 세워진 성재현의 차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운전석을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핸드폰은 찾기 쉬웠다. 그가 앉았던 운전석에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핸드폰이 없는데 일부러 내려보낸 게 아닌가, 하는 괴팍한 상상까지 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자조하며 차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는 어제 일 이후로 진동이 거북해졌다. 그래서 전화를 빼고, 문자를 포함한 모든 알림을 무음으로 바꿔버린 뒤였다. 진동의 근원은 성재현의 핸드폰이었다. 발신자 정영호 비서실장. 급한 용무인가. 무턱대고 받자니 성재현의 핸드폰이라 엄두가 안 났다. 어차피 통화목록을 확인할 테니, 받지 않고 그대로 손에 쥐었다. 두 차례 핸드폰이 울렸다가 멎었다. 징징, 손안에 울리는 진동에 나도 모르게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핸드폰 상단에 뜬 문자는 [소재 파악했….]까지만 보였다. 소재 파악?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누구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정영호를 통해 은밀히 사람을 찾는 거라면 회사 일이 아닌 건가.
꺼림칙했다. 알 수 없는 섬뜩한 기분이 몸을 넝쿨처럼 휘감는다. 성재현은 이곳에 없다. 모른 척하고 내용을 확인해 봐도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나를 붙들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안은 것처럼 나는 핸드폰을 꽉 쥐고 계단을 급히 올라갔다.
피크 타임이 지난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안쪽 창가 테이블에는 성재현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식사는 진즉 치웠는지 와인 잔과 간단한 안주만 남아있었다. 숨을 고르며 나는 성재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가져왔습니다.”
성재현은 핸드폰을 받아 드는 대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나는 시선을 회피하듯 말을 돌렸다.
“두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먼저 나갔어요. 여자 쪽이 피곤하다면서 같이 나가던데.”
피식 웃는 성재현을 바라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둘이 남아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까같이 뒤숭숭한 신경전을 보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나았다. 끼익, 의자를 뒤로 빼낸 성재현이 손바닥으로 의자 시트를 두드렸다.
“앉아요.”
“…….”
시간이 꽤 늦었다. 벌써 8시였다. 이태원동 본가에 돌아가고도 남았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재현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자 성재현이 내 턱을 홱 잡았다.
“아…!”
“표정이 안 좋네요.”
구석진 자리라고 해도 직원들이 보는 곳이었다. 그러나 성재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미미한 열감으로 달아오른 뺨을 만지는 성재현의 손이 차가웠다. 장식품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무슨 객기가 들었는지, 나는 과감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뺨을 잡았던 그의 손이 미끄러져 벗어났다. 곁눈질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비스듬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깨끗하게 정돈한 테이블에 새로운 요리가 올랐다. 다행히 김상훈이 아니라 처음 보는 조리사였다. 덜컥 내려놓은 접시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리소토였다. 성재현은 접시를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식사해요.”
“조금 전에 먹었습니다.”
“양상추 한 잎에 고기 한 점 먹은 걸 먹었다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
“그건….”
“말라서 그런지 박을 때마다 허벅지에 뼈가 부딪치는 거 같거든요. 그게 좀 거슬리더라고.”
“…….”
“그러니까 식기 전에 들어요. 남기지 말고.”
성재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기지 말고, 가 특히 두드러지게 강조된 명령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죽처럼 부드러운 식감에 넘기는 게 한결 편안했다.
“먹을 만해요?”
“네… 맛있습니다.”
거짓말로 대강 둘러댄 말은 아니었다. 좀 더 편한 자리였다면 웃으면서 먹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천천히 먹어요.”
선심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성재현이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반쯤 의무적으로 수저를 움직였다. 성재현은 빈 와인 잔에 새로 술을 따랐다.
가운데 놓인 피아노에 앉은 피아니스트가 손님들에게 인사했다. 곧바로 쇼팽의 프렐류드가 울려 퍼졌다. 수레를 끈 직원이 달그락거리며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기분 탓인 걸까. 우리 주변에만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이 늦은 탓이겠지만. 리소토를 반 정도 먹자 배가 불렀다. 그러나 수저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나를 주시하는 성재현의 시선 때문이었다. 업무 때문에 핸드폰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정작 성재현은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물로 입가심을 한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정 비서님께서 전무님께 연락하셨습니다.”
“그래요? 정 비서인 건 어떻게 알았지. 연락받았어요?”
“아니요.”
다급히 부정한 나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도록 말을 뒤이었다.
“화면에 정 비서님 이름이 떠서 알았습니다.”
문자 앞부분을 봤다는 말은 고이 삼켰다. 성재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느른한 미소였다.
“착해라.”
성재현이 손을 뻗어 내 입술 옆을 톡 건드렸다. 손가락에는 약간의 소스가 묻어있었다. 날름 핥는 얼굴이 야릇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 상관없으려나.”
“알게 될 거라니….”
심상찮은 말에 나도 모르게 말꼬리를 잡았다. 그러나 성재현은 더는 전화나 문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캐묻는다고 해도 다시는 말하지 않을 터였다. 나는 재빠르게 단념하고 지긋지긋한 식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내가 리소토를 말끔히 비우는 동안 그는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니 어느덧 9시 30분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늦어진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성재현을 귀가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역시 운전기사한테 양해를 구하는 게 낫겠지.
거울처럼 은색을 입힌 엘리베이터 문에 나와 성재현이 고스란히 비쳤다. 그는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웅, 웅, 진동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성재현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정 실장님.” 하고 받는 목소리는 평상시보다 나른하고 깊었다.
“지금 세한호텔에 있으니 그리로 오시면 됩니다.”
용건은 그게 전부였는지 통화는 금세 끝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를 따라 주차된 차 앞까지 걸었다. 아직 운전기사가 도착하기 전이었다.
차 안에서 기다리실 생각이냐고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강진하 씨.”
고개를 돌린 성재현이 나를 불렀다. 간격이 조금 멀었다. 가까이 오라는 부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가서지 않았다. 성재현이 앞으로 몸을 뻗었다. 손이 그에게 붙잡혔다. 뿌리칠 새도 없었다. 떠밀린 몸이 차 보닛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차장의 시멘트 천장이 보였다.
보닛에 나를 눕힌 성재현의 눈이 휘어졌다. 와인과 박하 향이 뒤섞인 날숨이 쏟아진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했다. 가면 같다고 생각했던 표면이 흐트러져 있었다. 밀착하듯 고개를 숙인 성재현이 내 아랫입술을 입에 머금었다.
“으음.”
약하게 깨무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혀를 살짝 세워 입술을 핥는다. 생각지 못한 입맞춤에 얼어붙은 채로 허공 같은 그를 마주했다.
그가 손에 부드럽게 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비빈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할 말이, 요?”
“뭐라도 좋으니까 해봐요.”
멍해졌다. 나는 침을 삼키며 성재현의 기색을 살폈다. 화난 거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오늘 공연,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식사, 감사했습니다.”
“그거 말고.”
침묵이 부유한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성재현이 피식 웃었다.
“아양도 못 떨고, 교태도 없고.”
“…….”
“그럼 솔직하기라도 해야지.”
내 입술을 가볍게 쪽 빨아당기며 성재현이 뒷말을 이었다.
“키스가 그렇게 받고 싶었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목구멍이 꽉 막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린다. 성재현은 내게 몸을 기울인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권재림이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내 뺨에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받아봐.”
뺨을 간질이는 진동 너머에 나를 노려보는 두 눈을 마주했다. 웃고 있으나 웃음이 사그라든 눈동자가 새카맣다.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얼른, 하고 성재현이 내게 채근했다. 보닛이 끼익, 무게가 실리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는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억지로 잡아 들었다. 통화 버튼에 닿은 손끝을 떨던 나는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진동 모드로 바꿨다.
정적 가운데 그와 나의 숨소리가 교차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받을 필요가 없는 전화일 겁니다.”
“그래요?”
“…네. 모르는 번호입니다.”
간결한 대답에 성재현은 입술을 실룩였다. 가소롭다는 듯한, 혹은 흥미로움을 내포한 미소였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내 손바닥에 납작하게 들러붙은 핸드폰에 손바닥을 맞댔다. 몸 위를 기어오를 것처럼 허리와 가슴을 꽉 짓누른 성재현이 말했다.
“상대는 강진하 씨를 아는 모양인데요.”
손가락이 내려와 손목을 톡톡 두드린다. 손목에 찬 시계가 달칵거리며 살결을 긁었다. 심호흡, 그리고 시선.
“지금은 전무님이 우선이니까.”
“내가, 우선이다?”
가증스럽지만 나름대로 계산적인 대답이었다. 뻔히 보이는 말이란 걸 그가 모르진 않겠지만, 나는 입속의 혀처럼 그의 검은 침묵을 뒹굴어야만 했다.
옅은 실소가 스쳤다.
“그 말은 왠지, 내가 보는 앞에서 받을 수 없는 전화란 소리로 들리는데.”
“…….”
대답하지 않았다. 정곡이었으며 반박할 이유도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잠자코 눈을 옆으로 돌렸다. 내 몸에 바짝 기댄 성재현이 내 턱 아래를 붙잡았다. 입술을 누른 엄지손가락이 치열을 가볍게 훑었다. 살짝 건드리는 정도로 흐느적거리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내가 우선이라면, 뭘 하든 상관없겠네요.”
“그런 뜻은 아니, 읍…!”
그의 입술이 내 윗입술을 짓눌렀다. 핸드폰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멘트 바닥에서 핸드폰이 바르르 쉴 새 없이 울려댄다. 그러나 손이 닿지 않았다. 등 아래 보닛이 덜컹 흔들린다. 성재현은 내 몸을 두 팔과 전신으로 강하게 누르고 내 아랫입술을 빨았다. 포도 향이 숨결에 배어들어 달큼하고 쌉싸름한 향기가 뇌리를 적셨다.
억지로 맞붙인 입술이건만 키스는 예상치 못하게도 부드러웠다. 애당초 성재현은 섹스 할 때 내게 키스한 적이 드물었다. 딱 한 번, 나를 붙잡고 갑작스럽게 맞춘 입맞춤이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키스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흐움, 음.”
그의 혀가 입천장을 간질이다 내 혀를 사탕이라도 된 양 쪽쪽 빨았다. 촉촉하고 매끈한 살끼리 서로 감긴다. 질척이는 소리가 목구멍과 귀 안을 맴돌았다. 음탕하고 야릇한 마찰음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미지근한 손바닥이 내 목을 받친다. 금속 시계의 차가운 감촉이 목덜미에 닿자 등골이 저릿저릿했다.
끼이익, 자동차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누군가의 이목보다도, 성재현에게 키스 받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많이… 취, 하셨습니다. 전무님.”
뒤늦게 이성을 차린 나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출차를 알리는 신호음이 나팔처럼 울렸다가 잠잠해졌다. 남은 건 잿빛에 둘러싸인 적막뿐이었다. 창백한 조명 빛이 그의 등 위를 덮는다. 성재현은 나를 물끄러미,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긴 숨을 고르는 그의 가슴팍이 부푼다. 상기된 얼굴은 취한 사람 같으면서도, 평온했다. 혹은 쾌락에 낭비되고 싶은 광신도처럼 풀어진 표정이었다.
“그래요. 아무래도 취했나 보군요.”
성재현이 순순히 긍정했다. 의아할 정도로 부드러운 태도였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성재현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내게 건넸다.
“깨진 곳은 없네요.”
의심 없이 받아 든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정영호가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이대로 그를 주차장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에게 로비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려 했다.
그때 삑, 하는 기계음이 짤막하게 들렸다. 핸드폰을 쥔 손을 그가 붙잡는다. 휘청거리는 나를 성재현이 차 안으로 밀어붙였다.
“아!”
쿵, 떠밀리며 반대편 차 문에 머리가 부딪혔다. 얼얼한 감각과 함께 눈앞이 어둑어둑 흐려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팔꿈치로 상반신을 지탱한 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개를 까딱거린 그가 엷은 미소를 짓는다. 어딘가 섬뜩했다. 매끄러운 가죽 시트에 무릎을 짚고 올라탄 성재현이 내 몸 위를 점거했다.
“아마, 취해서 정신 나간 거 아닐까요.”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 아앗!”
이윽고 그의 손이 내 팔을 힘껏 속박했다. 무게가 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놔달라는 의미로 무릎을 세워 그를 밀어냈다. 나는 어떻게든 막으려고 애썼다. 팔을 비틀고 턱을 젖혔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 말곤 볼 것도 없으면서, 자존심은 왜 이렇게 세지.”
나른한 탄식과 비아냥거림.
“얼마나 길들여야 제 노릇을 하려나.”
“으, 흐윽.”
성재현이 손으로 내 목을 강하게 눌렀다. 울대뼈에 압력이 가해지면서 기도가 막혔다. 눈앞이 새카매졌다. 내 목을 무자비하게 조르는 성재현의 표정은 덤덤했다. 아니, 손안에 든 나비를 짓뭉개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눈이 뒤집힐 것처럼 숨이 마른다. 그와 동시에 손에 힘이 풀리고 숨통이 트였다.
콜록콜록, 기침이 터진다. 목을 붙잡고 나는 숨을 연거푸 들이쉬고 내뱉었다. 성재현은 내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괴로워하는 것치곤, 너무… 잘 느끼네.”
“아…!”
어느새 바지 중심이 도도록했다. 그의 손이 천 위를 가벼이 두드릴 때마다 움찔, 몸이 떨렸다. 불쾌하지만 송곳으로 콕 찌르는 감각처럼 예리한 쾌감이었다.
넥타이 매듭이 풀리고 셔츠 깃이 벌어졌다. 성재현이 셔츠를 붙잡고 양쪽으로 확 젖혔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발버둥 쳐봤자 아무 소용 없다. 성재현은 언제든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체념에 다다르자 전신에 힘이 풀렸다.
손가락이 목선부터 천천히 쇄골을 건드린다. 내 몸 여기저기에 그가 남긴 흔적들이 도포되어 있었다. 잇자국이며 입을 대고 쪽 빨아 벌긋벌긋하게 물든 살결.
“나중에 여기다 문신이라도 새겨볼래요?”
성재현이 가슴 아래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젖꼭지에 어울릴 거 같은데.” 가슴을 집게손가락으로 두둑하게 붙잡고 꼬집는다.
“기왕이면 심플한 게 어울리겠네요. 가령, 바코드라든지.”
“…….”
입술로 목 아래를 빨며 성재현이 피식거렸다. 세밀하고 노골적인 애무에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그래, 이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면 끝나겠지. 그렇게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가죽 시트 구석에서 부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의 손길도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 아래에 깔려 있던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고 있었다. 자그만 액정에 떠오른 발신인 이름을 보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승혁>
남승혁이었다. 며칠 만의 연락이었다. 남경욱이 그에게 모든 걸 말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승혁이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연락을 반가워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이라니.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린 성재현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이걸로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나는 성재현이 확인하기 전에 급히 핸드폰을 치우려 했다. 성재현은 내 손목을 잡고는 핸드폰을 앗아갔다. 이름을 확인한 그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그리고 곧 잔혹한 웃음으로 뒤바뀌었다.
“검사 친구한테 전화 왔는데, 바꿔줄까요? 아, 아직 검사 시보던가.”
“받을 필요 없….”
“저런, 그래서야 되나. 이 시간에 전화할 정도면 굉장히 친한가 본데.”
하지 말라고 손을 붙잡았지만 성재현은 냉랭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툭, 연결된 수화기에서 “진하야.”라고 부르는, 다정한 음성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통화 시간을 알리는 숫자가 하나하나 올라가는 게 더디게 느껴질 정도였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남승혁이 재차 내 이름을 부른다.
-여보세요? 진하야. 내 목소리 안 들려? 진하야? 여보세요? 안 들려요?
“남승혁 씨가 애타게 찾는데요.”
이미 두 눈과 귀로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짚어주며 성재현이 말했다.
“정 부담스러우면 내가 대신 대답해줄 수도 있고.”
귀에 가까이 댄 핸드폰에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미안, 나중에….”라는 말에서 더는 잇지 못했다.
“아, 앗.”
성재현은 무릎을 세워 내 허벅지 사이를 압박했다. 벌린 잇새에서 신음이 얕게 흘러나왔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성재현의 손가락이 침묵을 막았다. 입 속 점막과 혀를 손가락으로 들쑤시자 질꺽질꺽, 물기가 엉기는 소리가 끈적하게 늘어졌다.
-진하야, 괜찮아?
“흐으, 읍, 괘, 애, 찮, 으흐.”
도무지 말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입가에 침이 흐르고 목이 멨다. 나는 이를 세워 그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떫고 쓴 피 맛이 입속을 맴돌았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하게 내 혀를 눌렀다.
-대체, 너 지금 무슨 일이야.
심상찮다는 걸 느꼈는지 남승혁이 놀란 어조로 내게 재차 말을 걸었다. 그의 손이 바지 사이로 들어왔다. 차가웠다. 뱀피 같은 손길이 사타구니를 더듬고 허벅지 안쪽 살을 주무른다. 세차게 도리질 친 나는 입술을 깨물어 숨을 삼켰다. 성재현이 내 몸을 깊이 덮어 눌렀다. 가죽이 몸에 밀려나며 뿌득, 질긴 소리를 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가늘게 성재현을 쏘아봤다. 성재현은 빙긋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강간당하고 있다고, 신고라도 해달라 하지 그래. 선량한 친구가 나쁘고 잔인무도한 나한테서 도와줄지도 모르잖아요.”
“윽….”
“안 그래요?”
명백하게, 일부러 희롱하고 있었다. 곤란하게 몰아세우려고 하는 짓이었다. 성재현이 오만한 입매를 구겼다.
“아니면 남승혁한테도, 박히고 싶어서 그러나.”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이 기폭제처럼 머릿속을 펑 터트렸다. 울컥, 목이 메었다. 어느 틈에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의 기계음도, 저 멀리서 노랗게 부서지는 헤드라이트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오만하고 싸늘한 남자의, 적나라한 멸시만이 내게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있는 힘껏 손으로 성재현의 뺨을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가 강렬했다.
공허한 적막. 나는 얼얼한 손바닥을 반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성재현은 미동 없이 우뚝 앉아있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하, 하하.” 하고 단조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두 눈이 살벌했다. 아득아득 씹어먹을 기세였다. 손을 뻗어 머리 뒤에 있는 차 문을 연 나는 옷도 추스르지 않고 달아났다. 성재현이 혹여나 쫓아올까 봐 비상계단을 마구 올랐다. 정신 차렸을 때는 호텔 지상 10층이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울긋불긋했다. 성재현을 때린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환하게 켜지던 불빛마저 꺼졌다. 눈앞이 컴컴해졌다.
**
새벽 내내 나는 길거리를 헤맸다. 종로 한가운데 치솟은 빌딩들을 미궁 삼아 떠돌고 떠돌았다. 지갑에 여윳돈은 있었다. 하다못해 택시를 타고 돌아가도 될 일이었지만, 나는 차마 갈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유자차를 산 나는 병을 쥐고 한기가 도는 손바닥을 데웠다. 덴 것처럼 뜨거운 감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자고 성재현한테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지. 싫다고 몸부림을 칠지언정 손으로 그의 얼굴을 때리다니, 내가 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당장 내일모레면 삼성동에서 성재현의 얼굴을 봐야 했다. 죄송하다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정영호한테 연락을 해서….
그러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치욕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성재현이 어떻게 나올지부터 고민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성재현과 나는 계약으로 얽힌 관계였다. 그는 나를 사들인 고용인이었고, 나는 이십억에 나를 팔아치웠다. 스스로 판 구덩이가 뱀 굴인 걸 알면서도 나를 밀어 넣은 셈이었다.
핸드폰을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렸지만 금세 포기했다. 어차피 핸드폰에는 저장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급한 연락이라고 해봤자 어머니한테 올 전화 정도였다.
나는 일단 삼성동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호텔에 도착한 정영호가 대강 상황 파악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계약 해지 통보든, 근신이든 간에 결판이 나겠지. 고단했다. 어디든 누워서 쉬고 싶었다. 근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머리가 아팠다.
가로등 아래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외관이 미끈한 스포츠카는 어디선가 본 듯 낯익었다. 주황색 불티가 일렁거리고, 담배 연기가 동그랗게 올라갔다.
“왔네?”
권재림이 말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세한호텔에서 마주친 거면 몰라도 여긴 삼성동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기 올 이유는 없을 텐데. 담배를 길에 던지고 구둣발로 비벼끈 권재림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여긴… 왜 왔어.”
“왜냐니, 너 기다렸지.”
“뭐? 내가 여길 올 줄 어떻게 알고.”
“새벽 세 시 전까지 안 오면 성재현 새끼가 붙잡은 거고, 그게 아니면 여기로 올 거 같더라고.”
“피시방이나 찜질방에 갈 수도 있는 거잖아.”
“근데 안 갔잖아?”
“…….”
더는 받아칠 말이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항복하듯 고개를 돌렸다. 스산한 바람이 셔츠 속으로 스며든다. 권재림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춥다. 형.”
선이 굵은 얼굴이 실실 웃는다. 그에게서 옅은 알콜 냄새가 풍겼다. 와인 마신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어디서 좀 더 마시고 온 게 틀림없었다.
“술 또 마셨어?”
“응.”
“…차는 어떻게 끌고 온 거야.”
“당연히 내가 운전해서 왔지?”
음주 운전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얼굴에 말문을 잃었다. 그러자 권재림은 “화내지 마. 술 깨고 운전대 잡았다고.”라고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달았다. 어디서 사고가 안 난 게 천만다행이지.
“나 피곤해.”
“나도.”
“그럼 기사 불러서 집에 가든가.”
“이 시간에 누구를 불러. 안 와.”
“그럼 택시 타고 가든지.”
“형이 재워주면 안 되냐?”
“허… 어디서? 건대 그 집?”
“아니.”
권재림이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은 삼성동 세한 저택이었다. 술 마시더니 어디 나사라도 풀렸나. 황당해서 골이 울렸다.
“전무님한테 허락받아.”
“형한테 물어본 건데?”
“일부러 곤란하게 만드는 거라면 지겹다. 나 들어갈게.”
손을 홱 뿌리치고 가려는 나를 권재림이 다시 붙잡았다.
“그럼 차에 같이 있어.”
“피곤하다니까….”
“내 차에서 자. 안 깨울게.”
싫다는 말을 반복하려던 나는 순간 호텔에서 있었던 소란을 떠올렸다. 과감하게 뺨까지 때리고는 그의 집에 기어 들어가 잔다는 것도 참 우스운 꼴이긴 했다. 피곤해서였을까, 아니면 유난히 추워서 그랬던 걸까.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렸다.
저택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권재림을 조용히 따라갔다.
깨끗한 골목 구석에 곱게 주차되어 있던 차 안은 따뜻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채웠다. 권재림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오늘은 싫다는 말 안 하네.”
“술 깰 때까지만 있을 거야….”
엄포를 놓자 권재림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온종일 차에서 지내게 생겼네. 한숨을 속으로 참아 넘기며 나는 팔짱을 끼고 몸을 돌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곁에서 들렸다. 곧이어 내 무릎에 폭신한 게 닿았다. 눈을 살짝 떠보니 두꺼운 펠트 담요가 보였다.
“담요는 왜 가지고 다녀?”
“아, 이거. 여자애들은 늘 춥다고 쫑알대거든. 귀찮아서 하나 사뒀는데 요긴하네.”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결론은 파트너들 때문에 준비했단 소리였다.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자상함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 배우도 얼굴을 붉혀가며 좋아했던 걸까. 하긴 돈도 많고 얼굴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몸도 좋으니 좋아할 구석은 많을 터였다. 성격이 좀 개차반 같긴 해도, 연인한테는 잘해줄지도 모르지.
“내 얼굴 훔쳐보지 말고 제대로 봐.”
곁눈질하던 나를 붙잡은 권재림이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왜, 너무 잘생겼어?”
권재림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이 뻔뻔했지만, 잘생긴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이 매끄러운 눈과 코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부옇게 차창으로 녹아들었다.
**
펄럭이는 커튼 너머로 볕이 들어온다. 퇴창에 앉은 소년이 가지런히 책장을 넘긴다. 검은 머리가 반듯하고 청량한 눈매를 가진 그는 자세마저도 어른스러웠다. 소년의 그림자가 옅게 내 발아래를 덮었다. 고개를 든 그가 빙그레 웃으며 책을 덮었다.
나는 그에게 걸어갔다. 외길밖에 없는 것처럼 정방향이었다. 소년이 손을 뻗었다. 마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내 목이었다.
숨이 막혔다. 버둥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틈에 어른으로 자라난 성재현이 음산하게 미소 지었다. 헐떡이는 나를 누르고 내 다리 사이를 힘껏 들이박았다. 감각이 없는 자극인데도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너는 나한테 절대 못 벗어나.’
눈을 가늘게 접어 웃은 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속죄라고 생각해야지.’
손을 휘저었다. 빈 허공만이 감돈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첫 숨을 쉬는 갓난아이처럼 숨을 골랐다. 목을 감싸자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씨발….”
욕지거리를 흘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하다 하다 이제는 꿈에서까지 성재현이 등장했다. 절대 못 벗어난다느니, 속죄라느니. 꿈속에서 내뱉는 말조차도 황당했다. 도대체 내가 성재현한테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식은땀이 흐른 이마와 목을 소매로 닦다 말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정돈이 잘된 깨끗한 방이었지만 내가 쓰는 침실은 아니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을 그대로 입고 잤는지 구겨진 셔츠 그대로였다.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고 수증기가 뿌옇게 흩어졌다. 누군가가 수건으로 탈탈 머리를 털며 걸어 나왔다. 가운도 안 입고 밑에는 트렁크만 덜렁 입은 채였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권재림이 내게 말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헛꿈을 꾸는 건 아닐 텐데, 왜 권재림이 여기에 있는 거지.
“너 왜, 있어?”
“왜 있냐니. 내 집인데?”
작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든 그가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내 집’이란 단어에 입술이 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아찔하다. 눈앞은 어둠에 휩싸인 듯 혼곤해졌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다가, 어젯밤 핸드폰을 떨어트리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꼬인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는 나와 다르게 권재림은 태연하게 오렌지 주스 한 병을 비우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얼어붙었어. 귀엽게.”
“내가… 내가 왜 네 집에 있는 건데…?”
“곤히 자길래 깨우기 싫어서 우리 집에 왔어. 형 잘 때 엄청 애기 같더라. 새근새근 소리 내는 사람 처음 봤어.”
병을 툭 내려둔 권재림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에 턱을 걸친 그가 귀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때 조심 좀 해야겠어. 내가 만져도 안 일어날 정도로 깊이 자던데?”
“…….”
“안에다 싸니까 구멍이 움찔거리더라.”
“지금 무슨 말을…!”
그대로 몸이 그의 무게에 눌린다. 침대에 풀썩 등이 닿았다. 권재림은 당장이라도 내 몸에 올라탈 기세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또 할까?”
귀에 닿은 입술이 내려와 목을 가볍게 깨문다. 잠든 사이라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자 내 뺨을 슬그머니 만지던 권재림이 킥킥거렸다.
“농담이야. 나도 피곤해서 오자마자 잤어. 형 데리고 올라오느라고 얼마나 진을 뺐는데.”
“…하나도 재미없고 기분 좆같으니까 하지 마.”
몸을 팍 밀쳐낸 나를 권재림은 붙잡지 않았다. 능글맞게 실룩거리던 입술이 내게 말을 덧붙였다.
“칫솔이랑 속옷 새거 가져다 뒀어.”
“필요 없어. 집에 가서 할….”
“씻고 나와.”
권재림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방을 나섰다. 슬리퍼가 탁탁 끌리는 소리가 멀어진다. 새벽에 잠깐이나마 괜찮다고 생각한 게 한심할 정도였다. 성재현이나 권재림이나 내 말은 똑같이 무시하긴 매한가지였다.
**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나는 엉덩이를 벌린 채 손가락으로 아래를 더듬었다. 삽입했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권재림이 농담이라고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안도하듯 긴 숨을 내쉰 한편 헛웃음이 나왔다. 흔적이 남아있을까 봐 혼자 뒤를 헤집는 내 꼴이 우스웠다. 성재현이 없는 자리에서도 성재현 눈치를 살피고 있다니. 그것도, 먼저 그를 때리고 달아난 건 내 쪽인데 말이다.
나는 온몸을 씻고 또 씻었다. 살갗이 발개질 정도가 되어서야 수도를 잠갔다. 욕실 밖에 나가니 포장도 뜯지 않은 와이셔츠와 깨끗하게 비닐로 덮은 정장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속옷. 아무리 봐도 남성용이라 할 수 없는 생김새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다 씻었어?”
커다란 가죽 소파에 늘어지듯 누워있던 권재림이 몸을 일으킨다. 나를 위아래로 보더니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단정한 디자인으로 갖다 달라 했는데, 역시 예쁘네.”
“…옷은 가자마자 돌려줄게.”
“돌려줄 필요 없는데? 형 입으라고 주는 거야.”
“이런 건 부담스러워.”
무심히 대꾸하던 나는 허전한 부분을 비로소 깨달았다. 코트. 성재현이 나한테 준 코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옷들은 비닐에 챙겨 넣었는데, 코트는 대체 어디다 벗어둔 거지. 거기에 지갑도 들어있을 텐데.
별안간 머릿속에 스포츠카가 스쳤다. 설마하니 차 안에다 벗어두고 온 건가. 권재림을 쳐다보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가 주는 게 부담스럽다고? 그런 것치곤 어제 형이 입었던 코트, 이탈리아 수제품이던데. 그거 아무리 못해도 몇백은 될걸?”
“…….”
“어라, 몰랐어? 난 형의 패션 감각이 상당하네, 했는데?”
“그거 내 거 아니야. 잠깐… 빌린 거라서, 내일까지 돌려줘야 해.”
“빌린 거라고? 이런 걸 누구한테 빌리는데?”
이쯤 되니 더는 둘러댈 말이 없었다. 나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미안한데 차 키 좀 줘. 코트만 가지고 바로 돌려줄게.”
“흠, 글쎄. 형한테 차 키를 맡겼다가 도망가면 곤란하잖아.”
“나 운전 못 해.”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값비싼 코트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성재현이 분명 혀를 찰 게 뻔했다. 하지만 이걸로 권재림이랑 실랑이하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듯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못 믿겠다면 별수 없지.”
한숨을 쉬며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권재림이 나를 가로막았다.
“지금 어디 가?”
“뭐? 당연히….”
“아, 삼성동?”
고개를 까딱 흔들며 권재림이 말했다. 입꼬리를 올리고 유들유들한 미소를 짓는 표정이 한껏 의기양양했다.
“…그래. 삼성동. 내일 근무할 준비도 해야 하니까.”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권재림을 맞닥트렸던 자리도 삼성동이었다. 말을 회피하거나 돌린들 아무 소용없었다. 권재림이 한쪽 눈썹을 찡긋거렸다.
“데려다줄게.”
“됐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삼성동까진 꽤 먼데?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간다고 그래?”
“멀어봤자 서울 안이겠지.”
“서울이긴 하지. 하지만 합정동에서 차비도 없이 어떻게 가려고? 못해도 이십 킬로미터인데?”
“뭐?”
“여기 합정이야. 창밖도 안 봤어? 양화대교며 한강도 잘 보여. 얼마나 근사한데.”
태연하게 말한 권재림이 창가로 저벅저벅 걸어가 커튼을 휙 걷어 올렸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권재림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벌써 한 시네. 배고파 뒤질 거 같다 했더니, 뭐라도 먹어야겠네. 목동 가서 먹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연남동 돌아다닐래?”
“대답해봤자… 내 의사가 있긴 해?”
“음, 지금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그러면서 왜 물어.”
“물어보고 싶으니까.”
눈을 가까이 들이댄 권재림이 히죽 웃는다.
“나는 형한테만큼은 아주 다정한 사람이고 싶어. 근데 말야, 자꾸 나한테 싫다, 뭐다, 하면서 뻗대면 내가 존나 야마가 돌 거 같거든.”
“…….”
“다정한 동생이 사고 안 치고 얌전히 놀아줄 때, 귀엽게 봐줘야지. 안 그래?”
이따위로 협박하는 주제에 다정하단 말이 가당키나 한 건가. 그래놓고는 귀엽게 봐달라니. 입 속까지 차오르는 불만을 삼켰다. 이윽고 권재림이 내 팔에 팔짱을 강하게 꼈다.
**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예상대로 코트는 차 안에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벗긴 것처럼 뒷좌석에 대충 널브러진 채였다. “어차피 나도 그쪽에 볼일 있으니까 같이 가면 되겠네.”라며 권재림은 나를 조수석으로 떠밀었고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싸울 기운도 없었던 나는 코트를 끌어안고 창문만 바라봤다.
볼일이 있다던 말이 무색하게 권재림이 들른 곳은 근처 한정식 전문점이었다. 창호지 벽으로 삼면을 가린 예약석에 앉은 그는 마음대로 메뉴를 주문했다.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운동을 해서 그런지 식성이 대단했다. 정작 나는 젓가락조차 손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 쪽에 놓인 반찬은 거의 그대로였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머지 눈까지 아팠다. 이 정도 어울려줬으면 된 거 아닐까. 오는 길에 지하철역 입구가 어디 있는지도 봤다. 더는 용건도 없으니 나가버리면 그만이었다.
“형 지금 그냥 가버리면 나 진짜 서운하다.”
권재림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볼일 있으니 차에 타라고 해놓고는 밥까지 먹고 있잖아. 그러면서 뭐가 서운한데.”
“서운하지. 형이 나한테 너무 쌀쌀맞잖아. 상냥한 맛이라곤 하나도 없어.”
“내가 너한테 상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아니, 의무 맞아.”
“무슨…….”
“비즈니스로 치면 난 성재현의 손님이니까 형이 나한테 상냥해야지.”
‘손님’이란 단어에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어련할까, 싶었다. 석영에다 세한까지 끼고 있는 재벌가 도련님한테 대들고 있는 내 객기가 권재림에게는 우스울 터였다. 그래, 손님이긴 하지. 10년 전, 그는 내게 조심스레 대해야 하는 귀빈이었다. 언제나, 항상 그랬다. 권재림이 나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변할 부분이던가.
이러면서 뭘 다정하게 대해준다는 거야. 인상을 구긴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 손님이 왕이시죠.”
“알면은, 앞으로 잘 해줘. 알았지?”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권재림은 씩 웃으면서 받아넘길 뿐이었다.
자리를 뜬 건 정오를 한참 지난 3시가 돼서였다. 점장이 따라 나와 발레파킹 된 차에 타는 권재림을 배웅했다. 권재림은 시큰둥하게 눈을 돌렸고 시동을 걸었다. 차에 올라타서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한강이 넘실거린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고가도로 위는 달리는 차로 부산했다.
끼익, 자동차가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선다. 덜컥, 몸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손잡이를 서둘러 붙잡았다.
“씨발, 저 새끼가 에쿠스 주제에 자꾸 앞지르네.”
쌍소리를 내뱉으며 권재림이 핸들을 거칠게 돌렸다. 앞에서 달리던 검은색 에쿠스를 기어코 추월하겠다는 듯 속도를 올렸다. 권재림은 운전을 아주 험악하게 했다. 시내 한복판을 마치 레이싱 코스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성재현은 느긋하고 신중한 편이었다. 운전 스타일마저 성격 따라가는 건가, 라고 문득 생각하다가 이마를 붙잡았다.
지금 성재현 생각을 해서 뭘 어쩌자는 거야. 하루 만에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당장 내일 해고 통지를 당하거나, 계약 무효를 강요당하며 억대 금액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힐끔 내 쪽을 돌아본 권재림이 딱, 딱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길래 죽상이야.”
“…심각한 생각 안 했어.”
“오, 그럼 내 생각이라도 했나?”
말을 말자. 나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식혔다.
한 30분을 달린 끝에 드디어 익숙한 거리가 보였다. 번화하고 북적거리는 사거리를 지나니, 점차 사람이 줄어들고 주택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오른 자동차가 마침내 멈췄다.
늘 오던 그곳이었다.
바라던 대로 목적지에 왔지만 나는 썩 기쁘진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야 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잠금이 해제된 차에서 내렸다. 그와 동시에 권재림이 시동을 껐다. 시동을 왜 끄는 거지. 나는 차 안쪽을 슬쩍 바라봤다.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근데 왜….”
차에서 내린 권재림은 내 팔을 홱 낚아채듯 잡았다. 막무가내로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는 힘이 엄청났다.
권재림은 대문 앞에 섰다. 스피커를 톡톡 손바닥으로 두드리던 그가 말했다.
“경비한테 빨리 문 열어달라고 해.”
“안 가?”
“여기까지 왔는데 집 앞까지 바래다줘야 안심이 되지.”
“여기가 내 집도 아니고. 아무나 못 들어가. 그러니까 빨리… 가줘.”
버거워진 나는 좀 더 누그러진 말투로 부탁했다. 그러나 권재림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표정이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성재현이 곤란해지기라도 해? 출입할 때 씨씨티비 다 찍히니까 누가 들어오는지 다 전달될 테고. 설령 문제가 생겨도 나한테 한마디 하면 했지, 누구보고 나무라는 성미는 아닌 거 뻔히 아는데?”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야.”
“그럼 대체 뭘 신경 쓰는데?”
“…….”
대답 없는 나를 내려다보며 권재림이 말을 이었다.
“성재현 이름이 나올 때마다 형이 무슨 표정 짓는 줄 알고는 있어?”
“그게, 지금 대화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짓을 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처럼, 순종적인 눈.”
순종적인 눈, 이라는 말에 나는 멍해졌다. 손목을 비틀 듯이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올라간다. 거세게 밀착한 몸이 나를 대문에 짓눌렀다.
“성재현이랑 있으면, 매번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내가 언제…….”
“그 새끼가 형을 사기라도 했어?”
그 순간 나조차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당황? 아니면 두려움? 미지근한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그럼 나한테도 팔아.”
“헛소리하지… 읍!”
급작스러운 키스였다. 달라붙는 입술에 내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나는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권재림은 내 턱을 움켜잡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내 입술을 삼키고 빨았다. 혀가 들어와 입속을 휘저어댔다.
“흐, 으으, 읍, 윽.”
숨이 막혔다.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질컥거리는 소리가 귀 안까지 관통했다. 나는 그의 팔뚝을 꽉 잡았다. 벗어나려고 무릎으로 배를 밀었으나 역으로 그가 내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웠다.
“윽!”
뒤통수가 쾅, 문에 부딪혔다. 머릿속이 둔탁하게 흔들린다. 권재림이 입술을 떼어냈다. 질식할 것만 같아 숨을 몰아쉬었다.
억지로 받은 키스에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받아줄 만큼 받아줬으니까 그만해.”
“받아줄 거면 더 받아야지.”
바짝 밀착한 그가 내 입술을 핥는다. 내려온 손이 가슴팍을 더듬어댔다. 셔츠를 두드리듯 문지르던 손끝이 내 살을 꼬집었다.
“키스밖에 안 했는데도 젖꼭지가 설 수 있어?”
“씨, 발, 하지…!”
“남자도 그런 줄은 몰랐네. 아니면 형이 잘 느끼는 건가?”
난폭한 희롱에 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권재림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더욱 몰아붙였다.
“존나 꼴리게 구니까 내가 더 감질나잖아.”
“그마, 한, 하라고… 말, 을…!”
급기야 눈물이 핑 돌았다. 축축한 눈을 질끈 감자 뺨에 물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이럴 때마다 내가 싫었다. 화가 나면 눈물부터 먼저 나는 편이었다. 진짜, 한심한 꼴이었다. 멍청하게 눈물이나 흘리고. 소매로 눈을 닦으려는 순간 내 몸을 꽉 누르고 있던 권재림이 순순히 물러났다. 헝클어진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묘했다. 억울하고, 심통 난 눈.
여태 자기가 나를 추행해놓고 왜 더 괴로워한단 말인가. 나는 씩씩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아스팔트를 밟으며 오르는 기척은 가까웠다. 차 문이 닫히고 열린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무님.”
정영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집 앞에서 ‘전무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성재현.
너무 급작스러웠다. 분명 내가 아는 대로라면 성재현은 월요일까지 이태원동에 있다가, 오전에는 본사에서 회의 후 저녁에 이쪽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정이 변경되었던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핸드폰을 두고 와서 나는 오늘 오전까지 아무런 상황을 전달하지도, 받을 수도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게다가 왜 차는 저택 안 주차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멈춘 거지.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얽히다 못해 머리가 고장 난 것만 같았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대문 앞에 멈춰 선 성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재림아, 여긴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그는 내가 아닌 권재림에게 말을 건넸다. 밀착했던 몸을 일으킨 권재림은 성가시다는 눈으로 성재현에게 대답했다.
“내가 이 근처에 오는 것도 굳이 전무님한테 연락해야 해?”
“네가 여길 들를 만한 일이 있나 궁금해서.”
“보고도 몰라? 강진하 때문이지.”
권재림이 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성재현은 빙긋 웃었다.
“난 또, 미술관 쪽에서 전시된 그림 건으로 전달할 이야기가 있나 했거든.”
“그랬으면 엄마가 말해줬겠지.”
“하하, 그렇긴 하네.”
“근데.”
의아한 표정으로 성재현을 빤히 관찰한 권재림이 뒤이어 말했다.
“전무님 얼굴에 그 커다란 밴드는 뭐야?”
“아, 이거.”
성재현이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의 오른쪽 뺨에 살색 반창고가 널따랗게 붙어 있었다.
“설마, 누구한테 맞았어?”
권재림이 킥킥거렸다. 비웃는 어조에도 성재현은 태연하게 생긋 웃었다.
“그래. 생각지도 못한 누구한테 한 방 맞았어.”
“뭐야, 진짜 맞은 거야? 와,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데.”
“그러게.”
성재현이 뺨을 가볍게 문지르며 내 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대단하긴 했지.”라고 덧붙이는 말과 함께 옅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애꿎은 입술만 연신 깨물었다. 누구라고 특정하진 않았으나 성재현이 가리키는 사람은 분명히, 나였다.
“강진하 씨.”
“…네.”
“손님이 왔으면 미리 정 비서한테 연락해주지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였지만 나는 마냥 천진하게 안도할 수 없었다. 성재현은 내가 핸드폰을 놓고 간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거기다 얼굴에는 아파 보일 정도로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 놨다. 나한테 맞았다고 시위라도 하고 싶은 건가.
어깨를 가볍게 추스르며 성재현이 말했다.
“이왕 왔으니 안에서 이야기할까. 어차피 고모님께 부탁드릴 일도 있거든. 온 김에 너한테 말하면 될 거 같네.”
“뭔데.”
“음, 큰 건은 아니고. 사고 싶은 회화가 있는데 언제쯤 경매장에 오를지 궁금해서.”
“여전하네. 그림에다 돈지랄 하는 거.”
“타지도 않을 신형 스포츠카를 사들이는 네 취미랑 내가 그림 모으는 거랑 딱히 차이는 없어.”
은근한 지적에 권재림은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에 오만가지 욕설이 보이는 듯했다. 다행히 거기서 더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닫힌 정문이 열렸고 정영호가 두 남자를 안내했다.
집 안에 들어서자 마른걸레로 매끄러운 가구 위를 닦는 가정부가 보였다. 그녀는 거실에 갑자기 들어온 사람들을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커피 별로 안 좋아했던가? 포도 주스 마실래?”
“포도 주스? 내가 어린 애냐? 차라리 와인을 줘라.”
“낮술은 내가 별로 안 좋아해.”
권재림이 투덜거리든 말든 성재현은 주스와 차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가정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사부작사부작 슬리퍼가 바닥을 희미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멀어진다. 탁자에 놓인 생화를 손으로 툭 건드리던 성재현이 나를 올려다봤다.
“아참, 강진하 씨 이것 좀 정리해주겠어요.”
그가 자연스럽게 내민 건 방금까지 입고 있던 외투였다. 껄끄러운 자리를 피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한편으론 불안했다. 권재림이 일부러 둘이 있었던 걸 과장해서 말한다거나, 괜한 말을 지어내서 성재현을 도발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운 부탁이에요?”
“아닙니다.”
나는 그의 손에서 외투를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내 손등을 훑듯이 살짝 스쳤다. 별거 아닌 접촉이건만 나도 모르게 손을 재빠르게 거뒀다.
시키는 대로 지하에 있는 드레스 룸 입구에 코트를 걸었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나 또한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리 무겁지도 않은 옷인데 짓눌리는 무게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1층으로 돌아가니 권재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심히 돌아가. 고모님께 안부 전해드리고.”
성재현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정작 권재림은 무뚝뚝하게 굳어있었다. 시종일관 성재현을 향해 이죽거리던 비아냥조차 없었다. 썩 유쾌한 대화는 아닐 게 뻔했지만, 왠지 표정이 낯설었다.
정영호가 그의 차를 주차장까지 끌고 왔다. 나는 차에 올라타는 권재림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검은 차창이 슥, 내려간다. “진하 형. 이리 와봐.” 능글거리는 어투가 아닌 가라앉은 목소리. 나는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한 달 반 뒤에는 여기서 나와. 내 집에서 지내게 해줄게. 아니, 그냥 거기 줄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형이 성재현이랑 같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널 만나는 것도 그놈 거쳐야 한단 식으로 구는 것도 좆같고.”
“그래서.”
“지금 하는 일 계약 기간만 끝나면 성재현이랑 상관없어지잖아. 여기 있을 이유도 없고.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정 불편하면 내가 비서로 고용해줄 테니까.”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통첩에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차창이 올라갔지만 차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창문 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사그락, 정영호가 잔디를 소리 나게 밟았다. 집 안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나는 차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커튼을 닫고 조명을 하나씩 켠 나는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어둑어둑해진 2층에 올라가 불을 켜다 보니 어느덧 서재 바로 앞이었다.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성재현은 권재림이 떠나자 곧바로 사무실 겸용으로 쓰는 서재로 들어갔다. 정영호가 돌아가고 밤이 되도록 그는 2층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저녁 식사 때 잠깐 식당으로 내려온 게 전부였다. 식사 내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적막을 씹는 듯했다.
불안하고 불편했다. 불과 하루 전에 나는 그의 뺨을 때렸다. 일순간 치민 분노 때문에 저지른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성재현은 그걸 보란 듯이 드러냈다.
나는 성재현이 부르기를 기다렸다. 계약 위반이나 해고, 그런 것도 아니라면 체벌이라도 할 터였다. 그러나 내 모든 예상과 다르게 그는 지극히 조용했다.
이대로 모른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는 걸까. 따지고 보면 어제 일을 되짚는 건 성재현한테도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비서도 아니며, 그저 저택에서 성가신 일이나 시키는 고용인한테 뺨을 맞았다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꼴사나운 모양새가 아닌가. 자존심과 겉치레가 중요한 그에게 내가 한 짓을 곱씹을 여유는 없으리라.
어쩌면 소모품처럼 쓰고 버릴 도구에 실수로 베인 정도로, 사소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쓰임새가 사라진 도구는 헐값으로 처분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보고, 듣고, 배운 그들의 사회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모르겠다. 굳이 성재현을 건드리지 않는 게 가장 좋은 판단이겠지. 쫓겨나든 뭘 하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뻐근한 손목을 주무르며 계단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간다. 틈 사이로 흘러나온 환한 빛이 넓어지고, 그림자가 길쭉하게 내려앉았다.
“강진하 씨.”
성재현이 불렀다. 고저도 없는 편안한 목소리였건만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숨을 한 차례 길게 내쉰 뒤 몸을 돌렸다. 샤워를 했는지 목덜미에 물방울이 남아있었다.
“네. 전무님. 뭐가 필요하십니까.”
“나보다는, 강진하 씨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성재현이 손바닥에 쥔 납작한 물건을 들어 보였다. 도색이 닳아 벗겨지고 스크래치가 여기저기 난 낡은 핸드폰.
“가지고 있는 내내 생각보다 전화가 많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돌려줘야겠다, 생각했지. 중요한 연락을 놓치면 안 되잖아요. 특히, 부모님 소식은요.”
“아….”
혹시, 행방이 묘연해진 어머니한테 드디어 연락이 온 건가. 아니면 아버지가 위독하다거나 건강해지신 것 같다는 긴급 전화라든가. 어느 쪽이든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지 않게 말을 조심히 골랐다.
“안 그래도 길에서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흠, 감사하단 말로 끝이에요? 나한테 보답도 없이 받아가려고요?”
“…….”
“이거 내가 아니면 못 찾았을 거잖아요.”
입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간다. 성재현은 보란 듯이 내 핸드폰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그런 다음 서재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았다. 즉, 들어오란 의미였다. 나는 열린 문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으니 최악의 경우를 헤아리는 게 나았다. 때린 대가로 맞거나, 그를 섹스로 만족시켜야 하거나. 나는 문을 향해 무거운 발을 옮겼다. 발목에 철근이라도 매달린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웠다.
방에 들어서서 문을 닫고, 잠갔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 보이는 서재 오른편, 성재현은 푹신한 소파형 의자에 앉아있었다. 느른하고 권태로운 모습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가 낮아지고 발이 보였다. 그는 실내용 슬리퍼가 아니라,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러자 성재현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무릎 꿇으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강진하 씨 스스로 하네요. 나한테 죄지은 거라도 있어요?”
“…….”
“아, 그렇지. 어제 내 얼굴을 때리고 갔었죠.”
그는 허리를 숙여 내게 가까이 기울였다.
“강진하 씨 손 생각보다 맵더라고요. 귀가 울릴 정도였거든.”
그러면서 성재현이 뺨에 붙였던 반창고를 찍, 떼어냈다. 그의 얼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었다. 손톱으로 긁힌 듯한 상처였다. 그를 때릴 때 운이 나쁘게도 손톱이 스친 모양이었다. 접착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성재현이 서글프게 말을 이었다.
“아팠을 거 같지 않아요? 피도 나더라고요.”
“일부러 긁은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짓이란 걸 이렇게 잘 알면서 어제는 왜 그랬을까.”
“잘못, 했습니다. 전무님. 정말로 죄송하단 말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거듭 용서를 빌었다. 속으로는 울컥, 서러움을 비롯해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다.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면서 주인에게 자비를 구하는 노예처럼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코 반복적인 사죄를 듣던 성재현이 구두 끝을 까딱 흔들었다.
“잘못했단 말 말고도 있을 거 같은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어디까지 참아줄지 계산이라도 하고 있나? 도통 모르겠네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 벼린 칼처럼 서늘했다. 나는 무릎에 둔 손을 꽉 쥐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쥐고 손가락으로 슬슬 쓸었다.
“어제 나한테서 도망가니까 기분 좋았어요?”
“전무님….”
“내가 모처럼 즐겁게 소꿉놀이를 시켜줬는데. 도망칠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지.”
“윽.”
머리채가 확 잡힌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그와 시선이 일직선으로 맞닿았다. 성재현이 구둣발로 내 허벅지를 찍어눌렀다.
“이렇게 떨 거면 그때 얌전히 돌아왔어야지.”
구두 굽에 찍힌 허벅지가 찌릿하다 못해 후벼 파이는 듯했다. 신음이 나올 것만 같아 입 속 살을 억지로 깨물었다.
“잘못했다고 말했죠? 그럼 벌 받을 생각도 했단 말이겠지.”
손가락이 내 입술 표면을 가로로 훑었다. 나는 입력된 프로그램처럼 입을 벌려 그의 검지를 핥으려 했다. 그러나 성재현은 내 입 안을 손가락으로 쑤시는 대신 나를 살짝 밀어냈다.
사무 책상 아래에서 종이 가방을 꺼내 든다. 동물 로고와 함께 ‘PETLOVE’라는 영문이 쓰여있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든 성재현이 내 손에 살포시 올렸다.
“스스로 채워.”
손에 들린 비닐 포장을 내려다봤다. 손이 떨렸다.
굵은 밧줄이 달린, 개 목걸이였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어요.”
성재현은 못마땅하다는 어투로 내게 다그쳤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리 없는 완고하고 오만한 얼굴이었다. 손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아까는 뭐든지 다 할 것처럼 빌었잖아요.”
“…저는 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못 하겠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깟 핸드폰 마음대로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이상하게도 성재현이 내 모든 걸 붙잡고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둥글게 매듭진 가죽은 제법 두꺼웠다. 표면은 코팅제로 반들반들 윤이 났고, 중간에는 도색된 방울이 달려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사람이 차고 다닐 용도는 아니었다.
성재현은 두 손을 깍지낀 채 유유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천천히 목에 가죽끈을 가져다 대고 이음새를 채웠다. 목둘레에 적당하게 맞는 사이즈였다. 딸랑, 딸랑.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가 귀를 찌르고 손잡이가 달린 끈이 등 뒤를 타고 흘러내렸다. 흡사 뱀이 기어 내려가는 듯했다. 팔과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목에 달라붙는 불쾌한 감촉을 외면하려 애쓰며 성재현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팔을 괴고 앉아있는 성재현의 눈을 마주하는 대신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바지 중심이 부풀어 있었다. 몇 번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입 안에 성기를 넣고 빨면서 그의 비위를 맞출 셈이었다. 바지 버클을 풀고자 손을 올리는 순간 가만히 앉아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성재현이 손등을 쳐냈다.
“내가 언제 손대라고 했죠.”
“아….”
“그렇게나 내 좆이 빨고 싶어요?”
미묘한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나는 속으로 차오르는 혐오를 내리누르며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얌전히 무릎을 꿇고 시선을 아래로 뒀다. 그러자 성재현이 내 목에 이어진 리드 줄을 쥐고 손바닥에 칭칭 휘감았다. 팽팽해진 줄이 내 목덜미를 당기고, 자연스럽게 성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옷.”
그의 발이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다. 벗으라는 암묵적인 지시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바지, 속옷까지 남김없이 벗었지만 예전처럼 수치스럽진 않았다. 다만 미적지근한 실내 공기가 피부 위를 설렁거리는 걸 느낄 뿐이었다.
성재현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검은자위에 조명이 비쳐 심해의 기포처럼 흐느적거린다. 쥐고 있던 리드 줄을 바짝 당긴다. 나는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그에게 끌려갔다. 고개를 숙인 성재현이 턱을 가볍게 쓸어주며 느른하게 속삭였다.
“이제 빨아봐. 대신 입만 사용해서.”
나는 바짝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붙였다. 입술과 이로 그의 버클을 잡고 혀로 굴려 간신히 풀었다. 종종 손이 올라갈라치면 성재현은 내 목줄을 잡아당기며 “안 돼”라고 냉엄하게 명령했다.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간신히 지퍼를 이로 잡고 직, 내렸다. 벌어진 바지 안쪽에 커다랗게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천에 비쳤다.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 크기였다. 허리 밴드를 끌어 내리자 불쑥 성기가 튀어나왔다. 핏줄이 도드라진 기둥과 축축한 귀두, 그리고 체모에 감긴 음낭. 머스크 향과 섞여 어딘가 묵직하고 들척지근한 살냄새가 풍겼다.
“하, 웁.”
입을 크게 벌리고 그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상당한 양감에 턱이 뻐근했다. 입술을 오므리고 점막으로 포피를 감싸며 소리 나게 빨았다. 무의식적으로 이를 세우자 성재현이 줄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읍!”
“아무리 급해도 물면 안 되지.”
웃으면서 줄을 탁, 탁 흔든다. 경고였다. 나는 볼을 홀쭉하게 오므려 흡착하듯 성기를 빨았다. 굵고 길쭉한 성기의 부피가 자꾸만 팽창했다. 뭉툭하게 부푼 귀두가 점점 깊이 들어와 목구멍을 건드렸다. 헛구역질을 간신히 삼키며 성기를 빠는 데만 집중하려 애썼다.
“하, 아.”
성재현이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귀두구에서 끈적거리는 물기가 침과 뒤섞여 입가까지 적셨다. 이대로라면 금방 사정할 게 틀림없었다. 그때, 성재현이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흐으, 컥, 허, 으웁.”
단번에 귀두가 깊숙이 들어왔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살덩어리에 온 신경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성재현은 “하아.” 하고 나른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목구멍은 여전히 좁네.”
“우읍, 흐, 큽.”
“그대로, 목에 힘 빼고, 후… 끝까지 삼켜.”
성재현이 눈을 가늘게 감고 세차게 들이박았다. 묵직하게 부딪친 성기가 목구멍을 가르듯 들어왔다. 혀 밑으로 고인 침이 입술 새로 질질 흐른다. 괴로웠다. 아니, 괴로워야만 했다. 코 아래에 살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목 안을 난폭하게 쑤시던 좆이 부드럽게 물러날 때마다 입천장이 간지러웠다. 방울이 그의 허벅지에 부딪힐 때마다 탁한 쇳소리가 났다. 울대뼈가 찌릿했다. 혀에 고인 체액을 삼키자 후르릅, 하고 차진 소리가 났다. 삼키길 기다렸다는 듯이 성재현이 입속으로 다시 좆을 처박았다. 목 아래가 꽉 막힌 것처럼 깊이 들어왔다. 안을 채우듯 꿈틀거리는 두툼한 살갗과 기둥을 휘감듯이 도드라진 핏줄까지 느껴질 만큼 지독한 자극이었다.
“강진하 목구멍, 자꾸 오물거리는 거 알아요?”
“욱, 흐, 크웁.”
“쫀득쫀득하게 달라붙는, 게, 좆 받는 구멍 그 자체, 네요. 음.”
탁한 숨이 섞인 고고한 목소리로 성재현은 내 구석구석을 평가했다. 목구멍을 휘젓는 성기가 입 안 구석구석을 거칠게 압박한다. 카펫을 짚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대로 퍽퍽 내 입에 가져다 대고 허리를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에 억지로 맞춰 꿀떡꿀떡 성기를 삼키려 애썼다. 음모부터 고환까지 철퍽철퍽 아랫입술과 턱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까지 울렸다.
“윽.”
혀 안을 꾹 누르며 침범하던 성기가 파르르 경련했다. 사정하려는 신호였다. 늘 그렇듯이 입에다 사정하고, 먹으라고 하겠지. 나는 숨을 참으며 마지막을 기다렸다.
불시에 움직임을 멈춘 성재현은 미동이 없었다.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에 그가 목구멍에서 성기를 쭉 빼냈다. 침과 묽은 체액이 섞여 찌익 귀두와 입술에 실처럼 이어진다. 딸랑, 하고 방울이 명랑하게 울린 것과 동시에 얼굴에 미지근한 정액이 뿌려졌다. 끈적한 정액이 앞머리에서부터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한 감촉에 눈을 찡그렸다. 혀끝에 귀두가 툭툭 닿는다.
“왜 그런 표정이려나.”
“…….”
“아, 혹시 입에다 좆물 쏴줄 걸 기대했는데, 안 해줘서 실망했어요?”
“…입에다 하실 거라 생각, 해서.”
바닥을 짚은 두 손을 힘껏 쥐었다. 성재현은 그런 나를 잠자코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피식거렸다.
“착하네. 그런 것도 생각하고.”
뜻밖의, 하지만 원치 않은 칭찬이었다. 목줄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린다. 몸을 일으킨 그가 바지를 추스르는 걸 보며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네?”
성재현이 몸을 낮춰 내 시선을 마주했다. 가지처럼 뻗은 그의 손이 헐거운 목줄 안쪽 살갗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그의 손을 따라 울렸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나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보통 강아지들은 주인에게 애교 부리잖아요. 헥헥거리면서, 배를 뒤집어 깐다든지, 멍멍 짖는다든지. 응?”
휙, 당긴 목줄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성재현은 바닥에 짓눌린 나를 내려다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진하가 자꾸 사람처럼 말을 하려고 하네.”
**
어지럽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어도 눈앞에 진득거리는 열기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조명을 등진 내 시야에는 보이는 거라고는 화려한 문양의 카펫, 그리고 검은색 옥스퍼드 구두.
“아윽, 흑!”
갑자기 쏟아지는 진동에 나는 몸을 떨었다. 구멍에 삽입한 바이브레이터가 나를 채근하듯 울렸다. 카펫을 짚은 손을 힘껏 쥐었다. 허벅지 사이로 끈덕진 물기가 줄줄 흐른다. 엉덩이에 매달린 털 뭉치가 자꾸 무릎 뒤를 간지럽혔다.
온 힘을 다해 엉금엉금 기어간 나는 문 앞에 놓여있던 골프공을 입으로 물었다. 잇새로 침이 흘러 자칫하면 빠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리 와.”
등 뒤에서 성재현이 명령을 내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 나는 성재현의 구두 아래에 공을 툭 떨어트렸다. 차오른 숨과 기침이 뒤죽박죽 섞였다.
축축한 골프공이 데굴데굴 구르는 바람에 카펫에 물기가 생겼다.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던 성재현이 말했다.
“진하야, 공놀이가 재미없어?”
“흡, 아니… 아, 앗!”
배 속까지 울리는 진동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앓는 신음을 내뱉었다. 성재현이 컨트롤러를 마지막 단계까지 올린 탓이었다. ‘사람 말’을 할 때마다 그는 보란 듯이 내 눈앞에서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깊숙이 쑤셔 넣은 바이브레이터가 강하게 떨릴수록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미묘하게 스치는 쾌감은 끝까지 치닫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카펫에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고 헐떡거리는 게 전부였다.
“재미없으면 다른 놀이 할까?”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성재현이 물었다. 다른 놀이, 라는 말은 이보다도 더 끔찍한 짓을 시키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성재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성재현이 피식거렸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르겠네.”
다리 사이에서 어릿하게 울리는 진동이 다시금 커졌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나는 성재현의 무릎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머, 멍멍!”
“좋아?”
“…멍, 머으, 흡.”
짖는 소리를 내다 말고 비참함에 목이 떨렸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성재현이 기분 나쁠까 봐 나는 뺨을 그의 다리에 대고 계속 작위적인 짖는 소리를 냈다. 딸랑, 딸랑. 방울이 어리광을 피우는 것처럼 울렸다. 성재현은 말이 없었다. 그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뱉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그가 탁자에 올려둔 바스켓에 손을 뻗었다. 공이 또다시 데구르르 굴렀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공밖에 모르는 개처럼 기었다.
장내에 가득 주입한 윤활제가 배 속에서 찰랑거리는 것만 같았다. 구멍에서는 점성을 잃은 물줄기가 쉬지 않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변을 참는 것처럼 허벅지를 모았다. 그 순간 각도가 어긋난 바이브레이터가 안쪽을 꾹 눌렀다.
“아, 아아! 아, 히으, 흑.”
등줄기가 떨릴 만큼 강한 쾌감이었다. 일시적인데도 온몸의 긴장이 풀릴 정도였다. 나는 몸을 옹송그리고 덜덜 떨었다. 간지럽고, 괴롭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주변의 모든 공기와 빛이 나를 갉아먹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강진하.”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나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어느 틈에 가까워졌는지 다리 사이로 그의 길쭉한 그림자와 윤이 나는 단정한 구두가 보였다. 그가 이름을 불렀건만 나는 차마 성재현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저 멍청하고 얼빠진 것처럼 바닥만 보고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듯 늘어졌던 목줄이 점점 마디마디 짧아지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난 공놀이를 하자고 했지.”
“으으, 응,”
“이렇게 자지를 세우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가 벌어진 다리 사이로 오른발을 집어넣고서 훤히 드러난 내 고환과 성기를 쓱 문질렀다. 기립한 성기에 직접적인 자극이 닿으니 무릎이 경련했다. 구두 코가 회음에 비비적거렸다.
“흥분해서 구멍이 벌름거려요.”
“아, 아.”
“애액도 이렇게 줄줄 새고. 못 봐주겠네.”
윤활제와 체액이 구두에 질척하게 묻어 반질거린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발을 까딱 앞뒤로 흔들며 고환과 회음을 끈덕지게 건드렸다. 둔탁한 마찰에 부들부들 어깨가 떨렸다.
구둣발로 기둥과 사타구니를 비비고 문지를 때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윽고 구두가 둔부 골을 파고들었다. 질척하게 젖은 구멍에 꽂힌 바이브레이터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그는 내 구멍에 구두 끝을 삽입하며 말했다.
“골프공을 입에 물고 올 게 아니라, 구멍에다 넣어줄 걸 그랬어요.”
“아, 으.”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까요? 배가 부를 때까지 골프공을 집어넣는 거지. 몇 개나 들어가려나. 다섯 개? 아님, 열 개?”
바스켓에서 공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럼 이거 하나씩 입으로 물어와서 구멍에 넣어 보는 건 어때요?”
바닥으로 추락한 골프공이 탁, 탁, 주변을 구른다. 여덟 개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구르는 걸 보며 나는 창백하게 질렸다. 오들오들 떨리는 어깨에 목 아래에 단 방울이 딸랑거렸다.
“무서워요?”
몸을 숙여 내 턱을 잡아 올린 성재현이 물었다. 눈물과 땀이 뒤섞여 축축해진 뺨을 긴 손가락이 문질러 닦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섭냐고 묻잖아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형형한 눈이 나를 쏘아본다. 수틀리면 얼마든지 짓밟아 버리겠다는 극악함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재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왜 그렇게 겁 없이 굴었어요.”
“아….”
“얌전하게 집에 들어오고, 나만 졸졸 쫓아오면 되는 건데.”
끈이 뒤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목에 채운 가죽이 살을 파고들며 숨통을 죄었다. 나는 목걸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손가락으로 틈을 만들었다.
“어제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요?”
성재현은 그대로 나를 카펫에 짓눌렀다. 귀밑머리에 입을 맞춘 그가 귓불을 바득 깨물었다.
“버림받은 개만도 못한 기분.”
“앗, 하윽!”
“좆같아서, 잠도 안 올 정도로….”
나는 성재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눈도, 볼 수 없었다. 단지 이를 악문 듯한 그의 말과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구멍에 박혀있던 바이브레이터가 쑥 빠져나갔다. 안에 고여있던 점액이 후두둑 사방으로 튀었다. 가짜 꼬리가 매달린 바이브레이터가 카펫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밑이 빠진 것처럼 싸늘해졌다.
“골프공을 내가 왜 넣겠어요.”
찰그랑, 버클을 푸는 소리에 아래를 쳐다보자 성재현이 성기를 손으로 훑고 있었다.
“여기다 넣을 건 내 좆 하나밖에 없어야지.”
그는 구멍에 툭툭 귀두를 두드렸다. 입을 벌린 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구멍에 곧바로 성기가 쑥 침범했다.
“으읍.”
그새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는 바이브레이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부피였다. 미끄러지듯 푹 들어온 살덩어리에 골반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두 팔을 휘저으며 카펫을 긁었다. 도망치고자 하는 발악 어린 몸짓이었다. 성재현은 한 번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푹 찔러넣었다.
“아악!”
여유라곤 전혀 없는 거칠고 드센 움직임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한 마디도 안 남기고 들어온 성기에 배가 불룩거리는 것처럼 거북했다. 좌우로 넓게 벌어진 허벅지를 두 손으로 꽉 잡아 누른 성재현이 허겁지겁 내 가슴을 빨았다. 유두가 그의 이에 잘근잘근 씹혔다. 살이 찢기는 듯해 아팠다. 침으로 진득해진 유두가 반들거리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같은 부분을 또 빨고 빨았다.
“아, 프, 아파, 앗! 아, 흐윽!”
자극이 쌓이고 쌓여 우르르 몸 위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시야마저 어질어질했다. 성재현은 내 몸을 누르고 강하고 깊게 허리를 움직였다. 두툼하고 길쭉한 성기가 퍽퍽 안을 때릴 때마다 내벽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졌다. 안을 채웠던 윤활제가 꿀렁꿀렁 흘러내렸다. 성기와 구멍이 맞물린 부위가 찐득거리며 움직임에 따라 찰박찰박 물소리를 냈다. 그의 성기가 빠져나올 때마다 검붉은 기둥에 묻어난 흰 거품과 애액이 뚝뚝 떨어졌다. 스멀스멀 오르는 쾌감이 배꼽 아래에서 울렸다.
“으응, 아, 전므, 님, 그만, 하윽.”
“하, 후우, 윽.”
성재현이 미간을 찡그리며 밭은 숨을 거칠게 쉬었다. 내 무릎 뒤를 잡고 거칠게 쳐올릴 때마다 퍽퍽 고환이 엉덩이에 세차게 부딪혔다. 딸랑딸랑, 목에 달린 방울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그러다 성재현이 방향을 살짝 틀었다. 집요하게 안을 찌르는 선단에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아, 싫어, 싫, 어, 싫, 아아, 윽.”
발가락부터 척추를 타고 뇌까지 짓이기는 듯한 전율. 나는 몸을 뒤틀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성재현이 목줄을 바짝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몇 센티미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성재현은 내 몸을 콱 찍어누르고 아래를 난도질하듯 처박았다.
“아, 아아, 아으, 앗! 히, 아…!”
“씨발.”
흐느끼는 나를 향해 그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서 물이 뚝뚝 흐른다. 찌푸린 눈을 간신히 뜨자 상기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목에는 핏줄이 도드라졌고 깨끗하게 다듬은 눈썹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긋난다는 표현조차 감히 상상할 수 없던 남자는, 엉망진창으로 나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카펫에서 뒹구느라 헝클어진 머리, 구김과 군데군데 물기로 얼룩진 셔츠, 은은하고 고아한 향기를 줄곧 유지하던 그에게서 땀과 정액 냄새가 났다.
“아, 아으, 응, 하, 히윽, 앗, 아.”
쩍쩍, 이제는 구멍에서 흐르는 게 체액인지 윤활제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성재현은 흘레붙는 것처럼 내 구멍에 성기를 쑤셔 박기 급급했다. 고개를 가까이 숙여 내 뺨과 귀를 빨고 핥았다. 그는 짐승처럼 허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열렬히 흥분하고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흉측한 자극만이, 내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이자 희열이었다.
“가, 가요, 갈, 거 같으, 가, 아, 아으.”
“크, 윽.”
“아, 제, 제발, 가, 가, 고 싶, 아, 으윽.”
나는 허리를 들썩이며 그의 성기를 꽉 조였다. 구멍부터 성기, 뇌까지 자그만 벌레가 물어뜯는 것만 같았다. 가렵고 뜨겁고, 아릿했다. 그저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사정하고 싶었다.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 나는 애원했다.
“도련, 님, 으흑, 잘, 못했, 으니까, 용서, 해주세요.”
픽픽 전류가 튀어 오르는 몸을 잠재우고 싶을 뿐이었다. 성재현이 내 목을 붙잡고 힘껏 누른다. 입술이 벙긋거린다. 진, 하, 야. 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입 모양. 그러고는 성기를 있는 힘껏 내벽 깊숙한 곳까지 퍽 처박았다.
“힉, 아, 하윽… 아, 앗! 하, 으응….”
소리가 멎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내 심장만 크게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을 파드득 떨었다. 삐이, 이명이 짧게 울렸다. 소리와 풍경이 하나둘씩 되돌아온다. 나는 카펫에 누워 할딱거렸다. 배와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자 배 위에 고인 정액이 둥그런 선을 타고 조르륵 흘러내렸다.
성재현은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여전히 맞물린 아래를 그가 한 번 콱 찧어 올렸고 나는 강렬한 압박감에 낮게 신음했다. 머지않아 그가 내 안에다 사정했다. 성기를 빼내자 질척하게 젖은 입구에서 정액이 울꺽 새어 나왔다.
적막 사이로 공기 청정기가 지잉, 청결한 공기를 흩뿌렸다. 성재현은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화난 표정도,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미건조하지도 않았다. 혼란과 당황이 옅게 드리운 그를 올려다보던 나는 조용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섣불리 목줄에 손을 대거나 입을 열진 않았다. 무릎을 꿇고서 그의 바지를 추스르고, 몸을 일으키도록 손을 내밀었다. 성재현은 순순히 내 손을 잡고 일어났고 나는 굴러다니는 단추를 챙겼다.
“무릎에.”
성재현이 말을 꺼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쳐다봤다. 정액과 윤활제가 흘러내린 다리, 무릎 주변이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당분간 멍이 좀 들겠네요. 혹시 뼈가 부러진 것 같으면, 박 교수한테 연락하고요.”
“…네.”
방금까지 일어났던 난폭한 섹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점잖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샤워실에 불을 켰다. 아직 바닥이 마르지도 않아 미온한 샴푸 향기가 났다. 몸을 씻고 나왔을 때 성재현은 서재에 없었다.
“맞다, 핸드폰….”
뒤늦게 중요한 목적을 깨달은 나는 힘없이 웃음을 삼켰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방금까지 인간 취급도 받지 않고 허덕이던 주제에, 지금 핸드폰을 받지 못한 사실을 떠올려서 뭐 하자고.
어차피 지금 쫓아가서 되돌려 받기도 애매했다. 성재현이 나를 침실로 부른다면 모르겠지만. 핸드폰 없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팔을 뒤로 돌려 목걸이를 풀었다. 발긋하게 멍이 오른 자리를 더듬었다. 아프면서도, 짜릿했다.
다음 날, 성재현은 일찍 본사로 향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를 배웅했고, 그는 나를 지나쳐 차에 올라타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정오에 성재현의 개인 물품을 챙기러 들른 정영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종로점에서 들어온 분실품인데, 강진하 씨 핸드폰 같아서 들고 왔습니다. 맞나요?”
“아,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겉면이 다 닳은 핸드폰을 받아 들자마자 정영호는 몸을 돌렸다. 나는 정영호가 차를 타고 떠난 뒤에도 핸드폰을 쉽사리 열지 못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돌려받은 것처럼 불길했다. 삑, 삑, 배터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알림에 핸드폰을 열었다.
문자, 전화, 수신 내역, 발신기록, 연락처.
숫자 하나 남김없이 비어있었다.
**
삭제된 핸드폰 데이터는 결국 복구하지 못했다. 핸드폰 수리센터 웹사이트를 비롯해 사설 업체 블로그 리뷰 등등을 찾아봤으나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간혹 사설업체 같은 데서 비싼 수리비를 받고 데이터를 복구해주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둥 불확실한 내용뿐이었다.
텅 빈 핸드폰을 보고도 나는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물론 어이없긴 했지만, 그대로 뛰쳐나가 성재현 멱살을 붙잡거나 삿대질할 정도의 큰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내 핸드폰에는 별거 없었다. 갖고 있던 연락처는 매년 한두 명씩 지워나가다 보니 남은 번호라고는 10명 언저리였고, 그마저도 연락하는 사람이 없었다. 문자 수신함은 스팸과 대출 광고 때문에 며칠만 지나도 용량 초과였다. 그래서 나는 기억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자가 아니면 그때그때 삭제하는 편이었다. 문자함에 든 문자도 기껏해야 정영호가 보낸 스케줄 관련 전달 문자, 그리고 대출 광고 스팸 문자가 전부였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간병인과 연락한 나는 핸드폰이 고장 났다는 핑계를 대며 전화번호를 다시 받았다. 아버지 전화번호야 기억하고 있었고 연락도 거의 안 하는 큰외삼촌 연락처는 오래된 다이어리에 꽂아둔 명함에서 확인했다. 그게 전부였다. 나한테서 앗아갈 수 있는 기록이라고는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다.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일부러 나를 도발하려던 말에 불과했던 게 뻔했다. 설령 의도를 미리 알았다 해도 나한테는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핸드폰은 그저 성재현이 분노를 드러낼 촉매제였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굳이 내 핸드폰 속 모든 내역을 전부 삭제했고, 보란 듯이 내게 돌려줬다. 무슨 의미인 걸까. 감시하고 있으니 얌전히 있으라는 경고, 협박. 뭐 그런 뜻인가. 아니면 해고하겠다는 암시인가.
무덤덤한 척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다. 당장이라도 계약 대행사에서 해고 통보가 올지도 몰랐다. 급하게 식당 홀서빙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전전했다. 그러나 며칠이 흘러도 성재현은 나를 해고하지 않았다. 정영호한테도 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기상 시간에 맞춰 그의 침실에 들르고, 식사를 챙기거나 외투를 준비해서 출근 배웅을 하고, 오후 내내 자질구레한 업무를 했다. 곧 다가오는 4월 말, 일본에서 주최하는 IT 박람회가 있었다. 광소 모니터를 비롯해 핸드폰을 주력 제품으로 내세우는 세한전자로서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출시 예정일을 잡은 신제품에 대한 샘플을 선보일 거라느니, 해외 지사에서 이번 세한 부스에 관련한 프레젠테이션을 주최사에 제출했느니. 중국 무슨 회사에서 이런 샘플을 메인으로 내세울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느니.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재현은 서너 명의 부장, 팀장들과 저녁 식사를 겸한 회의를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직원들과 부엌 안쪽 휴게실에서 식사를 했다.
그사이에 저택에 작은 인사이동이 있었다. 인사이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분명한 변화였다. 김상훈을 비롯한 주방 직원이 전부 바뀌어있었다. 듣기로는 제주지점으로 발령이 났다던가. 예전에 김상훈에게 듣기로 제주지점은 승진이라고 해도 내륙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현저히 적어서, 사실상 권고사직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시끄럽게 굴던 사람들이 사라지니 부엌은 평소보다도 더 조용해서 냉장고 가동되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양치를 하면서 나는 며칠 동안 느꼈던 점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뭔가, 느낌이 달랐다. 성재현은 내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일부러 괴롭히는 것처럼 흘리던 희롱조차 없었다. 다만 나와 마주치는 순간이 오면, 피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너무나도 집요했고 내 자취를 움켜잡는 것만 같았다. 화가 난 거라고 표현하기엔 어딘가 모호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날 일을 잊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나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커튼을 여미며 거실로 들어서자 성재현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9시 뉴스를 제외하면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그가 웬일로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꾸고 있었다. 수십 개의 유료 채널을 건너뛰던 화면은 스포츠 채널에서 멈췄다. 볕이 강렬한 잔디밭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서 있었다. 검게 그을린 팔뚝 아래 장갑을 낀 손이 클럽을 위로 크게 휘둘렀다. 철썩, 날아오른 흰 점이 토독, 풀밭을 데굴데굴 구른다. 성재현은 한쪽 다리를 꼬고 몸을 기울여 공이 굴러가는 모습을 감상했다. 하얀 골프공이 검은 구멍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가, 톡 떨어졌다. 홀인원이었다. 갤러리에서 박수가 쏟아졌고, 카메라는 연신 골프공과 선수를 번갈아 포커스 맞춰가며 해설하기 바빴다.
골프공을 바라보던 눈이 내 쪽으로 슬며시 돌아선다. 입꼬리가 음습하게 실룩거린다. 서재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야릇하게 뒤틀린 미소였다.
침을 꿀꺽 삼켰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가볍게 위아래로 까딱거린다. 팟, 텔레비전을 끄고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터벅터벅 다가온다.
“가끔 뉴스 보시는 모습만 봐서, 스포츠 채널도 보시는 줄 몰랐습니다.”
나는 어색한 침묵을, 평범한 말로 치장했다. 말을 걸고 싶진 않았지만 맞닥트린 이상 뭐라도 말을 꺼내야만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 시즌 경기는 챙겨봐요. 그래도 나름 즐기는 스포츠기도 하고, 생각보다 잘 치는 편이죠.”
“…네.”
어두운 눈이 나를 담는다. 그는 내게 몸을 살짝 기울였다. 나는 뒤로 물러나려다, 가까스로 몸을 굳혔다. “골프 좋아해요?” 속닥거리는 말에 움찔 떨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성재현이 내 팔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그런 것치고는 생각보다 소질 있던데요. 골프공을 구멍에다 한 번에 넣는 건, 아무나 못 하거든.”
대답 없는 나에게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쥐여준 성재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잘 자요. 강진하 씨.”
그대로 서서 지하로 내려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문이 열렸다가, 아주 천천히 닫힌다. 나는 복도 반대편으로 걸었다. 머무는 방 옆에 있는 샤워실에 들어섰다. 벽에 걸어둔 칫솔을 잡아 들고서 치약을 손바닥까지 넘치게 쭉 짰다. 그런 다음, 홀린 듯이 입 속을 거칠게 문질렀다.
골프 채널을 일부러 틀고, 가식으로 꾸민 웃음을 지으며 나를 건드리는 그의 말이 싫었다. 그리고 성재현을 계속 의식하는 것도 싫었다. 그날 후로 나는 성재현의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말없이 지나치거나, 말을 걸거나, 커피를 마시고, 안 마시고 그러는 사소한 것에 감정이 오락가락하고 불안했다.
대체 성재현이 나한테 뭐라고. 성재현은 나한테 돈을 주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용주라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모든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매번 매 순간 나는 그의 모든 것에 붙잡힌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발소리, 목소리, 손짓, 눈길, 심지어 그가 있었던 자리에 남은 흔적마저 나를 건드렸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입 안 가득 골프공을 머금은 것처럼 속이 막혔다. 입을 가득 메우던 골프공의 딱딱한 감촉이 남아있을 리도 없는데도 나는 허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들뜬 것처럼 입술과 뺨에 열이 오르고 아래가 시큰거렸다.
혀가 아플 정도로 치약을 듬뿍 짜서 입술과 이를 비볐다. 그러다 헛구역질이 섞인 거품을 뱉었다. 피가 맺혔다. 살이 튼 입천장이 얼얼하다. 찬물로 입을 몇 차례나 헹궜다. 숨이 찼다. 세면대를 붙잡고 헐떡거리던 나는 혀로 입 속을 쓸었다. 치아, 뺨 안쪽, 그리고 입천장.
혀에 오돌토돌 쓸리는 감각이 쓰라리면서도, 미묘하게 오싹오싹했다. 입천장 뒤를 훑을 때는 목구멍이 움찔 조여들 정도였다. 고인 침을 달게 삼킨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섞인 침을 몇 번이나 뱉고 물을 흘려 내보냈다.
**
잔고가 찍힌 통장을 눈대중으로 봤다. 황명수 명의로 된 계좌에 5억 원 출금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3분 전에 내가 창구로 보낸 돈이었고, 갚아야 했던 마지막 금액이었다. 이로써 몇 주간에 걸쳐 보낸 돈이 20억, 빌렸던 원금 전액이었다.
남은 게 없는데도 속이 시원했다. 황명수한테 억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지긋지긋한 빚이 드디어 끝났다. 굳이 문자를 보낼 필요도 없었다. 황명수 밑에 있는 직원이 입금 내역을 확인해 황명수한테 전달할 테니까. 고로 그 개 같은 놈이 연락할 빌미가 사라진 셈이었다.
후련했다. 이걸로 6년 넘게 시달린 걸 생각하자니 부산으로 내려가서 황명수한테 싱글싱글 웃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더러운 면상을 보며 웃어줄 바에는 영영 굿바이 하는 게 당연히 더 이로웠다.
때마침 정영호한테 문자가 왔다. 나는 그에게 본사에다 보낼 팩스를 부친 것과 우편물 확인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알겠다는 답변 뒤로 어디냐는 물음이 따라왔다. 둘러댈 필요도 없이 나는 강남구청 인근 은행이라고 대답했다. 성재현은 마지막 샘플링 확인 및 현장 시찰로 당진에 있었다. 부산에 잠깐 들를 거라 나흘 뒤에나 온다고 했다.
평안한 나날이었다. 윤중로에 드디어 벚꽃이 움텄고, 겨울 외투에서 한 겹 가벼워진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통장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탑승객을 기다리는 택시 앞으로 차 한 대가 난폭하게 멈췄다. 화려한 스포츠카. 불길한 직감을 느낀 것과 함께 신호등이 녹색으로 변했다. 서둘러 건너가려는 나를 가로막듯 클랙슨이 빵! 크게 울렸다. 빵, 빵, 빵! 화통 울리는 것보다도 더 시끄러웠고 지나치던 시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차 뭐야?” 하고 택시 기사들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흘깃거렸다.
지하철역 입구로만 내려가면 저 차랑 마주칠 일도 없다. 그러니까 빨리 걸어야만 하는데.
“아, 씨발! 강진하, 귀먹었냐?”
차 주인이 차 문을 열고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함으로도 모자라 정확하게 나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이젠 하다 하다 찻길에서 행패를 부릴 셈인가. 나는 낯뜨거운 시선을 무시하며 잰걸음으로 뛰었다. 그러나 불법 유턴까지 강행한 망할 스포츠카가 아예 내 앞에 멈춰 섰을 땐 의욕이 꺾였다.
“야.”
이제는 형도 아니고, “야”란다. 나는 기가 막혀서 차창 속 권재림을 노려봤다.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도가 지나쳤다.
“무슨 일이세요.”
“뭐? 무슨 일이세요? 지금 간만에 보는 나한테 한다는 말이 그거야?”
“하실 말씀 있으면 삼성동 오셔서 하세요.”
“아, 진짜, 왜 또 그래!”
아예 차에서 내린 권재림이 씩씩거렸다. 가뜩이나 선이 굵고 가무잡잡한 얼굴인데, 표정까지 찌푸리니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말하는 건 철부지 꼬맹이 같지만.
“정말, 어떻게 형은 볼 때마다 나한테 화만 내냐.”
“화낸 적 없어요.”
“씨발, 아오, 이게 지금 화 안 난 사람이 하는 행동이야? 어?”
“…….”
“아, 알았어. 잘못했어. 다 잘못했다니까? 뭐가 됐든 내가 잘못했어!”
완전 막무가내로 사과부터 하는 권재림을 보고 있노라니 우스웠다. 한 명은 나한테 사과조차 하지 않는데, 다른 하나는 말 한 번 뾰족하게 했다고 다짜고짜 사과부터 한다. 어느 쪽이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우위를 가를 수도 없었다.
“너 한가해? 어떻게 이렇게 수시로 내 앞에 나타나? 스토킹이라도 하고 다녀?”
“아니거든? 진짜 지금은 우연이었어! 내가 한가하긴 뭐가 한가해. 지금도 엄마가 닦달해서 어쩔 수 없이 할배들이랑 대화했더니 존나 피곤해 죽겠는데.”
“할배…?”
“교수들. 엄마가 대학원 가라고 하도 그래서.”
아, 그런 거군. 권재림은 외국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흔히 재벌의 유학코스라 불리는 학교는 아니었다. 이름이 있긴 해도 돈만 있으면 어영부영 들어갈 수 있다는, 사립대학은 만족스럽지 못한 학벌이었다. 그러니 이제 국내에서 괜찮은 대학원을 골라 넣어주려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입학 사정 비리란 말이었다.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
“아무튼, 정말 우연이었어. 삼성동 가려던 건 맞지만 난 형 여기 있는 줄은 진짜 몰랐다. 내가 무슨 인공위성도 아니고, 핸드폰 좌표 있어도 단순 GPS 추적으로는 단번에 찾기 어렵다고.”
“그 말은 해봤다는 소리야?”
“아니? 예를 들자면 그렇다고… 절대 안 했어, 안 했다?”
그렇게 부정할수록 정말 한 것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쳐다보자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권재림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디 다녀오는 길인데.”
“…은행.”
“은행? 돈 필요해서?”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은행에 다녀오는 길이고, 이제 가려던 차였어. 너야말로 삼성동은 왜 오려고. 오늘 전무님 안 계시고, 알다시피 넌 못 들어와.”
“어차피 형 없으면 내가 거길 왜 가.”
“…그럼 어쩌려고.”
고민하던 권재림이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를 가리켰다. “커피 마실까?” 프랜차이즈 카페는 평일 이른 오후라 그런지 한산했다. 당장 급한 일은 없지만, 딱히 커피까지 마시면서 할 이야기가 있던가.
“서 있는 것보단 낫잖아. 형 추위도 많이 타고.”
스산한 도시 바람에 손등이 추웠다. 따뜻한 차 한 잔 테이크 아웃 하는 셈이라 치면 되겠지. 나는 먼저 앞서가는 권재림을 따라 카페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진 자리를 선호하는 나와 다르게 권재림은 해가 아주 잘 드는 소파에 착석했다. 지갑에서 카드를 쓱 내민 권재림이 말했다.
“내 카드로 사.”
“뭐 마실 건데?”
“음, 나는 달달한 거.”
“…카라멜 마끼야또? 바닐라라떼?”
“상관없어. 그냥 적당히 아무거나.”
아무거나. 가장 까다로운 주문이었다. 결국 가장 무난해 보이는 신메뉴와 따뜻한 녹차를 시켰다. 음료는 금세 준비되었다. 나는 트레이에 음료 두 잔을 받쳐 자리로 되돌아갔다.
예상대로 권재림은 나한테 별다른 용건이 없었다. 그저 시시껄렁한 주제로 말을 걸면서 나에게 자꾸 치근덕거릴 뿐이었다. 나는 뜨거운 찻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대강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릴 때부터 툭하면 권재림은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자기 이야기를 했다.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 이야기라든지, 새로 온 가정교사, 그리고 집에 있는 조각품, 게임 콘솔, 축구, 농구, 수영. 내가 한 번이라도 “응.”이란 대답할 만한 이야기라면 죄다 꺼내 늘어놨다.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키랑 덩치만 훌쩍 자란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시간을 쟀다. 내달이면 계약도 끝날 터였다. 삼성동에서 더 일할 필요는 없으니 나는 그대로 비밀엄수 조건으로 떠나면 끝이었다. 그러고 나면 권재림도 별로 만날 일이 없겠지. 지금이야 엮이는 부분이 있다 치더라도, 재벌가와 하등 관계없는 민간인이 된다면 만나려고 해도 부딪칠 영역이 없었다. 말 그대로 우연히 만나는 정도일까. 거기다 성미령 관장이 권재림을 내버려 둘 성격도 아닐 게 뻔했다. 그리 생각하자 권재림이 떠드는 것도 덜 귀찮았다.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성재현이 서울에 없어서 그나마 평안하거나.
“그래서 정말 내 비서로 안 들어올래?”
“일반 사원으로 들어갈 생각이라서 생각 없어. 애초에 비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엄연히 전문직이고.”
“형이 그런 면에선 전문가잖아.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런 일 했었던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나는 조용히 손에 쥔 컵을 만지작거렸다. 권재림은 입맛을 다시더니 주머니에서 금속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한 개비를 뺐다.
“형도 피울래?”
뚜껑 연 담뱃갑을 내미는 손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너나 피우고 와.”
“씁, 그럼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나 두고 가면 안 돼. 알았지?”
몇 번이고 엄포를 둔 뒤에야 권재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있던 여자 손님들이 문밖으로 나가는 권재림을 보며 소곤거렸다. 진짜 잘생겼다, 배우나 모델 같은 거 아냐? 나는 창문 너머로 담배를 피우는 권재림을 쳐다봤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얼굴이 굉장히 묵직했다. 나한테는 마냥 방정맞거나 능글맞게 굴던 녀석이라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어색했다. 담배 피울 때는 저런 얼굴이구나. 그러고 보니 첫 만남 이후로 담배 피우는 걸 몇 번 보지 못했다. 그마저도 대부분 밤이라 어두워서 보이는 건 실루엣이 전부였다.
담배를 피우던 권재림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카페 안쪽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티슈로 닦은 다음 돌아선 그때였다.
“긴가민가했더니, 맞네.”
짝,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손에 어안이 벙벙했다. 목덜미를 잡아챈 남자가 나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었다.
“예쁜아, 내가 몇 번이고 경고했었지. 오빠 전화 한 번이라도 무시하면 그때 진짜 서울 올라온다고. 응? 그렇게 내 얼굴이 보고 싶었어?”
얼얼한 뺨에 눈을 찌푸리며 위를 올려다봤다. 내 머리채를 잡아 쥔 그의 벌어진 잇새로 금니가 번쩍거렸다.
아.
“얼른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씨발년아.”
황명수였다.
이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넙데데한 면상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넓은 서울 한복판에는 좆같은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건가. 아니면 내가 재수 더럽게 옴 붙어서 마주친 건가. 어느 쪽이든 간에 기분이 개 같았다.
“번호 차단으로도 모자라 다른 전화도 씹더라? 응? 간이 부었지?”
“오늘, 송금했어.”
내 턱과 뺨을 한 손으로 꽉 쥐고 좌우로 흔들던 황명수가 비웃었다.
“내 전화는 존나게 씹으시더니 돈은 보냈어? 얼마나?”
“…서류상 갚아야 한다고 나한테 들먹였던 십억하고, 이자까지 전부. 오늘 열한 시에 계좌로 보냈는데. 확인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
내 말에 황명수는 휙,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굶주린 짐승 같던 낯이 아까보단 풀려있었다.
“아하, 내가 서울 오느라 바빠서 사무실은 다른 놈한테 맡기고 왔거든. 그래서 몰랐지. 연락이 하도 없어서 예쁜이가 오빠랑 한 약속 잊어버린 줄 알았잖아.”
황명수는 히죽히죽 웃었다. 연락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터넷으로 입금 내역 확인해보면 될 일인데. 나는 내 얼굴을 붙잡고 있는 그의 팔목을 잡아 아래로 치우며 말했다.
“이제 알았으면 손 치워요.”
“거참, 오빠랑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살갑지가 않네?”
“살가워야 할 이유가 없는데. 내가 방금 돈 다 갚았고 이제 그쪽이랑 채무 문제 끝났다고요. 굿바이 인사라도 해야 해요? 뭐, 잘 가라, 이 좆만도 못한 개새끼야. 이런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그래요?”
신경질이 난 나머지 대놓고 욕이 나왔다. 황명수가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다.
“서울 올라가더니 돈 열심히 잘 갚네. 대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왔어?”
“…일해서 나왔죠.”
“무슨 일? 뭐 호빠라도 다니면서 다리 좀 벌려줬어?”
바짝 몸을 붙인 황명수가 내 엉덩이를 조몰락거렸다. 저질스럽다 못해 끔찍한 감촉. 그리고 동시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돈의 출처가 황명수의 발언과 그리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모멸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여기서 부정하면 오히려 저 새끼 말에 넙죽 동의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태연한 척 표정을 갈무리하며 덤덤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사장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갚는 데도 방법과 수단이 필요했어요?”
“나야 단기간에 억만금을 버는 스킬이 궁금해서 그러지. 우리 진하가 오빠한테도 가르쳐주면 좋잖아. 내 사업에 좀 써먹게.”
사업 좋아하네. 그래 봤자 신용 등급도 없어 빌빌대는 사람들 등골 빼먹는 주제에. 나는 황명수의 팔을 세게 밀었다.
“그놈의 오빠 소리. 당신이 왜 오빠야, 형이라고 불러주기도 싫은데.”
“에이, 우리 진하한테 나 오빠 맞잖아. 명수 오빠, 하고 예쁘게 불러줄 때는 언제고.”
“닥치고 좀 꺼져요.”
“어허, 말버릇이 험하네? 또 맞아야 정신 차리려나?”
황명수가 웃으면서 손을 홱 들었다. 예전이라면 가만히 맞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주저 없이 황명수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아, 씨발! 아오! 썅!”
걸걸한 욕을 내지르며 황명수가 정강이를 붙잡고 펄쩍거렸다. 주먹을 들고 달려드는 그를 보며 나는 핸드폰 통화 버튼에 손을 갖다 댔다.
“어디 한번 나 때려봐. 나한테 손대는 순간 경찰에다 모욕죄에 폭행으로 신고해줄 테니까.”
“신고? 네가 나를?”
“그래. 신고한다고!”
표독스러운 내 외침에 황명수가 허허 웃었다. 그러더니 나한테 다가와 핸드폰을 잡고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뚜르르, 신호가 가고 “경찰서입니다.”라고 응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신고해.”
황명수가 나한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내가 너 때렸다고 신고한다며? 해, 빨리. 다 말하라니까? 피차 나도 너한테 맞았으니 쌍방이네.”
“…….”
“왜, 이참에 다 떠벌리자고. 먼저 니 아빠가 이십억 넘게 비합법 사채 쓴 것부터 해서, 외삼촌이 마산 하우스 노름판 돈 먹고 튄 거랑 안동에다 무슨 이름도 없는 회사에 투자한답시고 니네 엄마랑 외삼촌이 합심해서 돈 끌어쓴 것도 다 불어야지. 그리고 또 뭐 있더라. 어?”
수화기에서 “여보세요, 무슨 상황입니까.” 하는 음성이 이어졌다. 귀찮음이 역력한 어투였다. 나는 핸드폰을 두고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씹새끼가 있는데도, 신고는커녕 비명조차 못 질렀다. 황명수는 뻔뻔하게 “아이구, 죄송합니다. 숫자를 잘못 눌렀네요. 고생하십쇼.” 하고 굽실굽실 대답했다. 그런 다음 칼같이 뚝 끊어버렸다.
“신고한다고 잘도 소리치더니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됐을까?”
나는 먹통이 된 기계처럼 그가 핸드폰을 던졌다 받는 걸 쳐다봤다. 머리로는 핸드폰을 빼앗아 신고하겠다고 해놓고 정작 몸이 떨렸다.
외삼촌 때문에 어머니가 황명수한테 사채를 쓰면서부터, 재산이며 가족들과 관련된 기록도 죄다 이 새끼한테 협박거리로 넘어갔다. 거기서 알게 된 건 작은 외삼촌이 아버지 명의로 개짓거리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어디서 헛소문만 듣고 무작정 시도한 땅 투기, 도박 사기, 비 승인된 마약류 밀반입까지 안 한 짓이 없었다. 드러난 부분만 하더라도 외삼촌은 물론이고, 이름만 연루된 아버지까지 법정에 끌려갈 판이었다.
그리고 황명수는 이런 법적인 일에서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데 도가 튼 놈이었다.
“진하야. 내가 전에 말해줬잖아. 경찰이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까.”
황명수가 혀를 쯧쯧 찼다.
“경찰이 신고받고 온다 치자, 고작 이런 아웅다웅 정도로 뭐라도 해줄 거 같았어? 나 수갑 채우길 바란 거야? 무슨 증거로?”
“…….”
황명수가 지껄이는 말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자면 그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신고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자진해서 불법 사채를 신고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황명수한테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파출소에서 신고받고 출동한 순경들은 그가 내민 두툼한 봉투에 입을 싹 다물었다. 순경이 떠난 뒤 그는 주변 사람들 다 보란 듯이 내 뺨을 때렸다. “돈이 있어야 법도 따라주는 거야.”라고 히죽거리며 내 얼굴에 담뱃재를 튕기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예쁘게 굴다가도 꼭 이렇게 지랄 떤다니까.”
미동 않는 내게 황명수가 핸드폰을 던졌다. 퍽, 하고 가슴팍에 부딪힌 핸드폰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머리를 북북 긁으며 황명수가 중얼거렸다.
“하여간 아들이나 애미나 꼴값을 해. 그년도 내가 지 지갑인 줄 안다니까. 자꾸 찾아와서는… 그러니까 버림이나 받지.”
나는 그 말을 흘려 넘기지 않았다. ‘그년’이라는 상스러운 말은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 틀림없었다.
“황 사장님. 어, 엄마 만났어?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자 황명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니 엄마는 부산에 있을 때 만났지,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내가 묻는 거 그 말 아니란 거 알잖아. 엄마 언제 만난 건데? 최근에? 아니면? 버림받았단 건 또 뭔데!”
퍼붓는 내 말에 황명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모른 척하지만 평소 그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조롱하든지, 욕이라도 내뱉어야 할 인간이 입을 다무는 게 이상했다.
“아, 몰라! 내가 그걸 일일이 기억하겠어? 나한테 삼십만 원만 꿔달라고 지난달인가, 그때 찾아온 이후로 못 봤어.”
“삼십만 원? 그걸 빌려달라고 했다고? 이유가 뭔데?”
“니 엄마가 나한테 돈 빌린 게 하루 이틀이냐. 뭐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나 보지.”
뭔가 수상한 대답이었다. 여행을 가고 싶었을 거라고? 어머니는 멀미 때문에 멀리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여행을 갈 돈을, 그것도 고작 30만 원을 꾸려고 황명수를 찾아갈 리가 없었다. 빚 때문에 황명수한테 시달린 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황명수를 찾아갈 바에는 차라리 나한테 돈 달라며 울고불고했을 터였다.
“아, 지금 생각하니 그냥 빌려줄 걸 그랬네. 이자율 존나 높여서 무서류로. 그래야 우리 진하가 얌전하게 내 말을 들을 텐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황명수가 말을 이었다.
“돈 이야기 나온 김에, 오빠가 어제 강남에서 클럽 사업하시는 형님 뵈러 갔다가, 존나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거든?”
황명수가 나한테 바짝 들러붙었다. 귀에 축축한 숨이 닿는다. 소름 끼쳤다.
“몇 달 전부터 어느 기업 도련님께서 섹파를 졸라 갈아 치웠는데, 그게 죄다 비슷한 남자애라는 거야. 키는 백칠십 중반에 염색 안 한 생머리, 피부는 하얀 데다 말수 없이 조용하고 이쁘장한 애들로. 그리고.”
오른손으로 내 뺨을 건드린 황명수가 히죽 웃었다.
“죄다 너처럼, 여기에 점이 콕 있었대. 서러워서 눈물 뚝뚝 흘리면 물방울이 지나갈 거 같은 곳에.”
“…….”
“그래서 실장들이 아주 상품 찾아오느라 연예인 연습생으로도 모자라 일반인까지 들쑤시고 다녔다더라?”
“손 치워.”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음산한 눈이 나를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서 씹질 한 번에 얼마 받았냐?”
“뭐?”
“오백? 천? 이야, 잘나가네. 강진하 구멍 팔아서 부자 되겠다. 그러니까 내가 진즉 뭐랬어. 넌 씹질이 천직이라니까. 먹어본 내가 이렇게 장담하잖냐?”
눈을 크게 뜬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입에서 욕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개새끼, 이 빌어먹을 개새끼. 참다못해 핸드폰을 쥔 손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던 그때였다.
뒤에서 달려든 커다란 그림자가 황명수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황명수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배에 주먹을 꽂자 퍽, 하고 강타하는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넘어진 황명수를 제압한 그가 면상을 주먹으로 때린다. 쿵, 쿵, 타일에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득했다.
“이 씨팔 새끼야!”
관자놀이까지 벌게진 권재림이 욕을 퍼부으며 황명수를 연신 두들겨 팼다. 퍽, 퍽, 코에서 피가 튄다. 그러나 조폭 출신인 황명수 맷집도 만만치 않았다. 코피를 손등으로 닦아낸 황명수가 머리로 권재림을 들이받고 주먹을 날렸다.
얻어맞은 뺨에 손을 댄 권재림이 분기탱천해서 황명수한테 달려들었다. 우당탕 자빠진 황명수를 상대로 권재림은 발길질을 해댔다. 이러다간 정말 무슨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황명수와 우격다짐을 하는 권재림을 붙잡았다.
“그만해!”
“씨발, 놔! 이 새끼 죽여버릴 거라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권재림이 나를 팔로 세차게 뿌리쳤다. 힘을 조절 못 하고 휘두른 그의 팔에 얼굴을 철썩 맞았다. 아프고도 당황스러웠다. 눈이 아예 희번덕거리며 돌아간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권재림을 뒤에서 양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미친 새끼야,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아!”
온 힘을 다해 권재림을 말렸다. 힘이 어찌나 센지 붙잡은 게 아니라 내가 매달린 꼴이었다. 몇 분 동안 그를 끌어안고 용을 쓴 끝에 나는 겨우 권재림을 말릴 수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황명수를 확인했다. 코가 터지고 입에서 피가 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멀쩡했다.
“하, 씨발. 이게 무슨 좆같은 상황이야.”
상반신을 일으킨 황명수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권재림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씹새끼가, 어디서 주먹을 휘둘러?”
“너야말로 씹새끼한테 제대로 처맞고 싶어서 환장했냐?”
“뭐? 이 좆같지도 않은 게, 깜빵에서 콩밥 먹고 싶어 환장했나 봐? 어?”
그러자 권재림은 기도 안 차다는 얼굴로 발을 쾅 굴렀다.
“깜빵? 콩밥? 어디 한번 먹여봐. 씨발아.”
보란 듯이 황명수 앞에서 핸드폰을 꺼낸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30초도 안 돼서 “예.” 하는 여성의 깍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김 부장님. 난데, 저번에 나랑 점심 먹은 할배 있지. 왜 그 박앤정이었나, 무슨 로펌 대표 말이야. 지금 연락해서 자기 선임한다고 해. 어떤 놈이 먼저 선빵 쳐놓고 나 신고한다는데 그래서 나도 고소하려고. 고소장 준비부터 하라 그래. 삼십 분 내로 갈 거니까.”
황명수가 입을 쩍 벌리곤 황당하다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전화를 끊은 권재림이 발로 황명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야, 빨리 신고해. 난 변호사 있으니까 바로 가면 될 거 같거든?”
“나 참,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어이가 없어서.”
조잘거리는 말투에서 기가 팍 죽은 게 느껴졌다. 변변한 집안 자제란 걸 알아차린 거겠지. “카악” 하고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황명수가 권재림을 위아래로 흘끔거렸다. 음흉하게 번들거리는 그의 눈이 천천히 나한테 쏠렸다.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누구이고 무슨 관계인지 퍽 궁금하다는 역겨운 시선. 그야말로 좆같았다.
“우리 진하가 인기가 많네. 이래서 나한테도 개겼나 보구나?”
“어디서 좆같이…!”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에 욱하려는 권재림을 일단 화장실 밖으로 밀었다. 카페에 놔뒀던 외투를 챙긴 다음 차를 주차해둔 골목까지 권재림을 질질 끌고 갔다. 아니, 끌고 가려 했지만 반대로 권재림한테 질질 끌려갔다. 권재림은 나를 차로 밀어 넣더니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차는 미친 듯이 달렸다. 얼마나 속도를 내던지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권재림. 너 미쳤어?”
한강 둔치가 보이는 부근에서 차가 멈추자마자 나는 몸을 돌려 권재림한테 쏘아붙였다. 그 말에 권재림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형이야말로. 그 새끼 뭔데? 왜 그따위 미친놈을 아는 건데?”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강진하!”
“다음부턴 무작정 주먹부터 날리지 좀 마. 이러고 다니는 거 너한테 하나도 안 좋은 거 알면서 그래?”
“씨발! 내가 물어보잖아! 그 새끼 뭐 하는 새끼냐고!”
아예 내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은 권재림이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화가 난 얼굴인데 눈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눈을 내리깔고 심호흡을 했다.
“대부업체 사장.”
“대부업체?”
“돈 빌려주는 작은 사무실 같은 데 있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아무튼… 나랑 돈 문제가 좀 있는 사람이야. 어쩌다 보니 여기서 만난 거고.”
“돈 문제가 어떻게 있는데? 무슨 문제인데?”
“그건… 해결했어. 이제 괜찮아.”
“아, 존나 씨발. 괜찮긴 뭐가 괜찮냐고! 씨발. 괜찮다는 사람이 처맞고 다니냐? 어?”
권재림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놀라서 빼낼 틈도 없었다. 손으로 더듬더듬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는 표정이 정성스러웠다. 나는 그의 팔목을 붙잡고 몸을 뒤로 빼냈다.
“…저 새끼가 원래 손버릇 더러운 놈이라 그래. 폭행 전적도 있고.”
“씨발, 폭행 전적도 있는 놈인데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내가 화장실 안 왔으면 형 처맞고 있었겠네.”
“내가 뭐 맞기만 한 줄 알아? 몇 대 안 맞았어. 그놈이야말로 정강이에 파스 좀 붙여야 할걸.”
“그래도!”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만지는 거긴, 권재림 니가 실수로 휘두른 손에 맞아서 그래.”
“내 손…?”
그 말에 권재림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무안한 듯 손을 뗐다. 표정 한가득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한 나는 그의 오른손을 응시했다. 도드라진 뼈마디가 새빨갛다 못해 자줏빛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황명수가 맞받아친 탓에 권재림 얼굴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저런 상태로 집에 가면 아마 석영그룹 사모님께서 펄쩍 뛰고도 남을 텐데. 사람을 때렸다는 전화까지 본인이 직접 전했으니 이미 집안은 발칵 뒤집혔을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창문 밖을 보니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상가에 편의점과 약국이 보였다. 달칵, 잠금장치를 푼 나는 차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여기, 잠깐만 앉아있어.”
“어디 가는데?”
“약국. 금방 갔다 올게.”
약국에서 상처용 패치와 멍과 붓기를 가라앉히는 이완 로션 등을 샀다. 나와보니 차 안에 있으라 했던 녀석이 우두커니 약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 보여줘 봐.”
“손? 나 안 아픈데.”
“내일이면 백프로 멍들걸. 지금 파스라도 발라둬야 빨리 가라앉지.”
“멍든다고 죽나.”
“관장님이 너 아픈 거… 엄청 싫어하시잖아.”
내 말에 권재림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형은?”
“나?”
“형도 나 아픈 거 싫냐고.”
장난기라고는 도통 보이지 않는 표정이 진지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사람이 아픈 거… 좋아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
나는 사람이 아픈 게 싫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암 투병으로 고생하셨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난 뒤로는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었으며, 어머니마저 알코올 중독이었다. 아픈 모습이 좋을 리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였다.
“얼른 손이나 줘.”
내가 채근하자 권재림은 오른손을 얌전히 내 손바닥에 올렸다. 마치 강아지가 앞발을 올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는 암만 대단한 집안의 도련님이래도 나보다 어린 동생이구나, 싶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나는 권재림의 손에 꼼꼼하게 파스를 발라줬다. 그의 얼굴에 살색 패치를 붙여줄 때는 눈높이에 맞도록 발끝을 들어 올렸다. 남들이라면 상대방한테 허리를 숙이라고 했겠지만, 나는 반대였다. 나보다 높은 사람은 가만히 있는 거고 내가 움직이는 게 당연한 곳에서 자란 탓이었다. 이럴 때 보면 몸에 밴 습관이란 게 별수 없는 모양이었다.
“진하 형.”
권재림이 입을 열었다. 발돋움을 한 채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권재림이 내 목을 부드럽게 잡더니 작게 벌린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둔치 공원 근처에 가로등이 켜지고 꽃망울에 빛이 하얗게 번졌다. 입술을 떼어낸 권재림이 눈을 휘며 웃었다.
“형, 나중에 내 비서로 들어와. 진짜 잘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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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가 깨진 핸드폰을 열었다가 닫았다. 어머니에게선 여전히 답장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실종 신고를 한 지 몇 주째였고 어머니에 대한 연락은 없었다. 그간 얻은 실마리라고는 고속버스를 탔다는 것, ATM의 마지막 기록을 통해 알아낸 마지막 행선지는 강원도 동해였다.
그날 황명수가 흘린 말이 기분 나쁘게 맴돌았다. 어머니가 그에게 30만 원을 꾸려고 했단다. 3,000만 원도 아니고 30만 원이었다. 어머니는 늘 허영을 부리고 싶어했다. 사모님이란 단어는 그의 위태로운 자기만족을 채워주는 단어였다. 그런 어머니가 고작 30만 원 때문에 황명수한테 매달렸단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강원도에는 왜 간 걸까. 문득 스친 문장은 ‘세한 일가의 별장’이었다. 해외를 비롯해 국내 이곳저곳에 별장을 둔 세한 일가족들 사이에서, 특히 성윤명은 바다가 보이는 곳을 선호했다고 들었다. 어머니가 세한그룹 사람들의 취향을 제대로 숙지하라며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던 말 중 하나였다.
아니겠지. 현재 성윤명 회장은 별장에서 한가롭게 시간이나 보낼 여력이 없었다. 지금도 뉴스만 틀면 이틀에 한 번은 그의 얼굴과 행보, 세한그룹의 몇 분기 실적 뉴스가 쏟아졌다. 차라리 작은외삼촌 때문에 강원도에 갔다는 말이 더 그럴듯했다.
작은외삼촌은 서울과 강원도를 전전했다. 공사판 노가다 같은 일용직으로 돈을 벌면 그걸로 죄다 도박에 쓰거나 주식에 붓곤 했다.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게 3년 전이었던가. 내가 어머니한테 외삼촌이랑 연을 끊으라고 악을 쓰며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린 뒤론 연락하는 모습은 잘 보지 못했다.
황명수한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입금액을 확인했을 테니 나한테 연락할 명분이 없는 게 당연했다. 어머니가 새로 돈을 꾼 것도 아니고 빌리려다 만 것뿐이니 더더욱. 그런데도 나는 황명수가 어머니랑 만났다는 사실이 찝찝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하필 서울에서 만난 것도 그렇고, 나랑 맞닥트릴 당시의 황명수는 내게 무척 화를 냈다. 단순히 연락을 안 받은 걸로 그렇게 화를 낸다니. 그 정도면 분노조절장애 아닌가.
“강진하 씨?”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거렸다. 내 쪽으로 몸을 살짝 돌린 성재현이 보였다. 그는 유리잔을 나한테 들어 보였다.
“와인. 키핑해 둔 것 중에 붉은색 라벨이 붙은 걸로 한 잔만 가져다주겠어요?”
“아, 네.”
고개를 숙인 나는 서둘러 그에게 잔을 받아 들었다.
출장을 마친 성재현은 예정 시각에 정확하게 돌아왔다. 저택에 들어온 차는 두 대였다. 그중 한 대는 세한전자 부속 계열사 사장을 모시고 온 차였다. 손님이 있다는 말은 미리 언질을 들어둔 터라 만반의 준비를 해둔 뒤였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받아서 분류하고, 성재현이 간단하게 씻고 나오기 전까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저녁 식탁을 마무리 지었다.
사장은 한정으로만 나온다는 싱글몰트를 성재현에게 선물 겸 식사주로 올렸다. 손님이 해산물을 좋아한단 전달에 저녁은 전부 해산물, 그리고 일본풍 코스였다. 사장은 저택 내부에 감탄하고 식사에 만족을 표했다. 그러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현 성재현 전무의 행보에 대한 외부 평가를 늘어놨다. 말이 좋아 외부 평가지, 그냥 사적인 아부였다. 명실공히 세한 후계자로 거의 확실시된 성재현의 라인을 타보겠다는 의지가 뚜렷해 보였다. 정작 성재현은 그의 노골적인 아부와 치레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두 남자는 먼 곳에서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사장은 반절 정도 채운 잔을 홀짝거렸다. 성재현은 잔을 내려두고 물을 마시거나, 묵묵히 생선 살을 나이프로 갈랐다.
부엌으로 들어서며 그가 내게 준 유리잔을 확인했다. 잔에는 사장이 따라준 술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성재현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흐트러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술조차도 정해진 곳에서, 정량만큼만 먹는 습관이 있었다. 독살을 경계하는 왕처럼 모든 걸 배제하고, 선을 넘는 일을 천박하게 여겼다.
아무래도 저 사장은 다음 분기 때 좌천될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는 나도 웃긴 인간이긴 마찬가지지만.
식사는 조용히, 꽤 지루하게 끝이 났다. 성재현과 다르게 사장은 꽤 취한 모양이었다.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위스키를 퍼부었으니, 늙은 양반이 나가떨어질 만했다. 나는 운전기사가 그를 부축하는 걸 도왔다. 사장은 딸꾹거리며 나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라고 말하는 얼굴이 취기 때문인지 얼빠져 보였다. 나는 조용히 그를 배웅했다.
외곽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머릿속이 텁텁해졌다. 후, 담배 연기가 길게 불자 잿빛이 조명 불빛에 발그레 붉어지다 이내 사그라졌다.
서재에서 나를 안은 그날 이후로 성재현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의 귀가를 기다리면서도 내내 긴장을 놓지 못했다. 오늘 권재림이 외부인과 몸싸움을 했다는 소식은 숨기지 않아도 그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괜한 트집을 잡는 건 아닐까. 나를 말과 눈길로 짓누를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성재현의 태도는 무안할 정도로 담백하고 무심했다.
사장이 돌아간 이후 그는 남은 회의록 검토에 들어갔고 먼저 잠자리에 누웠다. 나한테 부탁한 거라고는 밤중에 목을 축일 물 한 병이 유일했다.
나는 그의 묵시가 불안했다. 두려웠다. 아니면 이런 불길한 공포마저도 성재현이 바라던 걸까. 가끔은 그가 일부러 나를 모른 척 내버려 두고 있다는 자의식마저 들 때가 있다. 다 알면서도 기꺼이 모른 척하며, 나를 이리저리 돌려 엉키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손에 끼운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발끝을 휘적거렸다. 잔디가 포슬포슬 발아래에서 흔들린다. 슬슬 추웠다. 필터까지 다 탄 담배를 짓이겨 끄고 꽁초를 치웠다.
“다 피웠어요?”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천천히 앞으로 돌렸다. 성재현이 문가에 기대있었다.
정원에서 흡연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지만, 일하다 말고 담배 피우는 걸 좋아하는 고용주는 없을 터였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붙이며 몸을 일으키려는 내게 성재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도 한 대 줘요.”
“네?”
“담배. 하나 달라고요.”
곱상한 흰 손을 내밀며 그가 재차 말했다. 담배를 피우겠다는 건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담뱃갑을 꺼냈다. 성재현은 내가 준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불도 붙여달란 뜻이겠지. 라이터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싼 나는 그가 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칙, 하고 불붙은 담배가 빠르게 연기를 뿜었다.
“던힐, 피우네요?”
길게 연기를 내쉰 그가 담뱃재를 털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트?”라고 다시 그가 물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재현이 피식거렸다.
“무난하긴 하지만 맛이 너무 밋밋하지 않나요.”
“무난해서 이걸로 가끔 피웁니다.”
“뭐, 지금 피워보니 나쁘진 않네요.”
후, 하고 연기를 내뿜은 그가 담배를 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분명 내가 알기로는 성재현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했는데. 시종일관 저택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 어느 곳에서도 흡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담배는커녕 라이터도 직원들이 가끔 탈취용으로 쓰는 향초에 불붙일 때 쓰는 것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눈앞의 성재현은 어지간한 애연가만큼이나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피우던 담배의 불을 끈 나는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봤다. 왜 갑자기 나타난 거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하니 지하에다 외부로 연결한 망원경이라도 달아놓은 건가. 허튼 상상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자의식이 과잉되니 별생각을 다 한다. 잠이 안 와서 걸으러 나온 거겠지. 너무 덥지 않은 봄이나 가을에는 밤마다 가볍게 산책하는 걸 좋아한단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여긴 그의 영역이니 뭘 하든 말든 성재현의 마음이지 않던가.
당장 여기서 그가 나를 짓누르고 목을 졸라도 나는 소리조차 못 지를 텐데.
어디선가 날아든 마른 잎이 어깨에 떨어졌다. 밤바람이 소슬하게 불고 있었다. 성재현의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담배 연기가 그의 뒤편으로 흩날리는 모습이 자욱한 안개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고요할 때, 성재현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항상 그의 눈을 피하거나 내리깔고 있었다.
섬세하고 유려한 눈매 속에 깃든 검은 눈동자에 일렁거리는 담뱃불이 동그랗게 맺혔다. 모양이 단정한 콧대 아래로 벙긋 벌어진 입술. 그 순간 시선이 휙 나에게 향했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담배를 쥔 손을 뻗은 그가 내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한기가 사이를 틈탄다. 그는 손가락 옆면으로 뺨 옆을 비볐다. 약하게 욱신거렸다.
“여기 멍든 거 몰랐어요?”
알고는 있었다. 얼굴 옆이었고 머리카락에 가리면 별로 티가 나지 않는 자리였다. 그래서 내버려 뒀다. 그 자리를 어느 틈에 살펴봤는지 성재현은 정확하게 멍을 짚고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어깨가 살짝 떨렸다. 욱신거리는 감각이 아프면서도 나른했다.
“자리 한 번 비우고 올 때마다, 상처를 만들어서 오네.”
성재현이 웃음기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웃었다곤 하지만 썩 기쁜 어조는 아니었다. 아마도, 오늘 있었던 사고를 아는 눈치였다. 분명 석영에서 권재림이 다친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파악하려 나섰을 테니 그 과정에서 성재현도 알게 되었을 터였다. 나를 제대로 주의시키란 소리라도 들었을까. 아니면 권재림이 나에 대해 괜한 말이라도 덧붙였을까.
“저번에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몸조심하라고.”
“…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말을 안 듣고 그래요. 이런 식으로 가다간, 어느 날엔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말을 한 번 탁하게 맺은 그가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불씨가 남은 담배가 툭, 젖은 흙 사이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누구한테 강간이라도 당하겠어요.”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강간이라니. 단순한 경고라기에는 너무나도 섬뜩하고 질 나쁜 말이었다. 그러나 성재현은 본의와 무관하다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손이 떨렸다.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얄팍하게 스친, 불쾌감이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도리어 그를 즐겁게 만들 것만 같았다.
“금방 나을 겁니다. 불편하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뻔하고 식상한 대답으로 마무리 지었다. 연못에 파동이 둥글게 친다. 톡, 떨어지는 빗방울이 코에 닿았다. 비가 내리려는 듯했다. 싸늘하게 식은 몸을 두 팔로 비비며 나는 기대있던 나무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녕히 주무세요. 전무님.” 앞서 걸어가는 나를, 성재현은 따라오지 않았다.
비가 서서히 굵어진다.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 서 있는 성재현을 잠시 동안 바라봤다.
가끔씩 성재현은 어린 도련님의 얼굴이 된다. 볕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림자와 햇빛을 등 뒤에 뒀던 소년의 얼굴. 그때처럼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희미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장우산을 챙겨 나왔다. 혹시나 하고 되돌아간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
봄비가 꽤 오래 내렸다. 해가 잠깐 들었다가, 비가 내리길 반복한 한 주였다.
황명수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수요일이었다.
모르는 번호는 확인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 문자는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강진하 이야기 좀 하지]였고, 그다음 문자는 [나 무시하면 곤란할걸 썅년아]였다. 여기까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하면 번호를 차단하려던 그때 황명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일부러 뚝 끊었다. 그러자 온 문자가 가관이었다.
[진하야 오빠가 할 말 있다고 했잖아]
[내일 점심 코엑스 버거킹으로 와 너 갈보 만들어버리기 전에 내가 그거 못 할 거 같지]
보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알고 있는 더러운 욕은 죄다 할 심산인 듯했다. 여태 가만히 있더니, 왜 갑자기 다시 설치는 거지. 은행에 가서 입금 내역을 다시 확인해봤다. 분명 그 개 같은 ‘엠에스대부’ 업체 계좌로 제때 돈을 보냈다. 아예 사본을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또 뭘 바라고 이 지랄을 하는 거란 말인가.
설마하니 권재림이 자길 두들겨 팬 일로 신고라도 할 생각인가. 아무리 멍청해도 나한테 권재림 신상을 알려달라고 할 치는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머니에 대해서 뭔가 말할 생각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황명수가 나한테 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자를 받고 종일 싱숭생숭했다. 이대로 무시할까,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도통 무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창원에 있는 아버지한테 해코지를 할지도 몰랐다. 지난 몇 년간 걸핏하면 병원을 찾아와 협박을 일삼던 놈이었다. 당장 병원을 바꾸기도 어려웠고,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황명수를 만나는 쪽으로 결정했다. 만나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들어보고서, 가치 없는 소리면 그 즉시 자리를 뜨자고 속으로 몇 번이고 암시하듯 되뇌었다.
코엑스 안쪽에 있는 버거킹은 매대만 북적거리고 좌석은 한가했다. 황명수는 영화관이 아래에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꼴이 같잖았다.
“할 말이 뭔데.”
정영호가 부탁한 일 때문에 잠깐 나왔다가 들른 길이었다. 나는 앉지도 않고 테이블 앞에 서서 황명수한테 용건부터 물었다. 입에서 튀어나온 양파를 손가락으로 쏙 집어넣은 황명수가 웃으며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내가 왜.”
“말이 길어질 게 뻔하니까.”
“내가 왜 너랑 말을 길게 해야 하는데. 또 개수작이나 부리려고 부른 거면 가고.”
곧바로 가려는 내 팔을 붙잡은 황명수가 씩 웃으며 “앉으라고 내가 세 번 말했지.”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붙잡힌 팔을 세게 털었다.
“나야말로 내가 한 번만 더 손대면 진짜 가만히 안 있는다고 했어.”
“지금 내 말 안 들으면 후회하는 건 예쁜이일걸.”
“왜, 저번 일로 신고라도 하게? 얻어맞은 게 분했어?”
황명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딴 시시한 주먹질에 내가 화를 낼 리가 있냐. 오히려 재밌게 돌아가서 고맙지.”
재밌게 돌아간다니. 눈살을 찌푸리는 내게 황명수가 노트북을 내밀었다.
“앉아서 확인해볼래. 아니면 그냥 곧바로 보여줄까?”
열려있는 폴더 안에는 파일이 몇 개 있었다. 대꾸하지 않자 황명수가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냥 보면 알겠지.”
황명수가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모니터 화면 가득 떠오른 건 동영상이었다. 검은 화면이 지직거리고, 벽지가 보였다. 커다랗게 틀어둔 음량으로 씨발, 하고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살을 때리는 소리가 세찼다. 희끄무레한 침대 위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나는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진하가 가장 예쁘게 잘 나오는 부분인데 왜 껐어.”
황명수가 히죽거리며 내 어깨를 감쌌다. 뺨을 감싼 그가 내 귀에 바람을 불었다.
“이제 오빠랑 단란하게 이야기 좀 해볼 마음이 들지?”
싸구려 꽃무늬 벽지, 퀴퀴한 담배 냄새나는 침대. 당시 22살이었던 나는 뺨이 붓고 입술이 터질 정도로 맞은 채 황명수를 비롯한 남자들 앞에서 훌쩍거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손을 모아 비는 것밖에 없어서 빌고 또 빌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애걸복걸했었다. 그러나 황명수는 내 애원을 무시했다. 오히려 웃으면서 자기는 나 같은 애들이 울면 울수록 더 꼴린다고 이죽거렸다.
‘이만하면 존나 봐주는 거야. 예쁜아. 그러니까 앞으로 말 잘 듣자. 응?’
그 순간들이 저 영상에 남김없이 새겨져 있었다.
“와, 지나가던 남자들 네 울음소리 듣고 싸겠다. 응?”
황명수가 입으로 똑, 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는 것만 같다. 머리가 울렁거렸다. 아직도 소리가 나는 노트북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들다시피 했다. 앞뒤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바닥으로 내던졌다. 툭, 노트북 액정에 금이 가면서 분리된 배터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눈앞이 욱신거렸다. 황명수는 노트북을 내려다보며 혀를 츳츳 찼다.
“아이고, 한참 중요한 업무 보던 중이었는데, 이래서야 오늘은 일 쉬어야겠네.”
“미친 새끼… 넌 진짜 쓰레기야.”
“내가 쓰레기면, 너는 걸레지. 그것도 씹질에 환장한 남창년.”
온몸이 발발 떨렸다. 머릿속이 무너져 생각이란 걸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황명수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다 식은 감자튀김을 입에 넣고 씹었다. 입술에 묻은 소금을 혀로 할짝거린다.
“물론 난 이걸 유포할 생각은 없어. 내가 야동업자도 아니고. 귀찮게 그런 일을 왜 벌여?”
“그럼, 지워. 나한테 보여주지 말고, 지우라고.”
“이걸 그냥 지우기는 쫌 아깝더라고?”
황명수가 집게손가락을 마주 비볐다.
“한 오억만 더 주면 눈 딱 감고 지워줄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돈은 다 갚았잖아! 그런데 오억을 더 달라니,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얼씨구. 돈 생길 곳이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모른 척 빼네.”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뜬 황명수가 나한테 보인 건 핸드폰 속 사진이었다. 졸업 앨범으로 보이는 직사각형 사진 속에는 익숙한 인물이 있었다.
“잘 알지? 이 얼굴. 석영그룹 부회장 집안의 삼남이자 막내. 석영그룹 명예 고문이자 미래예술재단 이사, 미술관 관장까지 하시는 안주인께서 그렇게 옥이야 금이야 아끼며 기른 늦둥이. 그 덕분에 하는 건 좆도 없지만 계열사 주식이며, 부동산도 상당수. 간단히 말해서 재벌 삼세.”
“…….”
“그런데 어떻게 이런 거물을, 그것도 거물 중에서도 탑에 드는 인물이 어떻게 강진하랑 아는 사이일까. 이야, 우리 예쁜이가 이렇게 능력 있을 줄 몰랐다니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이 아니라 왕궁에 올랐네.”
눈을 내리깐 나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날 황명수는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바닥에 도는 정보를 끌어모았을 테고, 사진 속 얼굴을 보고 대번에 깨달았겠지. 자신의 얼굴에 멍이 퍼렇게 들 정도로 팬 사람이 석영 일가의 삼남, 권재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편으로는 성재현이 거론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들이마시며 말이 떨리지 않도록 목에 힘을 줬다.
“뭘 착각했나 본데 난 석영그룹하고 관련 없어.”
“오호, 그랬어?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니란 거야?”
“그래. 그러니까 이런 좆같은 걸로 협박해서 어디다 돈 뜯어오라는 개소리 할 거면, 꿈 깨. 나 오억 못 만들어. 어디서 빌려오라고 협박해도 그럴 곳도 없어.”
“이런, 한탕 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니. 그럼 곤란해지는데. 내가 사업 좀 크게 해보려고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아온지라, 돈이 필요하거든.”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알아서 해결해.”
“알아서 해결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인상을 한 번 팍 쓴 황명수가 나를 노려봤다.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할 수 없지. 내가 직접 석영 막내 도련님을 보러 가야겠네. 정말로 진하랑 아무 사이도 아니신지, 그쪽한테도 물어봐야 정확할 거 아니야. 겸사겸사 내 얼굴 때린 값도 좀 흥정해보고.”
“지랄하지 마.”
“지랄이라니. 우리 진하가 예쁜 입으로 자꾸 욕을 하네. 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신경 쓸 필요도 없잖아?”
“그쪽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니까…!”
“그런가? 하지만 그날 내가 두들겨 맞으면서 슬쩍 봤는데, 도련님 눈깔이 아주 단단히 돌았던데.”
황명수가 구겨진 빨대를 지휘봉처럼 흔들었다.
“그놈이랑도 잤냐?”
“헛소리 그만해.”
“안 잤어? 구멍도 안 대줬는데 그렇게 절절맨단 말이야? 진짜?”
대답할 가치도 없어 황명수를 노려봤다. 내 반응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 황명수가 박수를 짝짝, 느리게 쳤다.
“이야, 그 무서운 도련님께서 영상 보고 얼마나 쳐줄지 좀 궁금한데. 얼마 불러볼까. 십억? 아니면 이십억?”
“그만해.”
“아, 그래. 아무리 싸구려래도 그렇지, 몸값이 너무 구리네. 그래도 감히 석영인데 백억은 부르는 게 나으려나? 우리 진하를 얼마에 사주려나.”
“그만, 좀 닥치라고!”
테이블에 놓여있던 종이컵을 들고 그대로 황명수 머리에 콸콸 쏟았다. 녹은 얼음과 콜라가 그의 안면과 셔츠에 와르르 쏟아졌다. 황명수가 펄쩍거리며 옷을 털어내는 걸 본 나는 그의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노트북은 고장 난 거 같으니까 폐기해줄게. 사업용이랬지? 경찰서에 증거물로 제출해볼까?”
“허, 이 씨발년이….”
“여기서 더 건드리면 정말 경찰서로 갈 거야. 내가 좆 되든 니가 좆 되든 어디 한 번 해봐.”
나는 그 길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가는 길에 커다란 재활용 쓰레기통이 보였다. 캔과 플라스틱 병이 들어있는 안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여기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손이 썩을 만큼 더러운 오물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노트북을 버리지 못했다. 여차하면 이걸 들고 경찰서로 가든, 뭐라도 해야만 했다. 버린다고 해서 이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휘청휘청 인파 사이를 걸었다. 공항수속센터로 올라오자 탁 트인 바깥이 보였다. 목구멍이 욱신욱신 아프다.
“우욱.”
토기를 느낀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그대로 속을 게웠다. 나오는 것도 없어서 그저 헛구역질만 반복했다.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차가운 곳에서 변기를 붙잡고 한참 동안 웅크려 앉아있었다.
입술이 떨린다. 눈을 닦아내자 물기가 소매에 묻어났다. 기가 막혔다. 울긴 왜 울어. 이딴 일로 운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없는 거 알잖아.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아까 봤던 그 역겨운 장면이 반복되어 나를 짓이겼다.
왜 나는 황명수가 이런 개 같은 짓을 할 거라고 예상조차 못 했을까. 한 번이라도 의심했어야 했는데. 순순히 그를 따라갔던 스물둘의 나는, 천치 병신이었다. 그저 닥친 상황을 수습하려고 버둥거리는 벌레만도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날의 업보가 나를 찌르고 있었다.
황명수를 죽여버리고 싶다.
그렇게 매번 생각만 했다.
그날 모텔에서 황명수가 누워있을 때, 재떨이로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칼로 찔러 죽여버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내가 쓰지도 않은 빚을 갚느라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살인죄로 감옥에 가든 말든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내 처지는 감옥보다도 더 비참한 신세였다. 차라리 감옥에서 몇 년을 사는 게 지금처럼 병신같이 휩쓸리면서 사는 것보단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속으로는 몇 번을 상상해도 손은 늘 허공만 움켜쥐었다. 지금도 이렇게 도망이나 치는 게 겁쟁이였다. 발악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역겨웠다. 추하고 더러웠다.
**
저택에 못 보던 차 한 대가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벤츠였다. 번호판이 낯익었다. 그 말인즉 내가 업무 중에 기억해야 할 차량 번호란 뜻이었다.
세한전자 간부는 아니다. 그럼 주요 거래처 쪽에서 들어온 건가. 하지만 일개 거래처 사람까지 저택에 들일 일은 없다. 그렇다면 세한 일가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커튼을 활짝 열어둬 볕과 그늘이 나란히 드리운 거실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우아한 정장 차림에 머리를 동그랗게 올려묶은 여인이 티스푼으로 차를 휘젓고 있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수려한 눈매는 기품을 한데 담았다. 옆에는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로봇처럼 얌전히 서 있었다.
“괜히 찾아와서, 우리 전무님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아닙니다. 바쁘신 고모님께서 모처럼 와주셨는데 저야말로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격식을 차려가며 대화를 나눴다. 사인을 슥슥 하는 성재현의 손이 단아했다. 성미령에게 있어 성재현은 친조카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운영하는 미래미술관의 우대 고객이기도 했다. 고가의 예술 작품만 거래하는 만큼 오가는 돈 규모도 컸다. 전시 목적보다는 작품의 입찰과 거래가 주요 사업인 만큼 둘의 왕래는 친인척을 떠나서도 꽤 긴밀했다. 적어도 내가 보고, 아는 바로는 그랬다.
“정말이지, 윤명이가 아들은 잘 키웠어. 부러울 정도라니까. 재림이가 성 전무 절반만 닮아도….”
성미령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권재림이 퉁명스럽게 되받아쳤다.
“그렇게나 재현 형이 좋으면 아들 삼지 그랬어?”
“재림이 네가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걸, 굳이 조카를 아들 삼을 필욘 없잖니.”
“그래서 시키는 대로 대학원도 알아보고 과외도 받잖아. 왜 여기까지 와서 비교해.”
“하여간 말을 못나게 하는 건 누구 닮았는지. 어릴 때는 귀엽던 녀석이 클수록 말을 안 듣는다니까.”
흥, 하고 고개를 돌린 권재림이 문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성재현이 내 쪽을 보더니 잔을 내려뒀다.
“잘 다녀왔어요?”
“네? 아… 네.”
난데없는 인사였다. 내가 어디서 들어오든 말든 그에게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닌데. 내가 어디를 다녀온 걸 무척 신경 쓴 것처럼 다정한 말투였다.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가 고개를 까딱 숙였다. 정작 내게 서류를 부탁했던 정영호는 미동도 없었다.
“고생했어요. 가지고 온 건 내 서재에다 놔두면 돼요.”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대화가 쏠리자 성미령 또한 나를 넌지시 바라봤다. 묘한 눈길이었다. 관찰하는 것도 같고, 미심쩍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상품을 지나치는 것처럼 시선을 돌려 차를 마실 뿐이었다. 권재림은 성미령을 옆에 두고도 내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나는 아름답게 꾸며진 회화 같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길목마다 직원들이 부산하게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메슥거리는 속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가방을 내려두고 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장은 황명수가 하는 소리를 받아치며 무마시키고 왔지만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게 뻔했다. 경찰서에 간다 해도 정말 해결될지 의문이었다. 정말로 황명수가 권재림을 찾아가면 어떡하지. 만나줄 리 없다고 생각하려 해도, 만약이란 게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긁어놨으니 더더욱 미친개처럼 날뛸지도 몰랐다.
그럼 내가 먼저 권재림한테 말해야 하는 걸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도 신경을 썼는지 목 뒤부터 관자놀이까지 지끈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직원 한 명이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듯 괜찮냐고 물었다. 애써 괜찮다며 웃어넘긴 다음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누군가 서둘러 복도를 지나치던 나를 붙잡았다.
“진하 형.”
거실에 앉아있던 권재림이 어느 틈에 등 뒤에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는 내 팔을 잡은 권재림이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뭐야,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권재림이 손가락으로 뺨 아래를 슬슬 매만졌다. 갑자기 황명수가 한 말이 메아리처럼 귓속을 시끄럽게 떠돌았다.
‘도련님 눈깔이 아주 돌았던데.’
‘그놈이랑도 잤어?’
“아니야. 아니….”
“뭐가 아니야?”
팔목을 홱 잡아당긴 권재림이 씁, 하는 소리를 냈다. 목과 어깨를 잡은 손이 더듬더듬 옷 위를 매만졌다. “너 몸에서도 열나는데.” 옆에 서 있던 니콜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폈다. 권재림이 나를 부축하려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순간 겁이 났다. 모든 불안이 터져버릴 듯했다. 나는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반대 손으로 떼어냈다.
“놔둬. 약 먹으면 돼.”
“병원 가기 싫으면 의사 불러줄게.”
“놔두라고. 제발.”
“형 지금 존나 아파 보인다니까? 쓰러질 것 같이 얼굴이 허연 주제에 뭘 놔두긴, 놔둬. 씨발.”
그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 힘을 쓰며 다른 말로 회유했다.
“여기, 관장님, 계시는 자리잖아. 지금.”
“관장님? 우리 엄마? 먼저 갈 거라 나랑 상관없어. 난 일부러 따라온 거였고 어차피 엄마 저녁에 약속 있어서 먼저 가야 돼. 그리고, 형이 지금 우리 엄마를 뭐하러 신경 쓰는데.”
“당연히… 직원들 보는 데서 이러지 마. 제발.”
“저기요, 형 좀 데리고 나간다고 전해줘요.”
대뜸 통보하는 말에 옆에 서있던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권재림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직원들도 눈으로만 슬쩍 볼 뿐 나서지는 않았다. 귀찮다는 얼굴로 권재림이 픽 쏘아붙였다.
“전무님 때문에 그래? 내가 나중에 전화해주면 되잖아. 그거까지 눈치 봐야 해?”
“무슨 전화?”
스르륵 부드럽게 스며들듯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터벅터벅, 더없이 점잖게 걸어온다. 팔을 잡힌 손을 빼냈다. 성재현은 내 바로 옆에서 멈춰 섰다.
권재림이 턱을 들고 매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화할 필요 없겠네. 아파 보여서 데려가려고 하던 참이야.”
“아파 보여? 누가?”
“보면 몰라?”
짜증 섞인 목소리에 성재현이 음,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등 뒤에 있어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화가 났는지, 귀찮은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 이윽고 그의 팔이 뒤에서부터 나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그러네, 하고 동조한 그가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졌다.
“식은땀도 나고, 열도 있네.”
“그렇다니까.”
“아침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이마를 짚은 손바닥이 살살 내려와 눈꺼풀 위를 덮는다. 가로막힌 시야 속에선 목소리만이 온전했다. 붉어진 눈 아래를 살살 비비던 그가 불쑥 물었다.
“강진하 씨, 혹시 울었어요?”
다정하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길게 호선을 그리며 지은 미소는 틈 하나 없이 상냥했다. 그렇게 듣고, 여기고,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떨고 있었다.
웃음기가 사그라진 눈동자는 차가웠다. 밤으로 젖어든 바다의 색이다. 검고 푸르다. 뺨을 부드럽게 잡은 손에 약하게 힘이 들어간다. 눈 아래를 문지르고 고개를 앞으로 당긴 그가 속삭거렸다.
“운 거 맞네.”
“…….”
묻고자 한 게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옷매무새부터 표정까지 제대로 살펴봤다. 평상시와 똑같이 행동했고 말했다. 동요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멀쩡한 척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내가, 그렇게 티를 냈던가. 울컥, 차오른 울음을 억누르느라 목이 깔끄러웠다. 괜찮다는, 식상하고 여상한 대답을 해야만 하는데도 나는 멍하니 그의 눈에 담겨있었다.
성재현을 탁 밀쳐낸 권재림이 고깝다는 듯 쏘아붙였다.
“얼마나 혹사시켰으면 울기까지 해?”
“혹사?”
“봐. 얼굴 꼴이 이게 뭐야. 그러고 보니 저번 주말에도 끌고 나왔었지? 밑에 딸린 수행 기사 부르면 되는 걸 굳이… 하, 됐어. 아무튼 나 진하 형 병원부터 데려갈 거니까 신경 꺼.”
역정을 내며 내 팔에 팔짱을 낀 권재림이 현관 방향으로 눈짓했다. 나는 성재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팔을 꽉 잡고 현관으로 가려던 권재림은 두 걸음도 안 돼 우뚝 멈춰 섰다.
또각또각,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성미령이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재림아. 거기서 뭐 하느라 안 와.”
이윽고 권재림 앞에 선 그녀는 팔에 걸친 코트를 내밀었다.
“옷 입으렴. 집에 갈 거니까.”
“집? 내가 아까 알아서 간다고 했잖아요.”
“할아버님께서 가족끼리 저녁 같이 하자고 한 거 잊어버렸니?”
“아씨, 저녁은 무슨 저녁이야. 언제부터 가족 모임을 그렇게 챙겼다고. 할아버지가 나 보면 할 말이 뭐 얼마나 고울 거 같아서 데려가요.”
“재림아.”
“왜.”
“엄마 팔 무겁다. 얼른 가져가.”
재차 코트를 내민 성미령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두말하지 않겠다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크게 한숨을 쉰 권재림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코트를 홱 낚아챘다. 코트를 입은 그가 나를 힐끔 본다. 나는 가만히 눈을 아래로 내렸다. 쌩하니 가버리는 권재림을 보던 성미령이 머리를 짚었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니까. 미안하다. 재현아.”
“아닙니다, 고모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 참, 언제 철이 들려는지, 원.”
성미령이 한숨을 쉬자 부드럽게 미소 지은 성재현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철없으니까, 봐줄 수 있는 거겠죠.”
무감각하다 못해 싸늘한 음성. 아니, 그보다도 더 매몰찼다.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경시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잠자코 입을 다문 나는 비서에게 말을 건네는 성미령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뒷말은 듣지 못한 건지 성미령은 별 반응이 없었다.
차가 현관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먼저 나와있던 정영호의 안내를 받으며 나서던 성미령이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응시했다. 정경을 살피듯 둘러보던 시선이 나에게 도달했다. 그녀는 꽤 길게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저 정중하게 묵례하면서 성미령의 눈을 살짝 피했다.
가늘게 정리된 눈썹이 세모꼴이 된다. 혐오, 멸시, 경멸. 그런 악의 어린 단어들이 복잡하게 섞인 두 눈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여기 있는 게 불길하고 끔찍하다는 듯했다.
차는 금세 저택을 떠났다. 그제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실로 돌아가자 텅 빈 소파가 있었다. 성재현은 남은 업무 때문에 서재로 갔을 터였다. 직원 두 명이 다가와 그대로 남은 커피와 다과를 치웠다. 나 또한 떠난 자리를 정돈했다. 울렁거림이 가시질 않아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몸을 웅크리고 기침을 하자 누군가가 “진하 씨,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저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은은한 방향제 향기가 흘러나오는 문 앞에서 나는 문고리를 잡지 못했다.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이 옆으로 무너졌다. 우당탕,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끝으로 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가느다란 호스를 타고 노란 수액이 뚝뚝 떨어졌다. 링거대에 매달린 수액 팩이 반쯤 줄어든 걸 확인한 나는 뻑적지근한 눈을 손등으로 약하게 눌렀다.
화장실에서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침실로 옮겨졌다. 상황을 확인하러 온 정영호에게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지만 뜻밖에도 정영호에게서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유인즉 저택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에 괜한 말이 퍼질 수 있단 부분이었다. 성재현도 아니고 일개 사용인이 실내에서 쓰러진 건데 그렇게까지 말이 샐까, 싶었지만 비서실장인 그의 결정에 뭐라고 토를 달 수 없었다. 걱정하는 부분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택에서 일하던 직원이 쓰러진 일을 언론에서 파고들기라도 한다면 세한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울 터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이 이상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잠시 몸을 추스르는 동안 의사가 방문했다. 그가 내린 진단은 수면 부족으로 인한 과로 및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성 경련이었다. 요컨대, 컨디션 관리가 소홀했단 말이었다. 수액을 놔줄 테니 최소 두 시간은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으라는 권고에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잡념이 치솟았다. 정오부터 일어났던 일들이 차곡차곡 영화 필름처럼 드르륵 돌아간다. 황명수가 6년 전 억지로 했었던 섹스 동영상을 갖고 있었다. 그걸로 돈을 요구했고, 석영그룹 일가족인 권재림을 들먹이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홧김에 부서진 노트북을 빼앗아 왔지만 그뿐이었다. 어떤 해결책도 떠올릴 수 없었다.
권재림에게 거금을 받아낸다 한들 그걸로 끝날까. 절대 아니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돈을 갖고 온다면 황명수는 기회로 여길 터였다. 아니면 그전에 석영에서 나를 소리 소문 없이 멀리 보내버릴지도 모르겠다. 황명수가 우연찮은 사고로 죽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드르륵, 울리는 소리에 협탁을 돌아보자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놓여있는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니 권재림에게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대한대 병원 부원장 이금형 교수 011-999-0120] 대한대학교 병원이 석영과 산학협력으로 이어진 건 알고 있었지만. 정성스러운 호의에 쓴웃음이 났다.
문자를 들여다봤다. 권재림은 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걸까. 어릴 적 기억이 미화된 걸까. 당시 나는 그를 꽤나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는 어리광이 심했지만 나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나름 그를 친동생처럼 귀여워하려 노력했다. 조심스럽게 다루기 위해 항상 방긋 웃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호감을 가진다는 건 너무 순진하다. 어쩌면 수준 맞지 않는 누군가와 열렬한 관계라도 하고 싶다는 로망일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연애들처럼.
5억, 무려 5억이었다. 그러나 권재림을 이용할 순 없다. 누군가를 끌어들여 봤자 남는 건 좆같은 현실일 게 뻔한 결말이었다.
차라리 성재현한테 애원한다면.
“하, 하하.”
순간 웃음이 터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뭘 어쩌자고? 성재현한테 돈이라도 빌리자고? 무슨 말을 하면서? 협박을 당하고 있으니 5억만 꿔주세요? 그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엉망진창인 걸 알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정신 차려, 강진하. 속으로 거듭 그 말만 반복해서 되뇌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7시였다. 성재현이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이었다. 이후에는 남은 업무를 보거나, 아니면 트레이닝 룸에서 재활 운동을 하겠지.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든 내 눈앞에 보인 인영은 훤칠했고 단단한 체격이었다. 끽, 문이 닫히며 조명등에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졌다.
성재현이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자 성재현이 고개를 저었다. 일어설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벽에 세워둔 나무 스툴을 끌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나는 엉거주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링거대를 올려다본 성재현이 말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아까 들렀던 박 교수 말로는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거 같다던데,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요.”
“딱히 아픈 건 아니었습니다. 아마, 점심에 먹은 게 좀 체했던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재현이 끼익, 의자를 끌어당겼다. 손으로 침대를 짚은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한테 할 말은 없어요?”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있어야 합니까.”
“글쎄요, 내가 보기엔 강진하 씨가 나한테 할 말이 있을 거 같은데.”
가라앉은 목소리, 단단하고 냉엄한 어조.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른침만 소리 없이 꿀꺽 삼켰다. 가느다랗게 접힌 눈매가 나를 꿰뚫어 본다. 머릿속을 헤집고 가슴을 들쑤시는 시선이었다.
나는 몸을 좀 더 일으켰다. 손으로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바지 벨트를 풀고 전부 벗었다. 그런 다음 침대 아래로 내려가 성재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에 들고 있던 벨트를 그에게 내밀었다.
“입으로 먼저… 해드리면 될까요.”
성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느슨하게 웃던 얼굴이 어쩐지 불쾌해 보이기도 했다. 왜 즐거워하지 않는 거지. 성재현과 나 사이에서 이어진 거래 조건은 섹스였다. 이 방에 들어온 이유가 섹스도 업무 문제도 아니라면 뭘 바라는 걸까.
앞으로 숙인 내 얼굴을 그가 붙잡는다. 손가락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혀를 누르고 입속 점막을 헤집는다. 거칠게 휘저을 때마다 입 안에서 나는 끈적끈적한 소리가 귀까지 울렸다. 나는 얌전히 손가락을 혀로 감고 성기처럼 빨았다.
“이젠 정말 잘 빠네요.”
“으움, 웁.”
“부족해? 정말로 입에다 쑤셔줘?”
비아냥거림에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성재현은 내 입에 성기를 쑤셔 넣는 대신 손을 빼냈다.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느리게 훑으며 더듬더듬 입 주변을 건드렸다. 별것 아닌 손길에도 머리가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닿는 자리마다, 전류가 오르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냈다. 방금까지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아니, 화가 난 것 같이 차갑고 냉정한 눈이었다.
“거래 조건을 잊지 않은 건 고맙지만.”
그는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늘은 관두죠.”
“…그럼 일은.”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쉬도록 해요.”
침대 위에 놓인 담요를 내게 던진 성재현은 등을 돌렸다. 조명이 꺼지고 문이 열리며 빛이 새어 들었다. 그 틈을 가로막고서 성재현은 나를 돌아봤다. 일자로 다문 입술, 새카만 눈동자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강진하 씨 어머님하고는 연락이 됐던가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입술을 느리게 달싹이다 숨을 겨우 내쉬듯 대답했다.
“아직 전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무님께서 왜 저희 어머님을….”
“어릴 적에 자주 뵈었던 분이라 그런지, 안부가 궁금해졌거든요. 연락이 없다니 걱정이 많이 되겠네요.”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오늘 내게 한 말들도.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무슨 말을 숨기는 거지.
그런데도 나는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끼익, 문이 닫혔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
하루에도 열 번씩 전화가 온다. 전부 모르는 번호였지만 보나 마나 황명수가 번호만 바꿔서 거는 전화일 터였다. 나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어디 한번 계속 지랄해보라는 심보였다.
느려터진 노트북으로 신고할 방법을 검색했다. 절차가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수사에다 재판까지 가는 데는 꽤 오래 걸리는 듯했다. 황명수는 사업 때문에 법을 잘 알았다. 경찰 쪽에 인맥이 있었으며 강남에도 꽤 큰 인맥들이 있다고 몇 번이고 자랑했었다.
고장 난 노트북에 있던 영상도 분명히 사본일 게 틀림없었다. 황명수가 교활한 인간이란 걸 잘 아는 만큼 나는 대비가 필요했다.
어디다가 조언을 구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육필준 삼촌한테라도 신세를 구해야 하나. 변호사 상담 정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그러다 떠오른 게 남승혁이었다.
한심했다. 어떻게 승혁이한테 도와달란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어머니가 남승혁한테 여태 받은 돈만 생각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 남경욱이 성재현한테 암묵적으로 경고를 듣기까지 했다. 그러니 더더욱 승혁이한테 이런 일로 부탁하는 게 꺼림칙했다.
그러나 나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황명수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성재현은 여느 때처럼 회사에 갔고 나는 저택 샹들리에와 전등에 끼울 특수 전구를 받으러 조명 업체에 갔다 오던 길이었다. 오후의 지하철역 플랫폼은 한산했다. 핸드폰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던 나는 실수처럼 남승혁 전화번호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니, 사실 실수가 아니었다. 나는 황명수에게 협박을 들은 이후로 계속 남승혁에게 전화하길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여태 연락 한 번 제대로 안 하다가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염치가 없는 짓인지 알고 있었다. 그저 승혁이를 이용하려고 드는 나 자신이 치졸하고 한심해서 차마 연락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민만으로는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뚜루루, 신호가 가는 동안 입술 거스러미를 연신 손가락으로 뜯었다. 몇 번이고 끊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신호음은 몇 초 가지 않아 연결되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머지않아 “진하야.”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여전했다. 정작 “승혁아.”라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너 괜찮은 거야? 그때 전화 끊어진 뒤로 문자에도 답이 없어서.
“아, 핸드폰을 잠깐… 잃어버렸어. 미안. 제때 답 못 해줘서.”
-아니야. 그럼 핸드폰은 찾은 거지? 다행이네.
수화기 너머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났다. 듣기 좋았다. 이대로 시시콜콜한 대화나 나누고 싶을 만큼 그는 평온하게 나를 대하고 있었다. 나는 세게 그러쥔 핸드폰을 고쳐잡았다. 심호흡을 두 번이나 하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말문이 열렸다.
“사실 나, 너한테 부탁 좀 하고 싶어서.”
-부탁? 어떤 건데.
“그게, 검찰 쪽에 혹시 개인적으로 아는 분 있어? 선배라든지… 피해 신고를 하고 싶어서.”
-신고? 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인데.
“……말 못해.”
-진하야.
“나중에… 나중에, 얼굴 보면 이야기해줄게. 지금은, 말하기 어려워.”
말마다 탁한 숨이 맺히는 듯했다. 한동안 대답 없던 그의 수화기에서 종이가 팔락팔락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남승혁은 내게 서울동부지검 소속 검사를 비롯해 몇 명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나는 볼펜을 찾아 손바닥에다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그러면서 고소장을 쓰기 전에 필요한 부분 등을 간단하게 조언해줬다.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안 풀리면 바로 이야기해 줘. 최대한 도와줄게.
“아니야.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갑자기 연락해선 이런 부탁이나 하고, 미안해.”
-아니, 나야말로 이번에는….
말을 이어가던 남승혁의 목소리가 순간 끊겼다. 잠시 후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미안해하지 마. 나한테 늘 틱틱대던 강진하가 풀죽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하는 게 더 어색하거든.
“그렇게 내가 틱틱댔나.”
-좀 그런 편이지.
“미안. 다음부턴 안 그럴게.”
-아니, 난 강진하가 나한테 틱틱거리는 거 좋은데.
덜컹덜컹, 정적에 지하철 소리가 감긴다. 그 뒤로도 나는 남승혁과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마치 중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사소하고, 또 작은 말들이었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늘어놨다. 아이스크림 내기를 걸고 축구를 했다가 무리한 나머지 승혁이 다리가 부러진 일이라든지, 수학여행 때 몰래 마신 맥주에 취해서 오밤중에 난리 났던 일 등등.
남승혁은 변한 부분이 없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게 변했다. 나조차도 변해 버렸는데 승혁이만이라도 그대로라서, 안도가 되었다.
문자로 받아낸 연락처 중 하나로 전화를 걸었다. 남승혁의 선배라던 검사는 내가 남승혁과 고등학교 친구라는 소개를 듣자 이미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며 반갑게 반응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수사를 바로 들어가도록 준비할 테니 증거 및 진술을 위해서 시간 나는 대로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이었다. 방문 일정을 잡으려 다시 연락을 하자 이번에는 정반대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장 사건을 맡기에는 여력이 없으니 며칠 더 경과를 보자는 변명 같은 답변이었다. 방문 요청에도 묵묵부답이었고 몇몇은 아예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내 연락을 피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전무님께서 곤란해질 뻔한 건 인지하긴 하는 겁니까?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화 너머로 정영호가 크게 한숨을 쉰다. 세한 계열사 상반기 실적 평가회에 대한 스케줄 변경을 통보받고도 잊어버렸다. 그래서 차를 대기시키는 걸 깜빡한 바람에 이후 스케줄이 죄다 꼬여버렸다. 그나마 비서실에서 빠르게 대처한 덕분에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달리 변명할 것도 없었다. 정영호가 말한 대로 나는 요즘 정신이 빠져있었다. 며칠간 성재현이 돌아오는 시간을 헷갈리는 바람에 저녁 준비가 늦기도 하고, 온실에서 가지고 나온 화분을 깨트리거나, 매주 하는 카펫 청소를 까먹고 넘기기도 했다. 며칠 전 쓰러진 일 때문에 컨디션 난조라서 그렇다는 말로 넘기기에는,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검사실에서 올 연락을 기다리다 결국 직접 경찰서에 신고를 넣었지만 신고접수 되었다는 통보 이후로 경찰서에서도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이제는 황명수가 수시로 보내는 문자를 마주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오전에 보낸 문자만 하더라도 가관이었다. [아니면 내가 아는 형님 좆 빨면서 갚든가 한 번에 십만 원 쳐주신다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씨발년]이라는 말만 덩그러니 왔다.
전화를 끊고 계단 난간에 기댔다. 어질어질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2층 높이가 생각보다 아찔했다. 이런 데서 떨어지면 죽을까. 눈 딱 감고 뛰어내리면 모든 게 끝날까. 죽고 싶은 순간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저택으로 거는 전화 중에는 삼류 일간지나, 파파라치가 위장해서 캐묻는 전화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반드시 받고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여러 번 울려도 받는 사람이 없는 걸 보니 이 근처에는 나뿐인 듯했다.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성재현 전무님은 부재중이십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정해진 멘트대로 답하자 상대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화 안 놓치고 잘 받았네요.
“…전무님?”
당황스러웠다. 왜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건 거지. 급한 용건이라면 정영호가 나나, 아니면 다른 직원한테 바로 연락할 텐데.
“방금 정 비서님이랑 연락 나눴는데,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아니요. 전해준다는 걸 잊어서 알려주는 거예요.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갈 겁니다.
아, 그런 거군. 큰 의미 없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내일 언제쯤….”
-지금 옷 갈아입고 보내주는 주소로 와요. 문자로 보내줄 겁니다.
“네? 어디로.”
-늦지 말고 와야 합니다. 난 오래 기다리는 거 싫으니까.
“잠시만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전무님?”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뚜뚜, 울리는 수화기를 붙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난데없이 나오라니. 어디에 있길래 오라는 거지.
문자가 도착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심호흡을 하며 열자 간략하게 주소가 적혀있었다. 앞이 ‘경기도’로 시작되는 주소.
세한 일가가 쓰는 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