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petal hanging from a branch (1)
따각따각, 굽이 낮고 평평한 구두가 나긋하게 바닥을 디뎠다. 그 뒤를 따르는 낡은 흰색 운동화는 끼익, 미끄러지는 소리가 거슬릴세라 발끝을 들었다. 이윽고 멈춰 선 곳에는 너른 타원형 식탁이 놓여있었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여러 군데를 빠르게 가리켰다.
“이쪽은 식당, 쭉 따라 들어가면 부엌인데 미닫이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앞에 정수기 있으니까 물이 필요하면 정수기 이용하시면 될 거예요. 창고는 부엌 옆 오른쪽인데… 아마 진하 씨가 열어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알아두세요.”
“네.”
“전무님 일주일 스케줄은 주말 밤마다 정 비서님께서 문자로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번호는 받으셨어요?”
“네, 명함 받았습니다.”
“아, 그럼 제가 따로 알려드릴 필요는 없겠네요. 강진하 씨 근무일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총 오 일 근무예요. 시간은 계약서에도 적혀있듯이 그날그날 조금씩 달라지고요. 가끔 추가 근무가 있을 수 있어요. 삼성동 집은 방문객이 적긴 하지만 연말이나 기념일 때는 친지분들이 이쪽으로 오시면 일거리가 느니까요. 그래도 너무 늦게 나서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필리핀에서 온 가정부가 상주하거든요. 아, 본관은 밤 열 시 이후로 출입 금지니까 참고하시고요.”
나는 성의껏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질문을 꺼냈다.
“하루에 모두 몇 분이 계신가요.”
“음… 보자. 정기 상근은 진하 씨까지 들어오면 서른 명이에요. 출입 경비는 삼교대로 둘씩, 내부 관리 사용인은 오전, 오후 타임별로. 전무님께선 사람 많이 두는 걸 안 좋아하시거든요. 혼자 지내시니까 일손도 적게 두는 게 낫긴 하죠.”
이외에도 여자는 쉴 새 없이 규칙을 설명했다. 대부분은 금지사항이었다. 커다란 거실에 있는 피아노는 열어선 안 된다든지, 볕이 드는 오후를 제외하고 밤에는 커튼을 반드시 쳐야 한다든지. 불쾌한 냄새 및 세균 방지를 위해 외부 음식도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다. 세균이란 노골적인 표현에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참, 주민등록증이랑 통장 사본은 가져왔어요?”
“네, 필요하시다는 서류는 전부 가져왔습니다.”
나는 백팩을 뒤적여 파일 케이스를 내밀었다. 눈에 보이는 아무 문구점에 들어가서 급한 대로 복사하다 보니 민증과 통장이 삐뚜름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여자는 파일 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팔랑팔랑 건성으로 넘겨 보던 그녀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건 제 명함이에요. 혹시라도 의문이 생기면 정 비서님이 아니라 제 쪽으로 연락 주세요.”
여자에게 명함을 받아 들었다. [유한회사 백예, 관리팀장 김옥선]이라는 글자가 흰 종이에 새겨져 있었다. 나름 버젓한 회사처럼 보이지만, 결국 눈속임이었다. 세한그룹 오너 일가에 소속된 하청 회사. 공개채용도 없으며 오로지 내부인의 추천을 통해서만 들어가는 형식. 나는 그녀에게 연락할 일이 없길 바라면서 명함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진하 씨, 오늘 올라온 거예요?”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캐리어를 가리키며 김옥선이 내게 물었다. 캐리어는 척 보기에도 겉이 낡고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었다. 나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옥선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잠깐 지낼 것도 아니니까 몸만 덜렁 오기도 쉽지 않지. 그럼 서울에서 지낼 집은 구했어요?”
“집까진 아직 못 구했지만 당장 며칠 잘 곳은 있습니다.”
“그래요? 알다시피 이곳은 아무나 들락거리는 개인 아파트가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사적 공간이니까 짐을 맡기거나 그런 건 좀 곤란하단 건 아실 거예요.”
김옥선은 이곳이 성역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종종 여기로 택배를 받는 머저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옆구리에 파일을 끼운 김옥선 팀장이 다음 장소를 안내했다. 나는 구두 굽 소리를 따라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그나저나 솔직히 놀랐어요. 정 비서님이 연락 줄 때만 하더라도 나이가 좀 있는 남자겠거니 했는데 굉장히… 젊은 데다가 미남이셔서.”
미남이란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겸연쩍은 듯했다. 감사 인사 대신 수줍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한 사람에게라도 호감을 사면 좋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하청 노동에 젊은 사람들은 잘 안 쓰거든요. 손이 야무져야 하니까, 나이가 좀 있는 여성분들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네.”
“미리 계약서 봐서 알겠지만 대부분은 일정에 따른 준비 보조, 가사 노동, 그 외 잡무예요. 서비스직종 경험은 있어요?”
“음, 카페랑 레스토랑에서 각각 이 년씩 아르바이트한 정도인데요.”
“그나마 좀 믿음직스럽네요. 그럼 여기 오기 전에는 회사?”
“창원에 있는 회사에서 온라인마케팅을 담당했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창원에서 올라온 젊은 남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퍽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김옥선은 빙긋 웃었다.
개인사는 필요 없었다. 그저 주어진 할 일만 하고 나간다. 이곳에서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다. 나 또한 애써 의연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건물 면적만 몇백 평에 이르는 저택은 프리츠커 수상자 목록에도 실린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많은 이들이 삼성동 저택을 두고 그의 걸작이라고 칭송했으나 정작 내부 도면은 공개된 적 없었다. 신비로움을 더한 저택은 공시가만 300억에 다다를 정도였다.
거미줄처럼 얇은 실을 촘촘하게 꿴 커튼이 팔락거린다. 전면이 유리로 된 창이 일직선으로 이어진 복도에 서자 겨울의 흰색 직사광선을 받는 잔디와 수목이 보였다.
나는 창가에 멈춰 서서 겨울 정원을 바라봤다. 겨울이라 하면 대부분 정원이며 숲도 을씨년스럽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오전에 내린 겨울비로 정원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흰 돌로 둘러싼 인공 못 주변에는 옅은 물안개가 베일처럼 덮였고, 전구를 매단 나뭇가지들이 곳곳에 십자가처럼 심겨 있었다.
둘레를 둥글게 깎은 향나무가 돌을 깔아둔 길 주변을 채웠다. 담장 가까이에 꽃다발처럼 조성된 동백은 잎사귀가 푸르고 꽃잎은 붉으니 보기만 해도 싱그러웠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벚나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걸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장장 십여 년 만에 돌아왔다.
다시는 들어올 수도, 들어오고 싶지도 않았던 장소에 발을 들였다. 두렵거나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미적지근하고 싱거운 느낌이었다. 저택은 변함없이 웅장했고 운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음울한 정경 속에 잠겨있었다. 해가 무수히 내리쬐어도 그늘에 덮인 듯 컴컴한 온기. 마치 스노 글로브 안에 들어온 것만 같다.
변하지 않을 장면을 박제해 둔 것처럼.
“전무님,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들려온 음성은 정중하다 못해 우위를 식별하듯 깍듯했다. 창가에 가까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껏해야 오후 세 시쯤 되었을 터였다. 저택에서 일하는 가정부와 고용인은 새벽부터 출근하니, 도중에 들어올 만한 사람은 나처럼 주선 받은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멀리 현관과 거실로 이어지는 부근에 세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며칠 전 창원에서 만났던 비서실장 정영호였다.
정 비서가 왔다는 건, 이 집 주인이 귀가했단 뜻이리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손끝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숨을 참았다.
안경을 고쳐 쓴 정영호 비서가 말했다.
“박 교수는 외부 강의를 마치는 대로 내진하겠다고 합니다. 늦어도 여섯 시면 도착할 거라더군요. 통증 정도를 묻던데, 어떠십니까.”
“어차피 본인이 와서 직접 진단할 테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진통제를 먹을 때만 일시적으로 괜찮다고 해주세요.”
“네. 곧바로 전하겠습니다.”
절뚝거리는 발이 마룻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쿵, 쿵, 심장 고동처럼 메아리쳤다. 세 사람 중 가운데에서 부축받는 남자는 오른발에 깁스붕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의식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놓인 화려한 장식품, 조각상, 세심하게 공들이고 가꾼 인테리어 어디에도 눈이 가지 않았다. 경건하게 빚어낸 예술품처럼 우아한 남자였다. 구김 하나 없는 검은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몸은 훤칠하면서 날렵했다. 말쑥하게 넘긴 머리카락은 젊은 외모를 중년의 노련한 사업가 같은 인상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날카롭게 올라갔으나 위태로움을 은은하게 담은 눈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짙은 새벽을 한 폭 담아낸 듯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김옥선이 다가와 정영호에게 짧게 속닥거렸다. 김옥선이 나를 힐끔거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대강 알 거 같았다. 상근 고용인으로 면접 보러온 나에 대한 평가를 보고하는 모양이었다.
정영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쪽을 잠시 쳐다봤다. 어차피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어디서 왔고, 이력이 어떠하고, 심지어 가족관계마저도 숨긴 것이 없었다. 나는 얌전히 그들에게서 시선을 살짝 돌렸다. 호기심을 보이거나 잘 보이려는 행동은 금기다. 이런 곳에서는 없는 듯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다.
숨을 쉬는지도 모를 만큼 집요한 시선. 묵시를 대항하듯 나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입을 열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전무님.”
뒤편에 있던 정영호가 ‘전무님’을 부른다. 경계와 염려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제야 ‘전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정영호에게 말했다.
“보고 마저 들어야 하니 서재로 자리 옮기죠.”
“예.”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멀어진다. 남자는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지 않았다.
**
도어락도 없는 구식 모텔 방에선 퀴퀴한 담배 냄새가 났다. 있으나 마나 한 창문 너머로는 철골을 훤히 드러낸 공사판이 보였다. 나는 캐리어를 구석에 세워두고 침대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삐걱, 낡은 스프링이 등 아래에서 울렁거렸다.
새벽부터 잠도 못 자고 버스를 탔더니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그러나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이었다. 엎드려서 노트에 할 일을 적었다. 우선, 내일 눈뜨자마자 원룸 발품부터 파는 게 급선무였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인터넷으로 검색해 부동산에 죄다 연락을 돌렸다. 보증금 최대 500만 원, 잠만 잘 수 있다면 어디든 크게 상관없다. 여차하면 고시원에라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런 급박한 여건에도 다행히 부동산에서 문자가 몇 건 와있었다.
그다음은 유니폼. 저택에서 일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만들어진 고상함을 원했다. 그 조건이란 검은색 정장과 구두였다. 다행히 입던 정장이 있었다. 구두도 아직 해지지 않았으니 와이셔츠만 새로 사면 될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잊고 있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오면서 들른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꺼냈다. 구석에 있던 전기 포트를 열어보니 물때가 덕지덕지 끼어있었다. 컵라면은 포기하고 삼각김밥을 우적우적 씹었다. 차가워서 그런지 아무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뚜르르, 단조로운 벨 소리가 울리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전화벨 소리에 노이로제가 있었다. 그래서 늘 무음이나 진동 모드로 해두는데, 실수로 바꾼 모양이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는 아니었다. 오히려 모르는 번호보다도 더 달갑지 않았다.
발신인 아버지. 만감이 교차하는 이름에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끊이지 않는 벨 소리에 결국 통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라고 말 한마디를 잇기도 전에 거친 언성이 쏟아졌다.
-강진하! 너 왜 내 전화를 안 받아! 서울 도착하면 전화하랬잖아! 설마 일부러 안 받은 거야? 어?
절로 이맛살이 구겨졌다. 카랑카랑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먹다 만 삼각김밥을 봉투에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바빴어요.”
-몇 분도 못 낼 만큼 바빠? 하다못해 문자라도 넣을 수 있었잖아! 어? 너까지 나 무시하는 거야? 내 전화도 피할 만큼?
“그 집에선 근무 시간 동안 핸드폰 사용 안 되는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쉴 틈 없이 쏘아붙이던 고함이 그쳤다. ‘그 집’이란 단어에 어머니의 톤이 부드럽고 순해졌다.
-그럼 설마, 여태 삼성동에 있었니?
“네, 애초에 서울 간 이유가 그 일 때문이잖아요.”
-아휴, 참. 그랬지. 맞다, 맞네. 엄마가 정신없어서 깜빡했어.
깜빡했을 리가 없다. 확인차 전화한 거면서. 나는 어머니를 힐난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주제를 환기했다.
“무슨 일이세요. 병원 소등 시간이 곧일 텐데.”
그러자 흥흥,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어머니가 말했다.
-얘도 참. 엄마가 아들한테 전화할 이유가 있어야 전화해? 우리가 남도 아니고.
“…말씀하세요.”
-아니, 나는 진하 너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가뜩이나 피곤할 텐데 안 좋은 일 있나, 하고. 그러니까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문자라도 넣지 그랬어. 그러면 내가 신경 안 쓰잖아. 응?
중언부언 이어지는 변명의 결론은 전부 내 탓이었다.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는 건 어릴 때부터 진절머리나게 겪었다. 나는 적당히 끊을 생각으로 “네, 네.” 하고 기계처럼 대답했다. 무시하면 더 피곤해진다. 어머니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여자였다. 그러니 귀를 막고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전화를 붙잡고서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그래서 삼성동 저택은 그대로인지, 회장님은 평안하신지, 지금 거기엔 누가 일하고 있는지. 사정을 모르는 타인이 들으면 친인척 안부라도 묻는 것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말투였다. 정작 내 안부를 묻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울컥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른 내가 말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차라리 인터넷 뉴스를 보세요. 거기다 검색만 해도 나올 텐데요.”
-강진하. 너 지금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어차피 매번 뵐 사람들도 아니에요. 일거수일투족을 아는 건 비서 같은 사람들이죠. 저 같은 계약직이 세한그룹 회장의 안부를 알아서 뭐 하겠어요.”
-얘, 네가 모실 분들을 왜 몰라! 진하 너 삼성동 저택에서 일하잖아! 너는, 너는 그게 쉬운 줄 아니? 내가 요전번에 골프클럽서 만난 김 사장한테 물어보니까 요즘은 재벌 집에서 가사도우미도 잘 안 구한대. 외부에 자기들 정보가 유출될까 봐 사람 가려가며 받는다잖아. 그래서 무조건 소개라더라.
“그래서요.”
-남들은 발도 못 디딜 곳인데 넌 거길 들어간 거잖아. 그게 계약직이란 말로 퉁칠 일이니? 그런 데서 만드는 인맥이 얼마나 귀한데. 그 이름이… 그래, 정영호 그 사람. 내가 그 비서한테 얼마나 잘 말해서 된 일인지 몰라?
당당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의 주장을 납득해서가 아니라 우스운 탓이었다.
반년 전, 세한호텔에 갔던 어머니가 세한그룹 비서로 있는 정영호를 만났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다. 그들이 어머니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이유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오랜 시간 오너 일가를 위해서 일했던 고용인에게 물어볼 게 있다든지.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선 남자는 외관부터 정제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요직에서 일하는 사람 같은 차림새였다. 남자는 병실에 앉아있던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부터 번지르르한 명함에 쓰인 글자를 눈으로 읽었다.
[세한전자 제1 비서실 실장 정영호.]
정영호가 구석진 병원까지 찾아온 용건은 나에게 고용을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재벌가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대개는 고용된 사람의 친척이나 지인들이 다른 임원 밑에서 일하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4년 전 급성 뇌졸중으로 일터에서 쓰러진 후, 반신불수가 되었다. 식사는커녕 스스로 소변도 누지 못할 만큼 일상생활이 어려운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심장질환 때문에 퇴원하기도 어려웠다.
집은 물론이고 가진 땅 한 마지기도 담보로 이미 죄다 넘어간 뒤였다. 은행 대출을 빼고도, 아버지 앞으로 생긴 빚만 20억이었다. 병원비가 항시 급했다. 국가에서 의료비 지원을 받았지만 매달 나가는 병원비를 충원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날 병원 대기실에서 정영호가 내게 제안한 일은 저택 관리였다. 정확하게는 삼성동 저택 부역. 급여는 상당했다. 대기업 경력직보다도 훨씬 고액이었다. 비밀유지 의무 확약에 동의만 하면 계약 기간 후에는 세한그룹 계열사 중 인력 충원이 필요한 곳에다 추천서를 써준다고 했다. 계약 만료 후에는 소속 이력도 비서실로 나온다. 그 때문에 이직 조건은 충분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달콤한 조건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돈이 급했다. 다달이 갚아야 하는 이자부터 병원비, 생활비.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석 달 넘게 밀린 급여를 받지 못했다. 절박하다면 절박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조건을, 굳이 창원까지 내려와 이전 고용인이었던 사람에게 제안하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이만한 조건이면 일하려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을 터였다.
고용 의도를 의심하는 내게 정영호는 서슴없이 대답했었다.
‘저희 쪽에선 믿을 만한 사람으로 고용하고 싶으니까요.’
‘믿을 만한 사람이요?’
‘네, 강준구 씨 아드님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아버지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면 진즉 아버지를 찾아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10년 동안 무정하게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어두운 내 얼굴을 바라보던 정영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생각 있으면 일주일 내로 연락 주세요.’
나가기 전 정영호는 내게 꽤 두둑한 봉투를 내밀었다. 그룹 측에서 주는 위로금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20년을 묵묵히 운전만 하시다가 한순간 벌어진 오해 아닌 오해로 쫓겨나듯이 사직당했다. 사람을 그리 쉽게 내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위로금이라니. 그러나 돈 한 푼이 절실했던 나는 결국 몇 푼의 위로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도 소용없었다.
그 후 일주일도 안 돼서 나는 정영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만약 계약 급여를 가불받을 수 있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염치없는 부탁으로 성사된 자리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삼성동에서 일하는 걸 단순히 특혜라고 믿는 듯했다. 마치 왕이나 황제에게 간택 받은 것처럼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남들이 들으면 제가 무슨 대기업 임원이라도 된 줄 알겠어요. 그래 봤자 저, 거기서 하는 거 청소나 정리 정돈, 업무 보조 같은 거예요.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도 않고 기껏 해봤자 서재에 있는 빔 프로젝터 먼지나 털 텐데요.”
-진하야.
“세한 회장님 건강 신경 쓰실 시간에 아버지나 신경 써주세요. 옆에 사람 없으면 혼자 볼일도 못 보는 분이에요.”
-신경 쓰고 있…….
“아버지한테 미안하시다면서요. 엄마가 만든 그 좆같은 이십억 빚, 아버지가 혼자 감당하다가 이 지경 된 거예요. 그래놓고도 엄마한테 화 한 번 안 냈어요. 차라리 큰돈이 필요했으면 말해 주지 그랬냐고 타박한 게 전부라고요! 지금 삼성동 집이니, 세한 일가가 어쩌고 하실 게 아니라 제발 아버지한테 잘하세요.”
점점 격양되던 말투가 끝내 날카로워졌다. 어머니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안다, 나도 알아. 네 아버지가 나 때문에 고생한 거 내가 왜 모르겠냐고. 나도 미안해. 그래도 그건 내 실수만은 아니었잖아. 나도 그렇게 될 줄 몰랐어. 회사가 그렇게 쉽게 망할 줄 알았으면 안 했지. 돈이란 게 그렇게….
“아니요. 변명하실 거면 안 들을게요.”
-너는! 너는 자식이 무조건 엄마 이기려 들잖아. 나도 억울해! 내 돈을 잃은 건데 나라고 속 안 터졌겠니? 진하, 너 정말 그러는 거 아니다, 너? 사람 스트레스받는데 너까지 그러지 마. 응? 설마 삼성동에서도 그럴 거야? 회장님 뵈면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할 거냐고!
또 도돌이표처럼 같잖은 트집. 그놈의 회장님 타령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대드는 것보다도 무시하는 걸 더 싫어했다. 끝내 기분이 상한 그녀가 혼자 노발대발하며 욕을 퍼붓다 통화를 끊어버렸다. 뚜, 뚜. 핸드폰에서 무정한 기계음만 울렸다.
어차피 며칠 후면 다시 연락이 올 걸 알고 있다. 매달 말일이면 이자를 내야 했고 어머니에게는 땡전 한 푼도 없었다. “진하야, 어떡해. 또 찾아오면 어떡하지.” 하면서 울먹거릴 목소리가 지긋지긋했다. 어머니가 아버지 명의로 빌린 사채 때문이었다. 그게 한순간에 십수 년 동안 모아온 재산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배터리가 다 되어간다는 알람이 띵띵 울렸다. 핸드폰을 구석에 던진 나는 지끈거리는 눈썹뼈 주변을 손으로 문질렀다.
어머니는 내 안부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정말 삼성동 저택에 갔는지, 그곳에서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그게 알고 싶은 거였다. 한때 재벌가에서 일했던 어머니에게 삼성동 저택은 자존심이었고 추억, 그리고 미련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미련도 자존심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뿐이었다.
나는 캐리어를 열어 노트북을 꺼냈다. 낡은 노트북이 뻑뻑한 소음을 냈다. 간당간당한 와이파이를 잡아 포털 사이트에 글자를 입력했다.
세한.
두 글자 만에 자동검색어가 주르륵 나열되었다. 세한전자, 세한생명, 세한 공채 기간. 세한그룹으로 검색하자 페이지 가득 경제 뉴스가 쫘르륵 쏟아진다. 중국 비용 절감, 저가 공세 등으로 다소 불리해진 국내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획기적인 전략으로 승부수. 비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해 이동전자 기기에 약 60조 투자. 숫자로 나열하면 다섯 손가락에서도 상류에 드는 기업의 정보는 하루에도 수백 건씩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중 눈에 띄는 뉴스 하나를 눌렀다.
<세한전자 전략기획본부 성재현 전무이사, 피습으로 응급실 이송… 피습 현행범은 극진보 언론 기자.>
보름 전에 일어난 사고였다. 경기도 구리시 세한 제2 사업장에서 나오던 중, 경호가 한산한 틈을 타 기자가 억지로 인터뷰를 강행하려다 성재현을 계단에서 밀었다. 오른쪽 다리를 깁스한 게 이때의 여파인 듯했다.
넘어진 장면을 적나라하게 올린 기사는 거의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세한에서 초상권을 운운하며 압박을 가했겠지만. 그 대신 피습한 기자 사진은 수두룩했다. 현행으로 체포된 범인은 중년 남성, ‘국민의 신문’이라는 반(反)재벌을 외치던 언론사 소속 기자였다.
뉴스를 비롯해 온갖 언론에서 한 주간 크게 이슈가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세한에서는 기자를 폭행죄나 상해죄로 고소하지 않았다. 좀 더 청렴한 기업 이미지로 도약하겠다는 그럴싸한 기사가 줄줄이 실렸다. 여기저기서 그 사건으로 말이 많았다. 재벌의 가식, 오만. 그러나 피습 충격 이후 오히려 세한그룹 주가가 반동하듯 올랐다. 비록 고소는 진행하지 않았으나 만일을 위해 성재현 전무는 당분간 자택에서 근무할 예정이라는 기사에서 사건에 온점을 찍었다.
이것이 바로 정영호 비서가 내게 업무 보조를 제안한 이유였다. 이미지 보호 차원, 그리고 동정 여론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성재현 전무는 자택에서 근무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곁에서 보필할 사람이 필요했다. 회사를 오가며 의전을 대리하고 권한 대행도 겸할 수 있는 수행 비서가 아니라, 집에서 수발을 들어줄 하인.
노트북을 치운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대 엎드렸다. 눈을 감자 삼성동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듯이 떠올랐다. 흰 돌을 깎아 만든 대궐 같은 본관과 빙 둘러싼 정원수들, 인공연못 속 비단잉어. 그러다 문득 그곳의 주인인 남자가 자연스럽게 생각을 휘어잡았다.
성재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아니, 삼성동 저택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봤다면, 그를 만나본 적이 있다면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으리라. 태생부터 오만해도 되길 허락받은 듯한 남자였다. 내가 처음 성재현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은 도련님이었다. 삼성동 도련님, 큰 도련님, 재현 도련님.
오후에 지나치듯 만난 성재현은 마지막 기억보다도 훨씬 키가 컸다. 목소리는 더 낮았다. 애티를 완벽하게 벗은 어른이란 단어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기묘했다. 착각이라며 넘기고 싶지만, 분명 성재현은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대조되는 미미하게 올라간 입매. 꼭 원하던 목표에 도달한 사람처럼 희열에 차오른 얼굴이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렸다.
왜 그런 얼굴이었을까.
성재현에게 강진하는 지나가는 일부분에 불과했다. 대단히 특별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듯한 사연도 없었다. 그저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이자 서면으로 된 만남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자꾸 머릿속을 부식시켰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계속 볼 얼굴인데 굳이 하나하나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다. 몸을 일으킨 나는 녹슨 창문을 억지로 열었다. 창문 너머로 바깥에서 북적거리는 소음이 산만하게 기어 다녔다.
**
암 투병을 하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진통제 투여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내게 고해성사하듯 중얼거렸다. “수진아, 내가 다 잘못했다. 이게 다 내 업보인 거야.”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옷자락을 붙잡고 어머니 이름만 연신 중얼거리던 외할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펑펑 울면서 주름진 손을 만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장례식 때나 겨우 얼굴을 보였다. 헝클어진 그녀는 어머니가 죽어서 속이 시원하다면서, 술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한평생 보였던 표정 중 가장 미묘하고 복잡했다.
일곱 살 여름방학, 필동에서 삼성동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처음 버스를 타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삼성동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필동에서 꽤 거리가 먼 삼성동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삼성동 저택. 으리으리하고 근사한 부잣집에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내게 곧잘 잔심부름을 시켰다. 라면 사 와라, 소주 두 병만 사 와라, 담배 좀 사 와라. 하지만 그날은 평소 같은 자잘한 심부름이 아니었다. 머리를 곱게 만 어머니는 나를 아주 잘 차려 입혔다. 새로 산 반바지, 포장지에 보관했던 부들부들한 셔츠에서 장미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내 손에 지폐와 보자기를 쥐여주며 말했다.
‘할머니한테 좀 다녀오렴. 오늘 그 집에서 반찬 남는 거 싸 온다고 했거든.’
‘응.’
외할머니는 삼성동 저택 찬모(饌母)였다. 세한 회장은 외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젓가락질도 안 한다더라. 이북 동향이라 극진히 아낀다더라.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자랑거리처럼 하곤 했다. 부풀려지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명절마다 세한그룹 회장님 이름으로 소포가 오곤 했다. 금색 보자기를 풀면 안에는 통통한 굴비가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이게 세한그룹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이라고 뿌듯해하곤 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차 당부했다.
‘들어가서 부사장님 뵈면 인사 잘하고 와야 돼.’
‘부사장님?’
‘응. 아마 우리 진하 보면 누군지 바로 아실 거야.’
분홍색 보자기에 싼 찬합을 들고 삼성동 저택 문 앞에 서자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김 씨라 불리는 경비원이었다.
‘함흥댁 손자 아냐? 여긴 혼자서 어쩐 일이야.’
함흥댁은 외할머니를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이북 함흥에서 내려와 함흥댁이라 부른다든가.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보자기를 내밀자 김 씨가 껄껄 웃었다.
‘얼굴은 엄마 쏙 닮았는데, 하는 건 아버지를 닮아 똘똘하네.’
저택에 들어선 나를 발견한 외할머니는 호들갑을 떨었다. 또 그 기지배가 저 아들을 데리고 소꿉장난을 친다는 둥. 그래도 외할머니는 내가 삼성동에 오면 바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내게 맛있는 걸 쥐여주곤 했다. 으리으리한 집 안만큼이나 대부분 시중에도 볼 수 없는 간식이었다.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엔 드물었던 마카롱이며, 조각 케이크, 머핀과 쿠키가 그 저택에는 늘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먹는 거냐고 묻자, 외할머니 밑에서 일을 돕던 김 씨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했다.
‘도련님 간식인데 남긴 걸 나눠 먹는 거야.’
도련님. 그때 들은 그의 첫 호칭이었다.
‘도련님이 누군데요?’
‘이 집 사는 분 아드님 말고 누가 있겠어.’
와작, 아몬드가 박힌 쿠키를 베어 문 여자가 대신 답했다. 그들은 곧바로 ‘재현 도련님’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놨다. 성윤명 부사장의 유일한 아들이고 나이에 비해 참 조숙하다든지, 가끔은 애 같지 않아서 대할 때 조심스럽다든지.
‘그러고 보니 진하가 올해로 몇 살이지?’
‘저는 이제 일 학년이에요.’
‘일 학년이면 여덟 살인가? 그럼 도련님이랑 네 살 차이 나네.’
‘저보다 네 살이나 많아요?’
‘응. 한 번도 못 봤구나? 하긴 도련님도 어지간하면 학교 가 있고 했으니 만날 일이 없겠네.’
‘그런데 재현 도련님 말이에요. 열두 살인 거 맞긴 하죠? 그 나이대 애들 같은 느낌이 전혀 없던데.’
‘맞아. 좀 그래. 그래서 편하긴 한데, 가끔 인사드릴 때마다 어색하다니까요. 그래서 사모님도 여태 사이가 안 좋은 건지, 참….’
할머니가 헛기침하며 눈치를 주자 그제야 아주머니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당시 나는 그 재현 도련님이란 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분위기가 무시무시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현관을 지나가는 걸 몇 번 정도 본 게 전부였다. 그 사람이 성윤명 부사장, 이 집 주인이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모시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도련님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열두 살. 형제가 없는 내게는 까마득한 ‘형’처럼 느껴졌다.
한참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듣고 있는데 문득 바깥이 어수선해졌다. 머지않아 주방으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가쁜 숨을 한 번 고른 뒤 당황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사모님 돌아오셨대요.’
‘네? 이렇게 일찍요? 오늘 전시회 참석한다고 늦는다 하지 않으셨어요?’
‘몰라요. 지금 차 들어오고 있어요. 서둘러요.’
그 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입가에 부스러기를 털고 손을 씻은 다음 후다닥 자리를 뛰쳐나갔다.
저택에 사는 어른들이 돌아오면 외할머니는 정신없이 분주해졌다. 내가 저택 어디서 뭘 하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외할머니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닦아준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진하야, 잠깐만 밖에 나가서 놀고 있어. 너무 사람들 많은 데는 가지 말고. 알겠지?’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부엌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정원을 돌보는 육 씨 아저씨 일행도 오늘따라 일찍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들판처럼 넓은 잔디밭, 여기저기 빈틈없이 정갈하게 배치된 정원수,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는 화단. 식물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이런 풍경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나무가 촘촘하게 서 있는 정원 안쪽으로 걸어가자 응달과 볕 사이에 토끼풀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괜히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풀밭에 웅크려 앉았다. 동글동글한 잎사귀를 손으로 헤집자 토끼 꼬리 같은 흰 꽃이 보드랍게 손가락 사이에 얽혔다. 기분이 한껏 좋아지는 감촉이었다.
그때였다.
컹컹! 개가 짖는 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울렸다. 사납게 짖어대고 또 짖어대 나는 금세 겁에 질려 웅크렸다. 어릴 때 개에게 물린 기억이 있어 나는 큰 개를 무서워했다. 눈앞에 나타난 개는 나보다도 커다랬다.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꼼짝없이 물어뜯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개가 파닥거리며 발길질을 하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일도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털이 수북하고 무시무시한 개가 얌전히 앉아있었다. 눈물로 젖은 눈꺼풀을 깜빡거린 내게 그림자가 하나 다가왔다.
개의 목줄을 단단히 잡은 남자애가 그늘막과 햇볕 경계 사이에 서 있었다. 순간 닿는 햇볕에 눈을 찌푸렸다가 살짝 뜨자 후광을 두른 것처럼 그의 주변이 반짝거렸다. 나는 차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동화책 삽화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옷도, 얼굴도 하나같이 다른 세상에서 온 듯 화사하고 깨끗했다.
그는 미지를 발견한 듯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풀이 살랑살랑 열풍에 흔들리고 손과 목에서는 땀이 났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발에 족쇄라도 채워진 양 그저 입만 벌리고 주저앉아있었다. 이를 드러내고 경계 태세를 보이던 개가 으르렁거렸다.
‘안 돼.’
지극히 어른스러운 얼굴로 남자애가 목줄을 잡아당겼다. 당장이라도 덮칠 듯이 헐떡거리는 개에게 그가 말했다.
‘이건 너랑 교미 못 해. 소용없어.’
물건을 지칭하는 듯한 어투. 교미라는 단어는 어감도 이상했다. 무슨 말이지.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의미를 되묻지 못했다. 헥헥거리는 개는 남자가 다그치자 금세 얌전해졌다.
‘미안, 발정기라서 그래.’
‘…발정기?’
‘응. 발정기 때는 암컷한테 공격적이거든.’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소년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는 나를 일으켜주는 대신 허리를 숙였다. 자칫하면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내 팔목에 걸린 토끼풀을 쳐다봤다. 뒤로 손을 짚느라 흰 꽃이 살짝 뭉개져 있었다.
‘이건 뭐야?’
그가 물었다. 나는 부끄러운 눈으로 팔찌를 매만졌다.
‘크, 클로버꽃으로 만든 거예요.’
떠듬떠듬 대답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에 걸린 꽃 이파리를 둥글게 쓸면서 재차 물었다.
‘그럼 넌 이름이 뭔데?’
빙긋 웃는 얼굴이 교묘할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진, 진하요. 강진하.’
‘진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깨끗한 흰색 운동화를 신은 발끝을 까딱 흔들었다. 진하, 진하. 하고 되뇌는 목소리가 차분하다.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 같았다.
‘근데 내 이름은 전혀 관심이 없네.’
‘저기… 이름이 뭔데요?’
‘성재현.’
눈이 번뜩 뜨였다. ‘성씨’는 이 집에서 큰 어른들만 썼다. 성 부사장님, 성 회장님, 성 전무님. 그럼 이 소년도 그런 어른 중 한 명인 것이다. 게다가 재현은 아까 말한 도련님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도련님이겠구나. 뒤늦게 알아차린 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성재현은 여전히 나를 보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왜 자꾸 나를 보면서 웃는 걸까.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 나는 두 눈이 마주칠세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출입 신호가 켜진 저택 정문에 눈이 닿았다. 저 멀리서 자동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었다.
‘어!’
아버지가 모는 검은색 세단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번쩍 일어났다.
주차장을 향해 달음박질하려던 나는 순간 머뭇거렸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어머니는 부사장님이나 사모님을 만나면 반드시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성씨 사람들에게는 모두 깍듯하고 정중했다. 이 집의 독자인 성재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럼 나는 성재현에게 뭐라고 인사해야 하는 거지. 안녕히 계세요, 아니면 잘 있어요. 아니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오물거리던 내게 성재현이 물었다.
‘갈 거야?’
아쉽다는 목소리로 눈썹을 팔자로 모은다. 나는 쭈뼛거리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햇빛에 익은 바람이 살랑살랑 뺨을 스친다. 사박사박, 가까이 다가온 그가 붉게 익은 내 뺨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이제 막 재밌을 거 같았는데.’
재밌을 거 같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입을 작게 벌린 나를 붙잡은 그가 손에서 토끼풀을 슬쩍 빼냈다.
‘이건 내가 가질게.’
성재현이 싱긋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놀자. 진하야.’
개를 잡아당겨 방향을 돌린 성재현이 멀리 저택 후원을 향해 걷는다. 정갈하고 우아한 걸음걸이에 잔디가 힘없이 밟혀 우그러졌다. 나는 돌아가는 발길도 잊고 그의 그림자와 뒷모습과 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인조 분수에서 물줄기가 맥박쳤다.
**
월요일 새벽, 첫 출근길은 싸늘했다. 길을 헤매지 않게 꼼꼼하게 확인하고 버스에서 내려 삼성동 부촌 골목을 올랐다. 성벽 같은 담장을 빙 둘러 뒷문 경비실에 도착하자 늙수그레한 경비원이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떴다. 나는 미리 받은 출입증을 내밀고 핸드폰을 반납했다. 저택 내부에서 핸드폰은 일절 사용할 수 없었다. 계약서에도 쓰여있는 규칙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는 가져온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으니 어색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입은 적이 없었고 면접 볼 때나 입던 옷이라 더더욱 그랬다.
김옥선 씨가 건네준 안내문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저택에서 할 일은 대개 소일거리였지만 전부 역할과 직책이 나뉘었다. 주방 담당은 식사 준비 및 뒷정리를 했고, 청소 및 정비 담당은 실내 외 정리 정돈과 청소, 세탁, 쓰레기 분류를 했다. 만일 가정에 아이가 있다면 아이를 보호하고 돌보는 사람이 따로 지정되곤 했다. 성재현이 사는 삼성동 같은 경우 성재현 혼자 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담당을 일일이 세분화할 필요가 없어 사람을 적게 쓰는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불빛이 환히 켜진 주방에서 두 사람이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양파 껍질을 벗기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김옥선 실장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녀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아, 오늘부터 여기서 일한다던 강진하 씨, 맞죠?”
김옥선 팀장님한테 전해 들었어요. 싱크대에서 야채를 다듬던 남자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3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젊은 남자는 보기에도 상당히 건장했다. “안녕하세요.”라고 간단한 첫인사를 건넨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남자가 받아 들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야, 박카스를 다 사 오셨네요. 이 시간에 약국 연 데가 있어요?”
“편의점에서 사 온 거예요. 몇 달은 얼굴 볼 분들인데 빈손으로 인사드리긴 아쉬워서요.”
식탁 아래 박카스 상자를 내려둔 남자가 뒤늦게 말했다.
“아, 소개를 먼저 해야지. 전 김상훈입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이쪽에 계신 아주머님은 니콜 살라자르? 맞나? 아무튼 그런 이름이에요.”
소개받은 여자가 칼을 내려놓고 꾸벅 인사했다.
“필리핀 분인데 한국말은 많이 서투르신 거 같아요.”
몸을 가까이 붙인 김상훈이 속닥거렸다. 니콜은 말없이 감자 껍질을 벗길 뿐 내 쪽으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최근 국내에서 가정부로 고용되는 사람들 국적 중에 베트남, 필리핀 같은 나라가 많다고 얼핏 뉴스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외국인이 일하는 게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일찍 오셨네요? 나야 아침 준비를 한다 쳐도 다른 직원들은 다 여덟 시에 올 텐데?”
“저는 전무님 기상 시간과 비슷하게 맞춰야 한다고 들어서요.”
“아아, 맞다. 진하 씨는 전무님 비서로 들어온 거지.”
“비서는 아니고… 비슷한 일하는 사람 같은 거예요.”
“그게 그거죠. 뭐.”
김상훈은 하하 웃으며 살갑게 어깨를 두드렸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곧장 나한테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는 세한 계열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전문 조리사였다. 계열사 정직원 승진을 노리고 있고 이번 출장 근무가 가산점이 될 듯해 지원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느니, 전문학교를 다녔으며 가르친 사람이 프랑스에서도 유명한 셰프라느니. 굳이 알 필요 없는 개인사를 줄줄 늘어놨다.
붙임성이 심하게 좋다 못해 피곤한 사람이구나. 나는 그럭저럭 사람 좋은 얼굴을 유지하며 말을 대충 받아넘겼다. 정작 니콜은 말없이 할 일만 할 뿐이었다. 쉴 새 없이 떠벌리는 김상훈과 다르게 굉장히 과묵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자 어느덧 7시였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과 낱개 포장된 비타민을 챙긴 다음 김상훈에게 물었다.
“식사 준비는 언제쯤 될 거 같다고 이야기드리면 될까요?”
“여덟 시부터 됩니다. 전무님 올라오시는 대로 맞춰 준비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쟁반을 받쳐 들고 어슴푸레한 복도로 향했다. 이제 동이 트기 시작한 저택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불을 하나씩 켜며 나는 계단을 한 층 내려갔다. 저택에 방만 스무 개인데 그중 성재현 전무가 쓰는 침실은 반지하였다.
수백억짜리 저택에서 사는 사람의 침실이 반지하냐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지만, 일종의 프라이버시 보호 방법이었다. 담장을 아무리 높게 쌓았다 하더라도 외부에 사적인 공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재벌들은 지하에 방공호처럼 침실을 만들기도 했다.
지하라고 해서 딱히 음침한 환경도 아니었다. 5층에 있는 내 임시 거처인 모텔 방보다도 훨씬 밝고 쾌적했다. 생김새가 독특한 백열등에서 태양광과 거의 흡사한 노란 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공기청정기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대부분 현대식 정물화였다. 채도가 낮은 검은 벽 때문에 알록달록한 정물화는 한층 더 색이 두드러졌다.
침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고, 주먹을 약하게 쥐어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나 안쪽에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정영호가 말하기로는 성재현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기상 시간이 벌써 10분도 넘게 지났는데, 설마 아직 자는 건가. 고민하던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있을 거란 생각과 다르게 문은 열려있었다. 개인 침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널찍한 방이었다. 푹신한 카펫이 방바닥 전체에 깔렸고, 한쪽 벽에는 엘피판을 비롯해 각종 앨범이 가득 꽂힌 책장이 있었다. 스피커에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오전에 듣기엔 꽤 무거운 교향곡이었다.
침대는 이불만 흐트러진 채 텅 비어있었다. 어딜 나간 거지. 다리가 불편해서 멀리 나갈 리도 없었다. 지하 서재에 간 건가. 그러던 나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성재현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차분하게 소파에 기대있었다. 잠옷으로 입는 가운을 아직 걸치고 있음에도 자다 깬 사람 같지 않았다. 설마 잠을 안 잔 건가.
“전무님.” 하고 부르자 눈꺼풀이 매끄럽게 올라간다. 고혹적인 빛깔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정 비서가 보냈나요?”
“네, 오늘부터 전무님을 곁에서 도와드리게 된 강진하라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성재현이 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왠지 구면인 거 같은데.”
“그건 이틀 전에 저택에 있을 때 전무님을….”
“이틀 전 말고, 다른 데서도 만나지 않았나요.”
가늘어진 눈매가 다른 대답을 채근했다. 추궁당하는 기분에 목구멍이 깔깔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한 십 년 전까지 여기서 외할머님과 부모님이 일하시긴 했습니다.”
“아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비서실 수행 기사였다고 하셨죠.”
“네….”
길쭉한 손가락이 툭툭 팔걸이를 건드린다. 똑, 똑. 부딪치는 소리에 숨이 마르는 듯하다.
“십 년 전이면 미국에 있을 때기도 하고… 상당히 예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아마 저와는 만난 적이 거의 없으실 겁니다.”
성재현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착각했나 봐요.”
착각이라는 단어에 나는 조용히 숨을 삭혔다. 방금까지 두근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아 마침내 완곡한 박동으로 돌아왔다. 입가에 미소를 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네.”
그래,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 일로 삼성동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다. 강산도 변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그가 기억하지 않는 편이 일에 집중하기에는 더 편할지도 몰랐다.
**
다리 부상으로 걸음이 불편한 성재현 때문에 욕실에는 간이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 살짝 기대 느긋하게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했다. 나는 옆에서 그가 미끄러지지 않는지 주의하며 서 있었다. 바닥에 욕실용 러그가 깔려 있긴 하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다.
면도를 마친 성재현이 수건을 받아 들며 물었다.
“정 비서는 오늘 언제쯤 온다고 하던가요.”
“이따 아홉 시에 오신다고 전했습니다. 요청하신 서류도 그때 가져오신다고 합니다.”
“평소보다 늦네요. 확실히 강진하 씨 때문에 정 비서님이 살 만하겠군요.”
가벼운 농담조였다. 나는 웃음 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오늘 열한 시에 김희신 부장님이 기획서 결재받으러 오신다고 합니다. 두 시에 월요일 정기 회의가 있고, 일곱 시에는 부회장님 자택에서 저녁 식사 예정이 있습니다. 주치의는 다섯 시에 들를 건데, 만약 일정이 번거로우시면 이태원동으로 직접 들르겠다고 했습니다.”
발표라도 하는 기분으로 나는 천천히 숙지했던 일정을 나열했다. 성재현은 대답 없이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곁에 서서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가운만 걸친 성재현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건장했다. 키도 키지만 날렵하고 남성적인 몸 선이 두드러졌다. 매일 일어나자마자 한 시간씩 운동하는 습관이 있고 주말에는 스쿼시를 친다고 들었다. 뉴스에 짧게 나온 정보로는 사격과 승마가 취미라고 하던데. 이것저것 사교적인 야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인 듯했다.
“무슨 생각 중이에요?”
성재현이 묻는 말에 나는 한 박자 늦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하는 중에 다른 생각 하는 게 썩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전무님께서 이 시간이면 원래 개인 피트니스 룸에서 운동하신다고 들었는데, 불편하시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상세하게도 아네요. 꼭 나에 대해 전부 다 아는 사람처럼.”
“전부까지는… 아닙니다. 정 비서님한테 들은 것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그가 픽 웃었다. 별 뜻 없이 한 말인 듯했다. 세안을 마친 성재현을 부축한 나는 그를 침실로 다시 안내했다.
침실과 욕실 사이에는 복도처럼 이어진 드레스 룸이 마련되어 있었다. 드레스 장을 열자 옷걸이에 미리 준비된 정장들이 일렬로 걸려 있었다. 매주 화, 목에는 드라이클리닝 전문 업체에서 세탁물이 들어오는데, 그걸 일일이 정돈해야만 했다. 예전에는 담당 어시스트가 도맡았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맡을 일이었다. 이 많은 옷의 쓰임새는 전부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 용이었다. 회사도 아니고 자택에서 일하는 데도 양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니 새삼 피곤한 환경이었다.
나는 빳빳하게 다림질된 정장 중 두 벌을 꺼내 들었다. 성재현은 눈짓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너무 밝지 않은 회색 계통으로 구두에 양말까지 준비되어 있어 고를 필요가 없었다.
성재현은 익숙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걷는 게 불편할 뿐이라 옷 입는 일까지 크게 도울 필요는 없었다. 종종 그를 붙잡아주거나, 옷을 들어주는 정도였다.
“거울까지 가야 하니 넥타이는 강진하 씨가 직접 매주세요.”
옷걸이에 걸려 있는 넥타이를 가리키며 성재현이 말했다. 나는 넥타이를 두 손으로 잡고 그의 목에 감았다. 비늘처럼 촘촘한 무늬의 넥타이가 성재현의 가슴팍과 내 손 사이에서 사부작거린다. 그의 몸에서 미지근한 섬유 냄새와 샴푸 향기가 뒤섞여 풍겼다.
“음.”
성재현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팍이 천천히 들썩거렸다. 숨소리며 그에게서 나는 냄새까지 지나치게 가까웠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가깝고 긴한 거리.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성재현이 열렬하게 내려다보는 듯해 나는 도무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넥타이 매듭을 약하게 마무리 지은 나는 일부러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성재현은 넥타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불편한 건가 싶었지만 얼굴을 보니 딱히 그렇진 않은 듯했다.
“아침 약 챙겨 드리겠습니다.”
나는 준비해 온 약 포장지를 크게 뜯어 그에게 내밀었다. 비타민과 칼슘, 유산균 등 그가 매일 먹는다는 조제약은 전부 밀봉 상태로 들어온다. 도중에 다른 약과 바뀌는 일이 없도록 처방된 방식이었다. 거기다 진통제와 칼슘제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까드득, 생수병을 연 다음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내밀었다. 약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물을 삼킨 성재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꺼두지 않은 오디오에서 무거운 음악이 여전히 빙글빙글 허공을 돌았다. 나는 그에게 물병을 받아 들며 물었다.
“여기로 서류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요. 침실에서 일하는 건 싫고.”
살짝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정돈한 성재현이 오른손을 까딱 흔들었다.
“식사 후에 이 층 서재로 갈 테니 부축해요.”
성재현이 원한다면 자리를 위층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여기서 식사부터 업무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성재현은 위층에서 업무를 보려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오전 중에 그를 방문하는 사람만 두어 명이니 미리 움직이는 게 나을 터였다.
나는 소파에 앉은 몸을 내려다봤다. 성재현은 장신인 데다 체격도 건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팔을 붙잡자니 그의 손목에도 붕대가 감겨 있어 손을 대기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앞에서 몸을 바짝 기울였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침상에서 일으켜드릴 때는 이렇게 온몸으로 부축하는 게 편했다.
집중하느라 숨을 참은 내 턱 아래에 성재현이 이마를 댔다. 숨소리가 아까보다 살짝 컸다. 그게 불편하다는 의사라 생각한 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전무님, 혹시 불편하시….”
그 순간 성재현이 손으로 내 등줄기를 약하게 잡아 눌렀다. 눌렀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강한 압력이었다. 중심을 잃고 기울어진 내가 엉거주춤 소파에 손을 짚었다. 그의 얼굴이 내 가슴팍에 가까워졌다. 콧등이 슬쩍 아래로 내려왔다. 얇은 셔츠 틈으로 유두에 약하게 자극이 실렸다.
“아….”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움찔거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들어 올린 턱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성재현이 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습윤한 숨이 자글자글 옷감에 스며든다. 성재현이 고개를 느리게 좌우로 흔들자 닿은 곳에 자극이 더욱 거세졌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정전기가 일어 셔츠에 달라붙었다.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어지러운 사고를 정리한 나는 가까스로 그를 잡아 일으켰다. 성재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반듯하게 서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간지럼을 많이 타나 보군요. 이 정도에도 놀라는 걸 보니.”
몸을 살짝 숙인 성재현이 눈을 맞대고 말했다.
“가슴이 특히, 약한가 보죠?”
마치 아까 일어난 일이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성재현이 부드러운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몸조심해요. 강진하 씨.”
“예….”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크게 실수할지도 모르니까.”
“…….”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요.”
웃는 얼굴이 야릇하다. 짓궂게 흐려진 눈동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
집주인이 위로 올라오자마자 고요했던 저택에 활기가 빠르게 돌았다. 겨울 볕에 누렇게 된 잔디 위로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돌며 물을 뿌렸다. 일부러 틀어둔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너른 식탁 가득 아침 식사가 분주하게 차려졌다. 성재현은 차곡차곡 쌓여있는 신문 중 하나를 펼쳤다. 그는 정치면을 가볍게 훑었고, 경제 헤드라인에는 오래 시선을 뒀다.
나는 그에게 방해되지 않는 거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성재현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푸릇한 타박상이 드러났다. 어두운 침실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상처였다. 아마 보름 전에 있었던 그 추락 사고 때문일 터였다.
사고 경위는 정영호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다. 왼손은 인대가 붓는 정도에 그쳤지만 오른 다리는 골절이었다. 그래서 걸을 때 웬만하면 부축이 필요하고 왼손에 힘을 주는 일도 되도록 자제하라는 소견을 받았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도 3주는 입원해야 할 상태였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던가. 이사회와 주주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현(現) 세한 회장이 이미 그를 차기 경영권자로 점찍어 뒀고, 그에 따른 물밑 작업이 한창이었다. 예기치 못한 부상이라 해도 경영 일선에서 활동을 쉰다면 무능하단 낙인이 찍힐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일부러 퇴원을 빨리 시킨 거겠지. 나는 일순간 성재현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재현 전무가 듣는다면 비웃을지도 모르는 동정이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에 성재현 전무는 그리 편안해 보이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정은 일시적이었다. 애초에 성재현이 동정받을 사람이던가. 그는 군림하는 게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동정하는 건 우습고 값어치 없는 짓이었다.
이마에 손을 짚은 성재현이 심각하게 신문을 넘긴다. 관골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이며 이목구비가 근사하다. 어디를 가든 쉽게 주목받고 호감을 끌어낼 만큼 수려한 외모였다. 세한의 얼굴마담이라는 칭호가 괜한 게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돋보이고도 남는, 명화 같은 남자였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할 일을 가늠했다. 결재를 받으러 본부실 소속 직원 몇이 방문하고, 세한전자 이사 몇이 참석하는 회의가 있다. 그들을 맞기 전에 2층 접객실을 먼저 정리해야 했다. 그런 다음 아래층 서재와 침실을 정리하고 저녁에 방문하는 주치의에게 오늘 성재현 몸 상태가 어땠는지도 귀띔해 줘야 했다. 할 일이 많지는 않지만 죄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가는 일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잔에 새 커피를 따랐다. 식사 시중을 드는 건 나 말고도 서너 명이 더 있었다. 여기서 죽치고 있어 봤자 그리 도움도 되지 않을 듯했다.
“그럼 식사하시는 동안, 저는 정 비서님 오시기 전에 할 일을….”
달그랑,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은제 숟가락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 하고 탄식을 흘린 성재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손힘이 풀렸네요.”
“새 걸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새 수저를 꺼내 그의 자리에 내려뒀다. 그는 내가 떨어트린 수저를 치우고 혹시 몰라 냅킨을 바꿔 가져오는 걸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성재현이 나에게 말했다.
“아까, 나한테 어디 간다고 했죠?”
“정 비서님 오시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이야기 드렸….”
“할 일?”
“네.”
그러자 성재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날 혼자 두고 간단 겁니까.”
“식사에 방해가 되실까 봐 비켜드리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내가 말했겠죠. 그리고 강진하 씨는 정 비서가 오기 전까진 내 옆에 있는 게 우선순위일 텐데요.”
고집스러운 지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빠듯하긴 해도 정영호가 온 다음에 해도 될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는 식사 중에도 옆에 있도록 해요.”
성재현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들었다. 한 사람이 먹는 아침 식사치고는 굉장히 거창했다. 임금의 수라상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전채 요리로 나온 죽부터 시작해서 여러 종류 나물과 김치, 은어구이, 고기 요리,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부침개조차 모양이 정교하게 동그랬다.
“아까 나한테 십 년 전에는 이 집에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죠.”
“네. 어릴 때… 가끔 심부름 때문에 들렀습니다.”
“그럼 감회가 새롭겠군요.”
“글쎄요, 너무 예전 일이라 그렇게 기억이 많진 않습니다. 이곳은 제가 살던 집도 아닌 데다가 한두 번 들른 게 전부고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정원이나 집 안 구조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느낄 만도 하죠. 인테리어 바꾼 곳도 예전처럼 다시 고치라고 했으니까.”
“예전처럼, 말입니까.”
나는 그 말을 멍하니 곱씹었다. 예전처럼 다시 고친다. 성재현이 맡은 기획전략본부는 혁신이란 단어가 주축이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강력한 기획력으로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중이라는 그의 평판과 사뭇 반대되는 말이었다.
“난 익숙한 게 편해요. 특히 아끼던 물건이면 더더욱.”
“…….”
“길들여서 계속 쓰는 걸 아주 즐기거든요.”
그리 말하던 성재현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탁한 눈동자가 흥미롭게 번뜩였다. 오묘한 눈빛은 사소하게 넘기기 어려웠다. 의중을 알아챌 수 없어 더더욱.
“가령 만년필처럼 오래 쓸수록 내 손에 길이 드는 것들, 그런 건 내 식대로 맞춘단 기분이 들죠. 나한테만 맞춰져서 다른 사람들은 써도 그게 좋은 물건인지 아닌지 느끼기 어려워지게끔.”
창가에서 내리쬔 볕이 식탁의 그늘을 파고들었다. 역광을 등진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전,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기시감을 떠올렸다. 호기심과 흥미,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두렵게 만들던 위압감. 그 얼굴을 다시 보는 듯했다.
목이 탄다. 갈증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섬뜩함이었다. 손을 주먹 쥐었다가 약하게 폈다. 쥐가 나는 듯 저릿저릿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전무님. 정 비서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정영호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신문을 덮은 성재현은 무표정하게 그를 맞았다.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평소와 같습니다.”
“이십 분 뒤에 김 부장이 결재 서류 들고 도착한답니다. 채비는 해두겠습니다.”
“그래요. 이만 올라가죠.”
성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축한 정영호가 슬그머니 내게 눈짓한다. 정영호가 온 다음부터는 업무에 관련된 일 대부분은 그의 역할이었다. 나는 그제야 해방을 허락받은 사람처럼 급히 자리를 떴다.
**
2층에 올라간 사람들이 두 시간째 내려오질 않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이런 식으로 회의가 길어졌다. 부장, 차장 직함을 단 남자들은 저택을 나설 때마다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주눅 들어있었다.
그사이에 나는 침실을 정리했다. 사흘마다 한 번씩 침대 시트를 갈아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지만 청결을 중시하는 편인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여분의 침대 시트는 니콜이 찾아다 줬다. 혼자서는 힘들 거라 걱정했는지 니콜은 내게 손수 시트를 갈아 끼우는 법을 알려줬다. 거기다 아예 청소기를 가져와 침실 청소를 돕기도 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니콜은 목소리를 듣기 어려울 정도로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딱 한 번 그녀가 말한 걸 들은 건 성재현이 이태원동에 가느라 나설 때였다. 억양이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로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말했던가. 그 외에는 어떤 직원들과도 말을 섞는 걸 보지 못했다. 심지어 몇몇 직원은 그녀가 벙어리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니콜이 도와준 덕분에 침실과 욕실, 피트니스 룸까지 전부 치우고도 시간이 넉넉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은 지하 서재였다. 저택에는 서재가 총 두 군데였다. 하나는 회의실 겸 사무실로 쓰는 2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하에 있었다.
지하 서재는 성재현의 개인 공간이라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귀중품이나 중요한 게 있는 방들은 이런 식으로 자물쇠가 걸린 곳이 더러 있었다. 나는 정영호에게 미리 받아 온 열쇠로 문을 열었다.
은은한 방향제 향기와 목재 냄새가 뒤섞인 서재는 고풍스러웠다. 북유럽풍 벽난로와 나무와 유리로 만든 장식장, 책장. 그리고 중앙에는 성재현이 책을 읽거나 간단한 서류 검토를 할 때 쓰는 사무용 목재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너저분하게 늘어진 책과 서류철을 빼면 치울 게 많지 않았다. 나는 마시던 커피 잔을 치우고 쓰레기통을 점검했다. 업체에서 직접 쓰레기를 수거해 가긴 하지만, 혹시나 기자들이 함부로 뒤적일 경우를 대비해 일개 쓰레기조차 꼼꼼하게 관리했다.
몸을 일으키던 나는 자연스럽게 지하 베란다 쪽을 바라봤다. 사람 두세 명 누울 만한 공간에는 화분이 놓여있었다. 이름 모를 품종의 꽃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관엽목까지 개수만큼 종류도 다양했다. 성재현이 원예에 관심이 많다더니만, 지하 서재까지 화초가 장식되어 있었다.
“이거, 잎사귀가 노랗네.”
창문을 반쯤 연 나는 화분 하나를 손으로 건드렸다. 이파리가 시들시들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태양광과 거의 비슷한 조명등이 있다 해도 지하에 놔둔 식물이 성하지 않을 만도 했다.
손을 대려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택에 있는 물건은 웬만해선 건드릴 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엄연히 화분도 사유물이었다. 게다가 담아둔 화분만 보더라도 전부 도자기였다. 하지만 미관상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잎사귀는 누렇고 꽃은 원래 색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성재현은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걸 내버려 두는 걸 더 싫어하면 싫어했지, 잠시 치운다고 뭐라 하진 않을 듯했다. 나는 심하게 마른 화분을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후문 쪽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볼품없는 모양이 당장 버려도 될 정도였지만 주인 허락 없이 내다 버릴 수는 없으니 우선 여기 두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위에서 우르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계단을 올려다보자 피곤함에 전 사내들이 의기소침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며칠간 두세 번은 본 얼굴이었다. 김희신 부장, 박영수 차장. 그들은 저택의 웅장한 모습과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북적였던 주차장에서 차가 하나둘 사라졌다.
머지않아 성재현도 정영호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부축을 도왔다. 성재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코트 좀 가져다주세요. 강진하 씨.”
“어디 나가십니까.”
“급하게 저녁 약속이 하나 생겼어요. 늦게 들어올 테니 진하 씨는 먼저 퇴근….”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코트 가져오고, 강진하 씨도 채비해서 나오세요.”
“네?”
“어차피 바로 퇴근할 거라면 근처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다.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공간에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거절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정영호가 먼저 빠르게 코트를 가져왔다. 능숙하게 시중을 받은 성재현이 나에게 눈짓했다.
“퇴근 준비하고 나오세요. 차에 가 있을 테니까.”
**
넓은 차 안, 적당한 방향제, 그리고 일부러 적막함을 막으려고 틀어둔 음악. 고급 세단은 어디 하나 트집 잡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비좁은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보조석에 타겠다고 했지만 정영호는 딱 잘라 “그렇게 되면 자리를 다시 바꿔야 해서 번거롭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별수 없이 나는 성재현 옆자리에 타야만 했다.
수행 기사가 어디까지 모실지 물었다. 저택에서 그나마 인접한 역인 “청담역”이라고 말했지만 성재현이 곧바로 정정했다.
“대교 타고 올라가서 자양동으로 가세요.”
자양동은 내가 현재 사는 동네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거주지를 등록하긴 했지만, 김옥선 팀장에게 거주지 주소를 문자로 보낸 게 이틀 전이었다. 그게 벌써 성재현한테 보고되었을까. 아니, 애당초 일개 고용인이 사는 집을 일일이 보고할 필요가 있는 건가.
무거운 적막에 어색한 클래식 음악이 뒤숭숭하게 섞였다. 성재현이 핸드폰을 무릎에 내려두며 정영호에게 말을 걸었다.
“김 이사가 잠실에 있다고 했습니까.”
“네, 지금 길이 좀 막혀서 돌아간다고 했더니 그럼 직접 건대 쪽으로 오시겠답니다.”
“그럼 진즉 건대에서 보자고 하면 될 텐데. 김 이사가 사람 피곤하게 하는 데 재주가 있군요.”
“그럼 저택으로 오라고 할까요?”
“아니요. 이미 나왔으니 건대에서 보자고 하죠.”
급하게 잡힌 저녁 일정 이야기였다. 자양동이 그의 목적지였던 건가. 나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래,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거다. 첫 출근 날 성재현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도 굳이 그를 건드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무지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여기서 일한 지 오늘로 사흘인가요?”
성재현이 내게 물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일은 어때요.”
“적응하고 있습니다. 전무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흠, 나야말로 강진하 씨가 와서 한결 편하네요.”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사적인 일로 비서실 직원들을 집에 드나들게 할 순 없으니까요. 내 침대에서 잠옷을 벗기고 입혀준다든지, 욕실에서 도와준다든지.”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그의 말 하나하나가 묘하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살갗을 붓으로 살짝살짝 건드는 것처럼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갈 정도였다. 성재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기분 탓이겠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폐가 안 되도록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기대할게요.”
나는 그에게 하려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다. 서재에서 가져온 화분. 나는 어두워진 차창을 응시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무님… 서재에 있던 화분 중 하나가 시들어서 정원에 내놨습니다. 먼저 여쭸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바쁘신듯해서, 뒤늦게 말씀드립니다.”
“화분?”
그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좀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
“네, 지하 서재에 둔 화분 중에 꽃이 피어있던 건데. 생각보다 많이 시들어서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고 내일 봐서 다시 제자리에….”
“아니요. 상관없어요. 거기다 두세요.”
“그럼… 봐서 폐기 처분할까요?”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새로 하나 들여야겠네요.”
차 문틀을 톡톡 손끝으로 두드리던 성재현이 빙긋 웃었다.
“그런 화분 하나도 정성스럽게 돌봐주고. 세심하네요. 강진하 씨는.”
“전무님 서재에 있는 거라서 신경 썼을 뿐입니다.”
“그럼 내가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고요?”
문득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들렸다. 상냥하면서도 어딘가 독을 품은 과일 같았다.
“아마… 전무님 소유물이니 전무님 지시를 따라야겠죠.”
그 말에 성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입고 있는 낡은 패딩을 구명줄처럼 끌어안았다. 차라리 볼일이 있다고 말하고 내려달라고 할까. 청담대교를 지나는 차 안에서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나한테 연락 올 곳은 없었다. 핸드폰 번호를 몇 번 바꾸다 보니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점차 연락이 줄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니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 안부 문자를 주고받는 사람이라고는 한둘에 불과했다. 열 건도 넘는 문자 중에는 대출 홍보 스팸 문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 네 건 중 세 건은 캐피탈 광고 콜, 하나는 모르는 핸드폰 번호였다.
같은 번호로 문자가 한 건 와있었다.
[진하야 서울 왔다고 들었어 핸드폰 번호 바뀌었대서 이 번호로 연락했어 확인하거든 연락해줘 남승혁]
남승혁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리를 지나고 뚝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곳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바라보던 성재현이 지시하자 대로변에 차를 멈췄다. 나는 급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주소 이야기해 주면 거기까지 태워다 줄 텐데.”
“아닙니다. 가시던 길에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뱀눈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꼭 내면을 헤집어 뒤틀어 버리는 듯한 눈동자였다.
“이번 주말은 출근 안 하던가요?”
손을 뻗은 그가 내 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겼다. 싸구려 넥타이가 매끄러운 손에 휘감겼다.
“잘 쉬고 월요일에 봐요. 강진하 씨.”
“네… 전무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몸조심하고요.”
성재현은 마치 목줄을 쥔 주인 같은 표정으로 내게 연이어 속삭였다. 그러다가 다치니까. 선명하고 우아한 겁박이었다. 의도를 알아채고 싶지 않은, 불분명한 어둠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가 타고 가는 차가 멀어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섰다. 납작한 이불에 옷도 안 벗고 누웠다. 피곤해서 눈이 감긴다. 보일러도 돌려야 하고, 샤워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성재현이 내게 한 말이 자꾸 기계음처럼 반복되었다. 몸조심하라는 말은 그저 평범한 인사말인데 그가 내게 조심하라고 할 때마다 긴장이 된다.
그래도 주말이었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은 성재현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한결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누워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나는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다시 들여다봤다. 남승혁. 남승혁. 나는 집으로 오는 내내 그 문자만 들여다봤다. 답장을 보내지 못했고 문자를 못 본 척하지도 못했다. 차단도 하지 못했다.
남승혁은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다. 과거형인 이유는 내가 창원으로 오면서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남승혁은 내가 서울을 떠난 뒤로는 메일, 문자로 안부를 계속 물었는데 나는 둘 다 보지 않고 지우곤 했다. 그런데도 남승혁은 끈질기게 나를 찾아왔고, 끝내 내가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고 통보한 게 2년 전이었다.
이래서 서울에 오기 싫었던 건데.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울렸다. 어머니 전화였다. 시답잖은 이야기겠거니 생각하며 전화를 받자마자 통곡이 쏟아졌다.
“진하야, 어떡하지.”로 시작되는 일이 내 예상보다 너무 빨리 터진 것이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왜 원금 절반을 갑자기 빨리 상환하라고 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쪽에서 우리가 갚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대. 그래서 이번 달 내로 상환하지 않으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거야. 못해도 오억은 당장 가져오라는데, 오억을 어떻게 구해.
어머니는 우느라 말이 자꾸 끊어졌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아버지 명의로 된 빚은 금융권 채무만이 아니라, 흔히 일수라 불리는 불법 사채 지분이 컸다. 은행에서 고액 대출을 받을 능력이 없었던 어머니가 저지른 끔찍한 실수였다. 그 때문에 아무리 내 월급과 아르바이트 비용을 쏟아부어도 이자를 간신히 갚는 게 고작이었다.
상속 포기나 파산 신청 등 여러 방법을 찾아봤다. 그러나 아버지한텐 내려올 상속이 나밖에 없었다. 차라리 은행이나, 광고로 종종 볼 수 있는 대부회사 정도만 되었더라도 어떻게든 모면했을 터였다. 병원까지 찾아와 내 목을 졸라대던 그들을 생각하면 죽어도 시신에서 돈을 찾아갈 놈들이었다.
“큰삼촌한테 이야기는 해봤어요? 엄마 몫으로 받아야 할 유산도 삼촌이 안 주고 다 사업하는 데 썼잖아요. 그거 내놓으라고 해요.”
-윤기 오빠 연락 안 된 지 오래됐어. 그 양반… 내가 이 지경 되고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 영기가 빠칭코 드나든다고 해도 상관없다면서 무시하고.
“하…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려고요? 그럼 또 그 사람들 와서 엄마 달달 볶을 거고, 그런 다음에는 어쩌려고요?”
-진하야. 내, 내가 친한 사장님들한테도 연락 돌려봤거든. 그쪽에서 혹시 여윳돈 빌릴 수 있으면 그렇게라도 할 테니까. 너도 좀, 어디서 돈 꿀 데 있으면… 그렇게 해서 몇천만 원이라도 어떻게 막아보면….
답답해서 속이 터졌다. 어머니가 저지른 불법 사채에서 원금 절반이면 최소 10억이었다. 그 돈이 있었으면 이런 손바닥만 한 원룸에서 지낼 필요도 없었겠지. 나 또한 빚이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빚과는 별개로 학자금과 생활비를 대느라 생긴 빚이었다. 신용이 높은 것도 아니고 담보가 변변한 것도 아니니 은행에 가더라도 억 단위를 대출받을 수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월세 보증금이라도 다시 빼야 하나. 통장에 얼마나 있었지. 그거라도 마저 내놓고 싹싹 빌어야 할까. 무릎이 닳도록 비는 건 이미 몇 년 전에도 해봤다. 수치스럽지도 않았다.
-승혁이가… 너 찾더라. 요즘 잘 지내냐고, 안부 물을 수가 없어서 걱정이라면서. 승혁이네 집 잘 살잖아. 응? 승혁이네 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이고 어머니도 크게 무슨 회사 하나 한다면서. 승혁이한테 말이라도 해보면 안 될까? 너랑 친했었잖아.
“설마 번호 알려준 거… 엄마예요? 엄마가 승혁이한테 내 번호 알려줬어요?”
내 말에 어머니는 꿀 삼킨 사람처럼 침묵했다. 그렇다는 말보다도 더 강한 긍정이었다. 갑자기 뒷골이 아팠다. 나는 그녀에게 따질 만한 기운도 남지 않아 무작정 전화를 끊어 버렸다. 머리가 얼얼하고 토할 거 같았다. 몸살감기라도 걸린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 될 수 있을까. 연락하고 싶지 않은 친구한테 억지로 전화번호가 까발려지고, 원치 않는 빚을 갚고. 아마 어머니가 이미 자기 사정을 전부 말했을지도 모른다. 빚이 얼마고 내가 그래서 서울에 간 거라는 이야기까지도. 그러니 전화로 나한테도 일부러 말을 꺼낸 거겠지.
차라리 무릎이 닳도록 사채업자들 앞에서 비는 게 낫다. 일말의 가여움이라도 느낀다면 봐주지 않을까. 도망 안 가고 갚겠다는 사람을 죽이진 않을 테니까. 나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지긋지긋한지 모르겠다. 내 삶은 이미 오래전에 뒤틀린 게 틀림없었다. 어디서부터 뒤틀린 건지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늪 같았다.
이대로 잠이나 자고 싶었다. 구석에 던져둔 핸드폰이 징징, 다시 울렸다. 나는 무시하려 했다.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집어 들자 번호가 보였다. 등록되지 않은 전화번호. 내가 무시하려 했던 문자의 주인이었다.
끈질기게 전화가 이어졌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핸드폰만 노려보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주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건너편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전화 받았네. 드디어.
방학 기간을 맞은 대학가 호프집은 비교적 한산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일행이 있다고 말했다. 먼저 나온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던 나는 딸랑거리는 소리에 문가를 쳐다봤다.
청회색 코트, 훤칠한 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나를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두말없이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겨울의 찬 기운이 섞인 향수 냄새가 났다.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맨 처음으로 한 말이 그딴 소리였다. 나는 답답하게 끌어안긴 품을 밀어냈다.
“원래 이 정도였어.”
“예전에 잠깐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건강 검진이나 하려고 불렀어?”
내 말에 남승혁은 더 토 달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그가 후줄근한 가게 내부를 둘러보더니 눈썹을 살짝 찡긋거렸다.
“내가 살 테니까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 있어.”
“잠깐 볼 건데 편의점에서 만나자고 할 순 없어서 여기로 부른 거야.”
“진하야.”
“싫으면 나가도 돼. 나 혼자 치킨 먹고 맥주 마실 거니까. 안 그래도 나 치킨 먹고 싶어서 나온 거야. 안 먹은 지 반년은 된 거 같거든.”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툴툴대는 거 그대로라서 다행이네.”
“…툴툴대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남승혁은 또 말없이 씩 웃었다. 나는 그가 웃는 게 보기 싫어서 외면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르바이트생이 테이블로 다가왔고 남승혁은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했다. 치킨과 맥주 두 잔. 가게가 한산해서 그런지 음식이 금방 나왔다. 절인 무, 양배추 샐러드, 후라이드치킨, 맥주 두 잔. 나는 굶주린 사람처럼 치킨에만 연신 포크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제대로 들어가는 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남승혁을 다시 볼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를 지우려고 했었다. 성재현과 마찬가지로, 아니, 다른 의미로.
“어머니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아버지 많이 아프시다면서… 괜찮은 거야?”
“반신불수에 언어장애가 왔으니 괜찮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살아는 계셔. 재활 의지도 뚜렷하시고.”
“너랑 어머니만 괜찮다면 서울 병원에 자리 마련해 줄 수 있어. 큰아버지가 병원장으로 계시는데 내가 잘만 말하면 병원비 부담도 좀 줄일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남승혁.”
나는 포크를 내려두고 그를 노려봤다.
“적선하려고 나온 거야?”
“진하야.”
“대체 왜 나한테 연락했어. 내가 말했잖아. 연락하지 말자고.”
“너희 아버지한테, 우리 아버지가 했던 일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이렇게 말로 해도 모자랄 만큼.”
“…그만.”
“이제 와서 이런 말 해봤자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서 연락한 거야. 적선이나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너를 그렇게 생각하겠어.”
나는 울컥 치솟은 울음을 삼키려 맥주를 억지로 마셨다. 속이 뜨끈뜨끈하면서 얼얼했다.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마약사범 혐의로 연루되었을 때, 남승혁의 아버지가 당시 특검 부장이었다. 나는 남승혁에게 아버지는 결백하다면서 매달렸다. 하다못해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빌기까지 했다. 당시 마약 파티는 국내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줄줄이 딸려 나온 연예인들마저 기소를 당하던 상황에서 아버지도 그런 범죄자와 한 패거리 취급을 받았다. 집안 분위기는 급격히 망가졌고 나는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교실에 앉아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보며 숙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쟤네 아빠, 마약 사범이래. 마약 사범이 뭔데? 약 팔아서 돈 버는 사람 같은 거. 와, 진짜 무섭다. 범죄자잖아.
그때 남승혁은 그런 나를 보면서 미안하다고만 했다. 울면서 애걸복걸하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 봤자 남승혁도 그때 고작 열여덟을 바라보는 어린애였다. 아버지한테 저항해 봤자 소용이나 있었을까. 설령 말했다고 한들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을까. 아버지에게 닥친 일이 남승혁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서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여태 남승혁을 피했던 이유 중에는 그의 아버지와 닮은 얼굴도 있었다. 엎드려 빌던 나를 싸늘한 표정으로 지나치던 남경욱 특검 부장. 남승혁은 그런 제 아버지를 무척 빼닮았다. 닮았을 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볼 때면 괴로웠던 순간이 자꾸 떠올라 나는 일부러 남승혁을 피했다. 이사를 가던 날에도 그에게 한마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도망치듯이 떠났다.
그런데 남승혁은 미련스럽게도 그날 일을 꺼내 사과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한 번 감고 길게 숨을 고른 다음 그에게 말했다.
“사과하려고 온 거면 그냥 돌아가. 난 너랑 그 일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 그날만 생각하면 난 억장이 무너지고 지금도 주저앉아서 어린애처럼 울고 싶어 미치겠어.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집안은 난장판 되고… 그런 이야기 또 꺼내봤자 나만 죽을 거 같으니까.”
“난, 진하 너 괴롭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미안해.”
또 한 번 미안하단 말을 내뱉은 남승혁이 제 입을 가렸다.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맛없는 맥주만 연신 들이켰다. 사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그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남승혁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에게 자꾸 연좌제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런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포크로 닭고기를 푹푹 찌르며 말했다.
“그냥, 뭐 하고 지냈는지나 얘기해. 그게 나을 거 같으니까.”
“…그래.”
내 말을 수긍한 남승혁은 자신의 안부를 밝혔다. 그는 재작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며 현재 연수원 수료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아마 올해 여름이 가기 전에는 연수원 성적에 맞춰 발령이 잡힐 거라고도 했다.
남승혁의 집안은 대대로 법조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법무부 실장에도 올랐던 유명인사였고, 아버지는 현 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정계 진출까지 발을 들이민 거물이었다. 친척들 중에도 대형 로펌 변호사, 기업법무팀 소속변호사, 변리사 등등 굵직한 커리어가 수두룩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남승혁이 법대 진학을 결정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남승혁이 자진해서 법대를 진학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죽었다 깨도 법대는 안 가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랬지. 그런데 내 생각보다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어렵더라. 나름대로 이유와 확신을 가지고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남승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아버지의 고집을 결국은 꺾지 못했겠지. 그의 아버지는 지독한 사람이었다.
“뭐, 그렇다고 지금이 싫단 소리는 아니야. 그랬으면 시험 준비도 안 했겠지.”
가볍게 말을 넘긴 남승혁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서울. 왜 올라왔는지 물어봐도 돼?”
그 순간 씹고있던 닭고기가 목구멍에 막히는 듯했다. 남승혁이 궁금한 건 이해가 갔다. 거의 10년 가까이 서울에 올라오지도 않다가 갑자기 상경했으니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간의 사정을 전부 말하기에는 아직 나조차도 내 상황에 적응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물티슈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냥, 아무래도 직장 구하는 건 서울이 더 낫다 싶더라고.”
“음, 그렇긴 하지. 그럼 회사 때문에 올라온 거구나.”
“으응. 그렇지.”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손님이 여러 명 들어왔다. 조용하던 술집이 금세 떠들썩해졌다. 아르바이트생은 틀어뒀던 텔레비전을 스포츠 채널로 바꿨다. 작년 유럽 축구리그 결승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잔을 비우고 술을 다시 시켰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딱딱했던 분위기가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남승혁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적 이야기를 꺼내며 실실 웃었다.
“수학여행 인터뷰하겠다고 찾아갔는데 네가 단칼에 거절해서 엄청 민망했었어.”
“솔직히 뭐가 좋다고 수락하겠어. 그런 대회 우승한 게 무슨 자랑도 아니고.”
나는 접시에 놓인 감자튀김을 잘게 으스러트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바야흐로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반 대항전으로 치러진 여장대회 때 이야기였다. 부상으로 걸린 10만 원 현금이 탐났던 담임교사가 나를 적극적으로 떠미는 바람에 억지로 참가하게 된 대회였다. 결과는 우승으로 한동안 교내에서 여장대회 우승자로 유명세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잔뜩 심기가 불편한 와중에 나를 찾아온 게 당시 교내 신문부 부부장이었던 남승혁이었다.
“하다 하다 도서실까지 찾아왔을 때는 진짜 때리고 싶었는데. 나중에 같은 반까지 될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어. 그 일 아니었으면 평생 친해질 일 없었겠다 싶었는데.”
“난 사실 처음부터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나는 남승혁을 빤히 바라봤다.
“왜?”
“몰라. 그냥, 느낌이 그랬어. 왠지 얘랑 잘 맞을 거 같다, 뭐 그런 직감?”
“…….”
“같은 반 돼서 친해지고 보니까 내 감이 맞더라고. 정 많고, 말로는 떽떽거리면서 거절은 하나도 못 하고, 겉으로는 무심해 보여도 잘 울고, 잘 웃고.”
말을 멈춘 남승혁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쉬이 말문을 열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뻥!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공이 골대 안에 꽂혔다.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열광하며 휙휙 휘파람을 불어댔다. 남승혁이 내 맥주잔에 자기 것을 탁 부딪치며 말했다.
“건배나 하자.”
자정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승혁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마침 승객이 내리는 택시를 발견한 나는 서둘러 차를 붙잡아 남승혁을 태웠다. 나는 남승혁이 탄 차가 멀어지다 못해 도로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결국 편의점에 들어서서 꿀물을 사 마셨다. 나는 빈 병을 쥔 채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동안 복잡한 속을 달랬다.
서울로 돌아온 뒤로 재회의 연속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불안했다. 마치 멈춰있던 태엽이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태엽이 다 돌고 나면 어떻게 될까. 영영 멈추거나, 아니면 새로 감아 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고장이 나겠지. 어차피 서울로 온 이상 창원으로 다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가길 바랄 뿐이었다.
다음 날, 나는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부재중 문자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온 건 남승혁이 보낸 문자였다. 잘 들어갔는지, 속은 좀 괜찮은지 등등 나를 먼저 챙기는 안부가 담겨 있었다. 일방적으로 밀어내고 연락마저 끊었는데도 남승혁은 여전히 나를 유의미한 친구로 받아주고 있었다.
띠릭, 새로운 문자 도착 음에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몽롱함이 사라지고 현실이 찾아왔다. 발신자 정영호 실장, 첨부 파일까지 포함된 MMS에는 성재현의 이번 주 스케줄 및 중요사항이 적혀 있었다. 격일로 외출하던 지난주와 다르게 이번 주는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성재현이 이태원동이나 저녁 약속으로 나가는 일이 없다는 건, 내가 늦게까지 삼성동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거울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다 세수를 했다. 온수로 돌렸는데도 미적지근한 물만 나왔다. 깨진 타일을 내려다봤다. 보증금 500만 원짜리 반지하 원룸은 제대로 된 게 없었다.
**
한파 주의보가 지나간 오후는 꽤 쌀쌀했다. 나는 정원에 서서 두 팔을 쭉 뻗었다. 서울 한복판이라는 강남이지만 수목원처럼 나무며 꽃이 많아서 그런지 산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여기 들어온 지 일주일도 더 넘게 흘렀다. 성재현을 보조하는 일은 수월했다. 손이 많이 갔지만 조잡하진 않았다. 그는 일정이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7시면 일어났고 아침을 비롯한 식사도 대부분 비슷한 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재현의 일과는 잠시라도 한가한 새가 없었다. 저택에서 피습으로 인한 요양을 위해 칩복(蟄伏) 중이라는 기사와는 대조적일 정도였다. 그는 대부분 시간을 사무실로 쓰는 서재에서 보냈고 오후에는 결재받으러 온 부하직원과 면담하거나, 서너 시간에 걸쳐 회의를 했다. 내가 그를 도와야 하는 일은 아침과 늦은 오후, 그리고 주치의가 방문하는 잠깐뿐이었다.
나는 저택에 머무는 내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무던히 애를 썼다. 남는 시간에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라도 무언가를 했다. 이를테면 창고 정리, 필요 없는 문서 파쇄, 분리수거 등등. 그러는 동안 딱히 성재현이 내게 화를 내거나 지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같이 살얼음판을 딛는 기분이었다.
‘몸조심하세요. 그러다가 다치니까.’
성재현은 첫날에도, 그리고 차 안에서도 내게 조심하라고 했다. 그 말이 나를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넥타이를 살짝 잡아 쥐던 얼굴과 목소리가 뇌리에 박힌 듯이 맴돌았다.
앞으로 3개월. 3개월만 버티면 상여금, 고용인 사이에서는 은어로 입막음 돈이라 불리는 돈이 생긴다. 반년 기준으로 약 5,000만 원. 저택에서 나갈 때 보고 들은 걸 함구하는 조건으로 받는 돈이었다. 빚을 갚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끝내 화분은 회복하지 못했다. 나는 죽은 꽃과 흙을 내다 버렸다. 빈 화분만 덩그러니 남아 문가에 어색하게 놓여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 처지 같았다. 빈 화분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아 궁상맞기 짝이 없는 신세. 문득 담배 생각이 났다. 원래도 가끔 피웠는데 빚에 시달리다 보니 담뱃값 한 푼이 아까워서 아예 끊은 상태였다. 아쉬운 기분에 라이터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쓱 누가 어깨에 팔을 걸쳤다.
돌아보니 김상훈이 담배를 물고 씩 웃고 있었다.
“진하 씨, 저 불 좀 빌려주세요.”
그는 내가 들고 있는 라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능청스러운 얼굴에 나는 그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찰칵, 불을 붙인 김상훈이 훅 하고 연기를 불었다. 살 거 같다는 얼굴이었다.
“근데 진하 씨는 안 피우세요? 라이터만 들고 있네.”
“저 금연 중이에요.”
“아! 금연 좋죠. 저도 진짜 끊어야 하는데. 가끔 이렇게 피우게 된다니까요. 담배가 진짜 습관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피웠더니 자제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 니코틴 패치 같은 거라도 써야 하나.”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 그는 뻐끔뻐끔 맛있게도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가 매캐했다. 나는 달리 할 말도 없어 먼저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김상훈이 나를 턱 잡았다.
“한 대만 피우고 가니까 잠깐만 같이 있어요.”
“일해야 합니다.”
“지금 점심시간이잖아요. 내가 이번 주 내내 봤는데 진하 씨 브레이크 타임에도 별로 안 쉬던데요? 그러다 몸 축나요.”
김상훈은 과하게 나를 염려했다. 그래 봤자 일주일 정도 본 사이인데,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반년은 얼굴을 본 친한 사람 같았다. 김상훈은 담배를 피우는 내내 수다스러웠다. 올해로 32살,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고 세한호텔 종로 본점에 입사한 지 2년. 나는 그가 주절거리는 동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참, 점심은 어땠어요? 입에 맞아요?”
저택에서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집주인한테 먼저 나가고 남은 음식들이었다. 남았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좋은 식재료로 만든 고급 요리였다. 식대가 나갈 일이 없으니 나로서는 감사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내 말에 김상훈이 피식 웃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전무님 입맛이 상당히 맞추기 어려운 편이라 우리가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칭찬 한 번 듣기가 어렵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식사가 입에 맞냐는 김상훈의 물음에 성재현은 무심하게 “나쁘진 않네요.”라고만 말했다. 씁, 하고 가벼운 입바람 소리를 낸 김상훈이 뒷말을 이었다.
“뭐, 근데 전무님 정도면 아주 매너 있는 편이에요. 예전에 다른 호텔에서 일하던 동료 말로는 출장 뷔페 때문에 이태원, 성북동 같은 부촌에 불려갔다가 뺨도 맞았대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양반이 좀 있잖아요.”
“네….”
“전무님은 그에 비하면 필요한 지적만 하고 과묵하셔서, 뭐가 낫다거나 괜찮다는 말씀도 없긴 한데 이만하면 편하죠. 뭐… 군말 없으면 문제가 없겠거니 넘기거든요.”
줄줄 늘어놓는 말을 들어보니 직원 사이에서 성재현은 상당히 좋은 인상이었다. 저택에서 내가 보고 들은 평판도 비슷했다. 잘생기고 상냥한 도련님.
그는 삼성동 저택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 나이를 막론하고 다들 그를 도련님이라 부르면서 깍듯하게 모셨다. 지금도 그랬다. 변함이 없었다.
“전무님이 삼성동 저택 들어온 게 약혼 전제였는데, 작년 겨울에 혼담 파기하고 혼자 들어오신 거래요.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큰 집에 혼자 계시는 거겠죠.”
맞잡은 손가락을 주물거리며 나는 멍하니 김상훈의 말을 곱씹었다.
세한그룹 본가는 이태원동으로 현 세한그룹 오너이자 성재현의 친부가 살고 있었다. 두 번째 집이라 할 수 있는 삼성동 저택은 차기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집으로 기자들 사이에선 동궁이라고도 불렀다. 그런 의미를 둔 저택에 성재현만 떡하니 독립시킨 데에는 혼사 문제가 있을 거라는 추측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왜 약혼을 파기했는데도 돌아가지 않는 걸까. 선릉에 그가 다니는 본사 건물이 있다는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어차피 곧 물려받을 집이니까?
뭐든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딱딱하게 말을 뱉자 김상훈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나도 이쪽으로 근무지 발령 올 때 들은 거예요. 원래 직원을 더 뽑아 보내려고 했는데 자택에 혼자 계시면 많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여긴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고, 험담도 아닌데…….”
“설령 험담이 아니라 해도 조심하는 게 좋죠. 그러다 자칫 오해가 생기면 저나 김상훈 씨나 곤란할 거예요.”
내 말에 김상훈이 입맛을 쩝 다시며 긍정했다. 왕이 없는 데서는 욕도 한다지만 저택에 있는 한 어디서 그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저택이 넓고 당장 여기에 성재현이 없다고 해도 그의 밑으로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이 십수 명이었다. 말이 어디로 샐지는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님께서도 매번 당부하시던 말이었다. 저택에 있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단다. 몸가짐도, 말도 늘 정갈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나를 바라보던 김상훈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진하 씨는 좋아하는 메뉴 있어요?”
“좋아하는 메뉴요?”
“네, 별건 아니고 내일 점심 메뉴로 만들어보려는데 마땅한 게 생각 안 나서요. 하도 이것저것 만드니까 오히려 특정한 걸 고르기가 어렵더라고요.”
구구절절 사족을 붙인 김상훈이 멋쩍게 붉어진 콧등을 쓱쓱 문질렀다. 점심 메뉴라. 그런 거라면 차라리 성재현한테 직접 묻는 게 빠르지 않나.
“전무님께 제가 따로 여쭤볼게요.”
“아, 그게요. 전무님 메뉴는 정해져 있고 직원끼리 먹는 식사 이야기예요. 다른 직원들한테도 물어보려는데….”
“뭐야, 김상훈. 여기 있었냐?”
불쑥 남자 하나가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뺨과 머리카락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있었다. 그는 뭉뚝한 담배를 든 김상훈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혀를 찼다.
“너 승진 실기 전까지는 담배 끊는다더니?”
“남은 담배 아까워서 피웠어. 수셰프한테는 비밀로 해줘라. 알았지?”
“이 새끼, 너 그러다가 수셰프한테 정말 한 대 얻어터지려고 그러지.”
“남 이사. 장기섭 씨나 잘하세요.”
“챙겨줘도 지랄이에요. 재수 없는 새끼. 그런데 그쪽에 계신 분은 누구냐?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온 직원분?”
장기섭이란 남자가 나를 힐끔거렸다. 김상훈이 담배 연기를 손으로 날려 보내며 대답했다.
“이쪽은 강진하 씨. 전무님 어시스트. 보조 비서 같은 거래.”
“아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세한호텔에서 같이 근무하는 장기섭입니다. 디저트 담당이에요.”
졸지에 통성명을 하게 된 나는 고개만 까딱 숙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장기섭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히야, 어쩐지 김상훈이 유난히 과하게 친절하고 관심 가진다 했더니만, 흐음… 강진하 씨 실례지만 애인 있어요?”
“예?”
“어유, 남자분한테 좀 이런 말 실례 같지만 진짜 미인이시네. 김상훈이 주말 내내 설쳐댄 이유가 있었구만.”
“야, 장기섭. 내, 내가 언제 설쳤다고 그러냐! 헛소리 지어내지 마라?”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근무 다녀오자마자 나한테 몇 번 이야기했는 줄 알아? 글쎄요, 저 사람이 강진하 씨 없을 때 얼마나 호들갑을……!”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김상훈이 재빠르게 장기섭의 입을 턱 막았다. 장기섭이 버둥거리는 걸 온몸으로 막은 김상훈이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크게 내뱉었다.
“죄송해요. 이 친구가 좀 생각 없이 말을 내뱉거든요.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 말은 오해예요, 오해! 제가 진하 씨 온 게 반가워서 그런 분이 왔다고 말한 건데, 이 자식이 장난친다고 별소리를 다 하네요.”
“네. 그러시군요.”
“저 그런, 게이 같은 거 절대 아니에요! 이왕이면 친하게 지내고 싶고, 박카스도 사 왔는데 그때 감동을 확 받아서 아, 이런 분하고는 잘 지내야지! 뭐 그런 느낌인 거죠.”
김상훈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내게 해명을 반복했다. 나는 잠자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모른 척 흘려들었다. 내가 남자랑도 잔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받을까.
“그만 들어가죠. 담배도 다 피우셨고, 미리 저녁 준비도 해야 퇴근하시죠.”
“아, 그래요. 추운 데 너무 오래 있었네요. 하하.”
“먼저 가볼게요.”
멋쩍게 머리를 긁는 김상훈을 지나쳤다. 장기섭이 뒤에서 “등신 새끼.” 하고 핀잔주는 소리가 들렸다.
곧 세탁업체에 맡긴 정장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나는 문득 창가를 올려다봤다. 손으로 블라인드를 들춘 성재현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걸까.
2층까지는 높이가 있어 표정까지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성재현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포식자에게 달아나는 나약한 짐승처럼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뒤쫓는 듯한 시선이 서서히 멀어졌다.
욕조에 받아둔 물은 딱 알맞게 뜨거웠다. 그래도 혹시 몰라 찬물을 좀 더 섞었다. 손바닥으로 물을 살랑살랑 휘저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성재현은 내게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했다. 다리에 감은 깁스 때문에 목욕은 못 하지만 샤워는 어느 정도 가능했다. 내가 없을 때는 방수 보호대로 다리를 감싼 다음 마무리만 정 비서가 거들었다고 들었다. 정 비서는 당진에 있는 공장에 성재현을 대신해 출장을 가서 현재 부재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저택에서 샤워를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는, 성재현이 나를 지목했다.
“준비 다 끝났나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성재현이 문가에 서 있었다. 회색 배스 가운만 걸친 그의 왼손에는 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까 주치의 박 교수가 들렀을 때 새로 감은 모양이었다. 그는 준비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로 간병인을 구하기 전까지는 이틀에 한 번씩 내 손으로 아버지를 씻기고 말리는 일을 했다. 성재현은 그에 비하면 발을 디딜 수도, 걸을 수도 있으니 훨씬 쉬운 편이었다.
나는 욕조 앞에 놓아둔 의자에 성재현을 앉힌 후 물을 틀어 손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고개를 젖힌 그의 머리에 샤워기를 갖다 대고 물로 천천히 적시고 샴푸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감은 눈에 샴푸가 들어가진 않았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다뤘다. 귀 뒤와 목까지 살살 주무르자 성재현이 만족한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깁스한 오른쪽 다리만 피해 더운물을 끼얹었다. 스펀지로 거품을 내서 발부터 다리를 문질렀다.
걸치고 있는 배스 가운을 벗기려는데 순간 손이 멈칫했다. 여기서 가운을 벗기면 맨몸이 드러날 터였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없던 긴장감이 확 들었다.
이건 일이다. 고용인으로서 할 일을 하는 거다. 나는 시선을 의자 손잡이에 고정하고서 서둘러 가운을 벗겼다. 반복적으로 몸을 문지르고 헹궜다. 행여나 맨살에 손이 닿을까 스펀지를 꽉 잡고 있었다.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힘들어요?”
“아닙니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자꾸 눈 피하는 게 보이는데.”
“저….”
“내 몸. 똑바로 봐요.”
넓은 욕실에 그의 목소리가 고동처럼 울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시키는 대로 그의 몸을 바라봤다. 벗겨진 가운 사이로 그의 몸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정교하다고 느껴질 만큼 잘 짜인 근육, 굵고 탄탄한 허벅지와 배. 그 가운데 성기가 살짝 솟아있었다. 얼핏 봐도 굵고 큰 살덩어리를 보는 순간 나는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 거지. 살면서 남의 알몸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의 몸을 의식하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스펀지를 고쳐 잡고 나는 그의 몸을 성심껏 문질렀다. 서서히 허벅지 사이로 손이 가까워졌다. 소리 나지 않게 침을 꿀꺽 삼켰다. 스펀지로 성기를 감싸고 살살 문지르자 손안에서 성기가 점점 부푸는 게 느껴졌다. 생리적인 자극이니 별수 없지만 마치 그를 대신해 수음하는 기분이었다.
“됐어요. 그 정도로만.”
성재현이 오른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힘이 꽉 들어간 손이 축축했다.
성재현이 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나는 그가 입을 잠옷을 가져왔다. 미리 받아 온 세탁물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이제 봉투를 뜯어 그에게 건네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차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부풀어 오른 성재현의 성기가 배꼽 아래에서 꼿꼿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성재현은 내가 가져온 잠옷을 받아 들지 않았다.
“강진하 씨.”
넥타이가 꼬리처럼 잡혔다. 힘에 끌려간 나는 그대로 성재현 앞에 섰다. 키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눈 피하지 말라고 했더니.”
번들거리는 눈이 나를 바라본다.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야릇한 미소를 지은 그가 내게 속삭였다.
“내 좆이 그렇게 신경 쓰여요?”
그 말에 귀 끝이 뜨거워졌다. 마른 입술이 달싹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성재현이 넥타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전무님….”
“내 좆이 신경 쓰였냐고 물었는데.”
뱀 눈초리처럼 날카롭게 빠진 눈으로 바라보며 성재현은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이러할 듯했다.
“오해하신 거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내 눈을 피하고 있잖아요.”
“…….”
시곗바늘이 톡톡 움직이는 소리가 무겁게 고요를 긁었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입술을 깨물던 나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제 행동으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러자 성재현이 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재밌네요.”
“저는…….”
“내 말이 아니라고 애써 부정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죠.”
그 말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마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암흑 같았다. 빛조차 삼킨 수렁이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을 딱, 딱 느릿하게 부딪친 성재현이 말을 이었다.
“내가 기분 나빴다고 하면, 강진하 씨가 어떻게 하려고요? 잘못했다고 엎드려 빌기라도 하려고요?”
“그렇게 해서, 전무님께서 기분이 풀리신다면….”
“그럼 강진하 씨 손으로 만지세요.”
성재현이 말했다. 명령이나 마찬가지인 냉엄한 어조였다. 당황한 나머지 눈을 한 번 깜빡거린 내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 강진하 씨 손으로 내 것을 만지란 겁니다. 아, 좀 더 명확하게 말해줘야 하나? 좆을 만지라고?”
팔걸이에 팔을 대고 몸을 기울인 성재현이 입술을 가볍게 실룩거렸다. 웃음기가 비치지 않는 얼굴은 농담이 아니라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성재현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두 손을 맞잡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고 즐기는 듯한 태도였다. 입술을 힘껏 깨문 나는 내뱉듯이 말했다.
“…섹스 상대가 필요하신 거라면, 정 비서님께 연락드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섹스 상대?”
그가 말을 되짚어 또박또박 반복했다.
“나는 그저 손으로 만지라고만 했는데, 섹스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네요.”
“…….”
“게다가 섹스 상대를 불러온다니. 내 집에 누구를 들이려고요? 스폰서 찾는 연예인? 아니면?”
싸늘한 눈동자가 매도한다. ‘감히’라는 말이 생략된 표정이었다. 숨이 마르다 못해 폐부까지 떨렸다. 성재현은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거리며 가볍게 돌렸다.
“강진하 씨 입으로 빨아요.”
“전무님….”
“내가 시킨 게 섹스, 라고 말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죠.”
성재현은 ‘섹스’라는 단어에서 은근하게 악센트를 높였다. 시선에 솜털이 곤두섰다. 적정 온도에 맞춰 틀어둔 난방에도 몸의 한기를 떨칠 수 없었다.
“아까 샤워할 때 표정 보니 애가 타던데요. 만지는 걸로는 모자랐나 봐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흐트러진 목소리를 쥐어짰다. 나는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던 성재현이 넥타이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나는 허둥거리며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습기에 달라붙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준 성재현이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강진하 씨는 내가, 화났으면 좋겠어요?”
“…….”
“나, 화날 거 같거든요.”
그의 얼굴에서 나는 낯익은 두려움을 깨달았다. 도련님으로 불리던 성재현은 화가 날 때도 빙그레 미소 짓곤 했다. 폭풍전야처럼. 그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원한다면 이대로 달아날 수 있다. 성재현은 지금 다리를 다쳤고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느지막한 저녁에는 고용인도 저택에 많지 않았다. 아무리 성재현이 나보다 체격이 크다 해도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불가항력처럼 도망치지 못했다. 포착당한 사냥감처럼 시선에 압도될 뿐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두 손을 힘없이 내렸다. 그러자 스르륵, 팽팽하게 잡혀있던 넥타이에 힘이 풀렸다. 성재현은 손바닥으로 툭툭 허벅지를 두드렸다. 나는 다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굴욕적인 수치심.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괴로운 건, 머리로는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다.
허벅지 사이에 성기가 흉흉하게 발기해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기둥을 붙잡고서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더 휘둘려선 안 된다. 미친개한테 물린 셈 쳐야 한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문지르자 미끈한 체액으로 조금씩 젖어 들었다.
한 손으로 잡기에도 상당히 묵직하고 두꺼웠다. 뿌리까지 이어지는 길이도 상당했다. 핏대가 선 모양은 저급하게 표현하자면 짐승의 성기 같았다. 말이나 사자 같은 덩치 큰 동물들처럼 크고 우람했다.
이걸 한입에 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손으로 한 번 빼서 부피를 줄일 생각으로 손바닥으로 쥐고 위아래로 문질렀다. 그 순간 성재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내가 입으로 빨라고 말했을 텐데요.”
양손으로 기둥과 음낭을 주무르던 내게 성재현이 똑바로 지시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살냄새와 샴푸 냄새가 뒤섞인 냄새가 호흡 사이로 파고들었다. 입을 벌린 나는 둥그스름한 귀두에 살짝 끼웠다. 잇새에 낀 귀두를 혀끝으로 날름 핥자 성재현이 무릎을 살짝 떨었다.
“음.”
가벼운 신음 소리에 나는 서둘러 입속으로 성기를 넣었다. 부피가 너무 컸다. 굵은 살덩어리가 입 안을 꽉 채웠는데도 아직 밑동이 남아있었다. 더 넣으면 목구멍을 건드릴 게 분명했다. 나는 그 정도에서 멈춰 성기를 혀로 샅샅이 핥았다. 능란하게 보이고 싶진 않아 그저 입에 넣고 빠는 척을 했다. 촙, 촙, 거리면서 침에 젖은 살덩어리가 입속을 유영하는 끈덕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성재현이 나른하게 탄식했다. 내 어깨에 내려둔 성재현의 손가락이 살살 목덜미를 쓸면서 기어 올라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두피를 약하게 쓰다듬었다. 격려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나는 혀를 둥글게 말아 기둥을 쓸고 핥았다. 턱을 움직이고 콧숨을 짤막하게 내쉬며 입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비릿한 정액 맛이 조금씩 입속에 스며들었다. 역겨웠지만 참아 눌렀다.
이만하면 충분히 커진 거 같은데도 입속에 든 성기는 계속 부풀었다. 불뚝거리는 핏줄을 따라 혀로 문질렀다. 입에서 빼낸 성기를 옆으로 기울여 번들거리는 기둥 표피를 따라 이로 야금야금 깨물었다. 그러다가 입에 반쯤 넣고 뺨을 홀쭉하게 죄어 성기를 오물거렸다. 후룩거리는 음탕한 마찰음이 잇새에서 난잡하게 이어졌다.
내가 입으로 성기를 빠는 사이에 성재현은 슬리퍼를 신은 발로 무릎 꿇은 내 허벅지를 슬쩍 건드렸다. 쪼그리고 있어 편편해진 정장 바지가 얇은 실내용 슬리퍼에 쓸려 보스락거렸다. 그대로 내 사타구니를 비집고 들어올 것처럼 사뿐하고 끈덕진 발놀림이었다. 다리 사이가 간질간질했다. 구두를 신은 두 발끝에 힘을 줬다.
“강진하 씨 입 안 되게 뜨겁네요.”
“후, 으응, 춥, 웁….”
“주저하지도 않는 걸 보니 좆 한두 번 빨아본 게 아닌 모양이고.”
창부처럼 취급하는 말에 나는 눈을 들어 성재현을 바라봤다. 요요하게 웃은 그는 내 귓불과 귓바퀴를 느른하게 더듬었다.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찌르르 아릿해졌다. 허벅지를 들썩이며 나는 애써 오르르 울리는 느낌을 참아 눌렀다. 서둘러 마치고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나는 입에 든 성기를 정성스럽게 빠는 데만 집중했다. 성재현이 보란 듯이 내 귀 뒤와 목덜미를 간질여도 눈을 질끈 감기만 했다.
“그런데 좀 아쉽네요.”
작게 중얼거린 성재현이 내게 눈을 마주했다.
“훨씬 더 잘 빨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닌 척하는 거 같단 말이죠.”
그 말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뒤통수에 힘이 실렸다.
“읍… 우윽!”
순식간에 입을 빠듯하게 채우던 성기가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쾅, 하고 흉기처럼 두꺼운 성기가 밀려들자 코로 내쉬던 호흡이 흐트러졌다. 숨이 막힐 듯했다. 나는 그의 무릎을 양손으로 붙잡고 몸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성재현은 쉽게 내 움직임을 용인하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아 쥔 성재현이 내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찔러넣는 순간, 눈앞이 한 번 쿵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으, 욱!”
“이거 봐, 다 삼킬 수 있으면서.”
목구멍으로 넘어온 성기가 꿀렁이며 내 목 안 깊숙한 부분까지 점령했다. 콧잔등에 그의 거칠거칠한 체모가 문질러졌다. 묵직한 음낭이 입술 아래에 찰싹거리며 부딪쳤다. 나는 기침도 구토도 할 수 없었다. 온전히 그의 성기에 맞춰 목구멍이 늘어난 듯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더 깊이 치닫고 있었다. 어떻게든 통증을 줄이려 침을 삼키자 조여든 목구멍에 성기가 옴쭉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성재현은 내 머리채를 잡고 빙글빙글 손안에서 돌리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아… 생각한 것보다 더 좁네요.”
“흐윽, 으.”
“목에 힘 빼고 목구멍 더 크게 벌려요.”
목구멍 안까지 밀려들어 온 성기가 좌우로 움직이며 점막을 쿡쿡 건드렸다. 눈시울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삼키지 못한 침도 찢어질 듯이 벌어진 입술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 철퍽철퍽, 침과 정액이 뒤섞여 입 안에서 뜨겁게 부글거렸다.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내 고개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그를 힘껏 뿌리쳤다.
“푸, 하아, 콜록, 콜록.”
입을 난폭하게 점거했던 성기가 쭉 딸려 나오고 나는 기침을 연신 했다. 콜록거리면서도 목이 퉁퉁 부어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뭍에 버려진 물고기처럼 나는 숨을 억지로 들이쉬고 또 들이쉬었다.
성재현은 내 머리를 붙잡고 뺨에 성기를 슬슬 비볐다.
“왜, 못 하겠어요?”
“우윽.”
“좆에 환장한 것처럼 잘 빨아놓고.”
성재현은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입으로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싫었다. 더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성기를 넣지 않으려 도리질 쳤다. 그러자 성재현이 머리를 확 잡아당겼다. 힘 때문에 고개가 들렸다. 그가 억지로 성기를 쑤셔 넣자 반동적으로 이를 세웠다. 그러자 성재현이 씩 웃었다.
“왜, 아예 깨물어서 삼키려고요?”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태연했지만 두 눈은 형형했다. 결국 나는 턱에 힘을 풀었다. 성재현은 벌어진 내 입에 성기를 쑤셔 넣고 보란듯이 쑤셔댔다. 퍽퍽, 점막을 찧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릴 정도였다.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지만 차마 감을 수 없었다. 성재현의 눈길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 반응의 순간순간을, 전부 담겠다는 듯이 끈덕지고 집요했다.
슬리퍼를 신은 발끝이 허벅지 사이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위로는 난폭하게 성기를 들쑤시면서 아래로는 나를 미약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슬리퍼를 벗은 맨발이 내 허벅지를 약하게 밟는다. 그러다 허벅다리 사이로 발끝이 들어와 노를 젓는 것처럼 부드럽게 두드렸다.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려 손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입속을 푹푹 쑤시던 성기가 미약하게 떨렸다. 고양감에 고개를 젖힌 그가 내 입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곧바로 끈적한 물줄기가 내 머리카락과 눈, 뺨에 달라붙었다.
나는 나사가 빠진 기계처럼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입술 양옆이며 얼굴 전체가 화상이라도 입은 듯 얼얼했다.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며 길게 내쉰 성재현이 자신의 정액을 뒤집어쓴 내 턱을 잡았다. 입술까지 흘러내린 정액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손길은 우습게도 애틋했다. 그는 내 입술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치열을 쓸었다. 정액이 입속에 고였다. 별수 없이 삼키자 성재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몇 년 사이에 더 예뻐져서 왔네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성재현은 웃고 있었다. 숨겨둔 장난감을 찾아낸 어린 소년처럼 밝고 명랑한 미소였다. 나는 두 손으로 성재현을 밀어내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엉망이 된 머리와 얼굴을 닦아낸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강진하 씨.”
그가 문고리를 잡는 나를 불러 세웠다.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그의 발소리가 모든 소음을 눌렀다. 손을 뻗은 그가 나 대신 문고리를 잡아 열어줬다. 끼익, 문이 열리며 어두워진 복도가 보였다.
성재현이 내 귓불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저번에 내가 그렇게 말했었죠. 구면이라 느낀 게, 착각이었다고.”
“…네, 그러셨습니다.”
“오늘 그 말 취소하죠.”
“…….”
“나 강진하 씨가 익숙하거든요.”
나는 더 듣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 표정이 어떨지 전부 알 거 같았다.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성재현은 문밖으로 달아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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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이후로 나는 성재현에게 자주 초대를 받았다. 평소 군것질을 하지 못하던 내게 저택에 널린 디저트는 즐거운 호사였다.
그날 나온 건 멜론이 층층이 쌓인 생크림 케이크였다. 멜론을 한입 가득 물고 오물거리던 나에게 성재현이 말했다.
‘어제 내 개가 죽었어.’
내 개, 라는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저번에 본 커다란 개를 떠올렸다. 저택에서 기르던 경비견이 얼마 전에 직원을 물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결국 개는 안락사를 당했다. 도련님이 많이 예뻐하던 개라던데, 안 됐지. 할머니가 중얼거리던 말이 문득 귓가를 맴돌았다. 그럼 성재현은 지금 슬플까? 입맛이 뚝 떨어졌다. 무릎에 둔 케이크 접시를 탁자로 치우자 성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개가… 죽었다니까 불쌍해서.’
‘불쌍해? 왜?’
‘아팠을 거잖아요. 그리고, 도련님이 키우던 개였고.’
‘하지만 진하는 개 무서워하잖아?’
‘…….’
그의 말대로 나는 개를 무서워했다. 저택에 갈 때마다 사납게 짖어대는 통에 늘 귀를 틀어막고 멀리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러나 왜일까. 개를 무서워하던 나는 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데 정작 성재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해 보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포크만 만지작거리던 내게 성재현이 접시를 다시 들게 했다. “마저 다 먹어.”라는 말에 나는 맹하니 크림과 빵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삼성동에 ‘놀러’ 가는 길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매주 토요일 정오면 집 근처까지 하얀 세단이 찾아왔다. 향긋한 레몬 방향제와 반질반질한 가죽시트. 꼬박꼬박 존대를 써 주는 운전기사.
그리고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언덕길에 보이는 낯익은 얼굴. 차 문을 열면 나를 향해 빙그레 웃는 아름답고 어른스러운 도련님.
어렸던 나는 도련님이 나를 반가운 손님처럼 맞는 게 너무 좋았다. 좋아서, 매번 뺨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정오에 맞춰 오느라 나는 늘 배고픈 채로 저택에 도착하곤 했다. 응접실에는 알록달록한 간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곤 했다. 제철 과일이 종류별로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아몬드와 건과일이 촘촘히 박힌 초콜릿, 푸딩에 한과, 약과, 한입 크기로 만든 샌드위치와 수프까지 없는 게 없었다.
‘잘 먹네.’
‘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니는 내가 과자 같은 것을 탐닉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 건 쓰레기라고 했다. 몰래 사 먹었다가 야단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 무렵의 나는 간식이 늘 고팠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재현이 빙그레 웃었다.
‘먹고 싶은 건 뭐든 다 먹어도 돼.’
‘진짜 그래도 돼요?’
‘이거 진하 때문에 준비하라고 한 거야.’
‘저 때문에요? 왜요?’
‘글쎄. 이런 걸 좋아할 거 같아서?’
그의 손에 생크림이 묻어있었다. 당황한 내가 휴지를 찾았지만 성재현은 말없이 손가락을 날름 핥았다. 방금까지 내 입술에 묻어있던 생크림이었다.
‘진하가 얼른 더 자랐으면 좋겠다.’
그 말을 하던 얼굴이 조금 미묘했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혀로 입술을 핥은 그는 동네 미용실에서 헐값으로 자른 내 뒷머리를 가만가만 만지며 속삭였다.
‘그래야 더 즐거워질 테니까.’
아홉 살을 지나던 겨울이었다.
**
사흘이 지나도록 삼성동에 가지 않았다. 무단결근이었다.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처음이었다.
학교 한 번 결석해 본 적이 없었다. 발목이 퉁퉁 부어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못했고, 회식에서 억지로 과음한 다음 날에도 새벽 출근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얇은 이불 하나만 뒤집어쓰고 방 안에서 끙끙 앓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째 새벽이 되던 날 나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옷도 벗지 않아 구깃구깃한 셔츠와 넥타이를 걸친 몰골은 부랑자 같았다. 화장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머리와 얼굴을 씻고 또 씻었다. 양치질을 얼마나 했는지 새로 개봉한 치약의 절반이 동났다. 입 안은 얼얼하다 못해 떫은맛이 날 지경이었다.
그사이에 정영호에게도, 김옥선 팀장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나 또한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정신머리가 없었다. 멍하니, 낡은 캐리어만 보다 벌떡 일어나 짐을 있는 대로 쑤셔 넣었다. 어디 갈 곳도 없는데 당장이라도 도망갈 사람처럼 나는 핸드폰으로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눈을 감으면 성재현이 그날 내게 했던 말들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구면이라 느낀 게, 착각이었다고.’
‘오늘 그 말 취소하죠.’
성재현은 진즉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모른 척했던 것뿐이었다.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성재현의 놀잇감이었다. 그의 기분에 따라 역할은 매번 달라졌다. 옷을 여러 벌 갈아입히는 인형이 되기도 했고, 가끔은 그의 주변을 빙빙 맴돌면서 재롱을 부리는 강아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6살이 되던 해에 성재현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뒤로는 여름과 겨울에만 잠시 귀국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창원으로 내려간 후로는 성재현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했다. 성재현에게 있어 나에 대한 가치는 딱 그 정도였다. 고용인의 아들이며 아랫사람.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익숙하다고 했다.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 여태 일부러 모른 척한 이유는 뭘까. 불분명한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두려움이었다.
사흘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김옥선한테 연락해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할까.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백예에서 선불금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곧 학자금 이자 납부일이었다. 게다가 원금 상환이며, 빚은 어떻게 하고. 내게는 그 많은 돈을 끌어 올 방법이 없었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자 어머니한테 부재중 전화가 여러 건 와있었다. 조급해 보이는 문자도 있었다. 절박해 보이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힘없이 한숨을 삼켰다. 그러다 나는 남승혁이 남긴 문자를 눈으로 읽었다. 호프집에서 만난 뒤로 그는 틈만 나면 내게 문자를 보냈다. 사소하고 별거 아닌 안부 문자였다. 저녁인데 밥은 잘 먹었는지, 감기 조심하라든지, 날이 추우니 목도리라도 챙기라든지.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한참 내려다봤다.
남승혁이란 이름 대신 외운 전화번호를 멍하니 들여다봤다. 통화 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누르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그에게 간략한 문자만 보냈다.
[너도 감기 조심해 답장은 하지 마]
**
닷새 만에 집을 나섰다. 정영호에게서 연락이 온 탓이었다. 그는 내가 무단결근을 했는데도 나무라지도 않았고, 계약 위반으로 경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오부터 성재현이 서재에 있으니 보조하라는 전달뿐이었다. 내가 저택에 나흘이나 부재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혼자 어떻게든 상황을 정돈하려 애썼다. 성재현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간 무단으로 결근해서 죄송하다고 빌지, 아니면 성추행으로 고소하겠다고 난동을 피워야 하는지.
고소라니.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처신이었다. 차라리 덮어두고 모른 척하는 게 백번 낫지. 살아생전 할머니께서도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게다가 세한에서 저택 근무자들에게 비밀유지 계약서를 괜히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찬바람을 자꾸 맞아서 그런지 입술이 쓰라렸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늘 챙기고 다니던 립밤이 없었다. 까칠한 입술을 매만지며 나는 본관 뒷문으로 들어섰다. 부엌 옆 팬트리 주변이 새로 들어온 식료품으로 어수선했다. 선반을 정돈하던 김상훈이 나를 보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진하 씨! 아팠다면서요?”
무단결근은 ‘몸살감기’로 포장되어 있었다. 김상훈은 떼꾼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찼다.
“이거, 이거. 얼굴 봐. 창백하다 못해 피골이 상접하네. 입술은 왜 이래요? 설마 대상 포진인가? 그거 진짜 고생 많이 해요. 브레이크 때 제대로 안 쉴 때부터 알아봤어요.”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왜, 왜 신경을 안 써요? 아픈 사람 보이면 신경 쓰이죠. 니콜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김상훈은 허둥지둥 뒤에서 야채를 손질하던 니콜에게 동조를 구했다. 니콜은 소란에 눈으로 나와 김상훈을 쳐다보더니 다시 일에만 집중했다. 원하는 대답이 없자 목을 긁적인 김상훈이 말했다.
“죽 좀 만들어드릴까요? 지금 안 먹더라도 포장해서 들고 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상훈 씨 하던 일 마저 하세요.”
고개를 흔들며 나는 부엌을 나섰다. 내가 향할 곳은 한 군데였다. 2층, 성재현의 서재.
계단을 오르는 동안 손을 수십 번도 넘게 쥐었다 폈다. 복도에 간신히 도착하자 빈 물컵을 든 정영호가 문을 닫고 나서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주저 없이 내게 다가왔다.
“몸살은 괜찮습니까?”
화를 낼 거란 예상과 다르게 정영호 또한 안부를 먼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영호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볼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안에 계시니까 들어가 보세요.”
그 말이 끝이었다. 결근에 대해 그 어떤 이야기도 없었다. 뚜벅뚜벅 내려가는 정영호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빨랐다. 마치 그곳에 더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듯이.
양각으로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나무문 앞에 서서 입술 양옆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어떻게 나오든 간에 울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길 바랐지만 “들어오세요.”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블라인드를 쳐둔 방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벨벳 커튼과 펠트 카펫이 조화를 이루는 서재는 난실 같았다. 성재현은 안경을 쓰고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왼편에 수북하게 쌓인 파일철과 노트북. 금욕적이고 고상한 풍경이었다.
문가에 서 있는 나에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만년필로 톡, 톡 종이 위에 점을 찍던 그는 곧바로 하단에 사인을 남겼다. 팔락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허락받은 것처럼 이어졌다. 나는 그곳에 서서 성재현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무님, 이라고 불러야 할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잘 쉬고 왔어요?”
한참 만에 성재현이 말을 꺼냈다. 닷새 전 일을 망각한 사람처럼 여상하고 담백한 말투였다. 나는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고 한 걸음 나아갔다. 안경을 벗은 그가 깍지를 끼고 내가 다가오는 걸 차분하게 구경했다.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부르지 않으면 안 올 생각이었어요?”
성재현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듣고서도 나는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책임감 없는 짓이지만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대로 짐을 싸서 창원으로 도망칠 생각도 얼마나 했던가. 말없이 서 있는 내게 성재현은 오른편에 있던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내민 문서에 나는 두 손으로 받아 들며 물었다.
“결재라면 정 비서님께….”
“읽어봐요. 강진하 씨랑 협의해야 할 이야기니까.”
협의라니. 그 말에 나는 문서를 확인했다. 강준구 금융 채무 이력, 불법 사채 회사 명단, 파산 회생 신청 불허가. 그 외에도 내가 가진 20억 빚과 관련된 내용이 줄줄이 들어가 있었다.
“채권자 동의를 못 받아 파산 선고가 안 된 데다가 부산에서 악명 높은 조직에 사채 십수억 빚을 졌고. 이자만 해도 한 달에 거의 육백씩 나가는 거, 강진하 씨 혼자 감당하기 꽤 벅찼겠는데.”
“이건, 이건 개인 금융 정보입니다. 전무님께선 상관하실 필요가…!”
“그 와중에 있는 연줄이라고는 도박광이라 정선에 틀어박힌 작은외삼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 명의로 차렸던 부품 공장 하나 말아먹기 일보 직전인 큰외삼촌.”
“…….”
“많이 힘들었겠네.”
측은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동정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성재현이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게 두려울 뿐이었다.
“육백만 원씩 매달 내려면 강진하 씨 능력으로는 뭘 했을지 궁금하네요. 다니다 부도나서 그만둔 직장이 일본 수입 중계 회사던데. 일반 사무직이었으면 기껏해야 월 이백 정도 벌었으려나. 그걸로 감당이 됐어요?”
“그만….”
“아니면, 몸이라도 팔았어요?”
성재현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단 악의적인 희롱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성재현을 노려봤다. 들고 있던 문서를 힘껏 구기고 나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제가 그날 전무님 좆 한 번 빨았다고 해서, 남창처럼 보이십니까?”
“스스로, 남창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고요?”
“…제 가정 사정과 출신 이력이 전무님 수준에 맞지 않는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부어오른 목구멍이 홧홧했다. 눈을 크게 치켜뜨고 바닥에 종이 뭉치를 내던진 나는 몸을 돌려 나서려 했다.
“강진하 씨는 쓸데없이, 자존심이 세네요.”
깁스한 오른발이 쿵, 하고 바닥을 딛는다.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느릿하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붙잡혀서 얼굴도 모를 남자들한테 구멍이 너덜거리게 박히다, 장기도 없이 죽을 판국 아닌가? 아니면 팔다리 잘려 어선에 실린 채 평생 정액이나 받다 죽거나.”
“그만…하세요.”
“글쎄요. 나는 그만할 생각이 안 드는데. 강진하 씨가 지금 자기 주제 파악을 좀 못 한 거 같거든요.”
나를 붙잡아 챈 성재현이 문으로 확 밀쳤다. 순식간에 퇴로가 막힌 나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그를 올려다봤다. 험악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그의 입매에 걸려 있었다. 그는 내 귀밑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강진하 씨 계약 기간이 몇 개월이었죠?”
“…삼 개월입니다.”
“그럼 오늘을 기준으로 하면, 십이 주 남은 셈이네요.”
손가락이 뺨을 타고 내려와 내 턱을 가볍게 붙들었다. 상처가 난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댈 때마다 쓰라렸다.
“내가 제안 하나 하죠.”
“…….”
“이십억 빚을 전부 탕감해주는 대신, 강진하 씨는 남은 십이 주 동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예요.”
“원하는 대로라면 어떤 걸 말하시는 겁니까.”
“섹스.”
요컨대 성재현은 내게 20억가량의 빚을 전제로 몸을 팔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탕감이지 채권자를 성재현으로 바꾸겠단 뜻이었다. 그것도 섹스를 조건으로.
“단순하게 계산하면 한 번에 이억 정도가 되는 셈인데, 어때요? 이 정도면 강진하 씨한테 굉장히 유리한 거래조건 아닌가?”
“…….”
“그날, 강진하 씨 꽤 볼만했거든요.”
천박한 단어를 내뱉으며 그가 생글 웃었다. 목으로 내려온 손가락이 울대뼈를 연약하게 두드렸다.
“좆을 삼킬 때마다, 목이 울컥거리며 움직이는데 굉장히 야하더군요.”
솜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성재현이 내 머리채를 잡아채고 조아리게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입을 벌리게 하고 그때처럼 입으로 성기를 빨게 할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내 목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기만 했다. 흰 손이 차갑다 못해 섬뜩했다. 뱀의 비늘처럼 곤두선 손길이었다.
“물론 지금 하자는 건 아니에요. 난 무드를 즐기거든요.”
“…….”
“그러니까, 그런 억울한 눈으로 노려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싸구려 넥타이에서 멈춘 손이 천을 움켜쥐었다. 그는 털 달린 동물을 쓰다듬듯이 위아래로 넥타이를 흔들었다.
“결정은 일요일 밤까지.”
성재현은 착, 하고 내 넥타이를 당겨 매듭을 팽팽하게 조였다.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면 그날 저택으로 와요.”
마치 평범한 사안을 결정 내리듯 태평한 표정이었다. 이질감이 들어 턱이 떨렸다.
“제가 거절하면… 여기서 내치시는 겁니까.”
“내친다니. 내가 그렇게 악랄해 보여요?”
“…네. 그러신 거 같습니다.”
나도 모르게 노골적인 비난이 입 밖으로 나왔다. 최측근인 정영호가 봤다면 기겁할 만한 태도였지만 성재현은 화조차 내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저런, 나는 배려가 깊다는 감사 인사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악랄하다니 서운하네요.”
잔혹한 제안을 내놓고도 자신은 무고하다는 듯 성재현이 서글픈 어투로 대답했다. 돈으로 사람을 흔들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는 말이 목 끝까지 맺혔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말도 쏘아붙이지 못했다. 성재현은 꼭대기에 있었고 나는 더 벼랑 끝에 매달리다 못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성재현이 덧붙였다.
“거절한다면 불이익이 없다고는 장담 못 하겠죠. 만약 강진하 씨가 내 말을 거절한다면 내 제안은 결점이 될 테고, 조용히 은폐해야 하니까요.”
“그 말은 결국 협박이나 마찬가지잖습니까.”
“빚을 섹스 몇 번으로 없앨지, 협박이라 여기고 달아날지는 강진하 씨 선택이에요.”
성재현은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빚을 전부 갚아준다는 제안이 싫다면, 나로서는 별수 없죠. 강요는 할 수 없으니까.”
“…….”
“하지만 삼 개월 만에 빚을 손쉽게 해결할 방안이 강진하 씨한테 또 온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한순간도 자신은 강요하는 게 아니라는 듯 방어적이고 기만적인 태도였다. 불쾌하고 수치스럽다. 빚 이야기가 화두로 올라올 때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훌쩍거리진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건 나약하게 보일 뿐이다. 아둔하다고 여기게 되는 흔적을 그에게는 추호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왜 저한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성재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깊게 우물진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흐려졌다가 선명하게 초점을 되잡았다.
“절박하니 손쉽게 다룰 수 있고, 얼굴은 예쁘장하니 눈요기도 되고.”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내 팔을 꽉 잡은 성재현이 귀에 속삭였다.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 내 옆에 있으니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
“게다가 강진하 씨라면 금방 몸으로 배울 거 같거든요.”
성재현은 “놀잇감”이란 단어를 장황하게 풀었다. 그 정도 관계라고 완벽하게 규정짓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아득한 과거를 떠올렸다. 달콤한 걸 먹여주던 그의 손 위에서 노닐던 장난감 같았던 유년기는 떨칠 수 없는 내 안의 파편이었다.
불러낸 목적은 그뿐이었는지 성재현은 문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코끝에서 넘실거리던 그의 향수 냄새가 멀어졌다. 의자에 다시 앉은 성재현이 만년필을 집어 들더니 손으로 가볍게 돌렸다.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서류를 다시 끌어와 일하기 시작하는 성재현을 바라봤다. 나가라는 지시도, 머물라는 말도 없이 경계선만이 내 발아래에 놓여있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부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나는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긴 침묵의 끄트머리에 전화벨이 울렸다. 눈으로 번호를 확인한 성재현은 전화를 받는 대신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 제안과는 별개로 강진하 씨한테 업무 하나 맡기려는데.”
“어떤 업무를….”
“온실.”
블라인드에서 쪼개져 들어온 빛이 바닥을 가로로 갈랐다. 창가를 툭툭 손가락으로 두드린 성재현이 뒤이어 말했다.
“별관 온실 관리. 앞으로는 강진하 씨가 맡으세요.”
**
가파르게 땅을 깎아 언덕처럼 파인 길을 오르는 동안 와이셔츠 안에 땀이 흥건하게 났다. 광활한 평야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느 학교에나 있는 운동장 너비는 족히 되었다. 볕은 뜨겁고 바람은 차갑다. 나는 숨을 고르며 거대한 유리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저택 동쪽에는 별관이 하나 있었다. 원래는 손님이 머물 때 쓰이는 집이었지만 몇 년 전 별관을 옮기면서 빈터에 온실을 새로 지었다. 성재현은 굳이 나한테 온실 관리를 일임했다. 저택에는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조경 관리 업체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저택에 있는 사람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온실 관리 하나 돕지 못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비전문가인 나한테 이 일을 업무라며 떠맡긴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은색 철제로 세워진 서양식 온실은 삼면이 유리였다. 겉에 불투명 유리를 덧붙였는지 안이 바로 보이진 않았다. 녹색 잎사귀와 나무로 보이는 그림자가 선뜩거렸다. 상당히 음산했다.
문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도어 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온실에도 잠금장치가 있다니 독특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공간인 것처럼 폐쇄적이었다. 성재현이 불러줬던 번호를 머리로 되뇌며 버튼을 눌렀다. 간단한 비밀번호로 문은 금세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풀 냄새가 자욱하게 풍겼다. 갖가지 과실수부터 꽃, 선인장까지 일렬횡대로 나란히 늘어선 온실은 분명 아름다움의 집약체였다. 그러나 안에 들어선 나는 감탄보다도 오싹한 서늘함을 느꼈다.
성재현에게 온실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개인적으로 취미 삼아 만든 온실”이란 정도였다. 이마저도 정영호가 지나가듯 알려준 말이었다. 삼성동으로 들어오기 전 가장 먼저 보수 공사를 지시했다던 그의 온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맞은 습도와 온도. 두꺼운 유리에 투과된 빛은 바깥보다 한 꺼풀 어두워서 온실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날벌레 하나 없는 온실 내부를 둘러보자니 어딘가 스산했다. 제어 시스템으로 매시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있을 텐데도, 묘한 한기가 돌았다. 추운 건 아니었다. 온도는 분명히 외부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데도 마치 공허하고 텅 빈 폐허 같은 곳에서 느껴질 법한 기묘한 한기가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가까이에 있는 이파리 하나를 어루만졌다. 관리가 잘된 듯 싱싱하게 살아있는데도 기묘하게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식물을 박제한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끔 만드는, 완벽한 정지 상태였다.
이미 손질이 잘된 온실은 건드릴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손을 대는 순간 모래성처럼 부서질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관리’라는 말을 충실히 따랐다.
물을 길어와 조금씩 화분에 흘려 넣었다. 모래알처럼 촘촘한 흙 안으로 물이 고여 넘쳤다.
며칠간 출근하지 않은 탓에 할 일이 꽤 많았다. 대부분 수선 요청이나 재고 확인, 업체 연락, 별관 주간 청소 같은 급하지 않은 용건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일이 몰려 있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다행히 늦은 오후까지 발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별관을 나와 저택 본관으로 향하던 중에 나는 주차장에 승용차가 대기 중인 걸 발견했다. 손님이라도 방문한 걸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서둘러 본관에 들어서니 성재현이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정에는 분명 오늘 외출 일정 이야기는 없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겨울 코트를 걸친 다음 멀쩡한 왼발만 구두로 갈아신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정영호에게서 ‘피로연’과 ‘전경련’이란 단어가 번갈아 나온 걸 보니 일신상으로 거절했던 누군가의 연회에 별수 없이 얼굴마담으로 나서는 듯했다.
나는 그의 옆에 붙어서 차에 올라타는 그를 도왔다. 손이 닿는 동안 나도 모르게 긴장해 배 아래가 지끈거렸다. 이윽고 탑승을 마친 성재현은 차창을 살짝 내리고 창틀에 기대 내게 손짓했다.
“오늘 차림에 거추장스러우니 강진하 씨가 갖고 있어요.”
그는 넥타이에 꽂아뒀던 핀을 내 넥타이에다 꽂았다. 싸구려 넥타이에 금색 장신구가 덩그러니 매달렸다.
“그럼 일요일에, 보죠.”
거절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진 목소리였다.
차가 떠난다. 저택과 도로를 잇는 중간 현관문이 한 번 열렸다가 다시 성문처럼 굳게 닫혔다. 돌아선 나는 단단하게 죄던 넥타이를 먼저 풀었다. 넥타이핀을 손으로 힘껏 쥐었다. 애꿎은 화풀이였다.
**
보드카를 섞은 레모네이드를 홀짝거리며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클래식을 재즈 버전으로 변환한 연주곡이 은은한 조명을 타고 비처럼 내려앉았다.
패딩을 걸치고 퇴근하던 내게 김상훈이 갑작스럽게 “회식 안 할래요?”라고 말을 꺼냈다. 저택에 들락거리는 호텔 직원들끼리 주말을 맞아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 나도 같이 가자는 권유였다.
“아, 그런데 아픈 사람한테 이러는 건 좀 아닌가.”
“회식… 어디로 가실 건데요?”
“어? 진하 씨도 갈 거예요?”
김상훈은 내가 회식 제안을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는 게 싫어 거절했을 터였다. 하지만 착잡한 심정이 오늘따라 나를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회식이라는 말에 고깃집이나 포차를 떠올렸건만 김상훈이 말한 회식 자리는 의외로 호텔 라운지에 있는 와인 전문 바였다. 세한호텔 직원이라면 할인을 받을 수 있으니 종종 이용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라운지 바에 들어서는 태도가 어딘가 허술하긴 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고깃집이든 와인바든 술을 파는 건 같았고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회식에 참석한 인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이었다. 김상훈, 장기섭. 그리고 두 명은 저택에서 한두 번 본 사람이었다. 자주 볼 일은 없으니 이름을 물을 만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어색하게 통성명을 했다. 나를 제외하면 전부 세한호텔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물론 분야는 조금씩 달랐다. 장기섭을 비롯한 여자 쪽은 디저트 코너 담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비스팀 소속이라고 했다. 그래도 입사는 비슷한 시기에 했는지 다들 불편함 없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는 뻔하다면 뻔했다. 밖에서 보면 ‘재벌가의 착취’라는 힐난이 나오겠지만, 간혹 호텔 직원 중에서 몇몇은 개인 저택으로 가는 걸 선호한다고 했다. 어느 그룹 집안이든 몇 번 출입하고 나면 웬만해선 만날 일이 없는 고위층 인사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으면 아예 밑 사람으로 직접 고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문에라도 저택에 뿌리 박기를 시도하는 직원이 적잖은 듯했다. 매년 공고가 한 번씩 올라오는데 그때마다 경쟁률이 두 자리를 넘어간다는 둥, 자기 예찬이 섞인 우스갯소리와 농담이 술을 따라 흘러넘쳤다.
“그, 석영에 미래 미술관 관장님만 하더라도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아는 친구가 큐레이터인데 미술품 만지는 일보다도 호텔까지 택시 타고 커피 사 오는 일이 더 많았다더라고요.”
“석영그룹? 미래 미술관이면 세한 회장님 누나분 아니야?”
“네. 전무님 고모 되는 셈이죠. 그분 종로 본점도 자주 오잖아요. 엊그제도 비즈니스 예약 잡으셨다고 하던데요.”
그들은 금세 재벌가에 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화두에 오른 석영그룹은 세한과 혼맥으로 이어진 관계로 현 회장인 성윤명의 누나인 성미령이 바로 그 중점에 있었다. 성미령에 대해서는 얼핏 기억하는 게 있었다. 추석, 설날,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마다 내외가 함께 삼성동 저택에 방문하곤 했었다. 내외 밑으로 늦게 태어난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 나는 그 막내아들과 자주 놀아주곤 했었다.
서울에 돌아온 뒤로 덮어두고 있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익숙해서 습관적으로 떠올랐다고 해야 할지, 병든 기억력이라고 해야 할지. 한숨을 쉬며 남은 술을 털어 넣은 나는 바텐더에게 똑같은 걸로 하나 더 부탁했다. 셰이커가 찰찰 흔들린다. 보드카가 오늘따라 술술 들어갔다.
성재현은 내게 일요일까지 고민할 시간을 줬다. 수십억대의 빚을 갚아준다는 말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빚에 허덕이던 걸 떠올리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성재현이 그 말을 꺼냈다는 점과 그 대가로 섹스를 요구했다는 게 내게는 막막한 장벽이었다.
빚 때문에 찾아온 사채업자들이 내게 별 제안을 했었다. 골프 웨어 업체 사장 스폰 제안이 오는가 하면, 대놓고 호스트 제의를 하기도 했다. 나는 알량한 자존심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뿌리쳤다.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몸을 함부로 굴리고 싶진 않았다. 한 번 발을 담그는 순간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도 남을 터였다. 나는 그저 내 처지가 그 정도로 내려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쉬운 길에는 그만한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20억이나 되는 빚을 전부 갚아준다는 전제로 성재현이 내게 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제안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왜일까. 여태 그런 권유가 한두 번 온 것도 아닌데, 독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잔을 내려두지 않고 있었다.
3개월, 12주간 성재현이 원하는 대로 섹스한다. 그러고 나면 빚을 변제할 수 있다. 힘없이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내가 멍청하게 자존심이나 세우고 있는 걸까. 절박한 주제에 고작 내 가치를 지키겠다고 간편하고 쉬운 기회를 외면하려 드는 걸까.
남승혁한테 도움을 요청하자던 어머니의 말도 거절했다. 그래놓고 내가 한다는 고민이 결국 사창가에서 구걸하는 남창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술자리를 좋아한다던 김상훈은 예상보다 술이 약한지 얼굴이 빨갰다. 네 사람 중 둘은 내일 오전 근무가 있어 먼저 돌아갔고 남은 사람끼리 술을 더 마셨다. 와인 네 잔쯤 들어가자 아예 두 눈이 다 풀린 그는 실실 웃으면서 자꾸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덩치 큰 남자가 기대니 나도 자꾸 의자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곤란해하면서도 나는 김상훈을 매몰차게 밀어내는 대신 테이블에 엎드리게 했다.
“진하 씨, 하하, 진하 씨….”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취한 그는 나를 보고 히죽거렸다. 벙긋거리는 입술이 자꾸 내 이름을 실없이 부르고 있었다.
“뭐야, 얘 맛 갔네. 하여간 술도 제대로 못 마시는 놈이 맨날 회식, 회식 노래를 불러. 제대로 끝까지 가지도 못하는 게.”
화장실에 다녀온 장기섭이 뻗은 김상훈을 보더니 혀를 찼다. 김상훈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장기섭에게 김상훈을 부탁했다.
“슬슬 집에 가야겠어요. 늦었네요.”
시간을 확인하니 지하철 막차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내 말에 장기섭이 골머리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내일 일 있다는 새끼가 술에 곯아떨어지기나 하고. 좀만 들떴다 하면 이 지경이라니까요.”
“저 그럼, 대리 기사 부르는 동안 손만 좀 씻고 오겠습니다.”
“아, 그래요. 전 상훈이 술 좀 깨우고 있을게요.”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젖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잠시 꺼뒀던 핸드폰을 켜자마자 우수수 쏟아지는 장문의 문자는 절반이 협박이었다. 병원까지 찾아와 한바탕 난동이라도 부린 듯했다. 목을 졸라매는 게 이런 거겠지.
유예기간까지 가질 필요도 없었다. 결정권을 줘도 나한테는 그 권한을 행사할 여력도 없었다.
콸콸 흐르는 물소리만이 빙글빙글 귓가를 맴돌았다.
**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졌다. 비가 오려는지 습한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하얗게 부서졌다.
인적도 없는 삼성동 부촌 골목에 가로등 불빛만 휘영청 했다. 회색 담벼락, 그 위에 길쭉하게 고개를 뺀 소나무.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무결한 영역을 눈앞에 두고 나는 초조하게 한숨을 쉬었다. 녹아내린 목캔디가 뾰족하게 입 안을 찔러댔다. 주머니를 뒤적여 목캔디를 하나 더 꺼냈다. 와드득, 이로 부숴 먹으면서 혀끝으로 날이 선 가루를 굴렸다. 혀가 긁혔는지 씁쓰름한 피 맛이 났다.
서성거리던 발을 무겁게 옮겼다.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르자 불 켜진 경비 초소가 보였다. 안에서 CCTV를 보던 경비원이 나를 발견했다. 그는 네모난 창문을 열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벽에 달린 플라스틱 시곗바늘이 이미 ‘1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슴츠레 뜬 눈이 요목조목 나를 확인한다. 기자나 방송국 직원인지 분간하는 모양이었다. 삼성동, 이태원동, 한남동 같은 부촌 지역에는 기자들이 종종 밤을 틈타 얼쩡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출입증 대신 쓰이는 납작한 카드와 신분증을 제시했다.
“전무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호출이요? 이 늦은 시간에요?”
“네.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튈 정도는 아니었다. 경비가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여기 정문 경비입니다. 강진하 씨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잠시 통화를 하더니 내 쪽을 한 번 흘깃 쳐다봤다. 머지않아 수화기를 내려놓은 경비가 버튼을 누르자 달칵, 하고 현관 옆에 작게 딸린 중문이 열렸다. 나는 꾸벅 눈인사를 하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직원들 대다수가 퇴근한 저택은 군데군데 켜진 불을 빼고 거무스름했다. 블라인드와 커튼까지 내려져 있어 암굴 같은 복도를 지나쳤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2층 서재 문이 열려있었다.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병원에서 종종 맡던 소독약 냄새가 문 안에서 희미하게 풍겼다. 개포동에 있는 세한서울병원 정형외과장 박 교수가 방문한 모양이었다. 환갑을 앞둔 늙은 교수가 개복한 석고 깁스를 내렸다. 오른발에 지지대를 대고 붕대를 다시 감는 손길은 지나치게 꼼꼼하다. 그야말로 떠받들어 모시는 듯했다.
“손은 좀 어떠십니까?”
“음, 시큰거리는 건 많이 나아졌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저희 쪽으로 내원하셔서 물리치료 받으시는 게 좋습니다. 전무님께서 워낙 바쁘시니 이런 사소한 치료 하나도 번거로우시겠지만 큰 사고였던 만큼 후유증을 조심하시는 게 좋지요.”
박 교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다. 성재현은 대답 없이 붕대를 감은 발을 내렸다. 상황을 확인하던 정영호가 뒤늦게 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일요일 밤에 기별 없이 등장한 나를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실 테니 이만 쉬시도록 나가보겠습니다.”
정영호가 먼저 운을 띄우자 박 교수가 서둘러 짐을 챙기고 나설 채비를 했다. “기사가 댁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정영호가 박 교수를 따라나섰다. 그들 중 누구도 나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의도적인 무시였다.
인기척이 희미해진다. 고개를 까딱 좌우로 흔든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요.”
문을 등으로 받치듯이 서서 대기하던 나는 그 말에 입성했다. 두꺼운 나무문이 쿵, 닫혔다. 밀실에 갇힌 기분이었다.
의자에 느른하게 기댄 성재현은 간소한 차림이었다. 저녁쯤 퇴근하기 전에 그가 옷을 갈아입는 걸 몇 번 돕긴 했지만 이렇게 편한 모습으로 서재에서 맞닥트리기는 처음이었다.
“생각보다는 늦게 왔네요.”
탁자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린 그가 말을 이었다. 요란하지 않게 그의 앞까지 걸어간 나는 품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 사무 책상에 내려뒀다.
“맡겨두신 물건, 드리려고 왔습니다.”
지퍼 팩에 든 넥타이핀을 내려다본 성재현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요. 다음에 외출할 때는 이걸 꼭 차고 나가야겠어요.”
성재현은 지퍼 팩을 열어 넥타이핀을 꺼냈다. 가는 금속 테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전에 …몇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탁? 벌써부터 베갯머리송사라도 하려고요?”
“협의에 더 가까우니 송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열등 불빛이 그의 검은 망막에 둥글게 맺혔다. 이를 드러내지 않은 맹수처럼 고요한 눈길이었다. 나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되도록 업무시간 외, 가능하다면 밤에만 유효한 제안이었으면 합니다. 이건 저만이 아니라 전무님 일과와 프라이버시 보호이기도 합니다. 잘못 새어 나갔다가 추문이라도 돌면 그건 전무님도 피해를 보시겠지만 제가 가장 타격을 입습니다. 그리고… 주말은 피하고 싶습니다. 제게도 사적인 시간이란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삼 개월이라는 제한 기간과 약조한 대금은 반드시 지켜주세요.”
궁지에 몰린 주제에 부탁할 건 참 많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만 했다. 어차피 나는 더 몰릴 것도 없었고 그는 저울에 나를 들어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호소를 다 들은 성재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입매가 비스듬히 비틀려 있었다. 하하, 하고 웃는 목소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초과 근무에 해당하는 거금이라도 더 달라고 시위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네요.”
“…돈은 제안해 주신 이십억이면 충분합니다. 더 바랄 염치도 없고요. 삼 개월 뒤에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떤 말도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
부탁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느릿하게 몸을 흔드는 그를 지켜봤다. 성재현은 눈을 감고 날숨을 길게 흘렸다. 하아, 나른한 탄식과 함께 눈을 뜬 그가 말했다.
“일단 첫 주에는 오억 먼저, 나머지 돈은 차차 보내주죠. 아니면 더 필요해요?”
“…가급적이면 빨리 해결하고 싶습니다.”
말하면서도 자조가 목구멍에 맴돌았다. 하지만 저 돈이면 6년간 지독하게 시달렸던 사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 있었다. 그러려고 이 자리에, 그의 앞에 선 것이었다. 모아쥔 두 손에 힘을 꽉 줬다. 당장이라도 돌아서고 싶었지만 오로지 빚을, 병석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견뎠다.
집게손가락을 딱 부딪친 성재현이 대답을 이었다.
“좋아요. 준비되는 대로 지급해주죠.”
“감사, 합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나도 몇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끼익, 의자에서 등을 단단하게 세운 성재현이 나를 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강진하 씨에게 거부 의사는 없어요. 무조건 내 말에 따라야 합니다.”
“…네.”
“설령 싫다는 말을 들어도, 울어도 멈추지 않을 거고 내가 즐기고 싶을 만큼 즐길 거예요.”
“…….”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내게서 달아나지 말 것. 그래야 서로가 타당할 테니까.”
휘어진 눈매가 서늘하다. 조건이 아니라 경고였다. 숨소리가 서로 섞인다. 두 손을 의자 팔걸이에 댄 그가 내게 눈짓했다.
“옷 벗어요.”
블라인드를 내려 밖이 보이지 않는다지만 방 안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는 내게 옷을 벗으라고 지시했다. 시작이었다. 어리석다고 한탄하기에는 이제 늦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패딩부터 먼저 벗었다. 일부러 정장 재킷은 입고 오지 않아 와이셔츠에 넥타이, 바지만 입고 있었다. 단추를 푸는 동안 손가락이 떨려 자꾸만 미끄러졌다. 바지를 벗을 때쯤에 성재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벨트는 나한테 주세요.”
왜냐고 자연스레 물으려던 입술을 다물었다. 물어본들 그게 무슨 소용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합성 피혁으로 만든 벨트가 고결한 손에 잡혔다. 양말, 바지 전부 벗고 속옷만 남았다. 드로어즈 밴드에 손을 대고 머뭇거리던 나를 타박하듯 성재현이 손가락을 예민하게 툭, 툭 두드린다.
속옷까지 벗자 맨살에 닿는 공기가 이질적으로 차가웠다. 오한이 난 사람처럼 떨렸다. 시선을 외면하려 고개를 돌린 나를 내리훑은 성재현이 피식거렸다.
“옷 입고 있을 때는 단정하더니.”
팔을 길게 뻗은 그가 넥타이핀으로 내 가슴을 건드렸다. 유두에 금속이 아슬아슬하게 스치자 긴장으로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젖꼭지가 생각보다 커서 야하네요. 색도 짙은 분홍색인 게, 애라도 밴 건 아닐 테고.”
“아….”
“입에 넣고 빨기 좋겠어요. 아니면… 누가 이미 잔뜩 빨아줘서 이런 몸인 건가.”
한기에 바짝 일어선 유두를 쿡 찌르며 성재현이 웃었다. 상스럽고 저열한 평가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넥타이핀을 쥐고 손끝으로 배 아래까지 쭉 더듬어 내렸다. 미모사처럼 움츠리고 싶은 몸을 억지로 폈다.
“생각했던 대로 예쁜 몸이네요. 피부도 희고 부드러워서 멍들면 그거대로 어울릴 거 같고, 살집이 좀만 더 붙으면 좋겠지만.”
“흐, 읏.”
“게다가 자지 주변에 털이 거의 없어서, 색이 잘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어.”
배꼽 아래를 건드리던 손가락이 내려와 성기를 한 손에 쥐고 문질렀다. 생리적인 자극에 허벅지가 약하게 떨렸다. 길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귀두 위쪽을 잡고 손가락으로 비빈다. 입 안 볼살을 깨물고 신음을 억눌렀다. 검사나 다를 바가 없던 손길은 허벅지 안쪽으로 미끈하게 내려왔다.
“씻고 왔어요? 피부가 촉촉하네.”
“…샤워하고 왔습, 니다.”
“그럼 뒤도?”
눈 밑 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시간도 여기서 쓰고 싶지 않았던지라 집에서 구석구석 씻고 왔다. 내 대답에 성재현이 빙그레 웃었다. 일부러 완벽하게 준비해서 온 나를 그는 퍽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진도가 너무 빠른데요. 강진하 씨 속도 맞추려면 내가 너무 급해지겠는데.”
“…어차피 할 거라면, 빨리하시는 게 나으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달린 서랍이 열린다.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낸 성재현이 내 손에 무언가를 건네줬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에 흰색 고체. 좌약이었다.
손에 들린 약을 보며 나는 덤덤하게 사실을 고했다.
“관장이라면 이미 하고 왔습니다.”
“또 하세요.”
“…….”
“두 번 한다고 죽진 않잖아요. 오히려 더 깨끗해져서 박을 맛이 나겠지.”
몸을 살짝 든 성재현이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손바닥에 든 좌약을 힘껏 쥐었다. 청결한 걸 좋아하니 맞춰줘야겠지. 가까운 욕실로 향하던 나를 그가 단단한 손으로 붙잡았다.
“여기서 넣어요. 내 앞에서 엉덩이 벌리고.”
“네? 하지만….”
“그리고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십 분 동안 참는 겁니다.”
성재현이 턱을 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설득하려던 말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거부 의사는 듣지 않겠다는 성재현의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잠시 망설였다. 치욕스러운 기분에 질끈 깨문 입 안이 욱신거린다. 못 하겠다는 반발 어린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나는 무기력했다. 무릎을 꿇고 엉거주춤 선 나는 바닥에 턱을 대고 개처럼 엎드렸다.
“나한테 잘 보이게 더 벌려요.”
엄한 어투로 그가 말했다. 둔부를 한 손으로 잡고 힘껏 벌렸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예민한 속살을 스쳤다. 성재현이 뒤에서 이 과정을 죄다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목덜미까지 열이 올랐다.
반대 손에 쥐고 있던 좌약을 더듬더듬 구멍에 끼운 다음 천천히 밀어 넣었다. 집에서 하고 온 다음이라 살짝 부푼 입구에 약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 밀려 나와 툭, 떨어지는 바람에 손만 조급해졌다.
“으윽.”
최대한 엉덩이에 힘을 빼며 구멍을 완화시킨 다음 약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물기가 아직 축축한 내벽으로 알약이 박혔다.
“하, 아.”
석연찮은 이물감에 몸서리를 쳤다. 손가락보다도 짧고 가는데도 배 속을 헤집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움찔, 허벅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점막에 약이 스며들면서 금세 아랫배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엉덩이 들썩거리는 것도 볼만은 하지만.”
“…….”
“고개를 들어야, 강진하 씨 얼굴이 나한테 잘 보이지.”
의자 바퀴가 차르륵 굴러 내 등 뒤에 멈췄다. 성재현은 내 팔을 붙잡아 억지로 돌려 앉혔다. 무릎을 꿇자 배 속이 부글거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찰그랑, 벨트에 달린 이음새가 흔들거린다. 둥글게 매듭을 지은 성재현이 내 머리에 벨트를 씌우고 목에다 채웠다. 기긱, 하고 알맞게 조인 벨트는 답답하진 않지만 성재현이 조금이라도 잡아당기면 언제든 내 목을 죌 만큼 폭이 좁았다.
시간을 보려 해도 책상 위에 있는 시계를 올려다볼 높이가 되지 않았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한 배가 아릿했다. 이마와 귀 옆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새근덕, 더운 숨이 잇새에서 새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성재현은 나를 만지지도, 엎드리게 하고 성기를 처박지도 않았다. 그는 책상에 올려둔 책을 들고 읽고 있었다. 추태에 몸부림치는 나와 다르게 그는 경건하기까지 했다.
왼손으로 의자 모서리를 잡고 헐떡거렸다. 숨소리를 참느라 팔등으로 입을 막았다. 목덜미에 흘러내리던 진땀은 어느덧 겨드랑이와 가슴, 배에도 맺혀있었다. 숨이 가빠진다. 어느 틈에 나는 그의 바짓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 얼마나… 시간, 흐윽….”
“오 분도 안 지났습니다.”
냉정한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성재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몸짓이 더더욱 급해졌다. 맺힌 눈물이 울컥 터졌다. 눈물길을 타고 뺨으로 내려온 물기가 턱에 고인 땀과 섞여 성재현의 옷자락에 똑, 똑 떨어졌다.
“제발.”이란 간청이 울대에서 일렁거린다. 부푼 아랫배가 터질 듯하고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입술을 깨물고 눈꺼풀을 가늘게 치떴다.
“왜 이렇게 정신 사납게 떨어댈까. 읽는 거 방해되게.”
“흐… 으읏.”
책을 내려둔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온한 손가락 끝이 민감하게 열 오른 피부를 미끈하게 쓸어내린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성재현이 흠, 하고 탐탁잖은 숨소리를 뱉었다.
“강진하 씨.”
“전, 무님… 더는 못 버티겠, 습니다.”
“뭘 못 버티겠는데요.”
“화장실에….”
“화장실? 왜요?”
“흐윽, 화장실에, 보, 볼일 보고 싶….”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성재현이 손가락을 내 입술에 문지르더니 그대로 벌리고 치열을 훑었다. “더 간절히 부탁해야죠.”라는 말에 바르작거리며 무릎을 떨었다. 입 속으로 밀려든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가늠한다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입력된 행동 같았다. 나는 그의 손등과 손바닥까지 계속 입을 맞췄다. 수치스럽게 카펫을 적시고 싶진 않았다.
“버릇없고, 참을성도 모자라고.”
“아윽.”
“십 분을 참으랬는데 겨우 절반 참고는 발정 난 개처럼 굴고. 진하 씨가 이렇게 음탕한 암캐인 줄 몰랐는데.”
무릎에 발을 올린 그가 꾹 누른다. 신발을 신은 발끝이 내 가랑이 사이를 문지르며 살짝 일어선 성기를 짓눌렀다.
“으윽, 흐, 흡….”
흐느끼는 소리가 입 속에서 뭉개졌다. 암캐란 단어에 눈앞이 흐려진다. 내가 해갈하고자 하는 건 단지 배변 욕구일 뿐인데도 성재현은 내가 야살스럽고 음란하다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의 손바닥에 눌린 입술이 떨린다. 이 이상 어떻게 더 부탁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에 채운 벨트를 잡아당긴 성재현이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온화하게 말했다.
“그래도… 우는 얼굴은 상당히 볼만하네요.”
“아, 아….”
“갔다 와요. 오늘은 이쯤에서 봐줄 테니까.”
뒷말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허둥지둥 몸을 이끌고 기었다. 화장실은 서재 바로 옆이었지만 만 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가까스로 화장실에 당도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한참 동안 웅크렸다. 나오는 것도 없어 소변이라도 보는 듯 쪼르륵, 소리만 났다. 샤워기를 틀었다. 더운물인지 찬물인지 분간도 못 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물을 맞고 또 맞았다.
더러운 존재가 된 것처럼 수치스럽다.
쏴아, 물이 쏟아지는 샤워부스 너머에 성재현이 벽에 기대서 있었다. 빙긋 웃고 있는데도 싸늘하고 차갑다. 아래턱이 달달 떨린다. “다 했어요?”라고 묻는 말에 나는 젖은 눈꺼풀을 깜빡였다.
“내가, 씻으라고는 안 했는데.”
“그, 너무….”
목에 맨 벨트를 잡아당긴 그가 내 말을 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절뚝거리는 그의 걸음을 따라 나는 위태롭게 기었다. 물줄기가 타일 바닥을 적신다. 나뭇결이 살아있는 마룻바닥에도 점점이 남았다.
의자에 끽, 다시 걸터앉은 성재현이 내 귓불을 꼬집었다.
“저번에, 했던 것보다는 잘할 수 있겠죠.”
“윽…!”
대답도 전에 고개가 그의 다리 사이에 처박혔다. 바지 사이는 이미 불룩하게 솟아있었다.
섬유유연제 향기가 풍기는 다리 사이에서 나는 곤혹스러운 나머지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 일로 입술 양옆이 아직 따끔거렸다. 무자비하게 박혔던 목구멍도 아직 부어있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상처 때문에 한동안은 마스크를 끼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이자 성재현이 머리카락을 감은 손가락을 살살 휘저었다.
“시간 끌면, 강진하 씨만 손해일 텐데요.”
“…….”
“손 안 댈 테니까, 어디 한번 솜씨 좀 보죠.”
이로 바지춤을 잡아 끌어내렸다. 팽팽하게 솟은 속옷까지 끌어 내리자 이미 한 번 목격했던 성기가 전과 같은 위용을 과시했다. 다 발기한 것도 아닌데 이미 충분히 평균 이상이었다. 체온으로 달아오른 살냄새가 난다. 혀를 내민 나는 귀두 윗부분을 슬쩍 핥았다.
할짝거리며 느리게 표면을 핥다가 홈을 따라 갈라진 선을 세밀하게 간질였다. 성재현은 말한 것처럼 내가 하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당장은 입에다 바로 쑤셔 넣진 않을 모양인지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두피를 이리저리 훑을 뿐이었다.
서둘러 그의 욕구에 맞추고 끝내는 게 나로서도 편하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입을 벌린 나는 선단을 약하게 깨물었다. 살덩어리가 입 속에서 말캉거리며 입천장과 혓바닥 사이를 메웠다. 귀두 포피를 정성스럽게 빨다가 아래로 내려와 입을 맞추고 고인 침을 펴 바르듯 날름거리며 핥았다. 입에 성기를 넣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길게 흡입하자 성재현이 머리카락을 잡은 손끝을 약하게 떨었다.
“후우.”
나른한 숨이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내린다. 이대로만 계속 유지한다면 괜찮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성기를 반쯤 입에 집어넣고 홀쭉하게 좁혀 빨았다. 뜨거운 사탕을 빤다는 자기암시를 하면서 뿌리까지 내려와 지근거렸고 음낭에도 입을 맞췄다.
“흐움, 음, 춥.”
일부러 살을 빠는 소리를 크게 냈다. 시각과 청각만큼 사람에게 효과적인 자극은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성재현이 목구멍까지 단번에 처박을 걸 대비하며 긴장을 놓지 않았다.
침에 젖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성기가 서서히 흉포하게 커졌다. 뿌리부터 줄기를 뻗듯이 혈관이 도드라졌고 탁한 붉은빛이 도는 기둥은 빵빵하게 부풀었다.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온갖 유려한 수식이 어울리는 성재현의 얼굴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 사나움이었다.
슬슬 더 몰아붙이면 끝날 듯했다. 불뚝거리며 입속을 노닐던 성기가 꿈틀거린다. 그 순간 성재현이 벨트를 탁, 하고 고삐처럼 잡아당겼다.
“흐윽.”
저절로 고개가 뒤로 빠지면서 입에 물고 있던 성기가 멀어졌다. 삼키지 못한 침과 체액이 섞여 입가에 고였다. 성재현은 내게 몸을 당겨 온화하게 말했다.
“하아, 확실히 잘 빠네요. 목구멍에다 싸버리고 싶을 정도였어.”
싱긋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일부러 사정을 참은 모양이었다. 달갑지 않은 칭찬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사정도 안 했는데 벌써 끝인가. 이다음을 예측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이리로 와서 서요.”
성재현은 내 팔을 잡고 일어서게 했다. 의자에 앉아있는데도 눈높이 편차가 심하지 않았다. 내 몸을 손으로 살살 훑던 성재현이 유두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간지러운 감각에 무릎을 살짝 오므렸다.
“만져봐요. 스스로.”
잠시 숨을 고르던 나는 손을 들어 왼쪽 유두를 쥐었다. 말랑말랑한 살이 손가락 사이에서 뾰족하게 섰다. 유두를 이렇게 만지는 건 처음이었다. 간질간질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찌르르 울리는 미동이 살을 타고 단전과 허벅지 사이까지 기어 내려가는 듯했다.
“아, 하으.”
유두를 쥐고 나는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온기가 여기서부터 서서히 퍼지는 듯했다. 유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마다 긴장돼서 몸을 지탱하고 선 종아리까지 바싹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어떻게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약한 전기가 뾰족하게 돌출된 곳에 자꾸 신경 사납게 건드는 듯했다.
부풀어 오른 유두를 꼬집는 손을 그가 걷듯이 잡고 치웠다.
“좋았나 보네요. 젖꼭지 만지는 게.”
“흐으….”
“단단하게 커졌네. 색도 더 짙어졌어요. 보이죠?”
성재현은 내 유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상세하게 말했다. 보이는 장면 그대로를 읊을 뿐인데도 나는 뺨이 달궈지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숙인 성재현이 내 가슴에 머리카락을 약하게 비빈다. 콧숨이 피부에 야트막하게 흩어졌다. 흐음, 하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오싹하게 떨렸고 내쉬면 유두 주변이 저리저리했다.
모양 좋은 코끝이 가슴팍을 쿡 누른다. 약한 자극에도 벌레에 쏘인 듯 간질간질 아렸다. 멍하니 있었다면 그의 머리를 붙잡고 입술을 유두 가까이 가져다 댔을지도 모를 만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나는 팔로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벨트를 잡고 손끝으로 가죽을 더듬던 성재현이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진하 씨가 올라타서 하세요.”
예상보다는 싱거운 요구였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마치 내가 이 관계를 조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자세였다. 그러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 성재현은 이제 막 오른발에 했던 통깁스를 풀고 반깁스로 교체한 상태였다. 무거운 석고 붕대를 풀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거동이 불편할 터였다. 그러니 나더러 올라오라고 하는 것이 그의 입장에서도 편한 건 당연했다.
그러나 내가 주춤거린 이유는 일말의 수치심이나 거부감 때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의 허벅지 사이, 사타구니에 묵직하고 단단한 크기의 성기가 이미 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름도 두께도, 길이도 전부 범상치 않았다. 저걸 그대로 몸 안에 집어넣었다가는 삽입도 전에 피를 볼 터였다. 챙겨온 콘돔을 꺼내려 패딩에 손을 뻗는 내게 성재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뭘 찾는 겁니까.”
“콘돔이, 필요할 거 같아서.”
그 말에 성재현이 피식 웃었다. 웃음에 내포된 조롱을 깨달았다. 싫은 티는 다 낸 주제에 관장에 콘돔까지 준비해 온 나를 천박하다 비웃는 것이다. 나라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엉성하게 하다가 시간만 지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필요 없어요.”
성재현이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감흥 없이 말했다.
“강진하 씨한테 성병 기록 없는 거 확인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임신이라도 할까 봐요?”
“네?”
나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남자라는 걸 성재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벗은 몸을 보고도 착각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부러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인가 싶었지만, 성재현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말로 내 임신을 고민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돈으로 사람을 산 자의 악질적인 희롱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침묵을 외면하며 나는 콘돔 포장지를 뜯었다. 성기에 씌우자 윤활제가 손에 번들거리며 묻었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둔부 사이를 더듬거렸다. 물기 때문에 입구 주변이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윤활제로 미끈거리는 손가락을 밀어 넣자 겨우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나는 구멍에 손가락을 천천히 뺐다, 넣길 반복했다. 침범하는 이물감에 무릎부터 배 아래까지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아.”
아무래도 윤활제로는 부족한 듯싶었다. 지속되는 자극에 살짝 일어난 성기를 내려다봤다. 정액이라도 펴 바르는 게 나을까. 자연스럽게 내 성기 쪽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성재현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홱, 하고 손이 벨트를 잡아당겼다.
“으윽!”
이전에 내 몸을 잡아당길 때와 전혀 다른 힘이었다. 내 행동을 통제하겠다는 그의 의사가 명백하게 들어간 악력이었다. 목을 꽉 죄며 달라붙는 가죽에 숨통이 막힌 나는 손으로 목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세게 당겼다면 그대로 질식했을지도 몰랐다.
“기다리기 싫으니 그쯤하고 올라오세요.”
잡아 쥔 벨트를 손톱으로 바득바득 긁으며 성재현이 채근했다. 불뚝 일어선 성기에 허벅지를 문지르며 그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의자에서 하면 아무래도 중심 잡기가 힘들다. 그러나 성재현은 자리를 옮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탱탱하게 부푼 귀두에 구멍을 맞췄다. 격통을 직감하며 나는 조금씩 몸을 내렸다. 미끄덩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성기를 붙잡고 조심조심 끼워 맞췄다. 땀이 이마를 타고 눈 옆으로 흘러내렸다. 반도 못 집어넣었는데 한계였다. 포만감을 넘어서서 격렬한 만복감에 숨이 가쁠 정도였다.
“흐읏.”
아프다.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나는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 와중에도 무게가 성재현한테 쏠리지 않도록 경추 받침대를 두 손으로 힘껏 붙잡고 있었다. 심호흡하며 아래에 힘을 풀었다. 성재현을 절정에 오르게만 하면 끝이었다. 굳이 깊숙이 넣고 교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구멍에 반쯤 집어넣은 성기를 오물오물 조이며 나는 앞뒤로 몸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끼익, 끼익. 스프링이 달린 탄력 좋은 가죽 의자가 움직인다. 바퀴가 구르며 카펫에 바퀴 자국이 남았다.
“하으, 응, 읏, 으흑.”
연신 신음하며 나는 땀으로 미온해지기 시작한 엉덩이를 흔들었다. 목에 달린 벨트 이음새가 종처럼 찰그랑거렸다. 조급한 내 몸놀림을 지켜보고만 있던 성재현이 양손으로 내 둔부를 꽉 잡아 쥐었다. 붕대를 감싼 왼손이 내 옆구리를 두드린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그가 몸을 위로 쿵 박아 올렸다.
“아윽!”
그의 성기가 쑤시고 들어오는 순간 느껴지는 격통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성재현은 떨고 있는 내 턱 아래에 이마를 대고 부드럽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나 좀 두고 보려고 했는데.”
“아, 아흑.”
“허리 흔드는 소질은 있네요.”
“아, 아아, 저, 전무, 님, 으, 흑.”
“그거 말고는 죄다 엉망이야.”
엉덩이를 꽉 쥔 손의 악력이 무자비했다. 손안에서 살이 짓눌려 터질 듯했다. 점점 밀려 들어오는 성기에 배가 요동쳤다. 장내가 꿈틀거리며 불온한 침입을 겁내고 있었다. 긴장으로 얼어붙어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성재현은 씩 웃으며 내 목 옆에 입술을 묻더니 크게 입을 벌려 살을 꽉 깨물었다.
“아악!”
반사적으로 느슨해진 구멍에 푹, 하고 성기가 다시 밀려들었다. 성재현은 세게 깨문 어깨 쪽을 혀로 날름거리며 핥았다. 얼얼한 부분에 혀의 오돌토돌한 살갗이 닿으니 쓰라렸다.
“계속 움직여.”
이를 드러내고 살을 쪽 빨아들인다. 구멍에 성기를 집어넣은 채 나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들썩거리는 내 몸짓에 의자가 쿵쿵 흔들린다. 빙그르르 도는 의자에 주변 시야가 자꾸 변했다. 서재 책장으로 향했다가 퇴창으로 움직였다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엉망이 된 턱을 성재현이 핥는다.
“으음.”
엉덩이를 힘껏 그러쥔 성재현이 안으로 쳐올리며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던 양감이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멍든 것처럼 알록달록하게 흐려진 시야에 퇴창에 놓인 화분이 보였다. 유난히 시든 화분 하나가 있었다. 샛노랗게 이파리가 변색해 죽어가는 풍경에 눈을 뒀다. 성재현은 사정의 여운을 느끼는지 내 몸에 이마를 지그시 대고 숨을 고르기 바빴다. 날갯죽지를 더듬던 손이 올라와 내 목덜미를 더듬었다. 찰캉, 벨트가 풀리자 갑갑했던 목 주변이 화해졌다.
나는 그게 끝났다는 신호라는 걸 인식했다.
의자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기 직전이었지만 어떻게든 힘을 주고 버텼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네요.”
성재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크리스털 조명등에 투과된 불빛이 그에게 내려앉는다. 빛마저도 나비처럼 달려들 듯한 고아(高雅)한 얼굴이었다.
옷을 추슬러 입고 구겨진 넥타이를 맸다. 덜 마른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헝클어졌다. 손으로 대충 빗어넘기며 나는 성재현에게 고했다.
“방으로 모셔다드리고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자고 가세요.”
그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지금 성재현이 나더러 뭐라고 한 거지. 자고 가라니.
몸을 일으킨 성재현이 절뚝이며 내 앞에 섰다. 목을 잡아 쥘 듯하던 두 손이 내 넥타이를 붙잡더니 엉성한 매듭을 고쳐 맸다. 자고 가라는 말처럼 여상스러운 손짓이었다. 성재현이 다시 한번 나한테 말했다.
“열 시 이후에 고용인들을 퇴실시키는 건 불미스러운 상황을 방지하려는 내부사항 때문입니다. 내가 허락했으니 상관없어요.”
“감사하지만 귀가하는 쪽이 더 편합니다.”
“어차피 아침에 다시 와야 하는데 굳이 고집 피우지 마요. 이 집에 잘 곳이라면 넘치게 있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출입 기록이 남습니다. 자칫하면 내부에서 괜한 말이 돌 겁니다.”
“내 집에서 괜한 말 따위가 돌게 둘 거 같아요?”
그의 입매가 싸늘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리는 없다는 걸 왜 모를까. 눈 밖에 났다가 어디다 호소도 못 하고 회생조차 불가능한 꼴을 보고 들은 게 몇 개던가. 그런데도 나는 이 저택에서 눈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두 눈에 깃든 암흑이 탁하게 나를 어지럽힌다. 부질없다는 듯 잔잔한 어둠에 내가 그대로 비쳐있었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성재현은 내 팔에 얌전히 몸을 기댔다. 무게가 실린 걸음이 평소보다 버거웠다.
**
따뜻한 히터 바람에 버스에서 까무룩 잠들었다가 내릴 곳을 놓칠 뻔했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여기저기를 손으로 주물렀다. 가뜩이나 요통으로 몸이 뻑적지근한데 잠까지 와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택 뒷문을 통해 들어서자 김상훈이 먼저 와있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김상훈은 퀭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그날 잘 들어갔어요?”
“네, 상훈 씨는요?”
“저는 토요일 오전에 늘어져 있다가 디너팀 출근했어요. 그리고 또 마셨지 뭐예요. 아우,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 나이 먹고 너무 과음하면 안 되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딱 내가 그 꼴이에요.”
금요일 밤에 술에 취한 그는 대리 기사가 모는 차에 실려 귀가했다. 그날 마신 술만 해도 와인 두 잔에 도수 센 칵테일 두 잔이었으니 어지간히 주량이 센 게 아니라면 충분히 취할 만도 했다. 그래놓고 토요일에 또 마셨다니. 술자리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은 한식이에요. 다행이에요. 전무님이 아침은 되도록 한식 선호하시거든요.”
“아직 속 불편하신가 봐요.”
“해장국 생각 간절해요. 역 근처 감자탕집에서 뼛국이라도 한 그릇 먹고 올 걸 그랬나.”
입맛을 쩝, 다신 그가 내 안색을 보더니 측은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근데 진하 씨도 되게 피곤해 보이네요. 주말에 바빴어요?”
“…개인적인 일이 좀 있었어요.”
“그래요? 얼굴이 떴는데, 괜찮겠어요?”
“저야 뭐, 조금 피곤한 정도예요.”
나는 대수롭잖다는 듯이 웃었다. 두 시간 정도 잤던가. 집에 겨우 들어가서 옷을 벗고 씻고, 드러누워서 끙끙 앓았다. 오랜만에 한 섹스의 여파는 길었다. 입술 양쪽이 다시 부었다. 뒤는 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었다. 피를 안 본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오전 내내 나는 긴장한 채로 근무에 임했다.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무엇보다도 성재현이 신경 쓰였다. 혹시라도 전날 밤에 대해 말을 꺼내진 않을지, 나를 상대로 난잡한 조롱이라도 하진 않을지 괜히 신경이 바짝 서 있었다. 그러나 성재현은 내가 방으로 들어서서 그를 깨우고, 업무 준비를 돕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제안을 꺼냈다는 걸 잊은 사람처럼 철저하게 할 일에만 집중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했다. 이러다 몸만 내어주고 그가 했던 제안은 무효가 되는 건 아닐까. 변호사 공증이라도 부탁해야 했나. 그런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성재현도 그런 제안을 꺼냈다는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20억씩이나 되는 돈을 하사해가면서 내게 관계를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아무 소득도 없는 일이었다.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계단을 오르는 게 불편한 그를 부축했고 물과 약, 커피 등을 날랐다. 컵을 치우다 말고 퇴창에 놓인 화분을 바라봤다. 시든 화분은 아예 이파리가 부스스 떨어져 있었다. 이따 성재현이 점심을 먹을 때쯤에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온실을 떠올렸다.
불온하고 어딘가 황량하던 녹색의 영역.
퇴창을 바라보던 나를, 성재현이 올려다본다. 모호하고 음험한 눈길은 나를 발가벗기는 것만 같다. 나체가 되어 그의 시선 앞에 끌어 내려지는 듯했다. 껍데기까지 들춰 내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아닙니다. 그럼 이따 호출하실 때 올라오겠습니다.”
나는 빈 컵을 들고 재빠르게 그의 서재를 나섰다. 지나가던 여자가 돌아볼 정도로 부산스럽고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
외근을 나갔다가 은행에 들러 통장을 확인했다. 못 보던 액수가 찍혀있었다. 면식도 없는 낯선 입금자명으로 들어온 돈은 무려 5억 원이었다. 은행 시스템 문제로 잘못 들어온 돈인 건가. 당황한 나는 머릿속으로 돈의 출처를 가늠하다 비로소 깨달았다. 성재현이 지난주에 내게 제안했었던 ‘화대’의 일부였다.
돈을 받고 보니 비로소 내가 몸을 팔아치웠다는 게 실감 났다. 사채업자 계좌로 일단 3억을 먼저 보냈다. 남은 2억은 다음 주에 보낼 생각이었다. 한 번에 보내면 돈이 있다고 여기고 괜히 독촉만 더 급해질지도 몰랐다. 백예에서 주급이 들어와 있었다. 그중 절반은 밀린 간병 비용을 내는 데 썼다. 창구를 나서며 통장을 열어보니 내가 쓸 돈은 기껏해야 몇십만 원 정도였다.
허탈감에 자조했다. 통장에 숫자가 사라지는 건 이렇게 쉬운데 감당해야 할 건 너무 많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돈이 아쉬운 게 아니었다. 어차피 나갈 돈이니 차라리 없는 셈 치는 게 나을 터였다.
꽃샘추위라더니 손이 시리다.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길에 보이는 테이크아웃 카페에서 캐모마일 티를 주문하고 히터 가까이에 앉아 몸을 녹였다.
엉덩이가 욱신거리던 게 그래도 이틀이 지나니 살 만해졌다. 성재현은 오전에 본사로 출근해서 일찍 자리를 비웠고 나는 늘 하던 대로 일에 집중했다. 서재로 걸려오는, 하지만 대부분 전달조차 되지 않을 전화를 받거나, 카펫을 새로 바꾸거나 장식물 자리를 변경하는 자질구레한 작업이었다. 일이 손쉽진 않지만 성재현 얼굴을 마주 보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딱히 그가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무딘 신경줄이라 해도 카펫에서 알몸으로 있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석 달간은 이런 상태겠지.
카페 진동벨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고물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황개새끼]라는 이름에 씨발, 하고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돈 보내자마자 득달같이 전화부터 하는구나. 핸드폰을 귀에 대니 낄낄거리는 웃음이 산만하게 퍼졌다.
“사장님. 먼저 전화해 놓고 왜 웃으세요.”
-아하하, 하하, 진하야, 이게 웬 돈이야? 엉? 어디서 돈이 나왔을까?
“갚는 돈이지 뭐겠어요. 황 사장님이 원금 일부 이번 달 말일까지 달라고 난리 치셨잖아요.”
-그랬지. 근데 이런 거금이 대체 어디서 툭 나왔나 궁금해서 그래. 우리 예쁜이 돈 없는 거 내 잘 아는데.
그래, 잘 알겠지. 매달 문자로 꼬박꼬박 이자 받아 가고 반년에 한 번은 얼굴 맞대고 지랄하던 놈인데 오죽할까.
황개새끼는 사상구에서 대부업체 사장으로 있는 자로, 본명은 황명수였다. 간판도 없고 화장실에 붙인 스티커에다 <빠른 대출, 즉시 입금> 같은 말로 주부나 노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이자로 돈을 빌려줬다. 그야말로 개새끼라 불릴 만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놈이었다.
“다는 아니더라도 절반은 갚을 수 있게 돼서 먼저 송금 드렸어요. 다음 주 중에 또 송금할게요.”
-어쭈, 우리 강진하 진짜 돈 좀 생겼나 본데. 어디서 났어? 응? 나도 알려줘 봐.
“채무 이행에 그런 사적인 일까지 알려드려야 한다는 조항은 없을 텐데요. 갚으면 그만이잖아요.”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더니 왜 이렇게 앙칼져. 예쁜아, 사는 게 팍팍해도 나한테는 살살거려야 하는 거라 그랬지.
황명수의 조롱을 듣고 있자니 캐모마일 티가 독극물처럼 쓰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보고 대화했으면 실수한 척 저 개새끼한테 찻물이라도 엎어 버렸을 텐데. 서울 강남구에서 부산 사상구까지는 너무 멀었고, 황명수한테 아버지 명의로 기록된 빚은 한참 남아 있었다. 설설 기면서 비위 맞추기까지는 못해도, 눈치는 봐야 했다.
“점심 드실 시간인데 돈 받으셔서 밥맛은 좋으시겠어요.”
-예쁜이가 내 말 잘 듣고 열심히 돈 갚으니 기특해.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 내가 말했잖아? 정 안 되면 그 예쁜 엉덩이로 이자 받겠다고.
캬악, 수화기 너머로 황명수가 가래를 뱉는 소리가 들렸다. 흥얼거리는 콧소리에 역겨움마저 들었다. 황명수는 내게 얼굴이 반반하니 몸부터 팔아보라면서 바지에 내 얼굴을 비비던 말종이었다. 그때가 스물셋, 내 생일날이었다. 어머니가 외삼촌 말만 철석같이 믿고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다 10억을 날려 먹었던 좆같은 날.
사무실에서 칼부림할 기세로 역정 내던 황명수한테 나는 아버지가 죽을까 봐 무서워 빌었다. 채무 기간을 조금만 늘려달라는 말에 어떻게 되었더라.
아, 모텔에 질질 끌려가서 황명수한테 여섯 시간 동안 대줬었지.
따지고 보니 처음 몸을 판 것도 아니었다. 황명수라는 전적이 있었던 걸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재현한테 몸을 내주고도 왜 이렇게 덤덤한가 했더니, 이미 넌더리가 나게 겪은 일이었다.
“여튼 갚을 테니까 병원 가서 지랄 좀 그만해요. 황 사장님 그렇게 지랄하다 신고당하면 저야 감사하겠지만.”
-우리 진하가 내 생각을 다 해주네? 이 오빠 걱정보다는 우리 진하 걱정이나 해야지. 내가 깜빵 가는 거보다 네 엄마랑 아빠 시신이 바다에 둥둥 떠오르는 게 더 빠를 텐데.
“…아픈 사람 볶아봤자 죽으면 무슨 소용이라고요.”
-그럼 우리 예쁜이 보러 갈까? 저번 달에 너 서울 올라갔다더라? 그 간병인 아주머니가 다 말해 주던데? 응? 나한테 말도 없이 서울은 무슨 일로 갔을까?
씨발 새끼. 손이 떨렸지만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끊을게요.”라고 말한 다음 대답도 안 듣고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다행히 전화는 또 걸려오지 않았다.
택시를 잡으러 가는 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어진 신호음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산만한 주변 소음이 울린다. 오늘은 간병인이 병원에 계시니 어머니는 작은 월세방에서 계시거나 일용직이라도 나갔어야 했다. 받자마자 “웅, 응.” 하고 혀가 꼬부라진 걸 숨기는 억양에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상환금은 제가 해결한다고 황명수한테 연락했어요. 그 인간이 어머니나 아버지 목 조른다고 병원 찾아가는 일 당분간 없을 거예요. 그리고 생활비 조금 보냈는데 더 드릴 순 없으니까 제발 아껴 쓰시고요.”
-흐흐, 진하야. 우리 아드을.
“…엄마. 혹시 또 술 드셨어요? 술 끊는다고 하셨잖아요.”
-아니야! 아니야, 정말 안 마셨어. 나 곽 사장님이 밥 사준대서 한 잔만 얻어먹은 거야. 나 일 알선해 준다는 곽 사장님이 받으라는데… 응, 마다하면 좀 그렇잖아.
“마다하세요. 엄마. 술 마시는 거 병이라고 했잖아요. 그거 엄마 약 아니고 독이라고요.”
-응, 응, 그래, 진하야, 진하야. 우리 아들 서울 갔지? 서울 삼성동 가서 고생도 많이 하고.
딸꾹거리는 소리가 징글징글하다. 어머니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진하야, 진하야, 하고 종알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같은 잔소리를 반복했다. 제발 술 좀 마시지 마라, 가는 길에 차 조심해라, 돈 아무 데나 쓰고 다니지 마라. 어머니는 그저 몽롱하게 웃을 뿐이었다. 멍청하게도 얼빠지고 다정한 웃음소리. 나는 그녀의 술주정을 가만히 숨죽이고 듣다가 끊었다.
그저 술에 취해 하는 말일 뿐이었다. 알고 있지만 나는 어머니가 내게 아주 가끔 보이는 상냥함을 도무지 뿌리칠 수 없었다.
수행 기사였던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고 외할머니는 휴일이 없다시피 했다. 필동 작은 주택에서 나는 어머니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렸던 나는 어머니한테 칭찬받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 했다. 담배 심부름, 소주 심부름, 콘돔 심부름. 기분이 좋을 때면 어머니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그러면 사랑받는 기분이 들곤 했다.
‘너는 네 누나를 죽이고 태어났어.’
술에 취한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저주하듯 말하곤 했다. 말을 튼 네 살배기 시절부터 항상 듣던 말이었다. 네 누나는 너 때문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아버지는 그런 적이 없노라 했지만 어머니는 술에 취하면 되지도 않는 그 이야기를 반복했다. 충혈된 두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네 누나가 등 뒤에서 눈 부릅뜨고 널 저주하고 있어. 알아? 누나 팔자를 네가 훔쳐 간 거야! 차라리 네가 아니라 그 애가 살았어야 했는데. 그 애가… 대신 살았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환자였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예전부터 그녀는 지독하게 술을 마셨다. 신세를 한탄하고 그러다 거울을 부수며 울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딘가 망가지고 병든 어머니를 참으로 우직하게 사랑했다. 그러니 맹독 같은 빚을 가져와 수렁에 처박아도 달아나지 않은 거겠지. 세상은 그걸 로맨티시스트라고 하지 않는다. 호구, 등신이라고 하는 거다.
나는 그런 호구, 등신과 술로 정신이 어긋난 사람들의 자식이고.
점심을 먹고 들어가야 하는데 입맛이 하나도 돌지 않는다. 결국 식사를 거른 나는 바로 보이는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서 피웠다. 머릿속이 허했다.
**
온실에서 수십 개도 더 되는 화초와 꽃나무를 확인하고 나오던 나는 파란색 포터 트럭 한 대를 발견했다.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트럭에는 [양지조경 820-1555]라고 쓰여있었다. 정원수(庭園樹)가 많은 저택이라 정기적으로 조경 관리 업체가 오는데 오늘이 그날인 듯했다.
트럭에는 남자 둘이 타고 있었다.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와 머리가 회색으로 센 나이 든 사내였다. 그중에서도 나이 든 사내는 유독 낯이 익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살폈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입가에 담배를 물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제야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혹시… 육필준 삼촌?”
트럭에서 소라처럼 돌돌 만 호스와 정원용 가위를 내리던 사내가 돌아본다. 주름진 눈이 화들짝 펴졌다. 장갑을 벗은 필준 삼촌이 허둥지둥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이, 이게 누구야? 진하냐? 진하 맞아? 준구네 아들내미? 맞지?”
“예, 삼촌 저 기억하세요?”
삼촌은 말도 못 잇고 탄성만 어이구, 어이구, 반복했다. 나 또한 반가운 마음만 앞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필준 삼촌은 세한에서 소유한 삼성동과 이태원동 외 다수의 저택 정원을 관리하는 업체 직원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나이가 엇비슷한 또래였는데, 아버지와 같은 강원도 군부대 출신이었단 이유만으로 선후배 하며 돈독하게 지냈다. 어린 나한테도 덥석 용돈을 쥐여주고 차 안에 넣어둔 초코파이를 나눠주곤 해 나는 그를 삼촌이라 불렀다. 혈연이라 할 수 있는 두 외삼촌보다도 내게는 더 삼촌 같은 분이었다.
“삼촌 그간 잘 지내셨어요? 허리 아프신 건요?”
“나야 건강해. 허리도 수술한 뒤로 많이 좋아졌지.”
“다행이네요. 그거 때문에 맨날 파스 붙이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인석, 네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냐. 대리운전한다고 들은 이후로는 통 소식을 못 들었는데.”
필준 삼촌이 허허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간의 사태를 어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 지금은 병원에 입원 중이세요. 몸이 좀 아프시거든요.”
길고 세세하게 설명하는 대신 토막토막 말을 자르고 흐렸다. 그러자 필준 삼촌은 쯧쯧 혀를 차며 눌러쓴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많이 안 좋은 거야? 그 대부업체 때문에 나한테 변호사 지인 있냐고 전화하고 그랬던 건 기억하는데… 병원이라니.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야?”
“네, 좀 그래요. 거동이 좀 힘드셔서 오래 입원하셔야 한다고.”
“아이구, 준구 이 친구도 참… 아니다, 진하 네가 더 속상할 텐데.”
필준 삼촌은 금세 사람 좋게 대화를 넘겼다. 옆에서 자로 치수를 재던 남자가 “사장님”이라 부르며 조경 범위를 의논했다. 내가 기억하던 필준 삼촌은 대형조경회사 관리차장이었는데, 아마 저 양지조경이 필준 삼촌이 차린 사무실인 듯했다.
“양지조경이 삼촌 회사예요?”
“응? 아, 맞아. 오 년 전에 따로 분리해서 나왔지.”
“회사 차리겠다고 호언장담하시더니 정말 이루셨네요.”
“네 아버지한테도 정 힘들면 내 회사에서 일해도 되니까 서울 다시 오라고는 했는데….”
필준 삼촌은 쩝, 하고 물고 있던 담배를 트럭에 비벼 껐다.
마약 운반 혐의로 기소당할 처지에 놓였던 아버지는 끈 떨어진 샌들이었다. 한때는 임원비서실 소속이란 이유만으로 연락하고 지내던 하청 업체 동료들조차 쉽게 외면했다. 그런 아버지를 유일하게 붙들어준 게 육필준 삼촌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요. 삼촌이 서울 사는 건 알아도 연락처 찾아서 인사드리긴 그랬는데.”
무거워지는 대화에 나는 일부러 발랄하게 말했다. 필준 삼촌이 껄껄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운이 좋았어. 원래는 유명한 업체가 맡았는데 작년 겨울엔가 갑자기 연락 오더라고. 내가 삼성동 전담으로 해주면 좋겠다고.”
“그래요?”
“나도 좀 놀라긴 했는데… 뭐, 좋게 보셨나 보다 하고 좋았어. 업체 열 군데 중에 우리가 채택된 게 좀 신기하긴 했지만.”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인 필준 삼촌이 뒤이어 말했다.
“근데 진하 너는 여기 왜 있냐?”
물어볼 만한 질문이 뒤늦게 나왔다. 나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저도 저택에서 일해요.”
“일? 무슨 일? 경비업체랑 호텔리어들 드나드는 건 안다만.”
“성재현 전무님 어시스트로 들어왔어요.”
그 말에 모자를 고쳐 쓰던 필준 삼촌이 손을 내렸다. 내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 그러냐? 전무님 비서 같은 건가?”
“네… 뭐, 굳이 치면요.”
필준 삼촌이 엉, 엉, 하면서 건성으로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른 그가 도구를 챙겨 들더니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이만 일하러 가봐야겠다며 내 팔을 아프지 않게 툭툭 치는 필준 삼촌에게 나는 물어볼 말이 떠올랐다.
“참, 혹시 저 온실은 양지조경에서 관리 안 했나요?”
“응? 온실?”
“네, 전무님 온실을… 관리하라고 지시받았는데 조경업체에서 여기는 해당 사항이 없나 해서요.”
별관 쪽 온실을 바라본 육필준은 음,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저기를 관리하라고 했다고, 저기를, 하며 중얼거리는 말끝이 잘 안 들린다. 까칠한 턱을 목장갑 낀 손으로 문지른 그가 말했다.
“전무님 취미로 두는 곳이라 우리는 안 건드려.”
“…그래요?”
“그렇지. 온실은 안 건드려. 우린 정원 전문이고… 뭐 아무튼! 계약에는 없던 거니까 내가 손대면 안 돼.”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삼촌에게 차마 “왜 안 되냐”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성재현이 취미 삼아 하는 일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면 지킬 수밖에 없겠지만, 왜 조경 업체에다 맡기지 않는 걸까.
원예에 취미를 들이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지만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
이태원동으로 간다던 일정을 취소한 성재현이 곧장 집으로 왔다. 구두 겉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코트는 현관과 가장 가까운 드레스 룸에 걸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는 식사는 아래층에서 먹겠다고 말했다. 정영호가 간단하게 영어로 설명하니 니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걸을 만한지, 성재현은 정영호가 부축하는 걸 거절했다. 약간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한쪽 정장 바지를 일부러 넓게 수선해야 했던 때와 다르게 발을 보지 않으면 다친 줄도 모를 정도였다.
“정 비서는 이제 퇴근하세요.”
“아직 시간이….”
“남은 부분은 강진하 씨가 마저 인계할 거니까, 퇴근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정영호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괜찮겠냐는 의중이 담긴 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영호가 계속 있는 게 편하긴 하지만 새벽부터 나가야 했던 정영호 역시 피곤하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지하 서재에 들어선 그는 윗옷만 갈아입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일일이 시중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벗은 옷을 정돈하고 나가야 했다. 그게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온 목적이었고 저택에 고용된 이유였다.
“돈은 확인해 봤어요?”
머리를 손으로 흩트리며 성재현이 물었다. 그가 얼마 전 송금해준 5억에 대해 묻는 말이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액수에 불만은 없죠?”
“없습니다.”
불만이 있어도 없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순순하게 대답하니 성재현이 픽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얼굴에선 싫은 티가 역력한데 입으로는 네, 네. 대답하는 게 깜찍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건방지다고 해야 할지.”
끼익,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댄 성재현이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섹스할 때도 좋으면서 싫다고 할지 궁금한데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짓누를 것처럼 바라본다. 설마 여기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방에 사람이 없다고 해도 밖에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들이 있었다. 일전에 그에게 주말은 피해서 관계를 맺고 싶다고 부탁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성재현이 그걸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다. 간절한 건 오히려 나였다.
턱을 손가락으로 살살 장난스럽게 쓸던 성재현이 빙긋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일까. 꼭 내가 지금 당장 덮칠 거 같다는 얼굴인데요.”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했는데. 강진하 씨 강간하는 생각.”
경박한 말을 느른하게 흘린다. 모순적인 어투였다.
“뒤에다 좆 넣고서 끙끙거리던 얼굴도 상상하고, 너무 오래 참아서 눈 아래가 발긋해진 것도 잠깐 떠올렸는데.”
“…….”
“좋네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황홀해져.”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혀끝으로 입술을 핥는다. 야릇한, 뱀의 미소였다. 말 하나하나가 며칠 전 일을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에 올라타 헐떡거리던 순간들. 귀 끝이 뜨겁고 목이 아프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도통 둘러댈 말이 없었다.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세 번 났다. 어색한 적막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성재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문을 향해 들어와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문밖에는 직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동식 트롤리를 끌고 들어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뒀다. 성재현이 피곤하다는 말에 주방에서 신경을 썼는지 대체로 부드럽고 넘기기 쉬운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직원은 바로 나가지 않고 옆에서 기다렸다. 아마도 식사를 시중들려는 모양이었다.
“강진하 씨.”
불안스레 서 있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성재현이 삐죽 튀어나온 내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뭐 하시는 거냐는 물음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달고 있던 넥타이핀을 빼서 내 넥타이에 매달았다. 작은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넥타이핀은 낯익은 모양새였다. 톡톡, 손으로 테두리를 건드린 성재현이 말했다.
“갖고 있어요.”
“…하자가 있는 물건입니까.”
“아니요, 말 그대로 맡겨두는 거예요. 이번 주 금요일에 직접 돌려주면 되고요.”
그 말에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성재현은 “무슨 말인지 알겠죠?”라고 뒤이어 말을 매듭짓고 잔을 들었다. 정신없이 서재를 빠져나와 위층 계단 앞에서 벽을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벽에 등을 대고 서서 넥타이를 고쳐 맸다. 몇천 원짜리 싸구려 넥타이에 어울리지 않게 붙은 넥타이핀이 기괴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넥타이핀을 잡아 빼서 손에 쥐었다.
금요일 밤. 도망치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시였다.
**
봄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저녁부터 내린 비 때문에 저택은 금세 쌀쌀해졌다. 가동을 꺼뒀던 난방을 전부 돌리고 시계를 보니 곧 10시였다.
밤 10시가 되면 저택에는 가정부와 출입구에 있는 경비 초소 야간 근무자만 남았다. 주방으로 가보니 직원 한 명이 있었다. 가방을 정리하던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네. 전무님 일이 아직 좀 남아서요.”
“저런, 힘드시겠다.”
안쓰러워하는 눈빛에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자는 의심하는 눈치도 없이 내게 카드키를 내밀었다. “이따 경비 초소에다 맡기고 가시면 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사람이 주방 출입문을 잠그고 나가는 게 원칙이었다. 묶었던 머리를 푼 그녀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맞다, 아까 김 셰프님이 진하 씨보고 라커 확인해 보라고 전해 주셨어요.”
“라커요?”
“뭐 넣어뒀다는 거 같던데 확인해 보세요. 그럼 저 먼저 퇴근할게요. 고생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고생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화답했다. 여자는 우산을 들고 어둑어둑한 정원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확인한 뒤에야 나는 발을 돌렸다. 김상훈이 나한테 뭘 주고 간 거지. 소지품을 넣는 개인 라커를 열었다. 갈아신을 운동화와 여분의 볼펜만 들어있어야 하는 곳에 보온 통이 들어있었다.
보온 통을 열어보니 게살과 달걀이 듬뿍 들어간 수프가 들어있었다. 저녁도 안 먹는 내가 걱정된다며 김상훈은 퇴근하기 전까지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해산물 알레르기가 없냐고 묻던 게 이거 때문이었나. 고소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은 입을 댈 수 없었다. 뚜껑을 조심스레 닫은 나는 가지런히 제자리에 뒀다.
생수병과 약을 챙긴 다음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가는 넥타이핀이 손에 잡혔다.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제작된 장신구는 적절하게 화려하면서도 지나치게 섬세했다. 나한테는 사치품이었지만 누군가한테는 소모품에 불과할 물건을 내려다봤다. 뎅, 괘종시계가 정각에 맞춰 울렸다.
바야흐로 금요일 밤이었다.
주방에서 본관 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빗방울이 톡톡 유리창에 얼룩졌다. 굵직한 비는 아닌지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얀 레이스 커튼 때문에 빗방울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했다.
서재로 내려간 나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두 번 노크한 다음 천천히 문을 열자 틈새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재현은 의자에 가만히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칩복 중에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반드시 외출 일정이 있던 그는 오늘 종일 저택에만 있었다.
깊이 잠든 듯해 나는 소리 내지 않고 물병과 약, 그리고 넥타이핀을 테이블에 올려뒀다. 침실로 부축을 해야 하는 걸까.
가만히 그를 관찰하듯 바라봤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코와 입술이 약하게 미동하고, 어깨와 가슴팍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뚜렷하지만 섬세한 이목구비. 무방비하지만 차가웠다.
어릴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정교한 명화를 보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그림 속 인물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숨을 쉬진 않는다. 사람을 그림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건데, 성재현은 꼭 그런 느낌이 든다. 취미로 관리한다는 그의 온실처럼.
“관음하는 취미라도 있나 보군요.”
갑작스레 들린 그의 목소리에 두 눈을 슴벅였다. 어느 틈에 성재현이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깊이 잠든 게 아니었나. 가슴이 섬뜩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생수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많이 피곤하신 거 같아서, 깨우지 못했습니다.”
“잠깐 눈만 감고 있었는데.”
물로 입술을 축인 성재현이 뒤이어 말했다.
“나가지도 않고 계속 쳐다보길래 기다렸죠. 언제 나한테 말을 걸까, 하고.”
말인즉 내가 서재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깨어있었다는 소리였다. 내 시선을 즐겼다는 듯이 싱글거리는 얼굴에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말대로 모른 척 방을 나섰더라면 좋았을까. 성재현은 물병을 탁자에 내려두더니 내게 오른손을 뻗었다.
“잡아줘요.”
팔을 붙잡고 그를 힘껏 당겼다. 눌린 뒷머리를 살짝 손으로 만진 성재현이 한 걸음씩 움직인다. 어디로 가시는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 성재현이 힐끔 내 쪽을 돌아봤다.
“서재보다는 침대가 낫겠죠?”
목적이 생략되어 있지만 의미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걸음을 따라 옮겼다.
침실에 들어선 그가 조명을 켰다. 어둡게 가라앉은 방 안이 환해졌다. 오전에 들러 정돈했던 그대로였다. 그는 침대에 앉거나 눕지 않고 2인용 소파에 앉더니 바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소파에서 하려는 건가. 이럴 거면 왜 침실로 온 거지. 서재에도 소파가 있는데. 속은 복잡했지만 시키는 대로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간격을 넓게 벌려, 상석과 먼 곳에 앉으니 성재현이 피식 웃었다.
무릎에 둔 손으로 정장 바지를 움켜쥐었다. 할 거라면 빨리했으면 좋겠다. 초조한 나와 다르게 성재현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나는 손가락으로 정장 윗옷을 매만지다 겉옷만 먼저 벗었다. 그런데도 성재현은 내게 옷을 마저 벗으라든지, 뭔가를 요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톡, 톡 움직이는 소리가 숨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린다. 긴 손가락으로 내 턱을 붙잡은 성재현이 요리조리 살폈다.
“여기, 상처가 아직도 안 나았네요.”
“읏.”
검지로 입꼬리를 누르자 따끔했다. 눈꺼풀이 살짝 떨렸지만 비명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도자기나 보석에 난 잔 흠집을 어루만지는 듯 손가락으로 입술 옆 상처를 문지르던 성재현이 탁자 서랍을 열더니 도자기 병을 꺼냈다. 항아리 모양으로 된 병 안에 든 건 꿀이었다. 손가락에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꿀을 듬뿍 뜬 성재현이 내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뭘 하려는지 깨달은 나는 물러서듯 등을 뒤로 뺐다. 손가락에서 흐른 꿀이 톡, 하고 소파 가죽에 한 방울 맺혔다.
“상처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일주일 내내 나 보란 듯이 달고 다니던데.”
“그건, 잘 안 나아서 그랬던 겁니다.”
“그럼 얼른 낫게 해줘야죠.”
어깨를 붙잡는 손힘이 강하다. “내 탓이잖아요.”라며 싱긋 웃는 얼굴이 우아하면서도 고집스러웠다. 별수 없이 몸에 힘을 빼자 성재현은 끈적끈적하게 젖은 검지로 내 입술 아래를 툭, 하고 건드렸다. 입술을 지분거리며 문지르는 손가락이 유난히도 나긋나긋하다. 손가락으로 입 언저리를 만지던 그가 내 입술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으… 흐읍.”
입술에 달라붙은 꿀이 숨을 삼킬 때마다 스며들었다. 지독한 단맛이 입 안으로 밀려든다. 그는 내게 몸을 기울이고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꿀이 입 안 상처에도 도움이 된다던데.”
“흐, 웁.”
“입 속도 한 번 만져줘야겠네요.”
입천장을 살살 훑다가 혀를 꾹 누른다. 검지와 중지 두 개가 나란히 내 입을 점령하고 사정없이 휘저었다. 입속 상처를 건드릴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살짝 떨렸다. 성재현은 손가락 마디가 축축하게 젖고도 모자라 손등까지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내 입 속을 유영했다. 침과 꿀이 뒤섞여 한데 질컥거리는 소리가 목을 타고 귓속으로 파고든다. 눈 밑이 뜨거워졌다.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어 허공을 올려다봤다.
손가락의 온기 때문인지 유독 혀와 입 안이 뜨겁다. 코로 숨을 내쉬자 열 옮은 숨이 새근거리며 흩어진다. 침이 고였다. 이대로는 입술 새로 흐를 듯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손가락을 문 채로 삼키자 그가 눈을 가늘게 접고 웃는다.
“잘 삼키네.”
성재현이 혀를 휘감던 손가락 두 개를 빼내자 가득 찼던 입속이 텅 비면서 싸늘한 숨이 밀려들었다. 검지와 중지를 가만히 맞붙였다가 떼길 반복하던 그가 흠, 하고 숨소리를 냈다.
“좆에다가 꿀을 뿌린 다음 빨라고 시킬 걸 그랬나.”
“…….”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나는 애써 침묵했다. 입을 가지런히 다물고서 혀끝으로 입술에 묻은 꿀을 정돈했다. 달고 따끔하고, 알알하다. 혀로 입술을 핥던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성재현이 내 아랫입술을 톡 건드렸다.
“지금 강진하 씨 얼굴 보기 좋네요. 얼굴이 하얘서 그런가. 흥분하면 뺨이랑 입술이 유난히 붉어지고.”
“…….”
“유혹하는 것 같은 색이잖아요.”
얼굴이 흰 편인 나는 열이 나면 얼굴부터 금세 티가 났다. 겨울에는 더 심했다. 발그레한 홍조가 두드러져 남들이 보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얼마나 붉은색으로 얼룩덜룩할지 알 것 같았다. 반응 없이 숨만 차분하게 내쉬었다. 성재현은 손가락으로 내 입술과 목, 울대를 장난스럽게 간질였다.
가끔은 그가 손바닥을 펼쳐 목을 조르진 않을까 싶어 눈으로 손을 좇았다. 저번에 내 목에 벨트를 채우고 장난처럼 휙휙 잡아당기던 순간이 짤막하게 떠올랐다. 벌써부터 목에 힘이 들어갔다.
목덜미를 살금살금 더듬어 만지던 성재현이 목 끝까지 여민 단추를 쥐었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이 입술을 타고 흩어졌다. 성재현은 내 셔츠에 달린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바스락거리며 겉감이 두꺼운 겨울용 와이셔츠 가운데가 서서히 벌어졌다. 가슴골을 더듬던 그의 손이 내 유두를 가볍게 건드렸다. 느리고 섬세한 손길에 조급해졌다. 이대로는 영영 끝나지 않을 듯했다.
주저하던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무님, 옷은 제가… 벗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유두를 집게손가락으로 꽉 잡아 비튼 성재현이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자극이 파동처럼 퍼졌다. 경련하는 허벅지 사이에 힘을 단단히 주고 나는 입속에 어지럽게 퍼진 말을 골랐다.
“아직 왼손도 불편하시니까.”
“난 지금 즐거운데. 선물 포장 푸는 거 같아서.”
“전무님… 시간을 길게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목 끝이 간질거려 말끝이 가칠해졌다. 그러자 성재현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눈에 한기가 맺혀 새카맣게 흐려지는 게 두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말실수를 한 건가. 버릇처럼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성재현은 나를 꽉 붙잡고는 바지 벨트를 풀었다.
“분명 저번에 내가 말했을 텐데.”
찰그랑거리는 금속음이 귓가에 가까워졌다. 목에 가죽끈이 단단히 채워졌다.
“나랑 섹스할 때는 강진하 씨 의사는 없다고요.”
“으윽!”
“그런데도 쓸데없는 짓을 왜 자꾸 하려고 들까.”
답답할 정도로 목을 꽉 조인 벨트에 바동거렸다. 성재현은 나를 마주 보고 내 목에 채운 가죽을 잡아당겼다. 냉엄한 얼굴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흐윽, 헉, 윽.”
목에 맨 가죽 벨트는 숨을 쉴 수 있을 만큼만 느슨해졌다가 다시 죄어들길 반복했다. 호흡을 통제당하는 동안 등과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눈앞이 점점 흐려지고 땀에 젖은 속눈썹이 망막에 그늘을 새겼다. 눈과 귀조차 막힌 듯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켜켜이 어둠이 쌓여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성재현은 내 목을 꽉 잡고서 귀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진하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흔든다. 진하야, 진하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기억이 혼란스럽게 엉켰다.
‘다음에 만나면 안 보내줄 거야.’
검게 흐무러진 동공이 싸늘하다. 입술이 다섯 번 벙긋거린다. 뭐라고 말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눈물로 흐려진 두 눈만 슴벅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힘껏 말아 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가죽이 빠져나온다. 콜록, 콜록. 나는 소파에 몸을 묻고 두 손으로 목을 더듬더듬 붙잡았다. 이음새에서 벨트를 급히 잡아빼느라 손톱이 찢어졌으나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하, 아, 하윽.”
질식이 준 두려움에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성재현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헤아릴 틈이 없었다. 그저 숨을 쉬는 일에만 매달렸다.
“착하기도 해라.”
몸을 일으켜 준 성재현이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달래는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도 다정했다. 턱을 잡고 눈을 마주한 그가 빙긋 웃는다. 방금까지 내 목을 조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상하고 담백한 얼굴이었다.
“아직은 울릴 생각이 없었는데.”
“흐윽, 흡.”
“그만 울어요.”
뺨을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성재현이 입술로 핥았다. 눈꺼풀로 올라온 입술이 내 눈을 핥는다. 혀가 눈 아래를 살살 문지르고 눈물로 축축해진 속눈썹을 헤집었다. 참다못한 나는 그를 억지로 밀어냈다.
미친 새끼. 욕을 입속으로 뇌까리며 나는 성재현을 노려봤다. 감추지 못한 분노가 두 눈에 고스란히 드러났을 텐데도 성재현은 트집 잡지 않았다.
**
주말, 삼성역 코엑스는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았다.
대형 서점에 들른 나는 취미 코너에서 책을 몇 권 집었다. 『쉽게 배우는 가드닝』, 『원예 식물 도감』. 몇 권만 집어도 묵직해질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다.
온실 관리를 무턱대고 할 수는 없으니 독학으로 공부할 생각이었다. 필준 삼촌이 간단한 것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다며 연락처를 주긴 했지만, 회사 일로 바쁜 사람을 붙잡고 귀찮게 굴고 싶진 않았다.
목에 난 상처 부위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도 만지작거린 탓에 붙였던 반창고 접착면이 떨어져 달랑거렸다. 살짝 긁힌 정도라 피가 멎은 지 오래였지만 상처를 볼 때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느린 비디오를 재생하는 것처럼 떠올랐다.
그날, 성재현은 내게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소파에 누워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는 찬장으로 가서 술잔과 병을 꺼내 들었다.
“강진하 씨도 한 잔 들어요.”라며 그는 태연하게 술을 권했다. 술은커녕 아무것도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억지로라도 마시게 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성재현은 피식 웃기만 할 뿐,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잔 하나에 술이 가득 차서 넘쳤다. 테이블에 흥건하게 넘친 술에서 나무껍질 냄새가 났다.
술을 마시는 동안 성재현은 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그의 눈이 내 얼굴과 목, 벌어진 옷깃 사이를 살살 내리훑었다.
그야말로 전신을 헤집는 시선이었다.
코냑을 스트레이트로 석 잔을 마신 그는 더운 숨을 길게 내쉬며 피식 웃었다. “도망 안 가네요.”라고 중얼거린다. 마치 내가 도망가리라 예상했다는 듯한 어투였다. 깔깔하고 쓰라린 목으로 침묵을 삼키며 성재현을 지그시 노려보기만 했다. 오디오에서 교향곡이 멈추지 않는다. 빛과 소리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어도 주변은 암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가 도망이라도 쳐야 했습니까.’
그 말에 성재현이 내게 눈을 돌렸다. 분노도, 환희도 소거된 눈은 무채색 그 자체였다. 입꼬리가 불안정하게 올라갔다. 미소라고도 할 수 없는 뒤틀린 웃음.
‘달아날 곳이 없으면.’
‘…….’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목소리가 서서히 숨에 잠겼다. 그를 십여 분도 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공포, 그리고 나 또한 그의 목을 누르고 싶다는 섬뜩한 적개심. 나는 잠들어 축 늘어진 그를 침대로 옮겨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성재현은 눈을 감고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고 침실 불을 껐다.
그 뒤로 어떻게 저택을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운행 종료를 알리는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새벽 찬 공기에 손은 차갑고 입김이 하얗게 나와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성재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섹스를 강요할 줄 알았다. 그래도 나는 거절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데 건드리지도 않고 끝까지 날 지켜보기만 했다. 차라리 힘으로 날 눌렀다면 포기하고 순응했을 터였다. 돈을 생각하면서 참고 넘겼을 텐데 성재현이 나를 내버려 두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남창처럼 돈 받아먹고도 허리를 안 흔드는 게 성에 안 차는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건방지기 짝이 없게도 나는 돈을 받고도 빌빌 기지 않는 개였다.
복잡하던 머릿속은 서서히 차분해졌다. 들끓던 거부감마저 희미해지자 서서히 순간순간이 전신을 기어오르듯이 뇌리에 되감겼다. 멍하니 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 살을 따라 문질렀다. 멍든 부분이 따끔하면서도 간지러웠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귓가를 달싹이던 성재현의 목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감각을 모조리 삼키는 뜨겁고 낮은 음색.
‘달아날 곳이 없으면,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좁은 책장 사이를 지나치던 남자가 나를 확 치고 갔다. “아, 씨발, 뭐 하는 거야?” 휘청거리며 책장에 부딪힌 나를 향해 남자가 대놓고 욕을 내뱉었다. 평소 같으면 눈을 찌푸렸을 텐데도 나는 멍청하게 책장에 몸을 기댔다.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그래, 맞는 말이다. 나는 월요일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택에 가서 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돌아가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내 것도 아니고, 내 자리도 아닌 곳인데.
툭, 어깨를 붙잡는 손이 나를 돌려세웠다.
“너… 전화는 왜 안 받아.”
돌아보자 가쁘게 숨을 고르는 남승혁이 서 있었다. 뛰어왔는지 귀밑머리가 촉촉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이었다. 진동으로 해 놔서 미처 못 느낀 듯했다.
“전화한 줄 몰라서 못 받았어.”
“난 또, 너 화난 줄 알았어.”
“늦는다고 미리 말했는데 내가 화를 왜 내.”
남승혁에게 차가 너무 밀려서 늦어진다는 문자를 받은 게 30분 전이었다. 지각한 게 영 미안했는지 남승혁은 헉헉거리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처진 눈썹 때문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오늘따라 처량 맞아 보였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남승혁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려줬다.
“뛰어왔으니까 됐어. 느긋하게 걸어왔으면 몰라도.”
“안 그래도 주차장에 차 대자마자 뛰었어. 강진하 잔소리 더 안 들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실실 웃는 얼굴에 나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승혁은 여전히 나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저버리지 못했다. 문자를 무시해도 매일 사무적으로 안부를 묻는 통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나였다. 이대로 벽을 치고 무시하는 나 또한 남승혁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실책을 남승혁이 사죄할 이유는 없으니까. 3주 만에 남승혁에게 연락했고 주말에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엉키고 굴곡진 내게 흐트러지지 않은 사람은 남승혁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오랜 친구였던 그를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나저나 책 사려고?”
“서점 온 김에 겸사겸사.”
매대 줄에 선 나를 따라 옆자리에 선 남승혁이 내 품에 든 책을 보고는 글자를 읽었다.
“원예 도감?”
“일할 때 필요해서, 몇 권 사려고.”
책 표지가 보이지 않게 뒤집으며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남승혁한테는 어디서 일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계약직으로 회사를 다닌다는 두루뭉술한 정보만 언급했을 뿐이었다. 남승혁도 우리 집이 예전에는 세한그룹 밑에서 일했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남승혁은 어릴 때부터 고등검찰 검사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국회의원이나 기업가들이 여는 개업식이나 연말 파티에도 참석하곤 했었다. 두 다리만 건너도 성재현과 일면식이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 굳이 말해서 복잡해지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계산 대기 줄이 조금씩 줄어든다. 한 걸음 움직이려는 찰나에 미지근한 손가락이 슬그머니 목덜미 중간에 닿았다.
“진하, 너 목 뒤에 상처.”
상처라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 손바닥으로 목을 가리며 뒤를 돌아보자 남승혁이 놀란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아팠어?”
“아니… 안 아파.”
“어디 긁힌 거 같은데.”
“자다가 간지러워서 긁었는데… 손톱에 긁혔나 봐. 미안.”
예민하게 군 게 무안해 말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남승혁은 씩 웃으며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계산대 비었다.” 삑, 바코드를 찍는 동안에도 나는 연신 목 주변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괜히 신경 쓰였다. 결국 가방에 넣어둔 목도리를 꺼내 목에 칭칭 감았다. 갑갑했지만 티가 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술은 이번에 자기가 사겠다면서 남승혁이 데려간 곳은 청담동에 있는 재즈 펍(PUB)이었다. 간판은 펍이라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붙어있지만 규모는 아기자기한 펍보다는 클럽에 가까웠다. 신축 건물 2층을 전부 다 쓰는 재즈 펍은 막 개업했는지 입구부터 화환이 쭉 늘어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훈기와 함께 피아노로 연주하는 재즈가 울려 퍼졌다. 주차장에 있는 차만 해도 대부분 쿠페 이상이다 싶더니, 안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직장인이나 부유한 아티스트들이 많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턱수염을 기르고 긴 머리를 묶은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남승혁을 끌어안았다. 승혁은 자연스럽게 그와 포옹을 하더니 반갑게 대답했다.
“장현 선배님, 개업 축하드립니다.”
“짜식, 안 그래도 너 언제 오냐고 내가 애들한테 계속 물어봤는데 말이야. 이번 달 내로 안 오면 내가 블랙리스트에 확 넣을 생각이었지. 그런데 옆에는 누구야? 친구?”
“네, 중학교 때부터 친구예요.”
장현 선배라는 남자한테 나는 적당히 묵례만 했다. 그러자 장현이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씁, 하고 입맛을 다셨다.
“혹시… 연예인은 아니죠? 지망생?”
“아니에요.”
“선배, 얘는 그냥 회사원이에요.”
남승혁이 날 대변해서 간단하게 일축했다. 장현이 남승혁의 팔을 아프지 않게 치며 넉살을 떨었다.
“난 또, 보이시한 여자친구라도 데려온 줄 알았는데 남자네.”
“저 여자친구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왜 안 사귀냐고! 너 소개시켜 달라는 애들이 줄을 섰다니까? 안 그래도 오늘 놀러 온 애들 중에도 친한 여자애들 있는데, 너 배우는 관심 없냐?”
그러자 남승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배… 저 술 마시러 온 손님이에요. 자리 좀 내주시고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아이고, 너 반가워서 깜빡했다. 미안해요. 승혁이 친구분. 편한 자리에 앉아요.”
장현이 나와 남승혁을 서둘러 안내했다. 1층은 테이블과 1인석 스탠딩으로 나뉜 플로어, 복층으로 나뉜 2층은 프라이빗 룸이 몇 칸 있는데 전부 예약전용이었다. 입구에서 좀 떨어진 테이블에 앉자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독일에서 양조방식을 그대로 따왔다는 수제 맥주부터 한 병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양주까지 있었다. 남승혁은 하우스 와인, 나는 병맥주를 시켰다.
“선배라고 부르던데, 대학교 선배?”
“응, 학번 차이는 나지만. 장현 선배가 휴학을 좀 많이 해서 나랑 학기를 비슷하게 졸업했거든.”
우장현이란 남자는 남승혁과 여덟 살 정도 차이가 나는 선배로, 어머니가 교대에 있는 유명 로펌 대표 변호사였다. 법대를 나오긴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가게를 열게 되었다는 짤막한 사연이 있었다. 대로변에서 멀찍한 곳이라 해도 청담동에서 건물을 지어 가게를 열 정도면 어지간히 돈이 많은 집이란 소리였다.
하긴 인테리어를 보니 돈을 바른 느낌이 물씬 난다. 손님도 계급이 이미 정해진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데에 ‘친한 후배’로 오는 남승혁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겠지. 알고는 있는 사실이지만 입맛이 썼다. 가끔은 남승혁이 나와 친하게 지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기분, 안 좋아?”
남승혁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묻는다.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까 선배가 너무 반가워서 좀, 경황없이 군 거야. 장현 선배가 좀 앞뒤 안 보고 하고 싶은 말부터 하는 편이거든.”
“그런 거 같긴 했어.”
건과일을 입으로 넣으며 나는 다른 말로 주제를 돌렸다.
“저 선배가 여자 소개시켜 준다는데, 관심 없어?”
“딱히.”
“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남승혁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연수원 수업 챙기기도 바쁜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나랑 만날 시간에 만나면 되지.”
“진하 너는 몇 년 만에 보는 거잖아. 그것도 이제 보지 말자면서 나랑 이 년은 아예 연락도 안 했잖아.”
“…….”
“그리고 친구 만나는 건 연애랑 다른 건데. 친구는… 친구니까, 만날 때 편하지.”
뺨에 보조개가 패며 웃는 얼굴이 밝고 건강하다. 깊이 숨을 들이쉰 나는 맥주병을 그의 잔에 가볍게 갖다 댔다.
“그래, 우정 좋네.”
술을 마시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개 옛날이야기였다. 중, 고등학교를 쭉 같이 다녔기에 남승혁과 나 사이에는 추억거리라고 할 만한 게 많았다. 수학여행, 수련회, 첫 시험 등등.
“그나저나 승혁아, 아버지는 잘 지내시냐?”
한 바퀴 돌고 온 우장현이 우리 테이블에 다가와 말을 붙였다. 남승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늘 그렇듯 건강하시죠.”
“다행이네. 참, 네 아버지 이번 지방 선거 때 공천받으실 거 같단 말 많던데.”
“말이야 많은데, 뭐 모르는 거죠. 공천받아도 떨어지면 그만인 거고요.”
설렁설렁 대답하는 어투에서 아버지에 대한 싸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남승혁은 아버지와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금도 법대에 진학하고 연수원에 들어간 것 자체가 아버지의 강권 때문이었으니 오죽할까. 나는 건포도를 입에 밀어 넣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사람이 두어 명 버티고 있었다. 귀에 낀 인이어나 갖춰 입은 행색으로 봐서는 일반 회사원이 아니라 경호원 같았다. 그 앞에는 웬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는지 뭐라고 벙긋거리기 바빴다. 싸운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항의하는 분위기였다.
“저기,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예요?”
우장현에게 눈으로 반대편을 가리키자 그는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 기자 새끼 또 왔네.”
“기자라고요?”
“언론사니까 기자라고 하긴 해야 하는데 찌라시 팔아먹는 놈. 그 왜 기사 안 쓰고 정보만 팔아먹는 그런 데. 이 근방에 연예 기획사도 많고 예약제 술집도 많다 보니 자주 출몰해. 근데 오늘은 여기 와서 저 지랄이네.”
“그게 파파라치잖아요. 그럼 쫓아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남승혁이 거들 듯이 말하자 우장현이 손을 휘휘 흔들었다.
“사장 입장에서 쫓아냈다가 무슨 난리가 나려고. 거기다 쟤 뒤 봐주는 사람 있다는 말도 있어서 엮이면 피곤해질 거 같은데.”
“파파라치가 무슨 배후씩이나 있어요?”
“요즘 세상에 정보가 돈이잖냐. 그나마 촬영이나 녹음은 업장에서 안 된다고 못 박았더니 카메라 넣어두긴 하더라. 안 지키면 바로 신고하려고.”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우장현이 크게 한숨을 내쉰다. 퉁퉁하게 볼살이 늘어진 남자는 자꾸 내려오는 안경을 고쳐 올렸다. 기자가 여기 있다는 건 그럴 만한 상대가 있다는 뜻인데. 맥주로 입을 축인 내가 위층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 층에 누가 있어요?”
“그게… 오수안이라고 요즘 잘 나가는 배우 있어. 최근에 드라마 주연도 하나 하고.”
말이 어딘가 엉성하다. 잘 나가는 배우가 술 마시러 온 게 대수인가. 속닥거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층이 시끌벅적해졌다. 문을 박차고 나온 젊은 여자는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여자는 뒤를 흘겨보더니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구두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웠다.
아래층에 조용히 앉아있던 빼빼 마른 남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잔뜩 화가 난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남자한테 던지더니 쏜살같이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곧 유리창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였다. 여자를 태운 차인 듯했다.
그러자 기자가 다급하게 여자를 쫓아나갔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사람들은 힐끔 쳐다봤지만 금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관심을 접었다.
“드디어 갔네. 저놈 이번에는 오수안 특종 잡으려고 저 지랄인가보다. 거머리도 아니고.”
우장현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하려는 듯 자리를 떴다. 그러나 오수안이란 배우가 떠나고도 경호원들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펍에서 자체 고용한 인력은 아닌 거 같았다.
매시간 경호가 붙을 정도로 대단한 거물이든 말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패딩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어, 다녀와.”
남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밍도 좋게 그의 핸드폰이 지잉, 울린다. 나는 전화를 받는 그를 뒤로한 채 가게 밖으로 나와 주차장 구석에 섰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불씨가 빠르게 타들어 갔다. 깊숙이 연기를 빨아 마신 다음 후, 불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자갈이 우르르 흩어진다. 차 주인인가 싶어 옆으로 비켜서려던 내 옆에 누군가가 바짝 섰다.
“불.”
명령하는듯한 어투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술 먹고 정신이 나간 놈인가.
“불 좀 빌려줘.”
낮은 목소리는 다소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절로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입에 머금었던 연기를 채 내뱉지 못했다.
경호원을 매시간 붙이는 거물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피했어야 하는 걸까.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석영그룹 부회장의 막내아들, 권재림.
“아니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가로챈 권재림이 입술에 담배를 끼웠다. 휘어지는 눈매가 사납게 번뜩였다.
“이러면 되겠네. 그치?”
내가 피우던 담배를 쭉 빨아들인 권재림이 씁, 하고 입소리를 냈다.
“형이 피우던 거라 그런가. 이 담배가 내 것보다 맛있네.”
주머니에서 꺼내 든 담배를 흔들며 웃는 얼굴이 느른하다. 동굴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듯한 음색에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그럼 하나 적선한 셈 치죠.”
손을 털고 지나치려던 나를 권재림이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손 놔요.”
“놓으면 갈 거잖아.”
“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자 그의 동공이 짙어진다.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손목을 돌려 빼냈다. 권재림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다 태운 담배를 자갈밭에다 휙 던졌다. 꺼지지 않은 불씨가 벌겋게 회색 사이에서 타들어 간다.
“나 안 반가워, 형?”
안 반갑냐는 물음에 나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일진이 사나워도 이렇게 사나울 수가 있나. 서울 한복판이 그렇게 좁지만도 않은데, 나한테는 너무 좁았나 보다. 대답 없는 나를 바라보던 권재림이 뒤이어 말했다.
“나는 반가워서 미칠 거 같은데.”
운동화 아래 놓인 자갈이 발걸음에 밀려나 우르르 구르는 소리가 난다. 내가 뒤로 한 발자국 멀어지면 권재림은 두 발을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거든. 근데 아무리 봐도 확실하더라고. 내가 기억하는 강진하 얼굴 그대로.”
“죄송한데 전 그쪽이랑 관계도 없고 할 말도 없어요.”
숨을 고르느라 말이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석영그룹 부회장 집안은 나와 일절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세한그룹 차녀이자 석영그룹 명예 고문인 성미령의 막내아들 권재림은 알 수밖에 없었다. 권재림은 삼성동 저택에 자주 들렀던 귀빈(貴賓)이었으며, 성재현과는 외사촌지간이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리고 귀중한 손님이 저택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걸 막아설 사람은 없었다. 지체 높은 어른들이 응접실에 모여있는 동안 나는 눈치껏 권재림과 어울렸다. 당시 비서실장은 내가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했었고 그래서 말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것도 벌써 10년은 훨씬 더 된 이야기였다. 권재림이 나를 알아보고 이러는 게 이상할 정도로 오래전 일이다. 권재림은 두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관계가 없어?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렸어?”
“말 그대로, 관계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제 기억은 아주 멀쩡하고요.”
내 말에 권재림이 화가 난 얼굴로 붙잡은 팔목을 꽉 쥐어 비튼다. 힘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럼 관계 만들어주면 해결되겠네? 응? 키스라도 할래? 우리 이미 해봤잖아.”
당장이라도 입술을 물어뜯을 기세로 권재림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숨이 달라붙는 감촉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문득 오래전 일이 눈앞을 스쳤다.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안 된다고 밀어내는 나를 붙잡고, 권재림이 억지를 부리다 기어코 키스를 시도했던 날.
“모른 척하면 내가 착각이었나 보다, 하고 넘어갈 거 같아서 그래?”
“팔 좀.”
“내가 뭘 잘못해서 피하는 건데?”
“아프다고, 팔! 좀… 놔요.”
고통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권재림의 짙은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얼굴에는 싫은 티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내 말이 통했는지 손힘이 스르륵 풀렸다. 황급히 빼낸 팔목을 손으로 문지르자 시큰시큰했다.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머리를 부스스 손으로 흩트린 권재림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언제부터 한국에 있었던 거야? 미국에서 안 돌아온다고 했잖아.”
“미국…?”
“그래, 보스턴으로 유학 간다고. 그래서 내가 굳이 보스턴까지 갔었는데.”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얼굴은 진지했다. 보스턴으로 갔다는 말은 어디서 들은 거지. 유학 갈 형편이었으면 내가 이러고 살진 않았을 터였다.
“일단 다른 데서 마저 이야기해. 집에 가서….”
“할 이야기 없어요. 그리고 저 일행 있고요.”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뭐가 문제야? 성 여사가 형한테 뭐라고 했어? 그래서 강제로 유학 보냈대? 다시는 나랑 보지 말라느니 개수작 부렸어?”
“이렇게….”
“뭐?”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게 싫어.”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던 권재림이 비로소 입을 다문다. 손목을 문지르며 등 돌린 나는 가게로 돌아왔다. 중앙에서 피아노 재즈 라이브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우장현과 한창 대화 중이던 남승혁이 나를 보더니 빙긋 웃는다. 나는 의자에 걸어둔 패딩을 챙겼다.
“나 그만 가봐야 할 거 같아.”
“어? 갑자기?”
“좀 피곤해서. 새벽에 잠을 좀 못 잤거든. 넌 더 있다가 가. 나만 가면 되니까.”
“아니야. 나도 슬슬 가지 뭐.”
먼저 가려는 나를 만류한 남승혁은 곧바로 외투와 가방을 챙겼다. 먹은 만큼 계산하려던 나를 옆으로 밀어낸 남승혁이 모두 계산했다.
주차장에는 여전히 권재림이 서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가게 안을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털이 곤두선 들짐승처럼 사나워 보였다. 눈도 돌리지 않고 빠르게 걷는 나를 따라붙던 남승혁이 우뚝 멈췄다. “어.” 하고 말을 고르는 목소리가 곤란한 듯 가라앉았다.
“권재림…?”
손가락에 담배를 들고 차에 삐딱하게 기대있던 권재림이 나와 남승혁을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씩 올려 미소 지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가 했더니, 승혁이 형이네.”
“…그래, 반갑다.”
“얼마 만이지?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봤던 이후로 두 달만인가?”
“아마도.”
터벅터벅 걸어온 권재림이 남승혁 앞에 마주 보고 섰다. 키가 큰 편인 남승혁보다도 반 마디는 더 큰 권재림의 그림자가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먼저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어색하게 서 있는 내 쪽으로 권재림이 눈을 돌린다.
“일행 있다더니 그게 승혁이 형이었어? 말하지 그랬어. 동석하면 되는데.”
“둘이… 아는 사이야?”
놀란 듯 남승혁이 되묻는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 권재림이 해사하게 웃었다.
“알기만 하는 정도겠어? 나한테 진하 형이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 줬는데. 좀 각별했어.”
각별하다는 말에 깊이 악센트가 실렸다. 으스대는 듯한 눈빛이었다.
“먼저 가볼게. 다음에… 봐.”
패딩을 힘껏 여미며 나는 부리나케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택시가 보일 때까지 뛰었다. [빈차]라는 붉은 등이 켜진 택시를 붙잡아 타려는 순간 남승혁이 내 손을 잡았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없어. 둘이 대화 길어지기 전에 가려고 한 거야.”
“진하야.”
택시가 빵, 빵, 클랙슨을 크게 울렸다. 안 탈 거냐면서 택시 기사가 성난 표정으로 씨부렁거렸다. 내가 올라타자 남승혁도 내 옆자리에 탔다. 남승혁이 사는 곳은 서초동으로 나와는 정반대였다.
“나 집에 갈 거야. 넌 기사님 불러.”
“잘 들어가는지만 보고 갈 거야. 술 마셔서 도중에 잘못 갈까 봐 그래.”
“취하지도 않았고 알아서 갈 수 있어. 빨리 집에나 들어가.”
“자양2동 동사무소 앞이요.”라고 남승혁이 대신 우리 집 근처를 주소지로 불렀다. 미터기가 켜졌다. 더는 뭐라고 말할 기운도 없어 잠자코 머리를 오른손으로 짚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잡혔던 팔목이 시큰거렸다. 집에 가서 파스부터 붙여야겠네. 작게 한숨을 쉬는 내게 남승혁이 말을 붙였다.
“…괜찮아?”
“뭐가.”
“권재림 말이야. 갑자기 집에 간다고 하는 게, 그 때문인 거잖아.”
정곡을 찔렸지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대놓고 피했는데 이상하게 보는 건 당연했다. 품에 든 종이 가방을 손으로 구기며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재벌 집안이랑 엮어서 편할 게 뭐 있겠어.”
“그래서 피한다고?”
“부담스러워서 그래. 우리 아버지랑 외할머니 때문에 알게 된 사람인데 이제 와서 아는 척하는 것도 이상하고.”
“각별하다던 건 뭔데?”
“…어릴 때, 보모처럼 몇 번 챙겨준 적 있어서 그런 말을 했나 봐.”
“보모? 삼성동에서?”
“청문회는 여기서 그만하자.”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의사로 손을 들어 올렸다. 남승혁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피식 웃은 나는 목에 두른 목도리를 고쳐매며 말했다.
“그러는 승혁이 너는, 권재림이랑 어쩌다 알게 된 건데.”
“음, 몇 번 얼굴 봤었어. 아버지 때문에 이래저래 좀….”
남승혁이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알게 된 계기가 썩 좋은 일이 아니었을 거란 짐작이 갔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으니 검찰 쪽 일로 뭔가 접선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원치 않게 알게 된 모양이었다. 캐물을 만한 내용은 아닌 듯해 나는 입을 다물고 무릎에 둔 손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조용한 택시 안에서 똑딱거리는 시동 음과 작게 틀어둔 라디오 소리가 섞여 들렸다.
가로등과 신호등 불빛이 팔레트처럼 알록달록 섞인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권재림을 떠올렸다. 남들은 이름난 재벌가와 인맥이 있으면 좋지 않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저울질할 힘이 있을 때나 해당되는 말이다. 나에겐 그럴 여유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권재림을 피하려는 이유는, 성재현 때문이었다.
권재림이 내게 키스했던 그때, 성재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다급히 권재림을 밀쳐낸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없었던 일로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른 척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히 지나갈 줄로만 알았다.
달칵, 달칵, 와이퍼가 돌아가는 소리에 감은 눈 너머로 기억이 서서히 선명한 장면을 덧그려냈다. 나는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술기운으로 미지근해진 숨이 창문에 하얗게 서렸다.
**
1년 만에 방학을 맞아 귀국한 도련님을 위해 준비된 저녁식사는 별탈 없이 조용히 끝났다. 어차피 가족들만 모이는 소소한 식사라 삼남매 내외와 자식 한둘을 포함해도 열 사람 정도였다. 그럼에도 여느 연회 못지않은 만찬이었고 그만큼 뒷정리할 것은 평소보다도 두세 배였다.
남은 잔반과 그릇 정리로 정신없이 바쁜 부엌 가운데 나는 자청해서 일손을 돕고 있었다. 딱히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삼성동을 드나들면서 나도 모르게 어른들 따라 돕는 게 익숙해진 덕이었다. 함흥댁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들 사이에서 배척되지 않고 쉽게 끼어들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이쪽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그래봤자 무거운 짐 좀 나르고, 급한 심부름이나 대신 해주는 소일거리였다.
간만에 본가로 돌아온 도련님 이야기로 부엌은 화기애애했다. 원래도 어른스럽던 분이 외국물 먹으니 한층 성숙했느니, 유학이 이래서 좋은 거 같다느니.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바지런히 그릇을 정리하던 아주머니 한 분이 문득 생각난듯 나를 불렀다.
‘진하 학생, 아까 도련님이 찾던데 혹시 인사 안 드렸어?’
그 말에 쓰레기 봉투를 갈무리하던 손끝이 멈췄다. 내 반응에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엔 도련님이랑 자주 어울리고 그러더니, 이젠 어색해? 그래도 가기 전에 뵙고 가. 그러면서 눈도장도 찍고 그러는 거야. 이럴 때 잘 보여야지.’
‘그래, 박 집사님 말이 맞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맥 무시 못 한다. 그 왜, 경비하던 곽 씨 아저씨네도 저번에 부사장님 덕에 딸내미 독일 유학 갔다잖아. 십 년 동안 수고했다면서. 하기야 진하는 원래도 도련님한테 잘 보여서 괜찮나?’
서로 대화를 나누던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웃었다. 안부를 권한 그녀는 내게 오렌지와 청포도를 소담하게 담은 나무 쟁반을 내밀었다. 나는 마지못해 쟁반을 받아 들고 자리를 떠났다.
머릿속이 한껏 복잡하게 뒤숭숭하게 엉켰다가 풀리길 반복했다. 성재현을 만나는 게 1년 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창 철 모르던 아홉 살, 열 살 무렵처럼 선뜻 그를 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필 권재림한테 붙잡혔을 때 돌아온 성재현이랑 마주칠 줄 누가 알았을까. 사춘기가 되더니 권재림은 부쩍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빠르게 상황을 무마하고 몸을 피하긴 했지만 혹시나 다른 데서 괜한 말이 퍼질까봐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성미령이 나를 호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금지옥엽 막내아들이 거들떠도 보지않을 운전기사의 자식, 그것도 남자랑 키스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장에라도 나를 불러들여 저급하다며 호되게 야단을 치고도 남았다. 성미령은 나를 속물이나 천박한 것을 보는 것처럼 고까워했다. 권재림이 나를 두고 형, 형, 하고 따르는 것도 내가 꾀어낸 것이라며 화를 낼 정도였다. 아직까지 모르니까 여태 말이 없는 거겠지. 그래, 별 일 없을 거야. 해프닝이라 치고 단순하게 넘기자. 소란스럽게 굴수록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말고 조용히, 넘기자.
초조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길 반복했다. 머릿속은 한 장면에서 일시정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권재림, 키스. 방관하듯 목격하던 성재현의 무심한 얼굴. 하필 그런 순간에 맞닥트릴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그 순간의 성재현은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감흥없는 전시물을 지나치듯이 복도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별생각이 없었던 건지, 그도 아니면 미처 보지 못했던 건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나는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 인사만 간단하게 드린 다음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어디로 가셨을까. 나는 성재현이 갈만한 곳을 가늠했다. 그새 바깥으로 나가셨을까. 원래도 조용히 산책하는 걸 좋아하니 별관 쪽 정원일까. 아니면 2층 서재. 그러다 지하에 있는 보관실을 떠올렸다. 장식용 정물과 조각, 회화품 등 저택에 전시되지 않은 미술품이 보관되는 밀실은 성재현이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발길이 드물어 조용하니 예술품을 두고 바라보기 좋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다행히 감이 맞았는지 문이 열려있었다. 열쇠로만 열고 닫히는 방문이 열려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출입했다는 뜻이었다. 안에 들어서자 굳은 유채물감과 나무 바닥에 밴 왁스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어두운 곳에 보이는 것은 흰 천을 덮어둔 미술품뿐이었다. 도련님, 여기 계세요? 그 순간 누군가가 팔을 붙잡아 당겼다. 쿵, 중심을 잃고 쓰러진 몸 위를 에워싸듯 올라타는 인영을 확인한 순간 입이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다각다각, 굽이 편편한 구두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카펫을 두드렸다. 정 씨, 도련님 못 보셨어요? 부사장님이 찾으시는데, 방에는 안 계셔요. 여독 때문에 피곤해서 쉬시겠다고 하시던데요. 영화실 같은 곳에 있으신가봐요.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꽉 잡은 손 때문에 발버둥 한 번 치지 못하고 그대로 납작하게 눌려있었다.
인기척이 지나가고나서야 입을 막았던 손바닥이 풀렸다. 나는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았다 떠오른 사람처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그제야 성재현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안녕. 진하야.’
평범한, 보통의 인사말인데도 괜히 몸이 오싹했다. 나는 인사에 화답하는 대신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씩 웃은 그가 내 눈에 얼굴을 가까이 마주댔다.
‘돌아오자마자, 재밌는 걸 봤는데.’
곧고 긴 손가락이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손끝으로 말랑말랑한 살갗을 가만가만 짚다가 입술 안쪽을 꾹 눌렀다. 저절로 입이 헤 벌어졌다.
‘키스하니까 어땠어?’
좋았어?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음산하고 축축했다. 새카만 시선에 꽉 쥔 손끝이 벌벌 떨렸다. 방금 그를 찾아 지하를 내려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하던 변명같은 건 머릿속에서 증발된 뒤였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아무,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아니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창백하게 질린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싱긋 웃었다.
‘재림이가 들으면, 섭섭해하겠네.’
손목을 꽉 눌러 내 몸을 억제한 그가 내게 입술을 맞췄다. 밀어낼 틈도 없었다. 두 팔을 꽉 눌러 제압한 성재현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랫입술이 얼얼한 정도가 되어서야 성재현은 입술을 떼어냈다. 촉촉한 입술을 핥은 그가 생긋 웃었다.
‘방금 건, 내 첫 키스였어.’
‘하, 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변명 못 해.’
말이 끝나자마자 성재현이 내게 다시 입을 맞췄다. 머리가 하얗게 질리고 숨이 막혀 눈앞이 흐려질 즈음에 몸을 누르는 온기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내게 달라붙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집요한 그의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섰다. 전신에 전류가 튀는 것처럼 오싹오싹했다.
캔버스와 조각에 걸어뒀던 하얀 천이 사락, 하고 떨어졌다. 미명같은 어둠에 드러난 매끈한 여인 조각상이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각상 하나만이 아니었다. 박제된 거대한 독수리, 회화 속 인물들의 수백 개 눈이 내게 쏠려있는 것만 같았다. 저열하고 난잡한 구경거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성재현은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광경을 각인시키는 것처럼, 내 턱을 꽉 잡아 시선을 제 쪽으로 고정시켰다. 진하야. 나직이, 그러나 선명하게 나를 부른 그가 내 뺨에 입술을 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 첫 키스를 가져간 대가는 아주 많이 비싸.’
그러니까, 대가를 치를 때까지는 멀어질 생각은 하지 마.
“헉….”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두드려 맞은 것처럼 전신이 무거웠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낡고 너덜너덜한 벽지와 오래된 형광등, 장식용 옵션 텔레비전과 반쯤 남은 포카리스웨트 병이 눈에 들어왔다. 삑, 삑, 얇은 벽을 타고 옆방 핸드폰 알람 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흐릿한 몽롱함이 가시고 현실에 정신이 젖어들었다.
아, 꿈이었구나.
반지하 원룸 방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급하게 서울로 올라오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악몽을 꾸는 날이 잦았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런 꿈이라니. 벌써 10년도 된 기억을 꿈으로 되감자니 뒷맛이 나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성재현을 피하기 시작했다. 저택 쪽 어른들이 굳이 나를 찾는 일이 아니라면 일부러라도 내 발로 저택을 찾아간 적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성재현과 맞닥트릴 시간이 자연스럽게 줄었다는 점이었다. 유학생활 때문에 길어봤자 한 달정도 국내에 머물던 성재현과 내가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접점마저 흐려졌다. 어린 시절의 애틋함, 감사함, 선망, 동경. 그 모든 감정들마저 희미해질 무렵 얼마 안 가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쫒겨나면서 서울을 떠났었다. 그게 성재현과 내가 거쳐온 시간의 끝이었다.
왜 이제와서 그날 일이 생각났을까. 전날 권재림이랑 만난 것때문에 괜히 나도 모르게 불안해진 걸까. 그래봤자 아주 예전 일이었다. 들춰봤자 그저 어린 날이었노라며 웃어넘길 만큼 사소하고 흐릿한 기억의 일부였다. 무엇보다도 성재현이 이런 일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리가 있겠는가. 나조차도 기억 너머에 덮어뒀었는데 말이다.
얇은 이불과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웅크려 잤더니 등과 어깨가 뻐근했다. 남아있던 미지근한 포카리로 깔깔한 목을 축였다. 아직 하루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고단함이 몰려왔다.
오늘따라 뒤숭숭한 꿈을 꾼 탓인지 운수가 썩 좋지 않았다. 새벽 첫차를 놓칠까 뛰다가 넘어졌다.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오른 팔목이 싸했다. 기분 나쁜 통증이었다. 가져온 파스를 팔목에 임시방편으로 덕지덕지 붙였다. 몸에서 파스 냄새가 풀풀 나는 듯했다.
늘 보던 얼굴들이 먼저 와있었다. 락커에 가방을 넣어두고 인사하니 김상훈이 젖은 손을 털며 내게 다가왔다.
“진하 씨, 왜 내가 두고 간 보온 통 안 챙겼어요!”
“아… 맞다.”
토요일 새벽에 급하게 나오느라 김상훈이 나한테 줬던 보온 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날 챙겨간다는 게 깜빡했어요.”
“그거 냉동도 아니라서 되게 맛있었을 텐데.”
아쉽다는 듯 김상훈이 입술을 삐죽인다. 모처럼 챙겨준 호의를 무시한 꼴이었다. 나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연신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상훈 씨가 만들어 준 건데, 기분 나쁘게 해서.”
“토요일 아침에 확인해 보니까 그대로 두고 갔더라고요.”
“상했어요? 멀쩡하면 제가 먹을게요.”
“에이, 제가 그날 다 먹었죠!”
호쾌하게 웃는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김상훈은 넉살 좋게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툭 팔꿈치로 쳤다.
“미안하면 다음에 저 호텔에서 일할 때 놀러 와요.”
“일하는 곳에요?”
“네네, 세한호텔 종로점이요. 저 격주로 주말 근무해요. 다음 주에도 일하는데.”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장기섭이 김상훈을 잡아당긴다. 적당히 해, 등신아. 하고 속닥거리자 김상훈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는 장기섭을 밀어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맞으면 그럴게요.”
그러자 김상훈이 멋쩍게 헤헤 웃는다. 장기섭은 혀를 츳츳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재현은 이미 일어났는지 침실이 비어있었다. 새벽에 정영호가 들를 일이 있다고 하더니 아마 나를 대신해서 그를 챙긴 모양이었다. 지하 서재를 한 번 들여다봤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파스가 보이지 않게 소매를 최대한 내려 단추를 잠그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서재 문을 약하게 두드렸다.
서재에는 완벽하게 모든 걸 갖춘 성재현이 앉아있었다. 업무를 보는 건 아닌지 책을 펼쳐둔 얼굴은 고상하고 느긋했다. 지난주에 나와 있었던 일이 표백된 것처럼 고요한 반응이었다. 정작 동요하는 건 나였다. 지난주, 그리고 오늘 꾼 꿈.
닿지도 않은 입술이 문득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더는 있다간 표정마저 관리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가져온 커피를 책상에 놓아뒀다. 그리 무겁지도 않은데 손이 후들거린다. 쟁반을 옆구리에 끼운 나는 가습기와 난방 상태를 확인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화분도 내가 치운 걸 제외하면 생생하게 자라고 있었다.
“잠시만.”
나가려던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뒤돌아보자 성재현이 내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입속이 껄끄러울 만큼 버석거린다. 마른침을 삼키며 성재현에게 완전히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쪽으로 와보세요.”
성재현이 눈짓으로 책상 바로 옆을 가리켰다. 자못 심각한 반응에 불현듯 그날 밤 끝내지 못했던 섹스가 떠올랐다. 설마 여기서 마저 하자는 뜻으로 불러낸 건 아니겠지. 아직 낮인데. 일단은 시키는 대로 책상 옆에 섰다. 성재현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 오른 손목을 잡아챘다.
강한 아귀힘에 입술을 약하게 깨물자 눈을 가늘게 뜬 성재현이 내 옷 소매를 걷어 올렸다. 싸구려 파스가 덕지덕지 붙은 팔목이 드러났다. 성재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게, 무슨 꼴이죠?”
성재현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척 화가 난 얼굴이었다.
팔목을 그러쥔 손가락이 툭툭 살결을 건반처럼 두드린다. 유들유들한 미소도 없는 서늘한 눈빛은 불편한 심기를 정제 없이 내비쳤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나는 그의 물음에 해명했다.
“넘어져서 조금… 삐끗했습니다.”
“넘어져?”
“일하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성재현은 손바닥으로 내 손을 악수하듯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으윽.”
아파서 신음이 절로 나온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남의 팔목을 세게 잡는 거지.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성재현이 팔목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파스 접착제가 떨어져 드러난 안쪽에 직선으로 희미하게 멍이 들었고 팔목이 약간 부어있었다. 성재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내 팔목을 흔들어 보였다.
“지장 없는 정도가 아닌데요. 이 정도면.”
“파스 붙였고, 그렇게 아프진 않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도 성재현은 도통 수긍하지 않았다. 손을 붙잡은 채로 성재현은 핸드폰을 꺼냈다. 번호 몇 개를 누르더니 곧바로 통화를 시도했다. 뚜르르, 소리가 몇 초도 이어지지 않아 연결되었다.
“어제 정오에 예약했던 진료, 두 시간 앞당기죠. 음, 박 교수가 시간이 안 맞는다면 담당의 중 괜찮은 사람 대타로 보내도 괜찮다고 전하세요. 네, 상관없습니다. 차는 그럼 일원동으로 보내두세요.”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에 나는 멍하니 성재현을 바라봤다. 주말 동안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 건가. 그런 거라면 나한테 진즉 언질이라도 해줬어야 할 텐데 성재현은 내가 서재에 들어온 이후에도 별말이 없었다. 팔목에 든 멍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 것 말고는 안색도 멀쩡했다. 정영호한테도 특이사항을 전달받은 것도 없는데. 핸드폰을 닫는 그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무님. 어디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세한병원에서 한 시간 내로 도착한다고 하니 진료받아요.”
“진료라니, 저는….”
고작 팔목이 부은 정도로 진료는 과하다고 대답하려던 찰나에 성재현이 딱 잘라 말했다.
“금요일 밤부터 강진하 씨가 자꾸 내 기분에 거슬리는 짓을 하려고 드는데. 난 강진하 씨한테 이십억을 주는 대가로 섹스를 제안했어요. 고작 며칠 전에 협의했으니 잊진 않았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난 내가 쓰는 것에 남이 손대서, 흠집 나는 거 싫어해요.”
두 손을 맞잡고 턱을 걸친 성재현이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신체 권리까지 가진 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얄궂게도 내 몸뚱이가 받아쥔 20억은 그 이상의 의미였다. 장기를 전부 떼서 팔아도 20억을 못 갚는 마당인데. 더는 고집 피워 봤자 쓸데없는 일이란 걸 깨달은 나는 잠자코 순응했다.
성재현은 블라인드를 쳐둔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해 두자면, 당분간은 출퇴근 없이 여기서 지내도록 하세요.”
“저는 상직 근무자가 아닙니다.”
“방이라면 널리고 널렸는데 어디가 좋을까. 내 옆방?”
“전무님.”
“아니면 별관을 줄까요. 작긴 해도 쓸 만한 방은 거기도 많으니까.”
“제 퇴근 시간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생긴다면 제가 좀 더 늦게 퇴근하는 방향도 있습니다. 굳이 전무님 자택에서 머물 이유는….”
만년필을 집어 든 성재현이 딱, 하고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대화를 자르는 뭉툭한 소음이었다.
“내 수발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집 밖을 나돌아다니니까.”
“…….”
“매번 내가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게, 아주 불쾌하거든요.”
성재현은 단정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더니 셔츠를 똑, 똑 풀었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당황할 새도 없이 성재현은 옷을 걷어 상체를 보였다. 근육이 적절하게 잡힌 늑골 아래 옆구리 전체가 새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전무님 괜, 찮으십니까. 대체 어쩌다가….”
당황한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폈다. 자연스럽게 눈높이가 낮아진 나를 내려다보며 성재현이 음, 하고 숨소리를 골랐다.
“강진하 씨가 나가고서 자리를 옮기려다 발을 헛디뎠습니다. 욱신욱신해서 혹시나 하고 확인해 보니 멍이 들었더군요.”
“아….”
사고가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는 사뭇 명랑했다. 요약하자면 내가 토요일 새벽에 나가고서 생긴 사고란 뜻이었다. 설마 정영호도 몰랐던 걸까. 하지만 이 정도로 크게 다쳤다면 분명 알아차리고도 남았어야 할 텐데도 아무도 나한테 사고가 있었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그 말인즉 성재현이 미리 함구시켰거나, 여태 아무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주말에 일어난 사고가 나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거동이 불편한 그의 수발을 돕도록 고용된 입장에서 성재현이 또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건 나한테도 좋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길 바라며 술을 마신 그를 두고 나간 것도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전무님 컨디션을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덕분에 주말 내내 기분이 더럽긴 했죠.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서 별생각을 다 하기도 하고요.”
손으로 턱을 잡아 쥔 성재현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손길을 피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성재현의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강진하 씨 보자마자 이 입술이 가로로 찢어지든지 말든지, 입 안 가득 좆을 쑤셔버리려고 했지.”
“…….”
“아예 목구멍을 좆만 받는 구멍처럼 만들어 버릴까, 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단어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낮게 가라앉은 음색은 진심이었다. 형형하게 그을린 눈동자가 덫처럼 나를 휘감았다.
엄지손가락이 입속으로 밀려든다. 나는 턱에 힘을 풀고 숨을 참았다. 괜히 그의 바지를 의식했다. 정말로 좆을 꺼내 입에다 처박을까 봐 목에 힘이 들어갔다. 입꼬리를 실룩인 성재현이 내 목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목줄기를 문지를 때마다 어깨가 떨렸다. 숨이 턱, 막히던 감각에 목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손을 내린 성재현이 내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이틀 주죠. 내 말을 거절한다면 뭐 별수 없겠지만, 또 다치면 그때는 흐지부지 넘어가기 곤란해질 겁니다.”
“…….”
“내가 너무 쓸데없는 편의를 다 봐주고 있는 거 같거든요.”
날카로운 공박에 입술을 깨물었다. 들췄던 와이셔츠를 팔락 내려 정돈한 성재현이 빙그레 웃었다. 명도를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입술은 다 나았네요.”
“아….”
“내가 해준 치료가 잘 먹혔나 보네.”
넥타이에 매단 핀을 잡아 뺀 그가 내 뺨에 핀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을 따라 스르륵 내려간 넥타이핀이 내 넥타이 옆을 스쳤다. 찰칵, 하고 넥타이핀을 눌러 집게를 벌리는 소리가 났다. 선단으로 유두를 일부러 건드리는 느낌에 손끝을 오므렸다. 위아래로 벌린 집게가 살갗을 집어버릴까 온 신경이 그의 손을 좇았다. 온몸을 유랑하던 핀은 넥타이에도, 내 옷깃도 아닌 손바닥에 얌전히 놓였다.
“그럼 그날 저녁, 기대할게요.”
속살거리는 음성이 귀를 핥듯이 달라붙는다. 끈적끈적했다. “금요일 밤처럼 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성재현은 내 왼손을 둥글게 움켜쥐게 했다. 단단한 넥타이핀이 손바닥에 감겼다. 이질적인 차가움이었다.
**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노교수를 대신해 젊은 남자가 저택에 왕진했다. 세한서울병원에서 온 가정의학과 전문의라는 남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급하게 정장을 찾아다 입었는지 옷에서 탈취제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남자를 서재로 안내했다. 30분 정도 성재현을 진료하고 나온 남자는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강진하 씨 맞으시죠?”
“예?”
“저기, 전무님께서 치료받으시라고 하시던데, 팔목 말입니다.”
“이거 부러진 것도 아니고 살짝 삔 정도입니다.”
괜찮다며 마다하는 내게 남자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염좌는 아무리 가벼워도 반드시 처치를 받는 게 좋다는 둥, 설득이 길어졌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빈방에서 간단하게 치료를 받았다. 소염제 처방을 받았고 압박 붕대가 손까지 칭칭 감겼다. 시간 나면 물리 치료를 일주일 정도는 꾸준하게 받으라는 소견까지 받았다.
“그리고 다른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세요?”
“어, 네… 괜찮습니다.”
“목 주변이 따끔따끔하시다거나, 배가 아프거나, 출혈이 있을 정도로 심한 통증도 없으신 거고요?”
상당히 세세한 증상을 묻는 말은 유도 신문 같았다. 셋 다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자 남자는 임무를 완수한 사람처럼 안도했다.
“전무님은 어떠십니까. 제가 특별히 관리해야 한다거나, 신경 쓸 만한 부분은 없는가 해서요.”
“이번 주 수요일에 박 교수님께서 정밀하게 살피실 거예요. 크게 염려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의 몸에 난 타박상이 신경 쓰였지만 남자는 그 말 외에는 더하지 않았다. 나는 저택 현관 앞에서 대기 중이던 세단에 남자가 올라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오는 길에 팔목을 까딱 흔들어보니 아까보다 통증이 미미했다. 편의점에서 상비용으로 파는 파스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세한의료원 소속 병원에서도 내로라하는 의사가 왕진온 걸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떨떠름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틀 전 밤에 성재현은 내 목에 허리띠를 매고 숨통을 죄었다. 팔목을 삔 데 비교하자면 훨씬 더 강렬하고 두려운 고통이었다. 난폭한 섹스를 강요하면서 한편으로는 고작 팔목에 든 멍을 가지고 치료를 강권했다. 나로서는 성재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 말고도 이해하지 못할 포인트는 많았다. 옆구리에 멍이 들 정도로 심하게 넘어졌다면 비서실에, 하다못해 정영호한테 귀띔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상처를 나한테 드러내면서 미소 짓던 게 마음에 걸렸다. 꼭 나 때문에 다쳤다고 보여주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득 그가 술기운에 휘늘어져 중얼거린 말이 맴돌았다.
‘달아날 곳이 없으면,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달아날 곳이 어디 있다고. 도망칠 수 있었으면 진즉 외국으로 뜨고도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삼성동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입 안에 모래알이 깔끄럽게 굴러다니는 것처럼 뒷맛이 거북했다.
기한은 당장 내일모레였다. 짐이야 창원에서 들고 온 게 많지 않았고 원룸은 카페 같은 데다 글을 올려두면 얼추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삼성동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는 건, 내 일거수일투족이 성재현과 오롯하게 얽힌다는 걸 암시했다.
이런 걸 따지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일까. 이미 섹스를 전제로 돈을 받은 것부터 그른 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뻗은 손에 잡힌 게 지푸라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살겠다고 붙잡았다. 그래서 5억이 생겼고 빚의 일부를 청산했다.
제시된 기간은 석 달이었다. 그리고 이제 보름이 지났으니 앞으로 두 달만 더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빚만 갚고 나면 지긋지긋한 황명수 얼굴도, 독촉고지서가 수북하게 쌓인 우편함을 부끄러워하며 내다 버릴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고 나면 회사에 들어가서 평범하게 다달이 돈을 벌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거다. 그러고 싶었다.
자존심이나 도덕성을 따질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낭떠러지로 더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 게 급선무였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긍정적으로 합리화했다. 삼성동 저택은 방만 해도 한 층당 열 개였다. 지금 사는 불법 개조 원룸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러니 마다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
성재현이 나한테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는 알 필요 없다. 그가 원하는 대로 놀잇감이 되어주면 된다. 구질구질하고 추잡한 소문이 날 필요도 없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장난감.
팔목에 붕대를 요란스럽게 감은 탓에 직원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내 상태를 물었다. “어머, 진하 씨, 괜찮으세요?”라든지, “세상에, 팔이 어쩌다 그렇게 되셨어요. 아프겠다.”라는 등 걱정을 한 몸을 받았다. 팔목에 버젓이 붕대를 감고 다니니 다들 나를 중환자 취급하며 일부러 부딪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낮 동안에는 붕대를 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
-주말에 사고가 있었다고요?
“예, 혹시 몰라서 정 비서님께 연락드린 거예요.”
-전무님께서 별말씀 안 하셔서 전혀 몰랐습니다. 언제 그렇게 된 거라고 말씀은 주셨습니까? 상태는?
“오늘 의사가 다녀갔는데 크게 다치진 않으신 걸로 보입니다.”
-외부인이 벌인 사고라거나, 언론사에 노출될 경우 문제 되는 일은 아니고요?
“정황상 자택에 혼자 계시던 중에 벌어진 사고라 외부인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내 말에 정영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화기로도 그의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수석 비서로서 상사가 크게 다칠 뻔했다는 소식은 달갑지 않을 만도 했다. 이미 한 달 전에 성재현은 기자한테 피습당한 적이 있었다.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요소는 지주회사는 물론이고 기업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보좌인들이 기민하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자택에 머물라고 전무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정 비서님께도 알려야 할 거 같아 전화드린 겁니다.”
-전무님께서… 진하 씨한테 그러라고 하셨다고요?
“예….”
정영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구두를 신은 발끝을 툭툭 바닥에 내리쳤다. 이윽고 정영호가 말을 꺼냈다.
-사실 전무님이 먼저 이야기 꺼내기 전에 제가 먼저 진하 씨한테 부탁드리려던 부분인데 잘 되었군요. 강진하 씨도 동의하시는 부분이고요?
가능과 불가능을 따질 여건도 없었다. 나는 “예.” 하고 아까와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수화기 너머로 사각사각 볼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통화하면서 오간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듯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영호는 나와 성재현 사이에서 오간 제안을 알고 있을까. 성재현이 가진 재산은 언론에 공식적으로 노출된 금액만 하더라도 2조였다. 그에게 있어 20억은 손톱만큼도 안 될 정도로 적은 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쉬 넘어갈 돈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 정도 돈을 융통시킬 때 정영호를 거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서재에서 나올 때 나와 마주쳤던 정영호의 얼굴이 흐릿하게 뇌리에 스쳤다. 지나칠 만큼 태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그의 목소리처럼.
-그럼 그렇게 알고 백예에도 세부사항 수정하라고 해두죠. 스케줄 조정이랑 기타 자세한 건 이따 저녁에 들러서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정 비서님.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말을 꺼내려던 나는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저와 성재현 전무님 사이에서 오가는 일을 알고 계세요? 그런 물음을 꺼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영호는 철저히 성재현의 사람이었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30분에 육박하는 긴 통화였다. 뜨끈뜨끈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백화점 VIP 데스크로 돌아가자 주문해둔 제품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다음 달에 있을 세한그룹 정기 인사 발표 때 입을 성재현의 정복이었다.
시계부터 구두, 포켓치프. 그리고 일부 수선을 마친 양복이 얇은 천 두 겹에 감싸진 채로 대롱대롱 행거에 걸려 나왔다. 구성품을 모두 확인한 다음 운송 확인란에 서명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저녁에 가까운 오후였다.
점심 이후에 김희신 부장을 비롯해 기획서를 고쳐 들고 온 임원들을 빼면 방문객도 별로 없는 느긋한 하루였다. 그래도 저택에서 내가 할 일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 점심, 중간 끼니마다 커피와 다과를 챙겼고 침실 정돈을 한 다음, 창문을 죄다 열어 환기했다. 매일 정리정돈에 청소 전용 세제로 쓸고 닦는데도 치울 곳은 끊이질 않았다. 물론 내가 담당한 자리는 대개 성재현이 머물고 간 곳이거나, 성재현이 쓰는 개인 공간에 국한되어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저택에 들어서자 니콜이 오전에 열어뒀던 커튼을 다시 닫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나를 본 니콜은 놀란 얼굴이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그녀는 두 눈을 끔뻑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커튼 매듭을 묶는 데 집중했다. 어색해하는 태도에 나도 더는 건넬 말이 없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저녁 식사를 마무리 짓자 고용인들 대부분이 저택을 나섰다. 조명만 몇 군데 켜둔 저택은 금세 희끄무레한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넥타이핀을 손에 쥐고 서재로 들어섰다. 명목상 들고 온 차와 물병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옆에 서서 대기하는 내게 성재현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네킹이 된 기분으로 성재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책장이 팔락 넘어갈 때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그를 부르려던 찰나에 성재현이 안경을 벗었다. 그의 시선이 느지막하게 나를 향한다. 눈이 나를 향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미지근해진다.
그와 같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나는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성재현은 책상을 손으로 짚고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옆으로 살짝 물러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성재현이 입을 열었다.
“오후에 정 비서한테 전화했다면서요.”
“네, 주말에 있었던 사고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정 비서가 노파심이 많아서 일부러 말을 안 흘린 거였는데. 강진하 씨 때문에 들켜 버렸어요.”
“아….”
“뭐, 그래도 덕분에 귀찮았던 저녁 일정에 빠질 명분은 생겼으니까.”
내 손에 든 넥타이핀을 잡아 쥔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내일 저녁에는 이태원동에서 세한그룹 임원진 회동이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성재현은 컨디션 때문에 일정을 취소하려는 듯했다. 넥타이핀을 손끝으로 찰칵, 튕긴 성재현은 내 옆을 차분하게 지나쳤다. 다른 말은 없었지만 나는 그가 어디로 향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여전히 부자연스럽지만 전보다는 걸음걸이가 훨씬 가벼워진 성재현은 절룩거리면서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하에 있는 서재는 그가 잠들기 전 할 일을 마무리 짓는 곳이라 침실에서 멀지 않았다. 불 꺼진 침실에 들어선 성재현이 백열등의 조도를 절반으로 낮췄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면서 철컥, 저절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푹신한 침대와 소파, 거대한 그림이 놓인 침실은 창문도 없었다. 완벽한 밀실이었으며 소리가 새어 나갈 틈조차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해 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성재현은 왼손으로 넥타이 매듭을 풀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시가 없었지만 뭘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풀었다. 양말, 바지를 차례대로 벗었다. 부끄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적응이라도 한 건지 손이 떨리진 않았다.
“이리로.”
손짓, 그리고 짧은 명령. 복종하듯 무릎으로 기어 그의 다리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그는 가죽 벨트를 두 손으로 팽팽하게 당겨 내 목에 휘감았다. 긴장한 나머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성재현은 벨트를 꽉 여미지 않았다. 지나치게 헐겁게 채워진 벨트는 주르륵 어깨 위에 걸쳐져 걸리적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등허리를 둥글게 숙여 그의 지퍼를 내렸다. 지익, 매끄럽게 긁히는 소리 뒤로 좌우로 벌어진 바지 사이에서 불룩하게 솟은 면이 두드러졌다. 두 손으로 드로어즈를 끌어내리자 핏대가 선 기둥과 포피가 매끄러운 귀두가 튀어나왔다. 입술을 혀로 적시며 자연스럽게 입을 가까이 대려던 그때였다.
“오늘은 입으로 하기 전에.”
뺨을 무릎으로 살짝 밀어낸 성재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사르륵 내려와 맨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톱부터 마디까지 길쭉한 손가락에 유두가 은근하게 쓸렸다. 꼬집듯이 끝을 잡아당겼다가 돌돌 원으로 굴리는 손길에 신맛을 느낀 것처럼 입속이 깔깔해졌다. 반복적으로 만지고 꼬집자 색이 빨갛게 짙어진다. 성재현이 유륜을 퉁, 손으로 튕기며 말을 이었다.
“가슴으로 문질러봐요.”
“네…?”
“또 못 알아듣는 척하지.”
혀를 차며 핀잔하는 얼굴은 냉정했다. 다리 사이에서 두툼한 열기를 과시하는 성기를 눈짓으로 가리킨 성재현이 다시 한번 말했다.
“강진하 씨 가슴으로 좆, 문질러보라고요.”
엉거주춤 바닥에 앉아있던 나는 유두와 유륜만 봉긋하게 부푼 가슴을 내려다봤다. 뭘 원하는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이걸로 어떻게 가슴에 문질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두 손으로 힘껏 모아 쥐어도 편편한 살무덤으로는 비비는 게 불편할 터였다. 그러나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난주에 충분히 겪으면서 체득한 결과를 또 얻고 싶지는 않았다.
상체를 곧게 펴고 그의 무릎 사이에 몸을 끼웠다. 저절로 그의 허벅지가 벌어지고 대퇴근의 근육 선이 바짝 긴장했다. 불뚝 튀어나온 성기 선단에 가슴을 가져다 댔다. 저절로 체모와 음낭까지 꾹 눌린다. 살결에 뜨끈뜨끈하고 뭉툭한 살덩어리와 까슬까슬한 거웃이 닿자 느낌이 이상했다.
“음….”
성재현이 나른하게 한숨을 내쉰다. 나는 느릿느릿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연신 비비고 또 비볐다. 뾰족하게 솟은 유두에 귀두 끝을 둥글리다 두 손으로 가슴을 바짝 모아 기둥에 상반신을 바짝 붙이고 좌우로 흔들었다. 빳빳하고 거칠한 체모가 쓸릴 때마다 가슴팍 가운데가 간질거렸다.
턱 아래에 놓인 성기에서 후텁지근한 살냄새가 풍겼다. 슬쩍슬쩍 맞닿게 비빈 살갗에 땀과 체액이 맺혔다. 가슴으로 성기를 문지르던 나는 고인 침을 삼키지 않은 채로 성기를 입술 끝으로 물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성기를 입에 밀어 넣고 이와 입천장으로 약하게 깨물었다. 혀로 감고 사탕처럼 후룩후룩 빨다가 음낭까지 정성스레 핥았다. 그러면서도 가슴을 끌어모은 두 손은 놓지 않고 거듭 그의 허벅지에 문지르기 바빴다. 갈라진 귀두구에서 탁한 체액이 꿀처럼 흘렀다. 기둥부터 뿌리까지 체액으로 덮여 축축하고 반들거렸다. 연신 몸을 들썩거리던 내 머리를 쓰다듬은 성재현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오늘은 말을 잘 듣네.”
“흐으….”
“착하기도 하지.”
고개가 손힘을 따라 위로 들렸다. 시선을 마주한 성재현이 내 귀 아래에 입을 맞췄다. 쪽, 약하게 빨아들이는 느낌에 눈꺼풀이 떨렸다. 성재현은 내 귀부터 목까지 키스를 퍼부었다. 난폭하게 목을 조르고 살을 송곳니로 깨물어대던 것과는 달랐다. 애지중지하는 인형을 돌보듯이 사랑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벙긋 벌어진 입 모양만큼 울혈이 맺혔다. 오금이 오르르 간지러웠지만 반응하지 않으려 턱에 힘을 줬다.
침대에 떠밀려 등을 대고 누웠다. 넓은 침실 군데군데 버짐처럼 켜진 불빛이 망막을 부옇게 적셨다. 그늘이 스며들듯 성재현은 내 위로 슬그머니 올라왔다. 그의 셔츠 자락이 흐느적거리며 맨살에 부대낀다. 이윽고 성재현이 내 어깨를 잡고 가슴에 입술을 댔다.
“으응!”
밀려드는 자극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젖혔다. 조명을 노려보며 신음을 참았다. 그저 성기를 입으로 빨고, 삽입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전과 전혀 딴판이었다. 성재현은 나를 저녁 만찬처럼 음미하고 있었다. 유륜을 입 속에 머금고 게걸스레 빨다가 홈을 혀로 자극했다. 조용한 실내에 젖 빠는 물기 어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극적인 소리에 달아오른 귀가 잔뜩 예민해지고 그의 탄탄한 배와 성기가 부딪칠 때마다 단전부터 사타구니까지 지끈거린다. 기분이 이상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겪는 듯이 초조했다. 턱을 들고 허리를 위로 오목하게 들었다. 무게가 실린 발목이 떨렸다.
“히윽!”
가슴 양쪽을 번갈아 가며 집요하게 핥던 그가 이를 세워 유두를 강하게 깨물었다. 억지로 참고 있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래로 죽 따라 내려와 배꼽을 파고들었다가 옆구리, 그리고 배 아래 살까지 짐승처럼 핥아댔다. 숨소리가 자꾸 턱턱 입에 걸렸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자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성재현이 내 손을 붙잡았다.
“왜 입을 가려요.”
“아, 아앗.”
“소리 좀 참는다고 강진하 씨가 정숙해지기라도 할까 봐요?”
성재현이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손바닥을 입으로 깨물었다. 부기가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멍든 자리에 입술이 닿자 아릿했다. 통각에 머리며 눈앞까지 어지럽고 아찔하다. 내 팔을 침대에 잡아 누른 그가 도도록하게 솟은 유두를 계속 더듬었다. 자극을 각인시키려는 듯이. 나는 필사적으로 입속 살을 깨물고 참았다. 가슴 위로 살살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에 재채기가 나올 듯이 몸속 어딘가가 가려웠다. 결박하던 그의 손이 내 팔꿈치를 뭉근하게 건드린다.
“내가 어딜 만지든, 눈을 찡긋거리는데.”
“흐으, 응, 흑.”
“이래서야 일할 때 집중이나 제대로 하겠어요, 응?”
손끝을 세운 그가 슬그머니 겨드랑이 아래 늑골을 문지른다. 한껏 빨아 부풀어 오른 유두부터 곳곳에 붉게 멍울진 가슴까지 일부러 힘을 빼고 어루더듬는 그의 손길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차라리 난폭하게 괴롭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깃털로 살살 문지르는 것처럼 손과 혀가 전신을 마구 흐트러뜨릴 때마다 코를 타고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렀다. 성재현이 고개를 들고는 소매로 입술을 문질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할딱거리며 숨을 고르는 내 다리를 벌린 성재현이 성기를 무릎으로 툭 건드렸다. 배 아래에 바짝 닿을 기세로 일어선 성기를 붙잡은 그가 손바닥으로 성기를 주물렀다.
“이거 봐. 젖 좀 빨아준 걸로 벌써 아래까지 발딱 세우고.”
“아…!”
“내가 내 집에 들인 게 좆에 굶주린 남창인지, 아니면 도와주러 온 사용인인지 헷갈리는데요.”
“흐윽, 읏.”
성재현은 내 성기를 사정없이 뭉개고 주물렀다. 뿌리까지 손바닥으로 잡아 쥐고 음낭을 꽉 움켜잡아 강하게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시트 자락을 움켜쥐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머릿속이 툭툭 끊겼다. 가느다란 쾌감이 실처럼 내 몸 여기저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조명이 눈을 아릿하게 적셨고 발끝까지 저리저리해졌다.
배에 젤이 주르륵 떨어졌다. 차갑고 미끌미끌한 질감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대로 손까지 푹 젖은 성재현이 질척거리는 손을 내 허벅지에다 문지르다 이내 둔부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앗!”
손가락이 내벽을 가르고 들어와 꿈틀거렸다. 길쭉하면서도 두께 있는 마디가 푹, 하고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파들거리는 허벅다리를 내려다보며 성재현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여기, 소리 들리죠.”
“으, 으응.”
“손가락으로 살짝 쑤셨을 뿐인데 강진하 씨 뒤에서 애액이 이렇게나 흘러요.”
“아, 아응, 히윽….”
“자지에서도 물이 줄줄 새는데, 구멍은 더 하네.”
찰박거리는 소리가 끈덕지게 이어졌다. 음탕하고 게걸스러운 마찰음이었다. 애액이 아니라 윤활제란 걸 아는데도 얼굴이 붉어졌다.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손가락 세 개를 아래에 머금자 아랫배가 답답했다. 이물감에 허리를 위로 들고 발끝에 힘을 줬다. 성재현은 푹푹 아래를 쑤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불룩한 지점을 꾹 눌렀다.
“아! 아… 아아.”
눈앞이 하얗게 부서졌다. 감각이 아래로 죄다 쏠린 듯이 선명해졌다. 배 아래와 사타구니가 지끈거리고 전류가 몸속을 휘감아 도는 것처럼 찌르르 울리는 자극이 핏줄을 갉아먹는 듯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한 감각은 분명히, 쾌감이었다. 손바닥을 손톱으로 꽉 눌렀다. 숨을 참았다가 길게 내쉬었다. 성재현은 내가 느끼는 지점을 일부러 쿡쿡 빠르게 치댔다. 나는 구멍 안쪽을 엉망으로 휘저으며 움푹하게 파고드는 손가락을 조였다. 그러자 성재현이 입술을 사납게 실룩였다.
“손가락도 이렇게 조여대는데 좆 박아주면 까무러치겠어.”
“아, 윽, 하아!”
힘껏 팍 처박은 손가락 세 개가 내벽 깊숙한 부근을 짓눌렀다. 젤 때문에 마디 끝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안에서 꿈틀거리며 자유롭게 노니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느 틈엔가 눈물이 맺혔다. 젖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입을 벌리면 의미조차 싣지 못한 엉성한 음절이 뚝뚝 흩어졌다. 건전지가 아슬아슬하게 남은 기계처럼. 흐느낌인지 울음인지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손가락으로 안을 거칠게 휘젓던 성재현이 손을 쑥 빼낸다. 허옇게 거품이 일어난 젤이 쩍, 하고 손바닥에 묻어났다. 손가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젤을 바라보던 성재현이 웃었다. 재밌는 광경이라도 본 듯 즐거운 웃음이었다. 끝이 아니라는 징조였다. 침대가 한 번 크게 일렁거린 순간, 힘이 빠진 내 허벅지 사이로 불뚝 일어선 성재현의 성기가 닿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 으, 아아, 잠, 시이, 만, 흐윽.”
“안 되지. 잠시 봐줬다가.”
“아, 아…!”
“또 어디로 달아날지 누가 알고요.”
다리를 벌리고 무게를 실어 몸을 기댄 그는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내 아래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푹, 하고 살기둥이 좁은 입구를 파고들었다. 윤활제 때문에 두꺼운 살덩어리가 걸리는 부분조차 없이 단숨에 절반이나 밀려들었다. 질컥, 젤에 흠뻑 젖은 구멍이 성기의 두께만큼 넓게 벌어졌다. 성재현은 내 허벅지를 힘껏 잡아 누른 채로 숨을 크게 골랐다. 구겨진 셔츠 사이로 상박과 흉근이 오르내리는 순간 퍽, 하고 밑동까지 단숨에 들어왔다. 찌르르, 하는 가벼운 감각이 아니었다. 뒷골부터 척추까지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둔통에 몸이 위로 들렸다.
“아악, 아, 으윽! 히으…!”
새된 신음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터졌다. 빡빡하게 부푼 입구를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자리를 잡았다. 이대로 계속 아프리라고 예상하며 나는 입술을 깨물고 아래에 쏟아지는 자극을 참았다. 입 속 살을 깨물어도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 없어, 그저 눈만 질끈 감았다. 퍽, 퍽, 움직이는 가벼운 몸짓에 그의 숨소리가 얕아졌다. 격렬하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사뿐해지더니 그가 몸을 아래로 틀어 위로 쿡 찧어 올렸다.
“아, 아아, 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빨개질 정도로 힘껏 오므린 발끝이 덜덜 떨렸다. 조명에서 떨어져 내린 빛무리가 스르륵 눈에 감긴다. 따끔하면서도 새콤했다.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가 힘없이 떴다. 성재현이 내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아래를 맞대고 다시 힘껏 문질렀다. 쩍, 하고 찐득한 물기 어린 마찰음이 선명했다. 소리만이 아니라 발목부터 겨드랑이까지 저릿저릿하게, 개미 떼가 피부를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이상해, 이건 내가 원하는 느낌이 아니야. 싫어. 나는 고개를 젖히고 도리질을 쳤다. 숨을 삼켰다. 목이 따끔따끔 아팠다.
“하아, 나 봐요.”
“으읏, 윽.”
“나 보라고 했잖아요.”
성재현은 벨트를 잡아당겨 내 시선을 억지로 붙들었다.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깜빡였다. 검은 눈 아래 붉어진 성난 얼굴과 땀으로 부스스해진 머리카락, 우아한 유화 같은 남자는 얼룩덜룩했다. 분노로 검게 타오른 야수였다. 그대로 벨트를 잡은 채로 성재현은 교접한 아래를 빠르게 쿡쿡 쑤셨다. 팔꿈치로 시트를 비비고 허우적거리며 알 수 없는 어딘가를 자꾸만 더듬었다.
“아, 아! 흐윽, 으응.”
쿵, 쿵, 심장이 뛰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몸이 그에게 닿을 때마다 뿌드득 피부가 서로 밀렸다. 닿은 자리마다 발갛게 열이 올랐다. 성재현은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고 허리를 털럭털럭 묵직하게 흔들었다. 몸을 앞뒤로 흔들 때마다 은연중에 나는 그의 다리 부상을 떠올렸다. 많이 호전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편하지 않을 그에게 격렬한 움직임은 더 심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팔뚝 아래를 붙잡았다. 땀방울 때문에 미끄러져 손가락을 구부려 힘껏 그러잡은 나는 밭은 숨을 내뱉듯 그를 불렀다.
“전무… 저, 전므, 님….”
“왜.”
“잠, 잠히, 시만, 천, 천히, 읏…!”
“천천히, 라고 말할 여유까지 있나 봐요?”
“아, 으흑… 거기, 아, 안, 돼….”
푹, 하고 성기가 안으로 깊숙이 박혔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였다간 성기가 예민한 안쪽을 건드릴 것만 같았다. 성재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나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점잖던 그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야수 같았다. 성재현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깁스한 오른발이 보였다. 제아무리 푹신한 침대라 해도 더 이상 움직였다간 그의 발에 무리가 갈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질꺽, 교접된 아래에서 성기가 미끄덩거리며 빠져나왔다. 배 속을 가득 채웠던 묵직한 감각이 사라지며 순식간에 허전해지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젤과 체액이 달라붙은 성기가 반질반질했다. 묽은 시럽이 달라붙은 것처럼 매끈하게 젖은 건 그의 성기만이 아니라 내 허벅지며 사타구니도 마찬가지였다. 구멍을 타고 회음으로 뚝 흘러내린 윤활제가 무릎까지 쭉 흘러내렸다. 미적지근하니 간지러워 발가락을 살짝 오므렸다.
숨을 탁하게 고른 나는 손등으로 눈과 이마를 대충 문지른 다음 그를 침대에 눕혔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내가 둥그렇게 맺혔다.
“다리, 가 불편하실 거 같아서….”
“…….”
“괜찮으시다면, 제가, 위에서… 하겠습니다.”
또 저번처럼 그의 기분을 건드린 건 아닐까 우선 표정부터 살폈다. 얼굴이 붉어진 채 숨을 고르던 성재현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형형한 두 눈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견고하고 우아한 자태였다. 침대에 굴러다니는 젤 통을 집어 들고 손바닥에 가득 짠 다음 성재현의 성기를 붙잡았다. 구멍에 성기를 대고 천천히 하강했다. 밀려드는 양감에 배 아래가 빠듯해진다. 눈을 감고 허리를 흔들었다.
“흐윽.”
예민하게 달아오른 내벽에 들어온 성기를 조이고 들쑤셨다. 찰박찰박 윤활제와 정액으로 아랫도리가 질척였다. 침대까지 흘러내린 점액으로 젖은 시트가 구겨지고 뭉쳐졌다. 최대한 그가 사정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처럼 내 쾌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재현은 내가 무릎으로 딛고 서서 엉덩이를 아래로 콱 내렸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몰골을 관람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허리를 세우고 몸을 들썩거리느라 성재현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니 짐작이었다.
열감에 온몸을 에워싸고 아래는 눅진눅진하게 녹아내렸다. 그런데도 성재현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빠듯하고 버거웠다. 일부러 성감대를 피하는데도 구멍 주변이 죄다 예민해지고 성기는 음낭까지 땅땅하게 부풀어 당장이라도 사정할 듯이 아슬아슬했다.
“하….”
성재현은 내가 꽤 긴 시간 공들여 허리를 흔들고 난 뒤에야 움직임을 멈추는 걸 허락해 주듯이 안에 사정했다. 장내로 울컥거리며 들어오는 정액의 느낌에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 등이 떨렸다.
그의 허벅지 위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힘이 다 빠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안에 고여 있던 체액이 젤과 한데 덩어리져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볍게 절정에 올랐던 그는 목까지 붉어져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눈꺼풀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마와 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기자 섬세한 눈매가 드러난다. 짙은 쌍꺼풀과 세로로 시원스럽게 날 선 눈은 오로지 나를 깊숙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건… 가져오겠습니다.”
주어진 의무를 끝냈으니 방해되지 않게끔 침대로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강진하 씨.”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성재현이 내 목의 가죽끈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밀착한 입술이 벌어지며 아랫입술을 머금고 잘근거렸다.
“흐으, 읍.”
뿌리치지 못한 나는 그대로 혀가 입속으로 밀려드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 안을 맛보듯이 마구 쓸고 빨았다. 숨까지 씹어 삼킬 기세였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며 나른하고 습한 숨이 흩어졌다. 성재현은 가만히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눈 아래를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손길에 나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달칵, 소리가 났다. 목을 죄던 매듭이 느슨해졌다. 나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제정신으로 그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은 탓이었다.
“오늘은, 제법 괜찮네요.”
“…….”
고개를 돌린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성재현은 다행히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욕실에 힘없이 기대 뜨거운 물을 맞았다. 아래가 욱신거리고 허벅지가 땅겼다. 손을 내려 아래를 더듬거렸다. 사정하지 못한 성기가 욱신거린다. 퉁퉁 부어오른 구멍은 일부러 폭력적으로 이끈 섹스의 흔적이었다. 손으로 아래를 훑다가 힘껏 비볐다. 툭, 툭 물줄기에 섞인 정액이 타일을 지나 배수구로 쓸려나갔다.
숨을 고르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정사의 끝 맛보다도 키스가 남기고 간 흔적이 거슬렸다. 몇 번이고 깨물린 입술은 화끈거리고 혀는 알알했다. 베인 듯이 쓰라려서 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나도 모르게 의식하고 되뇌고 있었다. 몰아치는 듯했던 키스를, 혀가 섞이던 순간 목덜미를 잡아 쥐던 팽팽한 거리감 너머의 눈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유년 시절에도 성재현은 내게 충동적으로 군 적이 없었다. ‘놀이’였던 일조차도 계산적이며 은밀했고 군더더기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무엇이 다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관계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듯했다.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른 죄인처럼 나는 입술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
아침부터 간병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유, 진짜 사모님이 또 이러시네. 저더러 요일 바꿔서 나와달라고 문자만 똑 남기시고.”란 말로 다짜고짜 시작된 고자질은 내 무거운 아침잠을 달아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모님은 어머니를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아버지가 회사를 차린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사모님 대접을 받길 원하며 살았다. 심지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근간조차 모를 허영은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사람들이 사모님이라 부르는 데에는 존중도 격식도 없었다. 비꼬는 조롱에 가까웠다.
-진하 씨, 나도 내 사정이란 게 있잖아요. 매주 나흘씩, 여섯 시간으로 업체랑 이야기가 된 부분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간병인에게 그저 죄송하단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답답한지 에휴, 에휴, 하는 한숨 소리만 낼 뿐 더는 화내지 못했다.
어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핸드폰을 들고 있을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예상한 대로 받지 않았다. 신호는 가는데 일부러 끊는 듯한 눈치였다. 아는 핸드폰 번호 몇 개에 연락해 봤으나 다들 “씨팔, 니네 엄마를 왜 나한테서 찾아?”라는 욕설 섞인 반문뿐이었다.
어머니의 방랑벽이 또 도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여섯 번째 시도하다 결국 문자를 남겼다. [병원왜안갔어요나랑약속했잖아보는대로전화좀해요제발] 띄어쓰기도 제대로 안 된 문자를 덜렁 보내고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버지가 기적처럼 낫지 않는 한 돈은 계속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간병인 파견 업체에다 풀타임으로 새로 사람을 구해야 할까. 아니, 구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가뜩이나 내 이름은 거의 모든 간병업체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황명수가 걸핏하면 병원에 와서 깽판을 치는 바람에 간병인들은 ‘강준구’란 환자는 피한다고 했다. 여태 병원에서 안 쫓겨난 게 용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황명수는 최근 병원을 방문해서 난동을 피운 적이 없었다. 얼마 전 내가 원금 일부분을 갚은 덕분인 듯했다. 남은 빚만 갚고 나면 그대로 연락을 차단해 버릴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경찰에다 콱 찔러 버리고 싶지만, 괜한 꼬투리가 될 게 뻔했다. 그런 놈하고는 사소한 일로라도 엮이지 않는 게 나았다.
자다 깬 머리가 오작동 난 세탁기처럼 빙빙 돌았다. 잠기운이 서린 두 눈을 연신 슴벅거리며 주변을 느리게 돌아봤다. 곰팡이가 슨 벽 위에 싸구려 도배지를 덕지덕지 덧바른 원룸이 아닌, 깨끗하고 커다란 방이 보였다. 그러나 처음 본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세하게 구조를 알고 있을 정도로 눈에 익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나는 멍하니 탄식했다. 삼성동 저택. 성재현의 서재였다.
탁자에 놓인 박카스, 옷걸이에 곱게 걸린 낡은 패딩을 보자 비로소 새벽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성재현이 몸을 씻는 걸 돕고 잠자리에 드는 걸 확인하고 나니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정영호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교대할 생각으로 경비 초소에서 핸드폰만 챙겨서 실내로 돌아왔다. 경비원은 내가 늦은 시간까지 저택에 남아있어도 의구심조차 갖지 않았다. 성재현 전무 때문에 밤새워 일한다고 여기는 듯 측은한 눈으로 박카스를 줬다. 박카스를 마시고 서재를 마저 정돈했고, 히터 바람이 들어오는 침실 옆방 러그 위에서 개처럼 웅크려 졸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닥이 아닌 서재에 비치된 가죽 소파에 누워 담요까지 덮고 있었다. 설마 누가 여기로 옮겨준 건가. 지하 서재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아마도 내가 잠결에 소파로 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여덟 시. 출근 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했다.
“전무님, 늦어서 죄송합….”
침실로 들어서자 성재현은 옷을 완벽하게 갈아입은 채였다. 내 손길이 딱히 필요 없어도 될 만큼 모든 걸 갖춘 남자가 완벽한 얼굴로 돌아봤다.
“마침 타이밍 맞춰서 잘 왔어요.”
서랍장에 가지런히 접어둔 넥타이를 꺼낸 성재현이 빙긋 웃으며 넥타이를 흔들었다.
“다른 건 혼자서도 하겠는데 이상하게 넥타이는 잘 못 매겠더라고요.”
“…….”
숨을 소리 없이 들이쉰 다음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성재현은 익숙하게 턱을 살짝 들고 내게 목덜미를 맡겼다. 바스락거리며 실크 넥타이가 그의 목을 휘감는다. 그때마다 나는 내 목을 조이던 가죽 벨트를 떠올렸다. 침을 꿀꺽 삼키며 호흡을 골랐다. 향수 냄새가 그의 체온에 데워져 미지근하면서도 끝은 독처럼 서늘했다.
“정 비서님이 곧 오실 겁니다. 전무님 컨디션 맞춰서 스케줄 조율이 충분히 가능하니 미리 전해달라 하셨는데, 다리는 좀 어떠십니까?”
“강진하 씨, 샴푸 바꿨나 봐요.”
동문서답이었다. 넥타이 매듭을 마무리 짓던 나는 성재현을 올려다봤다. 그는 손으로 살짝 부슬거리는 내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향기가 잘 어울려요.”
샴푸를 바꾼 건 아니었다. 새벽에 이 저택에서 몸을 씻었으니까 저택에 구비된 제품을 썼을 뿐이었다.
“이건 저택에서 쓰는….”
“아, 그렇지. 나랑 같은 걸 썼겠구나.”
눈매가 가늘어지며 묘한 미소를 짓는다. 몸을 살짝 숙인 그의 얼굴이 내 뺨에 가까워진다. 숨결이 귀 끝에 닿을락 말락 스쳤다. 나른한 콧숨을 내뱉은 그가 말했다.
“나랑 강진하 씨 사이에 공유하는 게 많아졌네요. 빚에, 섹스에, 이제는 향기도 나누고.”
“…….”
“앞으로는 또, 뭘 공유하게 되려나.”
팔을 타고 내려온 그의 손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똑, 하고 풀려있던 단추를 잠가준 성재현이 내 손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볕이 잘 드는 오전마다 나는 온실에 들렀다. 저택에 있던 화분 중 시든 건 밖으로 옮겼다. 필준 삼촌에게 부탁해 공기 청정에 좋다는 화분도 새로 주문했다. 사람의 손을 탈 필요 없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영역이었다. 나는 그곳을 매일같이 들여다봤다.
매일 들여다보는 건 비단 온실만이 아니다. 성재현도 내가 들여다봐야 하는 화분 같은 존재였다. 온실에 내리쬐는 미온한 빛과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느끼며 나는 어린 시절을 더듬었다.
대대로 우리 집은 세한그룹의 사람들이었다. 함흥댁이라 불리던 외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신 회장님을 40년 넘게 모셨다. 암으로 자리보전을 하게 되기 전날에도 그녀는 세한 전 회장님께서 좋아하던 요리를 했고, 심지어 코에다 호스를 꽂고도 생신상을 지휘했다. 그것이 당신의 낙이었노라고 어느 날 곱게 웃으며 말했다. ‘그분’이라 부를 때면 외할머니는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이곤 했다. 전 회장님은 높으신 분이었지만, 어린 나한테는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보다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또한 세한 회장님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구두를 닦아주고 입시 준비를 하던 그의 다과를 들고 방문을 두드리던 저택 사람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신분제도, 노예제도 없는 세상이라지만 대대로 이어진 법칙처럼 우리 집은 다 그런 식으로 살았다. 숙명인 것처럼 그들에게 귀속되어 왔다.
성재현은 내게 첫 주인이었다. 요즘 세상에 ‘주인’이란 단어는 구식이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 말만큼 성재현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명칭은 없었다. 아홉 살 때부터 그는 내게 도련님이었으며, 거절이란 게 학습되지 않은 관계였다. 설령 그가 내 뺨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잘못을 빌어야 했다. 언제든 필요한 만큼 쓰고, 그러다 버리면 그만이었다.
섹스까지 했지만 성재현은 평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심경의 혼란이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여상한 일상이었다.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한 그는 계획적인 스케줄에 맞춰 일과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키스는,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
잠만 자는 쪽방 같은 원룸에 들어선 나는 옷가지만 간단하게 챙겼다. 어차피 몇 달 후에는 이 집에서 어디든 일을 다녀야 하니 굳이 방을 뺄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성재현이 권고해서 저택에 들어가게 되었을 뿐이었다. 내 집은 남겨둬야만 했다.
옷을 가방에 꼼꼼하게 정돈하던 중에 전화가 울렸다. 징, 징, 울리는 전화는 모르는 번호였다. 또 캐피탈 같은 데서 온 스팸 전화라 여기고 무시했다. 상당히 끈질기고 피곤한 곳인지 내가 여덟 통을 무시했는데도 또 걸고 또 걸었다.
빵, 빵! 클랙슨이 반지하 작은 창문 너머로 들렸다. 싸우기라도 하는지 클랙슨을 쉬지 않고 누른다. 산만한 소음을 견디다 못해 나는 핸드폰을 들고서 문밖으로 나섰다. 저 망할 놈의 얼굴이라도 확인하겠다는 생각으로 밖에 나가자마자 좁은 골목을 꽉 채울 듯 커다란 스포츠카 한 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빠아아앙! 요란하게 울리던 클랙슨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귀를 틀어막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스포츠카 쪽을 바라봤다. 창문이 진하게 선팅 되어 차내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창문이 쭉 내려가더니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여기 맞네.”
싱긋 웃은 권재림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내 손에 든 핸드폰도 여전히 울리기 바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통화를 누르자 핸드폰에 대고 권재림이 들으란 듯이 말했다.
“한참 기다렸잖아.”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통화를 종료한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문에 달린 비밀번호를 급하게 꾹꾹 눌렀다. 빌어먹을 손가락이 자꾸만 번호를 틀리게 누르는지 삐, 삐, 오류 신호만 두 번이나 떴다. 탁, 하고 차 문이 닫히고 내 등 뒤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발랄했다.
“여기가 형이 사는 곳?”
어깨에 턱을 걸친 권재림이 등에서부터 두 팔로 나를 꽉 잡아 안았다. 답답한 나머지 나는 팔꿈치로 그를 밀어냈다.
“이거 놔, 좀.”
“와, 이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집이 아니라 무슨 컨테이너 박스 같은데?”
“팔 풀어요. 무거워.”
버둥거렸지만 나를 붙잡아 안은 권재림은 미동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권재림은 나보다 체격도 훨씬 좋았다.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꾸준히 해온 데다, 승마와 골프는 대회까지 출전할 정도로 소질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발로 다리 사이를 걷어차지 않는 한 힘으로 그를 제압하는 건 쉽지 않았다.
몸을 억지로 돌린 권재림이 나를 문에 떠밀었다.
“아, 진짜! 형. 저번부터 왜 이렇게 꼴리게 굴어.”
“이거, 놓으라고 말했잖아요.”
“싫은데?”
“하… 대체 나한테 무슨 볼일이신데요.”
“나야 형하고 볼 일 많지.”
권재림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또 팔목을 비틀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두 눈 똑바로 뜨고 노려봤다.
“손 붙잡는 게 볼일이에요?”
“에이, 설마 내가 손만 잡으러 여기까지 왔겠어?”
“…그쪽 때문에 손목에 멍이 퍼렇게 들었거든요.”
“그랬어? 어디 봐봐.”
내 팔목을 잡아든 권재림이 소매를 걷었다. 아물어가는 멍이 희미한 누런빛이었다. “좀 아팠겠네.” 하는 목소리에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그때 나 피했어. 안 그랬으면 멍들 만큼 안 잡았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은 남자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내 팔을 툭툭 치며 저기요, 저기, 하고 남자가 말을 반복했다. 여기 사는 주민인 듯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비키려는 나를 대신해 재림이 “팔을 왜 쳐?” 하고 험악하게 욕을 뱉었다. 그러자 남자가 눈썹을 모으더니 “들어가게 비켜달라고….”라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한 권재림을 막아섰다.
“지금 시비 걸려고 왔어요?”
“저 새끼가 형 팔 쳤잖아.”
“내 팔을 친 거지, 재림 씨 팔 친 거 아니잖아요.”
“뭐야, 재림 씨라니. 언제부터 내가 형이랑 존대하는 사이였다고.”
“그럼 나한테 반말하지 말든가요.”
“형이야말로 반말하면 되잖아. 왜 자꾸 서먹하게 굴어?”
골목에 어슬렁거리는 사람 수가 더 늘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다들 수군거리고 있었다. 여기 있다가는 아예 대놓고 찍히겠다 싶어 나는 권재림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일단…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이야기해요.”
“여기 말고 다른 데면, 저기?”
권재림이 눈짓으로 차를 가리켰다. 별수 없이 나는 그를 따라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권재림은 어려운 미션을 완수한 사람처럼 뿌듯한 얼굴이었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고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맞대게 될 줄이야. 어떻게 집을 찾아왔는지, 핸드폰 번호를 어디서 알았는진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 정도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이파리가 황량한 가로수를 지나치는 동안 권재림은 휘파람을 휘휘 불었다.
“점심 먹었어?”
“…대충은요.”
“대충 가지고 되나. 아, 스시 먹을래? 형 초밥 좋아하잖아. 논현에 가끔 가는 오마카세가 있는데 꽤 괜찮아.”
“아니요, 슬슬 들어가 봐야 해서요.”
“어디?”
“…일하러.”
명확하게는 삼성동이지만 어쨌든 나한테는 직장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던 권재림이 신경질이 난 얼굴로 흠, 하고 숨소리를 내뱉었다.
“어디서 일하는데?”
“그냥, 회사….”
“설마 그 회사가 세한전자는 아니지?”
그 말에 나는 권재림을 멀뚱히 바라봤다. 서울에 있는 회사만 해도 몇백 개인데 그중 특별나게 ‘세한전자’를 끄집어낸 권재림은 여간 싫은 게 아닌 얼굴이었다. 고개를 저었다. 세한전자는 내 대학이나 학점으로는 넘볼 수도 없는 자리였다.
“뭐, 세한전자만 아니면 됐어.”
“…왜 세한전자만 아니면 되는데요.”
“그냥 싫어. 성재현이 거기 전무로 있는데 형이 그 밑에서 전무님, 하고 불러줄 생각하니까 좆같아.”
속으로 뜨끔했다. 세한전자를 다니는 건 아니지만 지금도 충분히 전무님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던가. 나는 모른 척 말했다.
“평사원은… 그 정도 임원 만날 일 없어요.”
“알아.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아. 성재현이랑 만날 일 만들지 마. 알았지?”
고집스럽게 쏘아붙인 권재림이 클랙슨을 빵빵 울렸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만지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세한그룹과 석영그룹은 재벌가의 혼맥으로 이어져 사실상 같은 집안으로 쳤다. 그래서 성재현과 권재림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라 그런지 성재현은 권재림을 적당히 귀여워했었다. 어지간하면 양보했고, 사고를 쳐도 적당히 눈감아준 적도 많았다. 고등학교 진학 전 미국 코네티컷에 있는 기숙 학교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자주 만나지 못해서 만날 때마다 더 살갑게 대했던 것 같은데. 하기야 원래부터 권재림은 성재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긴 했다. 오죽하면 삼성동 저택에 올 때마다 진짜 사촌 형인 성재현을 두고 나한테 들러붙곤 했었으니 말이다.
인파가 북적거리는 역 주변에서 좀 더 떨어진 갓길에 차를 세웠다. 커피숍이 많았지만 어디 앉아서 얼굴 보고 희희낙락 대화할 상태는 아니었다.
“형은 나 안 궁금했어? 그동안 잘 지냈는지 묻지도 않고?”
“…잘 지냈어요?”
원하는 대로 질문하자 권재림이 키득거렸다.
“그저 그랬어. 뭐… 미국에서 서핑은 많이 했지. 요트도 많이 타고, 파티도 거의 매일 들락거리고. 뭐, 소소하게 지냈지.”
“그 정도면 잘 지낸 거 같아 보이는데요.”
“곁에 형이 없어서 잘 못 지냈어, 라고 하면 나 귀여워해 줄래?”
“아니요.”
진심을 담아 거부하자 권재림이 실실 웃는다. 눈꼬리가 가늘어지고 보조개가 핀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어렸을 적 모습과 영락없이 똑 닮았다. 걸핏하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고집 피우고 투정 부리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외동이었던 나는 당시 동생을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친동생 대신 권재림을 나름 귀여워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었다. 감히 석영가 도련님을 동생처럼 예쁘게 생각했다니.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였다. 지금은 권재림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
정치인과 연예인 등 유명인사 마약 혐의로 세간이 뒤숭숭할 때, 석영그룹 사장단 중 한 명이 그 불미스러운 명단에 실려있었다. 아버지가 석영그룹 수행 기사로 발령 나자마자 터진 일이었다. 그러나 석영그룹에는 별 타격도 없었다. 연예인 몇몇만 기소되어 징역형을 받은 게 끝이었다. 물론 그 사건 자체는 권재림은 관련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이 세계와 더는 엮이고 싶진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볼일이 뭔데요.”
피곤한 눈 아래를 손으로 문질렀다. 차에 달린 시계를 확인했다. 여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슬슬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다. 권재림을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형 얼굴 보러 온 게 내 볼일이었는데.”
“그럼 끝났네요.”
매정하게 대답한 나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휙 들어온다. 기침이 터지는 걸 손등으로 막으며 안전벨트를 푸는 내 손을 붙잡은 권재림이 말을 이었다.
“남들은 내가 아는 척하면 그거 하나에 매달려서 어떻게든 친분 유지하려고 애쓰던데.”
“…….”
“모른다, 모른다, 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은 또 다 받아주고. 그러면서 밀어내고, 자꾸 감질나게.”
“나 그렇게 값비싼 사람 아니니까 이렇게 애써서 매달리지 마.”
그 말에 권재림이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팔을 비틀어 빼낸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문을 탁 닫았다. 어두운 차창 때문에 차 안이 가려졌다. 도망치듯이 지하철역으로 내려온 나는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 값비싼 사람이 아니니까 매달리지 말라니. 20억짜리 몸값이면 싸구려는 아니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돌돌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뭉툭하고 거칠었다.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했지만 어머니한테서 연락은 없었다. 이쯤 되니 나조차도 화가 났다. 똑같은 문자를 보내려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이태원동에서 성 회장이 준비한 저녁 만찬 대신 성재현은 자택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들겠다고 했다.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준비된 식탁은 요리 잡지에 실려도 될 만큼 화려하고 풍성했다. 넉넉하게 만드는 이유는 고용인들의 저녁 식사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매번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성재현은 굉장히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이제는 내 부축이 없어도 걸음을 뗄 수 있게 된 그는 아주 천천히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늘 그렇듯이 나는 옆자리에 서 있었다. 식사 시중까지 들 필요는 없지만 성재현이 물이나 그릇 같은 걸 요구할 때마다 내가 받아서 교체해 주는 식이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한 사람 몫으로 준비된 식탁을 보더니 정영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 더 준비하라고 전해 줘요.”
그 말에 정영호가 곧바로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손님이 방문할 예정은 없었는데 왜 갑자기 한 사람 더 준비하라고 하는 걸까. 놓친 게 없는지 고민하던 찰나에 곧바로 디너 매트와 식기, 잔이 바로 맞은편에 나열되었다. 성재현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앞쪽을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앉아요. 강진하 씨.”
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가지런한 식기를 내려보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저는 나중에 먹겠습니다. 지금 챙기지 않으셔도….”
“내가, 앉으라고 할 때 앉아요.”
“…….”
“얼른.”
부드럽고 나긋했던 목소리가 금세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정영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색하게 자리에 앉자마자 가끔 얼굴만 지나치듯 본 여자가 내 잔에 물을 따랐다. 곧 요리가 나왔다. 식사를 가지고 온 김상훈은 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보고는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성재현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메뉴와 들어간 재료를 설명했다. 김상훈의 열렬한 설명에도 성재현은 무미건조하게 젓가락을 들 뿐이었다.
“왜, 오늘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성찬을 두고도 물수건으로 손만 문질러 닦던 내게 성재현이 문득 말을 꺼냈다. 시식을 지켜보던 김상훈이 두 손을 잡고 주물렀다. 혹평이라도 나올까, 지레 긴장한 얼굴이었다. 물수건을 접시에 가지런히 접어 내려놓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입맛이 좀 없어서… 게다가 어색하고요.”
“어색하다?”
“네, 다른 직원들도 계시는데 저만 이렇게 자리에 앉는 게….”
“오늘부터 나랑 한 집 살이 할 사이잖아요. 곧 퇴근할 사람들과 다르죠.”
그 말에 등줄기가 움찔 떨렸다. 비단 나만이 아니라 곁에 서 있던 김상훈의 얼굴도 복잡미묘했다. 성재현이 젓가락으로 생선찜 살을 바르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당황했어요? 오늘부터 상직 근무하기로 결정된 거, 다 협의된 부분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놀라요. 내가 틀린 말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성재현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 분명 맞는 말이었다. 저택에서 남은 기간 동안 상주하기로 협의도 되었고, 계약서도 수정되었다. 그런데도 왜 그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걸까. 숨겨야 하는 비밀 때문에 예민해진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잠자코 수저를 들었다. 내가 수저를 드는 걸 확인하고서야 성재현도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맛을 따지고 음미하는 그와 다르게 나는 그릇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거북하게 들릴 무렵이 되자 성재현이 정영호를 눈짓으로 불러들였다.
“이만 퇴근하세요. 고생했습니다.”
신호탄이 떨어졌다. 정영호가 말없이 턱으로 좌우 흔들자 눈치껏 직원들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김상훈은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어딘가 멋쩍고 애석한 얼굴이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성재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 조리사가 계속 강진하 씨만 보던데.”
“…….”
“친해요?”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아랫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웃음없이 고개를 저었다.
“인사만 주고받았습니다.”
“그래요? 인사만?”
“네.”
나는 다시 한번 힘주어 대답했다.
“안 친합니다.”
관계를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본능이자 직감이었다.
**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은 나는 상비용으로 들고 다니던 소화제를 꺼냈다. 손톱만 한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자 쓴맛이 알알하게 혀를 적신다. 손바닥으로 가슴 아래를 약하게 문질렀다. 체한 건 아니지만 체할 걸 대비한 예방이었다.
개인 소지품을 넣어두는 창고에서 기척이 들렸다. 김상훈이었다. 아직 퇴근하기 전인지 조리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양파망을 한 아름 들고 있던 그는 나를 보더니 망을 내려두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진하 씨, 어떻게 된 거예요?”
따지듯이 입을 열었던 김상훈이 말투를 다시 고쳐 말했다.
“진짜 상직 근무예요?”
“…네.”
“갑자기요?”
숱이 많은 눈썹 아래 둥근 눈이 의아함을 잔뜩 품었다. 이 남자는 나한테 뭐가 이렇게도 궁금하고 참견하고 싶은 게 많은 걸까. 정수기에 손을 기댄 채 나는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주말에 전무님한테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 낫기 전까지는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상주하면서 보조하길 원하셔서 재협의했습니다.”
“사고? 아, 그 주말에 지하에서 넘어지셨다고….”
김상훈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얼마 전에 주치의가 다녀간 데다 정영호한테도 전달된 소식이었다. 대단한 사고는 아니라 해도 저택 고용주라 할 수 있는 만큼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컵에 든 물을 마시며 나는 김상훈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성재현이 부린 변덕 때문에 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아무리 상직 근무니 옆에서 돕는 어시스트니 해도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했다. 손님도 아닌데 저택 주인이자 그룹 임원과 같이 식사한다는 게 얼마나 무겁고 의미심장한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상훈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실실 웃었다.
“전무님이 제 생각보다 되게 소탈한 스타일이시구나. 안 그래도 오늘 낮에는 정 실장님이랑 점심 드시더라고요. 그래서 웬일인가 했는데, 아니면 면담을 이런 식으로 하시는 건가?”
“…그래요? 정 비서님하고 식사하셨다고요?”
“네, 정오에 진하 씨 없을 때… 정 비서님은 그런 다음 바로 외출하셨지만요.”
정영호랑 점심을 함께 들었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특별히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구나. 물론 정영호는 그의 직속 부하인 만큼 일개 계약직인 나와 상황이 다르다. 저택에서만 보좌하는 나와 다르게 그는 경영 권한도 대리 수행하는 요직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김상훈은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따지진 않았다.
“그나저나 퇴근하는 낙이 없어져서 안 됐네요. 출근하는 시간은 짧아져서 좋은 건가?”
“글쎄요. 장… 단점은 있겠죠.”
“하긴. 나 아는 형님도 대학 앞에 고깃집 차렸을 때 바로 위 레지던스에서 살았는데 출퇴근 짧아서 좋은데 직장이랑 너무 가까워서 쉬는 기분이 아니라고 구시렁대더라고요. 아, 근데 진하 씨는 아예 전무님이랑 같은 곳에 지내는 거니 좀 다르려나. 하하하.”
김상훈은 털털한 얼굴만큼이나 시원스럽게 웃었다. 정작 나는 웃지 못했다. 성재현이 식사 중에 나한테 했던 말이 맴돌았다. “친해요?”라고 묻던 음색, 표정, 눈, 손짓. 김상훈과 그리 친한 척한 적도 없었다. 오전에 말 몇 마디 섞고 퇴근할 때 인사나 붙이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마치, 외도를 추궁받는 배우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눈치 없이 재미없는 농담을 했나 봐요. 진하 씨 표정 무섭네. 미안, 미안.”
“…아니요. 뭐, 재밌진 않았지만 미안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정말이지, 은근히 독설가예요.”
머쓱한 표정이 된 김상훈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그럼 쉬어요. 난 내일 올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앞치마를 훌렁 벗은 김상훈은 조리복 그대로 패딩을 걸치고 차 열쇠를 챙겼다. 불빛만 휘영청 밝은 주방 안에 오도카니 서 있던 나는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2권에 이어서.