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온실낙원 2권-1. The petal hanging from a branch (2) (3/8)

온실낙원 2권

1. The petal hanging from a branch (2)

재벌가라고 하면 조명을 화려하고 환하게 켜둘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간혹 호기심이 많은 민간인이나 재벌들 사생활을 취재하려 드는 언론사 때문에 8시만 되어도 블라인드를 치고 사람이 없는 곳은 소등했다. 거실과 복도,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등을 켜둔 집 안은 어둡진 않지만 쓸쓸했다.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팬 소음이 희미하게 들리는 복도를 걷자 내 발소리만 들렸다.

퇴근할 필요가 없어지니 여유롭다 못해 한가했다. 손댈 필요 없는 설거지를 도왔고 회의 때문에 어질러진 방을 미리 정돈했다. 성재현은 2층 서재에서 남은 업무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부르기 전까지는 서재에 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응접실에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도피하듯 주방으로 숨어 들어가 노트북과 책을 펼쳤다. 서점에서 구매한 책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볼펜으로 필기하기도 했다. 노트북으로는 채용 사이트를 열어두고 이력서를 받았다. 채용 시즌이 아니라 올라오는 공고는 많지 않았다.

마우스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말고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점도 터무니없이 낮은 데다 이력서에 쓸 만한 자격증이라고 해봤자 토익점수 하나였다. 기숙사 딸린 공장에 들어가야 할까. 그러자니 아버지가 걸렸다. 간병인한테 언제까지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마땅한 곳이 없으면 필준 삼촌한테라도 붙어야 하나.”

육필준 삼촌은 나한테 사정을 듣더니 자기 회사는 어떠냐며 슬며시 입사를 권했다. 조경 전공이 아니더라도 재벌가 방식의 의전이 능숙하니 그 정도면 충분하단 말도 뒤따랐다. 전원주택 조경을 주로 맡는 삼촌으로선 주 고객들의 눈치와 비위를 잘 맞춰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쁘지 않은, 아니, 감사한 제안이었다. 아버지 사정을 아니까 도움 청하기도 훨씬 수월할 터였다.

며칠 전만 해도 살기 급급했는데 황명수한테 독촉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했다. 거의 매달 서너 번은 전화해서 복장을 뒤집던 황명수는 전화가 도통 없었다. 상환을 절반이나 했으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물론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성재현한테 조건부가 걸린 대가였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적응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전처럼 비참하진 않았다.

읽지 않은 메일로 너저분해진 메일함을 정리할 겸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 검색어가 시끌시끌하다. 실시간 검색 1위에 실려있는 이름은 [오수안]이었다. 저번 주에 지나가듯 봤던 배우였다. 나도 모르게 이름을 클릭하자 기사가 쭈르륵 나열되었다. 기사 제목을 보니 드라마 제작발표회 때문에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다만 연관되는 기사 중에 불미스러운 단어가 섞여 있었다.

오수안 드라마, 오수안 신작 발표, 오수안 스폰, 오수안 재벌 스폰. 단독 보도라고 뜬 기사에 스폰 의혹이 있다는 조잡한 추측이 가득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창을 껐다. 기분이 더러웠다.

전학을 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아버지의 마약 혐의와 각종 이슈로 기자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그 때문에 나는 기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머만큼 사람을 밑바닥까지 떨어트리는 건 없었다. 이미 해명하고 지나간 일을 굳이 꺼내서 들쑤시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아직 어린 데다 데뷔 연차도 많지 않은데 벌써 저런 기사에 소비당하는 입장이라니.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재벌 스폰의 주인공이 혹시 권재림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우연치고는 그날 둘이 같은 장소에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저급한 찌라시를 팔아먹는다는 그 기자가 붙은 게 영 찜찜했다. 물론 권재림이 그때 정황을 모를 리는 없으니 내가 괜히 나서서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노트북 하단에 표시된 시간이 바뀌었다. 어느새 밤 11시였다. 성재현은 아직도 업무가 안 끝났나. 저택 직원들 사이에서 성재현은 상당한 워커홀릭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공식적으로 요양 중인데도 그는 쉰 적이 없었다. 매일 회의를 하고 결재를 하고, 서류를 검토하느라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원예 도감?”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성재현이 느슨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주방에 있는 조명도 다이닝 테이블을 빼고 전부 꺼둔지라 응달진 곳에 서 있는 그의 얼굴도 어둡고 창백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무님.”

들어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예고 없는 등장에 너무 놀란 나머지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왜 시도 때도 없이 비명을 지르는지 그 감정을 선뜻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성재현은 손에 들고 있는 컵을 내게 내보였다.

“목이 말라서요.”

“아….”

미리 위층에 가져다 둔 물은 다 마신 모양이었다. 정수 냉장고가 비어 있었나. 분명 어제 확인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넉넉했던 것 같은데.

“호출하셨으면 제가 가져다드렸을 텐데.”

“어차피 이미 내려왔으니까 내 손으로 마시면 돼요.”

그는 터벅터벅 내 옆을 지나쳤다. 말은 저렇게 해도 걸음이 불편하다는 게 느껴지는 발소리였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은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다지 의미 없는 소음에도 귀 끝이 달싹거렸다.

입가에 댄 컵을 내린 성재현의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조명에서 뿜어져 내린 빛이 입자처럼 그의 입술에 달라붙어 반지르르 윤을 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숨을 잘게 부수듯 내쉬었다.

“그래서 원예 도감은 재밌어요?”

컵을 내려둔 성재현이 내 맞은편 다이닝 테이블에 두 팔을 대고 몸을 기울였다. 앉아있는 내 자리가 고스란히 그의 시야에 닿는다. 모나미 볼펜, 노트북, 덮어둔 책과 핸드폰까지 전부. 나는 일부러 정돈하는 척 노트북을 덮고 공책을 펼쳤다.

“온실 관리에 도움이 되는진 모르겠지만 노력 중입니다.”

“재미는?”

“…나름 읽을 만합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 솔직하게 말했다. 취미 교양서적이니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쁘진 않았다. 내 대답에 성재현이 테이블에 올린 손끝을 톡, 톡, 메트로놈처럼 두드렸다. 관상용이 된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몸에 힘을 빼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내리쬐는 조명에 둘러싸인 그가 턱을 괴고 느른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궁금한 건?”

“궁금한 거라면…?”

“온실. 나 대신 관리 중이잖아요.”

별관에 지어진 유리 온실을 떠올린 나는 울창하고 어두운 내부를 떠올렸다. 박제된 것처럼 표백된 생기를 머금은 꽃과 나무. 아름답지만 추방된 감옥 같던 창백한 온도를 떠올리며 크게 숨을 골랐다.

“…취미로 온실을 꾸민다고 들었는데, 왜 시작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십여 년 전의 성재현은,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던 성재현은 정원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명화를 모작하거나 고전 소설을 읽었다. 고상하다는 말로 대변되는 취향을 가졌고 우아하고 품격 높은 취미 생활을 누리는 정형화된 도련님 그 자체였다.

“음.”

성재현이 턱을 괸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을림 같은 두 눈만이 내게 쏟아질 뿐이었다.

“동물이나 사람은 죽으면 되돌릴 수 없지만, 꽃은 꺾어도, 자르거나 밟아 버려도 다시 자라나거든요.”

“…….”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것들인데, 달아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으니까. 그걸 보고 있으면 꽤, 즐거워져요.”

취미 예찬이라기보다는 고해 성사처럼 말을 늘어놓은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서재에 있던 그의 화초들이 돌연 떠올랐다. 때로는 싱싱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말라 있던 불균형한 모습이 그의 말과 뒤섞여 진혼곡 같았다.

“사람도 물론 비슷한 부분은 있죠. 사군자만 하더라도 사람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니까요.”

탁한 숨을 고른다. 살짝 들뜬 기색이 보이는 얼굴로 성재현이 뒷말을 이었다.

“가령 강진하 씨는, 음, 토끼풀 같죠.”

“…….”

“잡초 같지만, 꽃을 피우니까. 거기다 하얗고 동그란 토끼 꼬리 같은 꽃이 제법 귀엽잖아요. 안 그래요?”

“제가… 잡초면, 전무님은 커다란 나무겠군요.”

낮잡아보는 조롱에 무덤덤하게, 그러나 똑같이 받아쳤다. 토끼풀 같다는데 굳이 발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세한그룹 전무에게 나 같은 것이 토끼풀 같은 잡초처럼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성재현이 하하, 하고 웃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앉아있는 내 옆에 살짝 기댄 그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았다. 넝쿨처럼 그의 손가락에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둥글게 얽혔다.

“나무보다는, 사람이 아닐까요.”

“…….”

“토끼풀이 잔뜩 피어난 자리를 지나치지 못한 채,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헤집고 헤집어서 손가락에 풀물이 드는 줄도 모르는, 소년.”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었다가 뺨을 잡고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쓸었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낯설지 않다. 목줄을 쥐고 개를 잡아당기던 그때와 아주 흡사했다. 첨예하게 정제된 시선은 고요했지만 그래서 발아래를 잡아당기는 늪 같은 침범이었다.

손을 거둔 그는 사뿐하게 일어서서 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만 자야겠네요.”라고 흘리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하고 상냥했다. 상냥하다는 형용사가 거북하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나긋하고 무른 음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낼 방은 정했어요?”

“아니요. 아직….”

“아직? 왜?”

“전무님 자택이니, 쓰기 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술이 갸름하게 벌어졌다. 묘한 미소였다.

“그럼 내 침대에서 자라고 하면 잘 거예요?”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피식거린 그가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는 1층에 마련된 작은 침실을 열어줬다. 그나마 성재현과 같은 층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침실로 그를 안내했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내밀었다. 아로마 가습기 습도를 맞추자 라벤더와 바닐라 향이 적절하게 혼합된 향기가 풍겼다. 불면증세가 있다는 성재현에게 맞춰 조향된 냄새였다. 사부작, 옷을 벗는 그의 등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나는 꺼내고 싶지 않은 물음을 가까스로 입에 올렸다.

“오늘은… 안 하십니까.”

“뭘 안 해요?”

“그것… 말입니다.”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면 내가 뭔지 모르죠.”

일부러 모른 척하는 태도였다. 사자 굴에 손을 집어넣는 심정이었지만 피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성관계 말입니다.”

“성관계라, 고상한 표현이네요. 나랑 할 때마다 자지러지는 걸 보면 성관계보다는 씹질 같은데요.”

“…….”

손을 잡아당긴 그가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마디를 더듬고 손톱 윗면을 슬쩍슬쩍 문지르는 손길에 등줄기가 떨렸다.

“마음 같아선 놀아주고 싶지만 오늘은 참아야겠네요. 내일 일찍 나가볼 일이 있으니까.”

“…네.”

조명등을 껐다. 푸른 어둠에 휩싸인 방에서 성재현이 불쑥 말했다.

“문 잠그고 자요. 안 그러면.”

몸을 살짝 숙인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새벽에 내가 그 방으로 들어갈 거예요.”

“…….”

“그리고 다리를 오므리지도 못 할 만큼 박아줄 겁니다.”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내게서 떨어진 성재현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황급히 문을 막아서듯 등으로 기댔다. 한참 숨을 고르다 서둘러 1층으로 올라가 짐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그대로 앉아있던 나는 꽉 닫힌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문고리를 달칵, 잠갔다. 잠긴 문고리를 잡고 한동안 손잡이를 톡톡 건드리다 슬그머니 다시 열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숨듯이 누웠다. 빼꼼 눈을 이불 틈으로 내밀고 문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끼익, 끼익,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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